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한양) 탐구11-(서울의) 가톨릭 성지순례지

 

<배경음악>: 내주를 가까이하게함은 -찬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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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퀴즈]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퀴즈 1] (서울)도성 안에서 (순교한 신자들의) 시신을 운반해 나가던 문 이름은?

[퀴즈 2] 북달재(종현 鍾峴)’에 설립된 조선 최초의 본당이자 서양식 대성당인 이곳은?

[퀴즈 3] 조선시대의 중앙관서인 육조의 하나로. ‘추관 또는 추조라고도 했으며, 사헌부 

           한성부와 아울러 삼법사(三法司)라 일컬어지기도 한 관청은 무엇인가?

[퀴즈 4] 한강의 버들꽃나루(양화진)에 옆 이곳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처형(머리가 잘림)

            되어 붙여진 이름으로 가톨릭 성지이다 이곳의 이름은? oo산 성지

[퀴즈 5] 조선 교회 최초의 신부 주문모가 처형된 장소로 용산의 저습지였던 이곳은?

 

참조 영상 링크: 한국 가톨릭 디지털 역사관 - YouTube

 

다음 내용은 (서울의) 가톨릭 성지순례지로 서울대교구 성지순례길(www.catholic.or.kr)의 내용을 편집 요약한 것으로 서술 순서는 원문 순서를 따랐다.

 

참고로 (서울) 성지순례 순례지 가운데 김범우의 집터, 한국 천주교 순교자 124위 시복 터,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터, 한국 천주교회 창립 터(이벽의 집터)  4곳에 성지순례 스탬프가 마련되어 있다, 경기감영 터, 우포도청 터, 의금부터, 전옥서 터, 좌포도청 터, 형조 터 등 5곳은 종로 성지성당에서 스탬프를 찍을 수 있다.

원문을 보려면 참조 링크: 서울대교구 성지순례길(www.catholic.or.kr)를 클릭!

 

서울대교구 역사관 참조 링크: 천주교서울대교구역사관

명당 성당 구내에 있는 이 건물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 서양식 벽돌 건축물 중 하나이다. 1890년 한국가톨릭교회의 '주교관'으로 신축되었다.

 

서울대교구 성지순례길 원문 링크:서울대교구 성지순례길(www.catholic.or.kr)

- 원문 내용을 편집 요약한 것으로 서술 순서는 원문 순서를 따랐다. -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성당

서울대교구 성지순례길 중 종로구 혜화동 90-1에 있는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모셔진 장소이며 한국 교회 사제 성소의 요람이다. 성직자(성소자) 양성 공간이므로 개방이 안되고 있다.

 

광희문(光熙門), 속칭 水口門 또는 시구문(屍口門   참조자료: 광희문   참조자료: 광희문

광희문

현재 중구 광희동 2 105에 있는 광희문은 조선 시대 서울의 사소문(四小門)의 하나로,

도성 안에서 죽은 자들(순교한 신자들)의 시신을 운반해 나가던 문이다.

 

조선 시대에는 사람이 죽으면 서울 성곽 안에는 묘를 쓸 수 없었다. 그래서 시신을 서울 외곽 밖으로 가지고 나가 묘를 써야 했는데, 이때 서소문과 광희문을 통해 시신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런 이유로 광희문은 시신을 내어가는 문이라는 뜻의 시구문이라고 불렸다. 한편 명지대 홍순민 교수는  수구문에 대해서 부근으로 청계천 물길이 나가기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었다고 하는 말이 있으나 이는 억측이다. 청계천 물길은 흥인문이 더 가깝다. 수구문이란 한강으로 출입하는 문이란 뜻이다. 더구나 이 문을 그 부근에 늘 시신이 쌓여  있었다 하여 시구문(屍口門)이라 했다는 것은 일본인들의 악의적 왜곡이다. 참조 링크:  문(門) 이름에 숨은 뜻

 

천주교 박해시대에 수많은 사람들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포도청 등에서 신문을 받다가 순교하였다. 당시 옥중에서 치명한 순교자들의 시신은 광희문을 통해서 밖으로 내버려졌다.

 

좌포도청 터

좌포도청 터는 현재 종로구 묘동 56번지 단성사 일대(종로3가역 3호선 9번 출구)로 추정되고 있다. 포도청 순교지는 103위 성인 중 최경환 프란치스코, 유대철 베드로, 허임 바오로 등 스물한 분, 현재 시복 추진 중인 하느님의 종’ 124위 중 윤유일 바오로 등 5위가 장살, 옥사, 교수 등으로 순교한 곳이다.

 

포도청은 원래 도적을 잡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 운영되었다. 그러나 점차 그 담당 업무가 확대되어 한성부민들의 생활 전반에 걸쳐 금지 조항을 위반하는 사건들을 다루었고, 개항기에는 궁문수비, 외국공사관의 경비, 반역 죄인에 대한 심문까지도 담당하였다.

 

또한 지방의 중죄인을 압송, 체포하여 조사하고, 그 죄의 경중에 따라 의금부와 형조 등 상급기관으로 이송하는 중간기구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이벽의 집 터 수표교 인근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정조 8(1784) 겨울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되었다.

 

김범우의 집 터, 명례방과 장악원 터

김범우의 집이 있던 명례방은 남산 아래의 여러 마을들과 지금의 을지로 입구에서 명동 성당 부근까지를 포함하고 있던 곳이다. 명례방이 한국 천주교회사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게 되는 시기는 1784년 말 또는 1785년 초 수표교 인근 이벽의 집에서 열던 신앙 모임을 명례방 장악원 앞에 위치한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서 하게 된 때이다.

 

현재 명례방을 알리는 표지석은 없고 중구 을지로 2 181 외환은행 앞 장악원 터 표석 자리 앞쪽을 김범우의 집터로 보고 있다.

 

명동대성당

명동대성당

명동대성당은 옛날 조선 한성부 남부조선 최초의 서양식 대성당으로 명례동(明禮洞)’에 속하던 지역(오늘날 중구 명동 2)에 세워진 성당으로 1898 5 29일에 완공하였다. 지금은 주위 고층빌딩 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북달재(종현 鍾峴)’라고 불리던 남산 앞 언덕 위에 세워진 명동대성당은 도성 내 어느 곳에서나 올려다 보이던, 뾰족탑이 인상적인 서양식 교회 건물로 세인의 이목을 끌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이 개항정책을 취하게 되면서 교회에 대한 정부의 박해정책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자, 교회 당국은 1882 4월에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본당으로 종현 본당, 지금의 명동 본당을 설정했다.

 

명동대성당은 한국 교회 최초의 본당이며 성인 다섯 분과 순교자 네 분의 유해가 모셔진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이다.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 김성우 안토니오, 순교자 이 에메렌시아, 무명 순교자 1,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가 모셔져 있어, 기도와 참배를 위해 찾는 순례자들이 많은 성역이다. 이 가운데 이 에메렌시아,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는 시복 대상자로 선정되었다

 

가회동 성당

이 곳은 과거 의금부 터로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선교사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 땅에 들어와 1795년 예수부활대축일에 신자들과 함께 조선에서의 첫 미사를 계동 최인길의 집에서 봉헌하였다.

 

한국 천주교 초기 신앙의 중심지였던 이 지역을 관할하기 위해 1949년에 가회동성당이 설립되었고, 2014년 지금의 한옥과 양옥이 어우러진 새 성전이 건립되었다.

 

의금부 터

의금부 터(종로구 공평동 종각역 1번 출구)는 주교와 신부, 평신도 지도자들이 국문을 받던 곳이다. 의금부는 조선시대 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추국하는 일을 맡아 보던 관청이었으며 금부·금오·왕부라 부르기도 하였다.

 

박해시기, 천주교 신자들은 서울의 좌우포도청과 지방의 각 진영) 및 군현에서 문초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 중죄인, 즉 주교와 신부, 평신도 지도자들은 국왕의 특별한 명령에 의해 의금부로 압송되어 국문(鞫問)을 받았다.

 

전옥서 터

전옥서 터(종로구 종로1가 종각역 6번 출구) 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수감되어 있던 곳이다전옥서는 감옥과 죄인에 관한 사무를 관장했던 관서로 전옥서에 수감되는 죄수의 대부분은 상민이었다, 하지만 의금부가 육조, 왕실의 계보를 편찬하고 왕족의 허물을 살피던 관아였던 만큼 종부시, 사헌부 등의 죄인이나 왕족이나 양반, 관리들도 수감되었다.

 

우포도청 터

우포도청은 서린방 혜정교 남쪽(현 동아일보 신사옥 앞 화단))에 있었으며, 우포도청이 담당한 구역은 서울의 서부  북부와 경기 우도 즉 가평, 개성, 고양, 연천, 적성, 파주, 포천 등지였다.

 

우포도청은 한국 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장소이다. 1879 5 14일에 충청도 공주 지방에서 드게트 신부가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이날 드게트 신부뿐만 아니라 함께 거주하던 신자들까지 잡아서 공주 감영에 수감하였다가 5 29일 서울 포도청으로 이송하였다. 이때는 공식적인 박해가 종료되었던 시기라 가혹한 고문이 자행되지는 않았지만, 드게트 신부와 함께 투옥된 신자들은 굶주림으로 큰 고통을 받았다. 결국 그 가운데 이병교 레오, 김덕빈 바오로, 이용헌 이시도로 등은 우포도청에서 아사로 순교하였으며 이들이 바로 한국 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들이다.

 

형조(刑曹) 

형조(刑曹)는 한성부 서부 적선방(종로구 세종로 세종문화회관)에 있었는데 조선시대의 중앙관서인 육조(六曹)의 하나로 추관 또는 추조라고도 했으며, 사헌부  한성부와 아울러 삼법사(三法司)라 일컬어지기도 했다.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많은 천주교인들이 형조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다. 그 시작은 정조가 즉위한 지 9년째 되던 1785년에 발생한 을사추조 적발사건으로, 신자들이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서 집회를 갖던 중, 형조의 금리들에게 발각되어 형조로 압송된 사건이었다.

 

이후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최필공 토마스  최필제 베드로  윤운혜 루치아  정철상 가롤로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고, 김천애 안드레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윤지헌 프란치스코 등은 전주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신문을 받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남명혁 다미아노  김효임 골롬바  김효주 아네스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전장운 요한  최형 베드로 성인 등도 형조를 거쳐 갔다.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 성지

서소문 밖 네거리(중구 의주로 2 16번지 서소문 공원 내)는 신유·기해·병인박해 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신자들이 참수형을 받아 순교한 장소이다.

 

서소문은 조선시대 수도 한성의 출입 성문이던 네 개의 도성 대문과 네 개의 소문 가운데 하나인데, 서소문의 정식 이름은 소의문(昭義門)이다. 당시 서소문 밖의 네거리 광장은 조선시대 공식 사형 집행지였는데, 그 광장은 문안에서 아현고개와 남대문 밖 칠패시장으로 통하던 성문 밖에 생겨난 주막거리 광장이었다. 이 광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주막과 주위의 시장은 파루 인정제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즉 아침에 성문이 열리면 도성 출입이 가능하나, 저녁에는 성문을 닫아 통행을 금지하니, 통행인들이 문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성문 밖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했기에 이들을 상대로, 성문 밖에 취락이 생겨났고, 광장도 생겨났던 것이다.

 

따라서 관에서는 중죄인을 사형에 처할 때마다, 군중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다수의 군중을 동원하기 쉽고 또한 사형죄인들이 갇혀 있던 포도청이나 의금부와 가까운 서소문 밖 네거리 광장을 사형 집행 장소로 이용했다.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에서 순교자가 처음 생긴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로, 한국 교회의 첫 세례자인 이승훈 베드로와 명도회 초대 회장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그리고 여회장 강완숙 골룸바와 백서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 알렉시오 등이 참수로 순교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정하상 바오로,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등이 이곳에서 순교하였고,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성 남종삼 요한 등이 순교하였다. 이처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는 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하였으며, 그중 마흔 네 명이 성인의 반열에 오르면서 한국 교회사상 가장 많은 성인이 탄생한 곳이라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중림동 약현 성당

중림동 약현 성당(중구 중림동 149-2) 1892년에 건축된 서울 시내 두 번째 본당이다.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 성지를 관할하는 중림동약현 성당은의 규모는 명동 성당보다 작고, 도성문 밖에 위치하고 있으나, 한국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한국 최초의 고딕식 교회 건물이다.

 

서양식 교회 건물로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겸비한 성당 건물로 1977 11 22일자로 국가 사적 제252에 지정되었다. 한편 1998년에 화재로 내부가 불탔으나 2000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성당 내부 스테인드글라스가 볼 만하다.

 

성당 내에 있는 서소문 순교자 전시관 전시실에는 초기 한국 교회천주교회의 4대 박해 당시 순교한 신자들이 사용하던 교리서, 신심서적 등이 있으며, 특히 서소문 순교자인 강완숙의 가계도, 프랑스 선교사들의 문서류도 전시하고 있다.

 

경기감영 터

경기감영도- 경기감영 위치는 현 종로구 평동 164 서울적십자병원 정문 옆이다

경기감영이 설치된 것은 태종 때의 일이었다. 한양으로 천도한 다음 해인 1395(태조 4)에 경기 행정편제가 개편되었다. 이때 광주와 수원의 관할인 군현을 갈라서 경기 좌도라 하고, 양주부평철원연안의 관할인 군현을 경기 우도로 하였다. 그 후 1413년에 경기 영역을 다시 한 번 조정하여 좌우도로 나누지 않고 경기로 확정하면서 도관찰사를 파견하였고, 감영을 수원에 설치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감영은 경기도 광주로 옮겨졌다가 다시 한성부 내 서대문 밖 반송방(종로구 평동 164 서울적십자병원 정문 옆)으로 이전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최창주 마르첼리노, 이중배 마르티노, 원경도 요한, 권상문 세바스티아노, 홍인 레오 등 체포된 신자들은 경기감영으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과 문초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순교한 이가 있었는데, 바로 순교자 조용삼이다. 조용삼은 11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었고,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았다. 1801 2월에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형벌을 받았으나 약해진 몸은 더 이상의 형벌을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에는 다시 옥에 갇힌 지 며칠 만인 3 27일에 숨을 거두었다.”

 

절두산(切頭山) 순교성지

한강의 버들꽃나루라고 불렸던 양화진(마포구 합정동)에 자리 잡은 절두산 순교성지는 1866년 프랑스 함대의 침입을 계기로 많은 신자들이참수(머리가 잘림)되어 처형됐던 장소이다.

 

가장 혹독한 박해로 일컬어지는 1866부터 1873까지인 병인박해 기간 동안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기록으로 확인되는 순교자는 김한여 베드로, 최경원 야고보, 이의송 프란치스코, 김이쁜 마리아, 이붕익 베드로, 조 타대오 등 17명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순교자 5명을 포함하여 22명뿐이다.

 

현재 병인순교 100주년 기념 성당과 박물관이 서 있는 절두산 순교성지는 그 봉우리 형상이 누에머리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잠두봉이라 불렸으나,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에서 처형된 후에 천주교인들이 목 잘려 죽은 곳이라는 의미의 '절두산(切頭山)'으로 불리게 되었다.

 

노고산 성지

노고산 성지는 마포구 백범로 35(신수동) 서강대학교 가브리엘관 앞이다. 기해박해 때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한 후 이곳에 4년간 묻혀 있던 장소이다.

 

노고산은 박해시대 여러 처형장과 가까운 이유로 많은 순교자의 시신이 매장되었던 곳이다. 현재 노고산 아래 순교자들이 묻혔던 땅 위에는 예수회의 서강대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용산 신학교 성당

용산 신학교 성당(용산구 원효로4가 성심여자고등학교 내) 코스트 신부가 설계한 신학교 성당으로 1902 4 14일에 성당 봉헌식을 가졌다.

 

당시 조선 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신학교 부속 성당 건립을 위해 국내외에서 후원자를 구하던 중 프랑스인 드 사라(de Sarah) 여사로부터 기부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런데 그녀는 성당 건립 기금 후원에 앞서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순교지에 성당을 건립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뮈텔 주교는 김 신부의 순교지인 새남터는 홍수로 자주 잠기는 위치에 있어 위험하고, 오히려 조선대목구에서 유일한 신학교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순교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는 점, 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뒤를 계승하고자 하는 조선의 신학생들이 공부하는 곳에 신학교 성당을 건립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점을 오랜 기간 설득하여 마침내 그녀의 동의를 얻어냈다.

 

뮈텔 주교는 후원자의 뜻을 기리기 위해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미리내에서 이장하여 모시기로 하고, 1901 5 21일에 시복 재판 판사인 프와넬 신부와 기록 서기인 드망즈 신부, 안성 본당의 공베르 신부와 미리내 본당의 강도영 신부, 그리고 신자 30여 명이 참관한 가운데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발굴하였다. 발굴된 유해는 강도영 신부 사제관에 안치하였다가 5 23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 안치하였으며, 성당이 완공된 이후인 1902 6 23일에 성당의 제대(祭臺)에 오른편 모퉁이 바닥을 파고 그 안에 유해를 안치하였다.

 

김대건 신부 등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셨던 성당 출입구 상부에는 나무로 만든 명문을 부착하였는데 거기에는 성당 착공일인 1869 6 9일과 성당 봉헌일인 1902 4 14, 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세례명 안드레아(Andrea)의 이니셜인 ‘A’, 성 김(Kim)의 이니셜인 ‘K’와 생몰연대(1821~1846)가 로마자로 새겨져 있다.

 

당고개 순교성지

당고개 순교성지(용산구 신계동 1-57)는 기해박해 때 10명의 신자들이 참수로 순교한 장소이다. 당고개 순교성지는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많은 순교성인을 배출한 순교성지이다.

 

옛날 이곳에 민간인들이 제사 지내는 당집이 있었기에 당고개라 불렸으며 기해박해가 끝나갈 무렵에 열 명의 교우들이 순교한 곳이다. 1839년 음력 섣달그믐 경, 1년간에 걸친 기해박해의 마지막 단계에 아직 남아 있던 천주교인 다수를 서소문 밖 네거리 광장에서 처형하기로 결정했으나, 이런 사실을 사전에 알게 된 서소문 근처의 상인들이 설 대목장을 봐야 하는데, 사람들의 목을 베는 잔인한 처형이 이루어져서는 곤란하다며 설 대목장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처형장소를 서소문 밖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서소문에서 남동쪽으로 내려가 한강변에 위치한 용산의 당고개에서 처형하도록 하였다. 가족을 한 날에 처형하지 않는다는 국법에 따라 열 분 가운데 일곱 명은 12 27일에, 세 명은 28일에 처형되었다. 현재 그 가운데 아홉 분은 성인이 되셨고, 이성례 마리아는 하느님의 종에 올라 있다.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는 어린 다섯 형제를 두고 남편 성인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같이 수리산 교우촌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연행되어 옥고를 치르면서 젖먹이 막내아들이 자신 옆에서 배고파 죽는 것을 보아야 하는 처절하고도 기막힌 시련과 옥 밖의 네 명의 어린 자식들에 대한 인간적인 정에 못 이겨 한때나마 주님께 등을 돌렸지만, 다시 회개하고 옥에 돌아와 갖은 악형과 유혹을 이겨내고서 순교하였다.

 

왜고개 성지

왜고개 성지(용산구 용산동 5 2-65번지)는 기해·병오·병인박해 당시 새남터 순교자들이 잠시 매장된 장소이다. 왜고개는 1839년 기해박해 때 군문효수의 형을 받고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 그리고 188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성 남종삼 요한, 성 최형 베드로 그리고 홍봉주 토마스 등이 얼마간 암매장되었던 곳이다왜고개는 모두 열 명의 순교자가 묻혔던 곳으로 그중 여덟 명이 1984 5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왜고개는 한자로 와현(瓦峴) 또는 와서현으로 불리던 곳으로 원래 옛날부터 기와와 벽돌을 구워 공급하던 와서(瓦署)가 있었던 데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으며, 서울 명동 성당과 중림동약현 성당을 지을 때 사용했던 벽돌도 이곳에서 공급해 주었다고 전해진다.

 

새남터 순교성지

새남터 순교성지(서울 용산구 이촌로 80-8)는 기해·병오·병인박해 당시 성직자 11명과 교회지도자 3명이 군문효수형(軍門梟首: 사형수의 머리를 베어 간두(竿頭, 장대)에 매다는 형벌)을 받아 순교한 장소이다. 남대문 밖 용산의 저습지였던 모래벌 새남터는 간혹 풀이 우거져 있기는 하나 사람이 거주하거나 농토를 일굴 수 없는 모래톱 황무지였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그 북부 일부를 군사 훈련장으로 사용해 왔으며, 때로는 군문효수형을 선고받은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새남터와 조선 천주교회와의 악연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조선 교회 최초의 신부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박해 당국에 의해 새남터에서 처형됨으로써 비롯되었다. 그 후 한강가의 쓸쓸하고 황막한 모래땅 새남터는 우리 교회에 큰 박해가 닥칠 때마다 외국인 주교나 신부 등 선교사와 우리 신자 다수가 참수 치명된 대표적 순교성지가 되었고 새남터에서 순교한 순교자들 가운데 11위가 1984 5월에 시성되어 103위 성인 반열에 올랐다.

 

삼성산 성지

삼성산 성지(관악구 신림동 산 57-1)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앵베르 주교를 비롯하여 성 모방 신부와 성 샤스탕 신부의 유해가 1901년 명동 대성당 지하 소성당 묘역으로 모셔질 때까지 묻혀 있던 곳이다.

 

[요약퀴즈]

[퀴즈 1] (서울)도성 안에서 (순교한 신자들의) 시신을 운반해 나가던 문 이름은?

[퀴즈 2] 북달재(종현 鍾峴)’에 설립된 조선 최초의 본당이자 서양식 대성당인 이곳은?

[퀴즈 3] 조선시대의 중앙관서인 육조의 하나로. ‘추관 또는 추조라고도 했으며, 사헌부 

           한성부와 아울러 삼법사(三法司)라 일컬어지기도 한 관청은 무엇인가?

[퀴즈 4] 한강의 버들꽃나루(양화진)에 옆 이곳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처형(머리가 잘림)

            되어 붙여진 이름으로 가톨릭 성지이다 이곳의 이름은? oo산 성지

[퀴즈 5] 조선 교회 최초의 신부 주문모가 처형된 장소로 용산의 저습지였던 이곳은?

 

[요약퀴즈 정답]

[퀴즈 1] 도성 안에서 (순교한 신자들의) 시신을 운반해 나가던 문 이름은? .=> 광희문

[퀴즈 2] 북달재에 설립된 조선 최초 본당이자 서양식 대성당인 이곳은? .=>명동성당

[퀴즈 3] 조선시대의 육조의 하나로 추관’, ‘추조라고 불린 관청은 무엇인가? ,=>형조

[퀴즈 4] 천주교 박해시대 때 많은 신자들의 머리가 잘린 이 곳은? 절두산(切頭山) 성지

[퀴즈 5] 최초의 신부 주문모가 처형된 장소로 용산의 저습지였던 이곳은? ,=> 새남터

 

- 이 게시글로 서울(한양) 탐구 시리즈를 마침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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