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한양) 탐구02-조선의 궁궐(5대궁)


 

(배경 영상,음악)  정악 풍류- 영산회상: 국립국악원(2018.09.21)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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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한 주요 자료 및 링크>

1. 궐 및 종묘(문화재청-www.heritage.go.kr)

2. 조선 5대 궁궐로 떠나는 나들이 - Daum 백과

 

*조선 궁궐 잠깐 퀴즈! - 이것만 알아도 조선 궁의 알짜는 웬만큼 안다고 할 수 있다.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 퀴즈-A ]

퀴즈1. 서울에 있는 조선 시대 5대 궁궐의 이름은?

퀴즈2. 조선 시대 임금이 가장 오랫동안 政事(정사)를 보았던 궁(宮)의 이름은?

퀴즈3.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했던 궁의 이름은?

퀴즈4.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났던 궁(宮) 이름은?

퀴즈5. 고종이 아관파천 이후 환궁하여 마지막까지 살았던 궁(宮) 이름은?

퀴즈6. 조선왕조 마지막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여사가 기거한 장소로 실내의 각종 창문과 

         창호의 모양과 무늬가 매우 아름다운 이곳은 어디인가( 안에 있던 장소명)?

 

(알림)

본 게시물은 위에 소개한 참고 자료(밑줄 링크)의 내용과 아래 참조 자료에서 항목과 내용을 가져왔으며 내용 일부는 편집, 가감된 것도 있다.  상세한 내용은 관련 링크나 참조 링크를 보기 바람.

 

(조선) 궁궐의 역사     그림 및 내용출처: 국가문화유산포탈 | 궁궐의 역사 (heritage.go.kr)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5대 궁궐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경운궁) 그리고 경희궁(경덕궁)이다.

 

.경복궁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1392년)하고 나서 수도를 지금의 서울인 한양으로 옮긴 뒤 제일 먼저 종묘와 사직 그리고 궁궐인 경복궁을 세웠다(1395년). 그리고 3대 태종 때(1405년)에는 경복궁의 동쪽에 창덕궁을 창건했다.

 

.창덕궁

이로써 정궁(正宮) 경복궁과 이궁(離宮) 창덕궁 양궐 체제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임금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에 거처하는 것을 더 선호했다. 성종 때 이르러서는 세분의 대비를 위해서 창경궁을 세우게 되었다. 창경궁은 창덕궁 옆에 위치하여 창덕궁의 부속 역할을 하였다.  그 후 1592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타 없어지게 되고, 일 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선조 말 창덕궁 재건이 시작되어 1610년 광해군 때 완성되었으나 중건하고 약 10년 후 1623년 인조반정 때 외전(外殿)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고 말았다. 이후 25년간 방치되었다가 1647년에 복구되었다. 창덕궁은 이후 마지막 황제에 이르기까지 270여 년간 경복궁을 대신하여 정궁의 역할을 하였다.

 

.창경궁

창경궁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창덕궁과 함께 모두 불탔으나 1616년에 복원되었다.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으로 통명전, 양화당, 환경전 등 소실되었으나 1633년(인조 11년 통명전, 양화당, 환경전, 함인정 등 중건되었다. 

 

반면 덕수궁(경운궁)은 원래는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후손의 집이었으나 그 후 선조가 임진왜란 당시 임시로 거처하는 行宮(행궁-왕이 궁궐을 떠나 잠시 경유하는 궁)으로 사용하였다. 그 후 광해군은 이곳에서 즉위한 후 경운궁이라 이름 지어 7년간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광해군은 인왕산 아래, 지금의 사직단 뒤편에 인경궁, 그리고 그 앞쪽 지금의 새문안길가에 경덕궁(경희궁이란 이름은 영조 대에 바뀐 이름이다)을 지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몇 가지 무리한 정책으로 인하여 왕이 된지 15년이 되는 1623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나고 인조가 왕이 된다. 인조는 광해군이 지었던 인경궁을 헐어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보수하였고 경덕궁은 그대로 두어 離宮(이궁)으로 사용하였다. 이로써 창덕궁과 창경궁이 정궁이 되고 경덕궁(경희궁)이 이궁이 되는 새로운 체제가 성립되어 조선 후기 내내 지속되었다.

 

조선 후기의 正宮(정궁)으로 쓰이던 창덕궁은 고종 초년에 경복궁이 중건(1868년)되자 그 지위에 변동이 생긴다. 경복궁이 다시 정궁의 지위를 회복하고 창덕궁과 창경궁은 이궁으로 쓰이며 그때까지 이궁으로 쓰이던 경희궁은 빈 궁궐이 되었다.

 

고종은 경복궁과 창덕궁으로 오가면서 생활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고종에게 압박을 가하여 고종은 경복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다가 두 달도 못 되 다시 경복궁으로 옮기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고종과 그 비인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막아보려 했지만 오히려 일본은 일본공사 미우라의 지휘아래 일본군인, 자객들을 동원해 경복궁에서 명성황후를 살해한다. 이를 을미사변(1895)이라 한다.   참조링크: 명성황후 시해사건, 을미사변 

 

이렇게 압박을 가하는 일본을 외국의 힘으로 막아보려고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은 극비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했다(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러시아 대사관=아관 俄館으로 옮겨 거처함)이라 한다. 참조링크: 아관파천

 

.경운궁(덕수궁)

이로써 정궁인 경복궁이나 이궁인 창덕궁은 모두 빈 궁궐이 되고 만다. 다시 돌아오라는 국민들의 여망의 따라 고종은 경복궁도 창덕궁도 아닌 경운궁(덕수궁)을 확장,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1년 만에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한다. 고종은 경운궁으로 돌아간 뒤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1897년). 그러나 경운궁은 1904년의 대 화재로 인해 거의 모든 전각들이 소실되었다가 1905년-1906년에 대부분의 전각들이 복원되었다.

 

.경희궁

한편 경희궁은 광해군 때 지어진 뒤 여러 왕들이 태어나고 즉위식을 갖는 등 이궁(離宮)으로서 역할을 하다가 20세기 초 일제의 강점으로 뜯겨나가고 헐렸다. 그래서 예전의 본 모습은 오직 궁궐지의 기록을 찾아볼 수밖에 없다.

 

일제 강점기 때 수난을 당한 궁궐은 비단 경희궁뿐이 아니었다. 일제는 경복궁 흥례문 자리에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으며 창경궁에는 동물원과 식물원을 개설하여 일반인에게 관람하게 하면서 격하시켜 '창경원'이라 부르게 하였다.

 

이렇듯 조선의 5대 고궁은 국가의 흥망성쇠에 따라 그 운명을 같이 해온 우리 역사의 동반자이다. 시대가 변하여 차차 원래의 모습으로 보수, 복원되어가고 있지만 지나온 그 역사는 궁궐 각 건물의 공간 안에 현존한다. 그러기에 고궁 탐방은 단지 휴식을 취하고 볼 것을 즐기는 눈요기가 아니라 우리 선조들의 숨결을 함께 느껴볼 수 있는 역사 현장으로의 초대가 되는 셈이다.

 

(조선의) 5대 궁궐 구경(답사)하려면... 아래 링크를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

관람 시간, 관람료, 건물 설명 등은 해당 관리소 홈페이지(링크)를 참고하고, 문화해설사의 안내를 들으며 구경할 수도 있다. 참고로 창덕궁을 제외하고는 자유 관람이며, 경희궁은 무료 관람이다.

 

창덕궁 관람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다. 창덕궁은 안내에 의한 시간제 관람과 제한공개가 원칙이다. 목요일 자유관람 외에는 해설사와 함께 정해진 시간에 입장해야 한다. 옥류천(玉流川)과 낙선재(樂善齊)는 특별관람이다. 일반관람 코스에 들어가지 않는다.  

 

참조한 자료 및 내용 출처 : 조선 5대 궁궐로 떠나는 나들이  

1. 첫 번째 코스 (경복궁) ,   관람안내 링크: 경복궁 관리소 www.royalpalace.go.kr/

2. 두 번째 코스 (창경궁) ,   관람안내 링크: 창경궁 관리소 www.cgg.cha.go.kr/

3. 세 번째 코스 (창덕궁) ,   관람안내 링크: 창덕궁 관리소 www.cdg.go.kr

4. 네 번째 코스 (덕수궁) ,   관람안내 링크: 덕수궁 관리소 www.deoksugung.go.kr/

5. 다섯 번째 코스 (경희궁),  참조링크: 경희궁 - 나무위키 (namu.wiki)

..고지도에 표시된 조선의 주요 궁궐과 종묘와 사직단 - 출처: 인터넷

A.경복궁      관람안내 링크:  경복궁 관리소 www.royalpalace.go.kr/

                 내용출처: 국가문화유산포탈 | 경복궁 소개 (heritage.go.kr)

 

경복궁은 조선 왕조 제일의 法宮(법궁)이다.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창건하였고,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졌다가, 고종 때인 1867년 중건되었다. 흥선 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된 경복궁은 500여 동의 건물들이 미로같이 빼곡히 들어선 웅장한 모습이었다.

 

궁궐 안에는 왕과 관리들의 정무 시설, 왕족들의 생활공간, 휴식을 위한 후원 공간이 조성되었다. 또한 왕비의 중궁, 세자의 동궁, 고종이 만든 건청궁 등 궁궐 안에 다시 여러 작은 궁들이 복잡하게 모인 곳이기도 하다.

 

광화문-흥례문-근정문-근정전-사정전-강녕전-교태전을 잇는 중심 부분은 궁궐의 핵심 공간이며,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대칭적으로 건축되었다. 그러나 중심부를 제외한 건축물들은 비대칭적으로 배치되어 변화와 통일의 아름다움을 함께 갖추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복궁의 주요 건물          내용출처: 경복궁/건축물 - 나무위키 (namu.wiki)

광화문 光化門 링크:광화문(光化門)-경복궁의 正門(정문=南門 남문).

건춘문 建春門 링크:건춘문(建春門)-경복궁의 東門(동문)으로 봄(春)과 동쪽(東)은 예로부터 세자를 뜻하는 말이었고

                                     건춘문 근처에 동궁전이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다.

영추문 迎秋門 링크:영추문(迎秋門)-경복궁의 西門(서문)-가을을 맞이한다는 뜻.

신무문 神武門 링크:신무문(神武門)-경복궁의 북문. 풍수지리적인 문제로 닫혀 있었다.

 

동십자각 東十字閣 링크:동십자각(東十字閣) -궁성을 수비하던 망루로 경복궁에 현존하는 유일한 망루

근정전(勤政殿) 링크:근정전(勤政殿)-경복궁의 政殿(정전-왕이 정사를 보던 전각)으로 국가대례(代禮)를 거행하던

                                      장소로 다포식(多包式) 건축으로는 현존하는 것 중 국내 최대 규모이다.

 

강녕전(康寧殿)-임금의 침전(寢殿 잠을 자던 곳)으로 지붕에 용마루가 없다.

교태전(交泰殿)-왕비의 침전으로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지붕에 용마루가 없다.

 

아미산(峨嵋山)-경회루 연못을 팔 때 나온 흙으로 만든 인공산으로 3단의 화계(花階)로 된 출입구에는 2.6m 높이의 육각형 벽돌 굴뚝 4개가 있는데, 교태전의 온돌방에서 나오는 연기를 배출하기 위해 만들었다. 각 굴뚝의 여섯 벽면에는  다 양한 길상문이 아름답게 꾸며졌으며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11호로 지정되었다.

 

자경전 십장생 굴뚝-자경전 서쪽에 있는 담장으로 황토색 벽돌과 흰 삼화토를 사용해 만든 벽면에 각종 길상문자와 길상

                          도안, 기하학적 문양을 장식했다.

자경전 꽃담-미학적 가치가 뛰어나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10호로 지정되었다.

 

건청궁(乾淸宮)참조링크: 건청궁 (경복궁)-위키백과

건청궁은 1873년(고종 10년) 경복궁 중건이 끝난 뒤 고종이 흥선대원군 모르게 궁궐의 내밀한 북쪽에 국고가 아닌 사비로 지은 '궁 안의 궁'이다. 실제로 1873년부터 고종이 친정(親政)을 시작했기 때문에, 건청궁 건설은 아버지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정치적 행보라는 해석이 있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이후 버려졌다가 1909년(융희 3년) 철거되었고, 2007년 복원되었다.

 

곤녕합(坤寧閤)참조링크: 곤녕합(坤寧閤)

명성황후 민씨가 머물던 처소로 민가의 안채 역할을 하던 장소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 경복궁에 난입한 일본인에게 명성황후 민씨가 시해된 장소이며, 시신은 곤녕합 옥호루(玉壺樓)에 잠시 안치했다가 곧 건청궁 뒤쪽 녹산(鹿山)에서 불태워졌다. 이곳 역시 아관파천 이후 버려졌다가 1909년(융희 3년) 철거되었고, 2007년 복원되었다.

 

경회루(慶會樓)- 1395년(태조 년4) 경복궁 창건 때 연못을 파고 누각을 세웠으나 지대가 습해 건물이 기울자 1412년(태종 12년) 연못을 대규모로 준설해 동서 128m, 남북 113m의 방지(方池)를 조성하고 경회루를 세웠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867년(고종 4년) 중건하였다. 지금의 경회루는 정면 7칸(34.4m), 측면 5칸(28,5m)현존하는 한국의 목조 건축 중 규모가 가장 크다.

 

.경회루 -그림 출처: 조선의 궁궐 - 나무위키

향원정(香遠亭)- 경회루 서북쪽 향원지 안에 세워진 2층의 정자 누각이다. 원래는 건청궁의 후원 역할을 하는 장소였기에 건너가기 편하도록 건청궁에서 향원정을 향해 다리가 놓여있었으나 지금은 자리가 바뀌어 향원지 남쪽에서 향원정으로 향하게 놓여 있다. 창덕궁 부용정과 함께 사진이나 그림의 단골 소재인 장소이다.

.향원정

동궐도(東闕圖) - 참조링크 내용 출처: 동궐도(東闕圖) 다음백과

동궐도   사진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Donggwol-do.jpg

동궐(東闕)은 창덕궁의 별칭으로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동편에 있는 궁궐이라는 뜻으로 바로 옆에 인접한 창경궁도 함께 그려져 있다.

 

B. 창경궁    관람안내 링크:  창경궁 관리소 www.cgg.cha.go.kr/

                내용출처: 국가문화유산포탈 | 창경궁 소개 (heritage.go.kr)

 

창경궁은 경복궁, 창덕궁에 이어 세 번째로 지어진 조선시대 궁궐이다. 조선 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경복궁을 법궁으로, 창덕궁을 보조 궁궐로 사용하는 양궐 체제를 이어왔다. 그러나 역대 왕들은 경복궁보다는 창덕궁에 거처하는 것을 더 좋아하였고, 왕실 가족이 늘어나면서 차츰 창덕궁의 생활공간도 비좁아졌다. 이에 성종이 왕실의 웃어른인 세조 비 정희왕후, 예종 비 안순왕후, 덕종 비 소혜왕후 등 세 분의 대비가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창덕궁 이웃에 마련한 궁궐이 창경궁이다.

 

창경궁은 왕이 정사를 돌보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생활공간을 넓힐 목적으로 세워졌고, 또한 애초 궁궐로서 계획된 것이 아니라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살았던 수강궁에 몇몇 전각을 보태어 세운 궁궐이다. 따라서 경복궁이나 창덕궁과 비교해볼 때 그 규모나 배치 등에 다른 점이 많다.

 

우선 창경궁은 전각의 수가 많지 않고 규모가 아담하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은 자경전도 언덕에 지어졌다. 창경궁의 또 다른 독특함은 조선시대 다른 궁궐과 주요 전각들이 남향으로 지어진 것과 달리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점이다. 창경궁의 경우 정문인 홍화문과 정전인 명정전은 동쪽을 향하고, 관청 건물인 궐내각사와 내전의 주요 전각들은 남쪽을 향해 있다. 남·서·북쪽이 구릉이고, 동쪽이 평지인 지세라서 이를 거스르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왕실 가족의 생활공간으로 발전해온 궁궐이기에 내전이 외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넓은 것도 창경궁의 특색이다. 따라서 창경궁에는 왕들의 지극한 효심과 사랑, 왕과 세자의 애증, 왕비와 후궁의 갈등 등 왕실 가족 사이에 일어난 이야기도 풍부하게 전해온다. 세간에 널리 알려진 장희빈과 인현왕후,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도 사건이 일어난 현장인 창경궁에서 들으면 더 생생하게 들린다.

 

창덕궁과 함께 '동궐'로 불렸던 창경궁은 서쪽으로 창덕궁과 맞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낮은 언덕을 지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와 이어져 본래 한 영역을 이루었다.

 

C. 창덕궁    관람안내 링크: 창덕궁 관리소 www.cdg.go.kr

                내용출처: 국가문화유산포탈 | 창덕궁 소개 (heritage.go.kr)

 

창덕궁은 1405년 (태종5년) 조선왕조의 이궁(離宮)으로 지어진 궁궐이다. 경복궁의 동쪽에 자리한 창덕궁은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東闕0이라 불리기도 했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에 타자 선조는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의 복구를 선조 40년(1607)에 시작하였으며, 창덕궁은 광해군 2년(1610)에 중건이 마무리 되었다.

 

그 후 창덕궁은 1623년 3월 인조반정으로 인정전을 제외하고 또다시 불에 타는 시련을 겪었다. 인조 25년(1647)에 복구되었으나 1917년 대조전을 중심으로 내전 일곽이 손실되는 대화재가 일어났다.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 때부터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가지 총 258년 동안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하며 정사(政事)를 편 궁궐이다.

 

북한산의 매봉 기슭에 세운 창덕궁은 다른 궁궐과는 달리 나무가 유난히 많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가 탁월하여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조선시대의 뛰어난 조경을 보여주는 昌德宮後苑(창덕궁후원=秘苑 비원)을 통해 궁궐의 조경양식을 알 수 있다. 후원에는 160여 종의 나무들이 있으며, 그 중에는 300년이 넘는 나무도 있다. 창덕궁은 조선시대의 조경이 훼손되지 않고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는 귀중한 장소이다. 참조 링크: 창덕궁 후원秘苑(비원)

 

.부용지- 뒤쪽 언덕에 주합루

창덕궁의 주요 건물       내용출처: 창덕궁/건축물 - 나무위키 (namu.wiki) 

부용정(芙蓉亭)- 부용지의 정자로 정면 5, 측면 4, 배면 3칸의 자형 전각이다. 배면 한 칸은 연못에 높은 석주(石柱)를 세우고 수중누각(水中樓閣)이 되게 하여 수상과 지상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영화당(暎花堂)- 부용지 동쪽에 있는 전각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이익공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광해군 때 처은 건립되었으나 현재의 전각은 1692년(숙종 18)에 재건된 것이다. 부용정 일대에서 내력이 제일 오래된 건물이다. 정조 이전까지 왕과 신하들이 연회를 개최하거나 활을 쏘던 곳이고 이후 시험장으로 활용되었다. 영화당 앞 마당은 현재 모습과는 달리 창경궁 춘당지 바로 앞까지 넓게 열린 공간이었는데, 이 마당을 '춘당대春塘臺'라 불렀다. 공간이 매우 넓어 문과/무과시험 가리지 않고 왕이 직접 행차하여 과거시험을 지켜보고 관장했으며 이곳에서 치는 과거시험을 "춘당대시春塘臺試"라고 부르기도 했다.

 

주합루(宙合樓)- 창덕궁 부용지의 전각 중 하나로 정면 5칸, 측면 4칸, 팔작지붕 형식의 중층 전각으로 1776년(정조 원년)에 건립되었다. 주합루의 경우 2층은 주합루, 1층은 어제각이라 했으며 본래 역대 국왕들의 글과 어필을 보관하던 곳으로 이후 규장각으로 개명되었다.

 

연경당(演慶堂)- 창덕궁 후원에 위치한 전각으로 1828(순조 28)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기간에 순조의 진작례를 올리기 위해 진장각(珍藏閣) 옛터에 세워져 당시 효명세자의 왕권강화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전각이다. 궁궐의 다른 전각들과 달리 궐내에서 유일하게 민가 형식으로 지어졌다. 참고: 진작(進爵)-'진작례’란 왕실의 특별한 날에 신하들이 임금에게 술과 음식을 올리고 예를 표하는 의식이다.

 

청의정(淸漪亭)- 창덕궁 후원의 옥류천에 위치한 정자이며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궁궐에서 유일하게 팔각의 초가 지붕을 하고 있다. 익공계 사모 형식을 하고 있으며 1636(인조 14)에 세워졌다. 정자 앞으로 논을 만들어 벼를 심고, 수확 후에는 볏짚으로 정자의 지붕 이엉을 잇게 하였는데 이는 농사의 소중함을 백성들에게 일깨워주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애련정(愛蓮亭)-애련지에 위치한 전각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에 익공계 사모지붕을 하고 있다. 1692(숙종 18)에 세워졌고 액명은 중국 송나라 때 주돈이가 쓴 애련설에서 빌린 것이다.

 

관람정(觀纜亭)-관람지에 속해 있는 정자로 한반도 모양의 연못인 관람지에 놓여져 있으며 부채꼴 扇形(선형) 기와지붕을 한 굴도리집을 하고 있다.

 

존덕정(尊德亭)- 관람지에 속해 있는 정자로 동시대의 정자들과 달리 이중지붕 구조의 육각지붕으로 만들어진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어서 육우정(六隅亭) 또는 육면정(六面亭)이라고도 불렸다.

 

돈화문(敦化門)-창덕궁의 정문으로 1412(태종 12)에 건립되었고 다음 해인 1413(태종 13)에 무게 1만 5천 근의 동종을 걸어 시간을 알리게 했다. 현재 보물 제383호로 지정되어 있다. 굳이 5칸으로 지어놓고 양 옆의 2칸을 막아놓은 것은 황제국이 5문을 사용하고 제후국이 3문을 사용한다는 규정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은 셈이라고 한다.

 

인정전(仁政殿)-창덕궁의 정전으로 용마루에는 다섯 개의 이화문장이 새겨져 있다. 1405(태종 5)에 건립되어 세종 원년에 고쳐 지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광해군 원년에 재건되어 황폐화된 경복궁의 근정전을 대신해 이곳에서 국가적인 대례를 행하는 장소가 되었다.

 

궐내각사(闕內各司)-현재 창덕궁의 궐내각사는 인정전의 서편쪽 궐내각사만 복원되있는 형편이나, 원래는 선정전의 앞뜰에도 승정원, 사간원, 선전관청, 사옹원, 대전장방 등 빽빽한 건물군으로 궐내각사가 유지되었다. 비록 복원된 것이라고는 하나 창덕궁의 궐내각사는 한국 5대궁 중에서 특히나 궁이 과거 중앙국가행정의 중심이자 치소(治所)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곳으로써 가치가 높고, 왕족과 귀족의 거처에 불과한 서양의 궁/궁전들과의 차이점을 보여주는 곳이다.

 

창덕궁의 주요 궐내각사-(링크)

이문원(摛文院) 검서청(檢書廳) 봉모당(奉謨堂) 책고(冊庫)

예문관(藝文館)  홍문관(弘文館) 내의원(內醫院) 억석루(憶昔樓)

 

참고 궐외각사(闕外各司)- 대궐밖에 있었던 관청으로 광화문 앞 세종로에 있던 육조나, 궁 밖에 있는 내수사, 비변사 등은 궐외각사라 하였다.

 

희정당(熙政堂)-창덕궁의 편전으로 외양은 한식건물에 서양식 실내장식을 하고 있다. 남행각 현관의 경우 서구식 현관에 일본식이 가미되었고, 희정당도 왜곡과 변질이 가해졌다. 내부는 쪽마루에 카펫이 깔리고 창문에는 유리가 끼워졌으며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설치되는 등 전형적인 서양식 실내 장식을 하고 있는 데다가 외관의 남행각에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현관이 설치되었다. 해방 후인 1985년에 보물 제815호로 지정되었다.

 

대조전(大造殿)-왕비의 침전으로 용마루가 없다.

 

성정각(誠正閣)-창덕궁 동궁에 속한 전각으로 학문을 대하는 정성과 올바른 마음가짐을 뜻하는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이라는 말에서 따왔으며 현판의 필체는 정조의 어필이라고 전해진다. 성정각은 본래 왕세자가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었다.

   

선원전(璿源殿)- 이곳에는 태조·세조·원종·숙종·영조·정조·순조·문조·헌종·철종·고종·순종의 어진을 모시고 있다가 일제강점기인 1921년 창덕궁 후원 서북쪽에 선원전을 새로 지어 어진을 옮긴 뒤부터 구 선원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신 선원전- 창덕궁 신 신원전에 속하는 정면 14, 측면 4칸의 규모를 한 전각 중 하나로 본래 명나라 태조(太祖신종(神宗의종(毅宗)을 제사지낸 사당이었던 대보단(大報壇)과 북일영(北一營) 등이 위치하고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212곳을 헐어내 새로 선원전을 세워 역대 임금들의 어진을 모셨다. 하지만 19506.25 전쟁 때 부산으로 소개했던 어진들이 대부분 불에 타는 사고를 겪어 전각 안은 비어 있다. 현재는 일반에 개방된 곳이 아니다.

 

창덕궁 낙선재            내용 및 링크  출처1: 창덕궁/건축물 - 나무위키 (namu.wiki)

                                             출처2: 창덕궁낙선재(昌德宮樂善齋)-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낙선재

낙선재(樂善齋): 출처:창덕궁/건축물 - 나무위키 (namu.wiki)

창덕궁 낙선재 권역을 대표하는 전각으로 사랑채의 역할을 한다. 정면 6, 측면 2칸의 단층 팔작기와지붕이며 1846(헌종 12)에 단청없는 사대부가(士大夫家) 양식으로 세워졌다. 본래 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가 거주할 전각을 만들면서 헌종 본인도 같이 기거할 사랑채격으로 지은 곳으로 헌종이 추사 김정희를 접견하는 장소로 자주 사용하는 등, 헌종의 문예생활이 주로 이곳에서 이뤄졌다.

 

순종 사후(死後 죽은 후) 낙선재에 머물던 순정효황후를 위해 1930년대에 낙선재 서행랑(서쪽 행랑)을 허물고 신관을 신축했으며, 해방 후 대한제국 황실 가족이 거주한 장소이다. 1963 11 22일 일본에서 돌아온 영친왕이 1970 5 1, 이방자 여사가 1989 4 30일에 숨을 거둔 곳이기도 하다. 이방자 사후(死後 죽은 후)  1990년대에 신관을 철거하고 원래의 서쪽 행랑을 복원했다.

.낙선재 일원

이하 내용출처: 창덕궁낙선재(昌德宮樂善齋)-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847년(헌종 13)에 중건된 낙선재는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해 세워진 건물로 보물 제1764호이다. 그러나 고종 대에 들어와서 중희당과 가까운 낙선재를 종종 편전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생겼다. 특히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이후 고종은 낙선재를 집무실로 정하고 대신들과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였다. 그 후 조선왕조 마지막 영친왕 이은이 1963년부터 1970년까지 살았으며, 1966년부터 1989년까지는 이방자 여사가 기거하였다.

 

이 낙선재는 실내의 각종 창문과 창호의 모양과 무늬가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다른 곳에서 보기 드문 원형문(圓形門)이 있다. 낙선재의 후원에는 장대석으로 쌓은 화계(花階 꽃계단)가 있고 괴석 등을 전시하였다. 또 벽돌로 문양을 만들고 기와로 지붕을 얹은 아름다운 굴뚝이 있다. 화계 뒤로는 상량정(上凉亭)과 서고가 있고, 서쪽으로 소주합루와 만난다. 

 

D. 경운궁(慶運宮), 덕수궁(德壽宮)

참조 링크 1. 덕수궁 - 다음백과

참조 링크 2. 국가문화유산포탈 | 덕수궁 소개 (heritage.go.kr)

참조 링크 3. 덕수궁 관리소  www.deoksugung.go.kr/

 

덕수궁 일원

-이하 내용- 다음백과와 민족문화 백과사전에서 발췌함-

현재 덕수궁의 옛 이름인 경운궁은 처음 월산대군의 집터였던 것을 임진왜란 이후 선조의 임시거처로 사용되어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다가 광해군 때에 경운궁으로 개칭되었다.

 

고종은 1895년(고종 32)에 을미사변이후 세계 열강들 사이에서 보다 자주적인 입지를 확보하려는 계획을 도모하면서 경운궁(덕수궁)을 대대적으로 중건하였다. 1897년(광무 1)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부터 중화전을 비롯하여 정관헌, 돈덕전,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준명전, 흠문각, 함녕전, 석조전 등 많은 건물들을 지속적으로 세웠다.

 

1907년 고종은 결국 일본의 강압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났다. 고종에게 왕위를 물려받은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고종에게 장수를 비는 뜻으로 ‘德壽(덕수)’라는 궁호((宮號 궁이름)를 올린 것이 그대로 궁궐 이름 덕수궁(德壽宮)이 되었다.

 

한편 고종의 재위 말년의 약 10년간 정치적 혼란의 주무대가 되었던 덕수궁은 궁내에 서양식 건물(석조전 등)이 여럿 지어졌다. 덕수궁의 독특한 건물로 함녕전 뒤편에 있는 정관헌은 전통식 지붕 구조와 서양식 기둥 양식이 절충된 건물이다. 석조전은 내부와 외부가 모두 서양식으로 꾸며진 건물이다. 이처럼 덕수궁에 여러 서양식 건물이 남아 있는 것을 통해 고종이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점을 알 수 있다.

 

궁궐 안의 서양 건물, 석조전(石造殿) 참조링크: 석조전

.석조전

석조전은 경운궁(덕수궁) 안에 지어진 서양식 건물로 유럽의 궁정을 본 땄다. 황제가 일상생활을 하며 손님을 맞던 곳이었다. 화재 위험을 막기 위해 돌로 지었고 현관에는 대한 제국의 상징인 오얏꽃이 새겨져 있고 내부는 서양식 가구와 벽난로, 화려한 전등으로 장식했다.

 

1919년, 경운궁에 머물던 고종 황제가 세상을 뜨면서 석조전은 미술관으로 바뀌었다. 해방 이후 민주의원 의사당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린 장소이기도 하다. ​한국 전쟁 이후 국립박물관, 현대미술관, 문화재 관리국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쓰이다가 2014년 본래의 석조전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E. 경희궁(慶熙宮)   내용출처1: 경희궁 -위키백과

                          내용출처2: 경희궁 - 나무위키 (namu.wiki)

 

경희궁(慶熙宮)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 2가에 있는 조선 시대 궁궐로 광해군 9년(1617년)에 건립한 이후, 10대에 걸쳐 임금이 정사를 보았던 궁궐이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경복궁의 동쪽 궁궐인 창덕궁+창경궁을 지칭하는 '동궐'에 대비되는 경복궁의 서쪽 궁궐을 뜻하는 '서궐(西闕)'로 불렸다. 새문안 대궐, 새문동 대궐, 아주개 대궐이라고도 하였다. 조선 시대의 이궁(離宮)으로, 경운궁(덕수궁)과 홍교(虹橋 무지개다리 Arch)로 연결되어 있었다.

 

규모로 보자면 경복궁 크기의 2/3를 넘는 영역이 경희궁에 속하였고, 한양도성 서쪽 성벽 일부와 한양 서북부를 대부분 차지하던 거대한 궁궐이었다. 모두 98채의 건물이 들어섰던 경희궁은 경복궁, 창경궁과 함께 조선왕조의 3대궁으로 꼽힐 만큼 큰 궁궐이었으며 본래는 100여 동이 넘는 전각들이 있었다.

 

그러나 5대궁 가운데 가장 철저히 파괴된 궁으로서 흥선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에 의해 몇 채의 전각들을 제외하곤 전부 훼철됐고, 그나마 남아있던 부지 또한 일제강점기에 축소되어 현재 원 상태로 남아있는 건물은 정문이었던 흥화문과 정전이었던 숭정전, 그리고 후원의 정자였던 황학정까지 세 채에 불과하다.

 

[ 퀴즈-A ]

퀴즈1. 서울에 있는 조선 시대 5대 궁궐의 이름은?

퀴즈2. 조선 시대 임금이 가장 오랫동안 政事(정사)를 보았던 궁(宮)의 이름은?

퀴즈3.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했던 궁의 이름은?

퀴즈4. 명성왕후 시해 사건이 일어났던 궁(宮) 이름은?

퀴즈5. 고종이 아관파천 이후 환궁하여 마지막까지 살았던 궁(宮) 이름은?

퀴즈6. 조선왕조 마지막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여사가 기거한 장소로 실내의 각종 창문과 

         창호의 모양과 무늬가 매우 아름다운 이곳은 어디인가( 안에 있던 장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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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퀴즈-A 정답]

퀴즈1 답. 서울에 있는 조선 시대 5대 궁궐의 이름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경운궁), 경희궁.

퀴즈2. 답. 조선 시대 임금이 가장 오랫동안 政事(정사)를 보았던 궁(宮)의 이름은? 창덕궁

퀴즈3. 답.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했던 궁의 이름은? 창경궁

퀴즈4. 답. 명성왕후 시해 사건이 일어났던 궁(宮) 이름은? 경복궁

퀴즈5. 답. 고종이 아관파천 이후 환궁하여 마지막까지 살았던 궁(宮) 이름은? 덕수궁

퀴즈6. 답. 조선왕조 마지막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여사가 기거한 장소로 실내의 각종 창문과 

             창호의 모양과 무늬가 매우 아름다운 이곳은 어디인가( 안에 있던 장소명)?  낙선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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