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한양) 탐구08-(서울)한강의 나루, 살꽂이다리 箭串橋(전곶교)


 

(배경 영상,음악)  경기민요 한강수타령, 매화타령 -KBS 전주 국악한마당

    추후 링크가 끊어지면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 나올 수도 있으며,

    아래 음악이나 동영상 보려면 ▷클릭, 멈추려면 stop □ 버튼 클릭.    

    아래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보이면  https://www.youtube.com/embed/D124Y4Kyt2c<=요걸 클릭

 


 

* 본문 중 밑줄 친 링크는 본문 내용을 가져오거나 참고한 곳으로 필요시 밑줄 친 link를 클릭.

  단, 밑줄 친 링크는 현재는 연결되지만 추후 링크 주소 변경되면 연결이 안 될 수도 있음.

 

나루터, 포구, () 하천(河川), ()의 이름은 지명이나 지하철역명에 많이 반영되어 있다.

 

[요약 퀴즈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퀴즈 1] 태조 이성계가 함흥차사후 태종에게 화살을 쐈다는 중랑천 하류의 옛 다리 이름은?

[퀴즈 2] 나루 인근에 몽촌토성·풍납토성 등과 연결되는 아차산성이 있으며, 옛날부터 중요한

                 교통로였고 오늘날은 서울부산간 교통로가 이 지역을 지나고 있다. 나루 이름은?

[퀴즈 3] 과천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한강의 나루로 우리말(=노들나루)인 이 나루의 漢字名?

[퀴즈 4] 소금과 젓갈을 실은 배들이 모여들어 도성의 소금과 젓갈은 거의 모두 이곳에서 공급

                 됐다. 결빙기를 제외하고는 京江商人과 배들로 붐비고 활기를 띠었다. 이 나루 이름은?

[퀴즈 5] 서울에서 양천(陽川)을 지나 강화로 가는 조선 시대 교통의 요지였으며, 삼남 지방에서

                 한강을 통하여 운송되어 오는 곡식을 하역하던 나루이다. 이 나루의 이름은?

[퀴즈 6] 양화나루 인근에 있는 이곳은 누에머리를 닮았다하여 잠두봉이라 불린다. 많은 천주

                 교도들이 참수당한 곳으로 천주교의 순교성지가 되었다. 머리가 잘렸다 해서 oo?

 

한강 다리가 세워진 곳은 유명 나루터, 포구였다. (2019.01.04 기사)

내용출처: http://www.seni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971

 

역사적으로 한강은 한반도 중부지방을 동에서 서로 흘러가는 젖줄로써 일찍부터 그 가치를 인정받아 왔다. 그 중 광나루에서 양화진까지 조선시대 한양에 인접한 경강(京江-서울의 한강)에는 광나루, 두모포, 한강진 등 11개의 나루와 포구가 있었다.

 

이 나루와 포구는 한양과 전국 각지를 연결하는 주요 도로가 지나는 길목이었고 상업의 중심지였다. 경기도 광주로 가는 길은 동대문에서 시작하여 왕십리를 지나 살꽂이다리, 광진(廣津 광나루)을 거치고 용인으로 가는 길은 광희문에서 한강진(漢江津 한강나루)을 지난다. 과천으로 통하는 길은 남대문에서 동작진(銅雀津 동작나루)을 건너는 등 한양 남쪽 지방으로 향하는 대로(大路)는 모두 한강을 건너야 했다.

 

근대에 들어 육로교통 수단이 발달되면서 배로 한강의 남쪽과 북쪽을 연결하던 나루와 포구 자리에 다리가 들어섰다. 1900년 한강철교, 1917년 한강인도교 건설 등을 필두로 하여 수많은 다리가 놓여 있다. 한강의 다리 건설은 길을 이어줌과 동시에 강남(영동)개발, 여의도개발, 잠실개발 등 서울의 발전을 견인해왔다.

 

이러한 다리들은 하나같이 옛 길과 나루터 자리에 건설되었다. 노량진에는 한강대교(1한강교)가 놓였고 양화진에는 양화대교(2한강교)가 한강진에는 한남대교(3한강교)가 들어섰다. 마포나루에 들어 선 것이 마포대교(서울대교)이고 송파진에는 잠실대교가 서빙고나루에는 잠수교와 반포대교가 만들어지는 등 예전 나룻배가 다니던 길 위로 다리가 들어선 것이다.

 

이 다리는 조선시대와 같이 주요 지역을 잇는 길이기도 하다. 목포에서 임진각을 거쳐 신의주를 잇는 국도1호선이 1996년까지 한강대교(1한강교)를 거쳐 갔고 서울에서 인천과 강릉으로 이어지는 국도6호선은 양화대교(2한강교)를 지난다.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도 신설 당시 한남대교(3한강교)가 시작점이었던 점 등으로 보아 나루와 포구가 있던 자리에 건설된 한강의 다리는 근래에도 교통의 중심지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서울의 발전을 위해 추진된 부도심 건설은 교량 건설과 함께 하였다. 비행장이던 여의도를 부도심으로 개발하는 사업에는 마포대교(서울대교)가 한강 수변의 버려져 있던 저습지였던 강남 영동지구를 개발하는 사업은 한남대교(3한강교)가 활성화 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강다리의 이름은 제1한강교->한강대교, 2한강교->양화대교, 서울대교->마포 대교로 지금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한강대교의 건설로 만들어진 노들섬, 여의도 건설로 인해 변화된 서강대교 아래 밤섬, 서울 수돗물 정수장이었던 양화대교 아래의 선유도 등 한강에 있는 섬의 옛 모습 등 서울의 옛 모습은 서울역사박물관 홈페이지(www.museum.seoul.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19.01.04. 기사 내용)

 

살꽂이다리=살곶이다리     참조 링크: 살꽂이다리

살꽂이다리또는 살곶이다리라고 하였고 한자명으로 箭串橋(전곶교)라고 한다. 성동구 사근동 102번지 남쪽 현재 성동교 동쪽에 위치해 있는 돌다리로서 중랑천에 놓여 있다. 조선시대 다리로는 가장 길었으며 濟盤橋(제반교)라고도 불렀다. 현재는 중간 부분이 훼손된 채 양쪽 가장자리만이 원형을 보존하고 있으며 사적 제160호로 지정되어 있다.

살꽂이다리(箭串橋 전곶교-화살이 꽂힌 다리)

함흥차사(咸興差使)와 살꽂이다리(箭串橋 전곶교-화살이 꽂힌 다리)

함흥차사(咸興差使)       참조 링크: 함흥차사 -고사성어대사전

조선 초기, 방석(芳碩)의 변(1차 왕자의 난)이 있은 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정종(定宗)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고향인 함흥에 은거했다. 그 후 형제들을 살해하면서까지(2차 왕자의 난) 왕위를 차지한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은 분노한 태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함흥으로 차사를 보냈다. 하지만 태조가 번번이 활을 쏘아 차사들을 죽이거나 가두어 돌려보내지 않았다. 여기에 서 유래하여 함흥차사는 심부름 간 사람이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살꽂이다리(箭串橋(전곶교)-화살이 꽂힌 다리)로 불리게 된 까닭...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거쳐 태종으로 등극하자 함흥으로 내려가 한양으로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이방원의 등극을 부정하였다. 그 후 태조 이성계는 태종과 신하들의 간곡한 청으로 함흥에서 돌아오게 되는데, 태종이 이곳 중랑천 하류 한강 가에서 천막을 치고 아버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 태조가 태종을 향해 활을 쏘았으나 맞히지 못하고 화살이 땅에 꽂혔다, 그 후 이 지역을 화살이 꽂힌 곳이라 하여 살꽂이혹은 살곶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다리는 한강이 아니라 중랑천에 있는 다리이다.

 

한강의 유래      내용 출처: https://hangang.seoul.go.kr/archives/249 -서울시 한강사업본부

한사군과 삼국시대 초기의 한강은 한반도의 중간 허리부분을 띠처럼 둘렀다는 뜻에서 帯水(대수) 라 불렀고, 고구려에서는 '아리수' 라 했으며, 백제는 '욱리하' 라고 했다. 또 신라는 상류를 '이하', 하류를 '왕봉하' 라 불렀다. 한편 '삼국사기' '신라편' 지리지에는 한강을 '한산하' 또는 '북독' 이라고도 했다. 백제가 동진과 교통하여 중국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한강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고쳐서 '漢水(한수)'라 불렀고, 그 뒤부터 옛 이름은 사라지고 '한수' 또는 '漢江(한강)' 이라고 불리어졌다.

 

고려 때는 큰 물줄기가 맑고 밝게 뻗어내리는 긴 강이란 뜻으로 '열수' 라고 불렀으며, 모래가 많아 '사평도' 또는 '사리진' 이라고도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경강(京江)'이라고도 불렀다.

 

한강은 본래 우리말 '한가람'에서 비롯된 말로 '''크다, 넓다, 길다'는 의미이며, '기람'은 강의 고어로 한강’='크고 넓은 강' 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위치에 따라 다르게 불린 한강의 이름들      출처 링크: 한강 [漢江] 서울지명사전

한강이란 한남동 앞에 흐르는 강의 별명으로서 이곳에 한강진과 제천정 등이 있었다. 뚝섬에서 옥수동 앞강을 동호, 한남동 앞을 한강, 동작동 앞을 동작강, 노량진 앞을 노들강, 용산 앞을 용호 · 용산강, 마포 앞을 마포강, 서강 앞을 서강, 김포 북쪽을 조강이라고 불렀다.

 

한강의 포구와 나루 (-배대는 곳)      출처 링크: 포구 교역-문화원형백과

(알림) 이하 내용은 링크: 포구 교역-(문화원형백과 한강 생활문화)에서 가져 왔다.

우리말로 개, 한자말로 포()는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을 말한다. 서해 바닷물이 동작진(:나루 진)까지 올라왔다고 하는데 그 위로도 두모포(斗毛浦), 개포(開浦) 등이 있는 것을 보면 포라는 명칭이 붙기 위해서 반드시 바닷물이 드나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과거 삼개 즉 마포가 한강 물자유통의 중심이었던 것은 배들이 조수의 힘으로 가장 멀리 올라 올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한강 하류지역에 발달한 포구로는 하류로부터 조강포(祖江浦), 이산포(二山浦), 행주외리, 양천, 후포, 염창, 양화진, 서강, 마포, 용산 등 아랫강 포구와 서빙고, 한강리, 수철리, 뚝섬, 송파 등 윗강 포구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포구 가운데 용산과 마포가 규모와 기능 면에서 월등하였다.

 

-알림-

한강의 나루를 설명에, 나루 지명의 단순 링크는 다음백과를 참조하였고, 내용은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일부를 가져왔으며, 링크: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들-1에서 주로 가져왔다아래 각 나루의 설명은 한강 상류부터 내려오면서이다.

 

광나루       내용 출처 링크: 광나루

광진구 광장동에 양진(楊津광장(廣壯광진(廣津광진도(廣津渡) 등의 명칭으로도 불리었으며, 진취락(津聚落)을 형성하였던 곳이다. 한강의 중하류에 위치한 광나루는 교통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서울에서 부산까지 연결되는 영남로의 주된 간선로는 아니었으나, 부산으로 향하는 도로의 길목에 위치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파발로가 지나서, 광나루의 교통상 기능은 지속적으로 중요시되었다.

 

광진원(廣津院)이 광나루 북쪽 언덕에 위치하였으며, 도승(渡丞)이 있어 사람들의 내왕을 조사하기도 하였다. 당시 좌도수참전운판관(左道水站轉運判官)이 겸직으로 이 지역의 조운을 관장하였을 정도로, 광나루는 서울 주변의 중요한 나루터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북쪽에는 백제 초기 몽촌토성·풍납토성 등과 연결되는 아차산성이 있으며, 고대부터 교통로로서 중요하였고 오늘날은 서울부산간 교통로가 이 지역을 지나고 있다.

 

송파나루(松坡津 송파진)       내용 참조링크: 송파나루,송파진

현재의 송파구 석촌호 부근에 있던 나루터로서, 도성에서 전곶교를 건너 신천진을 지나 만나게 된다. 송파에서 잠실로 연결하였으며, 광주,이천으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도선장은 조선 후기에 발달하였다. 본래 이 부근에서 가장 큰 도선장은 삼전도였는데, 병자호란 이후 기피 경향이 있어 정부에서 송파진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 상공업의 발전과 함께 유명한 장시로 성장하여, 객주,거간을 비롯한 도선주들이 모여들었다. 송파진에는 9척의 진선이 있어 통행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송파진별장은 인근의 광진,삼전도,신천진의 나루까지 관장하였다.

 

신천나루(新川津 신천진)      내용 참조링크: 신천진

오늘날의 송파구 신천동에 있던 나루터로서, 신천동에서 뚝섬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삼전도(新川津 삼전도)      내용 참조링크: 삼전도 

서울시 송파구 삼전동에 있었던 나루로 삼밭나루라고도 불렸다. 한강 상류의 남안에 위치하여 서울과 부리도(浮里島, 또는 蠶室島인 현재의 잠실지역)를 연결하는 나루터로서 교통의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한강나루(漢江鎭 한강진) 내용 참조링크: 한강진  -서울지명사전

오늘날의 한남동과 강남구 신사동을 잇는 나루 겸 군영(軍營)이 있었다. (누를진)

 

한강도(漢江渡) 내용 참조링크: 한강도(漢江渡)

한강은 본래 서울의 남산 기슭 지금의 한남동 앞의 강을 일컬었다. 따라서 한강도는 한강나루라는뜻으로 한강진(漢江津)이라고도 하였다. 한강나루는 도성의 정남에 위치했다고 하였으며, 한남동 도선장 부근을 일컬었다.

 

그 강안 맞은편은 사평나루로, 고려 때는 사평도 또는 사리진으로 불렀다. 조선시대는 제일의 나루터로 판교역을 지나 용인,충주로 통하는 대로의 요충지였다.

 

사평나루(沙平渡 사평도)       내용 참조링크: 사평나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용산구 한남동과 연결되었다. 사평도(沙平渡 : 모래펄나루)의 다른 명칭으로 고대에는 사리진도(沙里津渡 : 모래펄나루)라 불렸다. 사평리는 한강진의 맞은편이라 하였고 한강진은 현재의 한남대교(漢南大橋) 서쪽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보아, 한강도는 현재 한남대교 부근으로 추측된다.

 

동작나루(銅雀津)        참조 링크: 동작나루

동작나루는 동작진(銅雀津)’ 또는 동작도(銅雀渡)’라고도 하였다. 중요 간선도로가 지나가는 나루터는 아니었으나 서울에서 과천으로 가는 도로의 길목에 위치하여 많은 사람의 이용이 있었다.

진선(津船)5척 배치되어 있었으며, 이 나루터 부근에는 모노리탄(毛老里灘, 尾老里灘)과 기도(碁島)가 위치하였다.

 

이하 내용은 참조링크: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들-1 에서 가져 왔다.

동작진(銅雀津)은 현재의 동작동 강변에 있었던 도선장 (渡船場)으로 일명 동재기라고도 한다. 도성에서 과천으로 빠지는 길목으로서 본래 노량진 관할이었으나 외방의 과객, 사대부의 왕래가 빈번한 곳인데 약간의 사선(私船)만이 비치되어 있어서 교통이 불편하였다.

 

그리하여이곳의 관리가 문제화 되던 중 영조 4(1728) 이인좌(李麟左)의 난을 계기로 나루의 관리를 철저히 하고자 별장(別將)을 파견하고 이어서 영조 22(1746)에는 노량진의 나룻배 3척을 이관하여 진도(津渡)로서의 체모를 살렸다. 1857년 철종은 이곳에 주교(舟橋 배다리)를 만들고 인릉(仁陵)에 왕래하였다. 근대에 이르기 까지 나룻배가 오갔는데 1917년 한강 인도교가 세워지면서 제구실을 잃었다. 현재 이곳에 1984년 거대한 동작대교가 건설되어 자동차와 전동차까지 운행하게 되었다.

 

개포(開浦)       내용 출처: 개포

강남구 개포동에 있던 마을로서, 마을 앞에 양재천 갯벌이 있어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개펄개패 또는 개포동이라고도 불렀다.

 

반포(盤浦)       내용 출처: 반포 서울지명사전

이 마을로 흐르는 개울이 서리서리 굽이쳐 흐른다고 하여 서릿개라 하고 이를 한자로 표기한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는데, 뒤에 한자 표기가 盤浦(반포)로 바뀌었다.

 

흑석나루(黑石津)       이하 내용은 참조링크: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들-1 에서 가져 왔다.

흑석진(黑石津)은 현재의 동작구 흑석동 강변에 있었던 나루이다. 도성에서 수원이나 과천 방향으로 왕래 하려면 노량진이나 한강도를 이용하여야 하는데 통행량이 많고 기찰(일종의 검문)

심하여 민간인들은 사선(私船)으로 운행되는 배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수참이 폐지되고 또한 인근에 동작진이 개설되면서 기능을 잃어갔다.

* 수참(水站): 조선시대 한강 수계(水系)의 포구에 위치하여 조창의 기능과 목재 등 각종 물품의

                             운송, 사객(使客)의 이동 보조의 역할을 하도록 인원과 선박 등을 배치한 시설.

 

마포나루(麻浦津)       이하 내용은 참조링크: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들-1 에서 가져 왔다.

서울의 마포구 마포동 강변에 있었던 나루로 삼개나루라고도 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도성에서 서남쪽으로 10리 지점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의 여의도를 지나 시흥 방면으로 빠지는 길목이다. 나루가 크지 않아서 본래 관선(官船)은 없었고, 사선(私船) 몇 척이 있어서 행인을 건네주었다.

1894년 한강의 마포(삼개)나루-사진 이사벨라 버드 비숍 촬영

조선 후기에 상업이 발달하면서 선상(船商)들이 한강을 거슬러 이곳에 와서 장사를 하였다. 인천 제물포에서 어물, 젓갈 소금 등을 실고 뱃길을 따라 서울 마포까지 그리고 한강을 따라 상류까지 상인들의 배가 다니며 돌아갈 때는 곡물을 싣고 갔다. .특히 소금과 젓갈을 실은 배들이 모여들어 도성의 소금과 젓갈은 거의 모두 이곳에서 공급되었다. 예로부터 마포나루에는 새우젓을 파는 사람들이 많아 '마포 새우젓 장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나루터에는 창고를 지어놓고 소금, 젓갈, 생선 등을 위탁 판매하거나 중개하는 객주, 여각 등이 생겨났고, 京江商人(경강상인)들의 활발한 상업활동이 있었다. 결빙기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배들로 붐비고 활기를 띠었다.

 

노량진(露梁津) = 노들나루       내용 출처 링크: 노량진

노량진(露梁津)은 노도진(露渡津노량진도(鷺梁津渡노들나루라고도 불리었다. 이 나루는 서울과 과천·시흥을 연결해주는 구실을 하였는데, 조선시대 9대 간선로 중에서 충청도와 전라도 방면으로 향하는 제6·7·8호 간선로의 길목이었다.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였던 나루터여서 사람들의 이용이 많았으며, 도승(渡丞)이 한 사람 배치되어 관리를 맡았다. 나루 남쪽 언덕에는 노량원(鷺梁院)이 위치하여 있었으며, 세금을 거두었다. 관내는 과천의 신촌리(新村里사촌리(沙村里곽계(槨契형제정계(兄弟井契마포강(麻浦江)이었다. 이 나루에 속하였던 진선(津船)10척이었고, 관선(官船)15척이었다.

 

영등포(永登浦)        내용 출처 링크: 영등포 

영등포는 왕성하게 번성하고 있던 이웃의 노량나루(鷺梁津)에 치여 내내 밀렸다. 영등포란 나루터는 지금의 한강성심병원 건너편 여의도 샛강에서 여의도의 사라진 옛 양말산(羊馬山)을 오가며 한강 밤섬(栗島)과 마포를 연결하는 소규모 나루터이었다. <경조오부도 왼쪽 하단에 영등포 여의도 율도(栗島)가 보인다. 英登浦로 표기한 점이 눈이 띤다. 그 아래쪽에는 방학곶(放鶴串) 지명이 보인다. 오늘날 영등포와 관련이 깊은 지명이다.

 

영등포란 명칭의 유래는 음력 2월 초하루를 영등일(靈登日)로 하여 보름까지 여의도 샛강에서 영등굿이 성행하였다. 늘 소원하는 것을 이곳 한강에서 빌면 다 들어주는 명당으로 알려져 '靈登'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 영등(靈登)永登(영등)"으로 변형표기된 것이라고 한다. '영등(永登)'과 물가 마을을 뜻하는 '()'를 합친 영등포가 되었다.

 

지금의 영등포역 주변에 소머리제(牛頭峴)가 있었다. "멀리 동쪽으로 왕성(王城)을 바라볼 수 있어 궁궐을 사모하는 사람이 의례히 이 재에 오른다"라는 말에서 영등포(永登浦)가 연유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양화나루(楊花)        참조 링크: 양화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 시대 삼진(三鎭)의 하나였던 양화진(楊花鎭)이 위치하였던 서울에서 양천(陽川)을 지나 강화로 가는 조선 시대 주요 간선 도로상에 위치하였던 교통의 요지였으며, 삼남 지방에서 한강을 통하여 운송되어 오는 곡식을 저장하던 오강 중의 하나로 농산물의 재분배 기능을 담당하던 중요 지역이었다.

 

또한, 서울의 천연 방어선을 이루는 한강의 중요 지역으로, 진대를 마련하고 진장(鎭將)을 두어 수비하게 하여 군사상 중요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도승(渡丞)이 배치되었으나 뒤에는 별장(別將)으로 바뀌었으며, 호조의 점검청(點檢廳)이 있었다. 나루터의 관할은 어영청에서 하였으며, 양화진에 속한 선박은 모두 10척이었다.

 

양화진(楊花鎭)광흥창(廣興倉)        참조 링크: 광흥창(廣興倉) -두산백과

광흥창은 고려시대에는 충렬왕(忠烈王) 때 설치하였는데, 조선시대에 관리들의 녹봉(祿俸)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1392(태조 1) 호조(戶曹)의 예속기관으로 서울 서교(西郊) 와우산(臥牛山:서울시 마포구 창전동) 아래에 설치하였다. 전국에서 올라온 세곡을 모으는 곳이었는데 한강 양화진에 도착한 세곡선(稅穀船)에서 하역한 쌀을 광흥창에 저장하였다. 그리고 광흥창은 관원들에게 녹봉을 지급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쌀과 옷감을 녹봉으로 지급하였다.

 

잠두봉(蠶頭峰)절두산 성지(切頭山 聖地)        내용 출처: 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

잠두봉, 절두산(折頭山)

잠두봉(蠶頭峰-누에머리 모양의 봉우리)지역은 한강의 동북쪽 강변(옛 당인리 발전소 근처)에 있는 곳으로 사적 제399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한강 가운데에서 경치가 아름답고 정자가 많기로 이름났던 지역이었다. 하지만 천주교도가 박해를 당하고 순교한 곳으로 지금도 순교자 묘지가 남아 있으며, 개화의 선각자였던 김옥균(金玉均)이 처형된 곳이기도 하다.

 

1866년 천주교를 탄압한 병인박해로 병인양요가 발생하여 프랑스 함대가 양화나루까지 진출했다가 퇴각하자, 이에 격분한 흥선대원군의 지시에 의해 잠두봉에서 많은 천주교도들이 참수 당함에 따라 천주교의 순교성지가 되었다.(折頭山 절두산-머리가 잘린 산).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6/6b/Jeoldusan.jpg/408px-Jeoldusan.jpg

 

(현재) 한강 유람선 나루들         출처 링크:https://hangang.seoul.go.kr/archives/249

다음은 한강 유람선의 나루들로 상류에서 하류 순으로 배치하여 각 나루 이름별로 연결 링크를 적었다. 자세한 내용 보려면 지명(나루이름)을 클릭하면 된다.

(상류) 광나루  잠실  뚝섬잠원  이촌  잠원,  이촌  반포  망원,  반포  여의도  난지,  강서  양화 (하류)

 

[요약 퀴즈 

[퀴즈 1] 태조 이성계가 함흥차사후 태종에게 화살을 쐈다는 중랑천 하류의 옛 다리 이름은?

[퀴즈 2]  나루 인근에 몽촌토성·풍납토성 등과 연결되는 아차산성이 있으며, 옛날부터 중요한

                교통로였고 오늘날은 서울부산간 교통로가 이 지역을 지나고 있다.  나루 이름은?

[퀴즈 3] 과천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한강의 나루로 우리말(=노들나루)인 이 나루의 漢字名?

[퀴즈 4] 소금과 젓갈을 실은 배들이 모여들어 도성의 소금과 젓갈은 거의 모두 이곳에서 공급

                 됐다. 결빙기를 제외하고는 京江商人과 배들로 붐비고 활기를 띠었다. 이 나루 이름은?

[퀴즈 5] 서울에서 양천(陽川)을 지나 강화로 가는 조선 시대 교통의 요지였으며, 삼남 지방에서

                 한강을 통하여 운송되어 오는 곡식을 하역하던 나루이다. 이 나루의 이름은?

[퀴즈 6] 양화나루 인근에 있는 이곳은 누에머리를 닮았다하여 잠두봉이라 불린다. 많은 천주

                 교도들이 참수당한 곳으로 천주교의 순교성지가 되었다. 머리가 잘렸다 해서 oo?

 

=== [퀴즈 답] ===

[퀴즈 1] 이성계가 함흥차사후 태종에게 화살을 쐈다는 옛 다리 이름은? .=> 살꽂이다리

[퀴즈 2] 나루 인근에 몽촌토성·풍납토성 등과 연결되는 아차산성이 있으며, 옛날부터 중요한

                교통로(오늘날은 서울부산간 교통로) 지나는 있다. 나루 이름은? .=> 광나루

[퀴즈 3] 과천 가는 길목의 나루로 우리말(=노들나루)인 이 나루의 漢字名? .=> 露梁津(노량진)

[퀴즈 4] 소금과 젓갈을 실은 배들이 모여들어 도성의 소금과 젓갈은 거의 모두 이곳에서 공급

                됐다. 京江商人과 배들로 붐비고 활기를 띠었다. 이 나루 이름은? .=> 마포나루

[퀴즈 5] 서울에서 양천(陽川)-강화로 가는 조선 시대 교통의 요지였으며, 삼남 지방에서 한강을

                통하여 운송되어 오는 곡식을 하역하던 나루이다. 이 나루의 이름은? .=> 양화진

[퀴즈 6] 양화나루 인근에 있는 이곳은 많은 천주 교도들이 참수당한 곳으로 천주교의 순교성지

               가 되었다. 머리가 잘렸다 해서 oo? .=> 절두산(切頭山)

(계속)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