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절(사찰) 구경하기-바로가기 묶음 - (최종 수정 2021.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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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1. 절(寺刹 사찰)구경하기1-일주문,금강문,사천왕문- (최종 수정 2021.10.28)

A.2. 절(寺刹 사찰)구경하기 2 - 탑, 부도, 석등

A.3. 절(사찰)구경하기03-불전(佛殿) 불상(부처,보살) 

A.4. 절(寺刹 사찰)구경하기 4-불상(부처)의 모습,형태

A.5. 절(寺刹 사찰)구경하기 5-당우, 단청, 拱包(공포), 法具四物, 불교 상징물 

 

A.6. 절(사찰) 구경의 기본 상식 (펌) )

 

'새날이'의 서울(한양) 탐구' -시리즈- 모음

우리가 사는 동네와 주변의 지명이나 지하철명에 담긴 옛 사건이나 유적의 의미를 알아두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서울(한양) 탐구'-시리즈- 게시물 속에서도 말했지만 산(山) 하천(河川), 성(城)의 이름뿐만아니라

나루터, 포구, 한강변 亭子(정자), 절(사찰), 가톨 성지 또는 순례지 외에도 유적지나 유물, 유명 인물들이

지명이나 지하철역명, 도로명(거리명)에 많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 '서울(한양) 탐구' - 게시물의 제목을 클릭하면 해당 게시물을 볼 수 있음.

[1] 서울(한양) 탐구01-서울의 명칭 유래와 간단 역사

[2] 서울(한양) 탐구02-조선의 궁궐(5대궁)

[3] 서울(한양) 탐구03-궁궐2-궁궐의 구조 외 운현궁, 칠궁, 종묘, 사직단, 동묘 

[4] 서울(한양) 탐구04-왕과 왕족의 호칭, 내시, 궁녀, 묘호(廟號), 왕릉, 왕비릉

[5] 서울(한양) 탐구05-조선시대 한양(서울)지도, 한양도성(성곽)과 4대문, 4소문

[6] 서울(한양) 탐구06-서울의 산(山),하천(河川),성(城)

[7] 서울(한양) 탐구07-청계천에 놓인 22개의 다리와 사연(scrap)

[8] 서울(한양) 탐구08-(서울)한강의 나루, 살꽂이다리 箭串橋(전곶교)

[9] 서울(한양) 탐구09-(서울)한강변의 亭子(정자)

[10] 서울(한양) 탐구10-(서울의) 사찰(절)

[11] 서울(한양) 탐구11-(서울의) 가톨릭 성지순례지

 

- 이 게시글로 서울(한양) 탐구 시리즈를 마칩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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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한양) 탐구11-(서울의) 가톨릭 성지순례지

 

<배경음악>: 내주를 가까이하게함은 -찬송가-
        추후 링크가 끊어지면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 나올 수도 있으며,  아래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보이면             
                  https://www.youtube.com/embed/9FNMj1rPU2c  <=요걸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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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퀴즈]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퀴즈 1] (서울)도성 안에서 (순교한 신자들의) 시신을 운반해 나가던 문 이름은?

[퀴즈 2] 북달재(종현 鍾峴)’에 설립된 조선 최초의 본당이자 서양식 대성당인 이곳은?

[퀴즈 3] 조선시대의 중앙관서인 육조의 하나로. ‘추관 또는 추조라고도 했으며, 사헌부 

           한성부와 아울러 삼법사(三法司)라 일컬어지기도 한 관청은 무엇인가?

[퀴즈 4] 한강의 버들꽃나루(양화진)에 옆 이곳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처형(머리가 잘림)

            되어 붙여진 이름으로 가톨릭 성지이다 이곳의 이름은? oo산 성지

[퀴즈 5] 조선 교회 최초의 신부 주문모가 처형된 장소로 용산의 저습지였던 이곳은?

 

참조 영상 링크: 한국 가톨릭 디지털 역사관 - YouTube

 

다음 내용은 (서울의) 가톨릭 성지순례지로 서울대교구 성지순례길(www.catholic.or.kr)의 내용을 편집 요약한 것으로 서술 순서는 원문 순서를 따랐다.

 

참고로 (서울) 성지순례 순례지 가운데 김범우의 집터, 한국 천주교 순교자 124위 시복 터,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터, 한국 천주교회 창립 터(이벽의 집터)  4곳에 성지순례 스탬프가 마련되어 있다, 경기감영 터, 우포도청 터, 의금부터, 전옥서 터, 좌포도청 터, 형조 터 등 5곳은 종로 성지성당에서 스탬프를 찍을 수 있다.

원문을 보려면 참조 링크: 서울대교구 성지순례길(www.catholic.or.kr)를 클릭!

 

서울대교구 역사관 참조 링크: 천주교서울대교구역사관

명당 성당 구내에 있는 이 건물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 서양식 벽돌 건축물 중 하나이다. 1890년 한국가톨릭교회의 '주교관'으로 신축되었다.

 

서울대교구 성지순례길 원문 링크:서울대교구 성지순례길(www.catholic.or.kr)

- 원문 내용을 편집 요약한 것으로 서술 순서는 원문 순서를 따랐다. -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성당

서울대교구 성지순례길 중 종로구 혜화동 90-1에 있는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모셔진 장소이며 한국 교회 사제 성소의 요람이다. 성직자(성소자) 양성 공간이므로 개방이 안되고 있다.

 

광희문(光熙門), 속칭 水口門 또는 시구문(屍口門   참조자료: 광희문   참조자료: 광희문

광희문

현재 중구 광희동 2 105에 있는 광희문은 조선 시대 서울의 사소문(四小門)의 하나로,

도성 안에서 죽은 자들(순교한 신자들)의 시신을 운반해 나가던 문이다.

 

조선 시대에는 사람이 죽으면 서울 성곽 안에는 묘를 쓸 수 없었다. 그래서 시신을 서울 외곽 밖으로 가지고 나가 묘를 써야 했는데, 이때 서소문과 광희문을 통해 시신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런 이유로 광희문은 시신을 내어가는 문이라는 뜻의 시구문이라고 불렸다. 한편 명지대 홍순민 교수는  수구문에 대해서 부근으로 청계천 물길이 나가기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었다고 하는 말이 있으나 이는 억측이다. 청계천 물길은 흥인문이 더 가깝다. 수구문이란 한강으로 출입하는 문이란 뜻이다. 더구나 이 문을 그 부근에 늘 시신이 쌓여  있었다 하여 시구문(屍口門)이라 했다는 것은 일본인들의 악의적 왜곡이다. 참조 링크:  문(門) 이름에 숨은 뜻

 

천주교 박해시대에 수많은 사람들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포도청 등에서 신문을 받다가 순교하였다. 당시 옥중에서 치명한 순교자들의 시신은 광희문을 통해서 밖으로 내버려졌다.

 

좌포도청 터

좌포도청 터는 현재 종로구 묘동 56번지 단성사 일대(종로3가역 3호선 9번 출구)로 추정되고 있다. 포도청 순교지는 103위 성인 중 최경환 프란치스코, 유대철 베드로, 허임 바오로 등 스물한 분, 현재 시복 추진 중인 하느님의 종’ 124위 중 윤유일 바오로 등 5위가 장살, 옥사, 교수 등으로 순교한 곳이다.

 

포도청은 원래 도적을 잡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 운영되었다. 그러나 점차 그 담당 업무가 확대되어 한성부민들의 생활 전반에 걸쳐 금지 조항을 위반하는 사건들을 다루었고, 개항기에는 궁문수비, 외국공사관의 경비, 반역 죄인에 대한 심문까지도 담당하였다.

 

또한 지방의 중죄인을 압송, 체포하여 조사하고, 그 죄의 경중에 따라 의금부와 형조 등 상급기관으로 이송하는 중간기구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이벽의 집 터 수표교 인근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정조 8(1784) 겨울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되었다.

 

김범우의 집 터, 명례방과 장악원 터

김범우의 집이 있던 명례방은 남산 아래의 여러 마을들과 지금의 을지로 입구에서 명동 성당 부근까지를 포함하고 있던 곳이다. 명례방이 한국 천주교회사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게 되는 시기는 1784년 말 또는 1785년 초 수표교 인근 이벽의 집에서 열던 신앙 모임을 명례방 장악원 앞에 위치한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서 하게 된 때이다.

 

현재 명례방을 알리는 표지석은 없고 중구 을지로 2 181 외환은행 앞 장악원 터 표석 자리 앞쪽을 김범우의 집터로 보고 있다.

 

명동대성당

명동대성당

명동대성당은 옛날 조선 한성부 남부조선 최초의 서양식 대성당으로 명례동(明禮洞)’에 속하던 지역(오늘날 중구 명동 2)에 세워진 성당으로 1898 5 29일에 완공하였다. 지금은 주위 고층빌딩 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북달재(종현 鍾峴)’라고 불리던 남산 앞 언덕 위에 세워진 명동대성당은 도성 내 어느 곳에서나 올려다 보이던, 뾰족탑이 인상적인 서양식 교회 건물로 세인의 이목을 끌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이 개항정책을 취하게 되면서 교회에 대한 정부의 박해정책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자, 교회 당국은 1882 4월에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본당으로 종현 본당, 지금의 명동 본당을 설정했다.

 

명동대성당은 한국 교회 최초의 본당이며 성인 다섯 분과 순교자 네 분의 유해가 모셔진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이다.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 김성우 안토니오, 순교자 이 에메렌시아, 무명 순교자 1,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가 모셔져 있어, 기도와 참배를 위해 찾는 순례자들이 많은 성역이다. 이 가운데 이 에메렌시아,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는 시복 대상자로 선정되었다

 

가회동 성당

이 곳은 과거 의금부 터로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선교사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 땅에 들어와 1795년 예수부활대축일에 신자들과 함께 조선에서의 첫 미사를 계동 최인길의 집에서 봉헌하였다.

 

한국 천주교 초기 신앙의 중심지였던 이 지역을 관할하기 위해 1949년에 가회동성당이 설립되었고, 2014년 지금의 한옥과 양옥이 어우러진 새 성전이 건립되었다.

 

의금부 터

의금부 터(종로구 공평동 종각역 1번 출구)는 주교와 신부, 평신도 지도자들이 국문을 받던 곳이다. 의금부는 조선시대 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추국하는 일을 맡아 보던 관청이었으며 금부·금오·왕부라 부르기도 하였다.

 

박해시기, 천주교 신자들은 서울의 좌우포도청과 지방의 각 진영) 및 군현에서 문초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 중죄인, 즉 주교와 신부, 평신도 지도자들은 국왕의 특별한 명령에 의해 의금부로 압송되어 국문(鞫問)을 받았다.

 

전옥서 터

전옥서 터(종로구 종로1가 종각역 6번 출구) 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수감되어 있던 곳이다전옥서는 감옥과 죄인에 관한 사무를 관장했던 관서로 전옥서에 수감되는 죄수의 대부분은 상민이었다, 하지만 의금부가 육조, 왕실의 계보를 편찬하고 왕족의 허물을 살피던 관아였던 만큼 종부시, 사헌부 등의 죄인이나 왕족이나 양반, 관리들도 수감되었다.

 

우포도청 터

우포도청은 서린방 혜정교 남쪽(현 동아일보 신사옥 앞 화단))에 있었으며, 우포도청이 담당한 구역은 서울의 서부  북부와 경기 우도 즉 가평, 개성, 고양, 연천, 적성, 파주, 포천 등지였다.

 

우포도청은 한국 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장소이다. 1879 5 14일에 충청도 공주 지방에서 드게트 신부가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이날 드게트 신부뿐만 아니라 함께 거주하던 신자들까지 잡아서 공주 감영에 수감하였다가 5 29일 서울 포도청으로 이송하였다. 이때는 공식적인 박해가 종료되었던 시기라 가혹한 고문이 자행되지는 않았지만, 드게트 신부와 함께 투옥된 신자들은 굶주림으로 큰 고통을 받았다. 결국 그 가운데 이병교 레오, 김덕빈 바오로, 이용헌 이시도로 등은 우포도청에서 아사로 순교하였으며 이들이 바로 한국 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들이다.

 

형조(刑曹) 

형조(刑曹)는 한성부 서부 적선방(종로구 세종로 세종문화회관)에 있었는데 조선시대의 중앙관서인 육조(六曹)의 하나로 추관 또는 추조라고도 했으며, 사헌부  한성부와 아울러 삼법사(三法司)라 일컬어지기도 했다.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많은 천주교인들이 형조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다. 그 시작은 정조가 즉위한 지 9년째 되던 1785년에 발생한 을사추조 적발사건으로, 신자들이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서 집회를 갖던 중, 형조의 금리들에게 발각되어 형조로 압송된 사건이었다.

 

이후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최필공 토마스  최필제 베드로  윤운혜 루치아  정철상 가롤로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고, 김천애 안드레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윤지헌 프란치스코 등은 전주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신문을 받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남명혁 다미아노  김효임 골롬바  김효주 아네스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전장운 요한  최형 베드로 성인 등도 형조를 거쳐 갔다.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 성지

서소문 밖 네거리(중구 의주로 2 16번지 서소문 공원 내)는 신유·기해·병인박해 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신자들이 참수형을 받아 순교한 장소이다.

 

서소문은 조선시대 수도 한성의 출입 성문이던 네 개의 도성 대문과 네 개의 소문 가운데 하나인데, 서소문의 정식 이름은 소의문(昭義門)이다. 당시 서소문 밖의 네거리 광장은 조선시대 공식 사형 집행지였는데, 그 광장은 문안에서 아현고개와 남대문 밖 칠패시장으로 통하던 성문 밖에 생겨난 주막거리 광장이었다. 이 광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주막과 주위의 시장은 파루 인정제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즉 아침에 성문이 열리면 도성 출입이 가능하나, 저녁에는 성문을 닫아 통행을 금지하니, 통행인들이 문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성문 밖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했기에 이들을 상대로, 성문 밖에 취락이 생겨났고, 광장도 생겨났던 것이다.

 

따라서 관에서는 중죄인을 사형에 처할 때마다, 군중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다수의 군중을 동원하기 쉽고 또한 사형죄인들이 갇혀 있던 포도청이나 의금부와 가까운 서소문 밖 네거리 광장을 사형 집행 장소로 이용했다.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에서 순교자가 처음 생긴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로, 한국 교회의 첫 세례자인 이승훈 베드로와 명도회 초대 회장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그리고 여회장 강완숙 골룸바와 백서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 알렉시오 등이 참수로 순교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정하상 바오로,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등이 이곳에서 순교하였고,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성 남종삼 요한 등이 순교하였다. 이처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는 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하였으며, 그중 마흔 네 명이 성인의 반열에 오르면서 한국 교회사상 가장 많은 성인이 탄생한 곳이라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중림동 약현 성당

중림동 약현 성당(중구 중림동 149-2) 1892년에 건축된 서울 시내 두 번째 본당이다.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 성지를 관할하는 중림동약현 성당은의 규모는 명동 성당보다 작고, 도성문 밖에 위치하고 있으나, 한국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한국 최초의 고딕식 교회 건물이다.

 

서양식 교회 건물로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겸비한 성당 건물로 1977 11 22일자로 국가 사적 제252에 지정되었다. 한편 1998년에 화재로 내부가 불탔으나 2000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성당 내부 스테인드글라스가 볼 만하다.

 

성당 내에 있는 서소문 순교자 전시관 전시실에는 초기 한국 교회천주교회의 4대 박해 당시 순교한 신자들이 사용하던 교리서, 신심서적 등이 있으며, 특히 서소문 순교자인 강완숙의 가계도, 프랑스 선교사들의 문서류도 전시하고 있다.

 

경기감영 터

경기감영도- 경기감영 위치는 현 종로구 평동 164 서울적십자병원 정문 옆이다

경기감영이 설치된 것은 태종 때의 일이었다. 한양으로 천도한 다음 해인 1395(태조 4)에 경기 행정편제가 개편되었다. 이때 광주와 수원의 관할인 군현을 갈라서 경기 좌도라 하고, 양주부평철원연안의 관할인 군현을 경기 우도로 하였다. 그 후 1413년에 경기 영역을 다시 한 번 조정하여 좌우도로 나누지 않고 경기로 확정하면서 도관찰사를 파견하였고, 감영을 수원에 설치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감영은 경기도 광주로 옮겨졌다가 다시 한성부 내 서대문 밖 반송방(종로구 평동 164 서울적십자병원 정문 옆)으로 이전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최창주 마르첼리노, 이중배 마르티노, 원경도 요한, 권상문 세바스티아노, 홍인 레오 등 체포된 신자들은 경기감영으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과 문초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순교한 이가 있었는데, 바로 순교자 조용삼이다. 조용삼은 11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었고,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았다. 1801 2월에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형벌을 받았으나 약해진 몸은 더 이상의 형벌을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에는 다시 옥에 갇힌 지 며칠 만인 3 27일에 숨을 거두었다.”

 

절두산(切頭山) 순교성지

한강의 버들꽃나루라고 불렸던 양화진(마포구 합정동)에 자리 잡은 절두산 순교성지는 1866년 프랑스 함대의 침입을 계기로 많은 신자들이참수(머리가 잘림)되어 처형됐던 장소이다.

 

가장 혹독한 박해로 일컬어지는 1866부터 1873까지인 병인박해 기간 동안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기록으로 확인되는 순교자는 김한여 베드로, 최경원 야고보, 이의송 프란치스코, 김이쁜 마리아, 이붕익 베드로, 조 타대오 등 17명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순교자 5명을 포함하여 22명뿐이다.

 

현재 병인순교 100주년 기념 성당과 박물관이 서 있는 절두산 순교성지는 그 봉우리 형상이 누에머리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잠두봉이라 불렸으나,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에서 처형된 후에 천주교인들이 목 잘려 죽은 곳이라는 의미의 '절두산(切頭山)'으로 불리게 되었다.

 

노고산 성지

노고산 성지는 마포구 백범로 35(신수동) 서강대학교 가브리엘관 앞이다. 기해박해 때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한 후 이곳에 4년간 묻혀 있던 장소이다.

 

노고산은 박해시대 여러 처형장과 가까운 이유로 많은 순교자의 시신이 매장되었던 곳이다. 현재 노고산 아래 순교자들이 묻혔던 땅 위에는 예수회의 서강대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용산 신학교 성당

용산 신학교 성당(용산구 원효로4가 성심여자고등학교 내) 코스트 신부가 설계한 신학교 성당으로 1902 4 14일에 성당 봉헌식을 가졌다.

 

당시 조선 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신학교 부속 성당 건립을 위해 국내외에서 후원자를 구하던 중 프랑스인 드 사라(de Sarah) 여사로부터 기부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런데 그녀는 성당 건립 기금 후원에 앞서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순교지에 성당을 건립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뮈텔 주교는 김 신부의 순교지인 새남터는 홍수로 자주 잠기는 위치에 있어 위험하고, 오히려 조선대목구에서 유일한 신학교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순교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는 점, 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뒤를 계승하고자 하는 조선의 신학생들이 공부하는 곳에 신학교 성당을 건립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점을 오랜 기간 설득하여 마침내 그녀의 동의를 얻어냈다.

 

뮈텔 주교는 후원자의 뜻을 기리기 위해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미리내에서 이장하여 모시기로 하고, 1901 5 21일에 시복 재판 판사인 프와넬 신부와 기록 서기인 드망즈 신부, 안성 본당의 공베르 신부와 미리내 본당의 강도영 신부, 그리고 신자 30여 명이 참관한 가운데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발굴하였다. 발굴된 유해는 강도영 신부 사제관에 안치하였다가 5 23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 안치하였으며, 성당이 완공된 이후인 1902 6 23일에 성당의 제대(祭臺)에 오른편 모퉁이 바닥을 파고 그 안에 유해를 안치하였다.

 

김대건 신부 등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셨던 성당 출입구 상부에는 나무로 만든 명문을 부착하였는데 거기에는 성당 착공일인 1869 6 9일과 성당 봉헌일인 1902 4 14, 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세례명 안드레아(Andrea)의 이니셜인 ‘A’, 성 김(Kim)의 이니셜인 ‘K’와 생몰연대(1821~1846)가 로마자로 새겨져 있다.

 

당고개 순교성지

당고개 순교성지(용산구 신계동 1-57)는 기해박해 때 10명의 신자들이 참수로 순교한 장소이다. 당고개 순교성지는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많은 순교성인을 배출한 순교성지이다.

 

옛날 이곳에 민간인들이 제사 지내는 당집이 있었기에 당고개라 불렸으며 기해박해가 끝나갈 무렵에 열 명의 교우들이 순교한 곳이다. 1839년 음력 섣달그믐 경, 1년간에 걸친 기해박해의 마지막 단계에 아직 남아 있던 천주교인 다수를 서소문 밖 네거리 광장에서 처형하기로 결정했으나, 이런 사실을 사전에 알게 된 서소문 근처의 상인들이 설 대목장을 봐야 하는데, 사람들의 목을 베는 잔인한 처형이 이루어져서는 곤란하다며 설 대목장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처형장소를 서소문 밖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서소문에서 남동쪽으로 내려가 한강변에 위치한 용산의 당고개에서 처형하도록 하였다. 가족을 한 날에 처형하지 않는다는 국법에 따라 열 분 가운데 일곱 명은 12 27일에, 세 명은 28일에 처형되었다. 현재 그 가운데 아홉 분은 성인이 되셨고, 이성례 마리아는 하느님의 종에 올라 있다.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는 어린 다섯 형제를 두고 남편 성인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같이 수리산 교우촌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연행되어 옥고를 치르면서 젖먹이 막내아들이 자신 옆에서 배고파 죽는 것을 보아야 하는 처절하고도 기막힌 시련과 옥 밖의 네 명의 어린 자식들에 대한 인간적인 정에 못 이겨 한때나마 주님께 등을 돌렸지만, 다시 회개하고 옥에 돌아와 갖은 악형과 유혹을 이겨내고서 순교하였다.

 

왜고개 성지

왜고개 성지(용산구 용산동 5 2-65번지)는 기해·병오·병인박해 당시 새남터 순교자들이 잠시 매장된 장소이다. 왜고개는 1839년 기해박해 때 군문효수의 형을 받고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 그리고 188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성 남종삼 요한, 성 최형 베드로 그리고 홍봉주 토마스 등이 얼마간 암매장되었던 곳이다왜고개는 모두 열 명의 순교자가 묻혔던 곳으로 그중 여덟 명이 1984 5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왜고개는 한자로 와현(瓦峴) 또는 와서현으로 불리던 곳으로 원래 옛날부터 기와와 벽돌을 구워 공급하던 와서(瓦署)가 있었던 데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으며, 서울 명동 성당과 중림동약현 성당을 지을 때 사용했던 벽돌도 이곳에서 공급해 주었다고 전해진다.

 

새남터 순교성지

새남터 순교성지(서울 용산구 이촌로 80-8)는 기해·병오·병인박해 당시 성직자 11명과 교회지도자 3명이 군문효수형(軍門梟首: 사형수의 머리를 베어 간두(竿頭, 장대)에 매다는 형벌)을 받아 순교한 장소이다. 남대문 밖 용산의 저습지였던 모래벌 새남터는 간혹 풀이 우거져 있기는 하나 사람이 거주하거나 농토를 일굴 수 없는 모래톱 황무지였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그 북부 일부를 군사 훈련장으로 사용해 왔으며, 때로는 군문효수형을 선고받은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새남터와 조선 천주교회와의 악연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조선 교회 최초의 신부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박해 당국에 의해 새남터에서 처형됨으로써 비롯되었다. 그 후 한강가의 쓸쓸하고 황막한 모래땅 새남터는 우리 교회에 큰 박해가 닥칠 때마다 외국인 주교나 신부 등 선교사와 우리 신자 다수가 참수 치명된 대표적 순교성지가 되었고 새남터에서 순교한 순교자들 가운데 11위가 1984 5월에 시성되어 103위 성인 반열에 올랐다.

 

삼성산 성지

삼성산 성지(관악구 신림동 산 57-1)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앵베르 주교를 비롯하여 성 모방 신부와 성 샤스탕 신부의 유해가 1901년 명동 대성당 지하 소성당 묘역으로 모셔질 때까지 묻혀 있던 곳이다.

 

[요약퀴즈]

[퀴즈 1] (서울)도성 안에서 (순교한 신자들의) 시신을 운반해 나가던 문 이름은?

[퀴즈 2] 북달재(종현 鍾峴)’에 설립된 조선 최초의 본당이자 서양식 대성당인 이곳은?

[퀴즈 3] 조선시대의 중앙관서인 육조의 하나로. ‘추관 또는 추조라고도 했으며, 사헌부 

           한성부와 아울러 삼법사(三法司)라 일컬어지기도 한 관청은 무엇인가?

[퀴즈 4] 한강의 버들꽃나루(양화진)에 옆 이곳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처형(머리가 잘림)

            되어 붙여진 이름으로 가톨릭 성지이다 이곳의 이름은? oo산 성지

[퀴즈 5] 조선 교회 최초의 신부 주문모가 처형된 장소로 용산의 저습지였던 이곳은?

 

[요약퀴즈 정답]

[퀴즈 1] 도성 안에서 (순교한 신자들의) 시신을 운반해 나가던 문 이름은? .=> 광희문

[퀴즈 2] 북달재에 설립된 조선 최초 본당이자 서양식 대성당인 이곳은? .=>명동성당

[퀴즈 3] 조선시대의 육조의 하나로 추관’, ‘추조라고 불린 관청은 무엇인가? ,=>형조

[퀴즈 4] 천주교 박해시대 때 많은 신자들의 머리가 잘린 이 곳은? 절두산(切頭山) 성지

[퀴즈 5] 최초의 신부 주문모가 처형된 장소로 용산의 저습지였던 이곳은? ,=> 새남터

 

- 이 게시글로 서울(한양) 탐구 시리즈를 마침 (完)-

서울(한양) 탐구10-(서울의) 사찰()

 

<배경 영상 음악>  삼귀의(三歸依)와 반야심경(般若心經) 등 

삼귀의(三歸依)는 삼보[三寶]인 불[佛]. 법[法]. 승[僧]에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은 불교의 중심이 되는 경전으로《대반야바라밀다경》의 요점을 간략하게 설명한 짧은 경전으로, 당나라 삼장법사인 현장(玄裝)이 번역한 것이다. 260자로 되어 있다.

 

 추후 링크가 끊어지면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 나올 수도 있으며, 

 아래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보이면   https://www.youtube.com/embed/cN0ArYAF7oM/span>  <=요걸 클릭

 

 

* 본문 중 밑줄 친 링크는 본문 내용을 가져오거나 참고한 곳으로 필요시 밑줄 친 link를 클릭.

, 밑줄 친 링크는 현재는 연결되지만 추후 링크 주소 변경되면 연결이 안 될 수도 있음.

 

[요약퀴즈]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퀴즈 1] (서울) 성북동에 있는 사찰로 법정 스님과 인연이 있는 절의 이름은?

[퀴즈 2] 북한산 아래에 있어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은 둘러봤을 사찰이다. 이 절의 이름은

[퀴즈 3] 도성 밖 비구니 사찰로 왕실과 후궁, 상궁 등 궁인에게 사랑받은 절 이름은?

[퀴즈 4] 신촌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뒤에 있는 한국불교 태고종의 절로 서재필은

           자서전에서 이곳을 개화파의 온상이라고 하였다. 이 절의 이름은?

[퀴즈 5] 본래 경기도 광주 수도산(修道山)의 산사(山寺)였지만, 지금은 서울시 강남구

           도심 한가운데 있는 사찰이 되었다. 돈이 많은 부자(富者) 절로 소문난 이 절은?

[퀴즈 6] 경기도 남양주 운길산(雲吉山)에 있는 사찰로 세조의 명으로 중창된 절이다.

           두물머리(양수리)를 바라볼 수 있는 저명한 경관 전망지인 이 절의 이름은?

[퀴즈 7] 국 불교 최대 종단인 조계종 本寺로 근정전 크기의 대웅전이 있는 이곳은?

[퀴즈 8] 조계사 바로 옆에 있는 한국 최초의 우체국으로 갑신정변이 일어난 곳의 이름은?

[퀴즈 9] 서울시 은평구에 있는 사찰로 고려 현종의 목숨을 구한 인연으로 왕실의 지원과

            보호를 받았다. 20093.1운동 당시에 쓰였던 태극기가 발견된 이곳은?

[퀴즈10] 이성계의 비호를 받아 '조선의 왕사(王寺)'라고 불렸던 경기도 양주에 있던 이

            사찰의 이름은?   

    

내용출처:    (불교)/한국 - 나무위키

[나무위키]-링크 홈페이지 현 위치(주소)
관문사(觀門寺) www.gwanmunsa.org/main 서울 서초구 우면동  
금선사(金仙寺) www.geumsunsa.org/ 서울 종로구 비봉길 137
길상사(吉祥寺) http://kilsangsa.info/ 서울 성북구 성북동 323(선잠로568)
도선사(道詵寺) www.doseonsa.org/ 서울 강북구 삼양로173 504(우이동 264)
묘각사(妙覺寺) www.myogaksa.net/ 서울 종로구 숭인동 178-3
보문사(普門寺) http://www.bomunsa.or.kr/ 서울 성북구 보문동3가 168
봉원사(奉元寺) http://bongwonsa.or.kr/ 서울 서대문구 봉원사길 120
봉은사(奉恩寺) www.bongeunsa.org 서울 강남구 봉은사로 531 (삼성동)
수국사(守國寺) www.suguksa.org/ 서울 은평구 구산동
수종사(水鐘寺) x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1060
연화사(蓮花寺) x 서울 동대문구 제기로31 10-3(회기동) 
정각원(正覺院) https://jeonggak.dongguk.edu/ 서울 중구 필동로1길 30
조계사(曹溪寺) www.jogyesa.kr/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55
진관사(津寬寺) www.jinkwansa.org/ 서울 은평구 진관길 73
호압사(虎壓寺) www.hoapsa.org/ 서울 금천구 호암로 278
회암사(檜巖寺) www.hoeamsa.com/ 경기도 양주시 회암사길 281
화계사(華溪寺) www.hwagyesa.org/ 서울 강북구 화계사길 117
흥천사(興天寺) www.heungcheonsa.net/ 서울 성북구 흥천사길 29

조계사, 봉은사, 진관사, 화계사, 금선사, 묘각사에서 등에서 운영하는 템플스테이(템플라이프)에 참여하면 사찰 체험과 함께 그 절의 내력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알림-

이 글 내용은 [나무위키 www.namu.wiki]에서 대부분 가져왔지만, ‘가나다순으로 배열하고 편집 요약하였다.

원문을 보려면 클릭=> (불교)/한국 - 나무위키

 

* 1: 사찰 설명 중 금선사’ ‘도선사’ ‘묘각사’ ‘수국사를 제외한 나머지는 [나무위키]에서 가져 왔다.

* 2: 경기도 지역의 사찰이지만 수종사는 태조 이성계, ‘회암사는 세조와 관련이 깊어 본 자료에 포함

시켰다.

 

 

 - 가나다순  -

관문사(觀門寺)    참조 링크: 관문사(觀門寺)   www.gwanmunsa.org/main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에 위치한 대한불교천태종 사찰로 1970년 천태종 중창조(重創祖)였던 상월원각대조사가 큰 천태사원을 세우라는 유지를 받들어 시작했다. 1996113일 법당 상량식을 거쳐 19971231일에 불사를 마쳤다.

 

금선사(金仙寺)   참조 링크: 금선사(金仙寺)    www.geumsunsa.org/

금선사(金仙寺)는 북한산국립공원 남서쪽 산기슭(서울시 종로구 비봉길 137)에 있는 사찰로

조선 초, 태조 이성계 곁에서 조선의 건국과 한양 천도를 도왔던 무학대사가 창건했다.

 

금선사는 조선 후기 정조 임금과 관련한 설화가 전해져온다. 대구 파계사에서 수행정진 중이던 용파스님은 사찰에 부과되는 각종 부역으로 전국의 사찰이 피폐하게 되자 왕과 담판을 지으려고 서울로 올라왔다. 어느 날 임금을 만나 담판을 하였는데 임금은 왕자의 탄생을 조건으로 걸게 된다. 이후 임금의 후궁인 수빈 박씨의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아들이 태어날 것을 점지하였고 수빈 박씨가 음력 618일 아들을 낳았다. 같은 날 목정굴에서 기도하던 농산스님이 앉은 채로 열반에 들었다. 이에 농산스님이 열반에 들어 수빈 박씨 몸에서 다시 태어난 것이라 여기고 해마다 이날 순조 임금의 탄신제를 올리고 있다.

 

금선사는 일제강점기에 전소되어 중창된 지가 60년밖에 되지 않기에 유형문화재가 많지 않다.(내용출처: 위키백과)

    

길상사(吉祥寺)   참조 링크: 길상사(吉祥寺)    http://kilsangsa.info/

길상사 사진출처: 위키백과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 323(선잠로5 68)에 위치한 불교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 송광사의 말사이다1997년에 세워졌으므로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최고급 요정이었던 대원각(大苑閣)이 불교 사찰로 탈바꿈한 특이한 설립 이력이 있는 곳이다.

 

본래는 '대원각'이라는 이름의 고급 요정이었으나 요정의 주인이었던 고 김영한(법명 길상화)이 법정 스님에게 자신이 소유한 요정 부지를 시주하여 사찰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1995613일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 말사인 '대법사'로 등록하여 사찰이 되었고, 초대 주지 로 현문이 취임하였다. 1997년에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재등록되었다.

 

길상사(吉祥寺)의 절 이름은 길하고 상서로운 절이란 의미로, 묘길상(妙吉祥) 곧 문수보살의 별칭에서 인용된 불교용어이며, 승보사찰(僧寶寺刹) 송광사(松廣寺)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내용출처: 위키백과)

 

도선사(道詵寺)       참조 링크: 도선사(道詵寺)   홈피:  www.doseonsa.org/

서울시 강북구 삼양로173504(우이동 264) 북한산 만경대 하단부에 위치한 대한불교 조계종 계열의 사찰이다. 신라 경문왕(景文王) 2(862)에 도선(道詵)이 세웠다. 도선은 이곳의 산세가 1,000년 뒤의 말법시대(末法時代)에 불법을 다시 일으킬 곳이라고 예견하고 절을 창건한 뒤, 큰 암석을 손으로 갈라서 마애관음보살상을 조각하였다고 한다.

 

그 뒤 조선 후기까지의 중건·중수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북한산성을 쌓을 때는 승병들이 이 절에서 방번(防番: 보초 임무)을 서기도 하였다. (내용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묘각사(妙覺寺)     참조 링크: 묘각사(妙覺寺)   홈피:  www.myogaksa.net/

서울시 종로구 숭인동 178-3 낙산 동쪽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불입종의 총본산이다. 법화경을 중심으로 수행과 대중 불교운동을 지향한 법화신앙(法華信仰)의 중심사찰로현 위치에 절을 세우면 서울이 평안하고 시민생활에 안정을 가져온다는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터를 잡았다고 한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석굴암(石窟庵), 요사채가 있다.(내용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웅전은 1975년에 착공하여 19816월에 완공한 건물로서, 내부 천장이 매우 높고 지붕은 청기와를 사용하였다. 법당의 본존불은 청동불로서 합장을 한 특이한 모습이며, 좌우에는 4대 보살상, 뒤편에는 목각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 석굴암의 불상은 모두 북향을 하였는데, 일반적인 불상 배치법과는 달리 북쪽을 향한 것은 이북동포의 안녕과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뜻에서 취한 것이라고 한다.

 

보문사(普門寺)     참조 링크: 보문사(普門寺)    홈피:  http://www.bomunsa.or.kr/

대한불교 보문종의 총본산인 보문사는 고려 예종 10(1115) 담진(曇眞) 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창건 당시부터 비구니 즉 여승들을 위한 사찰이었다. 조선 시대에도 '탑골승방'이라고 불리며 비구니들이 거처하던 도성 밖 4대 비구니사찰 가운데 하나였다.

 

대한불교 보문종의 실제 개조(開祖)이자 중흥조는 일제강점기에 보문사를 중창한 비구니 긍 탄(亘坦: 1885-1980)과 그 제자 보암당 은영(恩榮: 1910-1981)이다.

 

2017년에 보문사 극락보전을 중수할 때에 발견된 상량문에 따르면 청 건륭 12(조선 영조 23, 1747) 처음 중건하고 도광 4(순조 24, 1824)과 동치 4(고종 2, 1865)에 더 중수했다. 동치 4년 상량문에는 조선 왕실의 시주를 받아 불사를 진행하고 후궁과 상궁 등 궁인에서부터 사대부, 평민에 이르기까지 불사에 동참하였다는 내용도 있다.

 

보문사에는 왕실에서 하사한 연()수식과 인로왕번(引路王幡)을 비롯하여 조선 후기에 제작한 석가불도, 신중도, 지장보살도는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조선 전기에 제작된 묘법연화경은 국가지정문화재이다.

 

보암당 은영은 1971년에 오갈 데 없는 여신도들을 위하여 시자원(施慈院)이라는 양로원을 만들었는데, 여기서 순정효황후와 황후를 모셨던 마지막 궁녀들이 여생을 보냈다. 말 그대로 조선 왕실의 여인들과 마지막까지 함께한 사찰이다.

 

봉원사(奉元寺)     참조 링크: 봉원사(奉元寺)    홈피: http://bongwonsa.or.kr/

서울 서대문구 봉원사길(세브란스병원 뒤)에 위치한 한국불교태고종의 절이다. 889(진성여왕 3)에 도선국사가 금화산 서쪽에 있는 신도의 집을 희사 받아 창건한 뒤 반야사(般若寺)라 했다고 한다. 그 뒤 고려 말 공민왕 때 태고(太古) 보우가 중건·보수하고 금화사라고 개칭했다. 1651년 봄에 큰 화재로 많은 피해가 있었고, 1655년 다시 중건하였다. 그 후 6.25때 많은 피해가 있었지만 복원을 해서 지금의 봉원사가 되었다.

 

구한말에는 개화파인 이동인이 이곳 봉원사에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많은 개화파 인사들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근대문명과 관련된 책을 읽고, 자주 모여 토론을 벌이고 갑신정변을 모의하기도 했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 때문에, 서재필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곳 봉원사를 개화파의 온상이라고 하였다.

 

봉은사(奉恩寺)     참조 링크: 봉은사(奉恩寺)   홈피: www.bongeunsa.org

(일제시대의) 봉은사 사진출처:국립중앙박물관

봉은사는 서울시 강남구 봉은사로 531 (삼성동)에 위치한 도심 속의 고찰(古刹)로 대한불교 조계종 직영사찰이다. 본래 경기도 광주 수도산(修道山)의 산사(山寺)였지만 지금은 서울시 로 편입되어 강남구 도심 한가운데 있는 사찰이 되었다. 돈이 많은 부자(富者) 절로 소문나있다.

 

서기 794년 신라 원성왕 시절에 처음으로 창건된 것으로 전해진다. 원래의 이름은 '견성사(見性寺)'였고, 위치도 선릉 근처라 지금과 달랐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서 성종의 능인 선릉을 지키는 '능침사찰'이 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 많은 땅을 하사받았다. 이 때문에 절 이름을 '은혜를 받든다.'라는 뜻의 봉은(奉恩)으로 바꾸었다.

 

이후 불교를 사랑했던 문정왕후 때에 승과시(僧科試) 시험장이 되었다. 이 때문에 숭유억불을 국시로 삼았던 조선 유생들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았다. 그나마 능침사찰이라 회암사처럼 불태워지는 사태는 없었다. 하지만 승과고시 때문에 당시 학식 있는 사람들이 승려로 입산하였고, 휴정, 유정 같은 명망 있는 승려들이 나와 임진왜란 등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1939년에 큰 화재를 겪었으며, 19506.25 전쟁 때 전각이 대부분 파괴되었다가 이후에 재건되었다. 때문에 봉은사 건물은 판전 등 소수의 건물을 제외하면 주로 1940년대와 1980년대 전후로 재건된 것들이다.

 

수국사(守國寺)     참조 링크: 수국사(守國寺)    홈피: www.suguksa.org/

- ‘수국사관련 이 부분의 내용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가져온 것이다. -

서울시 은평구 구산동에 있는 절이다. 크기는 5층짜리 건물 정도로 20세기에 지어졌다.

외부와 내부 모두 99.9% 순금이라고 하나 사실 금으로 지은 것이 아니고 얇은 금박을 나무에 붙인 것이라고 한다. 기존의 사찰 건물은 나무에 단청을 칠하는데,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나무가 썩고 단청이 지워진다. 이를 보수하는 비용이 생각보다 많이 들어간다. 하지만 금을 입히면 이 비용을 많이 줄일 수 있다고 한다.

 

수종사(水鐘寺)     내용출처: 수종사(水鐘寺)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운길산(雲吉山)에 있는 사찰로 조선전기 제7대 세조의 명으로 중창 된 사찰이다. 수종사에 대한 유래는, 1458(세조 4) 세조가 금강산(金剛山) 구경을 다녀오다 이수두(二水頭 : 兩水里)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한밤중에 난데없는 종소리에 잠을 깬 왕이 부근을 조사하자, 주변에 바위굴이 있고, 굴 안에 18나한(羅漢)이 있었으며, 굴 안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종소리처럼 울려나와 이곳에 절을 짓고 수종사라고 하였다고 전해온다.

 

두물머리를 깨우는 종소리를 들어보려면 요걸 클릭. 추후 링크가 끊어지면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 나올 수도 있으며, 아래 동영상 보려면 ▷클릭=> https://youtu.be/bnsWLJBgGfg

 

 

운길산 수종사(水鐘寺)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양수리 兩水里)를 바라볼 수 있는 저명한 경관(景觀) 전망지이다. 예부터 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의 풍광을 시··화로 남겼으며, 서거정(1420~1488)은 수종사를 동방에서 제일의 전망을 가진 사찰이라 하였다. ·여름·가을·겨울 연중 내내 신록·단풍·설경이 신비스럽고, 일출·일몰·운해 등 어느 시간의 풍광이라도 대단히 아름다운 전망을 지니고 있어 조망지점으로서 경관(景觀) 가치가 큰 곳이다.

 

정약용은 일생을 통해 수종사에서 지낸 즐거움을 군자유삼락에 비교할 만큼 좋아했던 곳 이다. 또한 다선(茶仙)으로 일컬어지는 초의선사가 정약용을 찾아와 한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며 차를 마신 장소로 차문화와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현재 수종사는 삼정헌(三鼎軒)이라는 다실을 지어 차 문화를 계승하고 있어 차() 문화를 상징하는 사찰로 이름이 높다.

 

겸재 정선(1676~1759)의 경교명승첩(한강의 북한강·남한강 주변경관과 한강과 서울의 인왕산, 북악산 등의 경관을 그린 화첩으로 총 33점으로 이뤄짐)중 독백탄(獨栢灘)은 현재의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 兩水里의 경관을 보여주는 고서화로서 그 시대의 명승지 경관과 현재의 경관을 비교 감상할 수 있어 회화 가치가 높다.

 

연화사(蓮花寺)     참조 링크: 연화사(蓮花寺)

서울시 동대문구 제기로3110-3(회기동)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원찰로 세워진 사찰이다.

 

정각원(正覺院)     참조 링크: 정각원(正覺院)    홈피: www.heungcheonsa.net/

이 정각원 건물은 조선의 5대 궁궐 중 하나인 경희궁의 정전(正殿)이었던 숭정전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경희궁 전체를 완전히 해체하면서 숭정전의 목재들이 팔려 나왔고, 그 것을 일본 사찰이었던 대화정 조계사(大和町 曹溪寺)가 사들여 법당으로 사용하였다. 이 조계사는 현재의 대한불교 조계종의 조계사와는 다른 절이다.

 

이후 이 절의 부지에 동국대학교 건물들이 세워지자 1976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져 동국대학교 안의 법당이 되었다.

 

(사족) 동국대학교 근처의 서울 신라호텔 자리에는 박문사(博文寺: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사당으로 1932년 완공된 건물)가 있었다. 이때 경희궁에 있던 흥화문을 헐어 옮겨와 박문사 입구 문으로 썼다.

 

현재 경희궁의 원래 자리에는 새로운 숭정전으로 복원되어 있다. 원래의 (동국대)정각원을 다시 제자리로 옮기려 했으나 건물이 낡아 이전이 어려웠다. 1989년부터 6년에 걸쳐 원래 자리에 새 건물을 지어 복원했다고 발표했다. 그렇지만 복원된 경희궁 숭정전의 완성도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이제 와서 불교 건물로 사용되고 있는 정각원을 다시 회수하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

 

조계사(曹溪寺)     참조 링크: 조계사(曹溪寺)    홈피: www.jogyesa.kr/

조계사 대웅전

대한불교 조계종의 총본산인 조계사는 서울시 종로구 우정국로 55 (수송동)에 위치한 사찰 이다. 사찰 규모는 아담하지만 대한민국 불교 최대 종단의 본사(本寺)답게 경복궁 근정전에 맞먹는 큰 대웅전이 있고, 경내에는 천연기념물 제9호인 백송이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 재위 4(1395)에 창건되었다고 말하나, 실질적 창건은 구한말 순종 융희 4(1910)에 되었다. 한국 근대사가 그렇듯, 조계사도 역사는 짧지만 매우 복잡하다. 한국불교의 친일과 민족투쟁 역사의 중심에 있던 절이기도 하다.

 

대한제국 시절, 한국불교에는 구심점이 될 종단이 없어 계속 밀고 들어오는 일본 불교 세력에 한국 불교가 위축되었다. 이런 상황을 개탄하여 만해 한용운 등 민족적 불교 인사들이 새 종단을 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에 1902년 흥인지문(동대문) 밖 지금의 창신동 창신초등학교 자리에 원흥사(元興寺)를 창건하고, 1908년에 각 도의 사찰 대표 65인이 원종(圓宗) 종무원을 설치하였다.

 

조선왕조 내내 유교 성리학을 숭상하고 불교는 억제하는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해 사찰()도 산으로 추방당하거나 방화(放火)로 사라지는 판에, 한양도성 사대문 안에 절이 생기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게다가 1895년까지는 승려는 천민 신분으로, 도성 출입마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사대문 안에 절을 세운다는 것은 억압받던 한국 불교계에 있어 의미가 컸으며 또한 시대가 달라졌음을 뜻했다.

 

갑신정변(甲申政變)과 우정총국(郵征總局)      참조 링크: 갑신정변 -나무위키

우정총국(郵征總局)

조계사 바로 옆에 있는 우정총국(郵征總局)은 갑신정변이 일어났던 곳으로 한국 최초의 우체국이라고 할 수 있는 건물이다.

 

갑신정변(甲申政變)1884(갑신년)에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 개화파가 서구식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이다. 일본공사와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난을 일으켰다. 급진 개화파는 여러 온건 개화파들을 살해했다. 윤태준, 한규직, 이조연 등 영선사 출신이나 민씨 척족 중에서 민영목, 민태호 그리고 조영하 등 여러 온건 개화파들이 살해당했다.

 

고종을 속이고 새 내각을 구성해 정강 14조 등 개혁을 추진하려 했으나 청나라 군사(淸軍)가 창덕궁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고 민중들이 일본공사관을 공격하자 계획이 좌절되었다.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하며 삼일천하로 끝났다.

 

이 정변은 고종에게도 큰 충격을 준 사건으로 급진 개화파와 온건 개화파 모두 상당수의 인재들이 사라져 향후 근대화에 걸림돌이 되고 청의 내정간섭이 심해지는 등 큰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

 

진관사(津寬寺)     참조 링크: 진관사(津寬寺)   홈피:  www.jinkwansa.org/

진관사

서울시 은평구 진관길 73 (진관동 354번지)에 위치한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조계사 말사로 북한산 진관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신라 진덕여왕 때에 처음 지었다는 유래가 있기는 하지만 이 사찰이 거의 창건 수준으로 대대적으로 중창된 것은 고려 초기의 일이었다. 고려 초 이곳은 진관(津寬)이라는 승려가 홀로 수행하던 신혈사(神穴寺)라는 이름의 작은 암자였다고 한다.

 

진관사가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고려 현종의 목숨을 구한 사찰임과 동시에 사찰에서 6백 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수륙대재덕분이기도 하다. 땅 위, ‘수륙재는 물속의 모든 의지할 곳 없는 영혼들과 아귀(餓鬼)를 위하여 법요를 열고 음식을 공양하는 행사이다. 진관사의 경우 조선 태조가 몸소 국가행사로 명한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 초기의 문신 권근이 태조의 명으로 지은 진관사수륙재조성기(津寬寺水陸社造成記)에 따르면 태조 6(1397) 태조가 이 절에 수륙사(水陸社)를 설치하고 여러 번 행차하여 수륙재를 지냈다고 한다.

 

이를 본받아 태종도 태종 13(1413) 이 절에서 아들 성녕대군(誠寧大君)을 위한 수륙재를 열고, 향과 제교서(祭敎書)를 내렸으며, 수륙재위전(水陸齋位田) 100결을 하사하여 재를 계속하게 하였다. 이후부터 진관사에서는 매년 1월 또는 215일에 수륙재를 열게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진관사 수륙대재(국가무형문화재 제126)라는 이름으로 해마다 음력 9월에 거행되고 있다.

 

그 뒤 세조 9(1463) 화재로 소실된 것을 성종 1(1470) 벽운(碧雲)이 중건하였으며, 철종 5(1854)과 철종 7(1858)에 중수하였다. 고종 16(1879)에 경운(慶雲)이 대방을 중수하였다. 1908년에는 송암(松庵)이 오층석탑을 세우고 1910년에 대웅전의 삼존상을 개금하였으며 명부전을 중수하면서 지장보살상을 개금하였다. 또한 독성전과 칠성각을 새로 지었다.

 

그러나 6.25 전쟁 때 나한전 등 3동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1964년부터 최진관 비구니가 당우를 차례로 재건하여, 현재에는 대웅전을 비롯한 명부전, 나한전, 독성전(獨聖殿), 칠성각, 홍제루(弘濟樓), 종각(鐘閣), 일주문, 선원(禪院), 대방(大房) 등을 갖추었으며, 비구니 수도도량으로 이용하고 있다.

 

2009년 칠성각 보수 당시 불단 뒷면에서 3.1운동 당시에 쓰였던 태극기와 신대한 2·3, 자유신종보, 조선독립신문 32·40호 경고문 등 국외 독립운동과 불교계의 관계를 알려주는 유물들이 새롭게 발굴되기도 했다.

 

호압사(虎壓寺)      참조 링크: 호압사(虎壓寺)   홈피:  www.hoapsa.org/

서울시 금천구 시흥 2동 호암산(虎巖山) 아래에 위치한 대한불교 조계종 사찰로 조계사의 말사(末寺)이다.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봉은사의 말사였다고 한다.)

 

화계사(華溪寺)      참조 링크: 화계사(華溪寺)   홈피:  www.hwagyesa.org/

화계사(華溪寺) 대웅전

중종 17(1522) 신월(信月)선사가 창건했다. 고려 광종 때 탄문(坦文)과 법인(法印)이 현재 화계사 근처 부허동(浮虛洞)에 세운 보덕암(普德庵)을 신월이 서평군 이공(西平君李公)과 함께 현 위치로 옮긴 것이다. 광해군 10(1618) 화재로 전소되어 도월(道月)이 중창했다. 이후 고종 3(1866)에도 낡은 건물들을 보수했다. 구한말에는 흥선대원군이 개인적으로 후원을 하였다.

 

회암사(檜巖寺)      참조 링크: 회암사(檜巖寺)   홈피:  www.hoeamsa.com/

경기도 양주시 천보산에 위치했던 사찰로 숭유억불 정책을 추진한 조선왕조에서도 왕과 왕후들의 비호를 받으며 '조선의 왕사(王寺)'라고 불렸던 조선 최대의 절이었다. 선대왕들의 제사를 지내는 사찰이므로 더욱 특별히 보호받았다. 행궁으로도 기능했으므로 그 모습이 궁궐 건축에 가까웠다.

 

태조 이성계는 회암사를 매우 아꼈다. 나옹화상의 제자인 무학대사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였으며,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찬례(讚禮: (), (), () 삼보(三寶)에 예배하고 그 공덕을 찬탄함)토록 하였다. 이성계가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회암사에서 수도생활까지 했을 정도였다. 비록 이성계는 조선의 왕이었지만 그 자신은 유학자 출신이 아니었으며, 불교문화 속에서 성장한 고려시대 인물인지라 불교를 좋아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나름대로 독실한 불자였던 세조 등에 힘입어 회암사도 계속 번창하였다. 성종 3(1472)에는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자 대왕대비인 정희왕후가 더 크게 중창하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에도 숭유억불 정책이 존재했으나, 실제로 많은 왕족들은 불교에 관심이 있었다. 조선 초기는 왕의 권력이 신하들보다 더 강했기에, 국왕의 개인적인 생각에 따라 신료들의 반대를 누르고 사찰을 지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 유학자들의 힘이 강해지고 점점 숭유억불 정책도 강경해지던 중, 16세기 후반에 원인 모를 화재로 폐사가 되었다. 19세기에 이 절터 근처에 재건한 작은 회암사가 남아있다.

 

회암사지(檜巖寺址)     참조 링크: 회암사지 -다음백과

회암사는 1313년 이전에 이미 절이 창건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1326년 고려에 온 인도 승려 지공이 창건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1376년 지공의 제자인 나옹이 이 절을 중창했다.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를 이곳에 머물게 했고, 그 자신도 퇴위 후 이곳에서 생활했다. 1472년 세조비인 정희왕후의 명으로 정현조가 중창했고, 명조 때에는 보우를 신임한 문정왕후의 비호로 전국제일의 수선도량이 되었다. 왕후가 죽은 뒤 보우가 처형되고 절도 황폐해졌다. 선조 이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옛 절터 부근에는 1977년 중건한 대웅전·삼성각·영성각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 회암사지 선각왕사비(보물 제387회암사지 부도(보물 제388), 회암사지 쌍사자석등(보물 제389) 등이 남아 있다.

 

흥천사(興天寺)     참조 링크: 흥천사(興天寺)   홈피:  www.heungcheonsa.net/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조계사의 말사로 서울시 성북구 돈암동에 위치한 이 곳은 조선 시대의 사찰로 원래 한양 도성 내에 있었다.

 

조선 태조 5(1396) 태조의 정비였던 신덕왕후 강씨가 죽자 태조는 강씨의 능원인 정릉을 도성 내에 조성하고, 강씨의 원찰로써 흥천사를 지었다. 흥천사를 지은 후 태조 7(1398) 7월에 열린 우란분재(盂蘭盆齋: 불교에서 사후에 고통 받고 있는 자를 위해서 음력 715일에 음식을 공양하는 의식)를 직접 참여하거나, 8월에는 신덕왕후의 천도회(薦度會:죽은 이의 넋을 극락으로 보내기 위해 행하는 의식 모임)에 사찰 승려들을 몸소 만나 시주하고 천도회를 주도하는 등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계모 신덕왕후를 거의 증오하다시피 했던 태종이 즉위한 뒤인 태종 3(1403)에 사찰에 딸린 전답과 노비의 수를 줄이고, 태종 8(1408)에는 절의 건물 170칸을 뜯어서 명() 사신들의 객사인 태평관(太平館)을 짓는데 사용했다. 그나마 사찰 자체를 없앤 것은 아니어서 태종 10(1410) 태조의 유지(遺旨)를 좇아 절을 수리하고 이듬해에는 사리각을 중수하였다.

 

세종 6(1424) 선교양종 통합 당시 선종에 속하게 되었다. 세종 19(1437)부터 세종 23(1441) 3월까지 왕명으로 사찰을 중수하였고, 세조 8(1462)에는 범종을 만들어서 이 사찰에 봉안하였으며, 옛 흥천사 부지에 의경세자의 부인이자 며느리인 한씨의 사저를 지어주기도 했다.

 

성종 11(1480) 절을 다시 중수하였으며, 연산군 10(1504) 대궐 안에 있던 내원당(內願堂)을 이 절로 옮겼는데, 그 해 12월에 화재로 절이 소실되어 사리각만 남았다. 중종 5(1510)에는 이 사리각까지 불타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고, 선조 2(1569) 사찰이 정릉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왕명으로 함취정(含翠亭) 옛 터로 절을 옮겨지었다.

 

정조 18(1794) 이 절의 승려 성민(聖敏), 경신(敬信) 등의 발원으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짓고 절 이름을 신흥사(神興寺)라 하였다. 그 뒤 헌종 12(1846) 구봉(九峰)이 칠성각(七星閣)을 지었고, 철종 1(1849) 성혜(性慧)가 적조암(寂照庵)을 창건하였으며, 철종 4(1853) 대웅전(지금의 극락전), 철종 6(1855) 명부전(冥府殿), 고종 2(1865) 대방(大房)과 요사채를 짓고 이름을 창건 당시의 이름인 흥천사로 되돌렸다.

 

[요약퀴즈]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퀴즈 1] (서울) 성북동에 있는 사찰로 법정 스님과 인연이 있는 절의 이름은?

[퀴즈 2] 북한산 아래에 있어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은 둘러봤을 사찰이다. 이 절의 이름은

[퀴즈 3] 도성 밖 비구니 사찰로 왕실과 후궁, 상궁 등 궁인에게 사랑받은 절 이름은?

[퀴즈 4] 신촌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뒤에 있는 한국불교 태고종의 절로 서재필은

           자서전에서 이곳을 개화파의 온상이라고 하였다. 이 절의 이름은?

[퀴즈 5] 본래 경기도 광주 수도산(修道山)의 산사(山寺)였지만, 지금은 서울시 강남구

           도심 한가운데 있는 사찰이 되었다. 돈이 많은 부자(富者) 절로 소문난 이 절은?

[퀴즈 6] 경기도 남양주 운길산(雲吉山)에 있는 사찰로 세조의 명으로 중창된 절이다.

           두물머리(양수리)를 바라볼 수 있는 저명한 경관 전망지인 이 절의 이름은?

[퀴즈 7] 국 불교 최대 종단인 조계종 本寺로 근정전 크기의 대웅전이 있는 이곳은?

[퀴즈 8] 조계사 바로 옆에 있는 한국 최초의 우체국으로 갑신정변이 일어난 곳의 이름은?

[퀴즈 9] 서울시 은평구에 있는 사찰로 고려 현종의 목숨을 구한 인연으로 왕실의 지원과

            보호를 받았다. 2009 3.1운동 당시에 쓰였던 태극기가 발견된 이곳은?

[퀴즈10] 이성계의 비호를 받아 '조선의 왕사(王寺)'라고 불렸던 경기도 양주에 있던 이

            사찰의 이름은 

 

[요약퀴즈 정답]

[퀴즈 1] 성북동에 있는 사찰로 법정 스님과 인연이 있는 절의 이름은? .=> 길상사

[퀴즈 2] 북한산 아래에 있어 오르내리는 사람은 둘러봤을 절이다 이곳은? .=> 도선사

[퀴즈 3] 비구니 사찰로 왕실, 후궁, 상궁 등 궁인에게 사랑받은 절 이름은? .=> 보문사

[퀴즈 4] 세브란스병원 뒤에 있는 한국불교 태고종의 절로 서재필은 자서전에서 이곳을

            ‘개화파의 온상이라고 하였다. 이 절의 이름은? .=> 봉원사

[퀴즈 5] 본래 경기도 광주 수도산(修道山)의 산사(山寺)였지만, 지금은 서울시 강남구

           도심 한가운데 있고, 돈이 많은 부자(富者) 절로 소문난 이 절은? .=> 봉은사

[퀴즈 6] 경기도 남양주 운길산(雲吉山)에 있는 사찰로 세조의 명으로 중창된 절이다.

           양수리를 바라볼 수 있는 저명한 경관 전망지인 이 절의 이름은? .=> 수종사

[퀴즈 7] 국 불교 최대 종단인 조계종 本寺인 이곳은? .=> 조계사

[퀴즈 8] 한국 최초의 우체국으로 갑신정변이 일어났던 곳의 이름은? .=> 우정총국

[퀴즈 9] 서울시 은평구에 있는 절로 고려 현종의 목숨을 구한 인연으로 왕실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 3.1운동 당시에 쓰였던 태극기가 발견된 이곳은? .=> 진관사

[퀴즈10] 조선왕실의 비호를 받아 '조선의 왕사(王寺)'라고 불렸던 경기도 양주에 있던 이

            사찰의 이름은? .=> 회암사

(계속)

 

  서울(한양) 탐구09-(서울)한강변의 亭子(정자)

<배경음악>: 국악한마당 -KBS전주| 계면조 계락 '청산도' -하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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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퀴즈]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퀴즈 1] (서울)한강의 상류에 있던 정자로 일명 '회행정(回行亭)'로 불렸던 정자의 이름은?

[퀴즈 2] 한명회(韓明澮, 14151487)의 별장이었던 한강 정자의 이름은?

[퀴즈 3] 정조의 효심이 묻어나는 정자로 노들강(한강) 건너 풍광이 멋진 정자 이름은?

[퀴즈 4] 처음에 희우정(喜雨亭)이라 불렸던 양화나루(楊花津) 서쪽에 있는 정자의 이름은?

[퀴즈 5] 경기도 파주시에 있는 정자로 황희 정승이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친구 삼아

           여생을 보내던 임진강 하류의 절경 지역에 있는 이 정자의 이름은?

 

한강의 亭子(정자)

다음 내용은 참조 링크: 한강의 정자 https://hangang.seoul.go.kr/archives/249 문헌에서 가져 온 것이다.

                              (상세한 내용은 원문을 클릭)

 

한강 상류로부터 하류 순으로 정리 배치하였고, 일부 내용을 추가하거나 편집, 요약하였다.

화양정(華陽亭) 일명 '회행정(回行亭)'

화양정(華陽亭)은 광진구 화양동 110번지 32·34호에 있던 정자이다. 이 일대는 태조가 한양으로 도성을 정할 당시 말을 먹이는 목장이었는데, 세종 14(1432)에 낙천정 북쪽 언덕에 정자를 세웠다. 정자의 이름은 동지중추원사 유사눌(柳思訥)주서(周書)가운데 '말을 화산 양지에 돌려보낸다(歸馬于華山之陽)'란 뜻을 취하여 '화양(華陽)'이라 하였다.

 

남쪽으로 한강의 흐름이 보이고 북쪽으로는 삼각산·도봉산·수락산·용마봉이 한 눈에 들어오는 국립목장 살꽂이벌(箭串坪 전곶평) 언덕 위에 있는 이 정자에서 세종은 방목한 말들이 떼 지어 노는 광경을 즐겼다고 한다.

 

한편 이 정자는 일명 '회행정(回行亭)'이라고 한다. 그 연유는 단종과 명성왕후와 관련이 있다. 세조 3(1457) 621일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다음날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영월로 귀양 갈 때 이 화양정에서 전송하였는데 "화양정, 화양정"하고 중얼거리며 이 길이 부디 다시 되돌아 올 수 있는 회행길이 되었으면 하고 떠났으나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이에 사람들이 슬퍼하며 그 원혼이나마 돌아오기를 비는 마음에서 화양정을 회행정으로 부르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고종 19(1882)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나 명성왕후가 변복(變服)을 하고 창덕궁 뒷문으로 나와 장호원으로 피해갈 때 광나루까지 가던 도중 이 곳 화양정에서 잠시 쉬어갔다고 한다. 뒷날 명성왕후가 창덕궁으로 환궁하게 되자 사람들이 '정말 화양정이 회행정이 되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화양정은 그 규모가 매우 웅장하였다고 한다. 사각정(四角亭)으로서 기둥 둘레가 한아름이 넘었으며 그 내부가 100여 칸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화양정은 1911721일 낙뢰(落雷)로 무너지고, 지금 이곳에는 서울시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된 650년이 넘는 고목을 비롯한 7그루의 느티나무 고목만 서 있다. 1987년에 서울시에서 표석(標石)을 설치하여 그 자취를 알리고 있다.

 

낙천정(樂天亭)

(복원된) 낙천정(樂天亭)

낙천정(樂天亭)은 조선 태종이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고 머물던 정자로, 광진구 자양동 446번지 현대아파트 단지 내에 있다. 이곳은 원래 화양동에서 동남쪽으로 한강변을 끼고 거슬러 올라간 곳 언덕 위였다. 이 언덕은 모양이 시루를 엎어 놓은 것 같다고 하여 시리미(甑山 증산) 또는 대산(臺山)이라 하였으며 후에 발산(鉢山)이라 하였다. 대산은 표고 42.8m 밖에 안되었으나 한강이 발아래 감돌아 흐르고 강 건너 잠실동·신천동과 그 멀리 남한산성이 병풍같이 둘러섰고, 남쪽에 청계산·관악산, 그리고 서쪽에는 남산이 한 눈에 들어오는 승지(勝地)였다.

 

태종은 그 18(1418) 왕위를 아들 세종에게 양위한 후 그해 9월 이 곳에 이궁(離宮)과 그에 딸린 정자를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인 세종 1(1419) 2월 낙성하고, 좌의정 박은(?)에게 명하여 정자의 이름을 짓게 하니 주역(周易)계사편의 '낙천지명고불우(樂天知命故不憂)'의 구절을 따서 '낙천(樂天)'이라 불렀다. 또한 의정부 제조 변계량(卞季良)에게 <낙천정기(樂天亭記)>를 짓게 하고 한성부윤 권홍(權弘)으로 하여금 이를 쓰게 하여 94일 판각하여 정자에 달았다.

 

태종은 낙천정에 행차하여 종종 중요한 정무를 친히 듣고 결정하기도 하고, 종친간의 화목을 다짐하기도 하였다. 즉 세종 1년 이 곳에서 세종과 함께 왜구에 대비하기 위하여 삼판선(三板船)을 꾸미게 하였고, 이해 6월 체찰사 이종무(李從茂) 등이 삼도 수군을 거느리고 대마도(對馬島)를 쳐서 평정하고 돌아오니, 그들을 위하여 환영연을 성대히 베풀고 상을 주었다. 세종 2년 정월부터 상왕(태종)과 대비인 원경왕후(元敬王后) 민 씨가 아예 이곳으로 옮겨 거처하게 되므로 왕은 수시로 나가 양전(兩殿)에 문안한 후 유숙(留宿 머물다 자고 옴)하고 돌아옴은 물론 왕비 또한 때때로 낙천정에 나가 문안드렸다. 4월에는 중국사신을 접대하였더니 사신이 감탄하여 하늘이 마련해 준 선경(仙境)이라 칭송하였다 하며, 때때로 상왕은 왕과 함께 이곳에서 매사냥을 즐겼다 한다. 세종 35월에는 오위진(五衛陣)이라는 군사훈련을 사열한 일도 있다.

 

세종 4(1422) 5월 상왕이 승하한 후 세종은 이 정자를 둘째 딸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하사하여 부마인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과 함께 아름다운 풍물을 즐기게 하였다. 성종 3(1472)에는 양잠을 장려하기 위한 잠실(蠶室)로도 이용되었다.

 

정자가 퇴락하여 없어진 후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 터는 도시개발로 인해 강변도로와 주택지가 되어 있었는데, 1987년에 서울시에서 한강변 문화유적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그 자취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1991년에는 옛 대산 기슭 부분 자양동 673번지에 새로이 정면 3, 측면 2, 주심포 팔작지붕의 정자를 건립하여 그 자취를 알리고 있다. 하지만 원래 위치는 그곳이 아니었다.

 

천일정(天一亭)

천일정(天一亭)은 남산 줄기가 동남쪽으로 뻗어나가 한강에 닿는 강안(江岸), 용산구 한남동 459번지에 있었다. 고려시대의 절 터였던 이곳에 조선 성종 때의 문신 김국광(金國光, 14151480)이 처음으로 정자를 지었으며,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소유를 거쳐, 한때 민영휘(閔泳徽, 18521935)의 소유이기도 하였다. 정자의 이름은 당나라 왕발(王勃)등왕각(藤王閣)서문에 있는'추수공장천일색(秋水共長天一色)'의 시구를 취하여 이름 지었다 한다.

 

3,000나 되는 넓은 터전에 동쪽으로 아늑한 안채가 있고 정남향으로 조금 높은 터에 청원당(淸遠堂)이란 현판이 걸려 있었으며, 그 아래 조금 낮은 터에 강을 내려다보고 바깥사랑채 격인 천일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강변 높은 곳에 축대를 쌓고, 앞쪽으로 돌출된 누의 아래로는 사각 장초석을 세웠고 팔작지붕을 하였었다.

 

멀리 강 건너 압구정이 바라보이던 곳으로 19506·25전쟁 때 폭격 맞아 없어졌고 지금은 그 부근에 한남대교가 놓여 있다.

 

압구정(狎鷗亭)        참조 링크: 압구정 -문화원형백과

압구정(狎鷗亭)은 강남구 압구정동 산 310번지 일대인 동호대교 옆 현대아파트 11동 뒤편에 있었으며, 세조 때의 권신인 상당부원군 한명회(韓明澮, 14151487)의 별장이었다. 명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예겸(倪謙)이 지은 '압구정'이란 정자의 이름은 한명회의 생활과는 다르게 부귀공명 다 버리고 강가에서 해오라기와 벗하여 지낸다는 뜻을 지니고 있어 이곳을 지나가는 문인·유지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하였다 한다.

 

이 정자는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곳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는데, 압구정의 배 띄우기는 경도승경(京都勝景) 중의 하나였다. 그 후 한명회는 관직을 사퇴하고 이곳에서 여생을 지내려 하니 성종 7(1476)에는 왕이 압구정시(狎鷗亭詩)를 친제(임금이 친히 시제를 내림)하여 하사하였고 조정 문신들도 차운(次韻)하니 그 시가 수백편이나 되었다 한다.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압구정도(狎鷗亭圖)〉

정자의 모습은 겸재(謙齋) 정선(鄭敾)압구정도(狎鷗亭圖)에 높은 언덕 위에 정자가 있는데 마루 둘레에 난간을 돌리고 팔작지붕을 한 형태로 그려져 있어, 소박한 일반적인 정자와는 달리 비교적 규모도 크고 주위 경치와 어울려 화려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9세기 말에는 박영효(朴泳孝, 18611939)의 소유가 되었으나, 갑신정변으로 박영효가 국적(國賊)으로 일체의 재산이 몰수될 때 이 정자도 헐렸다. 이후 1970년대 영동개발에 따라 현대아파트가 들어서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동네이름으로 남게 되었으며, 근래에 표석을 설치하여 압구정 터임을 밝혀 놓았다.

 

제천정(濟川亭)

제천정(濟川亭)은 조선시대 한강변에 위치했던 왕실(王室) 소유의 정자로,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와 함께 사랑을 받았던 대표적인 정자이다. 제천정은 보광동 강가 언덕 즉 한남대교 북쪽 어귀에서 서쪽으로 바라보이는 용산구 한남동 537번지 일대에 있었다. 세조 2(1456)에 세웠으며, 세조로부터 명종 18(1563)에 이르기까지 한강변 정자 가운데서 왕이 가장 자주 찾은 곳이었다.

 

이곳은 경도십영(京都十詠)에도 있듯이 '제천완월(濟川翫月)'이라 하여 달구경의 경치가 좋은 곳으로 꼽혔던 곳으로 광희문(光熙門)을 나와 남도지방으로 내려가는 길목 나루터 옆에 있었기 때문에 왕이 선릉(宣陵)이나 정릉(靖陵)에 친히 제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러 쉬기도 하였으며, 또한 중국사신이 오면 으레 이정자에 초청하여 풍류를 즐기게 하였다.

 

성종은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세상을 떠난 뒤 이 제천정에 자주 나와 정자의 규모가 작고 좁다 하여 이를 크게 고쳐 짓기도 하였다. 또한 명종 13(1558)에는 임금이 이 정자에 올라 수전(水戰)을 관람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인조 2(1624) 이괄(李适)의 난으로 왕이 왕대비와 함께 종묘와 사직단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공주(公州) 로 피난갈 때, 밤에 한강을 건너면서 이 제천정에 불을 질러 그 불빛에 의지하여 강을 건넜다는 것으로 미루어 이 때 불타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58년에 발행된 서울명소고적에 의하면 이 정자 건물은 청일전쟁 때까지도 남아 있었으며, 그 후 왕실로부터 미국인 언더우드(H. G. Underwood)에게 불하하였는데, 뒤에 어느 틈에 없어졌는지 그 자리마저 황량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효사정(孝思亭)

사진 및 내용 출처 : http://www.discovery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308007  

 

효사정(孝思亭)은 조선 초기 문인 노한이 모친을 그리워하며 지은 정자로 한강 변에 자리해 한강 조망이 좋다. 조선 초기 문신 노한(1376~1443)이 어머니를 여의고 3년 동안 시묘를 했던 곳에 지은 정자다. 노한은 시묘 살이 후에도 묘소를 떠나지 못해, 묘소 북쪽 바위 언덕의 효사정에 올라가 부모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효사정이라는 이름은 노한과 동서지간이었던 호조참판 강석덕이 효를 생각하는 정자라는 뜻을 담아 지었다. 당시 효사정은 효의 상징이었으며, 한강 변 정자 중 경관이 가장 좋은 곳으로 칭송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서울시 우수 조망명소로 선정됐을 정도로 풍광이 아름답다.

 

옛 효사정은 조선 성종 때 헐렸다. 지금의 효사정은 1993년 일본 신사가 있던 자리에 정면 3, 측면 2칸의 정자를 새로 지은 것이다. 효사정에 관한 옛 기록을 참고해 제자리를 찾아보았으나 주변 환경이 많이 변해 찾지 못하고, 옛터와 가까운 곳에 지었다고 한다. 지하철 9호선 흑석역 1번 출구에서 약 1분 걸으면 도착한다.

 

용왕봉저정(龍驤鳳翥亭)      참조 링크: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 - sillokwiki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은 동작구 노량진로3214-7 (본동)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 후기의 누정(樓亭)으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었다. 정조는 효심이 지극한 군주로 비명에 간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추모하는 일에 정성을 다 하였다. 사도세자의 원묘(園墓)는 처음에는 영우원(永祐園)이라 하여 지금 서울시립대학교 뒷산인 배봉산(拜峰山)에 있었는데 그 규모가 작고 초라하였다. 이를 가슴 아파하던 정조가 178911월에 화산(華山, 수원)으로 옮긴 후 현륭원(顯隆園)이라 하고, 해마다 친히 참배하였다.

 

정조가 수원에 갈 때마다 노들강(한강)에 배다리(舟橋)를 설치하고 건넜는데, 시간이 걸렸으므로 강을 건넌 후에 잠시 어가(御駕)를 머물게 하고 쉴 자리가 필요하여 작은 언덕에 행궁(行宮)으로 이 누정을 지었던 것이다. 당시의 모습은 이신(爾信)의 그림 <노량진주교(鷺梁津舟橋)><행궁도(行宮圖)>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이 누정은 정조 13(1789)에 건립을 시작하여 2년 후에 완공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원래 이 집 터는 노저(露渚) 이양원(李陽元, 15331592)의 집 터였다고 한다. 용양봉저정이란 이름은 '용이 뛰놀고 봉()이 높이 나른다'는 뜻으로, 이곳이 국왕이 잠시 머무는 행궁 구실을 하였으므로 곧 국왕 행차가 성대함을 뜻하는 것이다. 또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점심을 들었기 때문에 일명 '주정소(晝停所)'라 부르기도 하였다.

 

또 이 누정은 매우 크고 화려하여 여기서 내려다보면 강 언덕의 푸른 수림(樹林) 아래로 한강의 맑은 물결이 내려다보이고, 저 멀리 눈을 돌리면 남산 북악 사이로 서울 장안의 풍경이 그림같이 펼쳐져 있으므로 전망도 매우 좋은 곳이다. 수고롭게 강을 건너 이곳에서 간단한 연석(宴席)을 마련하고 서늘한 바람, 맑은 공기를 곁들여 술을 한잔 든다는 것 또한 흥취 있는 일이었다. 정조는 이른 아침 일찍 용양봉저정에 올라 이와 같은 정경의 일면을 읊은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이 행궁에 정문(正門)과 누정 등 두 세 채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종 때 유길준(兪吉濬)에게 하사된 후 전전하다가 1930년 일본인 이케다(池田)의 손에 들어가 건물 일부를 철거하고 부근 5,300여 평에 온천·욕장·운동장·식당 등을 둔 오락장으로 삼고 이름도 '용봉정(龍鳳亭)'으로 고쳐 부르는 수난을 당했다. 광복 후 이를 국유(國有)로 환원하여, 오락시설을 철거하고 원래의 이름으로 고쳤다.

 

현존하는 건물은 2단의 나지막한 기단 위에 사각기둥을 세웠으며, 건평 10평에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층 팔작지붕이다. 중앙부는 온돌방으로 꾸미고 사방에는 띠살 분합(分閤)을 달았으며, 방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퇴칸(퇴칸:집채의 원래 칸살 밖에 붙여 딴 기둥을 세워 만든 칸살)을 설치하여 마루를 꾸몄다. 정면 중앙 3칸은 개방되어 디딤돌을 통해 마루로 올라가게 되었고, 둘레에는 난간을 돌렸다. 네모 기둥머리에는 초익공(初翼工)을 결구(結構)하고, 이중량(二重樑)을 둔 5량구조(五樑構造) 겹처마 집으로 간결하면서도 격식을 갖춘 특수기능의 건물이다.

 

심원정(心遠亭)

심원정(心遠亭)은 용산구 원효로487번지에 있던 정자인데, 임진왜란 때 왜군과 명나라 군이 화전(和戰)을 위한 교섭을 벌였던 장소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쟁이 일어난 지 1개월도 못되어 수도 한성이 함락되었던 전세는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조선 관군의 수습,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 명나라 군의 원군(援軍) 등으로 점차 조·명 연합군 측이 우세해졌다.

 

특히 행주대첩(幸州大捷)으로 자신을 얻은 조선군이 한성을 향해 일대 반격 내지 소탕전을 전개하려고 할 무렵, 왜군은 평양 전투에서 패배하여 남산 산록을 중심으로 이 곳 용산 일대에 모두 후퇴 결집하고 있었다. 왜군들은 모두 이곳으로 쫓겨 들어와 무기와 식량 부족이 심각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한성을 탈출해야 한다는 절박한 사정에 놓여 있었고, 명나라는 전쟁을 더 이상 끌면서 확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행주대첩 이후 자력(自力)으로 한성을 탈환할 것을 도모하고 있던 조선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 초기부터 일기 시작했던 화의론(和議論)이 대두되었다. 사실상의 작전권을 장악하고 있던 명군은 왜군 측의 화의에 대한 요구를 구실 삼아 조선 측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화의를 진행시켰다. 이러한 화의에 대한 명나라와 왜군의 강화회담이 한강 특히 용산강(龍山江)과 이 곳 심원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 강화회담의 진행으로 용산강 일대를 차지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육상의 적을 섬멸하려던 우리 군의 작전계획은 차질을 빚었으나, 이 곳 심원정과 용산강 일대는 임진왜란 전쟁사에 있어서 한 전환점을 이룬 전적지(戰蹟址)로서의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그 후 이곳은 고종 때에는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의 별장이 되기도 하였으며, 현재는 정자는 없고 '왜명강화지처(倭明講和之處)'라고 음각(陰刻)된 비()가 남아 있다. 또 강화를 체결한 후 기념식수한 것이라 전해지고 있는 천연기념물 제6호로 지정된 백송(白松)과 느티나무 고목이 있어 옛 역사의 현장을 느끼게 한다.

 

망원정(望遠亭) = 희우정(喜雨亭)

복원된 망원정(望遠亭) -사진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망원정(望遠亭)은 양화나루(楊花津) 서쪽 언덕인 마포구 망원동 137, 207-1번지 일대에 있었다. 태종의 아들이자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1486)의 별장으로 세종 6(1424)에 건립되었다. 이 정자는 처음에는 희우정(喜雨亭)이라 하였는데, 세종 7(1425) 왕이 농사 형편을 살피러 이곳에 거둥하였다가 새 정자에 올랐을 때 때마침 기다리던 비가 내려 온 들판을 흡족하게 적시므로 왕이 매우 기뻐하여 정자의 이름을 희우정이라 붙인 것이라 한다. 효령대군은 이러한 왕의 행차와 명명(命名)에 깊이 감사하여 부제학(副提學) 신장(申檣)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고, 변계량(卞季良)에게 기문(記文)을 짓게 하였다.

 

변계량의 기문과 망원정의 주변 풍광을 노래한 시들에 의하면 정자가 사치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으며, 강변에 매우 가깝게 있고 누각 형식의 건물로 둘레에 난간이 돌려져 있었으며, 주위에는 소나무와 버드나무가 울창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작가 미상의 희우정 그림을 보면 강가 절벽 암반 위에 덤벙주초석(자연석을 가공 없이 그대로 사용한 초석)을 놓고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건물로서, 마루 둘레에는 난간을 돌리고 팔작지붕을 한 모습이다.

 

세종 27(1445) 왕이 이곳에 거둥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천(?)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포를 발사하며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을 하게하고, 세자와 대군 등이 희우정 서쪽 봉우리에 올라 관람하였다. 따라서 이 부근은 경치 좋은 명소로서만이 아니라 수륙군(水陸軍)의 훈련장으로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종 15(1484)에는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1488)이 정자를 고쳐 짓고 이름을 망원정이라 하였다. 이는 이 정자에 오르면 연희평(延禧坪)의 넓은 들판을 건너 도성 서북쪽의 산악지대를 바라볼 수도 있고, 또 동남쪽으로 한강을 끼고 펼쳐진 산야의 먼 경치를 잘 바라볼 수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성종은 세종 때의 예에 의하여 매년 봄 가을 이곳에 나와 농사 형편을 시찰하고 또 수전 연습을 관람하였으며 문인 명사들과 시주(詩酒)를 즐기기도 하였다.

 

그 후 연산군 12(1506)에는 연산군의 향락행위를 위하여 한강 명소인 망원정을 크게 확장할 것을 명하였다. 이 때 지붕은 초가로 하고 건물은 천 여 명이 앉을 만큼 크게 짓게 하며, 정자 위에서 바라다 보이는 건물은 모두 철거하도록 하였으며, 정자의 이름도 수려정(秀麗亭)으로 고치게 하였다. 그러나 이해 9월 중종반정으로 모든 공사는 중지되고 철거됨에 따라 망원정도 다시 옛 모습으로 명사들이 즐기는 명소가 되었다. 이곳은 경치가 매우 좋아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던 연회장으로도 사용되었으며 잠두봉(蠶頭峰)과 가깝기 때문에 잠두봉을 찾는 길에 이곳에 들르는 사신도 있었다.

 

그러나 망원정은 1925년 을축년(乙丑年) 대홍수 때에 유실되어 마포구 망원동 동명에서만 그 자취를 찾을 수 있었다. 그후 서울시에서는 1986년에 한강변 문화유적 복원계획의 일환으로 문헌 고증과 현지 발굴조사를 통해 망원정을 복원하기로 결정하였다. 망원정 복원공사는 1988620일부터 19891020일까지 시행되었으며, 원래 위치에서 약간 벗어나 마포구 동교로8안길 23 (합정동)에 대지 341.5평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2층 팔작기와집 누각으로 복원되었다. 그리고 1990년에 망원정 터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9호로 지정 보전하고 있다.

 

반구정(伴鷗亭)       참조 링크: 반구정 -위키백과

갈매기를 벗삼는 반구정(伴鷗亭)-(복원)

서울에 압구정(狎鷗亭)이 있다면 서울시에 속한 정자는 아니지만 갈매기와 노닌다는 반구정(伴鷗亭)은 경기도 파주시에 있다. 조선 세종 때 유명한 정승이었던 황희(13631452)가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친구 삼아 여생을 보내던 곳이다. 임진강 하류의 절경 지역에 세워진 정자로 경기도의 문화재자료 제12호로 지정되었다.

 

바로 위쪽에 앙지대(仰止臺)가 있으며, 낙하진과 가깝게 있어 원래는 낙하정이라 불렀다.

분단의 현실을 체감할 수 있는 철조망이 반구정 언덕과 임진강을 가로 막아 낙조가 들면 더없는 슬픔과 아름다움을 한꺼번에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미수 허목선생이 지은 반구정기(伴鷗亭記)를 보면 정자는 파주 서쪽 15리 임진강 아래에 있고 조수 때마다 백구가 강 위로 모여들어 들판 모래사장에 가득하다. 9월이면 갈매기가 손으로 온다. 서쪽으로 바다는 30리 이다.’라고 아름다운 풍광을 묘사해 놓았다.

 

반구정은 황희가 죽은 후 조상을 추모하는 전국의 선비들이 유적지로 보호하여 오다가 한국전쟁 때 모두 불타 버렸다. 그 뒤 이 근처의 후손들이 부분적으로 복구해 오다가 1967년 크게 고쳐지었다. 건물 규모는 앞면 2· 옆면 2칸이며기둥 윗부분과 옆면 등에 꽃무늬 장식을 돌려 붙였다.

 

[요약퀴즈]

[퀴즈 1] (서울)한강의 상류에 있던 정자로 일명 '회행정(回行亭)'로 불렸던 정자의 이름은?

[퀴즈 2] 한명회(韓明澮, 14151487)의 별장이었던 한강 정자의 이름은?

[퀴즈 3] 정조의 효심이 묻어나는 정자로 노들강(한강) 건너 풍광이 멋진 정자 이름은?

[퀴즈 4] 처음에 희우정(喜雨亭)이라 불렸던 양화나루(楊花津) 서쪽에 있는 정자의 이름은?

[퀴즈 5] 경기도 파주시에 있는 정자로 황희 정승이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친구 삼아

           여생을 보내던 임진강 하류의 절경 지역에 있는 이 정자의 이름은?

 

[요약퀴즈 정답]

[퀴즈 1] 한강 상류의 정자로 일명 '회행정(回行亭)'로 불렸던 정자의 이름은? .=>화양정

[퀴즈 2] 한명회(韓明澮, 14151487)의 별장이었던 한강 정자의 이름은? .=>압구정

[퀴즈 3] 정조의 효심이 묻어나는 노들강 건너의 정자는?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

[퀴즈 4] 희우정(喜雨亭)이라고도 불렸던 양화나진서쪽에 있는 정자의 이름은? .=>망원정

[퀴즈 5] 경기도 파주에 있는 정자로 황희 정승이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친구 삼아

여생을 보낸 임진강 하류 절경 지역의 정자의 이름은? .=>반구정(伴鷗亭)

 

(계속)

 

서울(한양) 탐구08-(서울)한강의 나루, 살꽂이다리 箭串橋(전곶교)


 

(배경 영상,음악)  경기민요 한강수타령, 매화타령 -KBS 전주 국악한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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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밑줄 친 링크는 현재는 연결되지만 추후 링크 주소 변경되면 연결이 안 될 수도 있음.

 

나루터, 포구, () 하천(河川), ()의 이름은 지명이나 지하철역명에 많이 반영되어 있다.

 

[요약 퀴즈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퀴즈 1] 태조 이성계가 함흥차사후 태종에게 화살을 쐈다는 중랑천 하류의 옛 다리 이름은?

[퀴즈 2] 나루 인근에 몽촌토성·풍납토성 등과 연결되는 아차산성이 있으며, 옛날부터 중요한

                 교통로였고 오늘날은 서울부산간 교통로가 이 지역을 지나고 있다. 나루 이름은?

[퀴즈 3] 과천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한강의 나루로 우리말(=노들나루)인 이 나루의 漢字名?

[퀴즈 4] 소금과 젓갈을 실은 배들이 모여들어 도성의 소금과 젓갈은 거의 모두 이곳에서 공급

                 됐다. 결빙기를 제외하고는 京江商人과 배들로 붐비고 활기를 띠었다. 이 나루 이름은?

[퀴즈 5] 서울에서 양천(陽川)을 지나 강화로 가는 조선 시대 교통의 요지였으며, 삼남 지방에서

                 한강을 통하여 운송되어 오는 곡식을 하역하던 나루이다. 이 나루의 이름은?

[퀴즈 6] 양화나루 인근에 있는 이곳은 누에머리를 닮았다하여 잠두봉이라 불린다. 많은 천주

                 교도들이 참수당한 곳으로 천주교의 순교성지가 되었다. 머리가 잘렸다 해서 oo?

 

한강 다리가 세워진 곳은 유명 나루터, 포구였다. (2019.01.04 기사)

내용출처: http://www.seni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971

 

역사적으로 한강은 한반도 중부지방을 동에서 서로 흘러가는 젖줄로써 일찍부터 그 가치를 인정받아 왔다. 그 중 광나루에서 양화진까지 조선시대 한양에 인접한 경강(京江-서울의 한강)에는 광나루, 두모포, 한강진 등 11개의 나루와 포구가 있었다.

 

이 나루와 포구는 한양과 전국 각지를 연결하는 주요 도로가 지나는 길목이었고 상업의 중심지였다. 경기도 광주로 가는 길은 동대문에서 시작하여 왕십리를 지나 살꽂이다리, 광진(廣津 광나루)을 거치고 용인으로 가는 길은 광희문에서 한강진(漢江津 한강나루)을 지난다. 과천으로 통하는 길은 남대문에서 동작진(銅雀津 동작나루)을 건너는 등 한양 남쪽 지방으로 향하는 대로(大路)는 모두 한강을 건너야 했다.

 

근대에 들어 육로교통 수단이 발달되면서 배로 한강의 남쪽과 북쪽을 연결하던 나루와 포구 자리에 다리가 들어섰다. 1900년 한강철교, 1917년 한강인도교 건설 등을 필두로 하여 수많은 다리가 놓여 있다. 한강의 다리 건설은 길을 이어줌과 동시에 강남(영동)개발, 여의도개발, 잠실개발 등 서울의 발전을 견인해왔다.

 

이러한 다리들은 하나같이 옛 길과 나루터 자리에 건설되었다. 노량진에는 한강대교(1한강교)가 놓였고 양화진에는 양화대교(2한강교)가 한강진에는 한남대교(3한강교)가 들어섰다. 마포나루에 들어 선 것이 마포대교(서울대교)이고 송파진에는 잠실대교가 서빙고나루에는 잠수교와 반포대교가 만들어지는 등 예전 나룻배가 다니던 길 위로 다리가 들어선 것이다.

 

이 다리는 조선시대와 같이 주요 지역을 잇는 길이기도 하다. 목포에서 임진각을 거쳐 신의주를 잇는 국도1호선이 1996년까지 한강대교(1한강교)를 거쳐 갔고 서울에서 인천과 강릉으로 이어지는 국도6호선은 양화대교(2한강교)를 지난다.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도 신설 당시 한남대교(3한강교)가 시작점이었던 점 등으로 보아 나루와 포구가 있던 자리에 건설된 한강의 다리는 근래에도 교통의 중심지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서울의 발전을 위해 추진된 부도심 건설은 교량 건설과 함께 하였다. 비행장이던 여의도를 부도심으로 개발하는 사업에는 마포대교(서울대교)가 한강 수변의 버려져 있던 저습지였던 강남 영동지구를 개발하는 사업은 한남대교(3한강교)가 활성화 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강다리의 이름은 제1한강교->한강대교, 2한강교->양화대교, 서울대교->마포 대교로 지금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한강대교의 건설로 만들어진 노들섬, 여의도 건설로 인해 변화된 서강대교 아래 밤섬, 서울 수돗물 정수장이었던 양화대교 아래의 선유도 등 한강에 있는 섬의 옛 모습 등 서울의 옛 모습은 서울역사박물관 홈페이지(www.museum.seoul.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19.01.04. 기사 내용)

 

살꽂이다리=살곶이다리     참조 링크: 살꽂이다리

살꽂이다리또는 살곶이다리라고 하였고 한자명으로 箭串橋(전곶교)라고 한다. 성동구 사근동 102번지 남쪽 현재 성동교 동쪽에 위치해 있는 돌다리로서 중랑천에 놓여 있다. 조선시대 다리로는 가장 길었으며 濟盤橋(제반교)라고도 불렀다. 현재는 중간 부분이 훼손된 채 양쪽 가장자리만이 원형을 보존하고 있으며 사적 제160호로 지정되어 있다.

살꽂이다리(箭串橋 전곶교-화살이 꽂힌 다리)

함흥차사(咸興差使)와 살꽂이다리(箭串橋 전곶교-화살이 꽂힌 다리)

함흥차사(咸興差使)       참조 링크: 함흥차사 -고사성어대사전

조선 초기, 방석(芳碩)의 변(1차 왕자의 난)이 있은 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정종(定宗)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고향인 함흥에 은거했다. 그 후 형제들을 살해하면서까지(2차 왕자의 난) 왕위를 차지한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은 분노한 태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함흥으로 차사를 보냈다. 하지만 태조가 번번이 활을 쏘아 차사들을 죽이거나 가두어 돌려보내지 않았다. 여기에 서 유래하여 함흥차사는 심부름 간 사람이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살꽂이다리(箭串橋(전곶교)-화살이 꽂힌 다리)로 불리게 된 까닭...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거쳐 태종으로 등극하자 함흥으로 내려가 한양으로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이방원의 등극을 부정하였다. 그 후 태조 이성계는 태종과 신하들의 간곡한 청으로 함흥에서 돌아오게 되는데, 태종이 이곳 중랑천 하류 한강 가에서 천막을 치고 아버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 태조가 태종을 향해 활을 쏘았으나 맞히지 못하고 화살이 땅에 꽂혔다, 그 후 이 지역을 화살이 꽂힌 곳이라 하여 살꽂이혹은 살곶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다리는 한강이 아니라 중랑천에 있는 다리이다.

 

한강의 유래      내용 출처: https://hangang.seoul.go.kr/archives/249 -서울시 한강사업본부

한사군과 삼국시대 초기의 한강은 한반도의 중간 허리부분을 띠처럼 둘렀다는 뜻에서 帯水(대수) 라 불렀고, 고구려에서는 '아리수' 라 했으며, 백제는 '욱리하' 라고 했다. 또 신라는 상류를 '이하', 하류를 '왕봉하' 라 불렀다. 한편 '삼국사기' '신라편' 지리지에는 한강을 '한산하' 또는 '북독' 이라고도 했다. 백제가 동진과 교통하여 중국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한강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고쳐서 '漢水(한수)'라 불렀고, 그 뒤부터 옛 이름은 사라지고 '한수' 또는 '漢江(한강)' 이라고 불리어졌다.

 

고려 때는 큰 물줄기가 맑고 밝게 뻗어내리는 긴 강이란 뜻으로 '열수' 라고 불렀으며, 모래가 많아 '사평도' 또는 '사리진' 이라고도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경강(京江)'이라고도 불렀다.

 

한강은 본래 우리말 '한가람'에서 비롯된 말로 '''크다, 넓다, 길다'는 의미이며, '기람'은 강의 고어로 한강’='크고 넓은 강' 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위치에 따라 다르게 불린 한강의 이름들      출처 링크: 한강 [漢江] 서울지명사전

한강이란 한남동 앞에 흐르는 강의 별명으로서 이곳에 한강진과 제천정 등이 있었다. 뚝섬에서 옥수동 앞강을 동호, 한남동 앞을 한강, 동작동 앞을 동작강, 노량진 앞을 노들강, 용산 앞을 용호 · 용산강, 마포 앞을 마포강, 서강 앞을 서강, 김포 북쪽을 조강이라고 불렀다.

 

한강의 포구와 나루 (-배대는 곳)      출처 링크: 포구 교역-문화원형백과

(알림) 이하 내용은 링크: 포구 교역-(문화원형백과 한강 생활문화)에서 가져 왔다.

우리말로 개, 한자말로 포()는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을 말한다. 서해 바닷물이 동작진(:나루 진)까지 올라왔다고 하는데 그 위로도 두모포(斗毛浦), 개포(開浦) 등이 있는 것을 보면 포라는 명칭이 붙기 위해서 반드시 바닷물이 드나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과거 삼개 즉 마포가 한강 물자유통의 중심이었던 것은 배들이 조수의 힘으로 가장 멀리 올라 올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한강 하류지역에 발달한 포구로는 하류로부터 조강포(祖江浦), 이산포(二山浦), 행주외리, 양천, 후포, 염창, 양화진, 서강, 마포, 용산 등 아랫강 포구와 서빙고, 한강리, 수철리, 뚝섬, 송파 등 윗강 포구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포구 가운데 용산과 마포가 규모와 기능 면에서 월등하였다.

 

-알림-

한강의 나루를 설명에, 나루 지명의 단순 링크는 다음백과를 참조하였고, 내용은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일부를 가져왔으며, 링크: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들-1에서 주로 가져왔다아래 각 나루의 설명은 한강 상류부터 내려오면서이다.

 

광나루       내용 출처 링크: 광나루

광진구 광장동에 양진(楊津광장(廣壯광진(廣津광진도(廣津渡) 등의 명칭으로도 불리었으며, 진취락(津聚落)을 형성하였던 곳이다. 한강의 중하류에 위치한 광나루는 교통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서울에서 부산까지 연결되는 영남로의 주된 간선로는 아니었으나, 부산으로 향하는 도로의 길목에 위치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파발로가 지나서, 광나루의 교통상 기능은 지속적으로 중요시되었다.

 

광진원(廣津院)이 광나루 북쪽 언덕에 위치하였으며, 도승(渡丞)이 있어 사람들의 내왕을 조사하기도 하였다. 당시 좌도수참전운판관(左道水站轉運判官)이 겸직으로 이 지역의 조운을 관장하였을 정도로, 광나루는 서울 주변의 중요한 나루터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북쪽에는 백제 초기 몽촌토성·풍납토성 등과 연결되는 아차산성이 있으며, 고대부터 교통로로서 중요하였고 오늘날은 서울부산간 교통로가 이 지역을 지나고 있다.

 

송파나루(松坡津 송파진)       내용 참조링크: 송파나루,송파진

현재의 송파구 석촌호 부근에 있던 나루터로서, 도성에서 전곶교를 건너 신천진을 지나 만나게 된다. 송파에서 잠실로 연결하였으며, 광주,이천으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도선장은 조선 후기에 발달하였다. 본래 이 부근에서 가장 큰 도선장은 삼전도였는데, 병자호란 이후 기피 경향이 있어 정부에서 송파진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 상공업의 발전과 함께 유명한 장시로 성장하여, 객주,거간을 비롯한 도선주들이 모여들었다. 송파진에는 9척의 진선이 있어 통행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송파진별장은 인근의 광진,삼전도,신천진의 나루까지 관장하였다.

 

신천나루(新川津 신천진)      내용 참조링크: 신천진

오늘날의 송파구 신천동에 있던 나루터로서, 신천동에서 뚝섬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삼전도(新川津 삼전도)      내용 참조링크: 삼전도 

서울시 송파구 삼전동에 있었던 나루로 삼밭나루라고도 불렸다. 한강 상류의 남안에 위치하여 서울과 부리도(浮里島, 또는 蠶室島인 현재의 잠실지역)를 연결하는 나루터로서 교통의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한강나루(漢江鎭 한강진) 내용 참조링크: 한강진  -서울지명사전

오늘날의 한남동과 강남구 신사동을 잇는 나루 겸 군영(軍營)이 있었다. (누를진)

 

한강도(漢江渡) 내용 참조링크: 한강도(漢江渡)

한강은 본래 서울의 남산 기슭 지금의 한남동 앞의 강을 일컬었다. 따라서 한강도는 한강나루라는뜻으로 한강진(漢江津)이라고도 하였다. 한강나루는 도성의 정남에 위치했다고 하였으며, 한남동 도선장 부근을 일컬었다.

 

그 강안 맞은편은 사평나루로, 고려 때는 사평도 또는 사리진으로 불렀다. 조선시대는 제일의 나루터로 판교역을 지나 용인,충주로 통하는 대로의 요충지였다.

 

사평나루(沙平渡 사평도)       내용 참조링크: 사평나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용산구 한남동과 연결되었다. 사평도(沙平渡 : 모래펄나루)의 다른 명칭으로 고대에는 사리진도(沙里津渡 : 모래펄나루)라 불렸다. 사평리는 한강진의 맞은편이라 하였고 한강진은 현재의 한남대교(漢南大橋) 서쪽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보아, 한강도는 현재 한남대교 부근으로 추측된다.

 

동작나루(銅雀津)        참조 링크: 동작나루

동작나루는 동작진(銅雀津)’ 또는 동작도(銅雀渡)’라고도 하였다. 중요 간선도로가 지나가는 나루터는 아니었으나 서울에서 과천으로 가는 도로의 길목에 위치하여 많은 사람의 이용이 있었다.

진선(津船)5척 배치되어 있었으며, 이 나루터 부근에는 모노리탄(毛老里灘, 尾老里灘)과 기도(碁島)가 위치하였다.

 

이하 내용은 참조링크: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들-1 에서 가져 왔다.

동작진(銅雀津)은 현재의 동작동 강변에 있었던 도선장 (渡船場)으로 일명 동재기라고도 한다. 도성에서 과천으로 빠지는 길목으로서 본래 노량진 관할이었으나 외방의 과객, 사대부의 왕래가 빈번한 곳인데 약간의 사선(私船)만이 비치되어 있어서 교통이 불편하였다.

 

그리하여이곳의 관리가 문제화 되던 중 영조 4(1728) 이인좌(李麟左)의 난을 계기로 나루의 관리를 철저히 하고자 별장(別將)을 파견하고 이어서 영조 22(1746)에는 노량진의 나룻배 3척을 이관하여 진도(津渡)로서의 체모를 살렸다. 1857년 철종은 이곳에 주교(舟橋 배다리)를 만들고 인릉(仁陵)에 왕래하였다. 근대에 이르기 까지 나룻배가 오갔는데 1917년 한강 인도교가 세워지면서 제구실을 잃었다. 현재 이곳에 1984년 거대한 동작대교가 건설되어 자동차와 전동차까지 운행하게 되었다.

 

개포(開浦)       내용 출처: 개포

강남구 개포동에 있던 마을로서, 마을 앞에 양재천 갯벌이 있어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개펄개패 또는 개포동이라고도 불렀다.

 

반포(盤浦)       내용 출처: 반포 서울지명사전

이 마을로 흐르는 개울이 서리서리 굽이쳐 흐른다고 하여 서릿개라 하고 이를 한자로 표기한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는데, 뒤에 한자 표기가 盤浦(반포)로 바뀌었다.

 

흑석나루(黑石津)       이하 내용은 참조링크: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들-1 에서 가져 왔다.

흑석진(黑石津)은 현재의 동작구 흑석동 강변에 있었던 나루이다. 도성에서 수원이나 과천 방향으로 왕래 하려면 노량진이나 한강도를 이용하여야 하는데 통행량이 많고 기찰(일종의 검문)

심하여 민간인들은 사선(私船)으로 운행되는 배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수참이 폐지되고 또한 인근에 동작진이 개설되면서 기능을 잃어갔다.

* 수참(水站): 조선시대 한강 수계(水系)의 포구에 위치하여 조창의 기능과 목재 등 각종 물품의

                             운송, 사객(使客)의 이동 보조의 역할을 하도록 인원과 선박 등을 배치한 시설.

 

마포나루(麻浦津)       이하 내용은 참조링크: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들-1 에서 가져 왔다.

서울의 마포구 마포동 강변에 있었던 나루로 삼개나루라고도 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도성에서 서남쪽으로 10리 지점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의 여의도를 지나 시흥 방면으로 빠지는 길목이다. 나루가 크지 않아서 본래 관선(官船)은 없었고, 사선(私船) 몇 척이 있어서 행인을 건네주었다.

1894년 한강의 마포(삼개)나루-사진 이사벨라 버드 비숍 촬영

조선 후기에 상업이 발달하면서 선상(船商)들이 한강을 거슬러 이곳에 와서 장사를 하였다. 인천 제물포에서 어물, 젓갈 소금 등을 실고 뱃길을 따라 서울 마포까지 그리고 한강을 따라 상류까지 상인들의 배가 다니며 돌아갈 때는 곡물을 싣고 갔다. .특히 소금과 젓갈을 실은 배들이 모여들어 도성의 소금과 젓갈은 거의 모두 이곳에서 공급되었다. 예로부터 마포나루에는 새우젓을 파는 사람들이 많아 '마포 새우젓 장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나루터에는 창고를 지어놓고 소금, 젓갈, 생선 등을 위탁 판매하거나 중개하는 객주, 여각 등이 생겨났고, 京江商人(경강상인)들의 활발한 상업활동이 있었다. 결빙기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배들로 붐비고 활기를 띠었다.

 

노량진(露梁津) = 노들나루       내용 출처 링크: 노량진

노량진(露梁津)은 노도진(露渡津노량진도(鷺梁津渡노들나루라고도 불리었다. 이 나루는 서울과 과천·시흥을 연결해주는 구실을 하였는데, 조선시대 9대 간선로 중에서 충청도와 전라도 방면으로 향하는 제6·7·8호 간선로의 길목이었다.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였던 나루터여서 사람들의 이용이 많았으며, 도승(渡丞)이 한 사람 배치되어 관리를 맡았다. 나루 남쪽 언덕에는 노량원(鷺梁院)이 위치하여 있었으며, 세금을 거두었다. 관내는 과천의 신촌리(新村里사촌리(沙村里곽계(槨契형제정계(兄弟井契마포강(麻浦江)이었다. 이 나루에 속하였던 진선(津船)10척이었고, 관선(官船)15척이었다.

 

영등포(永登浦)        내용 출처 링크: 영등포 

영등포는 왕성하게 번성하고 있던 이웃의 노량나루(鷺梁津)에 치여 내내 밀렸다. 영등포란 나루터는 지금의 한강성심병원 건너편 여의도 샛강에서 여의도의 사라진 옛 양말산(羊馬山)을 오가며 한강 밤섬(栗島)과 마포를 연결하는 소규모 나루터이었다. <경조오부도 왼쪽 하단에 영등포 여의도 율도(栗島)가 보인다. 英登浦로 표기한 점이 눈이 띤다. 그 아래쪽에는 방학곶(放鶴串) 지명이 보인다. 오늘날 영등포와 관련이 깊은 지명이다.

 

영등포란 명칭의 유래는 음력 2월 초하루를 영등일(靈登日)로 하여 보름까지 여의도 샛강에서 영등굿이 성행하였다. 늘 소원하는 것을 이곳 한강에서 빌면 다 들어주는 명당으로 알려져 '靈登'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 영등(靈登)永登(영등)"으로 변형표기된 것이라고 한다. '영등(永登)'과 물가 마을을 뜻하는 '()'를 합친 영등포가 되었다.

 

지금의 영등포역 주변에 소머리제(牛頭峴)가 있었다. "멀리 동쪽으로 왕성(王城)을 바라볼 수 있어 궁궐을 사모하는 사람이 의례히 이 재에 오른다"라는 말에서 영등포(永登浦)가 연유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양화나루(楊花)        참조 링크: 양화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 시대 삼진(三鎭)의 하나였던 양화진(楊花鎭)이 위치하였던 서울에서 양천(陽川)을 지나 강화로 가는 조선 시대 주요 간선 도로상에 위치하였던 교통의 요지였으며, 삼남 지방에서 한강을 통하여 운송되어 오는 곡식을 저장하던 오강 중의 하나로 농산물의 재분배 기능을 담당하던 중요 지역이었다.

 

또한, 서울의 천연 방어선을 이루는 한강의 중요 지역으로, 진대를 마련하고 진장(鎭將)을 두어 수비하게 하여 군사상 중요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도승(渡丞)이 배치되었으나 뒤에는 별장(別將)으로 바뀌었으며, 호조의 점검청(點檢廳)이 있었다. 나루터의 관할은 어영청에서 하였으며, 양화진에 속한 선박은 모두 10척이었다.

 

양화진(楊花鎭)광흥창(廣興倉)        참조 링크: 광흥창(廣興倉) -두산백과

광흥창은 고려시대에는 충렬왕(忠烈王) 때 설치하였는데, 조선시대에 관리들의 녹봉(祿俸)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1392(태조 1) 호조(戶曹)의 예속기관으로 서울 서교(西郊) 와우산(臥牛山:서울시 마포구 창전동) 아래에 설치하였다. 전국에서 올라온 세곡을 모으는 곳이었는데 한강 양화진에 도착한 세곡선(稅穀船)에서 하역한 쌀을 광흥창에 저장하였다. 그리고 광흥창은 관원들에게 녹봉을 지급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쌀과 옷감을 녹봉으로 지급하였다.

 

잠두봉(蠶頭峰)절두산 성지(切頭山 聖地)        내용 출처: 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

잠두봉, 절두산(折頭山)

잠두봉(蠶頭峰-누에머리 모양의 봉우리)지역은 한강의 동북쪽 강변(옛 당인리 발전소 근처)에 있는 곳으로 사적 제399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한강 가운데에서 경치가 아름답고 정자가 많기로 이름났던 지역이었다. 하지만 천주교도가 박해를 당하고 순교한 곳으로 지금도 순교자 묘지가 남아 있으며, 개화의 선각자였던 김옥균(金玉均)이 처형된 곳이기도 하다.

 

1866년 천주교를 탄압한 병인박해로 병인양요가 발생하여 프랑스 함대가 양화나루까지 진출했다가 퇴각하자, 이에 격분한 흥선대원군의 지시에 의해 잠두봉에서 많은 천주교도들이 참수 당함에 따라 천주교의 순교성지가 되었다.(折頭山 절두산-머리가 잘린 산).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6/6b/Jeoldusan.jpg/408px-Jeoldusan.jpg

 

(현재) 한강 유람선 나루들         출처 링크:https://hangang.seoul.go.kr/archives/249

다음은 한강 유람선의 나루들로 상류에서 하류 순으로 배치하여 각 나루 이름별로 연결 링크를 적었다. 자세한 내용 보려면 지명(나루이름)을 클릭하면 된다.

(상류) 광나루  잠실  뚝섬잠원  이촌  잠원,  이촌  반포  망원,  반포  여의도  난지,  강서  양화 (하류)

 

[요약 퀴즈 

[퀴즈 1] 태조 이성계가 함흥차사후 태종에게 화살을 쐈다는 중랑천 하류의 옛 다리 이름은?

[퀴즈 2]  나루 인근에 몽촌토성·풍납토성 등과 연결되는 아차산성이 있으며, 옛날부터 중요한

                교통로였고 오늘날은 서울부산간 교통로가 이 지역을 지나고 있다.  나루 이름은?

[퀴즈 3] 과천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한강의 나루로 우리말(=노들나루)인 이 나루의 漢字名?

[퀴즈 4] 소금과 젓갈을 실은 배들이 모여들어 도성의 소금과 젓갈은 거의 모두 이곳에서 공급

                 됐다. 결빙기를 제외하고는 京江商人과 배들로 붐비고 활기를 띠었다. 이 나루 이름은?

[퀴즈 5] 서울에서 양천(陽川)을 지나 강화로 가는 조선 시대 교통의 요지였으며, 삼남 지방에서

                 한강을 통하여 운송되어 오는 곡식을 하역하던 나루이다. 이 나루의 이름은?

[퀴즈 6] 양화나루 인근에 있는 이곳은 누에머리를 닮았다하여 잠두봉이라 불린다. 많은 천주

                 교도들이 참수당한 곳으로 천주교의 순교성지가 되었다. 머리가 잘렸다 해서 oo?

 

=== [퀴즈 답] ===

[퀴즈 1] 이성계가 함흥차사후 태종에게 화살을 쐈다는 옛 다리 이름은? .=> 살꽂이다리

[퀴즈 2] 나루 인근에 몽촌토성·풍납토성 등과 연결되는 아차산성이 있으며, 옛날부터 중요한

                교통로(오늘날은 서울부산간 교통로) 지나는 있다. 나루 이름은? .=> 광나루

[퀴즈 3] 과천 가는 길목의 나루로 우리말(=노들나루)인 이 나루의 漢字名? .=> 露梁津(노량진)

[퀴즈 4] 소금과 젓갈을 실은 배들이 모여들어 도성의 소금과 젓갈은 거의 모두 이곳에서 공급

                됐다. 京江商人과 배들로 붐비고 활기를 띠었다. 이 나루 이름은? .=> 마포나루

[퀴즈 5] 서울에서 양천(陽川)-강화로 가는 조선 시대 교통의 요지였으며, 삼남 지방에서 한강을

                통하여 운송되어 오는 곡식을 하역하던 나루이다. 이 나루의 이름은? .=> 양화진

[퀴즈 6] 양화나루 인근에 있는 이곳은 많은 천주 교도들이 참수당한 곳으로 천주교의 순교성지

               가 되었다. 머리가 잘렸다 해서 oo? .=> 절두산(切頭山)

(계속)

서울(한양) 탐구07-청계천에 놓인 22개의 다리와 사연 (scrap)

 

< 참고영상>: 청계천을 살려라-역사채널e -

추후 링크가 끊어지면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 나올 수도 있으며, 아래 동영상 보려면 ▷클릭   

아래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보이면  https://www.youtube.com/embed/TW8zvCusM7o<=요걸 클릭

 

[요약퀴즈]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퀴즈 1] 서울의 하천(河川) 중 서울 도심을 통과하면서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하천의 이름은?

[퀴즈 2] 청계천 다리 중 청계천 수위 측정을 했던 다리 이름은?

[퀴즈 3] 청계천 다리 중  도성 안 중심통로였으며, 주변에 시전(市廛-오늘날의 상가商街)이 위치하고 있어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다리 이름은?

[퀴즈 4] 청계천 물줄기가 도성을 빠져나가는 지점에 다섯 칸의 수문이 홍예(무지개 다리 Arch)로

           건설된 다리이름은?

 

"청계천에 관한 좋은 참고자료 사이트"=> 청계천박물관 홈페이지 www.seoul.go.kr (강추) 

 

청계천(淸溪川)   내용출처: 청계천 -다음백과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북악산ㆍ인왕산의 부근에서 발원하여 시가지 중심부를 서쪽에서 동쪽

으로 통과하여 중랑천으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청계천에는 모두 24개의 다리가 있었는데 광교(廣橋)ㆍ수표교(水標橋)ㆍ관수교ㆍ오간수교(五間水橋) 등이 유명하였다. 그 중 수표교는 수위 측정을 위한 수표석(水標石)과 함께 유명하다. 수표석(水標石)은 1973년 10월에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졌다. 청계천 다리에는 조선 시대 전설과 풍류를 말하는 세시풍속이 있는데 연날리기와 답교(踏橋)는 특히 유명하다.

 

수표교((水標橋)      내용출처: 수표교 -서울시설공단

수표교((水標橋)  

1441년(세종 23)에 다리 옆에 개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서 수표(水標)를 세운 이후부터는 수표교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주변에 있는 마을은 수표동 (水標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수표는 하천수위를 과학적, 계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기구로 측우기와 함께 세종 때 만들어진 대표적인 과학 기기의 하나이다.

 

수표는 청천의 마전교 서쪽과 한강변에 세워졌는데, 처음에는 물 속에 돌을 놓고 그 위에 구멍을 파서 나무로 만든 기둥을 세웠다. 나무기둥에는 눈금을 새겨 수위를 알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나무로 만든 수표는 쉽게 망가져 15세기 성종 때 돌기둥으로 교체하였다.

 

수표교는 광통교와 함께 청계천에 있던 가장 유명한 다리로 다리밟기, 연날리기 등이 행해지던 대표적인 민속놀이 공간이었으며, 사람의 통행이 많았던 만큼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전해진다. 특히 수표교에는 숙종과 장희빈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가 남아있다.

 

광통교(廣通橋)        내용 및 사진 출처: 광통교 -위키백과

광통교(廣通橋)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린동 124번지 부근에 있었던 다리인데, 광통방에 있는 큰 다리였으므로 처음에는 대광통교(大廣通橋)라 하였다. 오늘날은 이 지역을 광교(通橋)로 부른다.

 

광통교는 육조거리-운종가-숭례문으로 이어지는 도성 안 중심통로였으며, 주변에 시전(市廛-오늘날의 상가商街)이 위치하고 있어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다리였다. 정월 대보름이 되면 도성의 많은 남녀가 이 곳에 모여 답교(踏橋)놀이를 하던 곳으로 유명하였다.

 

오간수교(五間水橋)     내용출처: 오간수교 -서울지명사전 사진 출처: 오간수교-위키백과

오간수교(五間水橋)의 옛모습    -출처- 위키백과  

청계천 물줄기가 도성을 빠져나가는 지점, 즉 동대문에서 을지로5가로 가는 성벽 아래 청계천 6가에 있던 조선시대의 수문(水門)이다. 이 다리는 조선시대 한성에 성곽을 쌓으면서 청계천 물이 원활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다섯 칸의 수문이 홍예(虹蜺-무지개 다리 Arch)로 설치되어 오간수다리 · 오간수문 등으로 불렀다홍예 위에 성곽을 쌓아 올렸으며, 아치 모양의 구멍을 서로 연결하여 성벽 안쪽으로 장대석을 연결하여 다리를 놓았다. 

 

(알림) 다음 내용은 아래 원글을 scrap한 후 그림을 확대한 것임.

원글: 청계천에 놓인 22개의 다리와 사연(<=클릭) 2007.12.17 게시글

    (참고: 같은 제목의 게시글 중 이 게시일이 가장 빠른 것임)    

 

 

 

 

 

 

[퀴즈 1] 서울의 하천(河川) 중 서울 도심을 통과하면서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하천의 이름은?

[퀴즈 2] 청계천 다리 중 청계천 수위 측정을 했던 다리 이름은?

[퀴즈 3] 청계천 다리 중  도성 안 중심통로였으며, 주변에 시전(市廛-오늘날의 상가商街)이 위치하고 있어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다리 이름은?

[퀴즈 4] 청계천 물줄기가 도성을 빠져나가는 지점에 다섯 칸의 수문이 홍예(무지개 다리 Arch)로

           건설된 다리이름은?

 

- [퀴즈 답] -

[퀴즈 답1] 서울 도심을 통과하면서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하천의 이름은? .> 청계천

[퀴즈 답2] 청계천 다리 중 청계천 수위 측정을 했던 다리 이름은? .> 수표교

[퀴즈 답3] 청계천 다리 중 도성 안 중심통로였으며, 주변에 시전(市廛=상가商街)이 위치하고

              있어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다리 이름은? .> 광통교(광교)

[퀴즈 답4] 청계천 물줄기가 도성을 빠져나가는 지점에 다섯 칸의 수문이 홍예(무지개 다리 Arch)로 

              건설된 다리이름은? .> 오간수교(五間水橋)

(계속)

 

서울(한양) 탐구06-서울의 산(),하천(河川),()


 

(배경 영상,음악)  남촌 -소프라노 강혜정-

    추후 링크가 끊어지면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 나올 수도 있으며,

    아래 음악이나 동영상 보려면 ▷클릭, 멈추려면 stop □ 버튼 클릭.    

    아래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보이면  https://www.youtube.com/embed/hepBkWQN0ko<=요걸 클릭

 


 

 * 본문 중 밑줄 친 링크는 본문 내용을 가져오거나 참고한 곳으로 필요시 밑줄 친 link를 클릭.

   단, 밑줄 친 링크는 현재는 연결되지만 추후 링크 주소 변경되면 연결이 안 될 수도 있음.

 

대동여지도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중 한양의 (북쪽, 동쪽 일부) 산과 산줄기 모습

그림출처: www.seoul.go.kr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일부)’-철종 12년(1861)

   그림  출처 링크

http://old.koreaa2z.com/digitaldaedong/area.php?kind=3&type=&sub=D00_07&kr=%C1%A6%B1%E2%C7%F6

 

()이나 하천(河川), ()의 이름들은 지명이나 지하철역 이름에 많이 반영되어 있다.

[ 요약 퀴즈 ]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A. 서울의 산()

[퀴즈 A-1] 서울 도심 바로 남쪽에 있어 남산(南山)으로 불리는 이 산의 옛 이름은?

[퀴즈 A-2] 서울 바로 북쪽에 있는 진산(鎭山)으로 삼각산으로도 불리는 산의 이름은?

[퀴즈 A-3] 서울 북동쪽에 있는 명산으로 5개의 암봉(岩峰)이 아름다운 이 산의 이름은?

[퀴즈 A-4] 서울 남쪽 경계에 있는 화강암 산으로 풍수지리상 불()산인 이 산은?

 

B. 서울의 하천(河川)

[퀴즈 B-1] 서울 도심을 통과하면서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하천의 이름은?

[퀴즈 B-2] 서울 정릉천과 서울 북동쪽의 미아동, 수유동, 우이동, 도봉동과 노원구 지역의 

            물도 유입되어 합쳐진다. 사근동에서 청계천과 합류(14개 지류)한 뒤,

            금호동과 성수동의 강변북로 교량 아래에서 한강에 합류되는 하천의 이름은?

[퀴즈 B-3] 경기도 용인시 법화산에서 발원해 성남시를 거쳐 서울 종합운동장 옆 한강에 

            합류하는 하천의 이름은?

[퀴즈 B-4] 경기도 의왕시의 청계산 서남쪽에서 발원하여 군포시를 거쳐 산본천, 호계천과 

            합류하고, 시흥 수암리에서 발원한 목감천과 합류한 후 서울시에 들어와

            도림천과 합류한 뒤 양화동 서쪽 끝에서 한강으로 들어가는 하천의 이름은?

 

C. 서울의 성()

[퀴즈 C-1] 산 정상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성벽을 빙 둘러 마치 머리띠를 두른 것처럼

            성()을 쌓는 방식을 oo식 산성이라 하나?

[퀴즈 C-2] 산의 계곡을 포용하고, 계곡을 둘러싼 산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는 방식을

             oo식 산성이라 하나?

[퀴즈 C-3] 북한산의 산성으로 백제가 132년에 포곡식 석축산성으로 축조했으나 신라,

            고구려의 치열한 쟁탈지가 되었고 신라 진흥왕은 553년 이곳에 순수비를 세웠다

            이후 조선 숙종(1711)대규모로 축성한 이 산성의 이름은?

[퀴즈 C-4] 병자호란때 인조가 이 성에 들어가 47일간 항전하다, 끝내 삼전도(三田渡)

            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게되었다. 이 성의 이름은?

[퀴즈 C-5] 서쪽으로 한강을 끼고 충적대지상에 구축된 평지토성으로 위례성(慰禮城)으로  

            추정되고 있는 이 토성(土城)의 이름은?

[퀴즈 C-6] 한강 남쪽 성내천(城內川)의 언덕에 자리 잡은 토성(土城)으로 서진(西晉)대 

            도기 조각이 나와 축성 시기는 3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된다. 성의 외벽은 경사 

            면을 깎아내어 급경사와 단을 만들고 두 번째 단에는 목책(木柵)을 설치한 이 

            토성(土城)의 이름은?

[퀴즈 C-7]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 한강변에 축조한 성으로 서울시 광진구

             (워커힐 호텔 뒷산에) 있는 이 석성(石城)의 이름은?

[퀴즈 C-8]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산성으로 임진왜란 당시 권율(權慄) 장군의 

            행주대첩에 큰 역할을 한 이 성()의 이름은 무엇인가?

  

A. 서울의 산() 

                      사진 및 내용 출처: 위키백과 (서울의  목록) 서울지명사전에서 가져 왔다.

 

서울의 산() 가나다순-

개운산 - 안암산, 陳石山(진석산)으로 불리며, 성북구 안암동에 있다. 개운사를 품고 있다.

개화산(開化山) - 강서구 개화동에 있는 산으로서, 주룡산, 봉화뚝이라고도 한다.

관악산 - 높이 632m인 관악산은 서울 관악, 경기 시흥, 과천, 안양에 위치하며 벼랑 위에 자리 잡은 연주대가 유명하다.

구룡산 - 높이 283.2m. 서울 서초구에 위치하며 산이 높지 않아 아침저녁으로 운동을 즐기기에 제격인 산이다.

 

굴봉산 - 구로구 오류동 개봉동에 있는 산으로서 굴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145.6m·143m·105m의 세 봉우리가 나란히 솟아 있어 삼각산이라고도 한다.

궁산(宮山) -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에 있는 산이다.

낙산 - 낙산(駱山)은 산모양이 낙타의 등과 같다고 하여 낙타산(일명 타락산)으로 불린다.

       서울시 종로구와 동대문구 성북구에 걸쳐 자리한 산으로 서울 도성의 좌청룡(左靑) 

       동산(東山)에 해당된다. 풍수지리상 서쪽 우백호의 인왕산과 대치된다.

 

남산(옛 이름은 목멱산) - 높이 262m. 서울 중구, 용산구에 위치. 옛 이름은 목멱산이다.

노고산 - 높이 106m인 노고산은 서강대학교 뒤편에 위치하며 밋밋한 구릉성의 산이다.

대모산 - 높이 293m. 서울 강남구에 위치하며 근처 아파트 주민들이 휴식공간으로 자주 찾는 산이다.

 

도봉산 - 서울 북동쪽 경계에 있으며 최고봉인 자운봉(紫雲峰 739.5m)과 만장봉(萬丈峰

          선인봉(仙人峰), 오봉(五峰여성봉 등 5岩峰과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산이다.

매봉재산 -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있으며 서리풀 공원과 이어지는 방배근린공원이 있다.

 

배봉산 - 높이 105.7m인 배봉산은 산전체가 공원으로 전농동과 휘경동에 속해 있다.

백련산 - 높이 215.5m의 백련산은 서울 은평구, 서대문구에 위치한 낮은 산으로 산내에는

          백련사가 있다. 응암동, 구파발, 홍은동 일대 주민들이 자주 찾는 산이다.

봉화산 - 높이 137,9m. 중랑구 신내동과 묵동, 중화동, 상봉동에 둘러싸여 있다.

 

북악산 - 높이 342m. 경복궁의 뒤쪽에 위치하며 산 정상을 따라 동서를 이어주는 길

         (북악스카이웨이)은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로 사랑 받고 있다.

북한산 높이 836.5m. 서울 북쪽 경계에 있으며 백운대, 인수봉, 국망봉(만경대)의 세 봉우리가 있어

          삼각산(三角山)으로 불린다. 세계적으로 드물게 수도 아주 가까이에 있는 명산으로 국립공원이다.

          인수봉은 바위 타는 사람(rock climber)의 성지이다.

불암산 - 높이 508m. 서울 동쪽 경계에 있으며 사찰로는 불암사가 있고 정상부분 전체가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다.

 

삼각산 => 북한산

삼성산 - 높이 480.9m인 삼성산은 서울 관악구, 구로구, 경기 안양시에 위치하며 원효대사가 

          의상, 윤필과 입산수도(入山修道)하였다 해서 삼성산(三聖山)이라 부른다.

성산 - 마포구 성산 제1동에 있는 산으로서, 성메, 성미라고도 한다. 산이 성과 같이 둘러있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수도산 -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산으로서, 봉은사 뒤에 있는 해발 75m의 산이다

수락산 - 높이 638m. 서울 동쪽 경계에 있으며 금류폭포와 내원암이 있는 바위 경치가 뛰어난 산이다.

 

아차산 - 높이 287m. 서울 중랑구와 경기 구리시에 위치하며, 삼국시대의 전략 요충지로

          온달장군의 전설이 전해 온다. 대성암, 석곽분, 봉수대 등이 있다.

안산 - 높이 295.9m인 안산은 무악산(毋岳山)으로 불리며,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하여 서울 시내가

        한 눈에 보이며 봉원사와 봉수대가 있다.

연희산(연희고지) - 서대문구 연희 제1,2동에 있는 높이 88m, 65m, 104m의 고지를 통틀어 일컫는다.

오패산(=벽오산) - 강북구 번동, 미아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 매봉짜, 빡빡산이라고도 한다.

와룡산 - 구로구 궁동에 있는 산으로서, 항굴 앞산으로 소가 누운 형상인 데서 유래된 이름 이다.

         궁동산, 궁동와룡산이라고도 한다.

와우산 - 마포구 서강동에 있는 산으로 홍익대학교 뒷산이다. 소가 누운 모양의 산이다.

 

용마산 - 높이 595.7m. 경기도 광주에 위치하고 있지만 교통이 편리해 찾는 사람이 많다.

용왕산 - 높이 해발 78m로 옛날에는 엄지산(嚴知山)이라고 불렸다. 양천구 목동에 있다.

우면산 - 높이 293m로 서울 서초구, 과천시 경계를 이루며 예술의 전당 뒤편에 있다.

우장산 - 높이 98.9m로 화곡5동 및 화곡6동 및 발산2동에 걸쳐 분포해있는 화곡동의 진산(鎭山)이다.

응봉산 - 응봉산은 성동구 응봉동에 자리한 해발81M의 산이지만 남쪽으로 한강을 내려다 보이고

          봄이면 온통 개나리꽃의 향연을 볼 수 있는 개나리동산이다.

인릉산 높이 327m. 순조의 능인 인릉의 朝山이 되는 데서 유래된 이름으로.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다.

인왕산 - 높이 338.2m의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하는 산으로 바위가 아름답고 정상에서 보는 (서울)도시 풍경이 멋지다

         풍수지리상 서쪽 우백호(右白虎)에 해당한다.

일자산 - 일자산(一字山)은 서울특별시 강동구, 경기도 하남시 경계에 있는 산이다.

    

천마산 - 높이 144.4m인 천마산은 서울 마천동과 하남시 사이에 위치하며 면적은 174,710 이다.

          정상에서 송파구 일대가 한눈에 들어와 전망이 좋다.

청계산 - 높이 618m. 서울 남쪽 경계(서울 서초구, 경기 과천시, 의왕시, 성남시), 정상에서

          과천 서울대공원, 서울랜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경마장이 한눈에 보인다.

청량산 - 높이 480m. 하남시와 광주군 사이에 위치하며, 산 안에 남한산성도립 공원이 위치하고 있다.

 

탑산 - 강서구 가양동에 있는 산으로서, 탑이 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호암산 - 높이 390m로 관악산 전체의 서쪽에 위치한다. 금주산, 금지산이라고도 한다.

         산세가 호랑이 형상을 닮아 일명 호암산(虎巖山)이라고도 한다.

 

화장산 - 동작구에 있는 국립현충원의 주산으로서, 공작봉이라도 한다.

 

B. 서울의 하천(河川)

서울시 안에 있는 하천은 모두 35개이다.

내용 참조 한 곳: <서울의 역사와 문화> 홈페이지 링크주소: http://history.seoul.go.kr

 

서울시 안에 있는 하천은 모두 35개이다. 이 가운데 국가 하천은 한강, 중랑천, 안양천 3개가 있고 지방 1급 하천으로는 청계천이 있다. 나머지 31개의 하천은 모두가 지방 2급 하천이다. 31개의 크고 작은 지방 2급 하천들은 북쪽과 남쪽으로 흘러 한강으로 합류하여 서해 바다로 들어간다.


그러나 서울시에 있는 총 31개의 지방 2급 하천 가운데 하천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하천들이 많다. 이미 완전히 복개가 된 하천으로는 만초천, 면목천, 월곡천, 녹번천, 봉원천, 삼성천이 있으며 홍제촌, 도림천 등은 반복개(半覆蓋) 상태이다.

 

서울의 하천     

 그림참조 링크: https://50plus.or.kr/upload/im/2018/05/c0b0f18c-3ab3-4a60-b99e-603bcad1d0ab.jpg

 

서울에 있는 하천들을 한강을 중심으로 나눠보면..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

(서울)북동쪽에 위치: 도봉천, 방학천, 당현천, 우이천, 대동천, 가오천, 화계천, 월곡천,

(서울)동쪽에 위치: 묵동천, 면목천, 전농천, 중랑천,

(서울)중앙에 위치: 청계천

(서울)정북쪽에 위치: 정릉천, 성북천, 삼청천

(서울)서북쪽에 위치: 홍제천, 봉원천, 만초천, 녹번천, 불광천, 난지천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

(서울)남동쪽에 위치: 고덕천, 성내천, 여의천, 양재천, 세곡천, 탄천

(서울)남쪽에 위치: 반포천, 사당천, 샛강

(서울)남서쪽에 위치: 대방천, 봉천천, 신림천, 도림천, 오류천, 시흥천,

목감천(개화천), 안양천

   

지방1급 하천 : 1개소 (청계천)

지방2급 하천 : 31개소  (갈색은 한강 북쪽에 ,분홍색은 한강 남쪽에 위치)
- 한강 수계 : 홍제천, 봉원천, 반포천, 탄천, 성내천, 고덕천
- 중랑천 수계 : 도봉천, 방학천, 당현천, 우이천, 목동천, 면목천, 전농천
- 안양천 수계 : 개화천(목감천), 도림천, 시흥천
- 청계천 수계 : 성북천, 정릉천
- 홍제천 수계 : 불광천
- 반포천 수계 : 사당천
- 탄천 수계 : 양재천, 세곡천
- 우이천 수계 : 화계천, 가오천, 대동천
- 도림천 수계 : 대방천, 봉천천
- 개화천 수계 : 오류천
- 정릉천 수계 : 월곡천
- 불광천 수계 : 녹번천
- 양재천 수계 : 여의천

 

중랑천(中浪川)  내용출처: 중랑천-서울지명사전

경기도 의정부시 수락산 북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양주군에서는 광사천, 어둔천과 합류되고, 의정부시에서는 부용천, 백석천, 회룡천, 호원천 등의 지류와 합류되어 서울특별시로 유입되어 총 14개 지류를 합류하여 한강으로 유입되는 국가하천이다. 

 

서울 정릉천과 서울 북동쪽의 미아동, 수유동, 우이동, 도봉동과 노원구 지역의 물도 합류되고 사근동에서 청계천과 합류(14개 지류)한 뒤, 금호동과 성수동의 강변북로 교량 아래에서 한강에 합류된다. 서울에서는 성북구, 강북구, 도봉구, 노원구, 중랑구, 동대문구, 성동구 등 7개구를 거치는 동안 각 행정자치구의 자연스런 경계 역할을 한다. 과거 중랑천은 도봉동에서는 서원천(書院川)’, 상계동 부근에서는 한강의 새끼 강이라는 뜻으로 샛강이라고 불렸다.

 

청계천(淸溪川)  내용출처: 청계천-다음백과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북악산인왕산의 부근에서 발원하여 시가지 중심부를 서쪽에서 동쪽

으로 통과하여 중랑천으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청계천에는 모두 24개의 다리가 있었는데 광교(廣橋)수표교(水標橋)관수교오간수교(五間水橋) 등이 유명하였다. 그 중 수표교는 수위 측정을 위한 수표석(水標石)과 함께 유명하다. 수표석(水標石)197310월에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졌다.

 

청계천 다리에는 조선 시대 전설과 풍류를 말하는 세시풍속이 있는데 연날리기와 답교(踏橋)는 특히 유명하다.

 

탄천(炭川)    내용출처: 탄천-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기도 용인시 법화산에서 발원해 성남시와 서울특별시 강남구·송파구를 지나 서울 종합운동장 근처에서 한강으로 유입되는 하천이다. 탄천은 성남시의 옛 지명인 탄리(炭里)에서 비롯되었다. 탄리는 지금의 성남시 태평동·수진동·신흥동 등에 해당하는 곳으로 과거에는 독정이·숯골 등의 마을이 있었다. 조선 경종 때 남이(南怡) 장군의 6대손인 탄수(炭叟) 남영(南永)이 이곳에 살았는데, 그의 호 탄수에서 탄골 또는 숯골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안양천(安陽川)     내용출처: 안양천 -서울지명사전

길이는 35.1이고 서울의 한강지류 가운데 중랑천 다음으로 규모가 크다. 갈천, 앞개울, 대천, 인덕원천(상류), 학고개천(중류), 기탄, 오목내(하류)라고도 한다.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청계산 서남쪽에서 발원하여 왕곡천과 오전천을 합류한 후 군포시를 거쳐, 다시 당정천과 산본천, 호계천을 합류한 후 안양천 지류 가운데 두 번째로 큰 유역면적을 가지고 있는 학의천을 만난다.

 

다시 수리산에서 발원한 수암천과 합류하고, 다시 삼성천을 만나고 시흥시 수암리에서 발원한 목감천을 만나고 서울특별시 경계를 넘어서는 도림천과 합류한 뒤 양화동 서쪽 끝에서 한강으로 들어간다.

 

C. 서울의 성()들    참조할 만한 홈페이지: 한강사업본부www.seoul.go.kr

 

-(알림)- 이하 내용은 해당 참조 링크에서 가져 온 것으로 내용을 편집 가감하였다.

 

산성의 축조 방식

테뫼식(山頂式) 산성: 산 정상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성벽을 빙 둘러 마치 머리띠를  두른 것처럼 성을 쌓은 것.

포곡식(包谷式) 산성: 산의 계곡을 포용하고, 계곡을 둘러싼 산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는 방식의 산성

 

북한산성    참조링크1:북한산성 다음백과 , 북한산성 -사진출처 위키백과

 

-사진출처- 위키백과

북한산성(北漢山城)은 북한산에 쌓은 산성이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산1-1번지에 위치한다.

북한산성(北漢山城)은 북한산성은 백제가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뒤 도성을 지키기 위해 쌓은 포곡식 석축산성으로 132년에 축조했다. 고구려, 신라의 치열한 쟁탈지가 되었고 신라는 553년 이곳에 진흥왕순수비를 세웠다. 이후 고려 현종이 성을 증축했으며 숙종(1711년)때 대규모의 축성 공사를 실시해서 석성을 완성했다.

 

현재 삼국시대 토성은 약간 남아 있을 뿐이고, 대부분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이 남아 있다. 14개의 문, 3개의 장대와 함께 유사시 어가를 북한산성으로 옮길 행궁을 건립하였다. 둘레가 7,620()이다.

 

지형에 따라 성벽 없이 여장(女檣)만 쌓은 곳도 있는데, 그 길이는 1,457보이다. 여장(女檣)이란 성벽 위에 설치한 낮은 담장으로 적을 관측하고 공격하면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 진 것으로 여자도 넘을 수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탕춘대성(蕩春臺城)     내용 및 사진 출처: 홍지문 및 탕춘대성 -위키백과

탕춘대성 암문(暗門) -사진 출처: 위키백과 -

홍지문 및 탕춘대성(弘智門 蕩春臺城)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1976623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

 

탕춘대성은 인왕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북쪽의 능선을 따라 내려가다가 사천을 지나 북한산 서남쪽의 비봉 아래까지 연결하여 축성한 산성이다. 이 산성의 명칭을 탕춘대성이라고 한 것은 현재 세검정이 있는 동쪽 약 100m 되는 산봉우리에 탕춘대(蕩春臺)가 있었던 것에서 연유한 것이며, 한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성(西城)이라고 하였다.

 

조선왕조 숙종은 왕 37(1711)에는 북한산성을 축성하였고 다시 탕춘대성을 축조하였다. 탕춘대성 전체의 길이는 약 4km 이었고 성내에 연무장(鍊武場)으로 탕춘대 터(오늘날 서울세검정초등학교)에 연융대(鍊戎臺)를 설치하는 한편, 비상시를 대비하여 선혜청(宣惠廳) 창고와 군량창고인 상·하 평창(平倉)을 설치하였다. 그 후 탕춘대성의 축성과 함께 그 성안을 총융청(摠戎廳) 기지로 삼고, 군영도 배치하였다.

 

현존하는 탕춘대성은 도성이나 북한산성과 같이 주 성벽과 여장(女墻)을 쌓았으며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일정한 간격으로 성구(城口)를 뚫어 놓았다. 현재 홍지문이 복원되어 있고, 상명대학교 북쪽으로 성곽이 남아있다.

 

남한산성(南漢山城)     내용 출처: 남한산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남한산성 서장대(일명 守禦將臺) 사진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남한산성(南漢山城)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시기에 축조되어 조선시대 수도 한양을 지키던 성곽이다. 흔히 북한산성(北漢山城)과 함께 조선의 도성인 한양의 방어를 위하여 쌓은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성벽의 바깥쪽은 경사가 급한데 비해 안쪽은 경사가 완만하여, 방어에 유리하면서도 적의 접근은 어려운 편이다. 봉암성(蜂巖城), 한봉성(漢峰城), 신남성(新南城) 3개의 외성과 5개의 옹성도 함께 연결되어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성벽과 성 안에는 많은 시설물과 건물이 있었지만, ··남문루와 장대(將臺돈대(墩臺((암문·우물 등의 방어 시설과 관청, 군사훈련 시설 등이 있다.

 

남한산성의 수비는 총융청이 맡아 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다. 여기에는 전····후의 5(五管)이 소속되었는데 전영장(前營將)은 남장대(南將臺), 중영장은 북장대에, 후영장과 좌영장은 동장대에, 우영장은 서장대에 진을 치고 있었다. 지금은 서장대(일명 守禦將臺)만 남아 있다

 

남한산성의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게 인정되어 20146월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신규 등재되었다.

 

'삼전도(三田渡)의 굴욕'      관련 링크: 삼전도의 굴욕 - 나무위키

1637224(인조 15년 음력 130)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일으키고 한양으로 빠르게 남하하자 조선의 왕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 하였다. 하지만 청군이 길을 막아 강화도로 갈 수 없게 되었고 이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한다.

 

그러나 남한산성에 피신하였던 백성들이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힘들어하는 상황과 성내의 물자가 떨어지자 47일간 대항하였지만 끝내 청나라와 치욕스러운 강화(말이 강화조약이지 항복이나 다름없었다)를 맺으니 이를 삼전도의 굴욕이라 한다. 삼전도(三田渡)는 서울시 송파구 삼전동에 있었던 나루로 삼밭나루라고도 불렸다.

 

인조는 세자와 신하들을 이끌고 남한산성 문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의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며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풍납토성(風納土城)     내용출처: 풍납동토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흔히 풍납토성(風納土城)=풍납동토성(風納洞土城)이라고도 하는 데 삼국사기백제본기(百濟本紀)에 나오는 위례성(慰禮城)으로 추정하는 견해이다. 또한, 평고성을 풍납토성으로 보고, 이 성이 서울 광진구 광장동 뒷산에 있는 아차산성(阿且山城)과 연결되어 방어적 기능을 담당했던 성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서북쪽으로 한강에 직면하고 있고, 강 맞은편에는 아차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남쪽으로 성내천을 사이에 두고 2.5km 거리에 몽촌토성이 있으며, 동쪽으로 이성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풍납토성은 서쪽으로 한강을 끼고 충적대지상에 구축한 순수 평지토성으로 약간 동쪽으로 치우친 남북 장타원형을 띠고 있다. , 북벽과 남벽은 짧은 벽으로 직선에 가깝고, 동벽과 서벽은 단벽에서 둔각을 이루며 꺾이는데, 그중 동벽은 중앙부가 완만한 형태를 띠고 있다.

풍납토성은 현재 북벽과 동벽, 남벽 등 일부가 약 2.1정도가 남아 있으며, 유실된 서벽을 포함한다면 전체 길이 3.5에 달하는 거대한 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몽촌토성(夢村土城)     내용출처: 서울몽촌토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풍납토성과 함께 백제가 성립된 시기에 만들어진 도성(都城)이다. 성벽 조사에서 출토된 중국 서진(西晉)대 전문 도기 조각이 나오므로 토성을 축조한 연대의 상한은 3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된다.삼국사기등에 기록된 것처럼, 고구려의 남진에 의해서 한성(漢城)이 함락되고 웅진으로 천도하였던 475년까지 백제의 도성으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판축 성토에 의한 토성 축성은 백제 한 성기를 중심으로 한 백제 토성의 유형과 축성 방법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기준으로 알려져 있다. 몽촌토성은 한강 남안 성내천(城內川)을 끼고 있는 언덕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성의 외벽은 언덕 경사면을 깎아내어 급경사와 단을 만들고 두 번째 단에는 목책(木柵)을 설치하였다. 현재 목책은 본성의 서북벽·동벽과 외성 등 3곳에서 확인되었는데, 생토암반층에 큰 나무를 박아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 보조기둥을 세웠다. 목책의 높이는 2m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이 목책은 발굴 조사된 원래의 목책 기둥 자리를 따라 그 위에 추정 복원한 것이다.

 

몽촌토성의 북쪽 기슭에는 1992년 몽촌역사관이 건립되어 한강 유역을 포함한 백제문화의 대표적인 유적과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암사동·명일동·역삼동의 선사시대 주거지와 가락동·방이동·석촌동의 고분군, 몽촌토성의 유적 모형과 출토 유물을 전시하여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아차산성(阿嵯山城)      내용출처: 아차산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서울특별시 광진구에 있는(워커힐 호텔 뒷산에 있는) 아차산의 경사진 산허리 윗부분을 둘러쌓은 테뫼식(山頂式) 산성으로. 삼국시대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 축조한 성이다.

 

아차산성(阿嵯山城)은 아단성(阿旦城장한성(長漢城광장성(廣壯城) 등으로 불리는데 <광개토왕비문>의 영락 6년조에 광개토왕이 백제로부터 공취한 58성 가운데 아단성의 이름이 보인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이끈 군대가 백제의 한성을 함락시킴에 따라 개로왕이 생포되어 아단성 아래서 처형되었다. 이렇게 아단성은 고구려 군대가 주둔한 군사진지였으며, 그 뒤 77년간 한강 유역을 통치한 고구려의 전방기지로서 기능하였다.

 

또 조선 후기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아차산에는 양진성과 아차산고성이라는 2개의 성곽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양진성은 나루를 방비하기 위한 성곽으로 현존하는 유구나 문헌자료를 통해 볼 때 아차산의 지봉(芝峰)을 따라 광나루 북방에 위치한 광진성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아차산고성은대동여지도에 보이는 망우리 쪽 아차산에 소재하고 있는 성곽을 아차산고성의 유지(遺址 남은 터)로 보고 있다.

 

아차산성은 석축성으로 기본 형태는 테뫼식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산 정상부를 돌아가며 축성한 테뫼식과는 달리 아차산 능선 말단부의 남쪽 지역을 적절히 이용하여 작은 계곡이 포함되도록 함으로써 성 내에 우물과 작은 계곡이 흐르는 포곡형 산성에 가까운 형태이다.

 

한편 장한성의 유구(遺構 남아 있는 구조물)는 본래 뚝도 부근의 한강변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고지를 따라 아차산에 이르고 다시 망우리에 이르는 산줄기를 따라 용마봉에 못 미치는 벼랑바위산에 이르기까지 산마루를 따라 석성 터가 있으며, 구리시 아천동까지 그 유구가 나타난다. 이를 장성 또는 장한성이라 하는 데 신증동국여지승람한성부 고적조에 '장한성이 한강 위에 있는데 신라 때 여기에 중요한 진영을 두었으며 고구려에 의해 점령당하였다가 군사를 동원하여 수복하고, 장한성가(長漢城歌)를 지어 그 공을 기리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성은 산 정상이나 산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토성이나 석성이 아니고 산 정상을 지나 등선을 따라 일직선 형태로 축조된 성벽으로 하남시 춘궁리에 있는 이성산성과 축성양식이 같은 신라시대의 산성으로 특히 삼국통일 전쟁 수행을 위한 북진기지 가운데서도 군사적 요충으로 추정된다.

 

행주산성((幸州山城)     내용출처: 행주산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행주산성은 삼국시대부터 토축(土築) 산성이 있었다. 행주산성이 처음 축성된 것은 통일신라시대(78세기경으로 추정)로 추정하고 있다. 강안(江岸)의 돌출된 산봉우리를 택하여 산 정상부를 에워싼 소규모의 내성(內城)과 북쪽으로 전개된 작은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外城)의 이중구조를 하고 있으며 둘레가 약 1,000m.

 

백제의 초기 영역에는 서해안으로의 수운(水運)과 관계된 중요한 거점이었으며, 특히 나당전쟁(羅唐戰爭) 때까지 남북교통의 요충에 해당하여 고구려와 신라의 공방전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행주(幸州) 산성은 해발 124.8m의 덕양산의 해발 70100m에 이르는 능선을 따라 축조되어 있는 테뫼식(山頂式) 산성으로, 남쪽은 한강이 연하여 있고, 동남쪽으로는 창릉천(昌陵川)이 산성을 돌아 한강으로 흘러들고 있어 자연적인 해자(垓字)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산성의 동남쪽과 남쪽 일대는 자연 경사가 매우 급하여 자연적인 요새로서의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 행주산성에서 조선시대 임진왜란(권율(權慄) 장군의 행주대첩) 당시 부녀자들까지 동원되어 관민(官民)이 일치단결하여 싸웠다. 특히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서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여기에서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 행주대첩으로 인하여 조선군과 명나라 군사가 사기를 회복하여 왜적을 남으로 쫓고 정부가 환도(還都)하게 되었으니 그 의의는 실로 크다 하겠다.

 

호암산성(虎巖山城)   내용출처1: 서울호암산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내용출처2:한강의 어제와 오늘 (서울시사편찬위원회 발간, 2001.10.)수록내용 발췌함

호암산성(虎巖山城)은 금천구 시흥2동 산 93번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리상으로 서울의 남서쪽에 해당된다. 산성의 입지조건으로 볼 때 호암산성은 안양 금천 일대의 평야를 관할하는 요새지로서 서쪽의 해안과 북쪽으로 침입하는 적에 대한 공격과 방비를 위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해발 347m의 조그만 봉우리를 최고봉으로 하는 산 정상의 성 내부는 비교적 평탄지형을 이루고 있다. 유적의 동쪽으로 직선거리 약 2km 지점에 해발 629m의 관악산 정상인 연주대가 위치하고, 동남방 1km 지점에 해발 460m의 삼성산 정상이 위치하고 있다.

 

문무왕 12(672)'한산주에 주장성(晝長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주목된다. 출토된 유물·유적과 지리적 입지조건을 바탕으로 문헌기록과 비교 검토한 결과, 호암산성의 축성 시기는 문무왕 12년경으로 보고 있다. 신라가 당나라와의 전쟁 때 한강을 넘어 수원 지역으로 내려가는 육로와 남양만으로 침입하는 해로를 가장 효과적으로 방어 공격하기 위해 세워진 요새지였다고 하겠다.

 

또한 호암산성 발굴에서 통일신라시대 이외에 고려시대의 유물도 많이 출토되었고, 임진왜란 당시 한성 수복을 위해 행주산성과 연합한 전라병사 선거이(宣居怡) 장군이 인솔하는 조선 군사들이 주둔한 곳이기도 하다.

 

[ 요약 퀴즈 ]

[퀴즈 C-4] 병자호란때 인조가 이 성에 들어가 47일간 항전하다, 끝내 삼전도(三田渡)

            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게되었다. 이 성의 이름은?

[퀴즈 C-5] 서쪽으로 한강을 끼고 충적대지상에 구축된 평지토성으로 위례성(慰禮城)으로  

            추정되고 있는 이 토성(土城)의 이름은?

[퀴즈 C-6] 한강 남쪽 성내천(城內川)의 언덕에 자리 잡은 토성(土城)으로 서진(西晉)대 

            도기 조각이 나와 축성 시기는 3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된다. 성의 외벽은 경사 

            면을 깎아내어 급경사와 단을 만들고 두 번째 단에는 목책(木柵)을 설치한 이 

            토성(土城)의 이름은?

[퀴즈 C-7]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 한강변에 축조한 성으로 서울시 광진구

             (워커힐 호텔 뒷산에) 있는 이 석성(石城)의 이름은?

[퀴즈 C-8]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산성으로 임진왜란 당시 권율(權慄) 장군의 

            행주대첩에 큰 역할을 한 이 성()의 이름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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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 퀴즈 답 ]

A. 서울의 산()

[퀴즈 A-1] 서울 도심 바로 남쪽에 있는 남산(南山)옛 이름은? .=> 목멱산(木覓山)

[퀴즈 A-2] 서울 북쪽에 있는 서울의 진산(鎭山) 불리는 산의 이름은? .=> 북한산

[퀴즈 A-3] 서울 북동쪽에 있는 5개의 암봉(岩峰)이 아름다운 이 산은? .=> 도봉산

[퀴즈 A-4] 서울 남쪽에 있는 화강암 산으로 풍수상 불()산인 이 산은? .=> 관악산

 

B. 서울의 하천(河川)

[퀴즈 B-1] 서울 도심을 통과하면서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하천의 이름은? .=> 청계천

[퀴즈 B-2] 서울 정릉천과 서울 북동쪽 미아동, 수유동, 우이동, 도봉동과 노원구 지역의

            물이 사근동에서 청계천과 합류되어 한강에 합류되는 하천은? .=> 중랑천

[퀴즈 B-3] 용인시, 성남시를 거쳐 종합운동장 옆 한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 탄천

[퀴즈 B-4] 경기도 의왕시, 군포시를 거쳐 산본천, 호계천과 합류하고, 시흥 목감천과

            합류하고 도림천과 합류 후 한강으로 들어가는 하천의 이름은? .=> 안양천

 

C. 서울의 성()

[퀴즈 C-1] 정상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성벽을 빙 둘러 마치 머리띠를 두른 것처럼

            성()을 쌓는 방식을 oo식 산성이라 하나? .=> 테뫼식(山頂式)

[퀴즈 C-2] 산의 계곡을 포용하고, 계곡을 둘러싼 산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는 방식을

            oo식 산성이라 하나? .=> 포곡식(包谷式) 산성

[퀴즈 C-3] 신라 진흥왕이 순수비를 새웠던 산의 이름은? .=> 북한산성

[퀴즈 C-4] 병자호란때 인조가 이 성에 들어가 47일간 항전하다, 끝내 삼전도(三田渡)

              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게되었다. 이 성의 이름은? .=> 남한산성

[퀴즈 C-5] 위례성(慰禮城)으로 추정되고 있는 토성(土城)의 이름은? .=> 풍납토성

[퀴즈 C-6] 한강 남쪽 성내천(城內川)의 언덕에 자리 잡은 토성(土城)으로 서진(西晉) 도기 조각이 나와

            축성 시기는 3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된다. 성의 외벽은 경사면을 깎아내어 급경사와 단을 만들고

            두 번째 단에는 목책(木柵)을 설치한 이 토성(土城)의 이름은? .=> 몽촌토성

[퀴즈 C-7]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 한강변에 축조한 성으로 서울시 광진구 (워커힐 호텔 뒷산에) 있는

            이 석성(石城)의 이름은? .=> 아차산성

[퀴즈 C-8]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산성으로 임진왜란 당시 권율(權慄) 장군의 행주대첩에 큰 역할을 한

            이 성()의 이름은 무엇인가? .=> 행주산성

  (계속)

 

서울(한양) 탐구05-조선시대 한양(서울)지도, 한양도성(성곽)4대문, 4소문



 

(배경 영상,음악)  수제천(壽齊天)-국립국악원-

    추후 링크가 끊어지면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 나올 수도 있으며,

    아래 음악이나 동영상 보려면 ▷클릭, 멈추려면 stop □ 버튼 클릭.    

    아래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보이면  https://www.youtube.com/embed/OANnUZVjfLE<=요걸 클릭

 



 

* 본문 중 밑줄 친 링크는 본문 내용을 가져오거나 참고한 곳으로 필요시 밑줄 친 link를 클릭. , 밑줄 친 링크는 현재는 연결되지만 추후 링크 주소 변경되면 연결이 안 될 수도 있음.

 

<참조한 주요 링크>

1. 조선시대 서울의 옛지도- https://blog.daum.net/sonsang4/13741884

2. 서울 성곽 일주하기(한 바퀴 돌기):

    참조링크2-1: 서울성곽   참조링크2-2 성곽둘레길:서울한양도성

    참조링크2-3: 서울의 성곽 상세 참고자료(PDF): 서울의 성곽 -WebViewer (seoul.go.kr)

3. 사대문(四大門) 참조자료3-1: 사대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자료3-2: [조선시대] 4대문-한국역사해설진흥원

4. 사소문(四小門) 참조한 자료 및 내용 출처: 사소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잠깐 퀴즈! -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주요 산, 도성(성곽)4대문, 4소문에 대한 퀴즈.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 퀴즈-D ]

1.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동서남북의 주요 산 이름(조선시대 불렸던 이름)?

    ①북쪽 산 동쪽 산 남쪽 산 서쪽 산

2. 한양도성의 주요 출입구였던 4대문의 이름은? (, 북쪽은 별로 통행하지 않음)

    ①북쪽 문 동쪽 문 남쪽 문 서쪽 문

3. 한양도성의 (4대문 말고) 소규모 출입구였던 4소문의 이름은?

    ①동북쪽 문 동남쪽 문 남서쪽 문 서북쪽 문

 

(알림)

이하 내용은 위에 소개한 참조 링크 및 본문 내용에 링크된 참고 자료에서 가져온 것이며 항목과 내용 일부는 편집, 가감된 것도 있음.

 

조선시대 한양의 모습이 담긴 지도

「경도오부 북한산성부도(京都五部北漢山城附圖)」-조선 영조 7(1731)년 경,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내용 출처: 조선시대 서울의 옛지도- https://blog.daum.net/sonsang4/13741884

   

경복궁을 비롯한 주요 궁궐, 육조 및 4大門, 4小門 위치, 서울을 둘러싸는 주요 산과 성곽, 외곽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길들이 그려져 있다.  

도성도(都城圖)」(부분) -조선 영조 26(1750)년 경 제작,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도성 안팎의 주요도로는 굵은 붉은 선으로, 간선도로는 가는 붉은 선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북악산과 인왕산 기슭에서 흘러 내려오는 하천들과 다리 명칭들이 표시되어 있다. 석주(石柱)만 남아있는 경회루 등 임진왜란 이후 복구되지 않은 경복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 성곽 일주하기(한 바퀴 돌기): 참조 링크1: 서울성곽   참조 링크2:서울한양도성

                                  참조링크3: 서울의 성곽 상세 참고자료(PDF): 서울의 성곽 -WebViewer (seoul.go.kr)

출처 및 저자: 서울시 간행물-서울특별시사 편찬위원회

 

한양 도성 성곽은 둘레 약 17로 조선왕조가 수도를 방어·수호하기 위해 쌓은 성곽으로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산은 북쪽의 백악산(白嶽山 링크:백악산-오늘날 북악산)을 시작으로 동쪽의 낙산(駱山 링크:낙산-낙타같이 생긴 산), 남쪽의 목멱산(木覓山 링크:목멱산-남산의 옛 이름),, 서쪽의 인왕산(仁王山 링크:인왕산)이 한양(서울) 중앙부를 둘러싸고 있다.

 

한양 도성의 성곽은 이들 4개의 산을 연결한 구간과 숙종 때 축성된 탕춘대성과 북한산성 행궁지 등을 연결한 조선시대 성곽을 말한다. 도심 바깥으로 탕춘대성, 북한산성이 서울을 둘러싸고 있고 홍지문(弘智門)蕩春臺城(탕춘대성)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출처:홍지문 및 탕춘대성

 

한양도성 성곽 둘레길

한양(서울)도성 성곽 둘레길

- 성곽 둘레길 참조 링크모음 

 [한양도성 백악구간] http://rblr.co/0ZVfb     [한양도성 낙산구간http://rblr.co/0ZVfi

 [한양도성 목멱구간] http://rblr.co/0ZXDC    [한양도성 인왕구간] http://rblr.co/0ZXDb

 [탕춘대성http://rblr.co/0ZcfR                [북한산성 행궁지http://rblr.co/0ZgmA

 

사대문(四大門) -요약-

조선시대 (한양) 도성에서 동쪽의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서쪽의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남쪽의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북쪽의 숙청문(肅淸門 1523년 이후 숙정문肅靖門으로 개칭) 등 사대문(四大門)이 있다.

 

서울의 4대문과 보신각에 담긴 뜻은 공자의 가르침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으로,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에 돈의문(敦義門), 남쪽에 숭례문(崇禮門), 북쪽에 홍지문(弘智門)숙정문(肅靖門), 중앙에 보신각(普信閣)이 있다.

 

유교의 오상(五常)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로 어질고, 의롭고, 예의 바르고, 지혜로움, 신뢰를 말한다.

 

사소문(四小門) -요약-

사소문(四小門)은 동북의 홍화문(弘化門, 후에 惠化門, 속칭 동소문), 남서의 소덕문(昭德門, 후에 昭義門, 속칭 서소문), 동남의 광희문(光熙門, 속칭 水口門), 서북의 창의문(彰義門, 속칭 紫霞門)을 통틀어 이르는 명칭이다. 1457(세조 3) 4소문 외에 남소문(南小門)을 개설하였다가 1469(예종 1) 폐문하였다.

 

조선시대 도성 문 내역(요약표)

구분 방위 문 이름 문화
가치
위치 용도 내용
4대문 홍인지문
(동대문)
보물1 종로
669
동쪽 관문 기가 약해 산맥의 뜻 지()를 넣었다고 함
돈의문
(서대문)
  종로구
신문로2
중국과의
관문
일제 때 철거
숭례문
(남대문)
국보1 남대문로
429
한양의
관문
궁궐에 직면한 관악산의 불기운을 막기 위해 현판을 세로로 썼다함
숙정문
(북대문)
사적10 삼청동
2-1
평상시
닫침
문을 열어놓으면 음기가 침범(풍기문란)한다 하여 폐쇄
4소문 동북 혜화문
(동소문)
성북구
동소문동
양주,포천 관문 일제 때 철거 후
1994년 복원
동남 광화문
(수구문)
중구
광희동
시신출구 1975년도 복원
서남 소의문
(서소문)
중구
서소문
  일제 때 철거
서북 창의문
(자하문)
종로구
청운동
북대문
역할
1958년 보수

 

4대문(四大門)

이하 내용과 사진은 참조자료1: 사대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자료2: [조선시대] 4대문-한국역사해설진흥원 에서 가져 왔다.

 

(동쪽)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흥인지문(=동대문) -사진 출처: 문화재청

흥인지문은 태조 때 1397(태조 6)1차 완공되었다. 1451(문종 1)에 중수를 시작하여

1453(단종 1)에 끝냈다. 이 문의 현판은 오행(五行)의 동쪽을 나타내는 인(仁)을 포함하며, 동대문 일대가 서울 도성 안에서 가장 낮은 지역으로 바로 남쪽에 청계천이 흐르고 있으므로, 땅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 1869년(고종 6) 개축하면서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고 ‘之’자를 보강하였다고 한다.

 

흥인문은 주위 지형의 열악한 조건을 보완하고자 옹성을 두른 것이 특징이다. 이 옹성은 문 앞쪽에 반달 모양으로 둥글게 축성되어 옹성 안에 들어온 적을 앞뒤에서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왜적이 가장 먼저 입성하였다.

 

(서쪽)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돈의문(敦義門) -사진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돈의문은 도성의 2차 공사가 끝나면서 다른 성문과 함께 건축되었다. 처음에는 경희궁 서쪽 언덕 지점에 위치하여 서전문(西箭門)이라 불리었다. 그러다가 1422년(세종 4) 2월에 도성을 고쳐 쌓게 되면서 서전문을 헐고 그보다 남쪽 지점에 새로 돈의문을 세웠다. 이후로 돈의문은 통칭 ‘새문[新門]’이라 불리게 되었다. 돈의문은 의주(義州) 국도의 관문으로 황해도와 평안도를 거쳐 중국으로 통하였다.

 

일제에 의해 철거되어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지금의 신문로 큰길과 정동에서 평동으로 통하는 길이 교차하는 마루턱에 위치하였다. 이괄(李适)의 난과 을미사변에 관련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남쪽)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사진 출처 : 한국관광공사

숭례문은 도성의 정문으로 청계천과 만초천(蔓草川)을 가르는 언덕에 세워져 있다. 도성 8문 가운데 가장 웅장하고 규모가 크며 서울의 얼굴 구실을 하였다. 남대문의 건축은 홍예(虹霓 Arch)와 문루 등 그 구조에 특별히 유의하였는데 1396년에 시작하여 1398년(태조 7) 2월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되었다.

 

1448년(세종 30) 숭례문의 지대를 높여 남산과 인왕산의 지맥을 연결시켜 경복궁을 아늑하게 껴안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풍수지리설과 당시의 여론에 따라 다시 건축하였다. 이때의 숭례문이 오늘에 전하는 것인데 1479년(성종 10)에 중수되었다. 한편 1962년 개수 공사 때 세종과 성종 때 개축 또는 중수한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숭례문의 현판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글씨로 전하는데, 다른 도성문과 다르게 횡액(橫額)이 아니라 종액(縱額-세로로 써진 편액)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오행사상에 따른 것으로 ‘예(禮)’자는 오행의 화(火)에 해당하는 글자인 까닭에 불이 타오르는 형상에 따라 세워서 달았다고 한다. 혹은 한양의 조산(朝山)인 한강 건너의 관악산이 오행의 화(火)에 해당되어 그 불기운이 도성을 범접하게 되므로 숭례문의 현판을 세워 맞불로 도성을 보호하고자 했다는 전설이 있다.   

 

(북쪽) 숙정문(肅靖門) 또는 숙청문(肅淸門)

숙정문(肅靖門) -사진 출처 : 두산백과

숙청문은 한양의 주산(主山)인 북악의 동쪽 마루턱에 위치하였으나 그 규모는 대문의 형식을 갖추지 못하고 소문(小門)의 규모였으며 오랫동안 문루마저 갖추지 못하였다. 숙청문의 원래 자리는 지금 자리의 약간 서쪽에 위치하였었다가 1504년(연산군 10)에 옮겨졌다. 숙청문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1413년(태종 13)에 폐문되었는데, 즉 북쪽은 음(陰)에 해당되어 이 문을 열어 놓으면 음기가 번성하여 도성 안의 부녀자들이 놀아나 풍기가 어지러워지기 때문에 문을 꼭꼭 닫아둔다고 하였다.

 

숙청문은 위치상 통행에는 거의 이용되지 않았고, 단지 장마가 지면 비 그치기를 기원하는 영제(禜祭), 즉 기청제(祈晴祭)를 여기에서 거행하였다. 또 예종 때부터는 가뭄이 들면 양기가 많은 남대문을 닫고 음기 서린 북대문을 열어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를 지냈다. 숙청문은 중종 이후 모든 기록에 ‘숙정문(肅靖門)’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현재 새로 복원한 문루에도 ‘肅靖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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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내용과 사진은 참조자료1: 사대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자료2: [조선시대] 4대문-한국역사해설진흥원 에서 가져 왔다

 

(중앙) 보신각(普信閣) 참조 자료: 보신각-위키백과-

보신각(普信閣) -사진 출처 : 위키백과

보신각(普信閣) 또는 종각(鐘閣) 서울시 종로구 관철동 종로사거리에 있는 전통 2 한옥 누각이다보신각종을 걸어 놓기 위해 만든 것으로 정면 5, 측면 4칸의 구조로 되어 있다. 1396(조선 태조 5) 창건했다가, 1869(조선 고종 6), 1979 8월에 재건했다. 보신각 터(普信閣址)라는 명칭으로 1997 1110일에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사소문(四小門)    참조한 자료 및 내용 출처: 사소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북의 홍화문(弘化門, 후에 惠化門, 속칭 동소문), 남서의 소덕문(昭德門, 후에 昭義門, 속칭 서소문), 동남의 광희문(光熙門, 속칭 水口門), 서북의 창의문(彰義門, 속칭 紫霞門)을 통틀어 이르는 명칭이다. 1457(세조 3) 4소문 외에 남소문(南小門)을 개설하였다가 1469(예종 1) 폐문하였다.

 

(동북의) 홍화문(弘化門, 후에 혜화문惠化門, 속칭 동소문)

           참조자료1: 혜화문(惠化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자료2: 화문-위키백과

혜화문(惠化門)-사진 출처 : 위키백과

홍화문((弘化門)은 혜화동에서 삼선동으로 뚫린 길 마루턱에 자리 잡아 도성에서 함경도 등 북방과 직결되는 관문이었다. 1484(성종 15) 창경궁이 완공되어 그 정문을 홍화문이라 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해 1511(중종 6) 혜화문으로 개칭하였다. 혜화문은 도성의 소문 가운데 하나였지만 대문의 구실을 하였다.

 

즉 경원가도(京元街道)가 여기서 연결되어 있었고, 북대문인 숙청문(肅淸門, 후에 肅靖門)이 항상 닫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문을 통행하였다. 그리고 여진(女眞)의 사신이 조공하기 위하여 한양에 입성할 때 이용하던 문이기도 하다.

 

처음 건립하였을 때의 문루는 언젠가 없어지고 1744(영조 20) 어영청(禦營廳)에 명하여 문루를 건축하였다. 이후 일제의 도시계획이라는 명목 아래 문루는 1928년에 헐리고, 홍예와 석문마저 1939년에 사라진 것을 1994년 길 마루턱 북쪽에 복원하였다.

 

(남서의) 소덕문(昭德門, 후에 소의문 昭義門, 속칭 서소문)    참조자료: 소의문 이야기

소의문(昭義門)= 서소문) -사진출처: 소의문 이야기 -Daum 백과

소덕문은 서소문동에서 의주로로 넘어가는 길 마루턱에 위치한다. 1472(성종 3) 예종비 장순왕후(章順王后) 한씨의 시호를 피하여 소의문으로 개칭하였다.

 

이 문은 도성 안 백성들이 죽어서 도성 서쪽으로 운구할 때 이용되는 문이었다. 서소문 밖에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시전의 하나인 칠패시전(七牌市廛)이 있어 발달하던 성업 활동의 중심무대가 되었다.

 

1396(태조 5) 건축 당시에는 다른 성문과 같이 문루가 있었으나 언젠가 없어지고 1743(영조 19) 다시 문루를 건축하였다. 1914년 일제에 의해 철거되어 서소문동이라는 지명만 남아 있다.

 

(동남의) 광희문(光熙門), 속칭 水口門 또는 시구문(屍口門)    참조자료: 광희문

광희문(光熙門= 水口門) -사진 출처 : 한국관광공사

광희문은 1396년 도성 축성 때 건축되었다. 문이름은 광명의 문을 의미하나 개천 수구(水口)에 가까운 곳에 있어 수구문이라 불렀으며, 도성 안 장례 행렬이 동쪽 성 밖으로 나갈 때 통과하는 문이어서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하였다.

 

동대문과 남대문 사이의 중구 광희동에 있어 남소문이라 할 수 있으나 따로 도성에서 한강 나루터로 바로 통하는 문이 필요하게 되어 세조 때 장충단공원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마루턱에 별도의 남소문을 건축하였다.

 

한편 명지대 홍순민 교수는  수구문에 대해서 부근으로 청계천 물길이 나가기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었다고 하는 말이 있으나 이는 억측이다. 청계천 물길은 흥인문이 더 가깝다. 수구문이란 한강으로 출입하는 문이란 뜻이다. 더구나 이 문을 그 부근에 늘 시신이 쌓여  있었다 하여 시구문(屍口門)이라 했다는 것은 일본인들의 악의적 왜곡이다. 참조 링크:  문(門) 이름에 숨은 뜻

 

그러나 남소문 건립 후 의경세자(懿敬世子 : 성종의 아버지, 德宗)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풍수 지리적으로나 실용적으로나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12년 만에 폐문되었다.

 

조선 전기 왜국 사신들은 옥수동의 한강 두모포(豆毛浦)나루를 거쳐 광희문을 통하여 인현동에 있던 지정 숙소인 동평관(東平館)에 머물렀다. 1915년경 문루가 자연 붕괴된 이래 홍예(虹蜺 Arch)만 남아 있었는데, 1975년 서울 성곽을 수축하면서 홍예 석축을 해체하여 남쪽으로 15m 이전 복원하면서 문루 12평도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서북의) 창의문(彰義門, 속칭 紫霞門)

           참조링크1:서울 창의문 자하문(紫霞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링크2:창의문  -위키백과

창의문(彰義門)=자하문(紫霞門) -사진 출처 : 한국관광공사

창의문은 의로움을 표창한다는 뜻으로 자하문(紫霞門)으로도 불렸고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도성을 축조할 때 함께 축조되었는데, 1413(태종 13) 지리도참설에 따라 일시적으로 문이 닫히기도 했다. 그러나 1422(세종 4) 숙청문과 함께 군인의 출입문으로 하였고, 궁궐의 담장 축조나 국가의 큰 공사가 있을 때 일시 열어 통행하였다.

 

1623년에는 인조반정의 반정군(反正軍)이 홍제원(弘濟院)에 집결하였다가 세검정을 거쳐 이 창의문을 열고 도성에 들어와 광해군을 쫓아냄으로써 인조 정권이 창출되었다. 1741(영조 17) 성문과 문루를 개수하면서 인조반정의 반정공신 1등에서 3등까지의 공신 이름을 새긴 현판을 걸었으며, 지금도 전해 오고 있다.

 

창의문은 서울 성곽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완형을 지니고 있으며 지금도 성곽의 일부가 연결되어 있다. 창의문 구조의 특징으로, 문 밖의 지세가 마치 지네의 형상과 같아 그 기세를 제압하고자 지네와 상극인 닭의 모형을 나무로 만들어 추녀에 매달아 놓았다.

 

[ 퀴즈-D ]

1.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동서남북의 주요 산 이름(조선시대 불렸던 이름)?

    ①북쪽 산 동쪽 산 남쪽 산 서쪽 산

2. 한양도성의 주요 출입구였던 4대문의 이름은? (, 북쪽은 별로 통행하지 않음)

    ①북쪽 문 동쪽 문 남쪽 문 서쪽 문

3. 한양도성의 (4대문 말고) 소규모 출입구였던 4소문의 이름은?

    ①동북쪽 문 동남쪽 문 남서쪽 문 서북쪽 문

 

[ 퀴즈-D 정답]

1.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동서남북의 주요 산 이름(조선시대 불렸던 이름)?

   ①북쪽 답.=> 백악산 동쪽 답.=> 낙산 남쪽 답.=> 목멱산 서쪽 답.=> 인왕산

2. 한양도성의 주요 출입구였던 4대문의 이름은? (, 북쪽은 별로 통행하지 않음)

   ①북쪽: 숙정문(肅靖門) 또는 숙청문(肅淸門)  동쪽: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③남쪽: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서쪽: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3. 한양도성의 (4대문 말고) 소규모 출입구였던 4소문의 이름은?

   ①동북쪽: 홍화문(弘化門, 惠化門, 속칭 동소문) 동남쪽:광희문(光熙門, 속칭 水口門)

   ③남서쪽: 소덕문(昭德門, 昭義門, 속칭 서소문) 서북쪽:창의문(彰義門, 속칭 紫霞門)

 

(계속)

서울(한양) 탐구04-왕과 왕족의 호칭, 내시, 궁녀, 묘호(廟號), 왕릉, 왕비릉


 

(배경 영상,음악)  장녹수 -정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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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중 밑줄 친 링크는 본문 내용을 가져오거나 참고한 곳으로 필요시 밑줄 친 link를 클릭. , 밑줄 친 링크는 현재는 연결되지만 추후 링크 주소 변경되면 연결이 안 될 수도 있음.

 

<참조한 주요 링크>

1. 왕비, 후궁의 호칭 참조링크1: 후궁 및 궁녀의 품계

2. 왕의 묘호((廟號참조링크1: 임금님의 이름과 묘호(廟號)

                     참조링크2: [조선왕 호칭/이름] ((() 묘호 차이

3. 조선왕실(선원계보) (heritage.go.kr) -국가문화유산포탈

 

* 잠깐 퀴즈! - 조선 왕과 왕족의 호칭과 묘호((廟號), 왕릉, 왕비릉에 대한 퀴즈.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 퀴즈-C ]

퀴즈1. 왕의 정실부인을 부르는 말은 무엇이며 또한 기거하던 곳을 부르는 호칭은?

퀴즈2. 왕의 정실부인(왕비)의 소생인 아들을 부르는 명칭?  

        왕의 정실부인인 아닌 후궁의 소생인 아들을 부르는 명칭은?

퀴즈3. 왕의 정실부인(왕비)의 소생인 딸을 부르는 명칭? 

        왕의 정실부인인 아닌 후궁의 소생인 딸을 부르는 명칭은?

퀴즈4. 덕혜옹주는 누구의 딸인가?

퀴즈5. 임금의 시중과 궁궐의 잡다한 일을 맡은 (거세자만이) 임명된 관리 명칭은?

퀴즈6. 임금이나 중전, 후궁을 보필하던 궁녀의 총수(우두머리) 상궁의 명칭은?

퀴즈7. 조선의 왕실이 27대 인데 이 중 장자(長子)가 왕위에 오른 분은 몇 분일까?

 

(알림)

이하 내용은 위에 소개한 참조 링크 및 본문 내용에 링크된 참고 자료에서 가져온 것이며 항목과 내용 일부는 편집, 가감된 것도 있음.

 

A.조선왕실 내용 출처 및 참조링크:  조선왕실(선원계보) (heritage.go.kr) 

조선 왕실은 왕과 왕비를 비롯해 왕세자와 왕세자빈, 왕자, 왕녀, 후궁 등이 구성원을 이룬다. 왕은 단 한명의 부인인 왕비를 두었으며, 왕비가 세상을 떠날 경우에는 그의 자리를 이어서 다음 왕비(계비繼妃)를 둔다.

 

왕비(王妃) 참조링크: 왕비-위키백과

왕비는 제후왕의 부인인 비()로서, 궁중에서 대왕대비와 왕대비 다음으로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또는 왕비를 중궁(中宮) 또는 중전(中殿)이라 부르기도 했다. 정실부인은 사별 후 재혼하지 않는 이상 단 한 명, 그 외엔 후궁으로 규정된다. 조선에서 왕비는 국왕의 비()로서 품계는 국왕과 같은 무품이었고, 내명부와 외명부의 수장이었다

 

왕세자, 왕세자빈, 대군(大君), (), 공주(公主), 옹주(翁主), 후궁(後宮)

왕의 아들 중에서 다음 대의 왕위에 오를 아들을 왕세자(王世子)라 하였고 그의 부인을 왕세자빈(王世子嬪)이라 하였다. 왕세자를 제외한 나머지 왕의 아들 중에서 왕비의 소생일 경우(嫡子적자)에는 대군(大君), 후궁의 소생일 경우에는 군()이라 하였다. 왕의 딸인 왕녀 중 왕비의 소생(嫡女적녀)일 경우에는 공주(公主), 후궁의 소생(庶女서녀)일 경우에는 옹주(翁主)라 하였다. : 덕혜옹주(참조:덕혜옹주)-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딸.

 

후궁은 사실상 왕의 부인이 아니고, 1품의 빈()부터 종4품의 숙원(淑媛)까지 품계를 받는 여관(女官)이었으며, 후궁이 되는 법은 간택 후궁이 되는 경우와 궁인 중에서 왕의 승은(承恩-여자가 임금의 사랑을 받아 밤에 동침함)을 입어 후궁이 되는 경우가 있다.

 

1897년에 대한제국으로 전환되며 왕실의 지위가 황실로 격상되어 왕을 황제, 왕비를 황후, 왕세자를 황태자, 왕세자빈을 황태자비, 왕자를 친왕이라 하였다.

 

후궁 품계

왕후(王后), 황후(皇后)는 품을 따지지 않았으며, 후궁들은 정 1~4품까지의 품이었다.

() -1품 귀인(貴人) -1품 소의(昭儀) -2품 숙의(淑儀) -2

소용(昭容) -3품 숙용(淑容) -3품 소원(昭媛) -4품 숙원(淑媛) -4

 

대원군(大院君) 참조링크: 대원군 -내용 출처 다음 백과

대원군(大院君)은 임금의 대를 이을 적자손이 없어 방계 친족이 대통을 이어받을 때, 그 임금의 친아버지에게 주던 벼슬. 즉 방계에서 왕위를 계승한 때에 그 임금의 생부에게 주는 칭호이다.

 

조선시대 전시기에 걸쳐 4명의 대원군이 있었는데, 선조의 아버지 덕흥군을 대원군으로 추존한 것이 처음이었다. 1623년 인조는 아버지 정원군을 대원군에 추존했다가 1632년 다시 원종으로 추존했다.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철종이 왕위에 옹립되었고 그의 아버지 전계군을 대원군에 추존했다.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흥선군 하응의 둘째아들 명복이 왕위에 올라 고종이 되었고 하응은 흥선대원군에 봉해졌다. 3명은 죽은 뒤에 추존되었으나, 흥선대원군만 살아 있을 때 봉해졌다. 고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조대비가 수렴청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흥선대원군이 섭정하여 국사의 모든 결정권을 가졌다. 흥선 대원군은 개항 전후 격변하는 국내외의 상황 속에서 10여 년간 권세를 누렸다.

 

내시[內侍]= 환관(宦官) 참조링크: 내시 환관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환관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궁중 잡역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고려 말기부터 국왕 측근에서 시종하는 문관인 내시(內侍)에 속하는 이들도 생겨남에 따라 그때부터 환관과 내시가 동일시되었다.

 

내시는 왕의 측근으로서 대궐 내에 상주해야 한다는 특수성 때문에 거세자만이 임명될 수 있었다. 본래는 선천적인 거세자로 충원했으나 스스로 거세하고 내시에 임명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이들도 처첩을 거느렸고 양자(養子)를 택해 가계를 이어가도록 했다. 내시의 제도는 갑오개혁을 계기로 폐지되었다.

 

궁녀(宮女) 참조링크: 궁녀

궁녀(宮女)는 왕족을 제외한 궁중 모든 여인들의 총칭을 말하는 데 궁인(宮人궁첩(宮妾내인(內人)으로도 불렸다. 보통 궁녀라 하면 상궁(尙宮)과 나인으로 분류되는 여인들을 의미한다. 궁녀는 왕이 있는 법궁(法宮, 本宮)뿐만이 아니라 제사궁(祭祀宮, 혹은 魂宮)과 별궁에 소속된 여인까지도 포함된다.

 

넓은 의미의 궁녀로 포괄되는 내역은 다음과 같다.

무수리 : 몽고말이며, 궁중 각 처소에서 막일을 담당하는 여인을 말한다.

각심이[婢子, 또는 房子] : 상궁의 처소에서 부리는 가정부·식모·침모 등의 총칭이다. 이들의 월급을 국가에서 지급했으므로 방자라고도 한다. 방자란 관청의 사환으로, 예컨대 춘향전에서의 방자와 같다.

손님 : 왕의 후궁으로서 당호(堂號)가 바쳐지고 독립 세대를 영위하는 여인의 집(후궁 집)에서 살림을 맡아하던 일종의 가정부 같은 여인이다. 대개 친정붙이이며, 보수는 후궁의 생계비에서 지출된다. 따라서 손님이라는 이름은 궁 밖에서 온 사람이라는 의미로, 무수리나 각심이와는 달리 예의를 갖춘 말이다.

의녀 : 약방 기생이라고도 한다. 약방이란 궁중 내의원(內醫院)의 별칭이며, 의녀의 소속은 내의원이지만 전신(前身)이 기생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평상시엔 궁녀들에게 침을 놓아주고 비·빈들의 해산시 조산원(助産員) 노릇을 하였다. 하지만, 궁중의 크고 작은 잔치가 있을 때에는 기생으로 변신하며 원삼(圓衫)을 입고, 머리에는 화관(花冠)을 쓰고, 손에는 색동 한삼(汗衫)을 끼고 춤을 추는 무희(舞姬)였다.

 

그리고 궁녀의 신분적 등급은 견습나인·나인·상궁의 세 종류로 나뉘며, 그 세 종류 가운데에서도 입궁 연조와 소속 부서에 따라 차등이 있었다. 같은 상궁이라도 경력에 따라 정7품도 있고 정5품도 있으며, 또 같은 정5품의 상궁도 소속 부서의 격에 따라 같을 수 없었다.

 

나인 : 궁중에서 왕족의 사생활을 시중하던 여관(女官)의 총칭으로 내인(內人)’의 전음(轉音)이다. 궁녀들은 반드시 자신들을 상궁나인이라 하여 상궁과 나인을 구분하였다. 나인과 상궁은 그들 사회에서는 차원이 다를 만큼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참조링크:나인)

 

또한, 나인 아래에는 견습나인이 있는데, 이들은 아기나인 또는 생각시로 불린다. 보통 4세부터 계례(筓禮) 전인 17세 사이의 어린이 및 소녀 나인들이다.

 

지밀·침방·수방·내소주방·외소주방·생과방·세답방·세수간·퇴선간·복이처·등촉방

지밀(至密침방(針房수방(繡房내소주방(內燒廚房외소주방·생과방(生果房세답방(洗踏房)의 일곱 부서 외에 세수간·퇴선간(退膳間복이처(僕伊處등촉방(燈燭房)의 네 부설 부소가 있다.

 

위 부서에 소속된 궁녀들을 일반 개인 가정으로 비교해보면, 지밀나인은 몸종 격으로 가장 격이 높고, 침방·수방 나인들은 침모(針母), 소주방과 생과방은 찬간(饌間)의 식모들인데, 궁중에는 무수리가 하역(下役)을 맡았다. 세답방은 표모(漂母)로서 빨래 일을 맡는데, 일반 개인 가정에서는 빨래를 보통 노비가 하고, 다리미와 다듬이질은 대개 경험이 많은 부인들이 맡는다.

 

지밀상궁[至密尙宮] 참조: 지밀상궁[至密尙宮]

조선 시대, 대전 좌우에서 임금을 모시며 잠시도 떠나지 않고 시중을 드는 상궁이다.

지밀상궁은 왕의 측근에서 항상 그림자와 같이 시위(侍衛)하여 대령상궁(待令尙宮)이라고도 했다.

 

또한, 지밀상궁 중에서 궁중 의식이나 잔치 때 왕을 비롯한 왕비·왕대비 등의 인도와 진행을 담당했던 시녀상궁(侍女尙宮)은 지밀의 서책 관리와 국상(國喪) 때 곡읍(哭泣)을 담당하기도 했다.

 

따라서 궁녀의 격은 지밀이 높고, 다음이 침방과 수방으로, 이들은 양반 부녀와 같이 치마도 외로 여며 입고 앞치마를 두르지 않고 길게 늘일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 그것은 마루 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의 성격상 소주방이나 세답방 나인같이 치마를 걷어 올릴 필요가 없기도 한 때문이다.

 

위 세 부서 외의 다른 부서는 치마를 바로 입고 앞치마를 위에 둘러 걷어 올린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각시가 있는 곳도 지밀과 침방·수방뿐이다. 나머지 부서들은 생[絲楊]을 맬 수 없으며,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다.

 

제조상궁(提調尙宮)

이러한 궁녀 사회에도 간부들이 있었는데, 총수격인 우두머리 상궁과 그 밖의 맡은 바 직책의 중요성에 따라 특별대우를 받는 궁녀들이 있었다. , 제조상궁(提調尙宮)은 큰방상궁이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많은 궁녀들 중에 어른으로 왕명을 받들고 내전(內殿)의 재산 관리를 담당했다. 또한, 아리꼬[阿里庫]상궁으로 불리는 부제조상궁은 내전의 창고(倉庫, 아랫고·下庫)의 물품을 관리했다.

 

감찰상궁(監察尙宮)

감찰상궁(監察尙宮)은 궁녀들의 상벌을 담당했으며, 감시병 구실도 겸한 두려운 존재였다. 궁궐내의 모든 궁녀들은 입궁에서 퇴출(退出)까지 원칙적으로 종신제였다.

 

그 외 왕자녀의 양육을 담당했던 보모상궁(保姆尙宮)이 있었으며, 이들 중에서 왕세자의 보모가 가장 격이 높았다.

 

궁녀의 선출

왕의 직계 및 그 배우자 외에는 후궁도 궁중에서 죽을 수 없으므로, 늙고 병들면 궁녀는 궁궐을 나가야 했다. 궁녀의 선출은 원칙적으로 10년에 한번이었지만 예외도 있었다. 지밀나인의 경우 조건이 까다로워서 상궁들이 두세 번씩 선을 보러 나갔다. 그러나 대개 연줄과 세습이라 할 수 있으며, 고모가 조카를 들여놓는 경우가 많았다.

 

궁녀의 출신 계급은 지밀과 침방·수방은 중인계급, 기타는 대개 상민계급이었다. 입궁 연령은 지밀이 가장 어려 48, 침방·수방이 613, 그 밖은 1213세가 관례였다. 궁녀는 입궁 후 15년이 되면 계례를 치르고 정식 나인이 되었다. 남색 치마에 옥색 저고리, 머리에는 개구리첩지를 단 제복이 일생 동안 그들의 복장이었다.

 

나인이 된 뒤 다시 15년이 경과되면 상궁으로 승격했으므로, 가장 빠른 45세 입궁을 기준으로 할 경우에 35세 이후라야 상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는데, 왕의 후궁이 되면 20대의 상궁도 있을 수 있었다. 이런 궁녀는 왕의 자녀를 낳기 전까지는 상궁의 신분에 머물러 있지만, 그 대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왕의 곁에서 시위만 하면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를 승은상궁(承恩尙宮)이라 했다.

 

궁녀는 원칙적으로 종신제였지만, 특별한 경우, 즉 이들이 중병이 들었을 때, 가뭄으로 궁녀 방출이 결행될 경우(, 젊은 궁녀), 모시고 있던 상전이 승하했을 경우 중도에 나갈 수도 있었다.

 

B. 왕의 명칭과 묘호(廟號)

조선 시대, 왕의 이름

이하 내용은 참조 링크: 조선 시대, 왕의 이름에서 가져 왔다.

조선 시대, 왕의 이름은 외자였다. 절대 존엄의 존재였던 왕의 이름은 함부로 말할 수도 쓸 수도 없기에 백성들의 말 사용을 배려해 잘 사용하지 않는 한자를 활용해 외자로 이름을 지었다.

 

이름과 관련한 일반 용어들

아명(兒名) : 어릴 때 정식 이름을 짓기 전에 부모가 자식을 부르는 친근한 이름.:막동

초명(初名) : 처음 이름

() : 태어날 때 받은 진짜 이름

() : 성년이 되는 관례 때 받는 이름인 관명과 함께 스스럼없이 부를 수 있도록 짓는 새로운 이름

() : 본명이나 자 이외에 따로 지어 부르는 이름 (별칭, 필명, 별호, 아호)

묘호(廟號) : 왕이 죽은 뒤 종묘에 그 신위를 모실 때 드리는 존호(尊號) 참조: 묘호

 

((() 묘호 참조링크: ((() 묘호

예기, 사기, 경국대전, 조선왕조실록 등에 공이 있는 사람은 '()'라고 하고, 덕이 있는 사람은 '()'을 붙인다고 하는 내용이 있다.

 

a. ()

1. 원칙적으로 나라를 창업한 왕에게만 사용한다. 태조는 1대 임금이므로 후대의 자손이 시조(始祖)로 삼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고려에 조()가 붙은 왕은 태조 왕건뿐이다.

 

2. 공이 있는 왕에게 조()를 붙인다.(나라를 세우거나 그에 버금가는 공을 세운 왕)

선왕의 적자가 아닌 사람이 임금이 되는 경우에 명분과 정통성을 부과하기 위해 붙인 경우가 많았다.

 

b. ()

왕위를 정통으로 계승한 왕들에게 붙이거나, 덕이 있는 왕에게 종()을 붙인다. 혹은

별다른 위기 없이 태평성대를 누린 경우에 붙인다.

 

c. ()

폐위된 왕은 자격을 박탈당하여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왕자시절의 호칭으로 불리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이 아니라, 연산군일기, 광해군일기에 따로 기록된다.

- 연산군: 중종반정으로 폐위

- 광해군: 인조반정으로 폐위

 

조선의 왕에 조()가 붙은 이유

나라를 창업한 왕이나 나라의 정통이 중단되었다가 다시 일으킨 왕에게 '()'를 쓴다. 그래서 조()가 종()에 비해서 격이 높다고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반정이나 찬탈을 통해 왕위에 오른 경우, 이를 정당화하려는 수단의 하나로 이용되면서 후손(아들)'()'에서 '()'로 추숭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외에도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쓰이기도 했다. 참고로, 중종의 경우에도 연산군을 몰아낸 공으로 묘호를 '중조'로 하자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

 

왕의 호칭(묘호)

묘호는 죽은 왕의 위패를 모시는 종묘에 올리는 이름이다. 따라서 왕이 생존해 있을 때는 묘호가 없었고,'주상', '전하', '상감' 등으로 불렸다. 왕의 3년 상을 치른 후, 왕과 고위 관료들이 묘호를 정한다. 왕의 업적을 한글자로 표현하여 신주를 종묘에 모셨다.

 

연산군과 광해군처럼 폐위되어 신주가 종묘에 들어가지 못한 왕들은 죽어서도 왕 대접을 받지 못하고 왕자 신분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종묘에 그 신위가 오르지 못했으며 따라서 묘호 또한 없으므로 단지 그들이 쫓겨난 이후나(연산군) 세자 시절에(광해군) 받은 군호로 불리고 있다. 조선조 2대 임금 정종과 6대 임금 단종은 오랫동안 묘호를 정하지 않고, 몇 백 년 동안 공정왕과 노산군으로 불리다가, 숙종 때 와서 그들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면서 비로소 정종과 단종이라는 묘호를 얻었다.

 

묘호의 예:

· 문종(文宗): 학문에 뛰어난 왕 · 성종(成宗): 제도 정비를 완성시킨 왕

· 세종(世宗): 태평성대를 이룩한 왕 · 인조(仁祖): 어진 왕

· 중종(中宗):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왕 · 태조(太祖): 나라를 세운 왕

· 태종(太宗): 나라의 기틀을 다진 왕 · 효종(孝宗): 효성이 지극한 왕

 

왕의 호칭에는 묘호 외에도 사후에 중국 황제가 지어 보내주는 시호(諡號)라는 것이 있고, 또 신하들이 그 왕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해 지어 올리는 휘호(徽號) 혹은 존호(尊號)라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태조(이성계)의 정식 호칭은 '태조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었는데, '태조'는 묘호, '강헌'은 시호, '지인계운성 문신무'는 휘호(존호)에 해당한다.

 

능호(陵號)

()’ 은임금의 무덤을 지칭하는 호칭하는 데 능은 구릉이란 의미로 구릉처럼 크고 웅장하다는 의미다. : 동구릉,

 

조선왕릉 참조링크1: 조선왕릉 - 나무위키 참조링크2: 조선왕릉 공식 홈페이지

42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태조의 추존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그 왕비들의 능까지 포함하면 총 50. 그러나 일반적으론 42기의 능만을 조선왕릉으로 표현하고 있다.

 

조선왕릉들은 주변의 지명에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잦다. 특히 아예 지명화되어버린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성북구 정릉동), 문정왕후 윤씨의 태릉(태릉선수촌), 세조의 광릉(광릉수목원) 등이 그러하다. 그 외에도 조선왕릉에서 역명을 따온 철도역인 선릉역, 선정릉역, 태릉입구역, 정릉역, 온릉역, 사릉역, 세종대왕릉역 등이나 서오릉 앞을 흐르는 창릉천과 그 일대의 행정동명인 창릉동, 그리고 해당 지역에 조성될 예정인 창릉신도시, 태종의 능침 앞을 지나는 도로인 헌릉로 및 선정릉 앞을 지나가는 도로인 선릉로와 정릉 앞을 지나가는 정릉로, 용인서울고속도로 헌릉IC 등의 지명이 그 예이다.

 

조선 왕 중 장자(長子)가 왕위를 이어 받은 왕은 몇 명이나 될까?

 조선 왕가 가계도 및 내용 참조 링크 : 조선왕실(선원계보) (heritage.go.kr) -

조선의 국왕 중 부왕의 적장자로 왕위에 오른 인물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경종, 순종으로 여덟 왕 뿐이다. 이들 중 숙종은 출생에서부터 왕세자 책봉을 거쳐 즉위에 이르기까지 가장 확고하고 뚜렷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던 왕이었다.

  '조선 왕가 가계도-'

 

  '조선 왕가 가계도2- 18대 현종-26대 고종'
.고종이후-대한황실 가계도

퀴즈1. 왕의 정실부인을 부르는 말은 무엇이며 또한 기거하던 곳을 부르는 호칭은?

퀴즈2. 왕의 정실부인(왕비)의 소생인 아들을 부르는 명칭?  

         왕의 정실부인인 아닌 후궁의 소생인 아들을 부르는 명칭은?

퀴즈3. 왕의 정실부인(왕비)의 소생인 딸을 부르는 명칭? 

         왕의 정실부인인 아닌 후궁의 소생인 딸을 부르는 명칭은?

퀴즈4. 덕혜옹주는 누구의 딸인가?

퀴즈5. 임금의 시중과 궁궐의 잡다한 일을 맡은 (거세자만이) 임명된 관리 명칭은?

퀴즈6. 임금이나 중전, 후궁을 보필하던 궁녀의 총수(우두머리) 상궁의 명칭은?

퀴즈7. 조선의 왕실이 27대 인데 이 중 장자(長子)가 왕위에 오른 분은 몇 분일까?

 

[ 퀴즈-C 정답]

퀴즈1. 왕의 정실부인을 부르는 말은 무엇이며 또한 기거하던 곳을 부르는 호칭은?

         답.=> 왕비(王妃)=중궁(中宮), 중전(中殿). 왕비가 거처하던 궁전=중궁전(中宮殿)

퀴즈2. 왕의 정실부인(왕비)의 소생인 아들을 부르는 명칭? .=> 대군(大君)

         왕의 정실부인인 아닌 후궁의 소생인 아들을 부르는 명칭은? .=> ()

퀴즈3. 왕의 정실부인(왕비)의 소생인 딸을 부르는 명칭? .=> 공주(公主)

         왕의 정실부인인 아닌 후궁의 소생인 딸을 부르는 명칭은? .=> 옹주(翁主)

퀴즈4. 덕혜옹주는 누구의 딸인가? .=> 고종

퀴즈5. 임금의 시중과 궁궐의 잡다한 일을 맡은 거세자만이 임명된 관리 명칭은?

         답.=> 내시[內侍]= 환관(宦官) 참조링크: 내시  환관

퀴즈6. 임금이나 중전, 후궁을 보필하던 궁녀의 총수(우두머리) 상궁의 명칭은?

         답.=> 제조상궁(提調尙宮). 큰방상궁이라고도 했음.

퀴즈7. 조선 왕실이 27대 인데 이 중 장자(長子)가 왕위에 오른 분은 몇 분일까? .=> 8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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