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특집 ‘한국의 구곡’|<1>어디서 유래했나?] ‘한국의 구곡’ 전국 102개 최초 공개



국립수목원에서 2021년까지 연구사업… 중국 주자가 무이산에 ‘무이구곡’ 첫 설정

여름 특집으로 ‘한국의 구곡九曲’을 마련했다. 말만 들어도 시원하다. 그런데 구곡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제법 있는 듯하다. 구곡 자체의 인문학적 개념을 배제한 채 간단히 말하면, 계곡의 다른 이름이다. 조금 격조 있는 표현으로는 굽이쳐 흐르는 풍경 있는 계곡을 가리킨다.

여름에는 대개 시원한 계곡이 있는 산을 찾는다. 거기서 경관 좋고 풍류를 즐길 만한 곳이 있으면 구곡이라 보면 된다. 조선 선비들 기준으로 ‘자연과 더불어 은둔생활하면서 후학을 가르치고 음풍농월하기 좋은 계곡’으로 보면 된다. 지금 남아 있는 서원들 주변에는 틀림없이 구곡이 있다. 서원이 없더라도 풍광이 좋으면 십중팔구 구곡과 관련이 있다.

시원한 계곡 중심으로 행해지는 여름 등산은 계곡을 따라 오르기도 하고 계곡에서 아예 머무르기도 한다. 계곡 주위 바위엔 다양한 석각들이 눈에 띈다. 누군가의 이름부터 고사성어까지 다양하다. 그중에 ‘1곡一曲’, ‘2곡二曲’ 등 뭔가 의미 있는 듯한 석각이 눈길을 끈다. 이른바 ‘구곡’이다.

구곡이 무엇이고, 어디서 유래했고, 언제 전국적으로 확산됐는지 살펴보자. 그런데 구곡을 파악하기 위해선 ‘산수山水’의 개념을 먼저 알아야 한다. 동양 사상인 유교나 불교, 도교의 근본 목적은 모두 깨달음, 즉 도道의 체득에 있다. 이보다 1,000여 년 뒤에 나온 주자의 성리학도 근본은 깨달음에 있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朝聞道 夕死可矣” 했다. 노자도 <도덕경>에 “도를 도라 하면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라고 했다. 불교는 “실체 없는 마음 본원의 자리를 깨닫는 게 도”라고 했다. 이른바 득도得道다. 도를 향한 본질은 같으면서도 방향성에 있어 조금씩 차이를 드러냈다.

근원자리는 山, 변화하는 자리는 水

도를 향한 본질, 즉 진리의 체득을 이들 사상에서는 공통적으로 산과 물의 이치에 비유했다. 흔들림 없는 인식과 판단 이전의 근원 자리를 산山에 비유했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세계를 물水에 비유했다. 이는 노자의 무위자연과 일맥상통한다.

1,000여 년 뒤 주자의 성리학에서는 이理와 기氣로써 나타내려고 했다. 성리학은 이와 기로써 깨달음을 얻으려고 했다. 理는 깨달음의 본성이고, 氣는 나타나는 현상세계를 말한다. 이기일원론은 깨달음이 나타나는 현상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고, 이기이원론은 깨달음이 보이는 현상과 다르다는 설명이다.

부산대 강기래 생명산업융합연구원은 “조선시대까지 학문의 궁극적 목적은 깨달음에 있으며,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물처럼 쉴 새 없이 생동감을 가지고 흐르면서, 산처럼 변하지 않는 진리를 산수라는 자연에 빗대 표현했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산수란 개념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고 그 속에 무궁무진한 철학적 개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산수의 개념에 더해서, 구九의 개념도 의미심장하다. 중국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르면, ‘구는 양수의 변變이며, 그 굽은 것이 다 끝난 모양을 본뜬 것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단순한 아홉 개의 개념이 아니라 굽이쳐 흐르는 모양이 극에 달한 모습을 가리킨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따라서 구곡의 개념은 진리를 깨닫기 위해 변화무쌍한 水와 흔들리지 않는 山의 모습이 굽이쳐 흐르는 극에 달한 계곡과 어울린 현상을 가리킨다고 보면 무리가 없겠다. 

유교는 초기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외향적 학문의 성격에서 정치와 학문적 발전과 질곡을 겪으면서 점차 수기안인修己安人의 내면적 학문으로 변해 간다. 이러한 내면적 평안을 위한 자기 수행 학문의 길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인물이 바로 주자이다.

주자는 이와 기의 발현과 그 관찰을 통한 심성의 체득을 목표로 했다. 이러한 심성, 즉 진리의 체득을 위한 수신의 장소와 도구로서 산과 물이 있는 자연을 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굽이쳐 흐르는 물의 모양에도 ‘구’라는 동양사상을 접목해 구곡이라는 개념을 탄생시켰다.   

주자는 공자 사후 1,500여 년이 지난 뒤 공자의 가르침인 도의 실체적 체득을 위한 행위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 고민의 해결점이 된 기본적인 장소가 산과 물이 있는 자연의 깊은 탐구로부터 시작된다. 그게 바로 무이구곡武夷九曲이다.

근본적인 깨달음을 표현한 도처럼 연원을 알 수 없는 공간으로부터 시작된 물줄기의 흐름에 대한 특정한 경관과 장소를 결합해 명칭을 부여하면 비로소 하나의 개인적 영역성을 가진 공간으로 변화한다. 이러한 공간에 대한 명칭은 타인들의 인식에 오르내리면서 자연스럽게 명명자의 사적인 공간으로의 역할도 하게 된다. 또한 영역성의 표시로 바위에 암각문을 새기고 시문을 남기기도 했다.

주자는 구곡을 경영하면서 자연과의 합일을 통한 궁극적인 깨달음에 이르기를 바랐고, 세상의 이치를 터득하기 위한 수신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바라보기도 했으며, 유교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장소로 활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실제 중국에는 유교의 성지라고 해서 유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하고 희한한 신앙 복합체로 뒤섞여 있다. 다시 말해 유교의 성지이지만 유교의 비중이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이산의 장소 정체성은 유·불·선 문화적 혼재로 인한 신비감과 도가의 수많은 유적, 선가에서 일컫는 36동천 중 16번째인 승진원화동천이라는 상징성 등 문화적 다양성으로 인해 경외감이 느껴질 정도다. 여기에 중국의 광활하고 기이한 자연이 주는 신비감으로 더욱 깊이를 더한다. 자연의 웅대한 스케일은 인간을 압도하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인간이 진리를 체득하기 위한 도구로 자연을 활용하기에 전혀 손색이 없다.

배를 타고 가는 중국 무이산의 무이구곡과는 달리 한국의 구곡은 하천을 따라 올라가면서 자연을 감상하는 구곡으로 변화했다. 사진 중국여유국
배를 타고 가는 중국 무이산의 무이구곡과는 달리 한국의 구곡은 하천을 따라 올라가면서 자연을 감상하는 구곡으로 변화했다. 사진 중국여유국
산은 이, 수는 기로서 道를 체득

주자의 학문, 즉 성리학은 고려 말 안향(1243~1306)에 의해 최초로 한반도로 유입된다. 구곡의 개념으로서보다는 신학문의 개념으로 들어왔다. 그보다 조금 뒤에 근재 안축(1282~1348)에 의해 순흥지역에 ‘죽계구곡’이 한반도 최초의 구곡으로 설정된다.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현재 소수서원)이 바로 그 계곡 옆에 자리 잡고 있다. 16세기 이황·이이를 중심으로 성리학이 심화되는 시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구곡이 정착되기 시작한다. 이른바 학주자學朱子·존주자尊朱子로 주자를 추앙하면서 조선 유학자들은 성리학의 기본 사상과 실천 철학으로 인식하면서 구곡이 확산된다.

하지만 우리의 자연환경은 중국의 자연환경과 스케일에서 너무 차이가 난다. 구곡의 모티프는 유지하지만 그 지역의 하천지형적 특성과 실정에 부합하는 이미지의 재구성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 무이구곡에 비해 산상의 수직요소보다는 산하의 국부적 수평요소가 우세경관요소로 작용하면서 소沼·담潭·석石 등에 이름 붙이기로 약간 변형된 형태로 자리 잡는다.

국내에는 무이구곡처럼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갈 만한 장소가 드문 관계로 하천 형태와 기능적 텍스트성으로서의 결속구조는 다소 이완된 채 도학적 사고나 풍류적 향유에 의존한 구곡문화가 텍스트성의 내적구조를 지배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조선의 구곡은 중국의 무이구곡을 받아들이지만 성리학적 이념을 배경으로 하는 조선의 사회 속에서 제작자의 목적이나 의도, 자연환경에 따라 재해석되고 이름 붙여지는 과정을 거친다.

결국 주자의 성리학적 구곡사상의 핵심은 자연에서 도를 체득하기 위한 도교문화적 상황과 유교의 경세제민經世濟民적 사대부 사고관과 융합된 조선의 새로운 유교문화로 정착하게 된다. 즉 도교와 유교가 결합된 사유방식으로 나타난다. 이후에는 도를 체득하기 위한 과정은 없어지고 풍류만 남는, 즉 본질은 없어지고 껍데기만 남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한편 국내의 구곡연구는 학자들마다 간헐적으로 이뤄져 오다가 국립수목원에서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산림역사자료 고찰을 통한 산수문화의 현대적 활용연구’라는 주제로 집중적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현재 남한의 구곡은 총 102개로 나타났다. 국내 최초로 현장 답사를 통해 공식적으로 집계하는 데 성공했다. 그동안 국내 학자들은 150개, 170개, 200여 개, 250여 개 등 각자 편의대로 다양한 구곡 수를 발표해 왔다.

강기래 부산대 연구원은 “공식적으로 확인된 구곡은 102개이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많다. 시나 문헌으로만 남은 구곡도 상당수 있어 그동안 구곡 수에 혼란이 있었다. 흔적이 없는 구곡까지 포함하면 실제 250개 정도 된다. 하지만 현장을 찾을 수 없고 실체가 없는, 즉 시와 구전으로만 전하는 구곡을 이번 조사를 통해 상당수 확인했다”고 말했다.

구곡은 사상적 의미 포함, 팔경은 수려한 자연만

국립수목원은 이번 조사에서 구곡과 팔경八景에 대해서도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구곡은 자연을 통해 이와 기의 진리를 체득하는 사상적 의미가 강하게 배어 있는 자연공간인 반면, 팔경은 경승이라는 수려한 자연현상에 더 큰 비중을 두는 차이가 있다. 팔경의 연원인 소상팔경瀟湘八景은 호남성 소강瀟江과 상강湘江이 만나는 지점의 팔경이 시화로 만들어진 데서 유래한다. 이후 팔경도 조선으로 유입돼,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지금 전하는 웬만한 팔경문화는 여기에서 유래한다고 보면 된다.

현재 남아 있는 구곡과 팔경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가장 심취한 산수문화로 꼽을 수 있다. 그 산수문화가 지금 한민족의 심성에 그대로 남아 등산문화로 전승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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