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닥크의 불교문화 (참조 위키백과: 티베트 불교)

 

 

(배경 영상,음악)  ♬인도요가 사바사나 만트라 명상 힐링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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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교’라고도 불리는 티베트 불교는 티베트, 네팔, 부탄을 포함한 히말라야 지역과 몽골 등지에서 믿는 대승불교 종파이다. 티베트 불교의 4대 종파의 이름은 겔룩파(དགེ་ལུགས་), 사캬파(ས་སྐྱ), 까규파(བཀའ་བརྒྱུད།), 닝마파(རྙིང་མ)이다. 4대 종파 중 가장 그 역사가 오래된 종파는 바로 닝마파로 구파(nyingma)이며 나머지 3개의 종파들은 모두 신파(sarma)라고 한다. 이는 크게 경전의 번역 시기에 따라 구분한 것이다

 

각 종파들은 각각 다른 명상법과 경전 해석본들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 다른 최고 종교 지도자를 내세우고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종교 지도자는 겔룩파의 수장인 달라이 라마이다. 달라이 라마가 속한 최대 종파인 겔룩파는 티베트 불교의 중흥조로 일컬어지는 쫑카빠가 확립한 종파로, 현교 수행론인 보리도차제론과 밀교 수행론인 밀종도차제론을 따른다.

 

스투파(stūpa) = 탑파(塔婆) 혹은 ()

       내용 참조1: 스투파stūpa, 참조2: (寺刹 사찰)구경하기 2 - , 부도, 석등

탑파(塔婆)’ 혹은 ()’이라는 말은 팔리어의 투파thūpa’에서 유래되었는데, 부처님(불타)의 사리를 봉안한 기념비적인 건조물을 가리킨다. 자이나교에서도 성현의 유골을 안치한 건축물을 스투파라고 부르지만 원래 베다 문학에서 스투파는 정상, 꼭대기를 뜻하는 말이었다.

 

스투파는 인도뿐 아니라 아시아의 불교 문화권에서도 널리 숭배되었는데 각 나라마다 건조물의 형태가 조금씩 서로 다르다. 스리랑카의 다가바(dāgaba), 타이의 체디(chedi), 미얀마의 제디(zedi), 파고다(pagoda)도 모두 스투파를 의미하는 말이다.

 

인도의 스투파는 정확한 비례 체계에 따라 설계되었는데, 이는 스투파가 우주의 구조를 상징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스투파의 기단(메디medhī)은 원형 또는 방형(方形 4각형)이며 그 위에 안다라는 반구형(半球形) 돔 형태로 되어 있으며 벽돌이나 돌로 만들어졌다. 안다의 내부에는 불타의 유골을 모신 관이나 방을 만든다. 돔의 정상부에는 발코니 모양의 하르미카가 있고 그 위에 야슈티라는 기둥이 솟아 있다. 그리고 야슈티는 여러 단으로 된 차트라를 받치고 있다. 안다(覆鉢 복발)를 중심으로 세속 세계와 성역을 구분하는 의미의 원형 울타리(난순, 베디카)가 둘러져 있고 네 방위에는 각각 문(토라나)이 세워져 있다. 이 문을 들어서면 스와스티카() 형태의 요도(繞道)를 따라 스투파 주위를 돌며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울타리와 문에는 불타의 전생이나 일생을 묘사한 부조 장식이 남아 있다. 시대가 내려오면 기단의 형태가 십자형이나 별모양으로 바뀐다.

 


티베트 불교 상징물 라다크의 스투파(불탑)

바위에 새겨진 진언: 옴마니 반 메홈

 

만다라(Mantra 만트라, 진언(眞言)-'옴마니반메훔' 내용참조:만트라(진언), 옴 마니 반메 훔 - 나무위키

티베트 불교 지역에서는 진언(만트라)을 흔히 볼 수 있다. 만다라(Mantra 만트라,티베트어: སྔགས་ ngak, 와일리 표기: sngags) 또는 만트람(Mantram)라고 불리는 진언(眞言: 참된 말, 진리의 말)"영적 또는 물리적 변형을 일으킬 수 있다"고 여겨지고 있는 발음, 음절, 낱말 또는 구절이다. 밀주(密呪) 또는 다라니(陀羅尼)라고도 한다.

 

만트라의 용도와 종류는 해당 만트라를 사용하는 종교 및 철학 학파에 따라 서로 다르다. 진언 중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으뜸되는 것이 '옴마니반메훔'이다.(참조: 마니 반메 훔의 뜻) 사전에는 '옴 마니 반메 훔'이 아닌 ‘옴 마니 밧메 훔’이라고 되어 있다. 옴마니반메훔은 oṃmaṇi padme hūṃ을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이다. 옴(唵)은 a · u · m의 합성어이고, 각각 만물의 발생 · 유지 · 소멸을 상징한다.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뜻하는 주문으로, 이것을 지극정성으로 읊으면 관세음보살의 자비에 의해 번뇌와 죄악이 소멸되고, 온갖 지혜와 공덕을 갖추게 된다고 한다.

 

이 진언의 정식 제목은 관세음보살 본심미묘 육자대명왕진언(觀世音菩薩 本心微妙 六字大明王眞言)이다. 너무 길어서 보통 '육자진언'이나 '관세음보살 육자진언', 6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이라고도 한다.

 

팔길상(八吉祥 여덟가지 상서로운 문양) 내용참조: 팔길상-대원사 박물관

< 티베트 불교의 팔길상(八吉祥) Tashi Tag-gye >

팔길상(八吉祥) 상서로운 여덟가지 문양의 뜻으로,
Tashi Tag-gye(Tashi-상서로움.Tag-모양. Gye-여덟)을 라다크에서
볼 수 있었다
.

(내용 및 사진참조: 팔길상-대원사 박물관 홈페이지)
 
이 홈페이지의 팔길상 사진과 라다크에서 본인이 찍은 사진과는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림 내용은 같았다
.

하지만, 여기에 본인 사진은 따로 첨부하지 않았다.

 
다음 내용은 대원사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옮긴 것으로
우측 사진은
8가지 문양을 합쳐 놓은 팔길상 만다라이다.

 

 





1.법라(소라고동으로 만든 피리)
소라고동의 아름다운 소리는 불법의 가르침이 멀리 퍼져감을 나타낸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리석음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 자신의 아름다움에 눈뜨게 한다.
2.일산(보물 양산)
따가운 햇살을 가려주는 일산은 사람들이 삶에서 겪게되는 질병과 장애를 막아주는 것을 나타낸다.
, 앞으로 겪을지 모를 지옥,아귀,축생의 삼악도의 고통에서 지켜줌을 상징하는 장엄이다.
3.산개(승리의 깃발)
몸과 입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허물을 밝게 살펴서 이겨낸 것을 나타낸다.

, 승리의 깃발을 불법의 공덕이 모든 악령들을 물리친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4.금어(금빛물고기 2마리)

물고기는 물을 무서워하지 않고 마음대로 헤엄치며 노닐듯이 모든 중생들이 괴로움의 바다에서 벗어나 용기있게 실천하는 것을 상징한다.

 



5.보병(보물이 가득한 항아리)

값비싼 보석이 가득담긴 항아리처럼 본래 부족함이 하나없는 자성의 공덕을 깨달아 세상과 저세상의 이익과 자유를 얻는 것을 상징한다;
 
6.연화(더러움에서 물들지 않는 연꽃)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연꽃의 아름다움처럼 번뇌와 죄악으로 가득한 인간의 마음도 그 본질이 깨끗하여 한 송이 연꽃으로 피어나서 축복받는 삶에 이르는 것을 상징한다.
7.문양(끝없이 이어지는 인연의 고리)
우주끝까지 연결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인연의 고리는 수행의 길을 가면서는 본래 비어있음(공생)과 인연법이 떨어질 수 없음을 나타내고 깨달음에 이르러서는 지혜와 자비가 온전히 하나가 됨을 나타낸다.
8.법륜(항상 굴러가는 진리의 바퀴)
진리의 수레바퀴는 부처님이 깨달으신 내용이 모든 중생의 마음속에 전해져서 진리의 기쁨과 올바른 행위 속에서 모두가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것을 상징한다.

 

마니차(摩尼車 참조링크: 마니차)

마니차(摩尼車)는 티베트 불교에서 사용되는 불교 도구로 원통형으로 되어 있으며 측면에는 만트라가 새겨져 있다. 마니차의 크기는 다양하며 손에 쥘 수 있는 크기부터 큰 것은 몇 미터에 달하며 사원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티베트 지역의 사람들은 불교 경전을 넣어 놓은 마니차를 한 바퀴 돌릴 때마다 죄업이 하나씩 사라진다고 믿는다.

 


마니차

Liker 곰파의 법륜 장식

 

법륜(法輪) 내용 및 그림 참조:위키백과-Dharmachakra

수레바퀴 모양의 법륜(法輪)은 부처님의 설법이 한사람이나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윤전하여 사람에게 전해지는 것이 바퀴가 구르는 것과 같아 법륜이라 하는 데 인도에서는 왕의 상징으로 사용한다.


타르쵸(Tarcho)와 룽따(rlung rta) 내용 참조 링크: 타르쵸와 룽따

바람의 깃발로 불리는 타르초(Tarcho)는 라마불교 경전이 인쇄된 ‘기도(祈禱) 깃발’이다. 타르초는 티베트어로 깃발을 의미하는 ‘다르(dar)’와 첨탑을 의미하는 ‘쪽(lcog)’을 결합한 단어 ‘다르쪽(dar lcog)’의 변음이다. 타르초는 원래 아시아 샤머니즘의 공통된 깃발 장식이었는데, 티베트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깃발에 경문을 인쇄하여 사찰을 장엄(장식)하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타르초에 인쇄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널리 퍼질 것이라는 소망을 담은 불교적 깃발로 재탄생한 것이다.타르쵸의 색깔은 우주의 5원소 청(파랑색)-하늘, 황(노랑색)-땅, 적(붉은색)-해, 백(흰색)-구름, 녹색(푸른색)-물,바다이다.

 

타르초에는 간혹 ‘날개 달린 말의 형상’인 ‘룽따(rlung rta 風馬)’가 경문과 함께 인쇄되어 있기도 하다. 룽따는 티베트어로 바람(風)을 의미하는 ‘룽(rlung)’과 말(馬)을 의미하는 ‘따(rta)’가 결합한 단어로 ‘바람의 말’이라고 번역된다. 펄럭이는 타르초와 어울리는 의미다. (내용참조.바람의 말룽따)

 

티베트 의학은 사람의 어묵동정(語默動靜)과 오감(五感)을 비롯한 모든 생명 현상은 바람의 작용이라고 여긴다. 사람의 넋은 염통 근처에 있는 차크라에 머물면서 열 가지 기본 바람의 도움으로 목숨을 이끌어가며, 넋은 다리가 없이 눈만 있고, 바람은 눈이 없고 다리만 있다고 비유한다. 

 


바람의 깃발 ‘타르쵸’

공명에 의해 물이 튀는 명상주발 singing ball

 

명상(瞑想) 주발 싱잉볼(singing ball) (내용참조 링크: 싱잉볼-붓다볼)

티베트 불교에서 사용하던 도구로, 표면을 문지르거나 두들겨 울림 파장을 만드는 종의 일종이다. 소리를 이용한 치유 도구로 티베트, 네팔, 북인도에서 오랜 전통으로 전해져왔다. 독특한 소리와 울림으로 고유의 하모니를 만들고 이를 느끼며 명상에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싱잉볼 연주(명상음악) 감상하려면  요걸 클릭=> https://www.youtube.com/watch?v=2N4eTTipm9I

 

곰파(Gompa) 참조 Wikipedia 링크: Gompa


산 위에 곰파를 짓는 라다크의 대표 곰파 틱세곰파 
달라이 라마를 알현하려는 전통 복장의 라다크인들

 

곰파(Gompa)는 티베트 불교 사원으로 티베트, 인도 북부, 네팔, 부탄 지역에서 볼 수 있다. 라다크 지방의 곰파는 대부분 (바위)산 위에 우뚝 솟아 있다. 레 근교의 티베트 불교 사원인 스피툭 곰파(Spituk Gompa), 틱셰 곰파(Tikse Gompa), 쉐이 곰파(Shey Gompa) 등이 유명하다.

 

라다크 곰파에서 본 사천왕 벽화 (사천왕 관련 참조링크: (寺刹 사찰) 구경하기1)


라마유르 곰파 사천왕 벽화1-탑을 지닌 ‘다문천왕’과
용을 잡고 있는 ‘광목천왕’

라마유르 곰파 사천왕2-‘검(칼)’을 쥐고 있는‘증장천왕’과 비파를 들고있는 ‘지국천왕’

틱세곰파의 사천왕 벽화1-‘탑’/ ‘용’을 쥐고 있다.

틱세곰파의 사천왕 벽화2-‘검(칼)/’비파‘를 들고 있다.

liker 수도원의 사천왕 벽화1’-‘’ / ‘을 쥐고 있다.

liker 곰파 ‘사천왕 벽화2’-‘검(칼)/ 비파‘를 들고 있다.

헤미스 곰파의 사천왕 벽화1- 정면-'탑(스투파)'/ 측면-'용'을 쥐고 있다.


헤미스 곰파의 사천왕 벽화2-1 검을 들고 있다.

헤미스 곰파의 사천왕 벽화2-2 비파를 쥐고 있다.

 

한국 사찰에서 익히 보았던 사천왕상을 한국과 수만리 떨어진 이 곳 라다크 곰파에서도 볼 수 있어서 깜짝 놀랐다.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 지 알 수는 없었지만, 한국의 불교 전래는 인도-중국-한국이므로 불교의 전파 경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혜초 &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lsquo;왕오천축국전&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rsquo;-경로

                                                 그림출처 링크: 혜초 왕오천축국전’-경로

 

라다크와 카슈미르 지역은 혜초가 거쳐 간 지역이다. 신라 성덕왕 때의 승려 혜초가 해로(海路)로 중국을 거쳐 인도에 건너가 각지를 순례하고 육로(陸路)로 중앙아시아를 거쳐 727년에 당나라로 돌아와 왕오천축국전을 썼다.

 

아그라와 델리에서의 여행 일정

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아그라에서 타지마할과 아그라 성을 보았다. 타지마할은 인도를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유적지 중 하나이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리석 건물로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이하 아그라관련 내용은 여행사 안내문에서 발췌)

무굴 제국의 5대 황제였던 "사 자한(Shah Jagan)황제가 아내였던 뭄타즈 마할에 대한 변치 않는 마음을 간직하고자 역사상 유례없는 화려한 무덤을 건설했다. 무려 22년 동안 타지마할을 지었는데 요즘 돈으로 720억 원의 비용과 연간 20만 명의 인원 그리고 천 여 마리의 코끼리가 동원되어 1653년에 완성되었다.


2011.02 찍은 타지마할-완벽한 좌우 대칭의 아름다움

화려하고 아름다움을 뽐내는 아그라 성
아그라 성 내부-아름다운 기하학적 무늬

타지마할의 모델인 후마윤 무덤

1565년 악바르 대제에 의해 건설된 아그라 성은 무굴제국의 권력을 상징하는 곳으로 엄청난 크기를 자랑한다. 아마르싱  문을 통해 궁전 내부에 입장하면 사암으로 만들어진 궁전이 있고 정원수와 초록잔디가 인상적이다. 특히 디완이카스는 귀빈 접견실로 아그라를 흐르는 야무나 강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 보여 매우 인상적이다. 아그라성에서 보이는 타지마할은 마치 강의 수면 위로 떠있는 듯하다.

 

델리로 이동하여 타지마할의 모델이 된 후마윤 무덤(참조:후마윤 무덤-Humayun's tomb)을 보았다. 후마윤의 무덤은 페르시아 양식을 따라 정원 안에 무덤을 만든 인도 최초의 정원식 무덤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명소다.

 

사족:  타지마할은 수시로 비계를 세우고 보수 또는 대리석 세척작업을 하므로 건물에 군더더기 없는 깨끗한 모습을 보려면 최근 다녀온 분들의 여행기나 사진을 참고하여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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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도 속의 작은 티베트 라다크

여행시기 2016.08월< span>. 여행사 패키지 여행.

   

(참조 영상)  자연과 함께 사는 사람들 라다크 -E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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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다크에 대하여  내용 참조: 다음백과 라다크 , 위키백과 라다크

인도의 북쪽 끝엔 인도 속의 작은 티베트라다크가 있다. 9백 년 동안 독립된 왕국으로 살아온 역사와 전통 라마교 문화를 가진 이곳은 행정구역상 인도일 뿐, 이곳은 '인도 라다크'가 아닌 그냥 '라다크'다.

 

라다크는 인도 북쪽 끝에 있다.

라다크와 카슈미르 지역: 붉게 표시된 곳이 라다크- 지도 출처: 위키백과.

 

북쪽에 쿤룬 산맥, 남쪽은 히말라야 산맥이 위치하고 있으며 길기트발티스탄과 아크사이친, 시아첸 빙하, 샤크스감 계곡, 캬슈미르와 이웃하고 있다. 라다크는 연평균강우량이 84밖에 되지 않으며, 3000M 이상의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 높은 고원지대인 탓에  (고원) 건조기후지역이다.

 

·보리·수수·메밀· 같은 농작물을 재배하모직물이 유일한 제조업 제품이며, 아리아인과 티베트인들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라다크의 중심 도시' 레'는 수세기 동안 카스가르와 티베트, 카슈미르를 이어주는 남부 실크 로드의 중간 지점으로 발달해 왔다. 하지만 영국 식민지 시대부터 줄어든 교역량은 1962년 인도와 중국의 국경 분쟁으로 국경이 폐쇄되면서 완전히 중단되었고, 라다크와 중심 도시 ‘레’는 외부와의 교류가 끊어진 채 지도 위에서 사라지게 되었다.(내용출처:엔조이 인도 링크:)

 

그러나 라다크의 전통 사회가 서구 미디어를 통해 알려지면서 1974년 외국인에게 개방되었고, 레와 라다크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주요 관광지로는 레 왕궁, , 라마유르, 알치 등에 있는 불교 사원인 곰파와 판공초 호수 등이다.

 

라다크(티베트어: ལ་དྭགས་, Ladakh, 힌디어: लद्दाख़, 우르두어: لدّاخ)는 인도령 카슈미르의 지역으로 전에는 잠무 카슈미르주의 지방이었으나, 2019년 10월 31일을 기해 독립된 연방 직할지로 되었다. 1949년 맺은 휴전협정으로 라다크 대부분은 인도에 속하고, 라다크 북쪽 일부는 파키스탄에 속하게 되었지만 아직도 인도와 파키스탄과의 분쟁지역이다. 또한 인도가 지배하던 라다크 북동지역을 중국 군대가 점령하면서 중국과도 분쟁이 발생되고 있다.(내용참조: 위키백과 라다크)

 

라다크의 여행 가능 시기

인도의 7-8월은 미친 듯이 뜨겁고 평균 기온이 40도 정도이다. 하지만 인도 북쪽 끝 잠무카슈미르 지방의 '레'는 7-8월에도 서늘하다. 라다크는 얼어붙은 육로가 열리는 여름 서너 달만 일반 여행자들에게 자유로운 여행이 허락되는 곳이다. 여행하고 싶어도 아무때나 여행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여행하기 좋은 시기는 라다크로 가는 도로가 녹는 시기인 7월 초~9월 말이 최적기이다. 장엄하고 아름다운 히말라야 설산부터 사막에서 즐기는 낙타사파리를 경험할 수 있으며, 척박한 환경에서 그들만의 방법으로 살아가는 순박한 사람과 티베트 문화를 만날 수 있다. 이곳은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책:오래된 미래(참조 링크: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우다)를 통해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다.

라다크 마을의 여름 모습으로 산 언덕 위에 곰파(불교 사원)가 있다.

라다크의 주요 관광지 (Leh 홈페이지: https://leh.nic.in)

*티베트의 포탈라궁의 모델이 된 17세기에 지어진 [레 왕궁]

*유채꽃밭과 설산이 어우러진 전원마을 [알치/알치곰파]

*매년 여름마다 벌어지는 가면축제가 유명한 [해미스/헤미스 곰파]

*라다크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곰파로 꼽히는 [틱세 곰파]

*달나라로 불리는 특이한 지형의 [라마유르]

*하늘 호수(판공초) & 판공초 메락 마을

 

델리 공항 입국 수속 안내

201608월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델리로 출발한 인도항공(Air India) 비행기는 홍콩을 경유하여 델리 도착에 도착 하였다.

*델리 공항 입국 수속 안내

1. 비행기에서 내린 후 EXIT/IMMIGRATION을 따라 가다보면 에스컬레이터가 보인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와

    E-TOURIST VISA 라고 쓰인 안내판 맨 왼쪽에 파란색 불빛이 있는 데스크에서 줄을 서 대기한다

    (여권과 입국 신고서 / 티켓과 전자비자 승인서 준비)
2. 준비한 서류를 직원께 제출 후 양손 지문인식 진행한다.

    지문인식순서:왼손 네 손가락(엄지제외)->오른손 네 손가락(엄지제외)->양손 엄지 3단계로 진행.

3. E-TOURIST VISA 스탬프 찍힌 여권을 돌려받은 후 BAGGAGE CLAIM으로 가서 짐을 찾은 후 공항을 빠져 나온다.

 

라다크 지방(참고: 중심도시 해발 3,250m)은 지대가 높으므로 고도 적응을 위해 하루 정도의 현지 적응 시간을 가지고 다음 날부터 라다크 투어가 시작되었다.

 

레 왕궁 (내용 출처: 엔조이 인도:  왕궁)

레 왕궁은 라다크 왕국의 전성기인 17세기(1630) 셍게 남걀(Sengge Namgyal) 왕에 의해 세워졌고, 남걀왕조 왕족들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19세기 카슈미르와의 전쟁에서 패한 남걀 왕조가 스톡(Stok)지방으로 추방되면서 폐가처럼 방치되던 왕궁은 1974년 외국인에게 라다크 지방이 개방되면서 박물관으로 재단장했다.

 

포탈라궁의 원조로 불리는 레 왕궁
샨티 스투파(‘스투파불탑이라는 뜻)

 

샨티 스투파(내용 출처: 엔조이 인도: 샨티 스투파)

일본 불교 종파인 일련정종(日蓮正宗)의 사원으로 198514대 달라이 라마가 개원식을 거행했다. 일련정종은 세계 평화를 기원하며 세계 곳곳에 20여 개의 탑을 세웠는데, 병풍처럼 펼쳐진 설산을 배경으로 한 의 샨티 스투파는 그 중에서 유독 아름답다는 평을 받고 있다.

 

알치(Alchi 참조링크: 알치)

레에서 서쪽으로 약 70km 떨어진 곳에 자리한 알치(Alchi 참조링크:알치)는 유채꽃밭이 어우러진 작은 마을이다. 저 멀리 설산(雪山)의 배경 속에 싱그러운 녹색과 노란 유채꽃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며, 천년의 세월을 이겨낸 알치 곰파(알치 곰파Alchi Gompa)는 산 위가 아니라 평지에 있다. 알치 곰파 벽화는 라다크 불교 미술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티베트 양식과 결합된 카슈미르 양식이 남아 있는 유일한 사원이기 때문이다. 카슈미르 분지의 사원들은 이슬람교도에 의해 거의 파괴되어 카슈미르 양식이 남아 있는 곳이 없다. 알치의 6개 법당에 남아 있는 카슈미르 양식 벽화들은 정교하고 세련된 아름다움이 아잔타미술과 견줄 만하다고 한다.

 


알치 곰파의 벽화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황량한 모습의 라마유르

 

라마유르(참조 링크: 라마유르)

라마유르는 레에서 서쪽으로 12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달의 표면과 같은 신기하고 척박한 풍경을 보인다. 티베트 전승에 따르면 라마유르는 붓다가 생존했던 시대에는 맑은 호수였는데 붓다의 제자 한명이 이곳을 방문하여 먼 미래에 호수가 사라지고 절이 들어설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고 한다. 라마유르 곰파에서 만난 행복한 아낙네의 모습은 보는 나에게도 그 행복감이 전해졌다.

 

산 꼭대기 위에 있는 ‘라마유르 곰파’

라마유르 곰파에서 만난 아낙네

 

웅장하고 신비로운 틱세곰파(참조 링크: 틱세 곰파)

레에서 남쪽으로 19km떨어져 있는 라마교 사원 틱세곰파는 아름다운 경치로 유명하며, 라다크 지역을 소개하는 사진엽서에 단골로 등장한다. 이 곳의 신상(神像)들은 눈을 가려 놓았는데 눈에서 영적(靈的) 에너지가 나온다고 믿는 이들이 영적 에너지가 발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가린 것이라고 한다. 이 곰파에는 라다크에서 가장 크다고 알려진 높이 20m의 황금미륵불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때마침 이곳에서 달라이 라마의 설법이 있어 신자들이 수 천명 운집하였다.

 


틱세곰파에 ‘달라이 라마’가 방문한다는 플랭카드

설법하는 ‘달라이 라마’

 

라다크 왕조의 여름 궁전 셰이곰파 (참조 링크:셰이 곰파Shey Gompa)

셰이 곰파가 유명해진 것은 라다크 지방에서 가장 큰 구리 불상과 거대한 마애불 때문이다. 구리 불상은 높이가 12미터에 이른다. 다섯 가지 부처상이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으며, 제작 연대는 8세기 직후로 추정되고 있다. 중앙에 있는 가장 큰 부처는 비로자나불이다.

 


라다크 왕조의 여름 궁전이었던 셰이 곰파

라다크지역에서 제일 규모가 큰 헤미스 곰파

 

헤미스 곰파(내용 출처 :두산백과-헤미스 곰파Hemis Gompa)

산 언덕에 지어진 전형적인 라다크 곰파인 헤미스 곰파는 라다크 지방에서 가장 큰 불교 사원으로 17세기 남걀(Namgyal) 왕조 때 세워진 건물이다. 사원 내부에는 오래된 전각과 아름다운 벽화들이 즐비하며 잘 보존된 벽화와 탕카(Thanka, 괘불), 구리에 금박을 입힌 불상, 많은 불탑이 볼 만하다.

헤미스 축제(Hemis Festival) (참조 링크: 엔조이 인도-헤미스)

파드마 삼바바의 탄생을 축하하며 매년 여름 6~7월 사이에 열리는 헤미스 축제(Hemis Festival)는 라다크 곰파 축제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선악을 표현한 가면을 쓴 승려들의 춤이 펼쳐지며, 평소 공개되지 않는 귀한 탕카(Thanka, 괘불)가 일반에게 공개된다

 

세계 3번째로 높은 도로 창라패스’(참조 링크: Chang La )

델리에서 라다크까지는 자동차 길로 964km이며 약 24시간 걸린다. 델리와 라다크 중간 지점인 마날리로부터 레까지는 약 473km며 이 길은 11월부터 5월까지 7개월간 자동차 운행이 금지된다.

 

라다크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자동차 고개길이 있다.

라다크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동차길이 있다(참조: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동차 도로-룽타 뉴스). 라다크는 고갯길의 땅이라는 뜻으로 라다크 남동부에 위치한 해발 5882m의 움링 라(Umling La pass) 도로가 가장 높은 자동차 고개로 알려져 있으며, 레에서 북쪽(North Pullu)으로 가는 카르둥라 고개(Khardung La pass 5602m)에서 남쪽 마날리로 넘어가는 타그룽라 고개(Taglung La pass 5350m)가 있다. ''에서 동쪽에 있는 판공초 호수를 가려면 창라 고개(Chang La pass 5360m)를 지나야 한다. 창라 고개의 노란 도로표시판에는 세계에서 세번째(3rd) 고개라 적혀져 있다.

 


’창라페스‘의 최고점은 5360M로 고산증이 느껴진다.

저 아래 마을(초록색)에서부터 지그재그로 올라온다.

 

자동차로 가파른 비포장 산비탈 도로롤 지그재그로 지나다 보면, 낭떨어지에 굴러떨어져 고꾸라 진 차들이 드물치 않게 보인다. 라다크는 얼어붙은 육로가 열리는 여름 서너 달만 자동차 여행이 가능하며 라다크로 가는 도로가 녹는 시기인 7월 초~9월 말이 최적기이다.


고산증에 대해

라다크 지역은 평균해발 4,000m 정도며, 이 지역 중심 도시 는 해발고도 3250m이므로 고산지대에서 생기는 고산증이 올 수 있다. ‘의 공항 안내게시판에는 고산증 예방,치료약인 다이아막스 Diamox®’(참조 링크:다이아막스정)를 먹으라고 적혀 있다. 참고로 이 약은 시내약국에서 의사 처방없이 구매할 수는 있으나, ‘다이아막스는 부작용이 있으므로 미리 주치의와 상담해 두는 게 좋을 것이다.

 

고산증의 증상은 어지러움, 두통, 구토, 숨가쁨, 식욕저하 등이 있으며, 지대가 올라갈수록 증상이 심해지며 의식을 잃을 수도 있다. 따라서 고산증이 염려가 되면(특히 고혈압, 호흡기 질환 질환이 있는 경우출발 전에 의사와 상담해야 한다.

 

단시간에 높은 지대로 올라가면 고산증이 더 잘 오므로 시간을 두고 천천히 고산(4000m 이상)을 올라가는 게 좋다. 우리같이 자동차로 불과 1~2시간만에 5000M 이상의 고지대(고개 정상)에 오르면 고산증이 더 잘생긴다. 따라서 단시간에 고지대에 올라갔을 경우에는 고산 증상이 심하지 않더라도 30분 이상 머무르지 않는 게 좋다.

 

라닥크의 하늘 호수 판공초 호수’ (내용참조:엔조이 인도-판공초)

라다크의 중심 도시 '' 동쪽 150km, 해발 4,200m판공초 호수가 있다. 인도와 중국(티베트) 국경에 걸쳐 있는 이 호수는 최대 길이 134km, 너비 5km, 면적 700km²로 그 크기가 제주도 면적의 1/4 정도이다. 6천만년 전 바다였던 히말라야가 지각 변동으로 융기하면서 바닷물이 남아 호수가 되었다. 하늘과 맞닿은 판공초 호수의 물은 짠맛이 느껴지고, 바다에서 사는 갈매기와 바다 작은 새우를 볼 수 있다.

 

판공초 호수에서 물을 먹는 '조'(소와 야크 잡종)

호수가에는 ‘세 얼간이’ 영화 장면처럼 오토바이가...

끝이 보이지 않는 푸른 판공초 호수는 티베트어로 길고 좁은 마법의 호수라는 뜻의 이름처럼 신비롭다. 인도영화 세 얼간이(3 Idiots, 2009)’ 촬영지로 유명하며, 호수가엔 오토바이 소품이 있어 영화에서 나온 장면처럼 같은 포즈로 많은 사람들이 기념 사진을 찍는다. (‘세 얼간이 Three Idiots)’  참조 링크:세 얼간이)

 

(계속)

 

 

제목: 절(사찰) 구경하기-바로가기 묶음 - (최종 수정 2021.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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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1. 절(寺刹 사찰)구경하기1-일주문,금강문,사천왕문- (최종 수정 2021.10.28)

A.2. 절(寺刹 사찰)구경하기 2 - 탑, 부도, 석등

A.3. 절(사찰)구경하기03-불전(佛殿) 불상(부처,보살) 

A.4. 절(寺刹 사찰)구경하기 4-불상(부처)의 모습,형태

A.5. 절(寺刹 사찰)구경하기 5-당우, 단청, 拱包(공포), 法具四物, 불교 상징물 

 

A.6. 절(사찰) 구경의 기본 상식 (펌) )

 

제목: 절(사찰) 구경하기-바로가기 묶음 - (최종 수정 2021.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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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1. 절(寺刹 사찰) 구경하기1-일주문,금강문,사천왕문

 

A.2. 절(寺刹 사찰)구경하기 2 - 탑, 부도, 석등

 

A.3. 절(寺刹 사찰)구경하기 3-불전(佛殿),불상(부처,보살)

 

A.4. 절(寺刹 사찰)구경하기 4-불상(부처)의 모습,형태

 

A.5. 절(寺刹 사찰)구경하기 5- 당우, 단청, 拱包(공포), 法具四物, 불교 상징물

 

A.5. 절(寺刹 사찰)절(寺刹 사찰) 구경의 기본 상식(펌)

'새날이'의 서울(한양) 탐구' -시리즈- 모음

우리가 사는 동네와 주변의 지명이나 지하철명에 담긴 옛 사건이나 유적의 의미를 알아두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서울(한양) 탐구'-시리즈- 게시물 속에서도 말했지만 산(山) 하천(河川), 성(城)의 이름뿐만아니라

나루터, 포구, 한강변 亭子(정자), 절(사찰), 가톨 성지 또는 순례지 외에도 유적지나 유물, 유명 인물들이

지명이나 지하철역명, 도로명(거리명)에 많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 '서울(한양) 탐구' - 게시물의 제목을 클릭하면 해당 게시물을 볼 수 있음.

[1] 서울(한양) 탐구01-서울의 명칭 유래와 간단 역사

[2] 서울(한양) 탐구02-조선의 궁궐(5대궁)

[3] 서울(한양) 탐구03-궁궐2-궁궐의 구조 외 운현궁, 칠궁, 종묘, 사직단, 동묘 

[4] 서울(한양) 탐구04-왕과 왕족의 호칭, 내시, 궁녀, 묘호(廟號), 왕릉, 왕비릉

[5] 서울(한양) 탐구05-조선시대 한양(서울)지도, 한양도성(성곽)과 4대문, 4소문

[6] 서울(한양) 탐구06-서울의 산(山),하천(河川),성(城)

[7] 서울(한양) 탐구07-청계천에 놓인 22개의 다리와 사연(scrap)

[8] 서울(한양) 탐구08-(서울)한강의 나루, 살꽂이다리 箭串橋(전곶교)

[9] 서울(한양) 탐구09-(서울)한강변의 亭子(정자)

[10] 서울(한양) 탐구10-(서울의) 사찰(절)

[11] 서울(한양) 탐구11-(서울의) 가톨릭 성지순례지

 

- 이 게시글로 서울(한양) 탐구 시리즈를 마칩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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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얼마인가 하니                                                                              작성일자 2021.07.14

 

<배경음악>: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임영웅

만약, 영상이 안 보이면 https://youtu.be/cKp4W5Iu95Q<= 클릭!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약 20여 년 전) 내 나이 50도 훨씬 안 되었을 때이다. 

그 때 나는 의사로 일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진료중인 보호자로 따라온 예닐곱 된 아이가 '할아버지, 사탕 주세요~'하는 것이었다. 그 때까지 나는 '할아버지'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순간 깜짝 놀라 당황했지만 아이 앞이라 '의사선생님~ 사탕하나 주세요.'라고 말해야지 라고 잖게 얼른 타이르곤 사탕을 쥐어 주었다. 아이에겐 다음부터는 '할아버지라 부르지 말고 의사선생님이라 그래라'라고 일렀다.

 

그런데 며칠 뒤 그 녀석이 와서는 또 '할아버지, 사탕 주세요~'하는 것이었다. 나는 '~ 이놈아, 내가 어째 할아버지냐? 의사선생님이지'하고 장난스럽게 윽박질렀다. 그랬더니 그 녀석이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머리가 하야니 할아버지잖아요'하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많지는 않았지만 새치 흰 머리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흰 머리 칼이 있으니 할아버지가 맞다

 

그렇게 십 수 년 세월이 흘러 약 9년 전에서야 진짜 할아버지가 되었다.

 

 

서울(한양) 탐구11-(서울의) 가톨릭 성지순례지

 

<배경음악>: 내주를 가까이하게함은 -찬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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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퀴즈]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퀴즈 1] (서울)도성 안에서 (순교한 신자들의) 시신을 운반해 나가던 문 이름은?

[퀴즈 2] 북달재(종현 鍾峴)’에 설립된 조선 최초의 본당이자 서양식 대성당인 이곳은?

[퀴즈 3] 조선시대의 중앙관서인 육조의 하나로. ‘추관 또는 추조라고도 했으며, 사헌부 

           한성부와 아울러 삼법사(三法司)라 일컬어지기도 한 관청은 무엇인가?

[퀴즈 4] 한강의 버들꽃나루(양화진)에 옆 이곳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처형(머리가 잘림)

            되어 붙여진 이름으로 가톨릭 성지이다 이곳의 이름은? oo산 성지

[퀴즈 5] 조선 교회 최초의 신부 주문모가 처형된 장소로 용산의 저습지였던 이곳은?

 

참조 영상 링크: 한국 가톨릭 디지털 역사관 - YouTube

 

다음 내용은 (서울의) 가톨릭 성지순례지로 서울대교구 성지순례길(www.catholic.or.kr)의 내용을 편집 요약한 것으로 서술 순서는 원문 순서를 따랐다.

 

참고로 (서울) 성지순례 순례지 가운데 김범우의 집터, 한국 천주교 순교자 124위 시복 터,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터, 한국 천주교회 창립 터(이벽의 집터)  4곳에 성지순례 스탬프가 마련되어 있다, 경기감영 터, 우포도청 터, 의금부터, 전옥서 터, 좌포도청 터, 형조 터 등 5곳은 종로 성지성당에서 스탬프를 찍을 수 있다.

원문을 보려면 참조 링크: 서울대교구 성지순례길(www.catholic.or.kr)를 클릭!

 

서울대교구 역사관 참조 링크: 천주교서울대교구역사관

명당 성당 구내에 있는 이 건물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 서양식 벽돌 건축물 중 하나이다. 1890년 한국가톨릭교회의 '주교관'으로 신축되었다.

 

서울대교구 성지순례길 원문 링크:서울대교구 성지순례길(www.catholic.or.kr)

- 원문 내용을 편집 요약한 것으로 서술 순서는 원문 순서를 따랐다. -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성당

서울대교구 성지순례길 중 종로구 혜화동 90-1에 있는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모셔진 장소이며 한국 교회 사제 성소의 요람이다. 성직자(성소자) 양성 공간이므로 개방이 안되고 있다.

 

광희문(光熙門), 속칭 水口門 또는 시구문(屍口門   참조자료: 광희문   참조자료: 광희문

광희문

현재 중구 광희동 2 105에 있는 광희문은 조선 시대 서울의 사소문(四小門)의 하나로,

도성 안에서 죽은 자들(순교한 신자들)의 시신을 운반해 나가던 문이다.

 

조선 시대에는 사람이 죽으면 서울 성곽 안에는 묘를 쓸 수 없었다. 그래서 시신을 서울 외곽 밖으로 가지고 나가 묘를 써야 했는데, 이때 서소문과 광희문을 통해 시신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런 이유로 광희문은 시신을 내어가는 문이라는 뜻의 시구문이라고 불렸다. 한편 명지대 홍순민 교수는  수구문에 대해서 부근으로 청계천 물길이 나가기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었다고 하는 말이 있으나 이는 억측이다. 청계천 물길은 흥인문이 더 가깝다. 수구문이란 한강으로 출입하는 문이란 뜻이다. 더구나 이 문을 그 부근에 늘 시신이 쌓여  있었다 하여 시구문(屍口門)이라 했다는 것은 일본인들의 악의적 왜곡이다. 참조 링크:  문(門) 이름에 숨은 뜻

 

천주교 박해시대에 수많은 사람들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포도청 등에서 신문을 받다가 순교하였다. 당시 옥중에서 치명한 순교자들의 시신은 광희문을 통해서 밖으로 내버려졌다.

 

좌포도청 터

좌포도청 터는 현재 종로구 묘동 56번지 단성사 일대(종로3가역 3호선 9번 출구)로 추정되고 있다. 포도청 순교지는 103위 성인 중 최경환 프란치스코, 유대철 베드로, 허임 바오로 등 스물한 분, 현재 시복 추진 중인 하느님의 종’ 124위 중 윤유일 바오로 등 5위가 장살, 옥사, 교수 등으로 순교한 곳이다.

 

포도청은 원래 도적을 잡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 운영되었다. 그러나 점차 그 담당 업무가 확대되어 한성부민들의 생활 전반에 걸쳐 금지 조항을 위반하는 사건들을 다루었고, 개항기에는 궁문수비, 외국공사관의 경비, 반역 죄인에 대한 심문까지도 담당하였다.

 

또한 지방의 중죄인을 압송, 체포하여 조사하고, 그 죄의 경중에 따라 의금부와 형조 등 상급기관으로 이송하는 중간기구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이벽의 집 터 수표교 인근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정조 8(1784) 겨울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되었다.

 

김범우의 집 터, 명례방과 장악원 터

김범우의 집이 있던 명례방은 남산 아래의 여러 마을들과 지금의 을지로 입구에서 명동 성당 부근까지를 포함하고 있던 곳이다. 명례방이 한국 천주교회사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게 되는 시기는 1784년 말 또는 1785년 초 수표교 인근 이벽의 집에서 열던 신앙 모임을 명례방 장악원 앞에 위치한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서 하게 된 때이다.

 

현재 명례방을 알리는 표지석은 없고 중구 을지로 2 181 외환은행 앞 장악원 터 표석 자리 앞쪽을 김범우의 집터로 보고 있다.

 

명동대성당

명동대성당

명동대성당은 옛날 조선 한성부 남부조선 최초의 서양식 대성당으로 명례동(明禮洞)’에 속하던 지역(오늘날 중구 명동 2)에 세워진 성당으로 1898 5 29일에 완공하였다. 지금은 주위 고층빌딩 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북달재(종현 鍾峴)’라고 불리던 남산 앞 언덕 위에 세워진 명동대성당은 도성 내 어느 곳에서나 올려다 보이던, 뾰족탑이 인상적인 서양식 교회 건물로 세인의 이목을 끌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이 개항정책을 취하게 되면서 교회에 대한 정부의 박해정책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자, 교회 당국은 1882 4월에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본당으로 종현 본당, 지금의 명동 본당을 설정했다.

 

명동대성당은 한국 교회 최초의 본당이며 성인 다섯 분과 순교자 네 분의 유해가 모셔진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이다.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 김성우 안토니오, 순교자 이 에메렌시아, 무명 순교자 1,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가 모셔져 있어, 기도와 참배를 위해 찾는 순례자들이 많은 성역이다. 이 가운데 이 에메렌시아,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는 시복 대상자로 선정되었다

 

가회동 성당

이 곳은 과거 의금부 터로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선교사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 땅에 들어와 1795년 예수부활대축일에 신자들과 함께 조선에서의 첫 미사를 계동 최인길의 집에서 봉헌하였다.

 

한국 천주교 초기 신앙의 중심지였던 이 지역을 관할하기 위해 1949년에 가회동성당이 설립되었고, 2014년 지금의 한옥과 양옥이 어우러진 새 성전이 건립되었다.

 

의금부 터

의금부 터(종로구 공평동 종각역 1번 출구)는 주교와 신부, 평신도 지도자들이 국문을 받던 곳이다. 의금부는 조선시대 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추국하는 일을 맡아 보던 관청이었으며 금부·금오·왕부라 부르기도 하였다.

 

박해시기, 천주교 신자들은 서울의 좌우포도청과 지방의 각 진영) 및 군현에서 문초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 중죄인, 즉 주교와 신부, 평신도 지도자들은 국왕의 특별한 명령에 의해 의금부로 압송되어 국문(鞫問)을 받았다.

 

전옥서 터

전옥서 터(종로구 종로1가 종각역 6번 출구) 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수감되어 있던 곳이다전옥서는 감옥과 죄인에 관한 사무를 관장했던 관서로 전옥서에 수감되는 죄수의 대부분은 상민이었다, 하지만 의금부가 육조, 왕실의 계보를 편찬하고 왕족의 허물을 살피던 관아였던 만큼 종부시, 사헌부 등의 죄인이나 왕족이나 양반, 관리들도 수감되었다.

 

우포도청 터

우포도청은 서린방 혜정교 남쪽(현 동아일보 신사옥 앞 화단))에 있었으며, 우포도청이 담당한 구역은 서울의 서부  북부와 경기 우도 즉 가평, 개성, 고양, 연천, 적성, 파주, 포천 등지였다.

 

우포도청은 한국 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장소이다. 1879 5 14일에 충청도 공주 지방에서 드게트 신부가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이날 드게트 신부뿐만 아니라 함께 거주하던 신자들까지 잡아서 공주 감영에 수감하였다가 5 29일 서울 포도청으로 이송하였다. 이때는 공식적인 박해가 종료되었던 시기라 가혹한 고문이 자행되지는 않았지만, 드게트 신부와 함께 투옥된 신자들은 굶주림으로 큰 고통을 받았다. 결국 그 가운데 이병교 레오, 김덕빈 바오로, 이용헌 이시도로 등은 우포도청에서 아사로 순교하였으며 이들이 바로 한국 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들이다.

 

형조(刑曹) 

형조(刑曹)는 한성부 서부 적선방(종로구 세종로 세종문화회관)에 있었는데 조선시대의 중앙관서인 육조(六曹)의 하나로 추관 또는 추조라고도 했으며, 사헌부  한성부와 아울러 삼법사(三法司)라 일컬어지기도 했다.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많은 천주교인들이 형조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다. 그 시작은 정조가 즉위한 지 9년째 되던 1785년에 발생한 을사추조 적발사건으로, 신자들이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서 집회를 갖던 중, 형조의 금리들에게 발각되어 형조로 압송된 사건이었다.

 

이후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최필공 토마스  최필제 베드로  윤운혜 루치아  정철상 가롤로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고, 김천애 안드레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윤지헌 프란치스코 등은 전주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신문을 받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남명혁 다미아노  김효임 골롬바  김효주 아네스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전장운 요한  최형 베드로 성인 등도 형조를 거쳐 갔다.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 성지

서소문 밖 네거리(중구 의주로 2 16번지 서소문 공원 내)는 신유·기해·병인박해 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신자들이 참수형을 받아 순교한 장소이다.

 

서소문은 조선시대 수도 한성의 출입 성문이던 네 개의 도성 대문과 네 개의 소문 가운데 하나인데, 서소문의 정식 이름은 소의문(昭義門)이다. 당시 서소문 밖의 네거리 광장은 조선시대 공식 사형 집행지였는데, 그 광장은 문안에서 아현고개와 남대문 밖 칠패시장으로 통하던 성문 밖에 생겨난 주막거리 광장이었다. 이 광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주막과 주위의 시장은 파루 인정제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즉 아침에 성문이 열리면 도성 출입이 가능하나, 저녁에는 성문을 닫아 통행을 금지하니, 통행인들이 문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성문 밖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했기에 이들을 상대로, 성문 밖에 취락이 생겨났고, 광장도 생겨났던 것이다.

 

따라서 관에서는 중죄인을 사형에 처할 때마다, 군중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다수의 군중을 동원하기 쉽고 또한 사형죄인들이 갇혀 있던 포도청이나 의금부와 가까운 서소문 밖 네거리 광장을 사형 집행 장소로 이용했다.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에서 순교자가 처음 생긴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로, 한국 교회의 첫 세례자인 이승훈 베드로와 명도회 초대 회장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그리고 여회장 강완숙 골룸바와 백서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 알렉시오 등이 참수로 순교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정하상 바오로,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등이 이곳에서 순교하였고,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성 남종삼 요한 등이 순교하였다. 이처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는 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하였으며, 그중 마흔 네 명이 성인의 반열에 오르면서 한국 교회사상 가장 많은 성인이 탄생한 곳이라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중림동 약현 성당

중림동 약현 성당(중구 중림동 149-2) 1892년에 건축된 서울 시내 두 번째 본당이다.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 성지를 관할하는 중림동약현 성당은의 규모는 명동 성당보다 작고, 도성문 밖에 위치하고 있으나, 한국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한국 최초의 고딕식 교회 건물이다.

 

서양식 교회 건물로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겸비한 성당 건물로 1977 11 22일자로 국가 사적 제252에 지정되었다. 한편 1998년에 화재로 내부가 불탔으나 2000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성당 내부 스테인드글라스가 볼 만하다.

 

성당 내에 있는 서소문 순교자 전시관 전시실에는 초기 한국 교회천주교회의 4대 박해 당시 순교한 신자들이 사용하던 교리서, 신심서적 등이 있으며, 특히 서소문 순교자인 강완숙의 가계도, 프랑스 선교사들의 문서류도 전시하고 있다.

 

경기감영 터

경기감영도- 경기감영 위치는 현 종로구 평동 164 서울적십자병원 정문 옆이다

경기감영이 설치된 것은 태종 때의 일이었다. 한양으로 천도한 다음 해인 1395(태조 4)에 경기 행정편제가 개편되었다. 이때 광주와 수원의 관할인 군현을 갈라서 경기 좌도라 하고, 양주부평철원연안의 관할인 군현을 경기 우도로 하였다. 그 후 1413년에 경기 영역을 다시 한 번 조정하여 좌우도로 나누지 않고 경기로 확정하면서 도관찰사를 파견하였고, 감영을 수원에 설치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감영은 경기도 광주로 옮겨졌다가 다시 한성부 내 서대문 밖 반송방(종로구 평동 164 서울적십자병원 정문 옆)으로 이전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최창주 마르첼리노, 이중배 마르티노, 원경도 요한, 권상문 세바스티아노, 홍인 레오 등 체포된 신자들은 경기감영으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과 문초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순교한 이가 있었는데, 바로 순교자 조용삼이다. 조용삼은 11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었고,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았다. 1801 2월에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형벌을 받았으나 약해진 몸은 더 이상의 형벌을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에는 다시 옥에 갇힌 지 며칠 만인 3 27일에 숨을 거두었다.”

 

절두산(切頭山) 순교성지

한강의 버들꽃나루라고 불렸던 양화진(마포구 합정동)에 자리 잡은 절두산 순교성지는 1866년 프랑스 함대의 침입을 계기로 많은 신자들이참수(머리가 잘림)되어 처형됐던 장소이다.

 

가장 혹독한 박해로 일컬어지는 1866부터 1873까지인 병인박해 기간 동안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기록으로 확인되는 순교자는 김한여 베드로, 최경원 야고보, 이의송 프란치스코, 김이쁜 마리아, 이붕익 베드로, 조 타대오 등 17명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순교자 5명을 포함하여 22명뿐이다.

 

현재 병인순교 100주년 기념 성당과 박물관이 서 있는 절두산 순교성지는 그 봉우리 형상이 누에머리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잠두봉이라 불렸으나,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에서 처형된 후에 천주교인들이 목 잘려 죽은 곳이라는 의미의 '절두산(切頭山)'으로 불리게 되었다.

 

노고산 성지

노고산 성지는 마포구 백범로 35(신수동) 서강대학교 가브리엘관 앞이다. 기해박해 때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한 후 이곳에 4년간 묻혀 있던 장소이다.

 

노고산은 박해시대 여러 처형장과 가까운 이유로 많은 순교자의 시신이 매장되었던 곳이다. 현재 노고산 아래 순교자들이 묻혔던 땅 위에는 예수회의 서강대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용산 신학교 성당

용산 신학교 성당(용산구 원효로4가 성심여자고등학교 내) 코스트 신부가 설계한 신학교 성당으로 1902 4 14일에 성당 봉헌식을 가졌다.

 

당시 조선 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신학교 부속 성당 건립을 위해 국내외에서 후원자를 구하던 중 프랑스인 드 사라(de Sarah) 여사로부터 기부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런데 그녀는 성당 건립 기금 후원에 앞서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순교지에 성당을 건립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뮈텔 주교는 김 신부의 순교지인 새남터는 홍수로 자주 잠기는 위치에 있어 위험하고, 오히려 조선대목구에서 유일한 신학교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순교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는 점, 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뒤를 계승하고자 하는 조선의 신학생들이 공부하는 곳에 신학교 성당을 건립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점을 오랜 기간 설득하여 마침내 그녀의 동의를 얻어냈다.

 

뮈텔 주교는 후원자의 뜻을 기리기 위해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미리내에서 이장하여 모시기로 하고, 1901 5 21일에 시복 재판 판사인 프와넬 신부와 기록 서기인 드망즈 신부, 안성 본당의 공베르 신부와 미리내 본당의 강도영 신부, 그리고 신자 30여 명이 참관한 가운데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발굴하였다. 발굴된 유해는 강도영 신부 사제관에 안치하였다가 5 23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 안치하였으며, 성당이 완공된 이후인 1902 6 23일에 성당의 제대(祭臺)에 오른편 모퉁이 바닥을 파고 그 안에 유해를 안치하였다.

 

김대건 신부 등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셨던 성당 출입구 상부에는 나무로 만든 명문을 부착하였는데 거기에는 성당 착공일인 1869 6 9일과 성당 봉헌일인 1902 4 14, 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세례명 안드레아(Andrea)의 이니셜인 ‘A’, 성 김(Kim)의 이니셜인 ‘K’와 생몰연대(1821~1846)가 로마자로 새겨져 있다.

 

당고개 순교성지

당고개 순교성지(용산구 신계동 1-57)는 기해박해 때 10명의 신자들이 참수로 순교한 장소이다. 당고개 순교성지는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많은 순교성인을 배출한 순교성지이다.

 

옛날 이곳에 민간인들이 제사 지내는 당집이 있었기에 당고개라 불렸으며 기해박해가 끝나갈 무렵에 열 명의 교우들이 순교한 곳이다. 1839년 음력 섣달그믐 경, 1년간에 걸친 기해박해의 마지막 단계에 아직 남아 있던 천주교인 다수를 서소문 밖 네거리 광장에서 처형하기로 결정했으나, 이런 사실을 사전에 알게 된 서소문 근처의 상인들이 설 대목장을 봐야 하는데, 사람들의 목을 베는 잔인한 처형이 이루어져서는 곤란하다며 설 대목장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처형장소를 서소문 밖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서소문에서 남동쪽으로 내려가 한강변에 위치한 용산의 당고개에서 처형하도록 하였다. 가족을 한 날에 처형하지 않는다는 국법에 따라 열 분 가운데 일곱 명은 12 27일에, 세 명은 28일에 처형되었다. 현재 그 가운데 아홉 분은 성인이 되셨고, 이성례 마리아는 하느님의 종에 올라 있다.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는 어린 다섯 형제를 두고 남편 성인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같이 수리산 교우촌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연행되어 옥고를 치르면서 젖먹이 막내아들이 자신 옆에서 배고파 죽는 것을 보아야 하는 처절하고도 기막힌 시련과 옥 밖의 네 명의 어린 자식들에 대한 인간적인 정에 못 이겨 한때나마 주님께 등을 돌렸지만, 다시 회개하고 옥에 돌아와 갖은 악형과 유혹을 이겨내고서 순교하였다.

 

왜고개 성지

왜고개 성지(용산구 용산동 5 2-65번지)는 기해·병오·병인박해 당시 새남터 순교자들이 잠시 매장된 장소이다. 왜고개는 1839년 기해박해 때 군문효수의 형을 받고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 그리고 188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성 남종삼 요한, 성 최형 베드로 그리고 홍봉주 토마스 등이 얼마간 암매장되었던 곳이다왜고개는 모두 열 명의 순교자가 묻혔던 곳으로 그중 여덟 명이 1984 5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왜고개는 한자로 와현(瓦峴) 또는 와서현으로 불리던 곳으로 원래 옛날부터 기와와 벽돌을 구워 공급하던 와서(瓦署)가 있었던 데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으며, 서울 명동 성당과 중림동약현 성당을 지을 때 사용했던 벽돌도 이곳에서 공급해 주었다고 전해진다.

 

새남터 순교성지

새남터 순교성지(서울 용산구 이촌로 80-8)는 기해·병오·병인박해 당시 성직자 11명과 교회지도자 3명이 군문효수형(軍門梟首: 사형수의 머리를 베어 간두(竿頭, 장대)에 매다는 형벌)을 받아 순교한 장소이다. 남대문 밖 용산의 저습지였던 모래벌 새남터는 간혹 풀이 우거져 있기는 하나 사람이 거주하거나 농토를 일굴 수 없는 모래톱 황무지였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그 북부 일부를 군사 훈련장으로 사용해 왔으며, 때로는 군문효수형을 선고받은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새남터와 조선 천주교회와의 악연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조선 교회 최초의 신부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박해 당국에 의해 새남터에서 처형됨으로써 비롯되었다. 그 후 한강가의 쓸쓸하고 황막한 모래땅 새남터는 우리 교회에 큰 박해가 닥칠 때마다 외국인 주교나 신부 등 선교사와 우리 신자 다수가 참수 치명된 대표적 순교성지가 되었고 새남터에서 순교한 순교자들 가운데 11위가 1984 5월에 시성되어 103위 성인 반열에 올랐다.

 

삼성산 성지

삼성산 성지(관악구 신림동 산 57-1)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앵베르 주교를 비롯하여 성 모방 신부와 성 샤스탕 신부의 유해가 1901년 명동 대성당 지하 소성당 묘역으로 모셔질 때까지 묻혀 있던 곳이다.

 

[요약퀴즈]

[퀴즈 1] (서울)도성 안에서 (순교한 신자들의) 시신을 운반해 나가던 문 이름은?

[퀴즈 2] 북달재(종현 鍾峴)’에 설립된 조선 최초의 본당이자 서양식 대성당인 이곳은?

[퀴즈 3] 조선시대의 중앙관서인 육조의 하나로. ‘추관 또는 추조라고도 했으며, 사헌부 

           한성부와 아울러 삼법사(三法司)라 일컬어지기도 한 관청은 무엇인가?

[퀴즈 4] 한강의 버들꽃나루(양화진)에 옆 이곳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처형(머리가 잘림)

            되어 붙여진 이름으로 가톨릭 성지이다 이곳의 이름은? oo산 성지

[퀴즈 5] 조선 교회 최초의 신부 주문모가 처형된 장소로 용산의 저습지였던 이곳은?

 

[요약퀴즈 정답]

[퀴즈 1] 도성 안에서 (순교한 신자들의) 시신을 운반해 나가던 문 이름은? .=> 광희문

[퀴즈 2] 북달재에 설립된 조선 최초 본당이자 서양식 대성당인 이곳은? .=>명동성당

[퀴즈 3] 조선시대의 육조의 하나로 추관’, ‘추조라고 불린 관청은 무엇인가? ,=>형조

[퀴즈 4] 천주교 박해시대 때 많은 신자들의 머리가 잘린 이 곳은? 절두산(切頭山) 성지

[퀴즈 5] 최초의 신부 주문모가 처형된 장소로 용산의 저습지였던 이곳은? ,=> 새남터

 

- 이 게시글로 서울(한양) 탐구 시리즈를 마침 (完)-

서울(한양) 탐구10-(서울의) 사찰()

 

<배경 영상 음악>  삼귀의(三歸依)와 반야심경(般若心經) 등 

삼귀의(三歸依)는 삼보[三寶]인 불[佛]. 법[法]. 승[僧]에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은 불교의 중심이 되는 경전으로《대반야바라밀다경》의 요점을 간략하게 설명한 짧은 경전으로, 당나라 삼장법사인 현장(玄裝)이 번역한 것이다. 260자로 되어 있다.

 

 추후 링크가 끊어지면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 나올 수도 있으며, 

 아래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보이면   https://www.youtube.com/embed/cN0ArYAF7oM/span>  <=요걸 클릭

 

 

* 본문 중 밑줄 친 링크는 본문 내용을 가져오거나 참고한 곳으로 필요시 밑줄 친 link를 클릭.

, 밑줄 친 링크는 현재는 연결되지만 추후 링크 주소 변경되면 연결이 안 될 수도 있음.

 

[요약퀴즈]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퀴즈 1] (서울) 성북동에 있는 사찰로 법정 스님과 인연이 있는 절의 이름은?

[퀴즈 2] 북한산 아래에 있어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은 둘러봤을 사찰이다. 이 절의 이름은

[퀴즈 3] 도성 밖 비구니 사찰로 왕실과 후궁, 상궁 등 궁인에게 사랑받은 절 이름은?

[퀴즈 4] 신촌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뒤에 있는 한국불교 태고종의 절로 서재필은

           자서전에서 이곳을 개화파의 온상이라고 하였다. 이 절의 이름은?

[퀴즈 5] 본래 경기도 광주 수도산(修道山)의 산사(山寺)였지만, 지금은 서울시 강남구

           도심 한가운데 있는 사찰이 되었다. 돈이 많은 부자(富者) 절로 소문난 이 절은?

[퀴즈 6] 경기도 남양주 운길산(雲吉山)에 있는 사찰로 세조의 명으로 중창된 절이다.

           두물머리(양수리)를 바라볼 수 있는 저명한 경관 전망지인 이 절의 이름은?

[퀴즈 7] 국 불교 최대 종단인 조계종 本寺로 근정전 크기의 대웅전이 있는 이곳은?

[퀴즈 8] 조계사 바로 옆에 있는 한국 최초의 우체국으로 갑신정변이 일어난 곳의 이름은?

[퀴즈 9] 서울시 은평구에 있는 사찰로 고려 현종의 목숨을 구한 인연으로 왕실의 지원과

            보호를 받았다. 20093.1운동 당시에 쓰였던 태극기가 발견된 이곳은?

[퀴즈10] 이성계의 비호를 받아 '조선의 왕사(王寺)'라고 불렸던 경기도 양주에 있던 이

            사찰의 이름은?   

    

내용출처:    (불교)/한국 - 나무위키

[나무위키]-링크 홈페이지 현 위치(주소)
관문사(觀門寺) www.gwanmunsa.org/main 서울 서초구 우면동  
금선사(金仙寺) www.geumsunsa.org/ 서울 종로구 비봉길 137
길상사(吉祥寺) http://kilsangsa.info/ 서울 성북구 성북동 323(선잠로568)
도선사(道詵寺) www.doseonsa.org/ 서울 강북구 삼양로173 504(우이동 264)
묘각사(妙覺寺) www.myogaksa.net/ 서울 종로구 숭인동 178-3
보문사(普門寺) http://www.bomunsa.or.kr/ 서울 성북구 보문동3가 168
봉원사(奉元寺) http://bongwonsa.or.kr/ 서울 서대문구 봉원사길 120
봉은사(奉恩寺) www.bongeunsa.org 서울 강남구 봉은사로 531 (삼성동)
수국사(守國寺) www.suguksa.org/ 서울 은평구 구산동
수종사(水鐘寺) x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1060
연화사(蓮花寺) x 서울 동대문구 제기로31 10-3(회기동) 
정각원(正覺院) https://jeonggak.dongguk.edu/ 서울 중구 필동로1길 30
조계사(曹溪寺) www.jogyesa.kr/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55
진관사(津寬寺) www.jinkwansa.org/ 서울 은평구 진관길 73
호압사(虎壓寺) www.hoapsa.org/ 서울 금천구 호암로 278
회암사(檜巖寺) www.hoeamsa.com/ 경기도 양주시 회암사길 281
화계사(華溪寺) www.hwagyesa.org/ 서울 강북구 화계사길 117
흥천사(興天寺) www.heungcheonsa.net/ 서울 성북구 흥천사길 29

조계사, 봉은사, 진관사, 화계사, 금선사, 묘각사에서 등에서 운영하는 템플스테이(템플라이프)에 참여하면 사찰 체험과 함께 그 절의 내력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알림-

이 글 내용은 [나무위키 www.namu.wiki]에서 대부분 가져왔지만, ‘가나다순으로 배열하고 편집 요약하였다.

원문을 보려면 클릭=> (불교)/한국 - 나무위키

 

* 1: 사찰 설명 중 금선사’ ‘도선사’ ‘묘각사’ ‘수국사를 제외한 나머지는 [나무위키]에서 가져 왔다.

* 2: 경기도 지역의 사찰이지만 수종사는 태조 이성계, ‘회암사는 세조와 관련이 깊어 본 자료에 포함

시켰다.

 

 

 - 가나다순  -

관문사(觀門寺)    참조 링크: 관문사(觀門寺)   www.gwanmunsa.org/main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에 위치한 대한불교천태종 사찰로 1970년 천태종 중창조(重創祖)였던 상월원각대조사가 큰 천태사원을 세우라는 유지를 받들어 시작했다. 1996113일 법당 상량식을 거쳐 19971231일에 불사를 마쳤다.

 

금선사(金仙寺)   참조 링크: 금선사(金仙寺)    www.geumsunsa.org/

금선사(金仙寺)는 북한산국립공원 남서쪽 산기슭(서울시 종로구 비봉길 137)에 있는 사찰로

조선 초, 태조 이성계 곁에서 조선의 건국과 한양 천도를 도왔던 무학대사가 창건했다.

 

금선사는 조선 후기 정조 임금과 관련한 설화가 전해져온다. 대구 파계사에서 수행정진 중이던 용파스님은 사찰에 부과되는 각종 부역으로 전국의 사찰이 피폐하게 되자 왕과 담판을 지으려고 서울로 올라왔다. 어느 날 임금을 만나 담판을 하였는데 임금은 왕자의 탄생을 조건으로 걸게 된다. 이후 임금의 후궁인 수빈 박씨의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아들이 태어날 것을 점지하였고 수빈 박씨가 음력 618일 아들을 낳았다. 같은 날 목정굴에서 기도하던 농산스님이 앉은 채로 열반에 들었다. 이에 농산스님이 열반에 들어 수빈 박씨 몸에서 다시 태어난 것이라 여기고 해마다 이날 순조 임금의 탄신제를 올리고 있다.

 

금선사는 일제강점기에 전소되어 중창된 지가 60년밖에 되지 않기에 유형문화재가 많지 않다.(내용출처: 위키백과)

    

길상사(吉祥寺)   참조 링크: 길상사(吉祥寺)    http://kilsangsa.info/

길상사 사진출처: 위키백과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 323(선잠로5 68)에 위치한 불교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 송광사의 말사이다1997년에 세워졌으므로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최고급 요정이었던 대원각(大苑閣)이 불교 사찰로 탈바꿈한 특이한 설립 이력이 있는 곳이다.

 

본래는 '대원각'이라는 이름의 고급 요정이었으나 요정의 주인이었던 고 김영한(법명 길상화)이 법정 스님에게 자신이 소유한 요정 부지를 시주하여 사찰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1995613일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 말사인 '대법사'로 등록하여 사찰이 되었고, 초대 주지 로 현문이 취임하였다. 1997년에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재등록되었다.

 

길상사(吉祥寺)의 절 이름은 길하고 상서로운 절이란 의미로, 묘길상(妙吉祥) 곧 문수보살의 별칭에서 인용된 불교용어이며, 승보사찰(僧寶寺刹) 송광사(松廣寺)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내용출처: 위키백과)

 

도선사(道詵寺)       참조 링크: 도선사(道詵寺)   홈피:  www.doseonsa.org/

서울시 강북구 삼양로173504(우이동 264) 북한산 만경대 하단부에 위치한 대한불교 조계종 계열의 사찰이다. 신라 경문왕(景文王) 2(862)에 도선(道詵)이 세웠다. 도선은 이곳의 산세가 1,000년 뒤의 말법시대(末法時代)에 불법을 다시 일으킬 곳이라고 예견하고 절을 창건한 뒤, 큰 암석을 손으로 갈라서 마애관음보살상을 조각하였다고 한다.

 

그 뒤 조선 후기까지의 중건·중수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북한산성을 쌓을 때는 승병들이 이 절에서 방번(防番: 보초 임무)을 서기도 하였다. (내용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묘각사(妙覺寺)     참조 링크: 묘각사(妙覺寺)   홈피:  www.myogaksa.net/

서울시 종로구 숭인동 178-3 낙산 동쪽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불입종의 총본산이다. 법화경을 중심으로 수행과 대중 불교운동을 지향한 법화신앙(法華信仰)의 중심사찰로현 위치에 절을 세우면 서울이 평안하고 시민생활에 안정을 가져온다는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터를 잡았다고 한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석굴암(石窟庵), 요사채가 있다.(내용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웅전은 1975년에 착공하여 19816월에 완공한 건물로서, 내부 천장이 매우 높고 지붕은 청기와를 사용하였다. 법당의 본존불은 청동불로서 합장을 한 특이한 모습이며, 좌우에는 4대 보살상, 뒤편에는 목각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 석굴암의 불상은 모두 북향을 하였는데, 일반적인 불상 배치법과는 달리 북쪽을 향한 것은 이북동포의 안녕과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뜻에서 취한 것이라고 한다.

 

보문사(普門寺)     참조 링크: 보문사(普門寺)    홈피:  http://www.bomunsa.or.kr/

대한불교 보문종의 총본산인 보문사는 고려 예종 10(1115) 담진(曇眞) 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창건 당시부터 비구니 즉 여승들을 위한 사찰이었다. 조선 시대에도 '탑골승방'이라고 불리며 비구니들이 거처하던 도성 밖 4대 비구니사찰 가운데 하나였다.

 

대한불교 보문종의 실제 개조(開祖)이자 중흥조는 일제강점기에 보문사를 중창한 비구니 긍 탄(亘坦: 1885-1980)과 그 제자 보암당 은영(恩榮: 1910-1981)이다.

 

2017년에 보문사 극락보전을 중수할 때에 발견된 상량문에 따르면 청 건륭 12(조선 영조 23, 1747) 처음 중건하고 도광 4(순조 24, 1824)과 동치 4(고종 2, 1865)에 더 중수했다. 동치 4년 상량문에는 조선 왕실의 시주를 받아 불사를 진행하고 후궁과 상궁 등 궁인에서부터 사대부, 평민에 이르기까지 불사에 동참하였다는 내용도 있다.

 

보문사에는 왕실에서 하사한 연()수식과 인로왕번(引路王幡)을 비롯하여 조선 후기에 제작한 석가불도, 신중도, 지장보살도는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조선 전기에 제작된 묘법연화경은 국가지정문화재이다.

 

보암당 은영은 1971년에 오갈 데 없는 여신도들을 위하여 시자원(施慈院)이라는 양로원을 만들었는데, 여기서 순정효황후와 황후를 모셨던 마지막 궁녀들이 여생을 보냈다. 말 그대로 조선 왕실의 여인들과 마지막까지 함께한 사찰이다.

 

봉원사(奉元寺)     참조 링크: 봉원사(奉元寺)    홈피: http://bongwonsa.or.kr/

서울 서대문구 봉원사길(세브란스병원 뒤)에 위치한 한국불교태고종의 절이다. 889(진성여왕 3)에 도선국사가 금화산 서쪽에 있는 신도의 집을 희사 받아 창건한 뒤 반야사(般若寺)라 했다고 한다. 그 뒤 고려 말 공민왕 때 태고(太古) 보우가 중건·보수하고 금화사라고 개칭했다. 1651년 봄에 큰 화재로 많은 피해가 있었고, 1655년 다시 중건하였다. 그 후 6.25때 많은 피해가 있었지만 복원을 해서 지금의 봉원사가 되었다.

 

구한말에는 개화파인 이동인이 이곳 봉원사에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많은 개화파 인사들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근대문명과 관련된 책을 읽고, 자주 모여 토론을 벌이고 갑신정변을 모의하기도 했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 때문에, 서재필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곳 봉원사를 개화파의 온상이라고 하였다.

 

봉은사(奉恩寺)     참조 링크: 봉은사(奉恩寺)   홈피: www.bongeunsa.org

(일제시대의) 봉은사 사진출처:국립중앙박물관

봉은사는 서울시 강남구 봉은사로 531 (삼성동)에 위치한 도심 속의 고찰(古刹)로 대한불교 조계종 직영사찰이다. 본래 경기도 광주 수도산(修道山)의 산사(山寺)였지만 지금은 서울시 로 편입되어 강남구 도심 한가운데 있는 사찰이 되었다. 돈이 많은 부자(富者) 절로 소문나있다.

 

서기 794년 신라 원성왕 시절에 처음으로 창건된 것으로 전해진다. 원래의 이름은 '견성사(見性寺)'였고, 위치도 선릉 근처라 지금과 달랐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서 성종의 능인 선릉을 지키는 '능침사찰'이 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 많은 땅을 하사받았다. 이 때문에 절 이름을 '은혜를 받든다.'라는 뜻의 봉은(奉恩)으로 바꾸었다.

 

이후 불교를 사랑했던 문정왕후 때에 승과시(僧科試) 시험장이 되었다. 이 때문에 숭유억불을 국시로 삼았던 조선 유생들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았다. 그나마 능침사찰이라 회암사처럼 불태워지는 사태는 없었다. 하지만 승과고시 때문에 당시 학식 있는 사람들이 승려로 입산하였고, 휴정, 유정 같은 명망 있는 승려들이 나와 임진왜란 등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1939년에 큰 화재를 겪었으며, 19506.25 전쟁 때 전각이 대부분 파괴되었다가 이후에 재건되었다. 때문에 봉은사 건물은 판전 등 소수의 건물을 제외하면 주로 1940년대와 1980년대 전후로 재건된 것들이다.

 

수국사(守國寺)     참조 링크: 수국사(守國寺)    홈피: www.suguksa.org/

- ‘수국사관련 이 부분의 내용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가져온 것이다. -

서울시 은평구 구산동에 있는 절이다. 크기는 5층짜리 건물 정도로 20세기에 지어졌다.

외부와 내부 모두 99.9% 순금이라고 하나 사실 금으로 지은 것이 아니고 얇은 금박을 나무에 붙인 것이라고 한다. 기존의 사찰 건물은 나무에 단청을 칠하는데,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나무가 썩고 단청이 지워진다. 이를 보수하는 비용이 생각보다 많이 들어간다. 하지만 금을 입히면 이 비용을 많이 줄일 수 있다고 한다.

 

수종사(水鐘寺)     내용출처: 수종사(水鐘寺)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운길산(雲吉山)에 있는 사찰로 조선전기 제7대 세조의 명으로 중창 된 사찰이다. 수종사에 대한 유래는, 1458(세조 4) 세조가 금강산(金剛山) 구경을 다녀오다 이수두(二水頭 : 兩水里)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한밤중에 난데없는 종소리에 잠을 깬 왕이 부근을 조사하자, 주변에 바위굴이 있고, 굴 안에 18나한(羅漢)이 있었으며, 굴 안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종소리처럼 울려나와 이곳에 절을 짓고 수종사라고 하였다고 전해온다.

 

두물머리를 깨우는 종소리를 들어보려면 요걸 클릭. 추후 링크가 끊어지면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 나올 수도 있으며, 아래 동영상 보려면 ▷클릭=> https://youtu.be/bnsWLJBgGfg

 

 

운길산 수종사(水鐘寺)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양수리 兩水里)를 바라볼 수 있는 저명한 경관(景觀) 전망지이다. 예부터 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의 풍광을 시··화로 남겼으며, 서거정(1420~1488)은 수종사를 동방에서 제일의 전망을 가진 사찰이라 하였다. ·여름·가을·겨울 연중 내내 신록·단풍·설경이 신비스럽고, 일출·일몰·운해 등 어느 시간의 풍광이라도 대단히 아름다운 전망을 지니고 있어 조망지점으로서 경관(景觀) 가치가 큰 곳이다.

 

정약용은 일생을 통해 수종사에서 지낸 즐거움을 군자유삼락에 비교할 만큼 좋아했던 곳 이다. 또한 다선(茶仙)으로 일컬어지는 초의선사가 정약용을 찾아와 한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며 차를 마신 장소로 차문화와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현재 수종사는 삼정헌(三鼎軒)이라는 다실을 지어 차 문화를 계승하고 있어 차() 문화를 상징하는 사찰로 이름이 높다.

 

겸재 정선(1676~1759)의 경교명승첩(한강의 북한강·남한강 주변경관과 한강과 서울의 인왕산, 북악산 등의 경관을 그린 화첩으로 총 33점으로 이뤄짐)중 독백탄(獨栢灘)은 현재의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 兩水里의 경관을 보여주는 고서화로서 그 시대의 명승지 경관과 현재의 경관을 비교 감상할 수 있어 회화 가치가 높다.

 

연화사(蓮花寺)     참조 링크: 연화사(蓮花寺)

서울시 동대문구 제기로3110-3(회기동)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원찰로 세워진 사찰이다.

 

정각원(正覺院)     참조 링크: 정각원(正覺院)    홈피: www.heungcheonsa.net/

이 정각원 건물은 조선의 5대 궁궐 중 하나인 경희궁의 정전(正殿)이었던 숭정전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경희궁 전체를 완전히 해체하면서 숭정전의 목재들이 팔려 나왔고, 그 것을 일본 사찰이었던 대화정 조계사(大和町 曹溪寺)가 사들여 법당으로 사용하였다. 이 조계사는 현재의 대한불교 조계종의 조계사와는 다른 절이다.

 

이후 이 절의 부지에 동국대학교 건물들이 세워지자 1976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져 동국대학교 안의 법당이 되었다.

 

(사족) 동국대학교 근처의 서울 신라호텔 자리에는 박문사(博文寺: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사당으로 1932년 완공된 건물)가 있었다. 이때 경희궁에 있던 흥화문을 헐어 옮겨와 박문사 입구 문으로 썼다.

 

현재 경희궁의 원래 자리에는 새로운 숭정전으로 복원되어 있다. 원래의 (동국대)정각원을 다시 제자리로 옮기려 했으나 건물이 낡아 이전이 어려웠다. 1989년부터 6년에 걸쳐 원래 자리에 새 건물을 지어 복원했다고 발표했다. 그렇지만 복원된 경희궁 숭정전의 완성도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이제 와서 불교 건물로 사용되고 있는 정각원을 다시 회수하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

 

조계사(曹溪寺)     참조 링크: 조계사(曹溪寺)    홈피: www.jogyesa.kr/

조계사 대웅전

대한불교 조계종의 총본산인 조계사는 서울시 종로구 우정국로 55 (수송동)에 위치한 사찰 이다. 사찰 규모는 아담하지만 대한민국 불교 최대 종단의 본사(本寺)답게 경복궁 근정전에 맞먹는 큰 대웅전이 있고, 경내에는 천연기념물 제9호인 백송이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 재위 4(1395)에 창건되었다고 말하나, 실질적 창건은 구한말 순종 융희 4(1910)에 되었다. 한국 근대사가 그렇듯, 조계사도 역사는 짧지만 매우 복잡하다. 한국불교의 친일과 민족투쟁 역사의 중심에 있던 절이기도 하다.

 

대한제국 시절, 한국불교에는 구심점이 될 종단이 없어 계속 밀고 들어오는 일본 불교 세력에 한국 불교가 위축되었다. 이런 상황을 개탄하여 만해 한용운 등 민족적 불교 인사들이 새 종단을 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에 1902년 흥인지문(동대문) 밖 지금의 창신동 창신초등학교 자리에 원흥사(元興寺)를 창건하고, 1908년에 각 도의 사찰 대표 65인이 원종(圓宗) 종무원을 설치하였다.

 

조선왕조 내내 유교 성리학을 숭상하고 불교는 억제하는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해 사찰()도 산으로 추방당하거나 방화(放火)로 사라지는 판에, 한양도성 사대문 안에 절이 생기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게다가 1895년까지는 승려는 천민 신분으로, 도성 출입마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사대문 안에 절을 세운다는 것은 억압받던 한국 불교계에 있어 의미가 컸으며 또한 시대가 달라졌음을 뜻했다.

 

갑신정변(甲申政變)과 우정총국(郵征總局)      참조 링크: 갑신정변 -나무위키

우정총국(郵征總局)

조계사 바로 옆에 있는 우정총국(郵征總局)은 갑신정변이 일어났던 곳으로 한국 최초의 우체국이라고 할 수 있는 건물이다.

 

갑신정변(甲申政變)1884(갑신년)에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 개화파가 서구식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이다. 일본공사와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난을 일으켰다. 급진 개화파는 여러 온건 개화파들을 살해했다. 윤태준, 한규직, 이조연 등 영선사 출신이나 민씨 척족 중에서 민영목, 민태호 그리고 조영하 등 여러 온건 개화파들이 살해당했다.

 

고종을 속이고 새 내각을 구성해 정강 14조 등 개혁을 추진하려 했으나 청나라 군사(淸軍)가 창덕궁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고 민중들이 일본공사관을 공격하자 계획이 좌절되었다.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하며 삼일천하로 끝났다.

 

이 정변은 고종에게도 큰 충격을 준 사건으로 급진 개화파와 온건 개화파 모두 상당수의 인재들이 사라져 향후 근대화에 걸림돌이 되고 청의 내정간섭이 심해지는 등 큰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

 

진관사(津寬寺)     참조 링크: 진관사(津寬寺)   홈피:  www.jinkwansa.org/

진관사

서울시 은평구 진관길 73 (진관동 354번지)에 위치한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조계사 말사로 북한산 진관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신라 진덕여왕 때에 처음 지었다는 유래가 있기는 하지만 이 사찰이 거의 창건 수준으로 대대적으로 중창된 것은 고려 초기의 일이었다. 고려 초 이곳은 진관(津寬)이라는 승려가 홀로 수행하던 신혈사(神穴寺)라는 이름의 작은 암자였다고 한다.

 

진관사가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고려 현종의 목숨을 구한 사찰임과 동시에 사찰에서 6백 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수륙대재덕분이기도 하다. 땅 위, ‘수륙재는 물속의 모든 의지할 곳 없는 영혼들과 아귀(餓鬼)를 위하여 법요를 열고 음식을 공양하는 행사이다. 진관사의 경우 조선 태조가 몸소 국가행사로 명한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 초기의 문신 권근이 태조의 명으로 지은 진관사수륙재조성기(津寬寺水陸社造成記)에 따르면 태조 6(1397) 태조가 이 절에 수륙사(水陸社)를 설치하고 여러 번 행차하여 수륙재를 지냈다고 한다.

 

이를 본받아 태종도 태종 13(1413) 이 절에서 아들 성녕대군(誠寧大君)을 위한 수륙재를 열고, 향과 제교서(祭敎書)를 내렸으며, 수륙재위전(水陸齋位田) 100결을 하사하여 재를 계속하게 하였다. 이후부터 진관사에서는 매년 1월 또는 215일에 수륙재를 열게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진관사 수륙대재(국가무형문화재 제126)라는 이름으로 해마다 음력 9월에 거행되고 있다.

 

그 뒤 세조 9(1463) 화재로 소실된 것을 성종 1(1470) 벽운(碧雲)이 중건하였으며, 철종 5(1854)과 철종 7(1858)에 중수하였다. 고종 16(1879)에 경운(慶雲)이 대방을 중수하였다. 1908년에는 송암(松庵)이 오층석탑을 세우고 1910년에 대웅전의 삼존상을 개금하였으며 명부전을 중수하면서 지장보살상을 개금하였다. 또한 독성전과 칠성각을 새로 지었다.

 

그러나 6.25 전쟁 때 나한전 등 3동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1964년부터 최진관 비구니가 당우를 차례로 재건하여, 현재에는 대웅전을 비롯한 명부전, 나한전, 독성전(獨聖殿), 칠성각, 홍제루(弘濟樓), 종각(鐘閣), 일주문, 선원(禪院), 대방(大房) 등을 갖추었으며, 비구니 수도도량으로 이용하고 있다.

 

2009년 칠성각 보수 당시 불단 뒷면에서 3.1운동 당시에 쓰였던 태극기와 신대한 2·3, 자유신종보, 조선독립신문 32·40호 경고문 등 국외 독립운동과 불교계의 관계를 알려주는 유물들이 새롭게 발굴되기도 했다.

 

호압사(虎壓寺)      참조 링크: 호압사(虎壓寺)   홈피:  www.hoapsa.org/

서울시 금천구 시흥 2동 호암산(虎巖山) 아래에 위치한 대한불교 조계종 사찰로 조계사의 말사(末寺)이다.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봉은사의 말사였다고 한다.)

 

화계사(華溪寺)      참조 링크: 화계사(華溪寺)   홈피:  www.hwagyesa.org/

화계사(華溪寺) 대웅전

중종 17(1522) 신월(信月)선사가 창건했다. 고려 광종 때 탄문(坦文)과 법인(法印)이 현재 화계사 근처 부허동(浮虛洞)에 세운 보덕암(普德庵)을 신월이 서평군 이공(西平君李公)과 함께 현 위치로 옮긴 것이다. 광해군 10(1618) 화재로 전소되어 도월(道月)이 중창했다. 이후 고종 3(1866)에도 낡은 건물들을 보수했다. 구한말에는 흥선대원군이 개인적으로 후원을 하였다.

 

회암사(檜巖寺)      참조 링크: 회암사(檜巖寺)   홈피:  www.hoeamsa.com/

경기도 양주시 천보산에 위치했던 사찰로 숭유억불 정책을 추진한 조선왕조에서도 왕과 왕후들의 비호를 받으며 '조선의 왕사(王寺)'라고 불렸던 조선 최대의 절이었다. 선대왕들의 제사를 지내는 사찰이므로 더욱 특별히 보호받았다. 행궁으로도 기능했으므로 그 모습이 궁궐 건축에 가까웠다.

 

태조 이성계는 회암사를 매우 아꼈다. 나옹화상의 제자인 무학대사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였으며,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찬례(讚禮: (), (), () 삼보(三寶)에 예배하고 그 공덕을 찬탄함)토록 하였다. 이성계가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회암사에서 수도생활까지 했을 정도였다. 비록 이성계는 조선의 왕이었지만 그 자신은 유학자 출신이 아니었으며, 불교문화 속에서 성장한 고려시대 인물인지라 불교를 좋아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나름대로 독실한 불자였던 세조 등에 힘입어 회암사도 계속 번창하였다. 성종 3(1472)에는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자 대왕대비인 정희왕후가 더 크게 중창하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에도 숭유억불 정책이 존재했으나, 실제로 많은 왕족들은 불교에 관심이 있었다. 조선 초기는 왕의 권력이 신하들보다 더 강했기에, 국왕의 개인적인 생각에 따라 신료들의 반대를 누르고 사찰을 지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 유학자들의 힘이 강해지고 점점 숭유억불 정책도 강경해지던 중, 16세기 후반에 원인 모를 화재로 폐사가 되었다. 19세기에 이 절터 근처에 재건한 작은 회암사가 남아있다.

 

회암사지(檜巖寺址)     참조 링크: 회암사지 -다음백과

회암사는 1313년 이전에 이미 절이 창건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1326년 고려에 온 인도 승려 지공이 창건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1376년 지공의 제자인 나옹이 이 절을 중창했다.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를 이곳에 머물게 했고, 그 자신도 퇴위 후 이곳에서 생활했다. 1472년 세조비인 정희왕후의 명으로 정현조가 중창했고, 명조 때에는 보우를 신임한 문정왕후의 비호로 전국제일의 수선도량이 되었다. 왕후가 죽은 뒤 보우가 처형되고 절도 황폐해졌다. 선조 이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옛 절터 부근에는 1977년 중건한 대웅전·삼성각·영성각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 회암사지 선각왕사비(보물 제387회암사지 부도(보물 제388), 회암사지 쌍사자석등(보물 제389) 등이 남아 있다.

 

흥천사(興天寺)     참조 링크: 흥천사(興天寺)   홈피:  www.heungcheonsa.net/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조계사의 말사로 서울시 성북구 돈암동에 위치한 이 곳은 조선 시대의 사찰로 원래 한양 도성 내에 있었다.

 

조선 태조 5(1396) 태조의 정비였던 신덕왕후 강씨가 죽자 태조는 강씨의 능원인 정릉을 도성 내에 조성하고, 강씨의 원찰로써 흥천사를 지었다. 흥천사를 지은 후 태조 7(1398) 7월에 열린 우란분재(盂蘭盆齋: 불교에서 사후에 고통 받고 있는 자를 위해서 음력 715일에 음식을 공양하는 의식)를 직접 참여하거나, 8월에는 신덕왕후의 천도회(薦度會:죽은 이의 넋을 극락으로 보내기 위해 행하는 의식 모임)에 사찰 승려들을 몸소 만나 시주하고 천도회를 주도하는 등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계모 신덕왕후를 거의 증오하다시피 했던 태종이 즉위한 뒤인 태종 3(1403)에 사찰에 딸린 전답과 노비의 수를 줄이고, 태종 8(1408)에는 절의 건물 170칸을 뜯어서 명() 사신들의 객사인 태평관(太平館)을 짓는데 사용했다. 그나마 사찰 자체를 없앤 것은 아니어서 태종 10(1410) 태조의 유지(遺旨)를 좇아 절을 수리하고 이듬해에는 사리각을 중수하였다.

 

세종 6(1424) 선교양종 통합 당시 선종에 속하게 되었다. 세종 19(1437)부터 세종 23(1441) 3월까지 왕명으로 사찰을 중수하였고, 세조 8(1462)에는 범종을 만들어서 이 사찰에 봉안하였으며, 옛 흥천사 부지에 의경세자의 부인이자 며느리인 한씨의 사저를 지어주기도 했다.

 

성종 11(1480) 절을 다시 중수하였으며, 연산군 10(1504) 대궐 안에 있던 내원당(內願堂)을 이 절로 옮겼는데, 그 해 12월에 화재로 절이 소실되어 사리각만 남았다. 중종 5(1510)에는 이 사리각까지 불타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고, 선조 2(1569) 사찰이 정릉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왕명으로 함취정(含翠亭) 옛 터로 절을 옮겨지었다.

 

정조 18(1794) 이 절의 승려 성민(聖敏), 경신(敬信) 등의 발원으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짓고 절 이름을 신흥사(神興寺)라 하였다. 그 뒤 헌종 12(1846) 구봉(九峰)이 칠성각(七星閣)을 지었고, 철종 1(1849) 성혜(性慧)가 적조암(寂照庵)을 창건하였으며, 철종 4(1853) 대웅전(지금의 극락전), 철종 6(1855) 명부전(冥府殿), 고종 2(1865) 대방(大房)과 요사채를 짓고 이름을 창건 당시의 이름인 흥천사로 되돌렸다.

 

[요약퀴즈]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퀴즈 1] (서울) 성북동에 있는 사찰로 법정 스님과 인연이 있는 절의 이름은?

[퀴즈 2] 북한산 아래에 있어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은 둘러봤을 사찰이다. 이 절의 이름은

[퀴즈 3] 도성 밖 비구니 사찰로 왕실과 후궁, 상궁 등 궁인에게 사랑받은 절 이름은?

[퀴즈 4] 신촌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뒤에 있는 한국불교 태고종의 절로 서재필은

           자서전에서 이곳을 개화파의 온상이라고 하였다. 이 절의 이름은?

[퀴즈 5] 본래 경기도 광주 수도산(修道山)의 산사(山寺)였지만, 지금은 서울시 강남구

           도심 한가운데 있는 사찰이 되었다. 돈이 많은 부자(富者) 절로 소문난 이 절은?

[퀴즈 6] 경기도 남양주 운길산(雲吉山)에 있는 사찰로 세조의 명으로 중창된 절이다.

           두물머리(양수리)를 바라볼 수 있는 저명한 경관 전망지인 이 절의 이름은?

[퀴즈 7] 국 불교 최대 종단인 조계종 本寺로 근정전 크기의 대웅전이 있는 이곳은?

[퀴즈 8] 조계사 바로 옆에 있는 한국 최초의 우체국으로 갑신정변이 일어난 곳의 이름은?

[퀴즈 9] 서울시 은평구에 있는 사찰로 고려 현종의 목숨을 구한 인연으로 왕실의 지원과

            보호를 받았다. 2009 3.1운동 당시에 쓰였던 태극기가 발견된 이곳은?

[퀴즈10] 이성계의 비호를 받아 '조선의 왕사(王寺)'라고 불렸던 경기도 양주에 있던 이

            사찰의 이름은 

 

[요약퀴즈 정답]

[퀴즈 1] 성북동에 있는 사찰로 법정 스님과 인연이 있는 절의 이름은? .=> 길상사

[퀴즈 2] 북한산 아래에 있어 오르내리는 사람은 둘러봤을 절이다 이곳은? .=> 도선사

[퀴즈 3] 비구니 사찰로 왕실, 후궁, 상궁 등 궁인에게 사랑받은 절 이름은? .=> 보문사

[퀴즈 4] 세브란스병원 뒤에 있는 한국불교 태고종의 절로 서재필은 자서전에서 이곳을

            ‘개화파의 온상이라고 하였다. 이 절의 이름은? .=> 봉원사

[퀴즈 5] 본래 경기도 광주 수도산(修道山)의 산사(山寺)였지만, 지금은 서울시 강남구

           도심 한가운데 있고, 돈이 많은 부자(富者) 절로 소문난 이 절은? .=> 봉은사

[퀴즈 6] 경기도 남양주 운길산(雲吉山)에 있는 사찰로 세조의 명으로 중창된 절이다.

           양수리를 바라볼 수 있는 저명한 경관 전망지인 이 절의 이름은? .=> 수종사

[퀴즈 7] 국 불교 최대 종단인 조계종 本寺인 이곳은? .=> 조계사

[퀴즈 8] 한국 최초의 우체국으로 갑신정변이 일어났던 곳의 이름은? .=> 우정총국

[퀴즈 9] 서울시 은평구에 있는 절로 고려 현종의 목숨을 구한 인연으로 왕실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 3.1운동 당시에 쓰였던 태극기가 발견된 이곳은? .=> 진관사

[퀴즈10] 조선왕실의 비호를 받아 '조선의 왕사(王寺)'라고 불렸던 경기도 양주에 있던 이

            사찰의 이름은? .=> 회암사

(계속)

 

  서울(한양) 탐구09-(서울)한강변의 亭子(정자)

<배경음악>: 국악한마당 -KBS전주| 계면조 계락 '청산도' -하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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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퀴즈]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퀴즈 1] (서울)한강의 상류에 있던 정자로 일명 '회행정(回行亭)'로 불렸던 정자의 이름은?

[퀴즈 2] 한명회(韓明澮, 14151487)의 별장이었던 한강 정자의 이름은?

[퀴즈 3] 정조의 효심이 묻어나는 정자로 노들강(한강) 건너 풍광이 멋진 정자 이름은?

[퀴즈 4] 처음에 희우정(喜雨亭)이라 불렸던 양화나루(楊花津) 서쪽에 있는 정자의 이름은?

[퀴즈 5] 경기도 파주시에 있는 정자로 황희 정승이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친구 삼아

           여생을 보내던 임진강 하류의 절경 지역에 있는 이 정자의 이름은?

 

한강의 亭子(정자)

다음 내용은 참조 링크: 한강의 정자 https://hangang.seoul.go.kr/archives/249 문헌에서 가져 온 것이다.

                              (상세한 내용은 원문을 클릭)

 

한강 상류로부터 하류 순으로 정리 배치하였고, 일부 내용을 추가하거나 편집, 요약하였다.

화양정(華陽亭) 일명 '회행정(回行亭)'

화양정(華陽亭)은 광진구 화양동 110번지 32·34호에 있던 정자이다. 이 일대는 태조가 한양으로 도성을 정할 당시 말을 먹이는 목장이었는데, 세종 14(1432)에 낙천정 북쪽 언덕에 정자를 세웠다. 정자의 이름은 동지중추원사 유사눌(柳思訥)주서(周書)가운데 '말을 화산 양지에 돌려보낸다(歸馬于華山之陽)'란 뜻을 취하여 '화양(華陽)'이라 하였다.

 

남쪽으로 한강의 흐름이 보이고 북쪽으로는 삼각산·도봉산·수락산·용마봉이 한 눈에 들어오는 국립목장 살꽂이벌(箭串坪 전곶평) 언덕 위에 있는 이 정자에서 세종은 방목한 말들이 떼 지어 노는 광경을 즐겼다고 한다.

 

한편 이 정자는 일명 '회행정(回行亭)'이라고 한다. 그 연유는 단종과 명성왕후와 관련이 있다. 세조 3(1457) 621일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다음날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영월로 귀양 갈 때 이 화양정에서 전송하였는데 "화양정, 화양정"하고 중얼거리며 이 길이 부디 다시 되돌아 올 수 있는 회행길이 되었으면 하고 떠났으나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이에 사람들이 슬퍼하며 그 원혼이나마 돌아오기를 비는 마음에서 화양정을 회행정으로 부르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고종 19(1882)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나 명성왕후가 변복(變服)을 하고 창덕궁 뒷문으로 나와 장호원으로 피해갈 때 광나루까지 가던 도중 이 곳 화양정에서 잠시 쉬어갔다고 한다. 뒷날 명성왕후가 창덕궁으로 환궁하게 되자 사람들이 '정말 화양정이 회행정이 되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화양정은 그 규모가 매우 웅장하였다고 한다. 사각정(四角亭)으로서 기둥 둘레가 한아름이 넘었으며 그 내부가 100여 칸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화양정은 1911721일 낙뢰(落雷)로 무너지고, 지금 이곳에는 서울시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된 650년이 넘는 고목을 비롯한 7그루의 느티나무 고목만 서 있다. 1987년에 서울시에서 표석(標石)을 설치하여 그 자취를 알리고 있다.

 

낙천정(樂天亭)

(복원된) 낙천정(樂天亭)

낙천정(樂天亭)은 조선 태종이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고 머물던 정자로, 광진구 자양동 446번지 현대아파트 단지 내에 있다. 이곳은 원래 화양동에서 동남쪽으로 한강변을 끼고 거슬러 올라간 곳 언덕 위였다. 이 언덕은 모양이 시루를 엎어 놓은 것 같다고 하여 시리미(甑山 증산) 또는 대산(臺山)이라 하였으며 후에 발산(鉢山)이라 하였다. 대산은 표고 42.8m 밖에 안되었으나 한강이 발아래 감돌아 흐르고 강 건너 잠실동·신천동과 그 멀리 남한산성이 병풍같이 둘러섰고, 남쪽에 청계산·관악산, 그리고 서쪽에는 남산이 한 눈에 들어오는 승지(勝地)였다.

 

태종은 그 18(1418) 왕위를 아들 세종에게 양위한 후 그해 9월 이 곳에 이궁(離宮)과 그에 딸린 정자를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인 세종 1(1419) 2월 낙성하고, 좌의정 박은(?)에게 명하여 정자의 이름을 짓게 하니 주역(周易)계사편의 '낙천지명고불우(樂天知命故不憂)'의 구절을 따서 '낙천(樂天)'이라 불렀다. 또한 의정부 제조 변계량(卞季良)에게 <낙천정기(樂天亭記)>를 짓게 하고 한성부윤 권홍(權弘)으로 하여금 이를 쓰게 하여 94일 판각하여 정자에 달았다.

 

태종은 낙천정에 행차하여 종종 중요한 정무를 친히 듣고 결정하기도 하고, 종친간의 화목을 다짐하기도 하였다. 즉 세종 1년 이 곳에서 세종과 함께 왜구에 대비하기 위하여 삼판선(三板船)을 꾸미게 하였고, 이해 6월 체찰사 이종무(李從茂) 등이 삼도 수군을 거느리고 대마도(對馬島)를 쳐서 평정하고 돌아오니, 그들을 위하여 환영연을 성대히 베풀고 상을 주었다. 세종 2년 정월부터 상왕(태종)과 대비인 원경왕후(元敬王后) 민 씨가 아예 이곳으로 옮겨 거처하게 되므로 왕은 수시로 나가 양전(兩殿)에 문안한 후 유숙(留宿 머물다 자고 옴)하고 돌아옴은 물론 왕비 또한 때때로 낙천정에 나가 문안드렸다. 4월에는 중국사신을 접대하였더니 사신이 감탄하여 하늘이 마련해 준 선경(仙境)이라 칭송하였다 하며, 때때로 상왕은 왕과 함께 이곳에서 매사냥을 즐겼다 한다. 세종 35월에는 오위진(五衛陣)이라는 군사훈련을 사열한 일도 있다.

 

세종 4(1422) 5월 상왕이 승하한 후 세종은 이 정자를 둘째 딸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하사하여 부마인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과 함께 아름다운 풍물을 즐기게 하였다. 성종 3(1472)에는 양잠을 장려하기 위한 잠실(蠶室)로도 이용되었다.

 

정자가 퇴락하여 없어진 후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 터는 도시개발로 인해 강변도로와 주택지가 되어 있었는데, 1987년에 서울시에서 한강변 문화유적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그 자취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1991년에는 옛 대산 기슭 부분 자양동 673번지에 새로이 정면 3, 측면 2, 주심포 팔작지붕의 정자를 건립하여 그 자취를 알리고 있다. 하지만 원래 위치는 그곳이 아니었다.

 

천일정(天一亭)

천일정(天一亭)은 남산 줄기가 동남쪽으로 뻗어나가 한강에 닿는 강안(江岸), 용산구 한남동 459번지에 있었다. 고려시대의 절 터였던 이곳에 조선 성종 때의 문신 김국광(金國光, 14151480)이 처음으로 정자를 지었으며,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소유를 거쳐, 한때 민영휘(閔泳徽, 18521935)의 소유이기도 하였다. 정자의 이름은 당나라 왕발(王勃)등왕각(藤王閣)서문에 있는'추수공장천일색(秋水共長天一色)'의 시구를 취하여 이름 지었다 한다.

 

3,000나 되는 넓은 터전에 동쪽으로 아늑한 안채가 있고 정남향으로 조금 높은 터에 청원당(淸遠堂)이란 현판이 걸려 있었으며, 그 아래 조금 낮은 터에 강을 내려다보고 바깥사랑채 격인 천일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강변 높은 곳에 축대를 쌓고, 앞쪽으로 돌출된 누의 아래로는 사각 장초석을 세웠고 팔작지붕을 하였었다.

 

멀리 강 건너 압구정이 바라보이던 곳으로 19506·25전쟁 때 폭격 맞아 없어졌고 지금은 그 부근에 한남대교가 놓여 있다.

 

압구정(狎鷗亭)        참조 링크: 압구정 -문화원형백과

압구정(狎鷗亭)은 강남구 압구정동 산 310번지 일대인 동호대교 옆 현대아파트 11동 뒤편에 있었으며, 세조 때의 권신인 상당부원군 한명회(韓明澮, 14151487)의 별장이었다. 명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예겸(倪謙)이 지은 '압구정'이란 정자의 이름은 한명회의 생활과는 다르게 부귀공명 다 버리고 강가에서 해오라기와 벗하여 지낸다는 뜻을 지니고 있어 이곳을 지나가는 문인·유지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하였다 한다.

 

이 정자는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곳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는데, 압구정의 배 띄우기는 경도승경(京都勝景) 중의 하나였다. 그 후 한명회는 관직을 사퇴하고 이곳에서 여생을 지내려 하니 성종 7(1476)에는 왕이 압구정시(狎鷗亭詩)를 친제(임금이 친히 시제를 내림)하여 하사하였고 조정 문신들도 차운(次韻)하니 그 시가 수백편이나 되었다 한다.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압구정도(狎鷗亭圖)〉

정자의 모습은 겸재(謙齋) 정선(鄭敾)압구정도(狎鷗亭圖)에 높은 언덕 위에 정자가 있는데 마루 둘레에 난간을 돌리고 팔작지붕을 한 형태로 그려져 있어, 소박한 일반적인 정자와는 달리 비교적 규모도 크고 주위 경치와 어울려 화려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9세기 말에는 박영효(朴泳孝, 18611939)의 소유가 되었으나, 갑신정변으로 박영효가 국적(國賊)으로 일체의 재산이 몰수될 때 이 정자도 헐렸다. 이후 1970년대 영동개발에 따라 현대아파트가 들어서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동네이름으로 남게 되었으며, 근래에 표석을 설치하여 압구정 터임을 밝혀 놓았다.

 

제천정(濟川亭)

제천정(濟川亭)은 조선시대 한강변에 위치했던 왕실(王室) 소유의 정자로,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와 함께 사랑을 받았던 대표적인 정자이다. 제천정은 보광동 강가 언덕 즉 한남대교 북쪽 어귀에서 서쪽으로 바라보이는 용산구 한남동 537번지 일대에 있었다. 세조 2(1456)에 세웠으며, 세조로부터 명종 18(1563)에 이르기까지 한강변 정자 가운데서 왕이 가장 자주 찾은 곳이었다.

 

이곳은 경도십영(京都十詠)에도 있듯이 '제천완월(濟川翫月)'이라 하여 달구경의 경치가 좋은 곳으로 꼽혔던 곳으로 광희문(光熙門)을 나와 남도지방으로 내려가는 길목 나루터 옆에 있었기 때문에 왕이 선릉(宣陵)이나 정릉(靖陵)에 친히 제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러 쉬기도 하였으며, 또한 중국사신이 오면 으레 이정자에 초청하여 풍류를 즐기게 하였다.

 

성종은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세상을 떠난 뒤 이 제천정에 자주 나와 정자의 규모가 작고 좁다 하여 이를 크게 고쳐 짓기도 하였다. 또한 명종 13(1558)에는 임금이 이 정자에 올라 수전(水戰)을 관람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인조 2(1624) 이괄(李适)의 난으로 왕이 왕대비와 함께 종묘와 사직단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공주(公州) 로 피난갈 때, 밤에 한강을 건너면서 이 제천정에 불을 질러 그 불빛에 의지하여 강을 건넜다는 것으로 미루어 이 때 불타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58년에 발행된 서울명소고적에 의하면 이 정자 건물은 청일전쟁 때까지도 남아 있었으며, 그 후 왕실로부터 미국인 언더우드(H. G. Underwood)에게 불하하였는데, 뒤에 어느 틈에 없어졌는지 그 자리마저 황량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효사정(孝思亭)

사진 및 내용 출처 : http://www.discovery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308007  

 

효사정(孝思亭)은 조선 초기 문인 노한이 모친을 그리워하며 지은 정자로 한강 변에 자리해 한강 조망이 좋다. 조선 초기 문신 노한(1376~1443)이 어머니를 여의고 3년 동안 시묘를 했던 곳에 지은 정자다. 노한은 시묘 살이 후에도 묘소를 떠나지 못해, 묘소 북쪽 바위 언덕의 효사정에 올라가 부모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효사정이라는 이름은 노한과 동서지간이었던 호조참판 강석덕이 효를 생각하는 정자라는 뜻을 담아 지었다. 당시 효사정은 효의 상징이었으며, 한강 변 정자 중 경관이 가장 좋은 곳으로 칭송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서울시 우수 조망명소로 선정됐을 정도로 풍광이 아름답다.

 

옛 효사정은 조선 성종 때 헐렸다. 지금의 효사정은 1993년 일본 신사가 있던 자리에 정면 3, 측면 2칸의 정자를 새로 지은 것이다. 효사정에 관한 옛 기록을 참고해 제자리를 찾아보았으나 주변 환경이 많이 변해 찾지 못하고, 옛터와 가까운 곳에 지었다고 한다. 지하철 9호선 흑석역 1번 출구에서 약 1분 걸으면 도착한다.

 

용왕봉저정(龍驤鳳翥亭)      참조 링크: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 - sillokwiki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은 동작구 노량진로3214-7 (본동)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 후기의 누정(樓亭)으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었다. 정조는 효심이 지극한 군주로 비명에 간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추모하는 일에 정성을 다 하였다. 사도세자의 원묘(園墓)는 처음에는 영우원(永祐園)이라 하여 지금 서울시립대학교 뒷산인 배봉산(拜峰山)에 있었는데 그 규모가 작고 초라하였다. 이를 가슴 아파하던 정조가 178911월에 화산(華山, 수원)으로 옮긴 후 현륭원(顯隆園)이라 하고, 해마다 친히 참배하였다.

 

정조가 수원에 갈 때마다 노들강(한강)에 배다리(舟橋)를 설치하고 건넜는데, 시간이 걸렸으므로 강을 건넌 후에 잠시 어가(御駕)를 머물게 하고 쉴 자리가 필요하여 작은 언덕에 행궁(行宮)으로 이 누정을 지었던 것이다. 당시의 모습은 이신(爾信)의 그림 <노량진주교(鷺梁津舟橋)><행궁도(行宮圖)>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이 누정은 정조 13(1789)에 건립을 시작하여 2년 후에 완공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원래 이 집 터는 노저(露渚) 이양원(李陽元, 15331592)의 집 터였다고 한다. 용양봉저정이란 이름은 '용이 뛰놀고 봉()이 높이 나른다'는 뜻으로, 이곳이 국왕이 잠시 머무는 행궁 구실을 하였으므로 곧 국왕 행차가 성대함을 뜻하는 것이다. 또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점심을 들었기 때문에 일명 '주정소(晝停所)'라 부르기도 하였다.

 

또 이 누정은 매우 크고 화려하여 여기서 내려다보면 강 언덕의 푸른 수림(樹林) 아래로 한강의 맑은 물결이 내려다보이고, 저 멀리 눈을 돌리면 남산 북악 사이로 서울 장안의 풍경이 그림같이 펼쳐져 있으므로 전망도 매우 좋은 곳이다. 수고롭게 강을 건너 이곳에서 간단한 연석(宴席)을 마련하고 서늘한 바람, 맑은 공기를 곁들여 술을 한잔 든다는 것 또한 흥취 있는 일이었다. 정조는 이른 아침 일찍 용양봉저정에 올라 이와 같은 정경의 일면을 읊은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이 행궁에 정문(正門)과 누정 등 두 세 채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종 때 유길준(兪吉濬)에게 하사된 후 전전하다가 1930년 일본인 이케다(池田)의 손에 들어가 건물 일부를 철거하고 부근 5,300여 평에 온천·욕장·운동장·식당 등을 둔 오락장으로 삼고 이름도 '용봉정(龍鳳亭)'으로 고쳐 부르는 수난을 당했다. 광복 후 이를 국유(國有)로 환원하여, 오락시설을 철거하고 원래의 이름으로 고쳤다.

 

현존하는 건물은 2단의 나지막한 기단 위에 사각기둥을 세웠으며, 건평 10평에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층 팔작지붕이다. 중앙부는 온돌방으로 꾸미고 사방에는 띠살 분합(分閤)을 달았으며, 방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퇴칸(퇴칸:집채의 원래 칸살 밖에 붙여 딴 기둥을 세워 만든 칸살)을 설치하여 마루를 꾸몄다. 정면 중앙 3칸은 개방되어 디딤돌을 통해 마루로 올라가게 되었고, 둘레에는 난간을 돌렸다. 네모 기둥머리에는 초익공(初翼工)을 결구(結構)하고, 이중량(二重樑)을 둔 5량구조(五樑構造) 겹처마 집으로 간결하면서도 격식을 갖춘 특수기능의 건물이다.

 

심원정(心遠亭)

심원정(心遠亭)은 용산구 원효로487번지에 있던 정자인데, 임진왜란 때 왜군과 명나라 군이 화전(和戰)을 위한 교섭을 벌였던 장소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쟁이 일어난 지 1개월도 못되어 수도 한성이 함락되었던 전세는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조선 관군의 수습,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 명나라 군의 원군(援軍) 등으로 점차 조·명 연합군 측이 우세해졌다.

 

특히 행주대첩(幸州大捷)으로 자신을 얻은 조선군이 한성을 향해 일대 반격 내지 소탕전을 전개하려고 할 무렵, 왜군은 평양 전투에서 패배하여 남산 산록을 중심으로 이 곳 용산 일대에 모두 후퇴 결집하고 있었다. 왜군들은 모두 이곳으로 쫓겨 들어와 무기와 식량 부족이 심각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한성을 탈출해야 한다는 절박한 사정에 놓여 있었고, 명나라는 전쟁을 더 이상 끌면서 확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행주대첩 이후 자력(自力)으로 한성을 탈환할 것을 도모하고 있던 조선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 초기부터 일기 시작했던 화의론(和議論)이 대두되었다. 사실상의 작전권을 장악하고 있던 명군은 왜군 측의 화의에 대한 요구를 구실 삼아 조선 측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화의를 진행시켰다. 이러한 화의에 대한 명나라와 왜군의 강화회담이 한강 특히 용산강(龍山江)과 이 곳 심원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 강화회담의 진행으로 용산강 일대를 차지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육상의 적을 섬멸하려던 우리 군의 작전계획은 차질을 빚었으나, 이 곳 심원정과 용산강 일대는 임진왜란 전쟁사에 있어서 한 전환점을 이룬 전적지(戰蹟址)로서의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그 후 이곳은 고종 때에는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의 별장이 되기도 하였으며, 현재는 정자는 없고 '왜명강화지처(倭明講和之處)'라고 음각(陰刻)된 비()가 남아 있다. 또 강화를 체결한 후 기념식수한 것이라 전해지고 있는 천연기념물 제6호로 지정된 백송(白松)과 느티나무 고목이 있어 옛 역사의 현장을 느끼게 한다.

 

망원정(望遠亭) = 희우정(喜雨亭)

복원된 망원정(望遠亭) -사진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망원정(望遠亭)은 양화나루(楊花津) 서쪽 언덕인 마포구 망원동 137, 207-1번지 일대에 있었다. 태종의 아들이자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1486)의 별장으로 세종 6(1424)에 건립되었다. 이 정자는 처음에는 희우정(喜雨亭)이라 하였는데, 세종 7(1425) 왕이 농사 형편을 살피러 이곳에 거둥하였다가 새 정자에 올랐을 때 때마침 기다리던 비가 내려 온 들판을 흡족하게 적시므로 왕이 매우 기뻐하여 정자의 이름을 희우정이라 붙인 것이라 한다. 효령대군은 이러한 왕의 행차와 명명(命名)에 깊이 감사하여 부제학(副提學) 신장(申檣)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고, 변계량(卞季良)에게 기문(記文)을 짓게 하였다.

 

변계량의 기문과 망원정의 주변 풍광을 노래한 시들에 의하면 정자가 사치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으며, 강변에 매우 가깝게 있고 누각 형식의 건물로 둘레에 난간이 돌려져 있었으며, 주위에는 소나무와 버드나무가 울창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작가 미상의 희우정 그림을 보면 강가 절벽 암반 위에 덤벙주초석(자연석을 가공 없이 그대로 사용한 초석)을 놓고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건물로서, 마루 둘레에는 난간을 돌리고 팔작지붕을 한 모습이다.

 

세종 27(1445) 왕이 이곳에 거둥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천(?)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포를 발사하며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을 하게하고, 세자와 대군 등이 희우정 서쪽 봉우리에 올라 관람하였다. 따라서 이 부근은 경치 좋은 명소로서만이 아니라 수륙군(水陸軍)의 훈련장으로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종 15(1484)에는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1488)이 정자를 고쳐 짓고 이름을 망원정이라 하였다. 이는 이 정자에 오르면 연희평(延禧坪)의 넓은 들판을 건너 도성 서북쪽의 산악지대를 바라볼 수도 있고, 또 동남쪽으로 한강을 끼고 펼쳐진 산야의 먼 경치를 잘 바라볼 수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성종은 세종 때의 예에 의하여 매년 봄 가을 이곳에 나와 농사 형편을 시찰하고 또 수전 연습을 관람하였으며 문인 명사들과 시주(詩酒)를 즐기기도 하였다.

 

그 후 연산군 12(1506)에는 연산군의 향락행위를 위하여 한강 명소인 망원정을 크게 확장할 것을 명하였다. 이 때 지붕은 초가로 하고 건물은 천 여 명이 앉을 만큼 크게 짓게 하며, 정자 위에서 바라다 보이는 건물은 모두 철거하도록 하였으며, 정자의 이름도 수려정(秀麗亭)으로 고치게 하였다. 그러나 이해 9월 중종반정으로 모든 공사는 중지되고 철거됨에 따라 망원정도 다시 옛 모습으로 명사들이 즐기는 명소가 되었다. 이곳은 경치가 매우 좋아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던 연회장으로도 사용되었으며 잠두봉(蠶頭峰)과 가깝기 때문에 잠두봉을 찾는 길에 이곳에 들르는 사신도 있었다.

 

그러나 망원정은 1925년 을축년(乙丑年) 대홍수 때에 유실되어 마포구 망원동 동명에서만 그 자취를 찾을 수 있었다. 그후 서울시에서는 1986년에 한강변 문화유적 복원계획의 일환으로 문헌 고증과 현지 발굴조사를 통해 망원정을 복원하기로 결정하였다. 망원정 복원공사는 1988620일부터 19891020일까지 시행되었으며, 원래 위치에서 약간 벗어나 마포구 동교로8안길 23 (합정동)에 대지 341.5평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2층 팔작기와집 누각으로 복원되었다. 그리고 1990년에 망원정 터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9호로 지정 보전하고 있다.

 

반구정(伴鷗亭)       참조 링크: 반구정 -위키백과

갈매기를 벗삼는 반구정(伴鷗亭)-(복원)

서울에 압구정(狎鷗亭)이 있다면 서울시에 속한 정자는 아니지만 갈매기와 노닌다는 반구정(伴鷗亭)은 경기도 파주시에 있다. 조선 세종 때 유명한 정승이었던 황희(13631452)가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친구 삼아 여생을 보내던 곳이다. 임진강 하류의 절경 지역에 세워진 정자로 경기도의 문화재자료 제12호로 지정되었다.

 

바로 위쪽에 앙지대(仰止臺)가 있으며, 낙하진과 가깝게 있어 원래는 낙하정이라 불렀다.

분단의 현실을 체감할 수 있는 철조망이 반구정 언덕과 임진강을 가로 막아 낙조가 들면 더없는 슬픔과 아름다움을 한꺼번에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미수 허목선생이 지은 반구정기(伴鷗亭記)를 보면 정자는 파주 서쪽 15리 임진강 아래에 있고 조수 때마다 백구가 강 위로 모여들어 들판 모래사장에 가득하다. 9월이면 갈매기가 손으로 온다. 서쪽으로 바다는 30리 이다.’라고 아름다운 풍광을 묘사해 놓았다.

 

반구정은 황희가 죽은 후 조상을 추모하는 전국의 선비들이 유적지로 보호하여 오다가 한국전쟁 때 모두 불타 버렸다. 그 뒤 이 근처의 후손들이 부분적으로 복구해 오다가 1967년 크게 고쳐지었다. 건물 규모는 앞면 2· 옆면 2칸이며기둥 윗부분과 옆면 등에 꽃무늬 장식을 돌려 붙였다.

 

[요약퀴즈]

[퀴즈 1] (서울)한강의 상류에 있던 정자로 일명 '회행정(回行亭)'로 불렸던 정자의 이름은?

[퀴즈 2] 한명회(韓明澮, 14151487)의 별장이었던 한강 정자의 이름은?

[퀴즈 3] 정조의 효심이 묻어나는 정자로 노들강(한강) 건너 풍광이 멋진 정자 이름은?

[퀴즈 4] 처음에 희우정(喜雨亭)이라 불렸던 양화나루(楊花津) 서쪽에 있는 정자의 이름은?

[퀴즈 5] 경기도 파주시에 있는 정자로 황희 정승이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친구 삼아

           여생을 보내던 임진강 하류의 절경 지역에 있는 이 정자의 이름은?

 

[요약퀴즈 정답]

[퀴즈 1] 한강 상류의 정자로 일명 '회행정(回行亭)'로 불렸던 정자의 이름은? .=>화양정

[퀴즈 2] 한명회(韓明澮, 14151487)의 별장이었던 한강 정자의 이름은? .=>압구정

[퀴즈 3] 정조의 효심이 묻어나는 노들강 건너의 정자는?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

[퀴즈 4] 희우정(喜雨亭)이라고도 불렸던 양화나진서쪽에 있는 정자의 이름은? .=>망원정

[퀴즈 5] 경기도 파주에 있는 정자로 황희 정승이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친구 삼아

여생을 보낸 임진강 하류 절경 지역의 정자의 이름은? .=>반구정(伴鷗亭)

 

(계속)

 

서울(한양) 탐구10-(서울의) 사찰()

 

<배경 영상 음악>  삼귀의(三歸依)와 반야심경(般若心經) 등 

삼귀의(三歸依)는 삼보[三寶]인 불[佛]. 법[法]. 승[僧]에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은 불교의 중심이 되는 경전으로《대반야바라밀다경》의 요점을 간략하게 설명한 짧은 경전으로, 당나라 삼장법사인 현장(玄裝)이 번역한 것이다. 260자로 되어 있다.

 

 추후 링크가 끊어지면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 나올 수도 있으며, 

 아래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보이면   https://www.youtube.com/embed/cN0ArYAF7oM/span>  <=요걸 클릭

 

 

* 본문 중 밑줄 친 링크는 본문 내용을 가져오거나 참고한 곳으로 필요시 밑줄 친 link를 클릭.

, 밑줄 친 링크는 현재는 연결되지만 추후 링크 주소 변경되면 연결이 안 될 수도 있음.

 

[요약퀴즈]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퀴즈 1] (서울) 성북동에 있는 사찰로 법정 스님과 인연이 있는 절의 이름은?

[퀴즈 2] 북한산 아래에 있어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은 둘러봤을 사찰이다. 이 절의 이름은

[퀴즈 3] 도성 밖 비구니 사찰로 왕실과 후궁, 상궁 등 궁인에게 사랑받은 절 이름은?

[퀴즈 4] 신촌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뒤에 있는 한국불교 태고종의 절로 서재필은

           자서전에서 이곳을 개화파의 온상이라고 하였다. 이 절의 이름은?

[퀴즈 5] 본래 경기도 광주 수도산(修道山)의 산사(山寺)였지만, 지금은 서울시 강남구

           도심 한가운데 있는 사찰이 되었다. 돈이 많은 부자(富者) 절로 소문난 이 절은?

[퀴즈 6] 경기도 남양주 운길산(雲吉山)에 있는 사찰로 세조의 명으로 중창된 절이다.

           두물머리(양수리)를 바라볼 수 있는 저명한 경관 전망지인 이 절의 이름은?

[퀴즈 7] 국 불교 최대 종단인 조계종 本寺로 근정전 크기의 대웅전이 있는 이곳은?

[퀴즈 8] 조계사 바로 옆에 있는 한국 최초의 우체국으로 갑신정변이 일어난 곳의 이름은?

[퀴즈 9] 서울시 은평구에 있는 사찰로 고려 현종의 목숨을 구한 인연으로 왕실의 지원과

            보호를 받았다. 20093.1운동 당시에 쓰였던 태극기가 발견된 이곳은?

[퀴즈10] 이성계의 비호를 받아 '조선의 왕사(王寺)'라고 불렸던 경기도 양주에 있던 이

            사찰의 이름은?   

    

내용출처:    (불교)/한국 - 나무위키

[나무위키]-링크 홈페이지 현 위치(주소)
관문사(觀門寺) www.gwanmunsa.org/main 서울 서초구 우면동  
금선사(金仙寺) www.geumsunsa.org/ 서울 종로구 비봉길 137
길상사(吉祥寺) http://kilsangsa.info/ 서울 성북구 성북동 323(선잠로568)
도선사(道詵寺) www.doseonsa.org/ 서울 강북구 삼양로173 504(우이동 264)
묘각사(妙覺寺) www.myogaksa.net/ 서울 종로구 숭인동 178-3
보문사(普門寺) http://www.bomunsa.or.kr/ 서울 성북구 보문동3가 168
봉원사(奉元寺) http://bongwonsa.or.kr/ 서울 서대문구 봉원사길 120
봉은사(奉恩寺) www.bongeunsa.org 서울 강남구 봉은사로 531 (삼성동)
수국사(守國寺) www.suguksa.org/ 서울 은평구 구산동
수종사(水鐘寺) x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1060
연화사(蓮花寺) x 서울 동대문구 제기로31 10-3(회기동) 
정각원(正覺院) https://jeonggak.dongguk.edu/ 서울 중구 필동로1길 30
조계사(曹溪寺) www.jogyesa.kr/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55
진관사(津寬寺) www.jinkwansa.org/ 서울 은평구 진관길 73
호압사(虎壓寺) www.hoapsa.org/ 서울 금천구 호암로 278
회암사(檜巖寺) www.hoeamsa.com/ 경기도 양주시 회암사길 281
화계사(華溪寺) www.hwagyesa.org/ 서울 강북구 화계사길 117
흥천사(興天寺) www.heungcheonsa.net/ 서울 성북구 흥천사길 29

조계사, 봉은사, 진관사, 화계사, 금선사, 묘각사에서 등에서 운영하는 템플스테이(템플라이프)에 참여하면 사찰 체험과 함께 그 절의 내력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알림-

이 글 내용은 [나무위키 www.namu.wiki]에서 대부분 가져왔지만, ‘가나다순으로 배열하고 편집 요약하였다.

원문을 보려면 클릭=> (불교)/한국 - 나무위키

 

* 1: 사찰 설명 중 금선사’ ‘도선사’ ‘묘각사’ ‘수국사를 제외한 나머지는 [나무위키]에서 가져 왔다.

* 2: 경기도 지역의 사찰이지만 수종사는 태조 이성계, ‘회암사는 세조와 관련이 깊어 본 자료에 포함

시켰다.

 

 

 - 가나다순  -

관문사(觀門寺)    참조 링크: 관문사(觀門寺)   www.gwanmunsa.org/main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에 위치한 대한불교천태종 사찰로 1970년 천태종 중창조(重創祖)였던 상월원각대조사가 큰 천태사원을 세우라는 유지를 받들어 시작했다. 1996113일 법당 상량식을 거쳐 19971231일에 불사를 마쳤다.

 

금선사(金仙寺)   참조 링크: 금선사(金仙寺)    www.geumsunsa.org/

금선사(金仙寺)는 북한산국립공원 남서쪽 산기슭(서울시 종로구 비봉길 137)에 있는 사찰로

조선 초, 태조 이성계 곁에서 조선의 건국과 한양 천도를 도왔던 무학대사가 창건했다.

 

금선사는 조선 후기 정조 임금과 관련한 설화가 전해져온다. 대구 파계사에서 수행정진 중이던 용파스님은 사찰에 부과되는 각종 부역으로 전국의 사찰이 피폐하게 되자 왕과 담판을 지으려고 서울로 올라왔다. 어느 날 임금을 만나 담판을 하였는데 임금은 왕자의 탄생을 조건으로 걸게 된다. 이후 임금의 후궁인 수빈 박씨의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아들이 태어날 것을 점지하였고 수빈 박씨가 음력 618일 아들을 낳았다. 같은 날 목정굴에서 기도하던 농산스님이 앉은 채로 열반에 들었다. 이에 농산스님이 열반에 들어 수빈 박씨 몸에서 다시 태어난 것이라 여기고 해마다 이날 순조 임금의 탄신제를 올리고 있다.

 

금선사는 일제강점기에 전소되어 중창된 지가 60년밖에 되지 않기에 유형문화재가 많지 않다.(내용출처: 위키백과)

    

길상사(吉祥寺)   참조 링크: 길상사(吉祥寺)    http://kilsangsa.info/

길상사 사진출처: 위키백과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 323(선잠로5 68)에 위치한 불교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 송광사의 말사이다1997년에 세워졌으므로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최고급 요정이었던 대원각(大苑閣)이 불교 사찰로 탈바꿈한 특이한 설립 이력이 있는 곳이다.

 

본래는 '대원각'이라는 이름의 고급 요정이었으나 요정의 주인이었던 고 김영한(법명 길상화)이 법정 스님에게 자신이 소유한 요정 부지를 시주하여 사찰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1995613일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 말사인 '대법사'로 등록하여 사찰이 되었고, 초대 주지 로 현문이 취임하였다. 1997년에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재등록되었다.

 

길상사(吉祥寺)의 절 이름은 길하고 상서로운 절이란 의미로, 묘길상(妙吉祥) 곧 문수보살의 별칭에서 인용된 불교용어이며, 승보사찰(僧寶寺刹) 송광사(松廣寺)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내용출처: 위키백과)

 

도선사(道詵寺)       참조 링크: 도선사(道詵寺)   홈피:  www.doseonsa.org/

서울시 강북구 삼양로173504(우이동 264) 북한산 만경대 하단부에 위치한 대한불교 조계종 계열의 사찰이다. 신라 경문왕(景文王) 2(862)에 도선(道詵)이 세웠다. 도선은 이곳의 산세가 1,000년 뒤의 말법시대(末法時代)에 불법을 다시 일으킬 곳이라고 예견하고 절을 창건한 뒤, 큰 암석을 손으로 갈라서 마애관음보살상을 조각하였다고 한다.

 

그 뒤 조선 후기까지의 중건·중수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북한산성을 쌓을 때는 승병들이 이 절에서 방번(防番: 보초 임무)을 서기도 하였다. (내용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묘각사(妙覺寺)     참조 링크: 묘각사(妙覺寺)   홈피:  www.myogaksa.net/

서울시 종로구 숭인동 178-3 낙산 동쪽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불입종의 총본산이다. 법화경을 중심으로 수행과 대중 불교운동을 지향한 법화신앙(法華信仰)의 중심사찰로현 위치에 절을 세우면 서울이 평안하고 시민생활에 안정을 가져온다는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터를 잡았다고 한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석굴암(石窟庵), 요사채가 있다.(내용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웅전은 1975년에 착공하여 19816월에 완공한 건물로서, 내부 천장이 매우 높고 지붕은 청기와를 사용하였다. 법당의 본존불은 청동불로서 합장을 한 특이한 모습이며, 좌우에는 4대 보살상, 뒤편에는 목각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 석굴암의 불상은 모두 북향을 하였는데, 일반적인 불상 배치법과는 달리 북쪽을 향한 것은 이북동포의 안녕과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뜻에서 취한 것이라고 한다.

 

보문사(普門寺)     참조 링크: 보문사(普門寺)    홈피:  http://www.bomunsa.or.kr/

대한불교 보문종의 총본산인 보문사는 고려 예종 10(1115) 담진(曇眞) 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창건 당시부터 비구니 즉 여승들을 위한 사찰이었다. 조선 시대에도 '탑골승방'이라고 불리며 비구니들이 거처하던 도성 밖 4대 비구니사찰 가운데 하나였다.

 

대한불교 보문종의 실제 개조(開祖)이자 중흥조는 일제강점기에 보문사를 중창한 비구니 긍 탄(亘坦: 1885-1980)과 그 제자 보암당 은영(恩榮: 1910-1981)이다.

 

2017년에 보문사 극락보전을 중수할 때에 발견된 상량문에 따르면 청 건륭 12(조선 영조 23, 1747) 처음 중건하고 도광 4(순조 24, 1824)과 동치 4(고종 2, 1865)에 더 중수했다. 동치 4년 상량문에는 조선 왕실의 시주를 받아 불사를 진행하고 후궁과 상궁 등 궁인에서부터 사대부, 평민에 이르기까지 불사에 동참하였다는 내용도 있다.

 

보문사에는 왕실에서 하사한 연()수식과 인로왕번(引路王幡)을 비롯하여 조선 후기에 제작한 석가불도, 신중도, 지장보살도는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조선 전기에 제작된 묘법연화경은 국가지정문화재이다.

 

보암당 은영은 1971년에 오갈 데 없는 여신도들을 위하여 시자원(施慈院)이라는 양로원을 만들었는데, 여기서 순정효황후와 황후를 모셨던 마지막 궁녀들이 여생을 보냈다. 말 그대로 조선 왕실의 여인들과 마지막까지 함께한 사찰이다.

 

봉원사(奉元寺)     참조 링크: 봉원사(奉元寺)    홈피: http://bongwonsa.or.kr/

서울 서대문구 봉원사길(세브란스병원 뒤)에 위치한 한국불교태고종의 절이다. 889(진성여왕 3)에 도선국사가 금화산 서쪽에 있는 신도의 집을 희사 받아 창건한 뒤 반야사(般若寺)라 했다고 한다. 그 뒤 고려 말 공민왕 때 태고(太古) 보우가 중건·보수하고 금화사라고 개칭했다. 1651년 봄에 큰 화재로 많은 피해가 있었고, 1655년 다시 중건하였다. 그 후 6.25때 많은 피해가 있었지만 복원을 해서 지금의 봉원사가 되었다.

 

구한말에는 개화파인 이동인이 이곳 봉원사에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많은 개화파 인사들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근대문명과 관련된 책을 읽고, 자주 모여 토론을 벌이고 갑신정변을 모의하기도 했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 때문에, 서재필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곳 봉원사를 개화파의 온상이라고 하였다.

 

봉은사(奉恩寺)     참조 링크: 봉은사(奉恩寺)   홈피: www.bongeunsa.org

(일제시대의) 봉은사 사진출처:국립중앙박물관

봉은사는 서울시 강남구 봉은사로 531 (삼성동)에 위치한 도심 속의 고찰(古刹)로 대한불교 조계종 직영사찰이다. 본래 경기도 광주 수도산(修道山)의 산사(山寺)였지만 지금은 서울시 로 편입되어 강남구 도심 한가운데 있는 사찰이 되었다. 돈이 많은 부자(富者) 절로 소문나있다.

 

서기 794년 신라 원성왕 시절에 처음으로 창건된 것으로 전해진다. 원래의 이름은 '견성사(見性寺)'였고, 위치도 선릉 근처라 지금과 달랐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서 성종의 능인 선릉을 지키는 '능침사찰'이 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 많은 땅을 하사받았다. 이 때문에 절 이름을 '은혜를 받든다.'라는 뜻의 봉은(奉恩)으로 바꾸었다.

 

이후 불교를 사랑했던 문정왕후 때에 승과시(僧科試) 시험장이 되었다. 이 때문에 숭유억불을 국시로 삼았던 조선 유생들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았다. 그나마 능침사찰이라 회암사처럼 불태워지는 사태는 없었다. 하지만 승과고시 때문에 당시 학식 있는 사람들이 승려로 입산하였고, 휴정, 유정 같은 명망 있는 승려들이 나와 임진왜란 등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1939년에 큰 화재를 겪었으며, 19506.25 전쟁 때 전각이 대부분 파괴되었다가 이후에 재건되었다. 때문에 봉은사 건물은 판전 등 소수의 건물을 제외하면 주로 1940년대와 1980년대 전후로 재건된 것들이다.

 

수국사(守國寺)     참조 링크: 수국사(守國寺)    홈피: www.suguksa.org/

- ‘수국사관련 이 부분의 내용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가져온 것이다. -

서울시 은평구 구산동에 있는 절이다. 크기는 5층짜리 건물 정도로 20세기에 지어졌다.

외부와 내부 모두 99.9% 순금이라고 하나 사실 금으로 지은 것이 아니고 얇은 금박을 나무에 붙인 것이라고 한다. 기존의 사찰 건물은 나무에 단청을 칠하는데,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나무가 썩고 단청이 지워진다. 이를 보수하는 비용이 생각보다 많이 들어간다. 하지만 금을 입히면 이 비용을 많이 줄일 수 있다고 한다.

 

수종사(水鐘寺)     내용출처: 수종사(水鐘寺)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운길산(雲吉山)에 있는 사찰로 조선전기 제7대 세조의 명으로 중창 된 사찰이다. 수종사에 대한 유래는, 1458(세조 4) 세조가 금강산(金剛山) 구경을 다녀오다 이수두(二水頭 : 兩水里)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한밤중에 난데없는 종소리에 잠을 깬 왕이 부근을 조사하자, 주변에 바위굴이 있고, 굴 안에 18나한(羅漢)이 있었으며, 굴 안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종소리처럼 울려나와 이곳에 절을 짓고 수종사라고 하였다고 전해온다.

 

두물머리를 깨우는 종소리를 들어보려면 요걸 클릭. 추후 링크가 끊어지면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 나올 수도 있으며, 아래 동영상 보려면 ▷클릭=> https://youtu.be/bnsWLJBgGfg

 

 

운길산 수종사(水鐘寺)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양수리 兩水里)를 바라볼 수 있는 저명한 경관(景觀) 전망지이다. 예부터 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의 풍광을 시··화로 남겼으며, 서거정(1420~1488)은 수종사를 동방에서 제일의 전망을 가진 사찰이라 하였다. ·여름·가을·겨울 연중 내내 신록·단풍·설경이 신비스럽고, 일출·일몰·운해 등 어느 시간의 풍광이라도 대단히 아름다운 전망을 지니고 있어 조망지점으로서 경관(景觀) 가치가 큰 곳이다.

 

정약용은 일생을 통해 수종사에서 지낸 즐거움을 군자유삼락에 비교할 만큼 좋아했던 곳 이다. 또한 다선(茶仙)으로 일컬어지는 초의선사가 정약용을 찾아와 한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며 차를 마신 장소로 차문화와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현재 수종사는 삼정헌(三鼎軒)이라는 다실을 지어 차 문화를 계승하고 있어 차() 문화를 상징하는 사찰로 이름이 높다.

 

겸재 정선(1676~1759)의 경교명승첩(한강의 북한강·남한강 주변경관과 한강과 서울의 인왕산, 북악산 등의 경관을 그린 화첩으로 총 33점으로 이뤄짐)중 독백탄(獨栢灘)은 현재의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 兩水里의 경관을 보여주는 고서화로서 그 시대의 명승지 경관과 현재의 경관을 비교 감상할 수 있어 회화 가치가 높다.

 

연화사(蓮花寺)     참조 링크: 연화사(蓮花寺)

서울시 동대문구 제기로3110-3(회기동)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원찰로 세워진 사찰이다.

 

정각원(正覺院)     참조 링크: 정각원(正覺院)    홈피: www.heungcheonsa.net/

이 정각원 건물은 조선의 5대 궁궐 중 하나인 경희궁의 정전(正殿)이었던 숭정전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경희궁 전체를 완전히 해체하면서 숭정전의 목재들이 팔려 나왔고, 그 것을 일본 사찰이었던 대화정 조계사(大和町 曹溪寺)가 사들여 법당으로 사용하였다. 이 조계사는 현재의 대한불교 조계종의 조계사와는 다른 절이다.

 

이후 이 절의 부지에 동국대학교 건물들이 세워지자 1976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져 동국대학교 안의 법당이 되었다.

 

(사족) 동국대학교 근처의 서울 신라호텔 자리에는 박문사(博文寺: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사당으로 1932년 완공된 건물)가 있었다. 이때 경희궁에 있던 흥화문을 헐어 옮겨와 박문사 입구 문으로 썼다.

 

현재 경희궁의 원래 자리에는 새로운 숭정전으로 복원되어 있다. 원래의 (동국대)정각원을 다시 제자리로 옮기려 했으나 건물이 낡아 이전이 어려웠다. 1989년부터 6년에 걸쳐 원래 자리에 새 건물을 지어 복원했다고 발표했다. 그렇지만 복원된 경희궁 숭정전의 완성도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이제 와서 불교 건물로 사용되고 있는 정각원을 다시 회수하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

 

조계사(曹溪寺)     참조 링크: 조계사(曹溪寺)    홈피: www.jogyesa.kr/

조계사 대웅전

대한불교 조계종의 총본산인 조계사는 서울시 종로구 우정국로 55 (수송동)에 위치한 사찰 이다. 사찰 규모는 아담하지만 대한민국 불교 최대 종단의 본사(本寺)답게 경복궁 근정전에 맞먹는 큰 대웅전이 있고, 경내에는 천연기념물 제9호인 백송이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 재위 4(1395)에 창건되었다고 말하나, 실질적 창건은 구한말 순종 융희 4(1910)에 되었다. 한국 근대사가 그렇듯, 조계사도 역사는 짧지만 매우 복잡하다. 한국불교의 친일과 민족투쟁 역사의 중심에 있던 절이기도 하다.

 

대한제국 시절, 한국불교에는 구심점이 될 종단이 없어 계속 밀고 들어오는 일본 불교 세력에 한국 불교가 위축되었다. 이런 상황을 개탄하여 만해 한용운 등 민족적 불교 인사들이 새 종단을 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에 1902년 흥인지문(동대문) 밖 지금의 창신동 창신초등학교 자리에 원흥사(元興寺)를 창건하고, 1908년에 각 도의 사찰 대표 65인이 원종(圓宗) 종무원을 설치하였다.

 

조선왕조 내내 유교 성리학을 숭상하고 불교는 억제하는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해 사찰()도 산으로 추방당하거나 방화(放火)로 사라지는 판에, 한양도성 사대문 안에 절이 생기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게다가 1895년까지는 승려는 천민 신분으로, 도성 출입마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사대문 안에 절을 세운다는 것은 억압받던 한국 불교계에 있어 의미가 컸으며 또한 시대가 달라졌음을 뜻했다.

 

갑신정변(甲申政變)과 우정총국(郵征總局)      참조 링크: 갑신정변 -나무위키

우정총국(郵征總局)

조계사 바로 옆에 있는 우정총국(郵征總局)은 갑신정변이 일어났던 곳으로 한국 최초의 우체국이라고 할 수 있는 건물이다.

 

갑신정변(甲申政變)1884(갑신년)에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 개화파가 서구식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이다. 일본공사와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난을 일으켰다. 급진 개화파는 여러 온건 개화파들을 살해했다. 윤태준, 한규직, 이조연 등 영선사 출신이나 민씨 척족 중에서 민영목, 민태호 그리고 조영하 등 여러 온건 개화파들이 살해당했다.

 

고종을 속이고 새 내각을 구성해 정강 14조 등 개혁을 추진하려 했으나 청나라 군사(淸軍)가 창덕궁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고 민중들이 일본공사관을 공격하자 계획이 좌절되었다.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하며 삼일천하로 끝났다.

 

이 정변은 고종에게도 큰 충격을 준 사건으로 급진 개화파와 온건 개화파 모두 상당수의 인재들이 사라져 향후 근대화에 걸림돌이 되고 청의 내정간섭이 심해지는 등 큰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

 

진관사(津寬寺)     참조 링크: 진관사(津寬寺)   홈피:  www.jinkwansa.org/

진관사

서울시 은평구 진관길 73 (진관동 354번지)에 위치한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조계사 말사로 북한산 진관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신라 진덕여왕 때에 처음 지었다는 유래가 있기는 하지만 이 사찰이 거의 창건 수준으로 대대적으로 중창된 것은 고려 초기의 일이었다. 고려 초 이곳은 진관(津寬)이라는 승려가 홀로 수행하던 신혈사(神穴寺)라는 이름의 작은 암자였다고 한다.

 

진관사가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고려 현종의 목숨을 구한 사찰임과 동시에 사찰에서 6백 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수륙대재덕분이기도 하다. 땅 위, ‘수륙재는 물속의 모든 의지할 곳 없는 영혼들과 아귀(餓鬼)를 위하여 법요를 열고 음식을 공양하는 행사이다. 진관사의 경우 조선 태조가 몸소 국가행사로 명한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 초기의 문신 권근이 태조의 명으로 지은 진관사수륙재조성기(津寬寺水陸社造成記)에 따르면 태조 6(1397) 태조가 이 절에 수륙사(水陸社)를 설치하고 여러 번 행차하여 수륙재를 지냈다고 한다.

 

이를 본받아 태종도 태종 13(1413) 이 절에서 아들 성녕대군(誠寧大君)을 위한 수륙재를 열고, 향과 제교서(祭敎書)를 내렸으며, 수륙재위전(水陸齋位田) 100결을 하사하여 재를 계속하게 하였다. 이후부터 진관사에서는 매년 1월 또는 215일에 수륙재를 열게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진관사 수륙대재(국가무형문화재 제126)라는 이름으로 해마다 음력 9월에 거행되고 있다.

 

그 뒤 세조 9(1463) 화재로 소실된 것을 성종 1(1470) 벽운(碧雲)이 중건하였으며, 철종 5(1854)과 철종 7(1858)에 중수하였다. 고종 16(1879)에 경운(慶雲)이 대방을 중수하였다. 1908년에는 송암(松庵)이 오층석탑을 세우고 1910년에 대웅전의 삼존상을 개금하였으며 명부전을 중수하면서 지장보살상을 개금하였다. 또한 독성전과 칠성각을 새로 지었다.

 

그러나 6.25 전쟁 때 나한전 등 3동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1964년부터 최진관 비구니가 당우를 차례로 재건하여, 현재에는 대웅전을 비롯한 명부전, 나한전, 독성전(獨聖殿), 칠성각, 홍제루(弘濟樓), 종각(鐘閣), 일주문, 선원(禪院), 대방(大房) 등을 갖추었으며, 비구니 수도도량으로 이용하고 있다.

 

2009년 칠성각 보수 당시 불단 뒷면에서 3.1운동 당시에 쓰였던 태극기와 신대한 2·3, 자유신종보, 조선독립신문 32·40호 경고문 등 국외 독립운동과 불교계의 관계를 알려주는 유물들이 새롭게 발굴되기도 했다.

 

호압사(虎壓寺)      참조 링크: 호압사(虎壓寺)   홈피:  www.hoapsa.org/

서울시 금천구 시흥 2동 호암산(虎巖山) 아래에 위치한 대한불교 조계종 사찰로 조계사의 말사(末寺)이다.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봉은사의 말사였다고 한다.)

 

화계사(華溪寺)      참조 링크: 화계사(華溪寺)   홈피:  www.hwagyesa.org/

화계사(華溪寺) 대웅전

중종 17(1522) 신월(信月)선사가 창건했다. 고려 광종 때 탄문(坦文)과 법인(法印)이 현재 화계사 근처 부허동(浮虛洞)에 세운 보덕암(普德庵)을 신월이 서평군 이공(西平君李公)과 함께 현 위치로 옮긴 것이다. 광해군 10(1618) 화재로 전소되어 도월(道月)이 중창했다. 이후 고종 3(1866)에도 낡은 건물들을 보수했다. 구한말에는 흥선대원군이 개인적으로 후원을 하였다.

 

회암사(檜巖寺)      참조 링크: 회암사(檜巖寺)   홈피:  www.hoeamsa.com/

경기도 양주시 천보산에 위치했던 사찰로 숭유억불 정책을 추진한 조선왕조에서도 왕과 왕후들의 비호를 받으며 '조선의 왕사(王寺)'라고 불렸던 조선 최대의 절이었다. 선대왕들의 제사를 지내는 사찰이므로 더욱 특별히 보호받았다. 행궁으로도 기능했으므로 그 모습이 궁궐 건축에 가까웠다.

 

태조 이성계는 회암사를 매우 아꼈다. 나옹화상의 제자인 무학대사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였으며,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찬례(讚禮: (), (), () 삼보(三寶)에 예배하고 그 공덕을 찬탄함)토록 하였다. 이성계가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회암사에서 수도생활까지 했을 정도였다. 비록 이성계는 조선의 왕이었지만 그 자신은 유학자 출신이 아니었으며, 불교문화 속에서 성장한 고려시대 인물인지라 불교를 좋아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나름대로 독실한 불자였던 세조 등에 힘입어 회암사도 계속 번창하였다. 성종 3(1472)에는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자 대왕대비인 정희왕후가 더 크게 중창하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에도 숭유억불 정책이 존재했으나, 실제로 많은 왕족들은 불교에 관심이 있었다. 조선 초기는 왕의 권력이 신하들보다 더 강했기에, 국왕의 개인적인 생각에 따라 신료들의 반대를 누르고 사찰을 지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 유학자들의 힘이 강해지고 점점 숭유억불 정책도 강경해지던 중, 16세기 후반에 원인 모를 화재로 폐사가 되었다. 19세기에 이 절터 근처에 재건한 작은 회암사가 남아있다.

 

회암사지(檜巖寺址)     참조 링크: 회암사지 -다음백과

회암사는 1313년 이전에 이미 절이 창건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1326년 고려에 온 인도 승려 지공이 창건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1376년 지공의 제자인 나옹이 이 절을 중창했다.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를 이곳에 머물게 했고, 그 자신도 퇴위 후 이곳에서 생활했다. 1472년 세조비인 정희왕후의 명으로 정현조가 중창했고, 명조 때에는 보우를 신임한 문정왕후의 비호로 전국제일의 수선도량이 되었다. 왕후가 죽은 뒤 보우가 처형되고 절도 황폐해졌다. 선조 이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옛 절터 부근에는 1977년 중건한 대웅전·삼성각·영성각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 회암사지 선각왕사비(보물 제387회암사지 부도(보물 제388), 회암사지 쌍사자석등(보물 제389) 등이 남아 있다.

 

흥천사(興天寺)     참조 링크: 흥천사(興天寺)   홈피:  www.heungcheonsa.net/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조계사의 말사로 서울시 성북구 돈암동에 위치한 이 곳은 조선 시대의 사찰로 원래 한양 도성 내에 있었다.

 

조선 태조 5(1396) 태조의 정비였던 신덕왕후 강씨가 죽자 태조는 강씨의 능원인 정릉을 도성 내에 조성하고, 강씨의 원찰로써 흥천사를 지었다. 흥천사를 지은 후 태조 7(1398) 7월에 열린 우란분재(盂蘭盆齋: 불교에서 사후에 고통 받고 있는 자를 위해서 음력 715일에 음식을 공양하는 의식)를 직접 참여하거나, 8월에는 신덕왕후의 천도회(薦度會:죽은 이의 넋을 극락으로 보내기 위해 행하는 의식 모임)에 사찰 승려들을 몸소 만나 시주하고 천도회를 주도하는 등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계모 신덕왕후를 거의 증오하다시피 했던 태종이 즉위한 뒤인 태종 3(1403)에 사찰에 딸린 전답과 노비의 수를 줄이고, 태종 8(1408)에는 절의 건물 170칸을 뜯어서 명() 사신들의 객사인 태평관(太平館)을 짓는데 사용했다. 그나마 사찰 자체를 없앤 것은 아니어서 태종 10(1410) 태조의 유지(遺旨)를 좇아 절을 수리하고 이듬해에는 사리각을 중수하였다.

 

세종 6(1424) 선교양종 통합 당시 선종에 속하게 되었다. 세종 19(1437)부터 세종 23(1441) 3월까지 왕명으로 사찰을 중수하였고, 세조 8(1462)에는 범종을 만들어서 이 사찰에 봉안하였으며, 옛 흥천사 부지에 의경세자의 부인이자 며느리인 한씨의 사저를 지어주기도 했다.

 

성종 11(1480) 절을 다시 중수하였으며, 연산군 10(1504) 대궐 안에 있던 내원당(內願堂)을 이 절로 옮겼는데, 그 해 12월에 화재로 절이 소실되어 사리각만 남았다. 중종 5(1510)에는 이 사리각까지 불타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고, 선조 2(1569) 사찰이 정릉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왕명으로 함취정(含翠亭) 옛 터로 절을 옮겨지었다.

 

정조 18(1794) 이 절의 승려 성민(聖敏), 경신(敬信) 등의 발원으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짓고 절 이름을 신흥사(神興寺)라 하였다. 그 뒤 헌종 12(1846) 구봉(九峰)이 칠성각(七星閣)을 지었고, 철종 1(1849) 성혜(性慧)가 적조암(寂照庵)을 창건하였으며, 철종 4(1853) 대웅전(지금의 극락전), 철종 6(1855) 명부전(冥府殿), 고종 2(1865) 대방(大房)과 요사채를 짓고 이름을 창건 당시의 이름인 흥천사로 되돌렸다.

 

[요약퀴즈]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퀴즈 1] (서울) 성북동에 있는 사찰로 법정 스님과 인연이 있는 절의 이름은?

[퀴즈 2] 북한산 아래에 있어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은 둘러봤을 사찰이다. 이 절의 이름은

[퀴즈 3] 도성 밖 비구니 사찰로 왕실과 후궁, 상궁 등 궁인에게 사랑받은 절 이름은?

[퀴즈 4] 신촌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뒤에 있는 한국불교 태고종의 절로 서재필은

           자서전에서 이곳을 개화파의 온상이라고 하였다. 이 절의 이름은?

[퀴즈 5] 본래 경기도 광주 수도산(修道山)의 산사(山寺)였지만, 지금은 서울시 강남구

           도심 한가운데 있는 사찰이 되었다. 돈이 많은 부자(富者) 절로 소문난 이 절은?

[퀴즈 6] 경기도 남양주 운길산(雲吉山)에 있는 사찰로 세조의 명으로 중창된 절이다.

           두물머리(양수리)를 바라볼 수 있는 저명한 경관 전망지인 이 절의 이름은?

[퀴즈 7] 국 불교 최대 종단인 조계종 本寺로 근정전 크기의 대웅전이 있는 이곳은?

[퀴즈 8] 조계사 바로 옆에 있는 한국 최초의 우체국으로 갑신정변이 일어난 곳의 이름은?

[퀴즈 9] 서울시 은평구에 있는 사찰로 고려 현종의 목숨을 구한 인연으로 왕실의 지원과

            보호를 받았다. 2009 3.1운동 당시에 쓰였던 태극기가 발견된 이곳은?

[퀴즈10] 이성계의 비호를 받아 '조선의 왕사(王寺)'라고 불렸던 경기도 양주에 있던 이

            사찰의 이름은 

 

[요약퀴즈 정답]

[퀴즈 1] 성북동에 있는 사찰로 법정 스님과 인연이 있는 절의 이름은? .=> 길상사

[퀴즈 2] 북한산 아래에 있어 오르내리는 사람은 둘러봤을 절이다 이곳은? .=> 도선사

[퀴즈 3] 비구니 사찰로 왕실, 후궁, 상궁 등 궁인에게 사랑받은 절 이름은? .=> 보문사

[퀴즈 4] 세브란스병원 뒤에 있는 한국불교 태고종의 절로 서재필은 자서전에서 이곳을

            ‘개화파의 온상이라고 하였다. 이 절의 이름은? .=> 봉원사

[퀴즈 5] 본래 경기도 광주 수도산(修道山)의 산사(山寺)였지만, 지금은 서울시 강남구

           도심 한가운데 있고, 돈이 많은 부자(富者) 절로 소문난 이 절은? .=> 봉은사

[퀴즈 6] 경기도 남양주 운길산(雲吉山)에 있는 사찰로 세조의 명으로 중창된 절이다.

           양수리를 바라볼 수 있는 저명한 경관 전망지인 이 절의 이름은? .=> 수종사

[퀴즈 7] 국 불교 최대 종단인 조계종 本寺인 이곳은? .=> 조계사

[퀴즈 8] 한국 최초의 우체국으로 갑신정변이 일어났던 곳의 이름은? .=> 우정총국

[퀴즈 9] 서울시 은평구에 있는 절로 고려 현종의 목숨을 구한 인연으로 왕실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 3.1운동 당시에 쓰였던 태극기가 발견된 이곳은? .=> 진관사

[퀴즈10] 조선왕실의 비호를 받아 '조선의 왕사(王寺)'라고 불렸던 경기도 양주에 있던 이

            사찰의 이름은? .=> 회암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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