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한양) 탐구01-서울의 명칭 유래와 간단 역사
서울의 명칭 유래 출처: <서울의 역사와 문화> 침조링크: http://history.seoul.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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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어원 출처: 서울특별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서라벌(徐羅伐), 서벌, 서야벌, 서나벌이라 하였는데 훈민정음의 창제 후 "셔ᄫᅳᆯ"이라는 표기가 등장하였고 조선시대의 서울의 한자 음차 표기는 이십일도회고시, 한경지략, 증보문헌비고의 서울(徐菀), 동사강목, 북학의의 서울(徐蔚), 대동지지의 서울(徐鬱), 앙엽기에서 서올(徐兀)이 등장하였다.
"서울"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나,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수도를 뜻하는 신라 계통의 고유어인 서라벌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때 한자 가차 표기인 서라벌이 원래 어떤 의미였을지에 대해서도 여러 학설이 존재한다. 삼국사기 등에서 서라벌을 금성으로도 표기했다는 점과 신라까지 포함하여 "설[새: 新, 金]-벌[땅: 羅, 城]", 즉 '새로운 땅'이라는 뜻으로 새기는 견해가 있다. 고대-중세 한국어에서 서라벌을 정확히 어떻게 발음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확인된 바가 없으며, 그 발음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훈민정음의 창제 후 "셔ᄫᅳᆯ"이라는 표기가 등장하고 나서부터이다.
서울의 한자 음차 표기로는 이십일도회고시, 한경지략, 증보문헌비고의 서울(徐菀), 동사강목, 북학의의 서울(徐蔚), 대동지지의 서울(徐鬱), 앙엽기의 서올(徐兀) 등이 있다. 이처럼 조선 시대에 서울은 한양, 한성(漢城) 외에도 서울(셔ᄫᅳᆯ), 경도(京都), 경부(京府), 경사(京師), 경성(京城), 경조(京兆) 등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김정호의 수선전도에서 알 수 있듯 수선(首善)으로 표기된 예도 있다. 이 중 한양과 한성을 제외하면 모두 수도를 뜻하는 일반명사들로서 '서울'이 원래는 서울 지역(사대문 안과 성저십리)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 수도를 뜻하는 일반명사였다는 방증이다. 국어사전에서는 일반명사 '서울'을 '한 나라의 중앙 정부가 있고, 경제, 문화, 정치 등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도시'라고 정의하고 있다. 1910년 10월 1일에 일제가 한성부를 경성부로 개칭하면서 일제강점기에 서울은 주로 경성으로 불렸으며, 1945년 광복 후에는 '경성'이란 말은 도태되고 거의 '서울'로 부르게 되었다.
서울특별시- 개정 로마자 표기: Seoul Teukbyeolsi 공식 표기: Seoul Special City
서울의 로마자 표기 'Seoul'은 19세기 프랑스 선교사들이 서울을 쎄-울(Sé-oul)로 표기한 데서 비롯되었다. 오늘날 프랑스에서는 서울을 'Séoul'로 표기하고, 스페인어권에서는 'Seúl'로 쓰나 모두 '쎄울'로 읽는다. 또, 영미권에서는 일반적으로 'Seoul'로 쓰고 영혼을 뜻하는 단어 'Soul'와 같은 '쏘울'로 읽는다. 서울시에서는 이러한 점을 착안하여 2006년 11월 13일 서울시의 서브슬로건(Sub slogan)을 《Soul of Asia》로 지정하였다.
서울의 명칭 유래
아래 내용은 <서울의 역사와 문화>(참조 링크: http://history.seoul.go.kr)에서 요약 추출한 내용이다.
서울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삼국시대 신라 때로 보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신라 혁거세왕에 대한 내용을 보면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 사라(斯羅), 사로(斯盧)라고 했고, 이후 이것이 도읍의 명칭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름들은 수도(京)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고, 그것이 오늘날의 서울이라는 말로 변하게 되었다.
삼국시대 서울은 백제 온조왕 때(기원전 18)부터 제21대 개로왕 때(475년)까지 약 500년 동안 백제의 수도였다. 오늘날 송파구에 남아있는 풍납토성이 당시의 왕성이었고, 위례성, 혹은 한성으로 불리었다. 그러다가 신라가 진흥왕 때에 한강 유역을 장악하면서 신주(新州)를 설치하였고(552년), 선덕왕 때에는 서울 지역을 한산주(漢山州)로 개칭(637년),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전국을 9주로 나누게 되면서 경덕왕 때에 한산주를 한주(漢州)로 고치게 된다(757년).
고려시대에 들어오면서 서울 지역은 초기에는 양주(楊州)로 불렸다. 그 후 문종 때에 남경(南京)으로 승격되었다가(1067년), 원간섭기인 충렬왕 때에 중앙과 지방 조직을 개편하면서 한양부(漢陽府)로 바뀌게 되었다(1308년).
이후 조선이 건국되면서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게 되었고(1394년),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의 수도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아울러 조선시대 정식 명칭은 한성부(漢城府)였다. 이외에도 당시 만들어진 고지도나 문집 등에는 한양, 경도, 경성 등으로 표기되기도 했다.
한편 일제강점기에는 한성부를 경성부로 개칭하고 경기도에 예속된 하위 관청으로 격하시켰다. 그리고 대외적인 정식 명칭은 일본어 발음인 게이조라고 불렀다. 물론 경성이라는 단어는 원래 삼국시대부터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널리 쓰였던 것이었으나 이 시기 이후부터 경성이라는 단어는 역사적 혹은 문화적으로 일제강점과 관련된 단어로 변하게 되었다.
해방 직후 서울은 서울, 경성, 한성 등 혼재된 이름을 사용했다. 심지어 미군정 표기와 서울시 자체 표기가 다를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1년 후인 1946년 8월 15일자로 서울특별자유시로 이름이 바뀌었고, 경기도와 대등한 관계의 행정기관이 된다. 그러다가 정부수립 이후인 1949년 11월 지방자치법이 공포되면서 서울특별시로 정해져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고려 왕조 말 평양에서 서울로의 한양 천도(遷都 서울을 옮기는 것)계획이 있었다.
출처1: 태고_보우와_한양천도(황인규)
출처2:
고려 왕조 말 공민왕대 승려 太古 普愚(보우)도 한양 천도(遷都 서울을 옮기는 것)를 주장한 바 있다. 한양 천도를 결정할 때 중요한 고려 요소는 풍수지리와 도참설이다. 보우의 남경(한양)천도 주장은 고려초 이래 불교계의 國家裨補思想(국가비보사상)의 흐름속에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공양왕은 2년 9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 짧은 기간 동안 한양에 있었다. 그러나 보우는 신돈이 집권한 1365년 이후 불교계에 이렇다고 할 시책을 펴지 못하다가 이어 보우가 지방으로 축출되면서 한양 천도는 무산되고 말았다.
공양왕은 이성계를 비롯한 공신들의 추대에 의해 국왕이 되었다. 공양왕의 한양 천도는 공민왕 5년(1356)의 반원 운동과 달리, 왜구에 대한 정치세력 간의 갈등에서 일어난 일시적 遷都(천도) 즉 巡駐(순주=왕이 3경(개경·평양·한양)을 돌아가면서 머무는 것)라고 보거나, 왕권을 지키려는 공양왕 세력과 이성계 세력 간의 갈등과정으로 보는 시각이다,
공민왕의 한양 천도 노력은 궁궐 축조까지 시작되었음에도 좌절되었다. 이후 우왕 역시 한양 천도를 결정하고, 이곳에서 몇 달간 머물렀다. 공양왕의 한양 천도는 이후 조선왕조 개창 이후 새로운 수도로 선정하는 기준이 되었다.
조선이 개국하며 한양(서울)이 수도로 결정되었다. 출처: <서울의 역사와 문화> 참조 링크: http://history.seoul.go.kr
아래 내용은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참조한 것으로 요약 편집하였다.
14세기 말 15세기 초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재편되는 가운데, 한반도에서도 새로운 나라가 등장했다. 500년 가까이 이어져 온 고려 왕조가 무너지고 조선이 세워진 것이다. 1392년 태조 이성계는 유교사회를 지향하는 조선을 창건하고, 그로부터 2년 뒤(1394년10월28일) 새 나라의 수도를 서울(당시 한양)로 옮겼다.
조선이 개국되고 정도전과 無學大師(무학대사)의 의견을 수렴하여 한양을 도읍지로 정했다. 한양(서울)의 인문지리적 측면, 경제·군사적 이점, 효율적인 국토 이용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였다. 이때부터 서울은 단순히 국토의 중앙이 아니라 조선 역사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한양(서울)의 풍수와 궁궐 입지
조선시대 서울은 진산인 삼각산(오늘날의 북한산)에서 이어지는 산세를 따라 白岳(백악-북쪽), 仁王(인왕-서쪽), 駱山(낙산-동쪽), 木覓(목멱-남쪽) 이렇게 4개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仁王山(인왕-서쪽)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청계천에 모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남쪽으로 굽이쳐 한강에 합류한다. 산과 물이 조화를 이룬 자연 형세를 배경으로 성곽과와 성문이 자리 잡고, 그 안에 궁궐, 종묘와 사직, 관아와 시전 등의 시설물이 입지했다.
1395년 경복궁과 종묘·사직단의 완공을 시작으로 1405년 창덕궁이 낙성되었으며, 의정부와 육조, 사헌부·사간원 등의 통치 기구가 오늘날 광화문 앞 세종로 일대에 자리했다.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 중등 교육기관인 4부 학당도 四大門(사대문) 안에 건립했다. 이로써 서울은 조선 정치·행정의 중심지 모습을 구축해 나갔다.
한강은 전국에서 거둔 세금을 서울로 운송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변방의 급한 소식은 봉수를 통해 중앙으로 보고되었다.
한편 16세기 말 17세기 초 동아시아 국제 정세 속에서 조선은 1592년 임진왜란과 1636년 병자호란 등의 전쟁을 겪게 된다. 이러한 전쟁 경험은 조선 사회를 비롯해 서울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조선의 국왕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을 정비하는 한편, 한양도성의 무너진 부분을 수축하고 북한산성을 축조하는 등 수도의 방위 체계를 수립해 나갔다.
한양(서울)은 정치·행정,상업의 중심지
이후 서울은 정치·행정의 중심지일 뿐 아니라, 상업 중심의 도시적인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인구가 증가하고 신분별로 지역별 주거지 특징이 나타나기도 했다. 청계천 북쪽 일대인 북촌은 종로구 가회동 일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주로 양반 관료들이 모여 살았고, 청계천 이남 지역인 남촌은 중구 필동을 중심으로 가난한 선비들과 서민들이 모여 살았다.
종로 일대에 형성된 市廛(시전=상설점포)은 도성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상업지역이 종로 중심인 시전에서 벗어나 청계천변 일대, 동대문 이현과 남대문 칠패시장까지 확대된다. 여기에 한강의 용산·마포·서강·송파 등 포구를 중심으로 한 京江商人(경강상인- 참조 링크:경강상인)들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새로운 학문과 (서양)종교 천주교의 도래
이러한 사회변화는 서울의 학문과 문화의 변화를 동반했다. 새롭고 실용적인 학문을 추구하는 실학이 일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했고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북학파도 출현했다. 실학의 대두와 함께 서양의 과학기술이 조선에 들어왔고 천주교 사상이 함께 전파되기도 했다. 초기 천주교는 학문적 차원에서 연구되다가 차츰 신앙으로 발전했으나 성리학적 세계관을 부정하는 교리 때문에 박해를 받았고 현재 양화대교 옆 잠두봉(참조: 절두산 성지)에서 많은 천주교 신자가 처형되었다.
진경산수화와 풍속화에는 한양의 모습이 담겨있어
18세기 서울 일대를 진경산수화풍으로 묘사한 정선은 관념적이고 명분론적인 사고를 대신해 현실에 대한 자각과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서울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와 함께 서민들의 생활풍속이나 여항의 모습을 담은 풍속화는 조선 후기 도시 문화를 생생하게 전달해 준다. 특히 이 시기에는 여항인들이 서울의 문학과 예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이는 조선 후기 서울의 또 다른 특징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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