[이광형의 퍼스펙티브] 미리 준비해야 존엄한 죽음 맞을 수 있다

[출처: 중앙일보] [이광형의 퍼스펙티브] 미리 준비해야 존엄한 죽음 맞을 수 있다

웰다잉
인간의 삶에서 오복(五福)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오복은 중국 춘추시대에 쓰인 『서경』에 처음 언급된 이후 수많은 문헌과 담론에서 인용되고 있다.
 

죽음은 가장 확실한 미래임에도 이에 대한 준비는 턱없이 부족 한국인 90% 집에서 운명 원하나 90% 이상이 병원서 맞는 게 현실
최근 하늘나라 가신 90대 어머니 10년 전부터 대비해 평안한 임종올. 2월부터 연명의료결정법 시행 연명치료 거부로 존엄사 가능해져

오복의 첫째는 수(壽)이다. 이것은 오래 살고자 하는 염원을 표현하고 있다. 둘째는 부(富)인데, 부유하고 풍족하게 살기를 바라는 소망을 나타낸다. 셋째는 강녕(康寧)으로서, 사는 동안 건강하게 살고자 하는 욕망을 나타낸다. 넷째 유호덕(攸好德)은 이웃이나 다른 사람을 돕고 베풀어서 덕을 쌓는 삶을 말한다. 다섯째 고종명(考終命)은 죽음을 편안하고 깨끗이 하자는 소망을 나타낸다.
 
2000년 이상이 흘렀지만, 오늘날 보아도 유효한 이상적 삶의 모습이다. 둘째 부(富)와 관련, 지금도 부유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노력하고 부자를 부러워한다. 오히려 지나쳐서 ‘금전 만능주의’를 우려할 정도다. 넷째 ‘유호덕’은 현대 사회에서는 네트워크로 해석된다. 사람들을 돕고 좋은 신뢰를 쌓아야 네트워크의 일원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이 촘촘하게 얽혀서 일하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더 중시하게 됐다. 심지어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사회를 ‘초연결’ 사회라고 특징짓기도 한다.
 
오복 중 경시되는 ‘고종명’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오복 중 첫째와 셋째, 다섯째 염원들은 다르게 표현돼 있지만 실제로는 비슷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세 가지를 요약하면 ‘건강하게 오래 살고 깨끗하게 죽고 싶다’는 희망이다. 현대적인 말로 표현하면 ‘건강 장수 웰다잉(Well-dying)’이다.
 
인간 사고와 행동을 결정하는 뇌 구조를 보면 뇌 중심부에 변연계라 불리는 곳이 있다. 이곳은 생명을 유지하고 보호하는 일을 관장한다. 예를 들어 내 몸을 보호하기 위한 본능적인 감정과 행위를 관장한다. 사람이 화를 내든 지 두려움을 느끼고 도망을 가는 행동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본능의 발현이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자 하는 욕망은 본능의 발현이라 할 수 있다.
 
요즘 TV를 켜면 건강 관련 프로그램이 자주 나온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건강에 관심이 많다는 뜻이다. 전 세계 수많은 과학자가 지금도 건강을 지키기 위해 연구한다. 인체의 작동 원리를 깨우치고 병원균을 연구해 새 치료법과 신약을 개발한다.
 
이런 노력 덕분에 인간 수명은 괄목할 정도로 증가했다.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지난 50년 사이 3년에 거의 1년씩 증가할 정도로 늘어나 지금은 82세가 됐다. 최근에는 유전병과 노화에 관련된 유전자들이 밝혀지고 있다. 유전자가위 기술은 유전병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잘라 내 정상적인 것으로 갈아 끼우는 기술로까지 발전했다. 머지않아 노화 유전자를 조절해 노화를 지연시키는 시대가 열릴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 오복 중 소홀하게 대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고종명’이다. 이것은 편안하고 깨끗하게 죽고자 하는 여망이다.
최근 웰다잉이라 하여 새롭게 조명하려는 노력이 있긴 하지만 다른 복에 비해 기울이는 노력이 미미한 것 같다.
 
원치 않는 방식으로 죽음 맞는 한국인   
영국 싱크탱크 이코노미스트연구소(EIU)가 2015년 80개국을 대상으로 ‘죽음의 질 지수’(Quality of Death Index)를 조사했다. 영국이 1위, 대만 6위, 일본 14위, 한국은 18위로 나왔다. 한국에서는 90% 이상이 병원에서 팔에 링거를 꽂고 산소마스크를 쓴 채 싸늘한 침대 위에서 죽고 있다. 반면 설문조사에 따르면 한국 고령자의 90% 이상은 연명치료 없이 집안에서 편안하게 생을 마감하기를 희망한다.
 
왜 대부분의 사람이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할까? 필자는 준비 부족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 평소 준비하지 않으면 허둥지둥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미리 차근차근 준비하면 당황하지 않고 준비한 방향으로 매끄럽게 진행해 나갈 수 있다.
 
죽음은 가장 확실한 우리의 미래다. 죽음에 대한 대화를 기피하는 이유는 막연한 두려움이 아닐까 생각한다. 예를 들어 전쟁은 무섭다. 그렇다고 전쟁에 대한 대화를 기피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실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속수무책이 된다. 두려운 것일수록 더욱 준비해야 한다.
 
인간의 죽음이란 생명 활동이 정지돼 원래 상태로 돌아오지 못하는 생물학적 종말을 말한다. 죽음은 한번 가면 되돌아오지 못하는 상태로 간다. 미지의 세상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만약 인간이 죽음을 경험하고 되돌아와 그 세상을 설명해 줄 수 있거나, 각자 체험을 하고 돌아올 수 있다면 불안감이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죽음이란 경험하기 전에는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 다른 방향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바로 미래학적 접근이다. 우리가 미래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발생 가능한 미래들을 예측해 보고, 그 미래들이 현실로 닥쳐왔을 때를 대비해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함이다. 그러면서 미래를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죽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에게 가장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죽음이다.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원하는 죽음이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존엄하게 죽는 연명의료 거부   
호주 최고령 과학자 데이비드 구달이 지난 5월 104세로 스위스 바젤에서 안락사했다. 그가 좋아하는 베토벤의 9번 교향곡 마지막 악장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불치병에 걸리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죽음을 택한 일은 선진국에서도 이례적이다. 그는 죽음을 앞둔 기자회견에서 너무 오래 산 것이 후회되고, 앞으로의 삶이 행복할 것 같지 않아서 안락사를 택한다고 말했다. 안락사가 허용되는 나라를 찾아 호주에서 스위스까지 날아가 죽음을 맞았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은 생명의 존엄성과 인간성에 대한 훼손이라 말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고통 없이 죽는다는 것이야말로 인간 존엄성을 높이는 일이라 말할 것이다.
 
안락사를 허용하는 나라는 현재 스위스·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콜롬비아·캐나다 등이다. 미국은 주별로 허용하는 곳이 있다. 안락사란 자의적 적극적 죽음을 말한다. 자신의 의사에 따라 독극물을 주입함으로써 고통 없이 품위 있게 죽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연명의료를 하지 않고 자연사를 하는 존엄사와는 구별된다.
 
한국에서는 지난 2월부터 존엄사를 가능하게 하는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됐다. 이 법이 시행되기 전에는 한번 링거를 꽂든지 산소마스크를 착용하면 제거할 수 없었다. 그래서 비참한 식물인간 상태로 몇 달 또는 몇 년을 지내다 죽어야 했다. 이제 연명의료를 거부하려면 사전에 본인이 의향서를 병원에 등록하든지, 가족 2인 이상의 진술 또는 의사 2인의 진단 등을 제출하면 된다.
 
연명의료 중단은 인위적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행위를 중단하는 것을 뜻하므로 안락사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한국에서는 법 시행 4개월 만에 접수된 연명의료중단이행서가 7800건을 넘었다고 한다. 이 법이 그동안 고통에 시달리던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기다리던 법이었는지 알려주는 통계다.
 
연명의료 중단 택한 어머니   
필자는 10년 전 80대 초반의 어머니와 대화를 나눴다. TV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누워있는 환자의 모습이 나왔다. “어머니, 저렇게 마스크 쓰고, 주사기 꽂고 죽으면 힘들 것 같아요.” “그러게 말이다.” “저렇게 돌아가시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지요?.” “그렇고말고….”
 
어려운 말을 TV의 도움으로 꺼냈다. 다행히 어머니는 덤덤하게 동의하셨다. 이를 연명치료거부의향서라는 서류로 작성해 본인과 자식들이 서명했다.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되기 훨씬 전이다.
 
올해 초부터 어머니 건강이 악화하기 시작했다. 특별히 아픈 곳은 없는데 기력이 없고 식사량이 줄었다. 자식들이 모여 전에 작성한 연명의료 거부 의사를 재확인했다. 그리고 장례에 대해 논의했다. 전통과 관례에 대한 의견도 있었다. “그동안 부조금으로 뿌린 돈이 얼만데…” 말이 나왔지만, 어머니를 아는 사람에게만 연락하기로 했다. 어머니는 사회생활을 하지 않으셔서 친척 외에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친척 중 직접 알지 않는 사람에게는 연락하지 않기로 했다.      


지난 7월이 돼 어머니 상태가 나빠졌다. 병원에 입원했다. 식사를 못 하니 병원에서는 링거를 꽂고 영양 공급을 하려 했다. 10년 전에 써 놓은 연명의료거부의향서를 보여줬다. 담당 의사는 알겠다고 했다. 인위적 처치를 하지 않게 됐다. 입원한 지 20일 만에 숨을 거두셨다. 당신이 평소 소망하던 것처럼 잠을 자다가 가셨다. 그래서 정확한 사망 시간도 모른다.
 
장례식은 준비해둔 절차에 따라 진행했다. 가족들은 약속한 대로 행동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알고 따르던 친척 몇 사람만 조문객으로 초대됐다. 가족끼리 지키는 빈소는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가끔 웃음소리도 나왔다. 가족들은 ‘호상’이라 자평했다. 매우 불효다운 일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92세의 수를 누리고 당신이 소망하던 방식으로 떠난 분께 축하하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기 어려웠다.
 
생각해 보면 이러한 ‘고종명’ 복이 저절로 온 것이 아니다. 미리 준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미리 준비하면 원하는 죽음을 만들 수 있다는 걸 절감했다.
 
이광형 KAIST 바이오뇌공학과·문술미래전략대학원 교수·리셋 코리아 4차산업혁명분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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