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茶)의 역사(펌글)

차나무의 어린 잎을 따서 만든 음료를 차라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율무차, 인삼차 등과 같이 곡류, 과실류, 식물의 잎·꽃·뿌리 등으로 만든 기호 음료 전체를 칭하기도 하나, 엄밀한 의미에서의 차란 차나무의 잎을 말한다. 율무차는 탕에 속하는 것이다. 

차나무는 식물학상 산차아목(山茶亞木), 산차과(山茶科), 차속(茶屬), 차종(茶種)의 종자 식물로서 학명은 카멜리아 시넨시스(Camellia sinensis)이다. 차나무의 원산지는 중국의 동남부와 인도의 아샘 지방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종은 잎과 나무가 작은 관목으로 '중국 소엽종'이라 하고 추위에 강하고 녹차용으로 적합하다. 

인도종은 인도와 중국 운남성 일부의 열대, 아열대에서 자라며, 잎이나 나무가 큰 교목으로 '인도 대엽종'이라 하고 홍차용으로 적합하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차나무는 모두 '중국 소엽종'으로 다 자란 경우도 2m를 넘지 않지만, 중국 운남성에는 높이가 30m나 되는 수령이 천년에 가까운 차나무도 있다. '중국 소엽종'과 '인도 대엽종'은 전혀 다른 종류의 차나무라는 주장도 있지만 염색체 수가 같으므로 세포유전학적인 차이는 없다고 한다. 

차나무가 자라기 위해서 기후는 연평균 기온 13도 이상, 강우량은 연평군 1,400mm이상이어야 하므로 고온과 많은 비가 필수적이다. 녹차용 차는 좀 냉랭하고 안개가 짙은 지방에 적합하며, 고지대일수록 차의 수획량은 적지만 향기가 좋다. 우리나라에서는 이곳 화개땅이 차나무가 자라는데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차의 기원에 대한 설은 중국 신농씨 때부터 음용했다는 설과 주나라 때부터 마셨다는 두가지 설이 팽팽하다. 그러나 전한시대인 기원전 59년에 작성된 노비매매문서인 <동약>에 차를 끓여 즐겨 마셨다는 기록을 미루어 보아 적어도 한나라 때부터는 차의 재배와 음용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차를 음용했을까? 이에 대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삼국사기>>에 따르면 7세기 초 신라 선덕여왕 때부터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삼국유사>>에는 서기 48년 가락국 수로왕에게 시집오는 야유국 공주의 배에 비단, 금, 은 등의 패물과 함께 차나무 씨가 실려있었다고 적혀 있었다. 신빙성 있는 기록은 흥덕왕 828년 사신이었던 대렴이 당나라에서 차나무 씨앗을 가져와 왕명으로 지리산에 심었는데, 이때부터 차를 마시는 풍속이 전래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 볼 때 삼국시대에는 이미 대중화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각 시기별 차의 역사를 보자


삼국시대

<<삼국사기>>를 통해 제 27대 선덕여왕 때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는 기록과 고구려 벽화를 통해 서도 삼국시기의 차생활을 엿볼 수 있다. 즉 고분에서 발굴된 전차(錢茶)를 통해 볼 때 무덤까지 넣은 점으로 미루어 고분의 주인공이 생전에 차를 몹시 좋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차를 부처에 공양한 점을 통해서도 이때 차를 널리 음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차생활은 일본 문헌을 통해 전해지는데, <<일본서기>>에는 메이천황13년 백제의 성왕이 담혜화상 등 16명의 스님에게 불구와 차를 일본에 보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동대사요록>>에도 백제의 귀화승인 행기가 차나무를 심었다는 기록되어 있다.


통일 신라시대

제 27대 선덕 여왕 때 차가 도입되어 이로부터 200년 후인 제 42대 흥덕왕때 지리산 자락에서 재배하였다. 신라시대에는 왕과 귀족, 승려와 화랑도, 학자들을 중심으로 차생활이 이루어졌다. 특히 승려와 화랑간에 차를 마시는 풍습이 성행했으며, 승려들의 차생활은 미륵신앙과 연관되어 행해진 기록이 전해진다. 차는 정신을 맑게 하고 잠을 쫓아 주기에 참선을 행하는 승려들에게 도움을 주고 나아가 불전에 공양하게 이른 것이다. 


고려 시대

차가 궁중음식으로 부각되면서 국가 의식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진다의식(進茶儀式)이 따랐다. 진다의식은 술과 과일을 임금에게 올리기 전에 임금이 먼저 차를 청하면 신하가 차를 올리는 것이다. 차는 왕이 신하와 백성에게 하사하는 귀중한 예물로서 외교상에서도 중요 예물이었다. 고려가 원에 예물을 보낼 때에도 향차가 들어 갔으며, 차를 맡아 보는 관아인 '다방'이 설치 되었다.

고려도 신라와 마찬가지로 귀족, 문인, 학자들이 차를 즐겼다. 초엽에는 귀족 중심이었으나 무신난 이후로는 문인과 학자들이 차문화를 꽃피웠다. 승려들은 수행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차를 즐겨 마셨다. 특히 사원에서는 차 끓이기를 서로 겨루는 '명선'이라는 풍속이 행해졌다.


조선 시대

조선 왕실은 고려와 달리 초엽부터 왕실 행사에 차를 의례로 행하는 일이 적었으며, 일부는 형식만 남아 차를 쓰지 않거나 술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관례적인 차생활은 계속되고 의식도 격식화되었다. 궁중에서 지내는 모든 제사에 차례가 포함되어 궁중에서의 차례를 관장하는 기관으로서 골처럼 '다방을 내시원에 설치되었다.

귀족, 승려, 문인 사이에서 애용되던 차는 고려시대의 전통이 조선시대 초엽까지 계속되어 차를 즐겨 마셨다. 일반 평민 역시 차가 생산되는 지방을 중심으로 기호음료로서 애용되었다.그러나 불교 배척으로 차를 가장 만힝 소비하는 사원의 재정사정이 곤란해지면서 차의 증산은 물론 사원 주변에 있던 많은 차밭을 관리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졌다. 그리하여 사원이 산속으로 쫓겨나 차생활의 명목이 이어졌던 사원과 평민 사이의 교류가 적어지므로서 차를 즐기는 인구도 줄어들었다. 

결국 조선 시대에는 차의 저변 확대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나마 남녘 사원에서 적으나마 차가 만들어져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에 19세기에 이르러 다시 차가 성행하였는데, '다도'라는 용어가 구체적으로 거론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당시 차를 중흥시킨 인물로서 정약용과 초의선사, 김정희 등을 들 수 있다. 정약용은 강진의 유배 생활 중 차를 즐기기 시작하여 자신의 호를 '다산'이라 칭하고 차와 관련한 많은 시를 남겼다. 또 강진을 떠나면서 제자들과 함께 '다신계'를 조직하기도 했다. 초의선사는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에도 통달하여 당시의 석학과 교류하면서 <동다송>과 <다신전>을 지어 우리 차의 우수성을 주장했다. 초의선사와 많은 논쟁을 벌였던 추사 김정희 역시 유배생활을 차로 달래면서 차에 관한 많은 시와 일화를 남겼다.


근대와 현대

19세기에 차를 마시는 여건이 새롭게 조성되면서 차를 마시는 풍습이 차츰 되살아 났지만 여전히 일부 계층에 그쳐 일반화되지 못하였다. 이에 19세기 외국인들이 왕실에 다업의 진흥을 건의하여 1883년부터 '농상사'라는 관청이 생겨났다. 이곳은 차의 재배를 관장하고 차 재배를 위한 조사를 지시하였으며 청나라로부터 모종을 수입하기도 했다. 당시 고관들 사이에는 '다화회'라는 모임도 자주 열렸다.

일제시기에는 차의 생산, 보급, 연구 등이 일본인들에 의해 진해되었다. 따라서 식민지 지배를 위한 다원이 조성되었으며, 고등여학교와 여자 전문학교에서 차생활 교육이 이루어졌다.
이후 1960년대부터는 다시 차에 관한 관심이 일기 시작하면 1970년대 후반부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지금은 동호인이나 친목회 등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차를 애용하고 있다. 1990년에 들어서는 건강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차에 대한 효용이 널리 알려지면서 차의 저변 확대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차와 가까워질 수 있도록 기호에 맞는 차를 생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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