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한양) 탐구04-왕과 왕족의 호칭, 내시, 궁녀, 묘호(廟號), 왕릉, 왕비릉


 

(배경 영상,음악)  장녹수 -정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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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한 주요 링크>

1. 왕비, 후궁의 호칭 참조링크1: 후궁 및 궁녀의 품계

2. 왕의 묘호((廟號참조링크1: 임금님의 이름과 묘호(廟號)

                     참조링크2: [조선왕 호칭/이름] ((() 묘호 차이

3. 조선왕실(선원계보) (heritage.go.kr) -국가문화유산포탈

 

* 잠깐 퀴즈! - 조선 왕과 왕족의 호칭과 묘호((廟號), 왕릉, 왕비릉에 대한 퀴즈.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 퀴즈-C ]

퀴즈1. 왕의 정실부인을 부르는 말은 무엇이며 또한 기거하던 곳을 부르는 호칭은?

퀴즈2. 왕의 정실부인(왕비)의 소생인 아들을 부르는 명칭?  

        왕의 정실부인인 아닌 후궁의 소생인 아들을 부르는 명칭은?

퀴즈3. 왕의 정실부인(왕비)의 소생인 딸을 부르는 명칭? 

        왕의 정실부인인 아닌 후궁의 소생인 딸을 부르는 명칭은?

퀴즈4. 덕혜옹주는 누구의 딸인가?

퀴즈5. 임금의 시중과 궁궐의 잡다한 일을 맡은 (거세자만이) 임명된 관리 명칭은?

퀴즈6. 임금이나 중전, 후궁을 보필하던 궁녀의 총수(우두머리) 상궁의 명칭은?

퀴즈7. 조선의 왕실이 27대 인데 이 중 장자(長子)가 왕위에 오른 분은 몇 분일까?

 

(알림)

이하 내용은 위에 소개한 참조 링크 및 본문 내용에 링크된 참고 자료에서 가져온 것이며 항목과 내용 일부는 편집, 가감된 것도 있음.

 

A.조선왕실 내용 출처 및 참조링크:  조선왕실(선원계보) (heritage.go.kr) 

조선 왕실은 왕과 왕비를 비롯해 왕세자와 왕세자빈, 왕자, 왕녀, 후궁 등이 구성원을 이룬다. 왕은 단 한명의 부인인 왕비를 두었으며, 왕비가 세상을 떠날 경우에는 그의 자리를 이어서 다음 왕비(계비繼妃)를 둔다.

 

왕비(王妃) 참조링크: 왕비-위키백과

왕비는 제후왕의 부인인 비()로서, 궁중에서 대왕대비와 왕대비 다음으로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또는 왕비를 중궁(中宮) 또는 중전(中殿)이라 부르기도 했다. 정실부인은 사별 후 재혼하지 않는 이상 단 한 명, 그 외엔 후궁으로 규정된다. 조선에서 왕비는 국왕의 비()로서 품계는 국왕과 같은 무품이었고, 내명부와 외명부의 수장이었다

 

왕세자, 왕세자빈, 대군(大君), (), 공주(公主), 옹주(翁主), 후궁(後宮)

왕의 아들 중에서 다음 대의 왕위에 오를 아들을 왕세자(王世子)라 하였고 그의 부인을 왕세자빈(王世子嬪)이라 하였다. 왕세자를 제외한 나머지 왕의 아들 중에서 왕비의 소생일 경우(嫡子적자)에는 대군(大君), 후궁의 소생일 경우에는 군()이라 하였다. 왕의 딸인 왕녀 중 왕비의 소생(嫡女적녀)일 경우에는 공주(公主), 후궁의 소생(庶女서녀)일 경우에는 옹주(翁主)라 하였다. : 덕혜옹주(참조:덕혜옹주)-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딸.

 

후궁은 사실상 왕의 부인이 아니고, 1품의 빈()부터 종4품의 숙원(淑媛)까지 품계를 받는 여관(女官)이었으며, 후궁이 되는 법은 간택 후궁이 되는 경우와 궁인 중에서 왕의 승은(承恩-여자가 임금의 사랑을 받아 밤에 동침함)을 입어 후궁이 되는 경우가 있다.

 

1897년에 대한제국으로 전환되며 왕실의 지위가 황실로 격상되어 왕을 황제, 왕비를 황후, 왕세자를 황태자, 왕세자빈을 황태자비, 왕자를 친왕이라 하였다.

 

후궁 품계

왕후(王后), 황후(皇后)는 품을 따지지 않았으며, 후궁들은 정 1~4품까지의 품이었다.

() -1품 귀인(貴人) -1품 소의(昭儀) -2품 숙의(淑儀) -2

소용(昭容) -3품 숙용(淑容) -3품 소원(昭媛) -4품 숙원(淑媛) -4

 

대원군(大院君) 참조링크: 대원군 -내용 출처 다음 백과

대원군(大院君)은 임금의 대를 이을 적자손이 없어 방계 친족이 대통을 이어받을 때, 그 임금의 친아버지에게 주던 벼슬. 즉 방계에서 왕위를 계승한 때에 그 임금의 생부에게 주는 칭호이다.

 

조선시대 전시기에 걸쳐 4명의 대원군이 있었는데, 선조의 아버지 덕흥군을 대원군으로 추존한 것이 처음이었다. 1623년 인조는 아버지 정원군을 대원군에 추존했다가 1632년 다시 원종으로 추존했다.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철종이 왕위에 옹립되었고 그의 아버지 전계군을 대원군에 추존했다.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흥선군 하응의 둘째아들 명복이 왕위에 올라 고종이 되었고 하응은 흥선대원군에 봉해졌다. 3명은 죽은 뒤에 추존되었으나, 흥선대원군만 살아 있을 때 봉해졌다. 고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조대비가 수렴청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흥선대원군이 섭정하여 국사의 모든 결정권을 가졌다. 흥선 대원군은 개항 전후 격변하는 국내외의 상황 속에서 10여 년간 권세를 누렸다.

 

내시[內侍]= 환관(宦官) 참조링크: 내시 환관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환관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궁중 잡역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고려 말기부터 국왕 측근에서 시종하는 문관인 내시(內侍)에 속하는 이들도 생겨남에 따라 그때부터 환관과 내시가 동일시되었다.

 

내시는 왕의 측근으로서 대궐 내에 상주해야 한다는 특수성 때문에 거세자만이 임명될 수 있었다. 본래는 선천적인 거세자로 충원했으나 스스로 거세하고 내시에 임명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이들도 처첩을 거느렸고 양자(養子)를 택해 가계를 이어가도록 했다. 내시의 제도는 갑오개혁을 계기로 폐지되었다.

 

궁녀(宮女) 참조링크: 궁녀

궁녀(宮女)는 왕족을 제외한 궁중 모든 여인들의 총칭을 말하는 데 궁인(宮人궁첩(宮妾내인(內人)으로도 불렸다. 보통 궁녀라 하면 상궁(尙宮)과 나인으로 분류되는 여인들을 의미한다. 궁녀는 왕이 있는 법궁(法宮, 本宮)뿐만이 아니라 제사궁(祭祀宮, 혹은 魂宮)과 별궁에 소속된 여인까지도 포함된다.

 

넓은 의미의 궁녀로 포괄되는 내역은 다음과 같다.

무수리 : 몽고말이며, 궁중 각 처소에서 막일을 담당하는 여인을 말한다.

각심이[婢子, 또는 房子] : 상궁의 처소에서 부리는 가정부·식모·침모 등의 총칭이다. 이들의 월급을 국가에서 지급했으므로 방자라고도 한다. 방자란 관청의 사환으로, 예컨대 춘향전에서의 방자와 같다.

손님 : 왕의 후궁으로서 당호(堂號)가 바쳐지고 독립 세대를 영위하는 여인의 집(후궁 집)에서 살림을 맡아하던 일종의 가정부 같은 여인이다. 대개 친정붙이이며, 보수는 후궁의 생계비에서 지출된다. 따라서 손님이라는 이름은 궁 밖에서 온 사람이라는 의미로, 무수리나 각심이와는 달리 예의를 갖춘 말이다.

의녀 : 약방 기생이라고도 한다. 약방이란 궁중 내의원(內醫院)의 별칭이며, 의녀의 소속은 내의원이지만 전신(前身)이 기생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평상시엔 궁녀들에게 침을 놓아주고 비·빈들의 해산시 조산원(助産員) 노릇을 하였다. 하지만, 궁중의 크고 작은 잔치가 있을 때에는 기생으로 변신하며 원삼(圓衫)을 입고, 머리에는 화관(花冠)을 쓰고, 손에는 색동 한삼(汗衫)을 끼고 춤을 추는 무희(舞姬)였다.

 

그리고 궁녀의 신분적 등급은 견습나인·나인·상궁의 세 종류로 나뉘며, 그 세 종류 가운데에서도 입궁 연조와 소속 부서에 따라 차등이 있었다. 같은 상궁이라도 경력에 따라 정7품도 있고 정5품도 있으며, 또 같은 정5품의 상궁도 소속 부서의 격에 따라 같을 수 없었다.

 

나인 : 궁중에서 왕족의 사생활을 시중하던 여관(女官)의 총칭으로 내인(內人)’의 전음(轉音)이다. 궁녀들은 반드시 자신들을 상궁나인이라 하여 상궁과 나인을 구분하였다. 나인과 상궁은 그들 사회에서는 차원이 다를 만큼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참조링크:나인)

 

또한, 나인 아래에는 견습나인이 있는데, 이들은 아기나인 또는 생각시로 불린다. 보통 4세부터 계례(筓禮) 전인 17세 사이의 어린이 및 소녀 나인들이다.

 

지밀·침방·수방·내소주방·외소주방·생과방·세답방·세수간·퇴선간·복이처·등촉방

지밀(至密침방(針房수방(繡房내소주방(內燒廚房외소주방·생과방(生果房세답방(洗踏房)의 일곱 부서 외에 세수간·퇴선간(退膳間복이처(僕伊處등촉방(燈燭房)의 네 부설 부소가 있다.

 

위 부서에 소속된 궁녀들을 일반 개인 가정으로 비교해보면, 지밀나인은 몸종 격으로 가장 격이 높고, 침방·수방 나인들은 침모(針母), 소주방과 생과방은 찬간(饌間)의 식모들인데, 궁중에는 무수리가 하역(下役)을 맡았다. 세답방은 표모(漂母)로서 빨래 일을 맡는데, 일반 개인 가정에서는 빨래를 보통 노비가 하고, 다리미와 다듬이질은 대개 경험이 많은 부인들이 맡는다.

 

지밀상궁[至密尙宮] 참조: 지밀상궁[至密尙宮]

조선 시대, 대전 좌우에서 임금을 모시며 잠시도 떠나지 않고 시중을 드는 상궁이다.

지밀상궁은 왕의 측근에서 항상 그림자와 같이 시위(侍衛)하여 대령상궁(待令尙宮)이라고도 했다.

 

또한, 지밀상궁 중에서 궁중 의식이나 잔치 때 왕을 비롯한 왕비·왕대비 등의 인도와 진행을 담당했던 시녀상궁(侍女尙宮)은 지밀의 서책 관리와 국상(國喪) 때 곡읍(哭泣)을 담당하기도 했다.

 

따라서 궁녀의 격은 지밀이 높고, 다음이 침방과 수방으로, 이들은 양반 부녀와 같이 치마도 외로 여며 입고 앞치마를 두르지 않고 길게 늘일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 그것은 마루 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의 성격상 소주방이나 세답방 나인같이 치마를 걷어 올릴 필요가 없기도 한 때문이다.

 

위 세 부서 외의 다른 부서는 치마를 바로 입고 앞치마를 위에 둘러 걷어 올린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각시가 있는 곳도 지밀과 침방·수방뿐이다. 나머지 부서들은 생[絲楊]을 맬 수 없으며,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다.

 

제조상궁(提調尙宮)

이러한 궁녀 사회에도 간부들이 있었는데, 총수격인 우두머리 상궁과 그 밖의 맡은 바 직책의 중요성에 따라 특별대우를 받는 궁녀들이 있었다. , 제조상궁(提調尙宮)은 큰방상궁이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많은 궁녀들 중에 어른으로 왕명을 받들고 내전(內殿)의 재산 관리를 담당했다. 또한, 아리꼬[阿里庫]상궁으로 불리는 부제조상궁은 내전의 창고(倉庫, 아랫고·下庫)의 물품을 관리했다.

 

감찰상궁(監察尙宮)

감찰상궁(監察尙宮)은 궁녀들의 상벌을 담당했으며, 감시병 구실도 겸한 두려운 존재였다. 궁궐내의 모든 궁녀들은 입궁에서 퇴출(退出)까지 원칙적으로 종신제였다.

 

그 외 왕자녀의 양육을 담당했던 보모상궁(保姆尙宮)이 있었으며, 이들 중에서 왕세자의 보모가 가장 격이 높았다.

 

궁녀의 선출

왕의 직계 및 그 배우자 외에는 후궁도 궁중에서 죽을 수 없으므로, 늙고 병들면 궁녀는 궁궐을 나가야 했다. 궁녀의 선출은 원칙적으로 10년에 한번이었지만 예외도 있었다. 지밀나인의 경우 조건이 까다로워서 상궁들이 두세 번씩 선을 보러 나갔다. 그러나 대개 연줄과 세습이라 할 수 있으며, 고모가 조카를 들여놓는 경우가 많았다.

 

궁녀의 출신 계급은 지밀과 침방·수방은 중인계급, 기타는 대개 상민계급이었다. 입궁 연령은 지밀이 가장 어려 48, 침방·수방이 613, 그 밖은 1213세가 관례였다. 궁녀는 입궁 후 15년이 되면 계례를 치르고 정식 나인이 되었다. 남색 치마에 옥색 저고리, 머리에는 개구리첩지를 단 제복이 일생 동안 그들의 복장이었다.

 

나인이 된 뒤 다시 15년이 경과되면 상궁으로 승격했으므로, 가장 빠른 45세 입궁을 기준으로 할 경우에 35세 이후라야 상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는데, 왕의 후궁이 되면 20대의 상궁도 있을 수 있었다. 이런 궁녀는 왕의 자녀를 낳기 전까지는 상궁의 신분에 머물러 있지만, 그 대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왕의 곁에서 시위만 하면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를 승은상궁(承恩尙宮)이라 했다.

 

궁녀는 원칙적으로 종신제였지만, 특별한 경우, 즉 이들이 중병이 들었을 때, 가뭄으로 궁녀 방출이 결행될 경우(, 젊은 궁녀), 모시고 있던 상전이 승하했을 경우 중도에 나갈 수도 있었다.

 

B. 왕의 명칭과 묘호(廟號)

조선 시대, 왕의 이름

이하 내용은 참조 링크: 조선 시대, 왕의 이름에서 가져 왔다.

조선 시대, 왕의 이름은 외자였다. 절대 존엄의 존재였던 왕의 이름은 함부로 말할 수도 쓸 수도 없기에 백성들의 말 사용을 배려해 잘 사용하지 않는 한자를 활용해 외자로 이름을 지었다.

 

이름과 관련한 일반 용어들

아명(兒名) : 어릴 때 정식 이름을 짓기 전에 부모가 자식을 부르는 친근한 이름.:막동

초명(初名) : 처음 이름

() : 태어날 때 받은 진짜 이름

() : 성년이 되는 관례 때 받는 이름인 관명과 함께 스스럼없이 부를 수 있도록 짓는 새로운 이름

() : 본명이나 자 이외에 따로 지어 부르는 이름 (별칭, 필명, 별호, 아호)

묘호(廟號) : 왕이 죽은 뒤 종묘에 그 신위를 모실 때 드리는 존호(尊號) 참조: 묘호

 

((() 묘호 참조링크: ((() 묘호

예기, 사기, 경국대전, 조선왕조실록 등에 공이 있는 사람은 '()'라고 하고, 덕이 있는 사람은 '()'을 붙인다고 하는 내용이 있다.

 

a. ()

1. 원칙적으로 나라를 창업한 왕에게만 사용한다. 태조는 1대 임금이므로 후대의 자손이 시조(始祖)로 삼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고려에 조()가 붙은 왕은 태조 왕건뿐이다.

 

2. 공이 있는 왕에게 조()를 붙인다.(나라를 세우거나 그에 버금가는 공을 세운 왕)

선왕의 적자가 아닌 사람이 임금이 되는 경우에 명분과 정통성을 부과하기 위해 붙인 경우가 많았다.

 

b. ()

왕위를 정통으로 계승한 왕들에게 붙이거나, 덕이 있는 왕에게 종()을 붙인다. 혹은

별다른 위기 없이 태평성대를 누린 경우에 붙인다.

 

c. ()

폐위된 왕은 자격을 박탈당하여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왕자시절의 호칭으로 불리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이 아니라, 연산군일기, 광해군일기에 따로 기록된다.

- 연산군: 중종반정으로 폐위

- 광해군: 인조반정으로 폐위

 

조선의 왕에 조()가 붙은 이유

나라를 창업한 왕이나 나라의 정통이 중단되었다가 다시 일으킨 왕에게 '()'를 쓴다. 그래서 조()가 종()에 비해서 격이 높다고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반정이나 찬탈을 통해 왕위에 오른 경우, 이를 정당화하려는 수단의 하나로 이용되면서 후손(아들)'()'에서 '()'로 추숭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외에도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쓰이기도 했다. 참고로, 중종의 경우에도 연산군을 몰아낸 공으로 묘호를 '중조'로 하자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

 

왕의 호칭(묘호)

묘호는 죽은 왕의 위패를 모시는 종묘에 올리는 이름이다. 따라서 왕이 생존해 있을 때는 묘호가 없었고,'주상', '전하', '상감' 등으로 불렸다. 왕의 3년 상을 치른 후, 왕과 고위 관료들이 묘호를 정한다. 왕의 업적을 한글자로 표현하여 신주를 종묘에 모셨다.

 

연산군과 광해군처럼 폐위되어 신주가 종묘에 들어가지 못한 왕들은 죽어서도 왕 대접을 받지 못하고 왕자 신분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종묘에 그 신위가 오르지 못했으며 따라서 묘호 또한 없으므로 단지 그들이 쫓겨난 이후나(연산군) 세자 시절에(광해군) 받은 군호로 불리고 있다. 조선조 2대 임금 정종과 6대 임금 단종은 오랫동안 묘호를 정하지 않고, 몇 백 년 동안 공정왕과 노산군으로 불리다가, 숙종 때 와서 그들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면서 비로소 정종과 단종이라는 묘호를 얻었다.

 

묘호의 예:

· 문종(文宗): 학문에 뛰어난 왕 · 성종(成宗): 제도 정비를 완성시킨 왕

· 세종(世宗): 태평성대를 이룩한 왕 · 인조(仁祖): 어진 왕

· 중종(中宗):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왕 · 태조(太祖): 나라를 세운 왕

· 태종(太宗): 나라의 기틀을 다진 왕 · 효종(孝宗): 효성이 지극한 왕

 

왕의 호칭에는 묘호 외에도 사후에 중국 황제가 지어 보내주는 시호(諡號)라는 것이 있고, 또 신하들이 그 왕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해 지어 올리는 휘호(徽號) 혹은 존호(尊號)라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태조(이성계)의 정식 호칭은 '태조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었는데, '태조'는 묘호, '강헌'은 시호, '지인계운성 문신무'는 휘호(존호)에 해당한다.

 

능호(陵號)

()’ 은임금의 무덤을 지칭하는 호칭하는 데 능은 구릉이란 의미로 구릉처럼 크고 웅장하다는 의미다. : 동구릉,

 

조선왕릉 참조링크1: 조선왕릉 - 나무위키 참조링크2: 조선왕릉 공식 홈페이지

42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태조의 추존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그 왕비들의 능까지 포함하면 총 50. 그러나 일반적으론 42기의 능만을 조선왕릉으로 표현하고 있다.

 

조선왕릉들은 주변의 지명에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잦다. 특히 아예 지명화되어버린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성북구 정릉동), 문정왕후 윤씨의 태릉(태릉선수촌), 세조의 광릉(광릉수목원) 등이 그러하다. 그 외에도 조선왕릉에서 역명을 따온 철도역인 선릉역, 선정릉역, 태릉입구역, 정릉역, 온릉역, 사릉역, 세종대왕릉역 등이나 서오릉 앞을 흐르는 창릉천과 그 일대의 행정동명인 창릉동, 그리고 해당 지역에 조성될 예정인 창릉신도시, 태종의 능침 앞을 지나는 도로인 헌릉로 및 선정릉 앞을 지나가는 도로인 선릉로와 정릉 앞을 지나가는 정릉로, 용인서울고속도로 헌릉IC 등의 지명이 그 예이다.

 

조선 왕 중 장자(長子)가 왕위를 이어 받은 왕은 몇 명이나 될까?

 조선 왕가 가계도 및 내용 참조 링크 : 조선왕실(선원계보) (heritage.go.kr) -

조선의 국왕 중 부왕의 적장자로 왕위에 오른 인물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경종, 순종으로 여덟 왕 뿐이다. 이들 중 숙종은 출생에서부터 왕세자 책봉을 거쳐 즉위에 이르기까지 가장 확고하고 뚜렷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던 왕이었다.

  '조선 왕가 가계도-'

 

  '조선 왕가 가계도2- 18대 현종-26대 고종'
.고종이후-대한황실 가계도

퀴즈1. 왕의 정실부인을 부르는 말은 무엇이며 또한 기거하던 곳을 부르는 호칭은?

퀴즈2. 왕의 정실부인(왕비)의 소생인 아들을 부르는 명칭?  

         왕의 정실부인인 아닌 후궁의 소생인 아들을 부르는 명칭은?

퀴즈3. 왕의 정실부인(왕비)의 소생인 딸을 부르는 명칭? 

         왕의 정실부인인 아닌 후궁의 소생인 딸을 부르는 명칭은?

퀴즈4. 덕혜옹주는 누구의 딸인가?

퀴즈5. 임금의 시중과 궁궐의 잡다한 일을 맡은 (거세자만이) 임명된 관리 명칭은?

퀴즈6. 임금이나 중전, 후궁을 보필하던 궁녀의 총수(우두머리) 상궁의 명칭은?

퀴즈7. 조선의 왕실이 27대 인데 이 중 장자(長子)가 왕위에 오른 분은 몇 분일까?

 

[ 퀴즈-C 정답]

퀴즈1. 왕의 정실부인을 부르는 말은 무엇이며 또한 기거하던 곳을 부르는 호칭은?

         답.=> 왕비(王妃)=중궁(中宮), 중전(中殿). 왕비가 거처하던 궁전=중궁전(中宮殿)

퀴즈2. 왕의 정실부인(왕비)의 소생인 아들을 부르는 명칭? .=> 대군(大君)

         왕의 정실부인인 아닌 후궁의 소생인 아들을 부르는 명칭은? .=> ()

퀴즈3. 왕의 정실부인(왕비)의 소생인 딸을 부르는 명칭? .=> 공주(公主)

         왕의 정실부인인 아닌 후궁의 소생인 딸을 부르는 명칭은? .=> 옹주(翁主)

퀴즈4. 덕혜옹주는 누구의 딸인가? .=> 고종

퀴즈5. 임금의 시중과 궁궐의 잡다한 일을 맡은 거세자만이 임명된 관리 명칭은?

         답.=> 내시[內侍]= 환관(宦官) 참조링크: 내시  환관

퀴즈6. 임금이나 중전, 후궁을 보필하던 궁녀의 총수(우두머리) 상궁의 명칭은?

         답.=> 제조상궁(提調尙宮). 큰방상궁이라고도 했음.

퀴즈7. 조선 왕실이 27대 인데 이 중 장자(長子)가 왕위에 오른 분은 몇 분일까? .=> 8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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