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한양) 탐구06-서울의 산(),하천(河川),()


 

(배경 영상,음악)  남촌 -소프라노 강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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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중 한양의 (북쪽, 동쪽 일부) 산과 산줄기 모습

그림출처: www.seoul.go.kr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일부)’-철종 12년(1861)

   그림  출처 링크

http://old.koreaa2z.com/digitaldaedong/area.php?kind=3&type=&sub=D00_07&kr=%C1%A6%B1%E2%C7%F6

 

()이나 하천(河川), ()의 이름들은 지명이나 지하철역 이름에 많이 반영되어 있다.

[ 요약 퀴즈 ]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A. 서울의 산()

[퀴즈 A-1] 서울 도심 바로 남쪽에 있어 남산(南山)으로 불리는 이 산의 옛 이름은?

[퀴즈 A-2] 서울 바로 북쪽에 있는 진산(鎭山)으로 삼각산으로도 불리는 산의 이름은?

[퀴즈 A-3] 서울 북동쪽에 있는 명산으로 5개의 암봉(岩峰)이 아름다운 이 산의 이름은?

[퀴즈 A-4] 서울 남쪽 경계에 있는 화강암 산으로 풍수지리상 불()산인 이 산은?

 

B. 서울의 하천(河川)

[퀴즈 B-1] 서울 도심을 통과하면서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하천의 이름은?

[퀴즈 B-2] 서울 정릉천과 서울 북동쪽의 미아동, 수유동, 우이동, 도봉동과 노원구 지역의 

            물도 유입되어 합쳐진다. 사근동에서 청계천과 합류(14개 지류)한 뒤,

            금호동과 성수동의 강변북로 교량 아래에서 한강에 합류되는 하천의 이름은?

[퀴즈 B-3] 경기도 용인시 법화산에서 발원해 성남시를 거쳐 서울 종합운동장 옆 한강에 

            합류하는 하천의 이름은?

[퀴즈 B-4] 경기도 의왕시의 청계산 서남쪽에서 발원하여 군포시를 거쳐 산본천, 호계천과 

            합류하고, 시흥 수암리에서 발원한 목감천과 합류한 후 서울시에 들어와

            도림천과 합류한 뒤 양화동 서쪽 끝에서 한강으로 들어가는 하천의 이름은?

 

C. 서울의 성()

[퀴즈 C-1] 산 정상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성벽을 빙 둘러 마치 머리띠를 두른 것처럼

            성()을 쌓는 방식을 oo식 산성이라 하나?

[퀴즈 C-2] 산의 계곡을 포용하고, 계곡을 둘러싼 산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는 방식을

             oo식 산성이라 하나?

[퀴즈 C-3] 북한산의 산성으로 백제가 132년에 포곡식 석축산성으로 축조했으나 신라,

            고구려의 치열한 쟁탈지가 되었고 신라 진흥왕은 553년 이곳에 순수비를 세웠다

            이후 조선 숙종(1711)대규모로 축성한 이 산성의 이름은?

[퀴즈 C-4] 병자호란때 인조가 이 성에 들어가 47일간 항전하다, 끝내 삼전도(三田渡)

            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게되었다. 이 성의 이름은?

[퀴즈 C-5] 서쪽으로 한강을 끼고 충적대지상에 구축된 평지토성으로 위례성(慰禮城)으로  

            추정되고 있는 이 토성(土城)의 이름은?

[퀴즈 C-6] 한강 남쪽 성내천(城內川)의 언덕에 자리 잡은 토성(土城)으로 서진(西晉)대 

            도기 조각이 나와 축성 시기는 3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된다. 성의 외벽은 경사 

            면을 깎아내어 급경사와 단을 만들고 두 번째 단에는 목책(木柵)을 설치한 이 

            토성(土城)의 이름은?

[퀴즈 C-7]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 한강변에 축조한 성으로 서울시 광진구

             (워커힐 호텔 뒷산에) 있는 이 석성(石城)의 이름은?

[퀴즈 C-8]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산성으로 임진왜란 당시 권율(權慄) 장군의 

            행주대첩에 큰 역할을 한 이 성()의 이름은 무엇인가?

  

A. 서울의 산() 

                      사진 및 내용 출처: 위키백과 (서울의  목록) 서울지명사전에서 가져 왔다.

 

서울의 산() 가나다순-

개운산 - 안암산, 陳石山(진석산)으로 불리며, 성북구 안암동에 있다. 개운사를 품고 있다.

개화산(開化山) - 강서구 개화동에 있는 산으로서, 주룡산, 봉화뚝이라고도 한다.

관악산 - 높이 632m인 관악산은 서울 관악, 경기 시흥, 과천, 안양에 위치하며 벼랑 위에 자리 잡은 연주대가 유명하다.

구룡산 - 높이 283.2m. 서울 서초구에 위치하며 산이 높지 않아 아침저녁으로 운동을 즐기기에 제격인 산이다.

 

굴봉산 - 구로구 오류동 개봉동에 있는 산으로서 굴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145.6m·143m·105m의 세 봉우리가 나란히 솟아 있어 삼각산이라고도 한다.

궁산(宮山) -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에 있는 산이다.

낙산 - 낙산(駱山)은 산모양이 낙타의 등과 같다고 하여 낙타산(일명 타락산)으로 불린다.

       서울시 종로구와 동대문구 성북구에 걸쳐 자리한 산으로 서울 도성의 좌청룡(左靑) 

       동산(東山)에 해당된다. 풍수지리상 서쪽 우백호의 인왕산과 대치된다.

 

남산(옛 이름은 목멱산) - 높이 262m. 서울 중구, 용산구에 위치. 옛 이름은 목멱산이다.

노고산 - 높이 106m인 노고산은 서강대학교 뒤편에 위치하며 밋밋한 구릉성의 산이다.

대모산 - 높이 293m. 서울 강남구에 위치하며 근처 아파트 주민들이 휴식공간으로 자주 찾는 산이다.

 

도봉산 - 서울 북동쪽 경계에 있으며 최고봉인 자운봉(紫雲峰 739.5m)과 만장봉(萬丈峰

          선인봉(仙人峰), 오봉(五峰여성봉 등 5岩峰과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산이다.

매봉재산 -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있으며 서리풀 공원과 이어지는 방배근린공원이 있다.

 

배봉산 - 높이 105.7m인 배봉산은 산전체가 공원으로 전농동과 휘경동에 속해 있다.

백련산 - 높이 215.5m의 백련산은 서울 은평구, 서대문구에 위치한 낮은 산으로 산내에는

          백련사가 있다. 응암동, 구파발, 홍은동 일대 주민들이 자주 찾는 산이다.

봉화산 - 높이 137,9m. 중랑구 신내동과 묵동, 중화동, 상봉동에 둘러싸여 있다.

 

북악산 - 높이 342m. 경복궁의 뒤쪽에 위치하며 산 정상을 따라 동서를 이어주는 길

         (북악스카이웨이)은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로 사랑 받고 있다.

북한산 높이 836.5m. 서울 북쪽 경계에 있으며 백운대, 인수봉, 국망봉(만경대)의 세 봉우리가 있어

          삼각산(三角山)으로 불린다. 세계적으로 드물게 수도 아주 가까이에 있는 명산으로 국립공원이다.

          인수봉은 바위 타는 사람(rock climber)의 성지이다.

불암산 - 높이 508m. 서울 동쪽 경계에 있으며 사찰로는 불암사가 있고 정상부분 전체가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다.

 

삼각산 => 북한산

삼성산 - 높이 480.9m인 삼성산은 서울 관악구, 구로구, 경기 안양시에 위치하며 원효대사가 

          의상, 윤필과 입산수도(入山修道)하였다 해서 삼성산(三聖山)이라 부른다.

성산 - 마포구 성산 제1동에 있는 산으로서, 성메, 성미라고도 한다. 산이 성과 같이 둘러있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수도산 -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산으로서, 봉은사 뒤에 있는 해발 75m의 산이다

수락산 - 높이 638m. 서울 동쪽 경계에 있으며 금류폭포와 내원암이 있는 바위 경치가 뛰어난 산이다.

 

아차산 - 높이 287m. 서울 중랑구와 경기 구리시에 위치하며, 삼국시대의 전략 요충지로

          온달장군의 전설이 전해 온다. 대성암, 석곽분, 봉수대 등이 있다.

안산 - 높이 295.9m인 안산은 무악산(毋岳山)으로 불리며,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하여 서울 시내가

        한 눈에 보이며 봉원사와 봉수대가 있다.

연희산(연희고지) - 서대문구 연희 제1,2동에 있는 높이 88m, 65m, 104m의 고지를 통틀어 일컫는다.

오패산(=벽오산) - 강북구 번동, 미아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 매봉짜, 빡빡산이라고도 한다.

와룡산 - 구로구 궁동에 있는 산으로서, 항굴 앞산으로 소가 누운 형상인 데서 유래된 이름 이다.

         궁동산, 궁동와룡산이라고도 한다.

와우산 - 마포구 서강동에 있는 산으로 홍익대학교 뒷산이다. 소가 누운 모양의 산이다.

 

용마산 - 높이 595.7m. 경기도 광주에 위치하고 있지만 교통이 편리해 찾는 사람이 많다.

용왕산 - 높이 해발 78m로 옛날에는 엄지산(嚴知山)이라고 불렸다. 양천구 목동에 있다.

우면산 - 높이 293m로 서울 서초구, 과천시 경계를 이루며 예술의 전당 뒤편에 있다.

우장산 - 높이 98.9m로 화곡5동 및 화곡6동 및 발산2동에 걸쳐 분포해있는 화곡동의 진산(鎭山)이다.

응봉산 - 응봉산은 성동구 응봉동에 자리한 해발81M의 산이지만 남쪽으로 한강을 내려다 보이고

          봄이면 온통 개나리꽃의 향연을 볼 수 있는 개나리동산이다.

인릉산 높이 327m. 순조의 능인 인릉의 朝山이 되는 데서 유래된 이름으로.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다.

인왕산 - 높이 338.2m의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하는 산으로 바위가 아름답고 정상에서 보는 (서울)도시 풍경이 멋지다

         풍수지리상 서쪽 우백호(右白虎)에 해당한다.

일자산 - 일자산(一字山)은 서울특별시 강동구, 경기도 하남시 경계에 있는 산이다.

    

천마산 - 높이 144.4m인 천마산은 서울 마천동과 하남시 사이에 위치하며 면적은 174,710 이다.

          정상에서 송파구 일대가 한눈에 들어와 전망이 좋다.

청계산 - 높이 618m. 서울 남쪽 경계(서울 서초구, 경기 과천시, 의왕시, 성남시), 정상에서

          과천 서울대공원, 서울랜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경마장이 한눈에 보인다.

청량산 - 높이 480m. 하남시와 광주군 사이에 위치하며, 산 안에 남한산성도립 공원이 위치하고 있다.

 

탑산 - 강서구 가양동에 있는 산으로서, 탑이 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호암산 - 높이 390m로 관악산 전체의 서쪽에 위치한다. 금주산, 금지산이라고도 한다.

         산세가 호랑이 형상을 닮아 일명 호암산(虎巖山)이라고도 한다.

 

화장산 - 동작구에 있는 국립현충원의 주산으로서, 공작봉이라도 한다.

 

B. 서울의 하천(河川)

서울시 안에 있는 하천은 모두 35개이다.

내용 참조 한 곳: <서울의 역사와 문화> 홈페이지 링크주소: http://history.seoul.go.kr

 

서울시 안에 있는 하천은 모두 35개이다. 이 가운데 국가 하천은 한강, 중랑천, 안양천 3개가 있고 지방 1급 하천으로는 청계천이 있다. 나머지 31개의 하천은 모두가 지방 2급 하천이다. 31개의 크고 작은 지방 2급 하천들은 북쪽과 남쪽으로 흘러 한강으로 합류하여 서해 바다로 들어간다.


그러나 서울시에 있는 총 31개의 지방 2급 하천 가운데 하천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하천들이 많다. 이미 완전히 복개가 된 하천으로는 만초천, 면목천, 월곡천, 녹번천, 봉원천, 삼성천이 있으며 홍제촌, 도림천 등은 반복개(半覆蓋) 상태이다.

 

서울의 하천     

 그림참조 링크: https://50plus.or.kr/upload/im/2018/05/c0b0f18c-3ab3-4a60-b99e-603bcad1d0ab.jpg

 

서울에 있는 하천들을 한강을 중심으로 나눠보면..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

(서울)북동쪽에 위치: 도봉천, 방학천, 당현천, 우이천, 대동천, 가오천, 화계천, 월곡천,

(서울)동쪽에 위치: 묵동천, 면목천, 전농천, 중랑천,

(서울)중앙에 위치: 청계천

(서울)정북쪽에 위치: 정릉천, 성북천, 삼청천

(서울)서북쪽에 위치: 홍제천, 봉원천, 만초천, 녹번천, 불광천, 난지천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

(서울)남동쪽에 위치: 고덕천, 성내천, 여의천, 양재천, 세곡천, 탄천

(서울)남쪽에 위치: 반포천, 사당천, 샛강

(서울)남서쪽에 위치: 대방천, 봉천천, 신림천, 도림천, 오류천, 시흥천,

목감천(개화천), 안양천

   

지방1급 하천 : 1개소 (청계천)

지방2급 하천 : 31개소  (갈색은 한강 북쪽에 ,분홍색은 한강 남쪽에 위치)
- 한강 수계 : 홍제천, 봉원천, 반포천, 탄천, 성내천, 고덕천
- 중랑천 수계 : 도봉천, 방학천, 당현천, 우이천, 목동천, 면목천, 전농천
- 안양천 수계 : 개화천(목감천), 도림천, 시흥천
- 청계천 수계 : 성북천, 정릉천
- 홍제천 수계 : 불광천
- 반포천 수계 : 사당천
- 탄천 수계 : 양재천, 세곡천
- 우이천 수계 : 화계천, 가오천, 대동천
- 도림천 수계 : 대방천, 봉천천
- 개화천 수계 : 오류천
- 정릉천 수계 : 월곡천
- 불광천 수계 : 녹번천
- 양재천 수계 : 여의천

 

중랑천(中浪川)  내용출처: 중랑천-서울지명사전

경기도 의정부시 수락산 북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양주군에서는 광사천, 어둔천과 합류되고, 의정부시에서는 부용천, 백석천, 회룡천, 호원천 등의 지류와 합류되어 서울특별시로 유입되어 총 14개 지류를 합류하여 한강으로 유입되는 국가하천이다. 

 

서울 정릉천과 서울 북동쪽의 미아동, 수유동, 우이동, 도봉동과 노원구 지역의 물도 합류되고 사근동에서 청계천과 합류(14개 지류)한 뒤, 금호동과 성수동의 강변북로 교량 아래에서 한강에 합류된다. 서울에서는 성북구, 강북구, 도봉구, 노원구, 중랑구, 동대문구, 성동구 등 7개구를 거치는 동안 각 행정자치구의 자연스런 경계 역할을 한다. 과거 중랑천은 도봉동에서는 서원천(書院川)’, 상계동 부근에서는 한강의 새끼 강이라는 뜻으로 샛강이라고 불렸다.

 

청계천(淸溪川)  내용출처: 청계천-다음백과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북악산인왕산의 부근에서 발원하여 시가지 중심부를 서쪽에서 동쪽

으로 통과하여 중랑천으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청계천에는 모두 24개의 다리가 있었는데 광교(廣橋)수표교(水標橋)관수교오간수교(五間水橋) 등이 유명하였다. 그 중 수표교는 수위 측정을 위한 수표석(水標石)과 함께 유명하다. 수표석(水標石)197310월에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졌다.

 

청계천 다리에는 조선 시대 전설과 풍류를 말하는 세시풍속이 있는데 연날리기와 답교(踏橋)는 특히 유명하다.

 

탄천(炭川)    내용출처: 탄천-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기도 용인시 법화산에서 발원해 성남시와 서울특별시 강남구·송파구를 지나 서울 종합운동장 근처에서 한강으로 유입되는 하천이다. 탄천은 성남시의 옛 지명인 탄리(炭里)에서 비롯되었다. 탄리는 지금의 성남시 태평동·수진동·신흥동 등에 해당하는 곳으로 과거에는 독정이·숯골 등의 마을이 있었다. 조선 경종 때 남이(南怡) 장군의 6대손인 탄수(炭叟) 남영(南永)이 이곳에 살았는데, 그의 호 탄수에서 탄골 또는 숯골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안양천(安陽川)     내용출처: 안양천 -서울지명사전

길이는 35.1이고 서울의 한강지류 가운데 중랑천 다음으로 규모가 크다. 갈천, 앞개울, 대천, 인덕원천(상류), 학고개천(중류), 기탄, 오목내(하류)라고도 한다.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청계산 서남쪽에서 발원하여 왕곡천과 오전천을 합류한 후 군포시를 거쳐, 다시 당정천과 산본천, 호계천을 합류한 후 안양천 지류 가운데 두 번째로 큰 유역면적을 가지고 있는 학의천을 만난다.

 

다시 수리산에서 발원한 수암천과 합류하고, 다시 삼성천을 만나고 시흥시 수암리에서 발원한 목감천을 만나고 서울특별시 경계를 넘어서는 도림천과 합류한 뒤 양화동 서쪽 끝에서 한강으로 들어간다.

 

C. 서울의 성()들    참조할 만한 홈페이지: 한강사업본부www.seoul.go.kr

 

-(알림)- 이하 내용은 해당 참조 링크에서 가져 온 것으로 내용을 편집 가감하였다.

 

산성의 축조 방식

테뫼식(山頂式) 산성: 산 정상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성벽을 빙 둘러 마치 머리띠를  두른 것처럼 성을 쌓은 것.

포곡식(包谷式) 산성: 산의 계곡을 포용하고, 계곡을 둘러싼 산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는 방식의 산성

 

북한산성    참조링크1:북한산성 다음백과 , 북한산성 -사진출처 위키백과

 

-사진출처- 위키백과

북한산성(北漢山城)은 북한산에 쌓은 산성이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산1-1번지에 위치한다.

북한산성(北漢山城)은 북한산성은 백제가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뒤 도성을 지키기 위해 쌓은 포곡식 석축산성으로 132년에 축조했다. 고구려, 신라의 치열한 쟁탈지가 되었고 신라는 553년 이곳에 진흥왕순수비를 세웠다. 이후 고려 현종이 성을 증축했으며 숙종(1711년)때 대규모의 축성 공사를 실시해서 석성을 완성했다.

 

현재 삼국시대 토성은 약간 남아 있을 뿐이고, 대부분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이 남아 있다. 14개의 문, 3개의 장대와 함께 유사시 어가를 북한산성으로 옮길 행궁을 건립하였다. 둘레가 7,620()이다.

 

지형에 따라 성벽 없이 여장(女檣)만 쌓은 곳도 있는데, 그 길이는 1,457보이다. 여장(女檣)이란 성벽 위에 설치한 낮은 담장으로 적을 관측하고 공격하면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 진 것으로 여자도 넘을 수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탕춘대성(蕩春臺城)     내용 및 사진 출처: 홍지문 및 탕춘대성 -위키백과

탕춘대성 암문(暗門) -사진 출처: 위키백과 -

홍지문 및 탕춘대성(弘智門 蕩春臺城)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1976623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

 

탕춘대성은 인왕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북쪽의 능선을 따라 내려가다가 사천을 지나 북한산 서남쪽의 비봉 아래까지 연결하여 축성한 산성이다. 이 산성의 명칭을 탕춘대성이라고 한 것은 현재 세검정이 있는 동쪽 약 100m 되는 산봉우리에 탕춘대(蕩春臺)가 있었던 것에서 연유한 것이며, 한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성(西城)이라고 하였다.

 

조선왕조 숙종은 왕 37(1711)에는 북한산성을 축성하였고 다시 탕춘대성을 축조하였다. 탕춘대성 전체의 길이는 약 4km 이었고 성내에 연무장(鍊武場)으로 탕춘대 터(오늘날 서울세검정초등학교)에 연융대(鍊戎臺)를 설치하는 한편, 비상시를 대비하여 선혜청(宣惠廳) 창고와 군량창고인 상·하 평창(平倉)을 설치하였다. 그 후 탕춘대성의 축성과 함께 그 성안을 총융청(摠戎廳) 기지로 삼고, 군영도 배치하였다.

 

현존하는 탕춘대성은 도성이나 북한산성과 같이 주 성벽과 여장(女墻)을 쌓았으며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일정한 간격으로 성구(城口)를 뚫어 놓았다. 현재 홍지문이 복원되어 있고, 상명대학교 북쪽으로 성곽이 남아있다.

 

남한산성(南漢山城)     내용 출처: 남한산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남한산성 서장대(일명 守禦將臺) 사진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남한산성(南漢山城)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시기에 축조되어 조선시대 수도 한양을 지키던 성곽이다. 흔히 북한산성(北漢山城)과 함께 조선의 도성인 한양의 방어를 위하여 쌓은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성벽의 바깥쪽은 경사가 급한데 비해 안쪽은 경사가 완만하여, 방어에 유리하면서도 적의 접근은 어려운 편이다. 봉암성(蜂巖城), 한봉성(漢峰城), 신남성(新南城) 3개의 외성과 5개의 옹성도 함께 연결되어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성벽과 성 안에는 많은 시설물과 건물이 있었지만, ··남문루와 장대(將臺돈대(墩臺((암문·우물 등의 방어 시설과 관청, 군사훈련 시설 등이 있다.

 

남한산성의 수비는 총융청이 맡아 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다. 여기에는 전····후의 5(五管)이 소속되었는데 전영장(前營將)은 남장대(南將臺), 중영장은 북장대에, 후영장과 좌영장은 동장대에, 우영장은 서장대에 진을 치고 있었다. 지금은 서장대(일명 守禦將臺)만 남아 있다

 

남한산성의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게 인정되어 20146월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신규 등재되었다.

 

'삼전도(三田渡)의 굴욕'      관련 링크: 삼전도의 굴욕 - 나무위키

1637224(인조 15년 음력 130)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일으키고 한양으로 빠르게 남하하자 조선의 왕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 하였다. 하지만 청군이 길을 막아 강화도로 갈 수 없게 되었고 이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한다.

 

그러나 남한산성에 피신하였던 백성들이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힘들어하는 상황과 성내의 물자가 떨어지자 47일간 대항하였지만 끝내 청나라와 치욕스러운 강화(말이 강화조약이지 항복이나 다름없었다)를 맺으니 이를 삼전도의 굴욕이라 한다. 삼전도(三田渡)는 서울시 송파구 삼전동에 있었던 나루로 삼밭나루라고도 불렸다.

 

인조는 세자와 신하들을 이끌고 남한산성 문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의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며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풍납토성(風納土城)     내용출처: 풍납동토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흔히 풍납토성(風納土城)=풍납동토성(風納洞土城)이라고도 하는 데 삼국사기백제본기(百濟本紀)에 나오는 위례성(慰禮城)으로 추정하는 견해이다. 또한, 평고성을 풍납토성으로 보고, 이 성이 서울 광진구 광장동 뒷산에 있는 아차산성(阿且山城)과 연결되어 방어적 기능을 담당했던 성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서북쪽으로 한강에 직면하고 있고, 강 맞은편에는 아차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남쪽으로 성내천을 사이에 두고 2.5km 거리에 몽촌토성이 있으며, 동쪽으로 이성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풍납토성은 서쪽으로 한강을 끼고 충적대지상에 구축한 순수 평지토성으로 약간 동쪽으로 치우친 남북 장타원형을 띠고 있다. , 북벽과 남벽은 짧은 벽으로 직선에 가깝고, 동벽과 서벽은 단벽에서 둔각을 이루며 꺾이는데, 그중 동벽은 중앙부가 완만한 형태를 띠고 있다.

풍납토성은 현재 북벽과 동벽, 남벽 등 일부가 약 2.1정도가 남아 있으며, 유실된 서벽을 포함한다면 전체 길이 3.5에 달하는 거대한 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몽촌토성(夢村土城)     내용출처: 서울몽촌토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풍납토성과 함께 백제가 성립된 시기에 만들어진 도성(都城)이다. 성벽 조사에서 출토된 중국 서진(西晉)대 전문 도기 조각이 나오므로 토성을 축조한 연대의 상한은 3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된다.삼국사기등에 기록된 것처럼, 고구려의 남진에 의해서 한성(漢城)이 함락되고 웅진으로 천도하였던 475년까지 백제의 도성으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판축 성토에 의한 토성 축성은 백제 한 성기를 중심으로 한 백제 토성의 유형과 축성 방법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기준으로 알려져 있다. 몽촌토성은 한강 남안 성내천(城內川)을 끼고 있는 언덕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성의 외벽은 언덕 경사면을 깎아내어 급경사와 단을 만들고 두 번째 단에는 목책(木柵)을 설치하였다. 현재 목책은 본성의 서북벽·동벽과 외성 등 3곳에서 확인되었는데, 생토암반층에 큰 나무를 박아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 보조기둥을 세웠다. 목책의 높이는 2m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이 목책은 발굴 조사된 원래의 목책 기둥 자리를 따라 그 위에 추정 복원한 것이다.

 

몽촌토성의 북쪽 기슭에는 1992년 몽촌역사관이 건립되어 한강 유역을 포함한 백제문화의 대표적인 유적과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암사동·명일동·역삼동의 선사시대 주거지와 가락동·방이동·석촌동의 고분군, 몽촌토성의 유적 모형과 출토 유물을 전시하여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아차산성(阿嵯山城)      내용출처: 아차산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서울특별시 광진구에 있는(워커힐 호텔 뒷산에 있는) 아차산의 경사진 산허리 윗부분을 둘러쌓은 테뫼식(山頂式) 산성으로. 삼국시대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 축조한 성이다.

 

아차산성(阿嵯山城)은 아단성(阿旦城장한성(長漢城광장성(廣壯城) 등으로 불리는데 <광개토왕비문>의 영락 6년조에 광개토왕이 백제로부터 공취한 58성 가운데 아단성의 이름이 보인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이끈 군대가 백제의 한성을 함락시킴에 따라 개로왕이 생포되어 아단성 아래서 처형되었다. 이렇게 아단성은 고구려 군대가 주둔한 군사진지였으며, 그 뒤 77년간 한강 유역을 통치한 고구려의 전방기지로서 기능하였다.

 

또 조선 후기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아차산에는 양진성과 아차산고성이라는 2개의 성곽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양진성은 나루를 방비하기 위한 성곽으로 현존하는 유구나 문헌자료를 통해 볼 때 아차산의 지봉(芝峰)을 따라 광나루 북방에 위치한 광진성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아차산고성은대동여지도에 보이는 망우리 쪽 아차산에 소재하고 있는 성곽을 아차산고성의 유지(遺址 남은 터)로 보고 있다.

 

아차산성은 석축성으로 기본 형태는 테뫼식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산 정상부를 돌아가며 축성한 테뫼식과는 달리 아차산 능선 말단부의 남쪽 지역을 적절히 이용하여 작은 계곡이 포함되도록 함으로써 성 내에 우물과 작은 계곡이 흐르는 포곡형 산성에 가까운 형태이다.

 

한편 장한성의 유구(遺構 남아 있는 구조물)는 본래 뚝도 부근의 한강변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고지를 따라 아차산에 이르고 다시 망우리에 이르는 산줄기를 따라 용마봉에 못 미치는 벼랑바위산에 이르기까지 산마루를 따라 석성 터가 있으며, 구리시 아천동까지 그 유구가 나타난다. 이를 장성 또는 장한성이라 하는 데 신증동국여지승람한성부 고적조에 '장한성이 한강 위에 있는데 신라 때 여기에 중요한 진영을 두었으며 고구려에 의해 점령당하였다가 군사를 동원하여 수복하고, 장한성가(長漢城歌)를 지어 그 공을 기리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성은 산 정상이나 산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토성이나 석성이 아니고 산 정상을 지나 등선을 따라 일직선 형태로 축조된 성벽으로 하남시 춘궁리에 있는 이성산성과 축성양식이 같은 신라시대의 산성으로 특히 삼국통일 전쟁 수행을 위한 북진기지 가운데서도 군사적 요충으로 추정된다.

 

행주산성((幸州山城)     내용출처: 행주산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행주산성은 삼국시대부터 토축(土築) 산성이 있었다. 행주산성이 처음 축성된 것은 통일신라시대(78세기경으로 추정)로 추정하고 있다. 강안(江岸)의 돌출된 산봉우리를 택하여 산 정상부를 에워싼 소규모의 내성(內城)과 북쪽으로 전개된 작은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外城)의 이중구조를 하고 있으며 둘레가 약 1,000m.

 

백제의 초기 영역에는 서해안으로의 수운(水運)과 관계된 중요한 거점이었으며, 특히 나당전쟁(羅唐戰爭) 때까지 남북교통의 요충에 해당하여 고구려와 신라의 공방전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행주(幸州) 산성은 해발 124.8m의 덕양산의 해발 70100m에 이르는 능선을 따라 축조되어 있는 테뫼식(山頂式) 산성으로, 남쪽은 한강이 연하여 있고, 동남쪽으로는 창릉천(昌陵川)이 산성을 돌아 한강으로 흘러들고 있어 자연적인 해자(垓字)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산성의 동남쪽과 남쪽 일대는 자연 경사가 매우 급하여 자연적인 요새로서의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 행주산성에서 조선시대 임진왜란(권율(權慄) 장군의 행주대첩) 당시 부녀자들까지 동원되어 관민(官民)이 일치단결하여 싸웠다. 특히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서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여기에서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 행주대첩으로 인하여 조선군과 명나라 군사가 사기를 회복하여 왜적을 남으로 쫓고 정부가 환도(還都)하게 되었으니 그 의의는 실로 크다 하겠다.

 

호암산성(虎巖山城)   내용출처1: 서울호암산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내용출처2:한강의 어제와 오늘 (서울시사편찬위원회 발간, 2001.10.)수록내용 발췌함

호암산성(虎巖山城)은 금천구 시흥2동 산 93번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리상으로 서울의 남서쪽에 해당된다. 산성의 입지조건으로 볼 때 호암산성은 안양 금천 일대의 평야를 관할하는 요새지로서 서쪽의 해안과 북쪽으로 침입하는 적에 대한 공격과 방비를 위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해발 347m의 조그만 봉우리를 최고봉으로 하는 산 정상의 성 내부는 비교적 평탄지형을 이루고 있다. 유적의 동쪽으로 직선거리 약 2km 지점에 해발 629m의 관악산 정상인 연주대가 위치하고, 동남방 1km 지점에 해발 460m의 삼성산 정상이 위치하고 있다.

 

문무왕 12(672)'한산주에 주장성(晝長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주목된다. 출토된 유물·유적과 지리적 입지조건을 바탕으로 문헌기록과 비교 검토한 결과, 호암산성의 축성 시기는 문무왕 12년경으로 보고 있다. 신라가 당나라와의 전쟁 때 한강을 넘어 수원 지역으로 내려가는 육로와 남양만으로 침입하는 해로를 가장 효과적으로 방어 공격하기 위해 세워진 요새지였다고 하겠다.

 

또한 호암산성 발굴에서 통일신라시대 이외에 고려시대의 유물도 많이 출토되었고, 임진왜란 당시 한성 수복을 위해 행주산성과 연합한 전라병사 선거이(宣居怡) 장군이 인솔하는 조선 군사들이 주둔한 곳이기도 하다.

 

[ 요약 퀴즈 ]

[퀴즈 C-4] 병자호란때 인조가 이 성에 들어가 47일간 항전하다, 끝내 삼전도(三田渡)

            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게되었다. 이 성의 이름은?

[퀴즈 C-5] 서쪽으로 한강을 끼고 충적대지상에 구축된 평지토성으로 위례성(慰禮城)으로  

            추정되고 있는 이 토성(土城)의 이름은?

[퀴즈 C-6] 한강 남쪽 성내천(城內川)의 언덕에 자리 잡은 토성(土城)으로 서진(西晉)대 

            도기 조각이 나와 축성 시기는 3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된다. 성의 외벽은 경사 

            면을 깎아내어 급경사와 단을 만들고 두 번째 단에는 목책(木柵)을 설치한 이 

            토성(土城)의 이름은?

[퀴즈 C-7]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 한강변에 축조한 성으로 서울시 광진구

             (워커힐 호텔 뒷산에) 있는 이 석성(石城)의 이름은?

[퀴즈 C-8]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산성으로 임진왜란 당시 권율(權慄) 장군의 

            행주대첩에 큰 역할을 한 이 성()의 이름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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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 퀴즈 답 ]

A. 서울의 산()

[퀴즈 A-1] 서울 도심 바로 남쪽에 있는 남산(南山)옛 이름은? .=> 목멱산(木覓山)

[퀴즈 A-2] 서울 북쪽에 있는 서울의 진산(鎭山) 불리는 산의 이름은? .=> 북한산

[퀴즈 A-3] 서울 북동쪽에 있는 5개의 암봉(岩峰)이 아름다운 이 산은? .=> 도봉산

[퀴즈 A-4] 서울 남쪽에 있는 화강암 산으로 풍수상 불()산인 이 산은? .=> 관악산

 

B. 서울의 하천(河川)

[퀴즈 B-1] 서울 도심을 통과하면서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하천의 이름은? .=> 청계천

[퀴즈 B-2] 서울 정릉천과 서울 북동쪽 미아동, 수유동, 우이동, 도봉동과 노원구 지역의

            물이 사근동에서 청계천과 합류되어 한강에 합류되는 하천은? .=> 중랑천

[퀴즈 B-3] 용인시, 성남시를 거쳐 종합운동장 옆 한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 탄천

[퀴즈 B-4] 경기도 의왕시, 군포시를 거쳐 산본천, 호계천과 합류하고, 시흥 목감천과

            합류하고 도림천과 합류 후 한강으로 들어가는 하천의 이름은? .=> 안양천

 

C. 서울의 성()

[퀴즈 C-1] 정상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성벽을 빙 둘러 마치 머리띠를 두른 것처럼

            성()을 쌓는 방식을 oo식 산성이라 하나? .=> 테뫼식(山頂式)

[퀴즈 C-2] 산의 계곡을 포용하고, 계곡을 둘러싼 산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는 방식을

            oo식 산성이라 하나? .=> 포곡식(包谷式) 산성

[퀴즈 C-3] 신라 진흥왕이 순수비를 새웠던 산의 이름은? .=> 북한산성

[퀴즈 C-4] 병자호란때 인조가 이 성에 들어가 47일간 항전하다, 끝내 삼전도(三田渡)

              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게되었다. 이 성의 이름은? .=> 남한산성

[퀴즈 C-5] 위례성(慰禮城)으로 추정되고 있는 토성(土城)의 이름은? .=> 풍납토성

[퀴즈 C-6] 한강 남쪽 성내천(城內川)의 언덕에 자리 잡은 토성(土城)으로 서진(西晉) 도기 조각이 나와

            축성 시기는 3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된다. 성의 외벽은 경사면을 깎아내어 급경사와 단을 만들고

            두 번째 단에는 목책(木柵)을 설치한 이 토성(土城)의 이름은? .=> 몽촌토성

[퀴즈 C-7]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 한강변에 축조한 성으로 서울시 광진구 (워커힐 호텔 뒷산에) 있는

            이 석성(石城)의 이름은? .=> 아차산성

[퀴즈 C-8]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산성으로 임진왜란 당시 권율(權慄) 장군의 행주대첩에 큰 역할을 한

            이 성()의 이름은 무엇인가? .=> 행주산성

  (계속)

 

서울(한양) 탐구05-조선시대 한양(서울)지도, 한양도성(성곽)4대문, 4소문



 

(배경 영상,음악)  수제천(壽齊天)-국립국악원-

    추후 링크가 끊어지면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 나올 수도 있으며,

    아래 음악이나 동영상 보려면 ▷클릭, 멈추려면 stop □ 버튼 클릭.    

    아래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보이면  https://www.youtube.com/embed/OANnUZVjfLE<=요걸 클릭

 



 

* 본문 중 밑줄 친 링크는 본문 내용을 가져오거나 참고한 곳으로 필요시 밑줄 친 link를 클릭. , 밑줄 친 링크는 현재는 연결되지만 추후 링크 주소 변경되면 연결이 안 될 수도 있음.

 

<참조한 주요 링크>

1. 조선시대 서울의 옛지도- https://blog.daum.net/sonsang4/13741884

2. 서울 성곽 일주하기(한 바퀴 돌기):

    참조링크2-1: 서울성곽   참조링크2-2 성곽둘레길:서울한양도성

    참조링크2-3: 서울의 성곽 상세 참고자료(PDF): 서울의 성곽 -WebViewer (seoul.go.kr)

3. 사대문(四大門) 참조자료3-1: 사대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자료3-2: [조선시대] 4대문-한국역사해설진흥원

4. 사소문(四小門) 참조한 자료 및 내용 출처: 사소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잠깐 퀴즈! -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주요 산, 도성(성곽)4대문, 4소문에 대한 퀴즈.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 퀴즈-D ]

1.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동서남북의 주요 산 이름(조선시대 불렸던 이름)?

    ①북쪽 산 동쪽 산 남쪽 산 서쪽 산

2. 한양도성의 주요 출입구였던 4대문의 이름은? (, 북쪽은 별로 통행하지 않음)

    ①북쪽 문 동쪽 문 남쪽 문 서쪽 문

3. 한양도성의 (4대문 말고) 소규모 출입구였던 4소문의 이름은?

    ①동북쪽 문 동남쪽 문 남서쪽 문 서북쪽 문

 

(알림)

이하 내용은 위에 소개한 참조 링크 및 본문 내용에 링크된 참고 자료에서 가져온 것이며 항목과 내용 일부는 편집, 가감된 것도 있음.

 

조선시대 한양의 모습이 담긴 지도

「경도오부 북한산성부도(京都五部北漢山城附圖)」-조선 영조 7(1731)년 경,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내용 출처: 조선시대 서울의 옛지도- https://blog.daum.net/sonsang4/13741884

   

경복궁을 비롯한 주요 궁궐, 육조 및 4大門, 4小門 위치, 서울을 둘러싸는 주요 산과 성곽, 외곽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길들이 그려져 있다.  

도성도(都城圖)」(부분) -조선 영조 26(1750)년 경 제작,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도성 안팎의 주요도로는 굵은 붉은 선으로, 간선도로는 가는 붉은 선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북악산과 인왕산 기슭에서 흘러 내려오는 하천들과 다리 명칭들이 표시되어 있다. 석주(石柱)만 남아있는 경회루 등 임진왜란 이후 복구되지 않은 경복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 성곽 일주하기(한 바퀴 돌기): 참조 링크1: 서울성곽   참조 링크2:서울한양도성

                                  참조링크3: 서울의 성곽 상세 참고자료(PDF): 서울의 성곽 -WebViewer (seoul.go.kr)

출처 및 저자: 서울시 간행물-서울특별시사 편찬위원회

 

한양 도성 성곽은 둘레 약 17로 조선왕조가 수도를 방어·수호하기 위해 쌓은 성곽으로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산은 북쪽의 백악산(白嶽山 링크:백악산-오늘날 북악산)을 시작으로 동쪽의 낙산(駱山 링크:낙산-낙타같이 생긴 산), 남쪽의 목멱산(木覓山 링크:목멱산-남산의 옛 이름),, 서쪽의 인왕산(仁王山 링크:인왕산)이 한양(서울) 중앙부를 둘러싸고 있다.

 

한양 도성의 성곽은 이들 4개의 산을 연결한 구간과 숙종 때 축성된 탕춘대성과 북한산성 행궁지 등을 연결한 조선시대 성곽을 말한다. 도심 바깥으로 탕춘대성, 북한산성이 서울을 둘러싸고 있고 홍지문(弘智門)蕩春臺城(탕춘대성)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출처:홍지문 및 탕춘대성

 

한양도성 성곽 둘레길

한양(서울)도성 성곽 둘레길

- 성곽 둘레길 참조 링크모음 

 [한양도성 백악구간] http://rblr.co/0ZVfb     [한양도성 낙산구간http://rblr.co/0ZVfi

 [한양도성 목멱구간] http://rblr.co/0ZXDC    [한양도성 인왕구간] http://rblr.co/0ZXDb

 [탕춘대성http://rblr.co/0ZcfR                [북한산성 행궁지http://rblr.co/0ZgmA

 

사대문(四大門) -요약-

조선시대 (한양) 도성에서 동쪽의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서쪽의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남쪽의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북쪽의 숙청문(肅淸門 1523년 이후 숙정문肅靖門으로 개칭) 등 사대문(四大門)이 있다.

 

서울의 4대문과 보신각에 담긴 뜻은 공자의 가르침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으로,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에 돈의문(敦義門), 남쪽에 숭례문(崇禮門), 북쪽에 홍지문(弘智門)숙정문(肅靖門), 중앙에 보신각(普信閣)이 있다.

 

유교의 오상(五常)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로 어질고, 의롭고, 예의 바르고, 지혜로움, 신뢰를 말한다.

 

사소문(四小門) -요약-

사소문(四小門)은 동북의 홍화문(弘化門, 후에 惠化門, 속칭 동소문), 남서의 소덕문(昭德門, 후에 昭義門, 속칭 서소문), 동남의 광희문(光熙門, 속칭 水口門), 서북의 창의문(彰義門, 속칭 紫霞門)을 통틀어 이르는 명칭이다. 1457(세조 3) 4소문 외에 남소문(南小門)을 개설하였다가 1469(예종 1) 폐문하였다.

 

조선시대 도성 문 내역(요약표)

구분 방위 문 이름 문화
가치
위치 용도 내용
4대문 홍인지문
(동대문)
보물1 종로
669
동쪽 관문 기가 약해 산맥의 뜻 지()를 넣었다고 함
돈의문
(서대문)
  종로구
신문로2
중국과의
관문
일제 때 철거
숭례문
(남대문)
국보1 남대문로
429
한양의
관문
궁궐에 직면한 관악산의 불기운을 막기 위해 현판을 세로로 썼다함
숙정문
(북대문)
사적10 삼청동
2-1
평상시
닫침
문을 열어놓으면 음기가 침범(풍기문란)한다 하여 폐쇄
4소문 동북 혜화문
(동소문)
성북구
동소문동
양주,포천 관문 일제 때 철거 후
1994년 복원
동남 광화문
(수구문)
중구
광희동
시신출구 1975년도 복원
서남 소의문
(서소문)
중구
서소문
  일제 때 철거
서북 창의문
(자하문)
종로구
청운동
북대문
역할
1958년 보수

 

4대문(四大門)

이하 내용과 사진은 참조자료1: 사대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자료2: [조선시대] 4대문-한국역사해설진흥원 에서 가져 왔다.

 

(동쪽)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흥인지문(=동대문) -사진 출처: 문화재청

흥인지문은 태조 때 1397(태조 6)1차 완공되었다. 1451(문종 1)에 중수를 시작하여

1453(단종 1)에 끝냈다. 이 문의 현판은 오행(五行)의 동쪽을 나타내는 인(仁)을 포함하며, 동대문 일대가 서울 도성 안에서 가장 낮은 지역으로 바로 남쪽에 청계천이 흐르고 있으므로, 땅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 1869년(고종 6) 개축하면서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고 ‘之’자를 보강하였다고 한다.

 

흥인문은 주위 지형의 열악한 조건을 보완하고자 옹성을 두른 것이 특징이다. 이 옹성은 문 앞쪽에 반달 모양으로 둥글게 축성되어 옹성 안에 들어온 적을 앞뒤에서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왜적이 가장 먼저 입성하였다.

 

(서쪽)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돈의문(敦義門) -사진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돈의문은 도성의 2차 공사가 끝나면서 다른 성문과 함께 건축되었다. 처음에는 경희궁 서쪽 언덕 지점에 위치하여 서전문(西箭門)이라 불리었다. 그러다가 1422년(세종 4) 2월에 도성을 고쳐 쌓게 되면서 서전문을 헐고 그보다 남쪽 지점에 새로 돈의문을 세웠다. 이후로 돈의문은 통칭 ‘새문[新門]’이라 불리게 되었다. 돈의문은 의주(義州) 국도의 관문으로 황해도와 평안도를 거쳐 중국으로 통하였다.

 

일제에 의해 철거되어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지금의 신문로 큰길과 정동에서 평동으로 통하는 길이 교차하는 마루턱에 위치하였다. 이괄(李适)의 난과 을미사변에 관련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남쪽)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사진 출처 : 한국관광공사

숭례문은 도성의 정문으로 청계천과 만초천(蔓草川)을 가르는 언덕에 세워져 있다. 도성 8문 가운데 가장 웅장하고 규모가 크며 서울의 얼굴 구실을 하였다. 남대문의 건축은 홍예(虹霓 Arch)와 문루 등 그 구조에 특별히 유의하였는데 1396년에 시작하여 1398년(태조 7) 2월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되었다.

 

1448년(세종 30) 숭례문의 지대를 높여 남산과 인왕산의 지맥을 연결시켜 경복궁을 아늑하게 껴안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풍수지리설과 당시의 여론에 따라 다시 건축하였다. 이때의 숭례문이 오늘에 전하는 것인데 1479년(성종 10)에 중수되었다. 한편 1962년 개수 공사 때 세종과 성종 때 개축 또는 중수한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숭례문의 현판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글씨로 전하는데, 다른 도성문과 다르게 횡액(橫額)이 아니라 종액(縱額-세로로 써진 편액)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오행사상에 따른 것으로 ‘예(禮)’자는 오행의 화(火)에 해당하는 글자인 까닭에 불이 타오르는 형상에 따라 세워서 달았다고 한다. 혹은 한양의 조산(朝山)인 한강 건너의 관악산이 오행의 화(火)에 해당되어 그 불기운이 도성을 범접하게 되므로 숭례문의 현판을 세워 맞불로 도성을 보호하고자 했다는 전설이 있다.   

 

(북쪽) 숙정문(肅靖門) 또는 숙청문(肅淸門)

숙정문(肅靖門) -사진 출처 : 두산백과

숙청문은 한양의 주산(主山)인 북악의 동쪽 마루턱에 위치하였으나 그 규모는 대문의 형식을 갖추지 못하고 소문(小門)의 규모였으며 오랫동안 문루마저 갖추지 못하였다. 숙청문의 원래 자리는 지금 자리의 약간 서쪽에 위치하였었다가 1504년(연산군 10)에 옮겨졌다. 숙청문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1413년(태종 13)에 폐문되었는데, 즉 북쪽은 음(陰)에 해당되어 이 문을 열어 놓으면 음기가 번성하여 도성 안의 부녀자들이 놀아나 풍기가 어지러워지기 때문에 문을 꼭꼭 닫아둔다고 하였다.

 

숙청문은 위치상 통행에는 거의 이용되지 않았고, 단지 장마가 지면 비 그치기를 기원하는 영제(禜祭), 즉 기청제(祈晴祭)를 여기에서 거행하였다. 또 예종 때부터는 가뭄이 들면 양기가 많은 남대문을 닫고 음기 서린 북대문을 열어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를 지냈다. 숙청문은 중종 이후 모든 기록에 ‘숙정문(肅靖門)’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현재 새로 복원한 문루에도 ‘肅靖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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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내용과 사진은 참조자료1: 사대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자료2: [조선시대] 4대문-한국역사해설진흥원 에서 가져 왔다

 

(중앙) 보신각(普信閣) 참조 자료: 보신각-위키백과-

보신각(普信閣) -사진 출처 : 위키백과

보신각(普信閣) 또는 종각(鐘閣) 서울시 종로구 관철동 종로사거리에 있는 전통 2 한옥 누각이다보신각종을 걸어 놓기 위해 만든 것으로 정면 5, 측면 4칸의 구조로 되어 있다. 1396(조선 태조 5) 창건했다가, 1869(조선 고종 6), 1979 8월에 재건했다. 보신각 터(普信閣址)라는 명칭으로 1997 1110일에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사소문(四小門)    참조한 자료 및 내용 출처: 사소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북의 홍화문(弘化門, 후에 惠化門, 속칭 동소문), 남서의 소덕문(昭德門, 후에 昭義門, 속칭 서소문), 동남의 광희문(光熙門, 속칭 水口門), 서북의 창의문(彰義門, 속칭 紫霞門)을 통틀어 이르는 명칭이다. 1457(세조 3) 4소문 외에 남소문(南小門)을 개설하였다가 1469(예종 1) 폐문하였다.

 

(동북의) 홍화문(弘化門, 후에 혜화문惠化門, 속칭 동소문)

           참조자료1: 혜화문(惠化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자료2: 화문-위키백과

혜화문(惠化門)-사진 출처 : 위키백과

홍화문((弘化門)은 혜화동에서 삼선동으로 뚫린 길 마루턱에 자리 잡아 도성에서 함경도 등 북방과 직결되는 관문이었다. 1484(성종 15) 창경궁이 완공되어 그 정문을 홍화문이라 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해 1511(중종 6) 혜화문으로 개칭하였다. 혜화문은 도성의 소문 가운데 하나였지만 대문의 구실을 하였다.

 

즉 경원가도(京元街道)가 여기서 연결되어 있었고, 북대문인 숙청문(肅淸門, 후에 肅靖門)이 항상 닫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문을 통행하였다. 그리고 여진(女眞)의 사신이 조공하기 위하여 한양에 입성할 때 이용하던 문이기도 하다.

 

처음 건립하였을 때의 문루는 언젠가 없어지고 1744(영조 20) 어영청(禦營廳)에 명하여 문루를 건축하였다. 이후 일제의 도시계획이라는 명목 아래 문루는 1928년에 헐리고, 홍예와 석문마저 1939년에 사라진 것을 1994년 길 마루턱 북쪽에 복원하였다.

 

(남서의) 소덕문(昭德門, 후에 소의문 昭義門, 속칭 서소문)    참조자료: 소의문 이야기

소의문(昭義門)= 서소문) -사진출처: 소의문 이야기 -Daum 백과

소덕문은 서소문동에서 의주로로 넘어가는 길 마루턱에 위치한다. 1472(성종 3) 예종비 장순왕후(章順王后) 한씨의 시호를 피하여 소의문으로 개칭하였다.

 

이 문은 도성 안 백성들이 죽어서 도성 서쪽으로 운구할 때 이용되는 문이었다. 서소문 밖에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시전의 하나인 칠패시전(七牌市廛)이 있어 발달하던 성업 활동의 중심무대가 되었다.

 

1396(태조 5) 건축 당시에는 다른 성문과 같이 문루가 있었으나 언젠가 없어지고 1743(영조 19) 다시 문루를 건축하였다. 1914년 일제에 의해 철거되어 서소문동이라는 지명만 남아 있다.

 

(동남의) 광희문(光熙門), 속칭 水口門 또는 시구문(屍口門)    참조자료: 광희문

광희문(光熙門= 水口門) -사진 출처 : 한국관광공사

광희문은 1396년 도성 축성 때 건축되었다. 문이름은 광명의 문을 의미하나 개천 수구(水口)에 가까운 곳에 있어 수구문이라 불렀으며, 도성 안 장례 행렬이 동쪽 성 밖으로 나갈 때 통과하는 문이어서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하였다.

 

동대문과 남대문 사이의 중구 광희동에 있어 남소문이라 할 수 있으나 따로 도성에서 한강 나루터로 바로 통하는 문이 필요하게 되어 세조 때 장충단공원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마루턱에 별도의 남소문을 건축하였다.

 

한편 명지대 홍순민 교수는  수구문에 대해서 부근으로 청계천 물길이 나가기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었다고 하는 말이 있으나 이는 억측이다. 청계천 물길은 흥인문이 더 가깝다. 수구문이란 한강으로 출입하는 문이란 뜻이다. 더구나 이 문을 그 부근에 늘 시신이 쌓여  있었다 하여 시구문(屍口門)이라 했다는 것은 일본인들의 악의적 왜곡이다. 참조 링크:  문(門) 이름에 숨은 뜻

 

그러나 남소문 건립 후 의경세자(懿敬世子 : 성종의 아버지, 德宗)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풍수 지리적으로나 실용적으로나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12년 만에 폐문되었다.

 

조선 전기 왜국 사신들은 옥수동의 한강 두모포(豆毛浦)나루를 거쳐 광희문을 통하여 인현동에 있던 지정 숙소인 동평관(東平館)에 머물렀다. 1915년경 문루가 자연 붕괴된 이래 홍예(虹蜺 Arch)만 남아 있었는데, 1975년 서울 성곽을 수축하면서 홍예 석축을 해체하여 남쪽으로 15m 이전 복원하면서 문루 12평도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서북의) 창의문(彰義門, 속칭 紫霞門)

           참조링크1:서울 창의문 자하문(紫霞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링크2:창의문  -위키백과

창의문(彰義門)=자하문(紫霞門) -사진 출처 : 한국관광공사

창의문은 의로움을 표창한다는 뜻으로 자하문(紫霞門)으로도 불렸고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도성을 축조할 때 함께 축조되었는데, 1413(태종 13) 지리도참설에 따라 일시적으로 문이 닫히기도 했다. 그러나 1422(세종 4) 숙청문과 함께 군인의 출입문으로 하였고, 궁궐의 담장 축조나 국가의 큰 공사가 있을 때 일시 열어 통행하였다.

 

1623년에는 인조반정의 반정군(反正軍)이 홍제원(弘濟院)에 집결하였다가 세검정을 거쳐 이 창의문을 열고 도성에 들어와 광해군을 쫓아냄으로써 인조 정권이 창출되었다. 1741(영조 17) 성문과 문루를 개수하면서 인조반정의 반정공신 1등에서 3등까지의 공신 이름을 새긴 현판을 걸었으며, 지금도 전해 오고 있다.

 

창의문은 서울 성곽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완형을 지니고 있으며 지금도 성곽의 일부가 연결되어 있다. 창의문 구조의 특징으로, 문 밖의 지세가 마치 지네의 형상과 같아 그 기세를 제압하고자 지네와 상극인 닭의 모형을 나무로 만들어 추녀에 매달아 놓았다.

 

[ 퀴즈-D ]

1.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동서남북의 주요 산 이름(조선시대 불렸던 이름)?

    ①북쪽 산 동쪽 산 남쪽 산 서쪽 산

2. 한양도성의 주요 출입구였던 4대문의 이름은? (, 북쪽은 별로 통행하지 않음)

    ①북쪽 문 동쪽 문 남쪽 문 서쪽 문

3. 한양도성의 (4대문 말고) 소규모 출입구였던 4소문의 이름은?

    ①동북쪽 문 동남쪽 문 남서쪽 문 서북쪽 문

 

[ 퀴즈-D 정답]

1.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동서남북의 주요 산 이름(조선시대 불렸던 이름)?

   ①북쪽 답.=> 백악산 동쪽 답.=> 낙산 남쪽 답.=> 목멱산 서쪽 답.=> 인왕산

2. 한양도성의 주요 출입구였던 4대문의 이름은? (, 북쪽은 별로 통행하지 않음)

   ①북쪽: 숙정문(肅靖門) 또는 숙청문(肅淸門)  동쪽: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③남쪽: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서쪽: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3. 한양도성의 (4대문 말고) 소규모 출입구였던 4소문의 이름은?

   ①동북쪽: 홍화문(弘化門, 惠化門, 속칭 동소문) 동남쪽:광희문(光熙門, 속칭 水口門)

   ③남서쪽: 소덕문(昭德門, 昭義門, 속칭 서소문) 서북쪽:창의문(彰義門, 속칭 紫霞門)

 

(계속)

서울(한양) 탐구04-왕과 왕족의 호칭, 내시, 궁녀, 묘호(廟號), 왕릉, 왕비릉


 

(배경 영상,음악)  장녹수 -정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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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중 밑줄 친 링크는 본문 내용을 가져오거나 참고한 곳으로 필요시 밑줄 친 link를 클릭. , 밑줄 친 링크는 현재는 연결되지만 추후 링크 주소 변경되면 연결이 안 될 수도 있음.

 

<참조한 주요 링크>

1. 왕비, 후궁의 호칭 참조링크1: 후궁 및 궁녀의 품계

2. 왕의 묘호((廟號참조링크1: 임금님의 이름과 묘호(廟號)

                     참조링크2: [조선왕 호칭/이름] ((() 묘호 차이

3. 조선왕실(선원계보) (heritage.go.kr) -국가문화유산포탈

 

* 잠깐 퀴즈! - 조선 왕과 왕족의 호칭과 묘호((廟號), 왕릉, 왕비릉에 대한 퀴즈.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 퀴즈-C ]

퀴즈1. 왕의 정실부인을 부르는 말은 무엇이며 또한 기거하던 곳을 부르는 호칭은?

퀴즈2. 왕의 정실부인(왕비)의 소생인 아들을 부르는 명칭?  

        왕의 정실부인인 아닌 후궁의 소생인 아들을 부르는 명칭은?

퀴즈3. 왕의 정실부인(왕비)의 소생인 딸을 부르는 명칭? 

        왕의 정실부인인 아닌 후궁의 소생인 딸을 부르는 명칭은?

퀴즈4. 덕혜옹주는 누구의 딸인가?

퀴즈5. 임금의 시중과 궁궐의 잡다한 일을 맡은 (거세자만이) 임명된 관리 명칭은?

퀴즈6. 임금이나 중전, 후궁을 보필하던 궁녀의 총수(우두머리) 상궁의 명칭은?

퀴즈7. 조선의 왕실이 27대 인데 이 중 장자(長子)가 왕위에 오른 분은 몇 분일까?

 

(알림)

이하 내용은 위에 소개한 참조 링크 및 본문 내용에 링크된 참고 자료에서 가져온 것이며 항목과 내용 일부는 편집, 가감된 것도 있음.

 

A.조선왕실 내용 출처 및 참조링크:  조선왕실(선원계보) (heritage.go.kr) 

조선 왕실은 왕과 왕비를 비롯해 왕세자와 왕세자빈, 왕자, 왕녀, 후궁 등이 구성원을 이룬다. 왕은 단 한명의 부인인 왕비를 두었으며, 왕비가 세상을 떠날 경우에는 그의 자리를 이어서 다음 왕비(계비繼妃)를 둔다.

 

왕비(王妃) 참조링크: 왕비-위키백과

왕비는 제후왕의 부인인 비()로서, 궁중에서 대왕대비와 왕대비 다음으로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또는 왕비를 중궁(中宮) 또는 중전(中殿)이라 부르기도 했다. 정실부인은 사별 후 재혼하지 않는 이상 단 한 명, 그 외엔 후궁으로 규정된다. 조선에서 왕비는 국왕의 비()로서 품계는 국왕과 같은 무품이었고, 내명부와 외명부의 수장이었다

 

왕세자, 왕세자빈, 대군(大君), (), 공주(公主), 옹주(翁主), 후궁(後宮)

왕의 아들 중에서 다음 대의 왕위에 오를 아들을 왕세자(王世子)라 하였고 그의 부인을 왕세자빈(王世子嬪)이라 하였다. 왕세자를 제외한 나머지 왕의 아들 중에서 왕비의 소생일 경우(嫡子적자)에는 대군(大君), 후궁의 소생일 경우에는 군()이라 하였다. 왕의 딸인 왕녀 중 왕비의 소생(嫡女적녀)일 경우에는 공주(公主), 후궁의 소생(庶女서녀)일 경우에는 옹주(翁主)라 하였다. : 덕혜옹주(참조:덕혜옹주)-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딸.

 

후궁은 사실상 왕의 부인이 아니고, 1품의 빈()부터 종4품의 숙원(淑媛)까지 품계를 받는 여관(女官)이었으며, 후궁이 되는 법은 간택 후궁이 되는 경우와 궁인 중에서 왕의 승은(承恩-여자가 임금의 사랑을 받아 밤에 동침함)을 입어 후궁이 되는 경우가 있다.

 

1897년에 대한제국으로 전환되며 왕실의 지위가 황실로 격상되어 왕을 황제, 왕비를 황후, 왕세자를 황태자, 왕세자빈을 황태자비, 왕자를 친왕이라 하였다.

 

후궁 품계

왕후(王后), 황후(皇后)는 품을 따지지 않았으며, 후궁들은 정 1~4품까지의 품이었다.

() -1품 귀인(貴人) -1품 소의(昭儀) -2품 숙의(淑儀) -2

소용(昭容) -3품 숙용(淑容) -3품 소원(昭媛) -4품 숙원(淑媛) -4

 

대원군(大院君) 참조링크: 대원군 -내용 출처 다음 백과

대원군(大院君)은 임금의 대를 이을 적자손이 없어 방계 친족이 대통을 이어받을 때, 그 임금의 친아버지에게 주던 벼슬. 즉 방계에서 왕위를 계승한 때에 그 임금의 생부에게 주는 칭호이다.

 

조선시대 전시기에 걸쳐 4명의 대원군이 있었는데, 선조의 아버지 덕흥군을 대원군으로 추존한 것이 처음이었다. 1623년 인조는 아버지 정원군을 대원군에 추존했다가 1632년 다시 원종으로 추존했다.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철종이 왕위에 옹립되었고 그의 아버지 전계군을 대원군에 추존했다.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흥선군 하응의 둘째아들 명복이 왕위에 올라 고종이 되었고 하응은 흥선대원군에 봉해졌다. 3명은 죽은 뒤에 추존되었으나, 흥선대원군만 살아 있을 때 봉해졌다. 고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조대비가 수렴청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흥선대원군이 섭정하여 국사의 모든 결정권을 가졌다. 흥선 대원군은 개항 전후 격변하는 국내외의 상황 속에서 10여 년간 권세를 누렸다.

 

내시[內侍]= 환관(宦官) 참조링크: 내시 환관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환관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궁중 잡역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고려 말기부터 국왕 측근에서 시종하는 문관인 내시(內侍)에 속하는 이들도 생겨남에 따라 그때부터 환관과 내시가 동일시되었다.

 

내시는 왕의 측근으로서 대궐 내에 상주해야 한다는 특수성 때문에 거세자만이 임명될 수 있었다. 본래는 선천적인 거세자로 충원했으나 스스로 거세하고 내시에 임명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이들도 처첩을 거느렸고 양자(養子)를 택해 가계를 이어가도록 했다. 내시의 제도는 갑오개혁을 계기로 폐지되었다.

 

궁녀(宮女) 참조링크: 궁녀

궁녀(宮女)는 왕족을 제외한 궁중 모든 여인들의 총칭을 말하는 데 궁인(宮人궁첩(宮妾내인(內人)으로도 불렸다. 보통 궁녀라 하면 상궁(尙宮)과 나인으로 분류되는 여인들을 의미한다. 궁녀는 왕이 있는 법궁(法宮, 本宮)뿐만이 아니라 제사궁(祭祀宮, 혹은 魂宮)과 별궁에 소속된 여인까지도 포함된다.

 

넓은 의미의 궁녀로 포괄되는 내역은 다음과 같다.

무수리 : 몽고말이며, 궁중 각 처소에서 막일을 담당하는 여인을 말한다.

각심이[婢子, 또는 房子] : 상궁의 처소에서 부리는 가정부·식모·침모 등의 총칭이다. 이들의 월급을 국가에서 지급했으므로 방자라고도 한다. 방자란 관청의 사환으로, 예컨대 춘향전에서의 방자와 같다.

손님 : 왕의 후궁으로서 당호(堂號)가 바쳐지고 독립 세대를 영위하는 여인의 집(후궁 집)에서 살림을 맡아하던 일종의 가정부 같은 여인이다. 대개 친정붙이이며, 보수는 후궁의 생계비에서 지출된다. 따라서 손님이라는 이름은 궁 밖에서 온 사람이라는 의미로, 무수리나 각심이와는 달리 예의를 갖춘 말이다.

의녀 : 약방 기생이라고도 한다. 약방이란 궁중 내의원(內醫院)의 별칭이며, 의녀의 소속은 내의원이지만 전신(前身)이 기생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평상시엔 궁녀들에게 침을 놓아주고 비·빈들의 해산시 조산원(助産員) 노릇을 하였다. 하지만, 궁중의 크고 작은 잔치가 있을 때에는 기생으로 변신하며 원삼(圓衫)을 입고, 머리에는 화관(花冠)을 쓰고, 손에는 색동 한삼(汗衫)을 끼고 춤을 추는 무희(舞姬)였다.

 

그리고 궁녀의 신분적 등급은 견습나인·나인·상궁의 세 종류로 나뉘며, 그 세 종류 가운데에서도 입궁 연조와 소속 부서에 따라 차등이 있었다. 같은 상궁이라도 경력에 따라 정7품도 있고 정5품도 있으며, 또 같은 정5품의 상궁도 소속 부서의 격에 따라 같을 수 없었다.

 

나인 : 궁중에서 왕족의 사생활을 시중하던 여관(女官)의 총칭으로 내인(內人)’의 전음(轉音)이다. 궁녀들은 반드시 자신들을 상궁나인이라 하여 상궁과 나인을 구분하였다. 나인과 상궁은 그들 사회에서는 차원이 다를 만큼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참조링크:나인)

 

또한, 나인 아래에는 견습나인이 있는데, 이들은 아기나인 또는 생각시로 불린다. 보통 4세부터 계례(筓禮) 전인 17세 사이의 어린이 및 소녀 나인들이다.

 

지밀·침방·수방·내소주방·외소주방·생과방·세답방·세수간·퇴선간·복이처·등촉방

지밀(至密침방(針房수방(繡房내소주방(內燒廚房외소주방·생과방(生果房세답방(洗踏房)의 일곱 부서 외에 세수간·퇴선간(退膳間복이처(僕伊處등촉방(燈燭房)의 네 부설 부소가 있다.

 

위 부서에 소속된 궁녀들을 일반 개인 가정으로 비교해보면, 지밀나인은 몸종 격으로 가장 격이 높고, 침방·수방 나인들은 침모(針母), 소주방과 생과방은 찬간(饌間)의 식모들인데, 궁중에는 무수리가 하역(下役)을 맡았다. 세답방은 표모(漂母)로서 빨래 일을 맡는데, 일반 개인 가정에서는 빨래를 보통 노비가 하고, 다리미와 다듬이질은 대개 경험이 많은 부인들이 맡는다.

 

지밀상궁[至密尙宮] 참조: 지밀상궁[至密尙宮]

조선 시대, 대전 좌우에서 임금을 모시며 잠시도 떠나지 않고 시중을 드는 상궁이다.

지밀상궁은 왕의 측근에서 항상 그림자와 같이 시위(侍衛)하여 대령상궁(待令尙宮)이라고도 했다.

 

또한, 지밀상궁 중에서 궁중 의식이나 잔치 때 왕을 비롯한 왕비·왕대비 등의 인도와 진행을 담당했던 시녀상궁(侍女尙宮)은 지밀의 서책 관리와 국상(國喪) 때 곡읍(哭泣)을 담당하기도 했다.

 

따라서 궁녀의 격은 지밀이 높고, 다음이 침방과 수방으로, 이들은 양반 부녀와 같이 치마도 외로 여며 입고 앞치마를 두르지 않고 길게 늘일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 그것은 마루 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의 성격상 소주방이나 세답방 나인같이 치마를 걷어 올릴 필요가 없기도 한 때문이다.

 

위 세 부서 외의 다른 부서는 치마를 바로 입고 앞치마를 위에 둘러 걷어 올린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각시가 있는 곳도 지밀과 침방·수방뿐이다. 나머지 부서들은 생[絲楊]을 맬 수 없으며,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다.

 

제조상궁(提調尙宮)

이러한 궁녀 사회에도 간부들이 있었는데, 총수격인 우두머리 상궁과 그 밖의 맡은 바 직책의 중요성에 따라 특별대우를 받는 궁녀들이 있었다. , 제조상궁(提調尙宮)은 큰방상궁이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많은 궁녀들 중에 어른으로 왕명을 받들고 내전(內殿)의 재산 관리를 담당했다. 또한, 아리꼬[阿里庫]상궁으로 불리는 부제조상궁은 내전의 창고(倉庫, 아랫고·下庫)의 물품을 관리했다.

 

감찰상궁(監察尙宮)

감찰상궁(監察尙宮)은 궁녀들의 상벌을 담당했으며, 감시병 구실도 겸한 두려운 존재였다. 궁궐내의 모든 궁녀들은 입궁에서 퇴출(退出)까지 원칙적으로 종신제였다.

 

그 외 왕자녀의 양육을 담당했던 보모상궁(保姆尙宮)이 있었으며, 이들 중에서 왕세자의 보모가 가장 격이 높았다.

 

궁녀의 선출

왕의 직계 및 그 배우자 외에는 후궁도 궁중에서 죽을 수 없으므로, 늙고 병들면 궁녀는 궁궐을 나가야 했다. 궁녀의 선출은 원칙적으로 10년에 한번이었지만 예외도 있었다. 지밀나인의 경우 조건이 까다로워서 상궁들이 두세 번씩 선을 보러 나갔다. 그러나 대개 연줄과 세습이라 할 수 있으며, 고모가 조카를 들여놓는 경우가 많았다.

 

궁녀의 출신 계급은 지밀과 침방·수방은 중인계급, 기타는 대개 상민계급이었다. 입궁 연령은 지밀이 가장 어려 48, 침방·수방이 613, 그 밖은 1213세가 관례였다. 궁녀는 입궁 후 15년이 되면 계례를 치르고 정식 나인이 되었다. 남색 치마에 옥색 저고리, 머리에는 개구리첩지를 단 제복이 일생 동안 그들의 복장이었다.

 

나인이 된 뒤 다시 15년이 경과되면 상궁으로 승격했으므로, 가장 빠른 45세 입궁을 기준으로 할 경우에 35세 이후라야 상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는데, 왕의 후궁이 되면 20대의 상궁도 있을 수 있었다. 이런 궁녀는 왕의 자녀를 낳기 전까지는 상궁의 신분에 머물러 있지만, 그 대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왕의 곁에서 시위만 하면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를 승은상궁(承恩尙宮)이라 했다.

 

궁녀는 원칙적으로 종신제였지만, 특별한 경우, 즉 이들이 중병이 들었을 때, 가뭄으로 궁녀 방출이 결행될 경우(, 젊은 궁녀), 모시고 있던 상전이 승하했을 경우 중도에 나갈 수도 있었다.

 

B. 왕의 명칭과 묘호(廟號)

조선 시대, 왕의 이름

이하 내용은 참조 링크: 조선 시대, 왕의 이름에서 가져 왔다.

조선 시대, 왕의 이름은 외자였다. 절대 존엄의 존재였던 왕의 이름은 함부로 말할 수도 쓸 수도 없기에 백성들의 말 사용을 배려해 잘 사용하지 않는 한자를 활용해 외자로 이름을 지었다.

 

이름과 관련한 일반 용어들

아명(兒名) : 어릴 때 정식 이름을 짓기 전에 부모가 자식을 부르는 친근한 이름.:막동

초명(初名) : 처음 이름

() : 태어날 때 받은 진짜 이름

() : 성년이 되는 관례 때 받는 이름인 관명과 함께 스스럼없이 부를 수 있도록 짓는 새로운 이름

() : 본명이나 자 이외에 따로 지어 부르는 이름 (별칭, 필명, 별호, 아호)

묘호(廟號) : 왕이 죽은 뒤 종묘에 그 신위를 모실 때 드리는 존호(尊號) 참조: 묘호

 

((() 묘호 참조링크: ((() 묘호

예기, 사기, 경국대전, 조선왕조실록 등에 공이 있는 사람은 '()'라고 하고, 덕이 있는 사람은 '()'을 붙인다고 하는 내용이 있다.

 

a. ()

1. 원칙적으로 나라를 창업한 왕에게만 사용한다. 태조는 1대 임금이므로 후대의 자손이 시조(始祖)로 삼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고려에 조()가 붙은 왕은 태조 왕건뿐이다.

 

2. 공이 있는 왕에게 조()를 붙인다.(나라를 세우거나 그에 버금가는 공을 세운 왕)

선왕의 적자가 아닌 사람이 임금이 되는 경우에 명분과 정통성을 부과하기 위해 붙인 경우가 많았다.

 

b. ()

왕위를 정통으로 계승한 왕들에게 붙이거나, 덕이 있는 왕에게 종()을 붙인다. 혹은

별다른 위기 없이 태평성대를 누린 경우에 붙인다.

 

c. ()

폐위된 왕은 자격을 박탈당하여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왕자시절의 호칭으로 불리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이 아니라, 연산군일기, 광해군일기에 따로 기록된다.

- 연산군: 중종반정으로 폐위

- 광해군: 인조반정으로 폐위

 

조선의 왕에 조()가 붙은 이유

나라를 창업한 왕이나 나라의 정통이 중단되었다가 다시 일으킨 왕에게 '()'를 쓴다. 그래서 조()가 종()에 비해서 격이 높다고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반정이나 찬탈을 통해 왕위에 오른 경우, 이를 정당화하려는 수단의 하나로 이용되면서 후손(아들)'()'에서 '()'로 추숭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외에도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쓰이기도 했다. 참고로, 중종의 경우에도 연산군을 몰아낸 공으로 묘호를 '중조'로 하자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

 

왕의 호칭(묘호)

묘호는 죽은 왕의 위패를 모시는 종묘에 올리는 이름이다. 따라서 왕이 생존해 있을 때는 묘호가 없었고,'주상', '전하', '상감' 등으로 불렸다. 왕의 3년 상을 치른 후, 왕과 고위 관료들이 묘호를 정한다. 왕의 업적을 한글자로 표현하여 신주를 종묘에 모셨다.

 

연산군과 광해군처럼 폐위되어 신주가 종묘에 들어가지 못한 왕들은 죽어서도 왕 대접을 받지 못하고 왕자 신분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종묘에 그 신위가 오르지 못했으며 따라서 묘호 또한 없으므로 단지 그들이 쫓겨난 이후나(연산군) 세자 시절에(광해군) 받은 군호로 불리고 있다. 조선조 2대 임금 정종과 6대 임금 단종은 오랫동안 묘호를 정하지 않고, 몇 백 년 동안 공정왕과 노산군으로 불리다가, 숙종 때 와서 그들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면서 비로소 정종과 단종이라는 묘호를 얻었다.

 

묘호의 예:

· 문종(文宗): 학문에 뛰어난 왕 · 성종(成宗): 제도 정비를 완성시킨 왕

· 세종(世宗): 태평성대를 이룩한 왕 · 인조(仁祖): 어진 왕

· 중종(中宗):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왕 · 태조(太祖): 나라를 세운 왕

· 태종(太宗): 나라의 기틀을 다진 왕 · 효종(孝宗): 효성이 지극한 왕

 

왕의 호칭에는 묘호 외에도 사후에 중국 황제가 지어 보내주는 시호(諡號)라는 것이 있고, 또 신하들이 그 왕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해 지어 올리는 휘호(徽號) 혹은 존호(尊號)라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태조(이성계)의 정식 호칭은 '태조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었는데, '태조'는 묘호, '강헌'은 시호, '지인계운성 문신무'는 휘호(존호)에 해당한다.

 

능호(陵號)

()’ 은임금의 무덤을 지칭하는 호칭하는 데 능은 구릉이란 의미로 구릉처럼 크고 웅장하다는 의미다. : 동구릉,

 

조선왕릉 참조링크1: 조선왕릉 - 나무위키 참조링크2: 조선왕릉 공식 홈페이지

42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태조의 추존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그 왕비들의 능까지 포함하면 총 50. 그러나 일반적으론 42기의 능만을 조선왕릉으로 표현하고 있다.

 

조선왕릉들은 주변의 지명에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잦다. 특히 아예 지명화되어버린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성북구 정릉동), 문정왕후 윤씨의 태릉(태릉선수촌), 세조의 광릉(광릉수목원) 등이 그러하다. 그 외에도 조선왕릉에서 역명을 따온 철도역인 선릉역, 선정릉역, 태릉입구역, 정릉역, 온릉역, 사릉역, 세종대왕릉역 등이나 서오릉 앞을 흐르는 창릉천과 그 일대의 행정동명인 창릉동, 그리고 해당 지역에 조성될 예정인 창릉신도시, 태종의 능침 앞을 지나는 도로인 헌릉로 및 선정릉 앞을 지나가는 도로인 선릉로와 정릉 앞을 지나가는 정릉로, 용인서울고속도로 헌릉IC 등의 지명이 그 예이다.

 

조선 왕 중 장자(長子)가 왕위를 이어 받은 왕은 몇 명이나 될까?

 조선 왕가 가계도 및 내용 참조 링크 : 조선왕실(선원계보) (heritage.go.kr) -

조선의 국왕 중 부왕의 적장자로 왕위에 오른 인물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경종, 순종으로 여덟 왕 뿐이다. 이들 중 숙종은 출생에서부터 왕세자 책봉을 거쳐 즉위에 이르기까지 가장 확고하고 뚜렷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던 왕이었다.

  '조선 왕가 가계도-'

 

  '조선 왕가 가계도2- 18대 현종-26대 고종'
.고종이후-대한황실 가계도

퀴즈1. 왕의 정실부인을 부르는 말은 무엇이며 또한 기거하던 곳을 부르는 호칭은?

퀴즈2. 왕의 정실부인(왕비)의 소생인 아들을 부르는 명칭?  

         왕의 정실부인인 아닌 후궁의 소생인 아들을 부르는 명칭은?

퀴즈3. 왕의 정실부인(왕비)의 소생인 딸을 부르는 명칭? 

         왕의 정실부인인 아닌 후궁의 소생인 딸을 부르는 명칭은?

퀴즈4. 덕혜옹주는 누구의 딸인가?

퀴즈5. 임금의 시중과 궁궐의 잡다한 일을 맡은 (거세자만이) 임명된 관리 명칭은?

퀴즈6. 임금이나 중전, 후궁을 보필하던 궁녀의 총수(우두머리) 상궁의 명칭은?

퀴즈7. 조선의 왕실이 27대 인데 이 중 장자(長子)가 왕위에 오른 분은 몇 분일까?

 

[ 퀴즈-C 정답]

퀴즈1. 왕의 정실부인을 부르는 말은 무엇이며 또한 기거하던 곳을 부르는 호칭은?

         답.=> 왕비(王妃)=중궁(中宮), 중전(中殿). 왕비가 거처하던 궁전=중궁전(中宮殿)

퀴즈2. 왕의 정실부인(왕비)의 소생인 아들을 부르는 명칭? .=> 대군(大君)

         왕의 정실부인인 아닌 후궁의 소생인 아들을 부르는 명칭은? .=> ()

퀴즈3. 왕의 정실부인(왕비)의 소생인 딸을 부르는 명칭? .=> 공주(公主)

         왕의 정실부인인 아닌 후궁의 소생인 딸을 부르는 명칭은? .=> 옹주(翁主)

퀴즈4. 덕혜옹주는 누구의 딸인가? .=> 고종

퀴즈5. 임금의 시중과 궁궐의 잡다한 일을 맡은 거세자만이 임명된 관리 명칭은?

         답.=> 내시[內侍]= 환관(宦官) 참조링크: 내시  환관

퀴즈6. 임금이나 중전, 후궁을 보필하던 궁녀의 총수(우두머리) 상궁의 명칭은?

         답.=> 제조상궁(提調尙宮). 큰방상궁이라고도 했음.

퀴즈7. 조선 왕실이 27대 인데 이 중 장자(長子)가 왕위에 오른 분은 몇 분일까? .=> 8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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