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한양) 탐구08-(서울)한강의 나루, 살꽂이다리 箭串橋(전곶교)


 

(배경 영상,음악)  경기민요 한강수타령, 매화타령 -KBS 전주 국악한마당

    추후 링크가 끊어지면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 나올 수도 있으며,

    아래 음악이나 동영상 보려면 ▷클릭, 멈추려면 stop □ 버튼 클릭.    

    아래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보이면  https://www.youtube.com/embed/D124Y4Kyt2c<=요걸 클릭

 


 

* 본문 중 밑줄 친 링크는 본문 내용을 가져오거나 참고한 곳으로 필요시 밑줄 친 link를 클릭.

  단, 밑줄 친 링크는 현재는 연결되지만 추후 링크 주소 변경되면 연결이 안 될 수도 있음.

 

나루터, 포구, () 하천(河川), ()의 이름은 지명이나 지하철역명에 많이 반영되어 있다.

 

[요약 퀴즈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퀴즈 1] 태조 이성계가 함흥차사후 태종에게 화살을 쐈다는 중랑천 하류의 옛 다리 이름은?

[퀴즈 2] 나루 인근에 몽촌토성·풍납토성 등과 연결되는 아차산성이 있으며, 옛날부터 중요한

                 교통로였고 오늘날은 서울부산간 교통로가 이 지역을 지나고 있다. 나루 이름은?

[퀴즈 3] 과천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한강의 나루로 우리말(=노들나루)인 이 나루의 漢字名?

[퀴즈 4] 소금과 젓갈을 실은 배들이 모여들어 도성의 소금과 젓갈은 거의 모두 이곳에서 공급

                 됐다. 결빙기를 제외하고는 京江商人과 배들로 붐비고 활기를 띠었다. 이 나루 이름은?

[퀴즈 5] 서울에서 양천(陽川)을 지나 강화로 가는 조선 시대 교통의 요지였으며, 삼남 지방에서

                 한강을 통하여 운송되어 오는 곡식을 하역하던 나루이다. 이 나루의 이름은?

[퀴즈 6] 양화나루 인근에 있는 이곳은 누에머리를 닮았다하여 잠두봉이라 불린다. 많은 천주

                 교도들이 참수당한 곳으로 천주교의 순교성지가 되었다. 머리가 잘렸다 해서 oo?

 

한강 다리가 세워진 곳은 유명 나루터, 포구였다. (2019.01.04 기사)

내용출처: http://www.seni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971

 

역사적으로 한강은 한반도 중부지방을 동에서 서로 흘러가는 젖줄로써 일찍부터 그 가치를 인정받아 왔다. 그 중 광나루에서 양화진까지 조선시대 한양에 인접한 경강(京江-서울의 한강)에는 광나루, 두모포, 한강진 등 11개의 나루와 포구가 있었다.

 

이 나루와 포구는 한양과 전국 각지를 연결하는 주요 도로가 지나는 길목이었고 상업의 중심지였다. 경기도 광주로 가는 길은 동대문에서 시작하여 왕십리를 지나 살꽂이다리, 광진(廣津 광나루)을 거치고 용인으로 가는 길은 광희문에서 한강진(漢江津 한강나루)을 지난다. 과천으로 통하는 길은 남대문에서 동작진(銅雀津 동작나루)을 건너는 등 한양 남쪽 지방으로 향하는 대로(大路)는 모두 한강을 건너야 했다.

 

근대에 들어 육로교통 수단이 발달되면서 배로 한강의 남쪽과 북쪽을 연결하던 나루와 포구 자리에 다리가 들어섰다. 1900년 한강철교, 1917년 한강인도교 건설 등을 필두로 하여 수많은 다리가 놓여 있다. 한강의 다리 건설은 길을 이어줌과 동시에 강남(영동)개발, 여의도개발, 잠실개발 등 서울의 발전을 견인해왔다.

 

이러한 다리들은 하나같이 옛 길과 나루터 자리에 건설되었다. 노량진에는 한강대교(1한강교)가 놓였고 양화진에는 양화대교(2한강교)가 한강진에는 한남대교(3한강교)가 들어섰다. 마포나루에 들어 선 것이 마포대교(서울대교)이고 송파진에는 잠실대교가 서빙고나루에는 잠수교와 반포대교가 만들어지는 등 예전 나룻배가 다니던 길 위로 다리가 들어선 것이다.

 

이 다리는 조선시대와 같이 주요 지역을 잇는 길이기도 하다. 목포에서 임진각을 거쳐 신의주를 잇는 국도1호선이 1996년까지 한강대교(1한강교)를 거쳐 갔고 서울에서 인천과 강릉으로 이어지는 국도6호선은 양화대교(2한강교)를 지난다.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도 신설 당시 한남대교(3한강교)가 시작점이었던 점 등으로 보아 나루와 포구가 있던 자리에 건설된 한강의 다리는 근래에도 교통의 중심지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서울의 발전을 위해 추진된 부도심 건설은 교량 건설과 함께 하였다. 비행장이던 여의도를 부도심으로 개발하는 사업에는 마포대교(서울대교)가 한강 수변의 버려져 있던 저습지였던 강남 영동지구를 개발하는 사업은 한남대교(3한강교)가 활성화 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강다리의 이름은 제1한강교->한강대교, 2한강교->양화대교, 서울대교->마포 대교로 지금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한강대교의 건설로 만들어진 노들섬, 여의도 건설로 인해 변화된 서강대교 아래 밤섬, 서울 수돗물 정수장이었던 양화대교 아래의 선유도 등 한강에 있는 섬의 옛 모습 등 서울의 옛 모습은 서울역사박물관 홈페이지(www.museum.seoul.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19.01.04. 기사 내용)

 

살꽂이다리=살곶이다리     참조 링크: 살꽂이다리

살꽂이다리또는 살곶이다리라고 하였고 한자명으로 箭串橋(전곶교)라고 한다. 성동구 사근동 102번지 남쪽 현재 성동교 동쪽에 위치해 있는 돌다리로서 중랑천에 놓여 있다. 조선시대 다리로는 가장 길었으며 濟盤橋(제반교)라고도 불렀다. 현재는 중간 부분이 훼손된 채 양쪽 가장자리만이 원형을 보존하고 있으며 사적 제160호로 지정되어 있다.

살꽂이다리(箭串橋 전곶교-화살이 꽂힌 다리)

함흥차사(咸興差使)와 살꽂이다리(箭串橋 전곶교-화살이 꽂힌 다리)

함흥차사(咸興差使)       참조 링크: 함흥차사 -고사성어대사전

조선 초기, 방석(芳碩)의 변(1차 왕자의 난)이 있은 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정종(定宗)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고향인 함흥에 은거했다. 그 후 형제들을 살해하면서까지(2차 왕자의 난) 왕위를 차지한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은 분노한 태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함흥으로 차사를 보냈다. 하지만 태조가 번번이 활을 쏘아 차사들을 죽이거나 가두어 돌려보내지 않았다. 여기에 서 유래하여 함흥차사는 심부름 간 사람이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살꽂이다리(箭串橋(전곶교)-화살이 꽂힌 다리)로 불리게 된 까닭...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거쳐 태종으로 등극하자 함흥으로 내려가 한양으로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이방원의 등극을 부정하였다. 그 후 태조 이성계는 태종과 신하들의 간곡한 청으로 함흥에서 돌아오게 되는데, 태종이 이곳 중랑천 하류 한강 가에서 천막을 치고 아버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 태조가 태종을 향해 활을 쏘았으나 맞히지 못하고 화살이 땅에 꽂혔다, 그 후 이 지역을 화살이 꽂힌 곳이라 하여 살꽂이혹은 살곶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다리는 한강이 아니라 중랑천에 있는 다리이다.

 

한강의 유래      내용 출처: https://hangang.seoul.go.kr/archives/249 -서울시 한강사업본부

한사군과 삼국시대 초기의 한강은 한반도의 중간 허리부분을 띠처럼 둘렀다는 뜻에서 帯水(대수) 라 불렀고, 고구려에서는 '아리수' 라 했으며, 백제는 '욱리하' 라고 했다. 또 신라는 상류를 '이하', 하류를 '왕봉하' 라 불렀다. 한편 '삼국사기' '신라편' 지리지에는 한강을 '한산하' 또는 '북독' 이라고도 했다. 백제가 동진과 교통하여 중국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한강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고쳐서 '漢水(한수)'라 불렀고, 그 뒤부터 옛 이름은 사라지고 '한수' 또는 '漢江(한강)' 이라고 불리어졌다.

 

고려 때는 큰 물줄기가 맑고 밝게 뻗어내리는 긴 강이란 뜻으로 '열수' 라고 불렀으며, 모래가 많아 '사평도' 또는 '사리진' 이라고도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경강(京江)'이라고도 불렀다.

 

한강은 본래 우리말 '한가람'에서 비롯된 말로 '''크다, 넓다, 길다'는 의미이며, '기람'은 강의 고어로 한강’='크고 넓은 강' 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위치에 따라 다르게 불린 한강의 이름들      출처 링크: 한강 [漢江] 서울지명사전

한강이란 한남동 앞에 흐르는 강의 별명으로서 이곳에 한강진과 제천정 등이 있었다. 뚝섬에서 옥수동 앞강을 동호, 한남동 앞을 한강, 동작동 앞을 동작강, 노량진 앞을 노들강, 용산 앞을 용호 · 용산강, 마포 앞을 마포강, 서강 앞을 서강, 김포 북쪽을 조강이라고 불렀다.

 

한강의 포구와 나루 (-배대는 곳)      출처 링크: 포구 교역-문화원형백과

(알림) 이하 내용은 링크: 포구 교역-(문화원형백과 한강 생활문화)에서 가져 왔다.

우리말로 개, 한자말로 포()는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을 말한다. 서해 바닷물이 동작진(:나루 진)까지 올라왔다고 하는데 그 위로도 두모포(斗毛浦), 개포(開浦) 등이 있는 것을 보면 포라는 명칭이 붙기 위해서 반드시 바닷물이 드나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과거 삼개 즉 마포가 한강 물자유통의 중심이었던 것은 배들이 조수의 힘으로 가장 멀리 올라 올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한강 하류지역에 발달한 포구로는 하류로부터 조강포(祖江浦), 이산포(二山浦), 행주외리, 양천, 후포, 염창, 양화진, 서강, 마포, 용산 등 아랫강 포구와 서빙고, 한강리, 수철리, 뚝섬, 송파 등 윗강 포구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포구 가운데 용산과 마포가 규모와 기능 면에서 월등하였다.

 

-알림-

한강의 나루를 설명에, 나루 지명의 단순 링크는 다음백과를 참조하였고, 내용은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일부를 가져왔으며, 링크: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들-1에서 주로 가져왔다아래 각 나루의 설명은 한강 상류부터 내려오면서이다.

 

광나루       내용 출처 링크: 광나루

광진구 광장동에 양진(楊津광장(廣壯광진(廣津광진도(廣津渡) 등의 명칭으로도 불리었으며, 진취락(津聚落)을 형성하였던 곳이다. 한강의 중하류에 위치한 광나루는 교통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서울에서 부산까지 연결되는 영남로의 주된 간선로는 아니었으나, 부산으로 향하는 도로의 길목에 위치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파발로가 지나서, 광나루의 교통상 기능은 지속적으로 중요시되었다.

 

광진원(廣津院)이 광나루 북쪽 언덕에 위치하였으며, 도승(渡丞)이 있어 사람들의 내왕을 조사하기도 하였다. 당시 좌도수참전운판관(左道水站轉運判官)이 겸직으로 이 지역의 조운을 관장하였을 정도로, 광나루는 서울 주변의 중요한 나루터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북쪽에는 백제 초기 몽촌토성·풍납토성 등과 연결되는 아차산성이 있으며, 고대부터 교통로로서 중요하였고 오늘날은 서울부산간 교통로가 이 지역을 지나고 있다.

 

송파나루(松坡津 송파진)       내용 참조링크: 송파나루,송파진

현재의 송파구 석촌호 부근에 있던 나루터로서, 도성에서 전곶교를 건너 신천진을 지나 만나게 된다. 송파에서 잠실로 연결하였으며, 광주,이천으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도선장은 조선 후기에 발달하였다. 본래 이 부근에서 가장 큰 도선장은 삼전도였는데, 병자호란 이후 기피 경향이 있어 정부에서 송파진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 상공업의 발전과 함께 유명한 장시로 성장하여, 객주,거간을 비롯한 도선주들이 모여들었다. 송파진에는 9척의 진선이 있어 통행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송파진별장은 인근의 광진,삼전도,신천진의 나루까지 관장하였다.

 

신천나루(新川津 신천진)      내용 참조링크: 신천진

오늘날의 송파구 신천동에 있던 나루터로서, 신천동에서 뚝섬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삼전도(新川津 삼전도)      내용 참조링크: 삼전도 

서울시 송파구 삼전동에 있었던 나루로 삼밭나루라고도 불렸다. 한강 상류의 남안에 위치하여 서울과 부리도(浮里島, 또는 蠶室島인 현재의 잠실지역)를 연결하는 나루터로서 교통의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한강나루(漢江鎭 한강진) 내용 참조링크: 한강진  -서울지명사전

오늘날의 한남동과 강남구 신사동을 잇는 나루 겸 군영(軍營)이 있었다. (누를진)

 

한강도(漢江渡) 내용 참조링크: 한강도(漢江渡)

한강은 본래 서울의 남산 기슭 지금의 한남동 앞의 강을 일컬었다. 따라서 한강도는 한강나루라는뜻으로 한강진(漢江津)이라고도 하였다. 한강나루는 도성의 정남에 위치했다고 하였으며, 한남동 도선장 부근을 일컬었다.

 

그 강안 맞은편은 사평나루로, 고려 때는 사평도 또는 사리진으로 불렀다. 조선시대는 제일의 나루터로 판교역을 지나 용인,충주로 통하는 대로의 요충지였다.

 

사평나루(沙平渡 사평도)       내용 참조링크: 사평나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용산구 한남동과 연결되었다. 사평도(沙平渡 : 모래펄나루)의 다른 명칭으로 고대에는 사리진도(沙里津渡 : 모래펄나루)라 불렸다. 사평리는 한강진의 맞은편이라 하였고 한강진은 현재의 한남대교(漢南大橋) 서쪽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보아, 한강도는 현재 한남대교 부근으로 추측된다.

 

동작나루(銅雀津)        참조 링크: 동작나루

동작나루는 동작진(銅雀津)’ 또는 동작도(銅雀渡)’라고도 하였다. 중요 간선도로가 지나가는 나루터는 아니었으나 서울에서 과천으로 가는 도로의 길목에 위치하여 많은 사람의 이용이 있었다.

진선(津船)5척 배치되어 있었으며, 이 나루터 부근에는 모노리탄(毛老里灘, 尾老里灘)과 기도(碁島)가 위치하였다.

 

이하 내용은 참조링크: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들-1 에서 가져 왔다.

동작진(銅雀津)은 현재의 동작동 강변에 있었던 도선장 (渡船場)으로 일명 동재기라고도 한다. 도성에서 과천으로 빠지는 길목으로서 본래 노량진 관할이었으나 외방의 과객, 사대부의 왕래가 빈번한 곳인데 약간의 사선(私船)만이 비치되어 있어서 교통이 불편하였다.

 

그리하여이곳의 관리가 문제화 되던 중 영조 4(1728) 이인좌(李麟左)의 난을 계기로 나루의 관리를 철저히 하고자 별장(別將)을 파견하고 이어서 영조 22(1746)에는 노량진의 나룻배 3척을 이관하여 진도(津渡)로서의 체모를 살렸다. 1857년 철종은 이곳에 주교(舟橋 배다리)를 만들고 인릉(仁陵)에 왕래하였다. 근대에 이르기 까지 나룻배가 오갔는데 1917년 한강 인도교가 세워지면서 제구실을 잃었다. 현재 이곳에 1984년 거대한 동작대교가 건설되어 자동차와 전동차까지 운행하게 되었다.

 

개포(開浦)       내용 출처: 개포

강남구 개포동에 있던 마을로서, 마을 앞에 양재천 갯벌이 있어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개펄개패 또는 개포동이라고도 불렀다.

 

반포(盤浦)       내용 출처: 반포 서울지명사전

이 마을로 흐르는 개울이 서리서리 굽이쳐 흐른다고 하여 서릿개라 하고 이를 한자로 표기한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는데, 뒤에 한자 표기가 盤浦(반포)로 바뀌었다.

 

흑석나루(黑石津)       이하 내용은 참조링크: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들-1 에서 가져 왔다.

흑석진(黑石津)은 현재의 동작구 흑석동 강변에 있었던 나루이다. 도성에서 수원이나 과천 방향으로 왕래 하려면 노량진이나 한강도를 이용하여야 하는데 통행량이 많고 기찰(일종의 검문)

심하여 민간인들은 사선(私船)으로 운행되는 배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수참이 폐지되고 또한 인근에 동작진이 개설되면서 기능을 잃어갔다.

* 수참(水站): 조선시대 한강 수계(水系)의 포구에 위치하여 조창의 기능과 목재 등 각종 물품의

                             운송, 사객(使客)의 이동 보조의 역할을 하도록 인원과 선박 등을 배치한 시설.

 

마포나루(麻浦津)       이하 내용은 참조링크: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들-1 에서 가져 왔다.

서울의 마포구 마포동 강변에 있었던 나루로 삼개나루라고도 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도성에서 서남쪽으로 10리 지점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의 여의도를 지나 시흥 방면으로 빠지는 길목이다. 나루가 크지 않아서 본래 관선(官船)은 없었고, 사선(私船) 몇 척이 있어서 행인을 건네주었다.

1894년 한강의 마포(삼개)나루-사진 이사벨라 버드 비숍 촬영

조선 후기에 상업이 발달하면서 선상(船商)들이 한강을 거슬러 이곳에 와서 장사를 하였다. 인천 제물포에서 어물, 젓갈 소금 등을 실고 뱃길을 따라 서울 마포까지 그리고 한강을 따라 상류까지 상인들의 배가 다니며 돌아갈 때는 곡물을 싣고 갔다. .특히 소금과 젓갈을 실은 배들이 모여들어 도성의 소금과 젓갈은 거의 모두 이곳에서 공급되었다. 예로부터 마포나루에는 새우젓을 파는 사람들이 많아 '마포 새우젓 장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나루터에는 창고를 지어놓고 소금, 젓갈, 생선 등을 위탁 판매하거나 중개하는 객주, 여각 등이 생겨났고, 京江商人(경강상인)들의 활발한 상업활동이 있었다. 결빙기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배들로 붐비고 활기를 띠었다.

 

노량진(露梁津) = 노들나루       내용 출처 링크: 노량진

노량진(露梁津)은 노도진(露渡津노량진도(鷺梁津渡노들나루라고도 불리었다. 이 나루는 서울과 과천·시흥을 연결해주는 구실을 하였는데, 조선시대 9대 간선로 중에서 충청도와 전라도 방면으로 향하는 제6·7·8호 간선로의 길목이었다.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였던 나루터여서 사람들의 이용이 많았으며, 도승(渡丞)이 한 사람 배치되어 관리를 맡았다. 나루 남쪽 언덕에는 노량원(鷺梁院)이 위치하여 있었으며, 세금을 거두었다. 관내는 과천의 신촌리(新村里사촌리(沙村里곽계(槨契형제정계(兄弟井契마포강(麻浦江)이었다. 이 나루에 속하였던 진선(津船)10척이었고, 관선(官船)15척이었다.

 

영등포(永登浦)        내용 출처 링크: 영등포 

영등포는 왕성하게 번성하고 있던 이웃의 노량나루(鷺梁津)에 치여 내내 밀렸다. 영등포란 나루터는 지금의 한강성심병원 건너편 여의도 샛강에서 여의도의 사라진 옛 양말산(羊馬山)을 오가며 한강 밤섬(栗島)과 마포를 연결하는 소규모 나루터이었다. <경조오부도 왼쪽 하단에 영등포 여의도 율도(栗島)가 보인다. 英登浦로 표기한 점이 눈이 띤다. 그 아래쪽에는 방학곶(放鶴串) 지명이 보인다. 오늘날 영등포와 관련이 깊은 지명이다.

 

영등포란 명칭의 유래는 음력 2월 초하루를 영등일(靈登日)로 하여 보름까지 여의도 샛강에서 영등굿이 성행하였다. 늘 소원하는 것을 이곳 한강에서 빌면 다 들어주는 명당으로 알려져 '靈登'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 영등(靈登)永登(영등)"으로 변형표기된 것이라고 한다. '영등(永登)'과 물가 마을을 뜻하는 '()'를 합친 영등포가 되었다.

 

지금의 영등포역 주변에 소머리제(牛頭峴)가 있었다. "멀리 동쪽으로 왕성(王城)을 바라볼 수 있어 궁궐을 사모하는 사람이 의례히 이 재에 오른다"라는 말에서 영등포(永登浦)가 연유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양화나루(楊花)        참조 링크: 양화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 시대 삼진(三鎭)의 하나였던 양화진(楊花鎭)이 위치하였던 서울에서 양천(陽川)을 지나 강화로 가는 조선 시대 주요 간선 도로상에 위치하였던 교통의 요지였으며, 삼남 지방에서 한강을 통하여 운송되어 오는 곡식을 저장하던 오강 중의 하나로 농산물의 재분배 기능을 담당하던 중요 지역이었다.

 

또한, 서울의 천연 방어선을 이루는 한강의 중요 지역으로, 진대를 마련하고 진장(鎭將)을 두어 수비하게 하여 군사상 중요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도승(渡丞)이 배치되었으나 뒤에는 별장(別將)으로 바뀌었으며, 호조의 점검청(點檢廳)이 있었다. 나루터의 관할은 어영청에서 하였으며, 양화진에 속한 선박은 모두 10척이었다.

 

양화진(楊花鎭)광흥창(廣興倉)        참조 링크: 광흥창(廣興倉) -두산백과

광흥창은 고려시대에는 충렬왕(忠烈王) 때 설치하였는데, 조선시대에 관리들의 녹봉(祿俸)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1392(태조 1) 호조(戶曹)의 예속기관으로 서울 서교(西郊) 와우산(臥牛山:서울시 마포구 창전동) 아래에 설치하였다. 전국에서 올라온 세곡을 모으는 곳이었는데 한강 양화진에 도착한 세곡선(稅穀船)에서 하역한 쌀을 광흥창에 저장하였다. 그리고 광흥창은 관원들에게 녹봉을 지급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쌀과 옷감을 녹봉으로 지급하였다.

 

잠두봉(蠶頭峰)절두산 성지(切頭山 聖地)        내용 출처: 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

잠두봉, 절두산(折頭山)

잠두봉(蠶頭峰-누에머리 모양의 봉우리)지역은 한강의 동북쪽 강변(옛 당인리 발전소 근처)에 있는 곳으로 사적 제399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한강 가운데에서 경치가 아름답고 정자가 많기로 이름났던 지역이었다. 하지만 천주교도가 박해를 당하고 순교한 곳으로 지금도 순교자 묘지가 남아 있으며, 개화의 선각자였던 김옥균(金玉均)이 처형된 곳이기도 하다.

 

1866년 천주교를 탄압한 병인박해로 병인양요가 발생하여 프랑스 함대가 양화나루까지 진출했다가 퇴각하자, 이에 격분한 흥선대원군의 지시에 의해 잠두봉에서 많은 천주교도들이 참수 당함에 따라 천주교의 순교성지가 되었다.(折頭山 절두산-머리가 잘린 산).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6/6b/Jeoldusan.jpg/408px-Jeoldusan.jpg

 

(현재) 한강 유람선 나루들         출처 링크:https://hangang.seoul.go.kr/archives/249

다음은 한강 유람선의 나루들로 상류에서 하류 순으로 배치하여 각 나루 이름별로 연결 링크를 적었다. 자세한 내용 보려면 지명(나루이름)을 클릭하면 된다.

(상류) 광나루  잠실  뚝섬잠원  이촌  잠원,  이촌  반포  망원,  반포  여의도  난지,  강서  양화 (하류)

 

[요약 퀴즈 

[퀴즈 1] 태조 이성계가 함흥차사후 태종에게 화살을 쐈다는 중랑천 하류의 옛 다리 이름은?

[퀴즈 2]  나루 인근에 몽촌토성·풍납토성 등과 연결되는 아차산성이 있으며, 옛날부터 중요한

                교통로였고 오늘날은 서울부산간 교통로가 이 지역을 지나고 있다.  나루 이름은?

[퀴즈 3] 과천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한강의 나루로 우리말(=노들나루)인 이 나루의 漢字名?

[퀴즈 4] 소금과 젓갈을 실은 배들이 모여들어 도성의 소금과 젓갈은 거의 모두 이곳에서 공급

                 됐다. 결빙기를 제외하고는 京江商人과 배들로 붐비고 활기를 띠었다. 이 나루 이름은?

[퀴즈 5] 서울에서 양천(陽川)을 지나 강화로 가는 조선 시대 교통의 요지였으며, 삼남 지방에서

                 한강을 통하여 운송되어 오는 곡식을 하역하던 나루이다. 이 나루의 이름은?

[퀴즈 6] 양화나루 인근에 있는 이곳은 누에머리를 닮았다하여 잠두봉이라 불린다. 많은 천주

                 교도들이 참수당한 곳으로 천주교의 순교성지가 되었다. 머리가 잘렸다 해서 oo?

 

=== [퀴즈 답] ===

[퀴즈 1] 이성계가 함흥차사후 태종에게 화살을 쐈다는 옛 다리 이름은? .=> 살꽂이다리

[퀴즈 2] 나루 인근에 몽촌토성·풍납토성 등과 연결되는 아차산성이 있으며, 옛날부터 중요한

                교통로(오늘날은 서울부산간 교통로) 지나는 있다. 나루 이름은? .=> 광나루

[퀴즈 3] 과천 가는 길목의 나루로 우리말(=노들나루)인 이 나루의 漢字名? .=> 露梁津(노량진)

[퀴즈 4] 소금과 젓갈을 실은 배들이 모여들어 도성의 소금과 젓갈은 거의 모두 이곳에서 공급

                됐다. 京江商人과 배들로 붐비고 활기를 띠었다. 이 나루 이름은? .=> 마포나루

[퀴즈 5] 서울에서 양천(陽川)-강화로 가는 조선 시대 교통의 요지였으며, 삼남 지방에서 한강을

                통하여 운송되어 오는 곡식을 하역하던 나루이다. 이 나루의 이름은? .=> 양화진

[퀴즈 6] 양화나루 인근에 있는 이곳은 많은 천주 교도들이 참수당한 곳으로 천주교의 순교성지

               가 되었다. 머리가 잘렸다 해서 oo? .=> 절두산(切頭山)

(계속)

서울(한양) 탐구07-청계천에 놓인 22개의 다리와 사연 (scrap)

 

< 참고영상>: 청계천을 살려라-역사채널e -

추후 링크가 끊어지면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 나올 수도 있으며, 아래 동영상 보려면 ▷클릭   

아래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보이면  https://www.youtube.com/embed/TW8zvCusM7o<=요걸 클릭

 

[요약퀴즈]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퀴즈 1] 서울의 하천(河川) 중 서울 도심을 통과하면서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하천의 이름은?

[퀴즈 2] 청계천 다리 중 청계천 수위 측정을 했던 다리 이름은?

[퀴즈 3] 청계천 다리 중  도성 안 중심통로였으며, 주변에 시전(市廛-오늘날의 상가商街)이 위치하고 있어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다리 이름은?

[퀴즈 4] 청계천 물줄기가 도성을 빠져나가는 지점에 다섯 칸의 수문이 홍예(무지개 다리 Arch)로

           건설된 다리이름은?

 

"청계천에 관한 좋은 참고자료 사이트"=> 청계천박물관 홈페이지 www.seoul.go.kr (강추) 

 

청계천(淸溪川)   내용출처: 청계천 -다음백과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북악산ㆍ인왕산의 부근에서 발원하여 시가지 중심부를 서쪽에서 동쪽

으로 통과하여 중랑천으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청계천에는 모두 24개의 다리가 있었는데 광교(廣橋)ㆍ수표교(水標橋)ㆍ관수교ㆍ오간수교(五間水橋) 등이 유명하였다. 그 중 수표교는 수위 측정을 위한 수표석(水標石)과 함께 유명하다. 수표석(水標石)은 1973년 10월에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졌다. 청계천 다리에는 조선 시대 전설과 풍류를 말하는 세시풍속이 있는데 연날리기와 답교(踏橋)는 특히 유명하다.

 

수표교((水標橋)      내용출처: 수표교 -서울시설공단

수표교((水標橋)  

1441년(세종 23)에 다리 옆에 개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서 수표(水標)를 세운 이후부터는 수표교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주변에 있는 마을은 수표동 (水標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수표는 하천수위를 과학적, 계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기구로 측우기와 함께 세종 때 만들어진 대표적인 과학 기기의 하나이다.

 

수표는 청천의 마전교 서쪽과 한강변에 세워졌는데, 처음에는 물 속에 돌을 놓고 그 위에 구멍을 파서 나무로 만든 기둥을 세웠다. 나무기둥에는 눈금을 새겨 수위를 알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나무로 만든 수표는 쉽게 망가져 15세기 성종 때 돌기둥으로 교체하였다.

 

수표교는 광통교와 함께 청계천에 있던 가장 유명한 다리로 다리밟기, 연날리기 등이 행해지던 대표적인 민속놀이 공간이었으며, 사람의 통행이 많았던 만큼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전해진다. 특히 수표교에는 숙종과 장희빈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가 남아있다.

 

광통교(廣通橋)        내용 및 사진 출처: 광통교 -위키백과

광통교(廣通橋)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린동 124번지 부근에 있었던 다리인데, 광통방에 있는 큰 다리였으므로 처음에는 대광통교(大廣通橋)라 하였다. 오늘날은 이 지역을 광교(通橋)로 부른다.

 

광통교는 육조거리-운종가-숭례문으로 이어지는 도성 안 중심통로였으며, 주변에 시전(市廛-오늘날의 상가商街)이 위치하고 있어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다리였다. 정월 대보름이 되면 도성의 많은 남녀가 이 곳에 모여 답교(踏橋)놀이를 하던 곳으로 유명하였다.

 

오간수교(五間水橋)     내용출처: 오간수교 -서울지명사전 사진 출처: 오간수교-위키백과

오간수교(五間水橋)의 옛모습    -출처- 위키백과  

청계천 물줄기가 도성을 빠져나가는 지점, 즉 동대문에서 을지로5가로 가는 성벽 아래 청계천 6가에 있던 조선시대의 수문(水門)이다. 이 다리는 조선시대 한성에 성곽을 쌓으면서 청계천 물이 원활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다섯 칸의 수문이 홍예(虹蜺-무지개 다리 Arch)로 설치되어 오간수다리 · 오간수문 등으로 불렀다홍예 위에 성곽을 쌓아 올렸으며, 아치 모양의 구멍을 서로 연결하여 성벽 안쪽으로 장대석을 연결하여 다리를 놓았다. 

 

(알림) 다음 내용은 아래 원글을 scrap한 후 그림을 확대한 것임.

원글: 청계천에 놓인 22개의 다리와 사연(<=클릭) 2007.12.17 게시글

    (참고: 같은 제목의 게시글 중 이 게시일이 가장 빠른 것임)    

 

 

 

 

 

 

[퀴즈 1] 서울의 하천(河川) 중 서울 도심을 통과하면서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하천의 이름은?

[퀴즈 2] 청계천 다리 중 청계천 수위 측정을 했던 다리 이름은?

[퀴즈 3] 청계천 다리 중  도성 안 중심통로였으며, 주변에 시전(市廛-오늘날의 상가商街)이 위치하고 있어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다리 이름은?

[퀴즈 4] 청계천 물줄기가 도성을 빠져나가는 지점에 다섯 칸의 수문이 홍예(무지개 다리 Arch)로

           건설된 다리이름은?

 

- [퀴즈 답] -

[퀴즈 답1] 서울 도심을 통과하면서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하천의 이름은? .> 청계천

[퀴즈 답2] 청계천 다리 중 청계천 수위 측정을 했던 다리 이름은? .> 수표교

[퀴즈 답3] 청계천 다리 중 도성 안 중심통로였으며, 주변에 시전(市廛=상가商街)이 위치하고

              있어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다리 이름은? .> 광통교(광교)

[퀴즈 답4] 청계천 물줄기가 도성을 빠져나가는 지점에 다섯 칸의 수문이 홍예(무지개 다리 Arch)로 

              건설된 다리이름은? .> 오간수교(五間水橋)

(계속)

 

서울(한양) 탐구06-서울의 산(),하천(河川),()


 

(배경 영상,음악)  남촌 -소프라노 강혜정-

    추후 링크가 끊어지면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 나올 수도 있으며,

    아래 음악이나 동영상 보려면 ▷클릭, 멈추려면 stop □ 버튼 클릭.    

    아래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보이면  https://www.youtube.com/embed/hepBkWQN0ko<=요걸 클릭

 


 

 * 본문 중 밑줄 친 링크는 본문 내용을 가져오거나 참고한 곳으로 필요시 밑줄 친 link를 클릭.

   단, 밑줄 친 링크는 현재는 연결되지만 추후 링크 주소 변경되면 연결이 안 될 수도 있음.

 

대동여지도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중 한양의 (북쪽, 동쪽 일부) 산과 산줄기 모습

그림출처: www.seoul.go.kr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일부)’-철종 12년(1861)

   그림  출처 링크

http://old.koreaa2z.com/digitaldaedong/area.php?kind=3&type=&sub=D00_07&kr=%C1%A6%B1%E2%C7%F6

 

()이나 하천(河川), ()의 이름들은 지명이나 지하철역 이름에 많이 반영되어 있다.

[ 요약 퀴즈 ]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A. 서울의 산()

[퀴즈 A-1] 서울 도심 바로 남쪽에 있어 남산(南山)으로 불리는 이 산의 옛 이름은?

[퀴즈 A-2] 서울 바로 북쪽에 있는 진산(鎭山)으로 삼각산으로도 불리는 산의 이름은?

[퀴즈 A-3] 서울 북동쪽에 있는 명산으로 5개의 암봉(岩峰)이 아름다운 이 산의 이름은?

[퀴즈 A-4] 서울 남쪽 경계에 있는 화강암 산으로 풍수지리상 불()산인 이 산은?

 

B. 서울의 하천(河川)

[퀴즈 B-1] 서울 도심을 통과하면서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하천의 이름은?

[퀴즈 B-2] 서울 정릉천과 서울 북동쪽의 미아동, 수유동, 우이동, 도봉동과 노원구 지역의 

            물도 유입되어 합쳐진다. 사근동에서 청계천과 합류(14개 지류)한 뒤,

            금호동과 성수동의 강변북로 교량 아래에서 한강에 합류되는 하천의 이름은?

[퀴즈 B-3] 경기도 용인시 법화산에서 발원해 성남시를 거쳐 서울 종합운동장 옆 한강에 

            합류하는 하천의 이름은?

[퀴즈 B-4] 경기도 의왕시의 청계산 서남쪽에서 발원하여 군포시를 거쳐 산본천, 호계천과 

            합류하고, 시흥 수암리에서 발원한 목감천과 합류한 후 서울시에 들어와

            도림천과 합류한 뒤 양화동 서쪽 끝에서 한강으로 들어가는 하천의 이름은?

 

C. 서울의 성()

[퀴즈 C-1] 산 정상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성벽을 빙 둘러 마치 머리띠를 두른 것처럼

            성()을 쌓는 방식을 oo식 산성이라 하나?

[퀴즈 C-2] 산의 계곡을 포용하고, 계곡을 둘러싼 산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는 방식을

             oo식 산성이라 하나?

[퀴즈 C-3] 북한산의 산성으로 백제가 132년에 포곡식 석축산성으로 축조했으나 신라,

            고구려의 치열한 쟁탈지가 되었고 신라 진흥왕은 553년 이곳에 순수비를 세웠다

            이후 조선 숙종(1711)대규모로 축성한 이 산성의 이름은?

[퀴즈 C-4] 병자호란때 인조가 이 성에 들어가 47일간 항전하다, 끝내 삼전도(三田渡)

            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게되었다. 이 성의 이름은?

[퀴즈 C-5] 서쪽으로 한강을 끼고 충적대지상에 구축된 평지토성으로 위례성(慰禮城)으로  

            추정되고 있는 이 토성(土城)의 이름은?

[퀴즈 C-6] 한강 남쪽 성내천(城內川)의 언덕에 자리 잡은 토성(土城)으로 서진(西晉)대 

            도기 조각이 나와 축성 시기는 3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된다. 성의 외벽은 경사 

            면을 깎아내어 급경사와 단을 만들고 두 번째 단에는 목책(木柵)을 설치한 이 

            토성(土城)의 이름은?

[퀴즈 C-7]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 한강변에 축조한 성으로 서울시 광진구

             (워커힐 호텔 뒷산에) 있는 이 석성(石城)의 이름은?

[퀴즈 C-8]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산성으로 임진왜란 당시 권율(權慄) 장군의 

            행주대첩에 큰 역할을 한 이 성()의 이름은 무엇인가?

  

A. 서울의 산() 

                      사진 및 내용 출처: 위키백과 (서울의  목록) 서울지명사전에서 가져 왔다.

 

서울의 산() 가나다순-

개운산 - 안암산, 陳石山(진석산)으로 불리며, 성북구 안암동에 있다. 개운사를 품고 있다.

개화산(開化山) - 강서구 개화동에 있는 산으로서, 주룡산, 봉화뚝이라고도 한다.

관악산 - 높이 632m인 관악산은 서울 관악, 경기 시흥, 과천, 안양에 위치하며 벼랑 위에 자리 잡은 연주대가 유명하다.

구룡산 - 높이 283.2m. 서울 서초구에 위치하며 산이 높지 않아 아침저녁으로 운동을 즐기기에 제격인 산이다.

 

굴봉산 - 구로구 오류동 개봉동에 있는 산으로서 굴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145.6m·143m·105m의 세 봉우리가 나란히 솟아 있어 삼각산이라고도 한다.

궁산(宮山) -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에 있는 산이다.

낙산 - 낙산(駱山)은 산모양이 낙타의 등과 같다고 하여 낙타산(일명 타락산)으로 불린다.

       서울시 종로구와 동대문구 성북구에 걸쳐 자리한 산으로 서울 도성의 좌청룡(左靑) 

       동산(東山)에 해당된다. 풍수지리상 서쪽 우백호의 인왕산과 대치된다.

 

남산(옛 이름은 목멱산) - 높이 262m. 서울 중구, 용산구에 위치. 옛 이름은 목멱산이다.

노고산 - 높이 106m인 노고산은 서강대학교 뒤편에 위치하며 밋밋한 구릉성의 산이다.

대모산 - 높이 293m. 서울 강남구에 위치하며 근처 아파트 주민들이 휴식공간으로 자주 찾는 산이다.

 

도봉산 - 서울 북동쪽 경계에 있으며 최고봉인 자운봉(紫雲峰 739.5m)과 만장봉(萬丈峰

          선인봉(仙人峰), 오봉(五峰여성봉 등 5岩峰과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산이다.

매봉재산 -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있으며 서리풀 공원과 이어지는 방배근린공원이 있다.

 

배봉산 - 높이 105.7m인 배봉산은 산전체가 공원으로 전농동과 휘경동에 속해 있다.

백련산 - 높이 215.5m의 백련산은 서울 은평구, 서대문구에 위치한 낮은 산으로 산내에는

          백련사가 있다. 응암동, 구파발, 홍은동 일대 주민들이 자주 찾는 산이다.

봉화산 - 높이 137,9m. 중랑구 신내동과 묵동, 중화동, 상봉동에 둘러싸여 있다.

 

북악산 - 높이 342m. 경복궁의 뒤쪽에 위치하며 산 정상을 따라 동서를 이어주는 길

         (북악스카이웨이)은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로 사랑 받고 있다.

북한산 높이 836.5m. 서울 북쪽 경계에 있으며 백운대, 인수봉, 국망봉(만경대)의 세 봉우리가 있어

          삼각산(三角山)으로 불린다. 세계적으로 드물게 수도 아주 가까이에 있는 명산으로 국립공원이다.

          인수봉은 바위 타는 사람(rock climber)의 성지이다.

불암산 - 높이 508m. 서울 동쪽 경계에 있으며 사찰로는 불암사가 있고 정상부분 전체가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다.

 

삼각산 => 북한산

삼성산 - 높이 480.9m인 삼성산은 서울 관악구, 구로구, 경기 안양시에 위치하며 원효대사가 

          의상, 윤필과 입산수도(入山修道)하였다 해서 삼성산(三聖山)이라 부른다.

성산 - 마포구 성산 제1동에 있는 산으로서, 성메, 성미라고도 한다. 산이 성과 같이 둘러있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수도산 -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산으로서, 봉은사 뒤에 있는 해발 75m의 산이다

수락산 - 높이 638m. 서울 동쪽 경계에 있으며 금류폭포와 내원암이 있는 바위 경치가 뛰어난 산이다.

 

아차산 - 높이 287m. 서울 중랑구와 경기 구리시에 위치하며, 삼국시대의 전략 요충지로

          온달장군의 전설이 전해 온다. 대성암, 석곽분, 봉수대 등이 있다.

안산 - 높이 295.9m인 안산은 무악산(毋岳山)으로 불리며,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하여 서울 시내가

        한 눈에 보이며 봉원사와 봉수대가 있다.

연희산(연희고지) - 서대문구 연희 제1,2동에 있는 높이 88m, 65m, 104m의 고지를 통틀어 일컫는다.

오패산(=벽오산) - 강북구 번동, 미아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 매봉짜, 빡빡산이라고도 한다.

와룡산 - 구로구 궁동에 있는 산으로서, 항굴 앞산으로 소가 누운 형상인 데서 유래된 이름 이다.

         궁동산, 궁동와룡산이라고도 한다.

와우산 - 마포구 서강동에 있는 산으로 홍익대학교 뒷산이다. 소가 누운 모양의 산이다.

 

용마산 - 높이 595.7m. 경기도 광주에 위치하고 있지만 교통이 편리해 찾는 사람이 많다.

용왕산 - 높이 해발 78m로 옛날에는 엄지산(嚴知山)이라고 불렸다. 양천구 목동에 있다.

우면산 - 높이 293m로 서울 서초구, 과천시 경계를 이루며 예술의 전당 뒤편에 있다.

우장산 - 높이 98.9m로 화곡5동 및 화곡6동 및 발산2동에 걸쳐 분포해있는 화곡동의 진산(鎭山)이다.

응봉산 - 응봉산은 성동구 응봉동에 자리한 해발81M의 산이지만 남쪽으로 한강을 내려다 보이고

          봄이면 온통 개나리꽃의 향연을 볼 수 있는 개나리동산이다.

인릉산 높이 327m. 순조의 능인 인릉의 朝山이 되는 데서 유래된 이름으로.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다.

인왕산 - 높이 338.2m의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하는 산으로 바위가 아름답고 정상에서 보는 (서울)도시 풍경이 멋지다

         풍수지리상 서쪽 우백호(右白虎)에 해당한다.

일자산 - 일자산(一字山)은 서울특별시 강동구, 경기도 하남시 경계에 있는 산이다.

    

천마산 - 높이 144.4m인 천마산은 서울 마천동과 하남시 사이에 위치하며 면적은 174,710 이다.

          정상에서 송파구 일대가 한눈에 들어와 전망이 좋다.

청계산 - 높이 618m. 서울 남쪽 경계(서울 서초구, 경기 과천시, 의왕시, 성남시), 정상에서

          과천 서울대공원, 서울랜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경마장이 한눈에 보인다.

청량산 - 높이 480m. 하남시와 광주군 사이에 위치하며, 산 안에 남한산성도립 공원이 위치하고 있다.

 

탑산 - 강서구 가양동에 있는 산으로서, 탑이 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호암산 - 높이 390m로 관악산 전체의 서쪽에 위치한다. 금주산, 금지산이라고도 한다.

         산세가 호랑이 형상을 닮아 일명 호암산(虎巖山)이라고도 한다.

 

화장산 - 동작구에 있는 국립현충원의 주산으로서, 공작봉이라도 한다.

 

B. 서울의 하천(河川)

서울시 안에 있는 하천은 모두 35개이다.

내용 참조 한 곳: <서울의 역사와 문화> 홈페이지 링크주소: http://history.seoul.go.kr

 

서울시 안에 있는 하천은 모두 35개이다. 이 가운데 국가 하천은 한강, 중랑천, 안양천 3개가 있고 지방 1급 하천으로는 청계천이 있다. 나머지 31개의 하천은 모두가 지방 2급 하천이다. 31개의 크고 작은 지방 2급 하천들은 북쪽과 남쪽으로 흘러 한강으로 합류하여 서해 바다로 들어간다.


그러나 서울시에 있는 총 31개의 지방 2급 하천 가운데 하천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하천들이 많다. 이미 완전히 복개가 된 하천으로는 만초천, 면목천, 월곡천, 녹번천, 봉원천, 삼성천이 있으며 홍제촌, 도림천 등은 반복개(半覆蓋) 상태이다.

 

서울의 하천     

 그림참조 링크: https://50plus.or.kr/upload/im/2018/05/c0b0f18c-3ab3-4a60-b99e-603bcad1d0ab.jpg

 

서울에 있는 하천들을 한강을 중심으로 나눠보면..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

(서울)북동쪽에 위치: 도봉천, 방학천, 당현천, 우이천, 대동천, 가오천, 화계천, 월곡천,

(서울)동쪽에 위치: 묵동천, 면목천, 전농천, 중랑천,

(서울)중앙에 위치: 청계천

(서울)정북쪽에 위치: 정릉천, 성북천, 삼청천

(서울)서북쪽에 위치: 홍제천, 봉원천, 만초천, 녹번천, 불광천, 난지천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

(서울)남동쪽에 위치: 고덕천, 성내천, 여의천, 양재천, 세곡천, 탄천

(서울)남쪽에 위치: 반포천, 사당천, 샛강

(서울)남서쪽에 위치: 대방천, 봉천천, 신림천, 도림천, 오류천, 시흥천,

목감천(개화천), 안양천

   

지방1급 하천 : 1개소 (청계천)

지방2급 하천 : 31개소  (갈색은 한강 북쪽에 ,분홍색은 한강 남쪽에 위치)
- 한강 수계 : 홍제천, 봉원천, 반포천, 탄천, 성내천, 고덕천
- 중랑천 수계 : 도봉천, 방학천, 당현천, 우이천, 목동천, 면목천, 전농천
- 안양천 수계 : 개화천(목감천), 도림천, 시흥천
- 청계천 수계 : 성북천, 정릉천
- 홍제천 수계 : 불광천
- 반포천 수계 : 사당천
- 탄천 수계 : 양재천, 세곡천
- 우이천 수계 : 화계천, 가오천, 대동천
- 도림천 수계 : 대방천, 봉천천
- 개화천 수계 : 오류천
- 정릉천 수계 : 월곡천
- 불광천 수계 : 녹번천
- 양재천 수계 : 여의천

 

중랑천(中浪川)  내용출처: 중랑천-서울지명사전

경기도 의정부시 수락산 북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양주군에서는 광사천, 어둔천과 합류되고, 의정부시에서는 부용천, 백석천, 회룡천, 호원천 등의 지류와 합류되어 서울특별시로 유입되어 총 14개 지류를 합류하여 한강으로 유입되는 국가하천이다. 

 

서울 정릉천과 서울 북동쪽의 미아동, 수유동, 우이동, 도봉동과 노원구 지역의 물도 합류되고 사근동에서 청계천과 합류(14개 지류)한 뒤, 금호동과 성수동의 강변북로 교량 아래에서 한강에 합류된다. 서울에서는 성북구, 강북구, 도봉구, 노원구, 중랑구, 동대문구, 성동구 등 7개구를 거치는 동안 각 행정자치구의 자연스런 경계 역할을 한다. 과거 중랑천은 도봉동에서는 서원천(書院川)’, 상계동 부근에서는 한강의 새끼 강이라는 뜻으로 샛강이라고 불렸다.

 

청계천(淸溪川)  내용출처: 청계천-다음백과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북악산인왕산의 부근에서 발원하여 시가지 중심부를 서쪽에서 동쪽

으로 통과하여 중랑천으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청계천에는 모두 24개의 다리가 있었는데 광교(廣橋)수표교(水標橋)관수교오간수교(五間水橋) 등이 유명하였다. 그 중 수표교는 수위 측정을 위한 수표석(水標石)과 함께 유명하다. 수표석(水標石)197310월에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졌다.

 

청계천 다리에는 조선 시대 전설과 풍류를 말하는 세시풍속이 있는데 연날리기와 답교(踏橋)는 특히 유명하다.

 

탄천(炭川)    내용출처: 탄천-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기도 용인시 법화산에서 발원해 성남시와 서울특별시 강남구·송파구를 지나 서울 종합운동장 근처에서 한강으로 유입되는 하천이다. 탄천은 성남시의 옛 지명인 탄리(炭里)에서 비롯되었다. 탄리는 지금의 성남시 태평동·수진동·신흥동 등에 해당하는 곳으로 과거에는 독정이·숯골 등의 마을이 있었다. 조선 경종 때 남이(南怡) 장군의 6대손인 탄수(炭叟) 남영(南永)이 이곳에 살았는데, 그의 호 탄수에서 탄골 또는 숯골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안양천(安陽川)     내용출처: 안양천 -서울지명사전

길이는 35.1이고 서울의 한강지류 가운데 중랑천 다음으로 규모가 크다. 갈천, 앞개울, 대천, 인덕원천(상류), 학고개천(중류), 기탄, 오목내(하류)라고도 한다.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청계산 서남쪽에서 발원하여 왕곡천과 오전천을 합류한 후 군포시를 거쳐, 다시 당정천과 산본천, 호계천을 합류한 후 안양천 지류 가운데 두 번째로 큰 유역면적을 가지고 있는 학의천을 만난다.

 

다시 수리산에서 발원한 수암천과 합류하고, 다시 삼성천을 만나고 시흥시 수암리에서 발원한 목감천을 만나고 서울특별시 경계를 넘어서는 도림천과 합류한 뒤 양화동 서쪽 끝에서 한강으로 들어간다.

 

C. 서울의 성()들    참조할 만한 홈페이지: 한강사업본부www.seoul.go.kr

 

-(알림)- 이하 내용은 해당 참조 링크에서 가져 온 것으로 내용을 편집 가감하였다.

 

산성의 축조 방식

테뫼식(山頂式) 산성: 산 정상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성벽을 빙 둘러 마치 머리띠를  두른 것처럼 성을 쌓은 것.

포곡식(包谷式) 산성: 산의 계곡을 포용하고, 계곡을 둘러싼 산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는 방식의 산성

 

북한산성    참조링크1:북한산성 다음백과 , 북한산성 -사진출처 위키백과

 

-사진출처- 위키백과

북한산성(北漢山城)은 북한산에 쌓은 산성이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산1-1번지에 위치한다.

북한산성(北漢山城)은 북한산성은 백제가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뒤 도성을 지키기 위해 쌓은 포곡식 석축산성으로 132년에 축조했다. 고구려, 신라의 치열한 쟁탈지가 되었고 신라는 553년 이곳에 진흥왕순수비를 세웠다. 이후 고려 현종이 성을 증축했으며 숙종(1711년)때 대규모의 축성 공사를 실시해서 석성을 완성했다.

 

현재 삼국시대 토성은 약간 남아 있을 뿐이고, 대부분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이 남아 있다. 14개의 문, 3개의 장대와 함께 유사시 어가를 북한산성으로 옮길 행궁을 건립하였다. 둘레가 7,620()이다.

 

지형에 따라 성벽 없이 여장(女檣)만 쌓은 곳도 있는데, 그 길이는 1,457보이다. 여장(女檣)이란 성벽 위에 설치한 낮은 담장으로 적을 관측하고 공격하면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 진 것으로 여자도 넘을 수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탕춘대성(蕩春臺城)     내용 및 사진 출처: 홍지문 및 탕춘대성 -위키백과

탕춘대성 암문(暗門) -사진 출처: 위키백과 -

홍지문 및 탕춘대성(弘智門 蕩春臺城)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1976623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

 

탕춘대성은 인왕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북쪽의 능선을 따라 내려가다가 사천을 지나 북한산 서남쪽의 비봉 아래까지 연결하여 축성한 산성이다. 이 산성의 명칭을 탕춘대성이라고 한 것은 현재 세검정이 있는 동쪽 약 100m 되는 산봉우리에 탕춘대(蕩春臺)가 있었던 것에서 연유한 것이며, 한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성(西城)이라고 하였다.

 

조선왕조 숙종은 왕 37(1711)에는 북한산성을 축성하였고 다시 탕춘대성을 축조하였다. 탕춘대성 전체의 길이는 약 4km 이었고 성내에 연무장(鍊武場)으로 탕춘대 터(오늘날 서울세검정초등학교)에 연융대(鍊戎臺)를 설치하는 한편, 비상시를 대비하여 선혜청(宣惠廳) 창고와 군량창고인 상·하 평창(平倉)을 설치하였다. 그 후 탕춘대성의 축성과 함께 그 성안을 총융청(摠戎廳) 기지로 삼고, 군영도 배치하였다.

 

현존하는 탕춘대성은 도성이나 북한산성과 같이 주 성벽과 여장(女墻)을 쌓았으며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일정한 간격으로 성구(城口)를 뚫어 놓았다. 현재 홍지문이 복원되어 있고, 상명대학교 북쪽으로 성곽이 남아있다.

 

남한산성(南漢山城)     내용 출처: 남한산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남한산성 서장대(일명 守禦將臺) 사진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남한산성(南漢山城)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시기에 축조되어 조선시대 수도 한양을 지키던 성곽이다. 흔히 북한산성(北漢山城)과 함께 조선의 도성인 한양의 방어를 위하여 쌓은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성벽의 바깥쪽은 경사가 급한데 비해 안쪽은 경사가 완만하여, 방어에 유리하면서도 적의 접근은 어려운 편이다. 봉암성(蜂巖城), 한봉성(漢峰城), 신남성(新南城) 3개의 외성과 5개의 옹성도 함께 연결되어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성벽과 성 안에는 많은 시설물과 건물이 있었지만, ··남문루와 장대(將臺돈대(墩臺((암문·우물 등의 방어 시설과 관청, 군사훈련 시설 등이 있다.

 

남한산성의 수비는 총융청이 맡아 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다. 여기에는 전····후의 5(五管)이 소속되었는데 전영장(前營將)은 남장대(南將臺), 중영장은 북장대에, 후영장과 좌영장은 동장대에, 우영장은 서장대에 진을 치고 있었다. 지금은 서장대(일명 守禦將臺)만 남아 있다

 

남한산성의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게 인정되어 20146월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신규 등재되었다.

 

'삼전도(三田渡)의 굴욕'      관련 링크: 삼전도의 굴욕 - 나무위키

1637224(인조 15년 음력 130)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일으키고 한양으로 빠르게 남하하자 조선의 왕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 하였다. 하지만 청군이 길을 막아 강화도로 갈 수 없게 되었고 이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한다.

 

그러나 남한산성에 피신하였던 백성들이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힘들어하는 상황과 성내의 물자가 떨어지자 47일간 대항하였지만 끝내 청나라와 치욕스러운 강화(말이 강화조약이지 항복이나 다름없었다)를 맺으니 이를 삼전도의 굴욕이라 한다. 삼전도(三田渡)는 서울시 송파구 삼전동에 있었던 나루로 삼밭나루라고도 불렸다.

 

인조는 세자와 신하들을 이끌고 남한산성 문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의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며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풍납토성(風納土城)     내용출처: 풍납동토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흔히 풍납토성(風納土城)=풍납동토성(風納洞土城)이라고도 하는 데 삼국사기백제본기(百濟本紀)에 나오는 위례성(慰禮城)으로 추정하는 견해이다. 또한, 평고성을 풍납토성으로 보고, 이 성이 서울 광진구 광장동 뒷산에 있는 아차산성(阿且山城)과 연결되어 방어적 기능을 담당했던 성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서북쪽으로 한강에 직면하고 있고, 강 맞은편에는 아차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남쪽으로 성내천을 사이에 두고 2.5km 거리에 몽촌토성이 있으며, 동쪽으로 이성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풍납토성은 서쪽으로 한강을 끼고 충적대지상에 구축한 순수 평지토성으로 약간 동쪽으로 치우친 남북 장타원형을 띠고 있다. , 북벽과 남벽은 짧은 벽으로 직선에 가깝고, 동벽과 서벽은 단벽에서 둔각을 이루며 꺾이는데, 그중 동벽은 중앙부가 완만한 형태를 띠고 있다.

풍납토성은 현재 북벽과 동벽, 남벽 등 일부가 약 2.1정도가 남아 있으며, 유실된 서벽을 포함한다면 전체 길이 3.5에 달하는 거대한 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몽촌토성(夢村土城)     내용출처: 서울몽촌토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풍납토성과 함께 백제가 성립된 시기에 만들어진 도성(都城)이다. 성벽 조사에서 출토된 중국 서진(西晉)대 전문 도기 조각이 나오므로 토성을 축조한 연대의 상한은 3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된다.삼국사기등에 기록된 것처럼, 고구려의 남진에 의해서 한성(漢城)이 함락되고 웅진으로 천도하였던 475년까지 백제의 도성으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판축 성토에 의한 토성 축성은 백제 한 성기를 중심으로 한 백제 토성의 유형과 축성 방법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기준으로 알려져 있다. 몽촌토성은 한강 남안 성내천(城內川)을 끼고 있는 언덕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성의 외벽은 언덕 경사면을 깎아내어 급경사와 단을 만들고 두 번째 단에는 목책(木柵)을 설치하였다. 현재 목책은 본성의 서북벽·동벽과 외성 등 3곳에서 확인되었는데, 생토암반층에 큰 나무를 박아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 보조기둥을 세웠다. 목책의 높이는 2m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이 목책은 발굴 조사된 원래의 목책 기둥 자리를 따라 그 위에 추정 복원한 것이다.

 

몽촌토성의 북쪽 기슭에는 1992년 몽촌역사관이 건립되어 한강 유역을 포함한 백제문화의 대표적인 유적과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암사동·명일동·역삼동의 선사시대 주거지와 가락동·방이동·석촌동의 고분군, 몽촌토성의 유적 모형과 출토 유물을 전시하여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아차산성(阿嵯山城)      내용출처: 아차산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서울특별시 광진구에 있는(워커힐 호텔 뒷산에 있는) 아차산의 경사진 산허리 윗부분을 둘러쌓은 테뫼식(山頂式) 산성으로. 삼국시대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 축조한 성이다.

 

아차산성(阿嵯山城)은 아단성(阿旦城장한성(長漢城광장성(廣壯城) 등으로 불리는데 <광개토왕비문>의 영락 6년조에 광개토왕이 백제로부터 공취한 58성 가운데 아단성의 이름이 보인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이끈 군대가 백제의 한성을 함락시킴에 따라 개로왕이 생포되어 아단성 아래서 처형되었다. 이렇게 아단성은 고구려 군대가 주둔한 군사진지였으며, 그 뒤 77년간 한강 유역을 통치한 고구려의 전방기지로서 기능하였다.

 

또 조선 후기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아차산에는 양진성과 아차산고성이라는 2개의 성곽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양진성은 나루를 방비하기 위한 성곽으로 현존하는 유구나 문헌자료를 통해 볼 때 아차산의 지봉(芝峰)을 따라 광나루 북방에 위치한 광진성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아차산고성은대동여지도에 보이는 망우리 쪽 아차산에 소재하고 있는 성곽을 아차산고성의 유지(遺址 남은 터)로 보고 있다.

 

아차산성은 석축성으로 기본 형태는 테뫼식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산 정상부를 돌아가며 축성한 테뫼식과는 달리 아차산 능선 말단부의 남쪽 지역을 적절히 이용하여 작은 계곡이 포함되도록 함으로써 성 내에 우물과 작은 계곡이 흐르는 포곡형 산성에 가까운 형태이다.

 

한편 장한성의 유구(遺構 남아 있는 구조물)는 본래 뚝도 부근의 한강변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고지를 따라 아차산에 이르고 다시 망우리에 이르는 산줄기를 따라 용마봉에 못 미치는 벼랑바위산에 이르기까지 산마루를 따라 석성 터가 있으며, 구리시 아천동까지 그 유구가 나타난다. 이를 장성 또는 장한성이라 하는 데 신증동국여지승람한성부 고적조에 '장한성이 한강 위에 있는데 신라 때 여기에 중요한 진영을 두었으며 고구려에 의해 점령당하였다가 군사를 동원하여 수복하고, 장한성가(長漢城歌)를 지어 그 공을 기리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성은 산 정상이나 산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토성이나 석성이 아니고 산 정상을 지나 등선을 따라 일직선 형태로 축조된 성벽으로 하남시 춘궁리에 있는 이성산성과 축성양식이 같은 신라시대의 산성으로 특히 삼국통일 전쟁 수행을 위한 북진기지 가운데서도 군사적 요충으로 추정된다.

 

행주산성((幸州山城)     내용출처: 행주산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행주산성은 삼국시대부터 토축(土築) 산성이 있었다. 행주산성이 처음 축성된 것은 통일신라시대(78세기경으로 추정)로 추정하고 있다. 강안(江岸)의 돌출된 산봉우리를 택하여 산 정상부를 에워싼 소규모의 내성(內城)과 북쪽으로 전개된 작은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外城)의 이중구조를 하고 있으며 둘레가 약 1,000m.

 

백제의 초기 영역에는 서해안으로의 수운(水運)과 관계된 중요한 거점이었으며, 특히 나당전쟁(羅唐戰爭) 때까지 남북교통의 요충에 해당하여 고구려와 신라의 공방전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행주(幸州) 산성은 해발 124.8m의 덕양산의 해발 70100m에 이르는 능선을 따라 축조되어 있는 테뫼식(山頂式) 산성으로, 남쪽은 한강이 연하여 있고, 동남쪽으로는 창릉천(昌陵川)이 산성을 돌아 한강으로 흘러들고 있어 자연적인 해자(垓字)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산성의 동남쪽과 남쪽 일대는 자연 경사가 매우 급하여 자연적인 요새로서의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 행주산성에서 조선시대 임진왜란(권율(權慄) 장군의 행주대첩) 당시 부녀자들까지 동원되어 관민(官民)이 일치단결하여 싸웠다. 특히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서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여기에서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 행주대첩으로 인하여 조선군과 명나라 군사가 사기를 회복하여 왜적을 남으로 쫓고 정부가 환도(還都)하게 되었으니 그 의의는 실로 크다 하겠다.

 

호암산성(虎巖山城)   내용출처1: 서울호암산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내용출처2:한강의 어제와 오늘 (서울시사편찬위원회 발간, 2001.10.)수록내용 발췌함

호암산성(虎巖山城)은 금천구 시흥2동 산 93번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리상으로 서울의 남서쪽에 해당된다. 산성의 입지조건으로 볼 때 호암산성은 안양 금천 일대의 평야를 관할하는 요새지로서 서쪽의 해안과 북쪽으로 침입하는 적에 대한 공격과 방비를 위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해발 347m의 조그만 봉우리를 최고봉으로 하는 산 정상의 성 내부는 비교적 평탄지형을 이루고 있다. 유적의 동쪽으로 직선거리 약 2km 지점에 해발 629m의 관악산 정상인 연주대가 위치하고, 동남방 1km 지점에 해발 460m의 삼성산 정상이 위치하고 있다.

 

문무왕 12(672)'한산주에 주장성(晝長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주목된다. 출토된 유물·유적과 지리적 입지조건을 바탕으로 문헌기록과 비교 검토한 결과, 호암산성의 축성 시기는 문무왕 12년경으로 보고 있다. 신라가 당나라와의 전쟁 때 한강을 넘어 수원 지역으로 내려가는 육로와 남양만으로 침입하는 해로를 가장 효과적으로 방어 공격하기 위해 세워진 요새지였다고 하겠다.

 

또한 호암산성 발굴에서 통일신라시대 이외에 고려시대의 유물도 많이 출토되었고, 임진왜란 당시 한성 수복을 위해 행주산성과 연합한 전라병사 선거이(宣居怡) 장군이 인솔하는 조선 군사들이 주둔한 곳이기도 하다.

 

[ 요약 퀴즈 ]

[퀴즈 C-4] 병자호란때 인조가 이 성에 들어가 47일간 항전하다, 끝내 삼전도(三田渡)

            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게되었다. 이 성의 이름은?

[퀴즈 C-5] 서쪽으로 한강을 끼고 충적대지상에 구축된 평지토성으로 위례성(慰禮城)으로  

            추정되고 있는 이 토성(土城)의 이름은?

[퀴즈 C-6] 한강 남쪽 성내천(城內川)의 언덕에 자리 잡은 토성(土城)으로 서진(西晉)대 

            도기 조각이 나와 축성 시기는 3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된다. 성의 외벽은 경사 

            면을 깎아내어 급경사와 단을 만들고 두 번째 단에는 목책(木柵)을 설치한 이 

            토성(土城)의 이름은?

[퀴즈 C-7]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 한강변에 축조한 성으로 서울시 광진구

             (워커힐 호텔 뒷산에) 있는 이 석성(石城)의 이름은?

[퀴즈 C-8]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산성으로 임진왜란 당시 권율(權慄) 장군의 

            행주대첩에 큰 역할을 한 이 성()의 이름은 무엇인가?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요약 퀴즈 답 ]

A. 서울의 산()

[퀴즈 A-1] 서울 도심 바로 남쪽에 있는 남산(南山)옛 이름은? .=> 목멱산(木覓山)

[퀴즈 A-2] 서울 북쪽에 있는 서울의 진산(鎭山) 불리는 산의 이름은? .=> 북한산

[퀴즈 A-3] 서울 북동쪽에 있는 5개의 암봉(岩峰)이 아름다운 이 산은? .=> 도봉산

[퀴즈 A-4] 서울 남쪽에 있는 화강암 산으로 풍수상 불()산인 이 산은? .=> 관악산

 

B. 서울의 하천(河川)

[퀴즈 B-1] 서울 도심을 통과하면서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하천의 이름은? .=> 청계천

[퀴즈 B-2] 서울 정릉천과 서울 북동쪽 미아동, 수유동, 우이동, 도봉동과 노원구 지역의

            물이 사근동에서 청계천과 합류되어 한강에 합류되는 하천은? .=> 중랑천

[퀴즈 B-3] 용인시, 성남시를 거쳐 종합운동장 옆 한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 탄천

[퀴즈 B-4] 경기도 의왕시, 군포시를 거쳐 산본천, 호계천과 합류하고, 시흥 목감천과

            합류하고 도림천과 합류 후 한강으로 들어가는 하천의 이름은? .=> 안양천

 

C. 서울의 성()

[퀴즈 C-1] 정상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성벽을 빙 둘러 마치 머리띠를 두른 것처럼

            성()을 쌓는 방식을 oo식 산성이라 하나? .=> 테뫼식(山頂式)

[퀴즈 C-2] 산의 계곡을 포용하고, 계곡을 둘러싼 산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는 방식을

            oo식 산성이라 하나? .=> 포곡식(包谷式) 산성

[퀴즈 C-3] 신라 진흥왕이 순수비를 새웠던 산의 이름은? .=> 북한산성

[퀴즈 C-4] 병자호란때 인조가 이 성에 들어가 47일간 항전하다, 끝내 삼전도(三田渡)

              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게되었다. 이 성의 이름은? .=> 남한산성

[퀴즈 C-5] 위례성(慰禮城)으로 추정되고 있는 토성(土城)의 이름은? .=> 풍납토성

[퀴즈 C-6] 한강 남쪽 성내천(城內川)의 언덕에 자리 잡은 토성(土城)으로 서진(西晉) 도기 조각이 나와

            축성 시기는 3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된다. 성의 외벽은 경사면을 깎아내어 급경사와 단을 만들고

            두 번째 단에는 목책(木柵)을 설치한 이 토성(土城)의 이름은? .=> 몽촌토성

[퀴즈 C-7]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 한강변에 축조한 성으로 서울시 광진구 (워커힐 호텔 뒷산에) 있는

            이 석성(石城)의 이름은? .=> 아차산성

[퀴즈 C-8]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산성으로 임진왜란 당시 권율(權慄) 장군의 행주대첩에 큰 역할을 한

            이 성()의 이름은 무엇인가? .=> 행주산성

  (계속)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