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한양) 탐구05-조선시대 한양(서울)지도, 한양도성(성곽)4대문, 4소문



 

(배경 영상,음악)  수제천(壽齊天)-국립국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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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한 주요 링크>

1. 조선시대 서울의 옛지도- https://blog.daum.net/sonsang4/13741884

2. 서울 성곽 일주하기(한 바퀴 돌기):

    참조링크2-1: 서울성곽   참조링크2-2 성곽둘레길:서울한양도성

    참조링크2-3: 서울의 성곽 상세 참고자료(PDF): 서울의 성곽 -WebViewer (seoul.go.kr)

3. 사대문(四大門) 참조자료3-1: 사대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자료3-2: [조선시대] 4대문-한국역사해설진흥원

4. 사소문(四小門) 참조한 자료 및 내용 출처: 사소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잠깐 퀴즈! -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주요 산, 도성(성곽)4대문, 4소문에 대한 퀴즈.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 퀴즈-D ]

1.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동서남북의 주요 산 이름(조선시대 불렸던 이름)?

    ①북쪽 산 동쪽 산 남쪽 산 서쪽 산

2. 한양도성의 주요 출입구였던 4대문의 이름은? (, 북쪽은 별로 통행하지 않음)

    ①북쪽 문 동쪽 문 남쪽 문 서쪽 문

3. 한양도성의 (4대문 말고) 소규모 출입구였던 4소문의 이름은?

    ①동북쪽 문 동남쪽 문 남서쪽 문 서북쪽 문

 

(알림)

이하 내용은 위에 소개한 참조 링크 및 본문 내용에 링크된 참고 자료에서 가져온 것이며 항목과 내용 일부는 편집, 가감된 것도 있음.

 

조선시대 한양의 모습이 담긴 지도

「경도오부 북한산성부도(京都五部北漢山城附圖)」-조선 영조 7(1731)년 경,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내용 출처: 조선시대 서울의 옛지도- https://blog.daum.net/sonsang4/13741884

   

경복궁을 비롯한 주요 궁궐, 육조 및 4大門, 4小門 위치, 서울을 둘러싸는 주요 산과 성곽, 외곽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길들이 그려져 있다.  

도성도(都城圖)」(부분) -조선 영조 26(1750)년 경 제작,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도성 안팎의 주요도로는 굵은 붉은 선으로, 간선도로는 가는 붉은 선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북악산과 인왕산 기슭에서 흘러 내려오는 하천들과 다리 명칭들이 표시되어 있다. 석주(石柱)만 남아있는 경회루 등 임진왜란 이후 복구되지 않은 경복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 성곽 일주하기(한 바퀴 돌기): 참조 링크1: 서울성곽   참조 링크2:서울한양도성

                                  참조링크3: 서울의 성곽 상세 참고자료(PDF): 서울의 성곽 -WebViewer (seoul.go.kr)

출처 및 저자: 서울시 간행물-서울특별시사 편찬위원회

 

한양 도성 성곽은 둘레 약 17로 조선왕조가 수도를 방어·수호하기 위해 쌓은 성곽으로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산은 북쪽의 백악산(白嶽山 링크:백악산-오늘날 북악산)을 시작으로 동쪽의 낙산(駱山 링크:낙산-낙타같이 생긴 산), 남쪽의 목멱산(木覓山 링크:목멱산-남산의 옛 이름),, 서쪽의 인왕산(仁王山 링크:인왕산)이 한양(서울) 중앙부를 둘러싸고 있다.

 

한양 도성의 성곽은 이들 4개의 산을 연결한 구간과 숙종 때 축성된 탕춘대성과 북한산성 행궁지 등을 연결한 조선시대 성곽을 말한다. 도심 바깥으로 탕춘대성, 북한산성이 서울을 둘러싸고 있고 홍지문(弘智門)蕩春臺城(탕춘대성)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출처:홍지문 및 탕춘대성

 

한양도성 성곽 둘레길

한양(서울)도성 성곽 둘레길

- 성곽 둘레길 참조 링크모음 

 [한양도성 백악구간] http://rblr.co/0ZVfb     [한양도성 낙산구간http://rblr.co/0ZVfi

 [한양도성 목멱구간] http://rblr.co/0ZXDC    [한양도성 인왕구간] http://rblr.co/0ZXDb

 [탕춘대성http://rblr.co/0ZcfR                [북한산성 행궁지http://rblr.co/0ZgmA

 

사대문(四大門) -요약-

조선시대 (한양) 도성에서 동쪽의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서쪽의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남쪽의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북쪽의 숙청문(肅淸門 1523년 이후 숙정문肅靖門으로 개칭) 등 사대문(四大門)이 있다.

 

서울의 4대문과 보신각에 담긴 뜻은 공자의 가르침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으로,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에 돈의문(敦義門), 남쪽에 숭례문(崇禮門), 북쪽에 홍지문(弘智門)숙정문(肅靖門), 중앙에 보신각(普信閣)이 있다.

 

유교의 오상(五常)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로 어질고, 의롭고, 예의 바르고, 지혜로움, 신뢰를 말한다.

 

사소문(四小門) -요약-

사소문(四小門)은 동북의 홍화문(弘化門, 후에 惠化門, 속칭 동소문), 남서의 소덕문(昭德門, 후에 昭義門, 속칭 서소문), 동남의 광희문(光熙門, 속칭 水口門), 서북의 창의문(彰義門, 속칭 紫霞門)을 통틀어 이르는 명칭이다. 1457(세조 3) 4소문 외에 남소문(南小門)을 개설하였다가 1469(예종 1) 폐문하였다.

 

조선시대 도성 문 내역(요약표)

구분 방위 문 이름 문화
가치
위치 용도 내용
4대문 홍인지문
(동대문)
보물1 종로
669
동쪽 관문 기가 약해 산맥의 뜻 지()를 넣었다고 함
돈의문
(서대문)
  종로구
신문로2
중국과의
관문
일제 때 철거
숭례문
(남대문)
국보1 남대문로
429
한양의
관문
궁궐에 직면한 관악산의 불기운을 막기 위해 현판을 세로로 썼다함
숙정문
(북대문)
사적10 삼청동
2-1
평상시
닫침
문을 열어놓으면 음기가 침범(풍기문란)한다 하여 폐쇄
4소문 동북 혜화문
(동소문)
성북구
동소문동
양주,포천 관문 일제 때 철거 후
1994년 복원
동남 광화문
(수구문)
중구
광희동
시신출구 1975년도 복원
서남 소의문
(서소문)
중구
서소문
  일제 때 철거
서북 창의문
(자하문)
종로구
청운동
북대문
역할
1958년 보수

 

4대문(四大門)

이하 내용과 사진은 참조자료1: 사대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자료2: [조선시대] 4대문-한국역사해설진흥원 에서 가져 왔다.

 

(동쪽)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흥인지문(=동대문) -사진 출처: 문화재청

흥인지문은 태조 때 1397(태조 6)1차 완공되었다. 1451(문종 1)에 중수를 시작하여

1453(단종 1)에 끝냈다. 이 문의 현판은 오행(五行)의 동쪽을 나타내는 인(仁)을 포함하며, 동대문 일대가 서울 도성 안에서 가장 낮은 지역으로 바로 남쪽에 청계천이 흐르고 있으므로, 땅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 1869년(고종 6) 개축하면서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고 ‘之’자를 보강하였다고 한다.

 

흥인문은 주위 지형의 열악한 조건을 보완하고자 옹성을 두른 것이 특징이다. 이 옹성은 문 앞쪽에 반달 모양으로 둥글게 축성되어 옹성 안에 들어온 적을 앞뒤에서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왜적이 가장 먼저 입성하였다.

 

(서쪽)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돈의문(敦義門) -사진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돈의문은 도성의 2차 공사가 끝나면서 다른 성문과 함께 건축되었다. 처음에는 경희궁 서쪽 언덕 지점에 위치하여 서전문(西箭門)이라 불리었다. 그러다가 1422년(세종 4) 2월에 도성을 고쳐 쌓게 되면서 서전문을 헐고 그보다 남쪽 지점에 새로 돈의문을 세웠다. 이후로 돈의문은 통칭 ‘새문[新門]’이라 불리게 되었다. 돈의문은 의주(義州) 국도의 관문으로 황해도와 평안도를 거쳐 중국으로 통하였다.

 

일제에 의해 철거되어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지금의 신문로 큰길과 정동에서 평동으로 통하는 길이 교차하는 마루턱에 위치하였다. 이괄(李适)의 난과 을미사변에 관련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남쪽)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사진 출처 : 한국관광공사

숭례문은 도성의 정문으로 청계천과 만초천(蔓草川)을 가르는 언덕에 세워져 있다. 도성 8문 가운데 가장 웅장하고 규모가 크며 서울의 얼굴 구실을 하였다. 남대문의 건축은 홍예(虹霓 Arch)와 문루 등 그 구조에 특별히 유의하였는데 1396년에 시작하여 1398년(태조 7) 2월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되었다.

 

1448년(세종 30) 숭례문의 지대를 높여 남산과 인왕산의 지맥을 연결시켜 경복궁을 아늑하게 껴안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풍수지리설과 당시의 여론에 따라 다시 건축하였다. 이때의 숭례문이 오늘에 전하는 것인데 1479년(성종 10)에 중수되었다. 한편 1962년 개수 공사 때 세종과 성종 때 개축 또는 중수한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숭례문의 현판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글씨로 전하는데, 다른 도성문과 다르게 횡액(橫額)이 아니라 종액(縱額-세로로 써진 편액)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오행사상에 따른 것으로 ‘예(禮)’자는 오행의 화(火)에 해당하는 글자인 까닭에 불이 타오르는 형상에 따라 세워서 달았다고 한다. 혹은 한양의 조산(朝山)인 한강 건너의 관악산이 오행의 화(火)에 해당되어 그 불기운이 도성을 범접하게 되므로 숭례문의 현판을 세워 맞불로 도성을 보호하고자 했다는 전설이 있다.   

 

(북쪽) 숙정문(肅靖門) 또는 숙청문(肅淸門)

숙정문(肅靖門) -사진 출처 : 두산백과

숙청문은 한양의 주산(主山)인 북악의 동쪽 마루턱에 위치하였으나 그 규모는 대문의 형식을 갖추지 못하고 소문(小門)의 규모였으며 오랫동안 문루마저 갖추지 못하였다. 숙청문의 원래 자리는 지금 자리의 약간 서쪽에 위치하였었다가 1504년(연산군 10)에 옮겨졌다. 숙청문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1413년(태종 13)에 폐문되었는데, 즉 북쪽은 음(陰)에 해당되어 이 문을 열어 놓으면 음기가 번성하여 도성 안의 부녀자들이 놀아나 풍기가 어지러워지기 때문에 문을 꼭꼭 닫아둔다고 하였다.

 

숙청문은 위치상 통행에는 거의 이용되지 않았고, 단지 장마가 지면 비 그치기를 기원하는 영제(禜祭), 즉 기청제(祈晴祭)를 여기에서 거행하였다. 또 예종 때부터는 가뭄이 들면 양기가 많은 남대문을 닫고 음기 서린 북대문을 열어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를 지냈다. 숙청문은 중종 이후 모든 기록에 ‘숙정문(肅靖門)’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현재 새로 복원한 문루에도 ‘肅靖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

이상 내용과 사진은 참조자료1: 사대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자료2: [조선시대] 4대문-한국역사해설진흥원 에서 가져 왔다

 

(중앙) 보신각(普信閣) 참조 자료: 보신각-위키백과-

보신각(普信閣) -사진 출처 : 위키백과

보신각(普信閣) 또는 종각(鐘閣) 서울시 종로구 관철동 종로사거리에 있는 전통 2 한옥 누각이다보신각종을 걸어 놓기 위해 만든 것으로 정면 5, 측면 4칸의 구조로 되어 있다. 1396(조선 태조 5) 창건했다가, 1869(조선 고종 6), 1979 8월에 재건했다. 보신각 터(普信閣址)라는 명칭으로 1997 1110일에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사소문(四小門)    참조한 자료 및 내용 출처: 사소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북의 홍화문(弘化門, 후에 惠化門, 속칭 동소문), 남서의 소덕문(昭德門, 후에 昭義門, 속칭 서소문), 동남의 광희문(光熙門, 속칭 水口門), 서북의 창의문(彰義門, 속칭 紫霞門)을 통틀어 이르는 명칭이다. 1457(세조 3) 4소문 외에 남소문(南小門)을 개설하였다가 1469(예종 1) 폐문하였다.

 

(동북의) 홍화문(弘化門, 후에 혜화문惠化門, 속칭 동소문)

           참조자료1: 혜화문(惠化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자료2: 화문-위키백과

혜화문(惠化門)-사진 출처 : 위키백과

홍화문((弘化門)은 혜화동에서 삼선동으로 뚫린 길 마루턱에 자리 잡아 도성에서 함경도 등 북방과 직결되는 관문이었다. 1484(성종 15) 창경궁이 완공되어 그 정문을 홍화문이라 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해 1511(중종 6) 혜화문으로 개칭하였다. 혜화문은 도성의 소문 가운데 하나였지만 대문의 구실을 하였다.

 

즉 경원가도(京元街道)가 여기서 연결되어 있었고, 북대문인 숙청문(肅淸門, 후에 肅靖門)이 항상 닫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문을 통행하였다. 그리고 여진(女眞)의 사신이 조공하기 위하여 한양에 입성할 때 이용하던 문이기도 하다.

 

처음 건립하였을 때의 문루는 언젠가 없어지고 1744(영조 20) 어영청(禦營廳)에 명하여 문루를 건축하였다. 이후 일제의 도시계획이라는 명목 아래 문루는 1928년에 헐리고, 홍예와 석문마저 1939년에 사라진 것을 1994년 길 마루턱 북쪽에 복원하였다.

 

(남서의) 소덕문(昭德門, 후에 소의문 昭義門, 속칭 서소문)    참조자료: 소의문 이야기

소의문(昭義門)= 서소문) -사진출처: 소의문 이야기 -Daum 백과

소덕문은 서소문동에서 의주로로 넘어가는 길 마루턱에 위치한다. 1472(성종 3) 예종비 장순왕후(章順王后) 한씨의 시호를 피하여 소의문으로 개칭하였다.

 

이 문은 도성 안 백성들이 죽어서 도성 서쪽으로 운구할 때 이용되는 문이었다. 서소문 밖에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시전의 하나인 칠패시전(七牌市廛)이 있어 발달하던 성업 활동의 중심무대가 되었다.

 

1396(태조 5) 건축 당시에는 다른 성문과 같이 문루가 있었으나 언젠가 없어지고 1743(영조 19) 다시 문루를 건축하였다. 1914년 일제에 의해 철거되어 서소문동이라는 지명만 남아 있다.

 

(동남의) 광희문(光熙門), 속칭 水口門 또는 시구문(屍口門)    참조자료: 광희문

광희문(光熙門= 水口門) -사진 출처 : 한국관광공사

광희문은 1396년 도성 축성 때 건축되었다. 문이름은 광명의 문을 의미하나 개천 수구(水口)에 가까운 곳에 있어 수구문이라 불렀으며, 도성 안 장례 행렬이 동쪽 성 밖으로 나갈 때 통과하는 문이어서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하였다.

 

동대문과 남대문 사이의 중구 광희동에 있어 남소문이라 할 수 있으나 따로 도성에서 한강 나루터로 바로 통하는 문이 필요하게 되어 세조 때 장충단공원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마루턱에 별도의 남소문을 건축하였다.

 

한편 명지대 홍순민 교수는  수구문에 대해서 부근으로 청계천 물길이 나가기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었다고 하는 말이 있으나 이는 억측이다. 청계천 물길은 흥인문이 더 가깝다. 수구문이란 한강으로 출입하는 문이란 뜻이다. 더구나 이 문을 그 부근에 늘 시신이 쌓여  있었다 하여 시구문(屍口門)이라 했다는 것은 일본인들의 악의적 왜곡이다. 참조 링크:  문(門) 이름에 숨은 뜻

 

그러나 남소문 건립 후 의경세자(懿敬世子 : 성종의 아버지, 德宗)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풍수 지리적으로나 실용적으로나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12년 만에 폐문되었다.

 

조선 전기 왜국 사신들은 옥수동의 한강 두모포(豆毛浦)나루를 거쳐 광희문을 통하여 인현동에 있던 지정 숙소인 동평관(東平館)에 머물렀다. 1915년경 문루가 자연 붕괴된 이래 홍예(虹蜺 Arch)만 남아 있었는데, 1975년 서울 성곽을 수축하면서 홍예 석축을 해체하여 남쪽으로 15m 이전 복원하면서 문루 12평도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서북의) 창의문(彰義門, 속칭 紫霞門)

           참조링크1:서울 창의문 자하문(紫霞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링크2:창의문  -위키백과

창의문(彰義門)=자하문(紫霞門) -사진 출처 : 한국관광공사

창의문은 의로움을 표창한다는 뜻으로 자하문(紫霞門)으로도 불렸고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도성을 축조할 때 함께 축조되었는데, 1413(태종 13) 지리도참설에 따라 일시적으로 문이 닫히기도 했다. 그러나 1422(세종 4) 숙청문과 함께 군인의 출입문으로 하였고, 궁궐의 담장 축조나 국가의 큰 공사가 있을 때 일시 열어 통행하였다.

 

1623년에는 인조반정의 반정군(反正軍)이 홍제원(弘濟院)에 집결하였다가 세검정을 거쳐 이 창의문을 열고 도성에 들어와 광해군을 쫓아냄으로써 인조 정권이 창출되었다. 1741(영조 17) 성문과 문루를 개수하면서 인조반정의 반정공신 1등에서 3등까지의 공신 이름을 새긴 현판을 걸었으며, 지금도 전해 오고 있다.

 

창의문은 서울 성곽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완형을 지니고 있으며 지금도 성곽의 일부가 연결되어 있다. 창의문 구조의 특징으로, 문 밖의 지세가 마치 지네의 형상과 같아 그 기세를 제압하고자 지네와 상극인 닭의 모형을 나무로 만들어 추녀에 매달아 놓았다.

 

[ 퀴즈-D ]

1.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동서남북의 주요 산 이름(조선시대 불렸던 이름)?

    ①북쪽 산 동쪽 산 남쪽 산 서쪽 산

2. 한양도성의 주요 출입구였던 4대문의 이름은? (, 북쪽은 별로 통행하지 않음)

    ①북쪽 문 동쪽 문 남쪽 문 서쪽 문

3. 한양도성의 (4대문 말고) 소규모 출입구였던 4소문의 이름은?

    ①동북쪽 문 동남쪽 문 남서쪽 문 서북쪽 문

 

[ 퀴즈-D 정답]

1.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동서남북의 주요 산 이름(조선시대 불렸던 이름)?

   ①북쪽 답.=> 백악산 동쪽 답.=> 낙산 남쪽 답.=> 목멱산 서쪽 답.=> 인왕산

2. 한양도성의 주요 출입구였던 4대문의 이름은? (, 북쪽은 별로 통행하지 않음)

   ①북쪽: 숙정문(肅靖門) 또는 숙청문(肅淸門)  동쪽: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③남쪽: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서쪽: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3. 한양도성의 (4대문 말고) 소규모 출입구였던 4소문의 이름은?

   ①동북쪽: 홍화문(弘化門, 惠化門, 속칭 동소문) 동남쪽:광희문(光熙門, 속칭 水口門)

   ③남서쪽: 소덕문(昭德門, 昭義門, 속칭 서소문) 서북쪽:창의문(彰義門, 속칭 紫霞門)

 

(계속)

서울(한양) 탐구04-왕과 왕족의 호칭, 내시, 궁녀, 묘호(廟號), 왕릉, 왕비릉


 

(배경 영상,음악)  장녹수 -정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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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한 주요 링크>

1. 왕비, 후궁의 호칭 참조링크1: 후궁 및 궁녀의 품계

2. 왕의 묘호((廟號참조링크1: 임금님의 이름과 묘호(廟號)

                     참조링크2: [조선왕 호칭/이름] ((() 묘호 차이

3. 조선왕실(선원계보) (heritage.go.kr) -국가문화유산포탈

 

* 잠깐 퀴즈! - 조선 왕과 왕족의 호칭과 묘호((廟號), 왕릉, 왕비릉에 대한 퀴즈.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 퀴즈-C ]

퀴즈1. 왕의 정실부인을 부르는 말은 무엇이며 또한 기거하던 곳을 부르는 호칭은?

퀴즈2. 왕의 정실부인(왕비)의 소생인 아들을 부르는 명칭?  

        왕의 정실부인인 아닌 후궁의 소생인 아들을 부르는 명칭은?

퀴즈3. 왕의 정실부인(왕비)의 소생인 딸을 부르는 명칭? 

        왕의 정실부인인 아닌 후궁의 소생인 딸을 부르는 명칭은?

퀴즈4. 덕혜옹주는 누구의 딸인가?

퀴즈5. 임금의 시중과 궁궐의 잡다한 일을 맡은 (거세자만이) 임명된 관리 명칭은?

퀴즈6. 임금이나 중전, 후궁을 보필하던 궁녀의 총수(우두머리) 상궁의 명칭은?

퀴즈7. 조선의 왕실이 27대 인데 이 중 장자(長子)가 왕위에 오른 분은 몇 분일까?

 

(알림)

이하 내용은 위에 소개한 참조 링크 및 본문 내용에 링크된 참고 자료에서 가져온 것이며 항목과 내용 일부는 편집, 가감된 것도 있음.

 

A.조선왕실 내용 출처 및 참조링크:  조선왕실(선원계보) (heritage.go.kr) 

조선 왕실은 왕과 왕비를 비롯해 왕세자와 왕세자빈, 왕자, 왕녀, 후궁 등이 구성원을 이룬다. 왕은 단 한명의 부인인 왕비를 두었으며, 왕비가 세상을 떠날 경우에는 그의 자리를 이어서 다음 왕비(계비繼妃)를 둔다.

 

왕비(王妃) 참조링크: 왕비-위키백과

왕비는 제후왕의 부인인 비()로서, 궁중에서 대왕대비와 왕대비 다음으로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또는 왕비를 중궁(中宮) 또는 중전(中殿)이라 부르기도 했다. 정실부인은 사별 후 재혼하지 않는 이상 단 한 명, 그 외엔 후궁으로 규정된다. 조선에서 왕비는 국왕의 비()로서 품계는 국왕과 같은 무품이었고, 내명부와 외명부의 수장이었다

 

왕세자, 왕세자빈, 대군(大君), (), 공주(公主), 옹주(翁主), 후궁(後宮)

왕의 아들 중에서 다음 대의 왕위에 오를 아들을 왕세자(王世子)라 하였고 그의 부인을 왕세자빈(王世子嬪)이라 하였다. 왕세자를 제외한 나머지 왕의 아들 중에서 왕비의 소생일 경우(嫡子적자)에는 대군(大君), 후궁의 소생일 경우에는 군()이라 하였다. 왕의 딸인 왕녀 중 왕비의 소생(嫡女적녀)일 경우에는 공주(公主), 후궁의 소생(庶女서녀)일 경우에는 옹주(翁主)라 하였다. : 덕혜옹주(참조:덕혜옹주)-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딸.

 

후궁은 사실상 왕의 부인이 아니고, 1품의 빈()부터 종4품의 숙원(淑媛)까지 품계를 받는 여관(女官)이었으며, 후궁이 되는 법은 간택 후궁이 되는 경우와 궁인 중에서 왕의 승은(承恩-여자가 임금의 사랑을 받아 밤에 동침함)을 입어 후궁이 되는 경우가 있다.

 

1897년에 대한제국으로 전환되며 왕실의 지위가 황실로 격상되어 왕을 황제, 왕비를 황후, 왕세자를 황태자, 왕세자빈을 황태자비, 왕자를 친왕이라 하였다.

 

후궁 품계

왕후(王后), 황후(皇后)는 품을 따지지 않았으며, 후궁들은 정 1~4품까지의 품이었다.

() -1품 귀인(貴人) -1품 소의(昭儀) -2품 숙의(淑儀) -2

소용(昭容) -3품 숙용(淑容) -3품 소원(昭媛) -4품 숙원(淑媛) -4

 

대원군(大院君) 참조링크: 대원군 -내용 출처 다음 백과

대원군(大院君)은 임금의 대를 이을 적자손이 없어 방계 친족이 대통을 이어받을 때, 그 임금의 친아버지에게 주던 벼슬. 즉 방계에서 왕위를 계승한 때에 그 임금의 생부에게 주는 칭호이다.

 

조선시대 전시기에 걸쳐 4명의 대원군이 있었는데, 선조의 아버지 덕흥군을 대원군으로 추존한 것이 처음이었다. 1623년 인조는 아버지 정원군을 대원군에 추존했다가 1632년 다시 원종으로 추존했다.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철종이 왕위에 옹립되었고 그의 아버지 전계군을 대원군에 추존했다.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흥선군 하응의 둘째아들 명복이 왕위에 올라 고종이 되었고 하응은 흥선대원군에 봉해졌다. 3명은 죽은 뒤에 추존되었으나, 흥선대원군만 살아 있을 때 봉해졌다. 고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조대비가 수렴청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흥선대원군이 섭정하여 국사의 모든 결정권을 가졌다. 흥선 대원군은 개항 전후 격변하는 국내외의 상황 속에서 10여 년간 권세를 누렸다.

 

내시[內侍]= 환관(宦官) 참조링크: 내시 환관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환관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궁중 잡역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고려 말기부터 국왕 측근에서 시종하는 문관인 내시(內侍)에 속하는 이들도 생겨남에 따라 그때부터 환관과 내시가 동일시되었다.

 

내시는 왕의 측근으로서 대궐 내에 상주해야 한다는 특수성 때문에 거세자만이 임명될 수 있었다. 본래는 선천적인 거세자로 충원했으나 스스로 거세하고 내시에 임명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이들도 처첩을 거느렸고 양자(養子)를 택해 가계를 이어가도록 했다. 내시의 제도는 갑오개혁을 계기로 폐지되었다.

 

궁녀(宮女) 참조링크: 궁녀

궁녀(宮女)는 왕족을 제외한 궁중 모든 여인들의 총칭을 말하는 데 궁인(宮人궁첩(宮妾내인(內人)으로도 불렸다. 보통 궁녀라 하면 상궁(尙宮)과 나인으로 분류되는 여인들을 의미한다. 궁녀는 왕이 있는 법궁(法宮, 本宮)뿐만이 아니라 제사궁(祭祀宮, 혹은 魂宮)과 별궁에 소속된 여인까지도 포함된다.

 

넓은 의미의 궁녀로 포괄되는 내역은 다음과 같다.

무수리 : 몽고말이며, 궁중 각 처소에서 막일을 담당하는 여인을 말한다.

각심이[婢子, 또는 房子] : 상궁의 처소에서 부리는 가정부·식모·침모 등의 총칭이다. 이들의 월급을 국가에서 지급했으므로 방자라고도 한다. 방자란 관청의 사환으로, 예컨대 춘향전에서의 방자와 같다.

손님 : 왕의 후궁으로서 당호(堂號)가 바쳐지고 독립 세대를 영위하는 여인의 집(후궁 집)에서 살림을 맡아하던 일종의 가정부 같은 여인이다. 대개 친정붙이이며, 보수는 후궁의 생계비에서 지출된다. 따라서 손님이라는 이름은 궁 밖에서 온 사람이라는 의미로, 무수리나 각심이와는 달리 예의를 갖춘 말이다.

의녀 : 약방 기생이라고도 한다. 약방이란 궁중 내의원(內醫院)의 별칭이며, 의녀의 소속은 내의원이지만 전신(前身)이 기생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평상시엔 궁녀들에게 침을 놓아주고 비·빈들의 해산시 조산원(助産員) 노릇을 하였다. 하지만, 궁중의 크고 작은 잔치가 있을 때에는 기생으로 변신하며 원삼(圓衫)을 입고, 머리에는 화관(花冠)을 쓰고, 손에는 색동 한삼(汗衫)을 끼고 춤을 추는 무희(舞姬)였다.

 

그리고 궁녀의 신분적 등급은 견습나인·나인·상궁의 세 종류로 나뉘며, 그 세 종류 가운데에서도 입궁 연조와 소속 부서에 따라 차등이 있었다. 같은 상궁이라도 경력에 따라 정7품도 있고 정5품도 있으며, 또 같은 정5품의 상궁도 소속 부서의 격에 따라 같을 수 없었다.

 

나인 : 궁중에서 왕족의 사생활을 시중하던 여관(女官)의 총칭으로 내인(內人)’의 전음(轉音)이다. 궁녀들은 반드시 자신들을 상궁나인이라 하여 상궁과 나인을 구분하였다. 나인과 상궁은 그들 사회에서는 차원이 다를 만큼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참조링크:나인)

 

또한, 나인 아래에는 견습나인이 있는데, 이들은 아기나인 또는 생각시로 불린다. 보통 4세부터 계례(筓禮) 전인 17세 사이의 어린이 및 소녀 나인들이다.

 

지밀·침방·수방·내소주방·외소주방·생과방·세답방·세수간·퇴선간·복이처·등촉방

지밀(至密침방(針房수방(繡房내소주방(內燒廚房외소주방·생과방(生果房세답방(洗踏房)의 일곱 부서 외에 세수간·퇴선간(退膳間복이처(僕伊處등촉방(燈燭房)의 네 부설 부소가 있다.

 

위 부서에 소속된 궁녀들을 일반 개인 가정으로 비교해보면, 지밀나인은 몸종 격으로 가장 격이 높고, 침방·수방 나인들은 침모(針母), 소주방과 생과방은 찬간(饌間)의 식모들인데, 궁중에는 무수리가 하역(下役)을 맡았다. 세답방은 표모(漂母)로서 빨래 일을 맡는데, 일반 개인 가정에서는 빨래를 보통 노비가 하고, 다리미와 다듬이질은 대개 경험이 많은 부인들이 맡는다.

 

지밀상궁[至密尙宮] 참조: 지밀상궁[至密尙宮]

조선 시대, 대전 좌우에서 임금을 모시며 잠시도 떠나지 않고 시중을 드는 상궁이다.

지밀상궁은 왕의 측근에서 항상 그림자와 같이 시위(侍衛)하여 대령상궁(待令尙宮)이라고도 했다.

 

또한, 지밀상궁 중에서 궁중 의식이나 잔치 때 왕을 비롯한 왕비·왕대비 등의 인도와 진행을 담당했던 시녀상궁(侍女尙宮)은 지밀의 서책 관리와 국상(國喪) 때 곡읍(哭泣)을 담당하기도 했다.

 

따라서 궁녀의 격은 지밀이 높고, 다음이 침방과 수방으로, 이들은 양반 부녀와 같이 치마도 외로 여며 입고 앞치마를 두르지 않고 길게 늘일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 그것은 마루 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의 성격상 소주방이나 세답방 나인같이 치마를 걷어 올릴 필요가 없기도 한 때문이다.

 

위 세 부서 외의 다른 부서는 치마를 바로 입고 앞치마를 위에 둘러 걷어 올린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각시가 있는 곳도 지밀과 침방·수방뿐이다. 나머지 부서들은 생[絲楊]을 맬 수 없으며,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다.

 

제조상궁(提調尙宮)

이러한 궁녀 사회에도 간부들이 있었는데, 총수격인 우두머리 상궁과 그 밖의 맡은 바 직책의 중요성에 따라 특별대우를 받는 궁녀들이 있었다. , 제조상궁(提調尙宮)은 큰방상궁이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많은 궁녀들 중에 어른으로 왕명을 받들고 내전(內殿)의 재산 관리를 담당했다. 또한, 아리꼬[阿里庫]상궁으로 불리는 부제조상궁은 내전의 창고(倉庫, 아랫고·下庫)의 물품을 관리했다.

 

감찰상궁(監察尙宮)

감찰상궁(監察尙宮)은 궁녀들의 상벌을 담당했으며, 감시병 구실도 겸한 두려운 존재였다. 궁궐내의 모든 궁녀들은 입궁에서 퇴출(退出)까지 원칙적으로 종신제였다.

 

그 외 왕자녀의 양육을 담당했던 보모상궁(保姆尙宮)이 있었으며, 이들 중에서 왕세자의 보모가 가장 격이 높았다.

 

궁녀의 선출

왕의 직계 및 그 배우자 외에는 후궁도 궁중에서 죽을 수 없으므로, 늙고 병들면 궁녀는 궁궐을 나가야 했다. 궁녀의 선출은 원칙적으로 10년에 한번이었지만 예외도 있었다. 지밀나인의 경우 조건이 까다로워서 상궁들이 두세 번씩 선을 보러 나갔다. 그러나 대개 연줄과 세습이라 할 수 있으며, 고모가 조카를 들여놓는 경우가 많았다.

 

궁녀의 출신 계급은 지밀과 침방·수방은 중인계급, 기타는 대개 상민계급이었다. 입궁 연령은 지밀이 가장 어려 48, 침방·수방이 613, 그 밖은 1213세가 관례였다. 궁녀는 입궁 후 15년이 되면 계례를 치르고 정식 나인이 되었다. 남색 치마에 옥색 저고리, 머리에는 개구리첩지를 단 제복이 일생 동안 그들의 복장이었다.

 

나인이 된 뒤 다시 15년이 경과되면 상궁으로 승격했으므로, 가장 빠른 45세 입궁을 기준으로 할 경우에 35세 이후라야 상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는데, 왕의 후궁이 되면 20대의 상궁도 있을 수 있었다. 이런 궁녀는 왕의 자녀를 낳기 전까지는 상궁의 신분에 머물러 있지만, 그 대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왕의 곁에서 시위만 하면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를 승은상궁(承恩尙宮)이라 했다.

 

궁녀는 원칙적으로 종신제였지만, 특별한 경우, 즉 이들이 중병이 들었을 때, 가뭄으로 궁녀 방출이 결행될 경우(, 젊은 궁녀), 모시고 있던 상전이 승하했을 경우 중도에 나갈 수도 있었다.

 

B. 왕의 명칭과 묘호(廟號)

조선 시대, 왕의 이름

이하 내용은 참조 링크: 조선 시대, 왕의 이름에서 가져 왔다.

조선 시대, 왕의 이름은 외자였다. 절대 존엄의 존재였던 왕의 이름은 함부로 말할 수도 쓸 수도 없기에 백성들의 말 사용을 배려해 잘 사용하지 않는 한자를 활용해 외자로 이름을 지었다.

 

이름과 관련한 일반 용어들

아명(兒名) : 어릴 때 정식 이름을 짓기 전에 부모가 자식을 부르는 친근한 이름.:막동

초명(初名) : 처음 이름

() : 태어날 때 받은 진짜 이름

() : 성년이 되는 관례 때 받는 이름인 관명과 함께 스스럼없이 부를 수 있도록 짓는 새로운 이름

() : 본명이나 자 이외에 따로 지어 부르는 이름 (별칭, 필명, 별호, 아호)

묘호(廟號) : 왕이 죽은 뒤 종묘에 그 신위를 모실 때 드리는 존호(尊號) 참조: 묘호

 

((() 묘호 참조링크: ((() 묘호

예기, 사기, 경국대전, 조선왕조실록 등에 공이 있는 사람은 '()'라고 하고, 덕이 있는 사람은 '()'을 붙인다고 하는 내용이 있다.

 

a. ()

1. 원칙적으로 나라를 창업한 왕에게만 사용한다. 태조는 1대 임금이므로 후대의 자손이 시조(始祖)로 삼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고려에 조()가 붙은 왕은 태조 왕건뿐이다.

 

2. 공이 있는 왕에게 조()를 붙인다.(나라를 세우거나 그에 버금가는 공을 세운 왕)

선왕의 적자가 아닌 사람이 임금이 되는 경우에 명분과 정통성을 부과하기 위해 붙인 경우가 많았다.

 

b. ()

왕위를 정통으로 계승한 왕들에게 붙이거나, 덕이 있는 왕에게 종()을 붙인다. 혹은

별다른 위기 없이 태평성대를 누린 경우에 붙인다.

 

c. ()

폐위된 왕은 자격을 박탈당하여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왕자시절의 호칭으로 불리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이 아니라, 연산군일기, 광해군일기에 따로 기록된다.

- 연산군: 중종반정으로 폐위

- 광해군: 인조반정으로 폐위

 

조선의 왕에 조()가 붙은 이유

나라를 창업한 왕이나 나라의 정통이 중단되었다가 다시 일으킨 왕에게 '()'를 쓴다. 그래서 조()가 종()에 비해서 격이 높다고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반정이나 찬탈을 통해 왕위에 오른 경우, 이를 정당화하려는 수단의 하나로 이용되면서 후손(아들)'()'에서 '()'로 추숭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외에도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쓰이기도 했다. 참고로, 중종의 경우에도 연산군을 몰아낸 공으로 묘호를 '중조'로 하자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

 

왕의 호칭(묘호)

묘호는 죽은 왕의 위패를 모시는 종묘에 올리는 이름이다. 따라서 왕이 생존해 있을 때는 묘호가 없었고,'주상', '전하', '상감' 등으로 불렸다. 왕의 3년 상을 치른 후, 왕과 고위 관료들이 묘호를 정한다. 왕의 업적을 한글자로 표현하여 신주를 종묘에 모셨다.

 

연산군과 광해군처럼 폐위되어 신주가 종묘에 들어가지 못한 왕들은 죽어서도 왕 대접을 받지 못하고 왕자 신분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종묘에 그 신위가 오르지 못했으며 따라서 묘호 또한 없으므로 단지 그들이 쫓겨난 이후나(연산군) 세자 시절에(광해군) 받은 군호로 불리고 있다. 조선조 2대 임금 정종과 6대 임금 단종은 오랫동안 묘호를 정하지 않고, 몇 백 년 동안 공정왕과 노산군으로 불리다가, 숙종 때 와서 그들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면서 비로소 정종과 단종이라는 묘호를 얻었다.

 

묘호의 예:

· 문종(文宗): 학문에 뛰어난 왕 · 성종(成宗): 제도 정비를 완성시킨 왕

· 세종(世宗): 태평성대를 이룩한 왕 · 인조(仁祖): 어진 왕

· 중종(中宗):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왕 · 태조(太祖): 나라를 세운 왕

· 태종(太宗): 나라의 기틀을 다진 왕 · 효종(孝宗): 효성이 지극한 왕

 

왕의 호칭에는 묘호 외에도 사후에 중국 황제가 지어 보내주는 시호(諡號)라는 것이 있고, 또 신하들이 그 왕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해 지어 올리는 휘호(徽號) 혹은 존호(尊號)라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태조(이성계)의 정식 호칭은 '태조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었는데, '태조'는 묘호, '강헌'은 시호, '지인계운성 문신무'는 휘호(존호)에 해당한다.

 

능호(陵號)

()’ 은임금의 무덤을 지칭하는 호칭하는 데 능은 구릉이란 의미로 구릉처럼 크고 웅장하다는 의미다. : 동구릉,

 

조선왕릉 참조링크1: 조선왕릉 - 나무위키 참조링크2: 조선왕릉 공식 홈페이지

42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태조의 추존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그 왕비들의 능까지 포함하면 총 50. 그러나 일반적으론 42기의 능만을 조선왕릉으로 표현하고 있다.

 

조선왕릉들은 주변의 지명에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잦다. 특히 아예 지명화되어버린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성북구 정릉동), 문정왕후 윤씨의 태릉(태릉선수촌), 세조의 광릉(광릉수목원) 등이 그러하다. 그 외에도 조선왕릉에서 역명을 따온 철도역인 선릉역, 선정릉역, 태릉입구역, 정릉역, 온릉역, 사릉역, 세종대왕릉역 등이나 서오릉 앞을 흐르는 창릉천과 그 일대의 행정동명인 창릉동, 그리고 해당 지역에 조성될 예정인 창릉신도시, 태종의 능침 앞을 지나는 도로인 헌릉로 및 선정릉 앞을 지나가는 도로인 선릉로와 정릉 앞을 지나가는 정릉로, 용인서울고속도로 헌릉IC 등의 지명이 그 예이다.

 

조선 왕 중 장자(長子)가 왕위를 이어 받은 왕은 몇 명이나 될까?

 조선 왕가 가계도 및 내용 참조 링크 : 조선왕실(선원계보) (heritage.go.kr) -

조선의 국왕 중 부왕의 적장자로 왕위에 오른 인물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경종, 순종으로 여덟 왕 뿐이다. 이들 중 숙종은 출생에서부터 왕세자 책봉을 거쳐 즉위에 이르기까지 가장 확고하고 뚜렷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던 왕이었다.

  '조선 왕가 가계도-'

 

  '조선 왕가 가계도2- 18대 현종-26대 고종'
.고종이후-대한황실 가계도

퀴즈1. 왕의 정실부인을 부르는 말은 무엇이며 또한 기거하던 곳을 부르는 호칭은?

퀴즈2. 왕의 정실부인(왕비)의 소생인 아들을 부르는 명칭?  

         왕의 정실부인인 아닌 후궁의 소생인 아들을 부르는 명칭은?

퀴즈3. 왕의 정실부인(왕비)의 소생인 딸을 부르는 명칭? 

         왕의 정실부인인 아닌 후궁의 소생인 딸을 부르는 명칭은?

퀴즈4. 덕혜옹주는 누구의 딸인가?

퀴즈5. 임금의 시중과 궁궐의 잡다한 일을 맡은 (거세자만이) 임명된 관리 명칭은?

퀴즈6. 임금이나 중전, 후궁을 보필하던 궁녀의 총수(우두머리) 상궁의 명칭은?

퀴즈7. 조선의 왕실이 27대 인데 이 중 장자(長子)가 왕위에 오른 분은 몇 분일까?

 

[ 퀴즈-C 정답]

퀴즈1. 왕의 정실부인을 부르는 말은 무엇이며 또한 기거하던 곳을 부르는 호칭은?

         답.=> 왕비(王妃)=중궁(中宮), 중전(中殿). 왕비가 거처하던 궁전=중궁전(中宮殿)

퀴즈2. 왕의 정실부인(왕비)의 소생인 아들을 부르는 명칭? .=> 대군(大君)

         왕의 정실부인인 아닌 후궁의 소생인 아들을 부르는 명칭은? .=> ()

퀴즈3. 왕의 정실부인(왕비)의 소생인 딸을 부르는 명칭? .=> 공주(公主)

         왕의 정실부인인 아닌 후궁의 소생인 딸을 부르는 명칭은? .=> 옹주(翁主)

퀴즈4. 덕혜옹주는 누구의 딸인가? .=> 고종

퀴즈5. 임금의 시중과 궁궐의 잡다한 일을 맡은 거세자만이 임명된 관리 명칭은?

         답.=> 내시[內侍]= 환관(宦官) 참조링크: 내시  환관

퀴즈6. 임금이나 중전, 후궁을 보필하던 궁녀의 총수(우두머리) 상궁의 명칭은?

         답.=> 제조상궁(提調尙宮). 큰방상궁이라고도 했음.

퀴즈7. 조선 왕실이 27대 인데 이 중 장자(長子)가 왕위에 오른 분은 몇 분일까? .=> 8

(계속)

서울(한양)탐구03-궁궐2-궁궐의 구조 외 운현궁, 칠궁, 종묘, 사직단, 동묘

 

(배경음악) 종묘제례악 5분 하이라이트공연-예술의 전당 2017

              추후 링크가 끊어지면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 나올 수도 있으며,

              아래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보이면 https://youtu.be/D-1-4eLjzhE <=요걸 클릭

 

* 본문 중 밑줄 친 링크는 본문 내용을 가져오거나 참고한 곳으로 필요시 밑줄 친 link를 클릭. , 밑줄 친 링크는 현재는 연결되지만 추후 링크 주소 변경되면 연결이 안 될 수도 있음.

 

<참조한 주요 자료 및 링크>

1.  궁궐 및 종묘(문화재청-heritage.go.kr)우리 궁궐 이야기

2.  서울 5대궁과 종묘에서 만나는 궁궐이야기 [ 5회 궁중문화축전 ]-10분 가량의 동영상(youtube)동영상임.

 

*조선 궁궐 잠깐 퀴즈! - 이것만 알아도 조선시대 궁 관련 내용은 좀 안다고 할 수 있다.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 퀴즈-B ]

퀴즈1. 궁궐 내에서 대신(大臣)들이 업무를 보던 관청들이 모여 있는 곳을 무어라 하나?

         (오늘날 정부 종합청사에 해당하는 곳을 말함)

퀴즈2. 왕이 조의(朝議-아침 조회)를 할 때 왕이 계신 정전(政殿) 내부[=당상(堂上)]에서

        국사(國事에 대해 임금과 논의를 하거나 왕이 하시는 말씀(下交)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관리를(또는 그런 직책) 무어라 하는가? ( OO官 )

퀴즈3. 왕이 정사를 보는 정전(政殿) 앞마당에 각 품계에 따라 관리들이 도열하는 위치에

         (주로) 돌로 만들어 세워둔 것을 무어라 부르는가?

퀴즈4. 흥선대원군의 사저(私邸)로 대원군이 섭정을 하며 나랏일을 보던 곳이다. 고종이

         태어난 곳이며 고종이 명성황후와 가례를 치른 곳이기도 하다. 이곳의 명칭은?

퀴즈5. 종묘사직(宗廟社稷)이란 말의 뜻은? 이와 관련된 서울에 있는 장소 명칭은?

퀴즈6. 관우(關羽)를 모신 사당의 이름은?

 

[ 궁궐 관련 몇 가지 용어, 단어 설명 ]

<참조 링크> 1. 국가문화유산포탈 | 궁궐의 건축 (heritage.go.kr)

                  2.국가문화유산포탈 | 궁궐의 짜임새 (heritage.go.kr)

 

정전(正殿): 왕이 조회(朝會)를 하던 궁전. 경복궁의 근정전, 창덕궁의 인정전 등이 있다.

편전(便殿): 임금이 평상시에 거처하는 궁전.

 

중궁(中宮): 1. 왕의 정실부인(왕비) 2. 궁궐의 중앙에 있는 궁궐로 왕비가 거처하는 곳.

중궁전(中宮殿): 왕비가 거처하던 궁전.

 

세자궁(世子宮) : 왕세자가 거처하던 궁전.

빈궁(嬪宮) : 1.왕세자의 아내. 2. 임금의 후궁 가운데 지위가 가장 높은 사람.

                 3. 조선 시대에, ()이나 세자빈이 거처하던 곳.

 

(알림)

본 게시물은 위에 소개한 참고 자료(밑줄 링크)의 내용과 아래 참조 자료에서 항목과 내용을 가져왔으며 내용 일부는 편집, 가감된 것도 있다. 상세한 내용은 관련 링크나 참조 링크를 보기 바람.

 

궁궐의 짜임새(구조) 내용참조 링크: 국가문화유산포탈 | 궁궐의 짜임새 (heritage.go.kr)

중국 고대부터 전해오는 궁궐 구성의 원칙적인 구성이 "오문삼조(五門)"였다. 궁궐은 궁성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내부가 몇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있다. 각 구역에는 들어가는 문이 있는데, 남에서 북으로 가면서 다섯 개의 문들이 배열되어 있다. 이 다섯 문 안에 외조, 치조, 연조라는 세 조정이 있어 "오문삼조"라는 궁의 공간구조가 형성된다.

 

조선은 삼문삼조(三門三朝)의 원칙이었는데 삼문이라 함은 고문(皐門), 치문(治門), 노문(路門)이고 삼조라 함은 외조(外朝), 치조(治朝), 연조(燕朝)이다. 참조 링크: 경복궁과 자금성의 비교 - 나무위키 (namu.wiki)

 

1. 외전(外殿)

외전은 왕이 공식적으로 신하들을 만나는 공간이다. 외전 중 핵심이 되는 공간이 바로 정전이다. 정전은 궁궐에서 외형상 가장 화려하고 권위가 있는 공간으로 조정의 조회와 사신의 응대, 각종 잔치를 벌이는 국가의 공식적인 의식을 거행하는 공간이다.

 

정전(正殿)-궁궐의 큰 행사가 열렸던 곳으로 가장 화려하고 권위가 있어 왕의 위엄을 드러내는 곳이다. 새로운 임금의 즉위식이라던가, 외국의 중요한 사신이 와서 임금님께 인사를 하던 곳이다. 정전에서는 한 달에 네 번 정도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조회를 했다. 건물 이름에 O政殿으로 된 것이 많다. : 경복궁의 勤政殿(근정전), 창덕궁의 仁政殿(인정전), 창경궁의 明政殿(명정전)

창덕궁 '인정전'과 그 아래 품석(품계석)

정전(正殿) 건물 주변은 회랑(回廊)이 둘러싸여 있어 비를 맞지 않고 다닐 수 있었다. 이 회랑 안 네모난 공간(일종의 뜰 마당)을 조정(朝廷)이라 하고, 여기엔 품석(품계석)이 있어 각 관리들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품계 내용의 출처: 다음백과

관계·위계라고도 한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3국이 각각 관의 등급을 나누고 고유의 관등명을 썼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는 신라의 관등을 그대로 적용했다. 고려 초기에는 신라와 태봉의 관계를 계승했으나 중앙집권체제가 정비되면서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여 문산계와 무산계를 정1품에서 종9품까지, 18품계로 정했다. 이 품계는 명칭만 변경되어 조선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당상관(堂上官)

조선시대 조의(朝議)를 행할 때 당상(堂上)에 있는 교의(交椅)에 앉을 수 있는 관계(官階) 또는 그 관원으로, 동반은 정3품의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상, 서반은 절충장군(折衝將軍) 이상, 종친은 명선대부(明善大夫) 이상, 의빈(儀賓)은 봉순대부(奉順大夫) 이상의 품계를 가진 사람이다.

 

이러한 당상관은 의관(醫官)·역관(譯官) 등 기술관, 또는 환관(宦官) 등에게도 간혹 제수하였으나 이는 특례이고 대부분 양반이 독점하였다.

 

고려시대는 국정의결에 2품 이상의 재추(宰樞)만이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그 폭을 정3품 당상관까지 확대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당상관은 국정을 입안, 집행하는 최고급 관료 집단이라 할 수 있다.

 

편전(便殿)-왕이 일하던 곳으로 왕이 공부도 하고 신하들과 회의도 나누던 곳이 편전이다. 편전에서 있었던 회의는 그 내용이 모두 글로 기록되어 있다.

 

2. 내전(內殿)

궁의 중앙에 위치한 내전은 왕과 왕비의 공식 활동과 일상적인 생활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위치만 궁의 중앙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궁의 핵심을 이루는 기능도 하였다. 내전은 크게 보아 대전과 중궁전으로 구성된다. 대전은 왕이 기거하는 공간이며, 중궁전은 왕비가 기거하고 활동하는 공간이다.

 

침전-임금님이 잠을 자던 공간

중궁전-가장 안쪽에 위치한 공간으로 왕비가 머물던 곳으로, 중전 또는 중궁이라고 부른다.

          예: 경복궁의 교태전, 창덕궁의 대조전

대비전-왕의 어머님이나 웃어른들이 사는 공간. : 경복궁의 자경전

 

3. 동궁(東宮)

동궁은 왕위의 계승자인 세자의 활동공간이다. 다음 왕위를 이을 세자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에 내전의 동편에 그 처소를 마련했는데 그 이유는 세자를 떠오르는 해와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경복궁의 자선당

 

4. 후원(後苑)

궁궐의 북쪽 산자락에 위치한 후원은 왕을 비롯한 궁궐 사람들의 휴식공간이다. 후원은 산골짜기, 연못, 아담한 정자 등이 주로 배치되어 있는데 후원에서는 과거 시험을 치르고 군사훈련을 했으며, 종친 모임과 같은 대규모 모임을 열기도 하였다: 경복궁의 향원정, 창덕궁 후원(=祕苑)

 

5. 궐내각사(闕內各司)

궐내각사는 궁궐 안에서 활동하는 여러 관리들이 업무를 보던 공간으로, 관서들을 이르는 말이다. 궐내각사에는 정치,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기구, 경비와 호위 등 군사 관계 업무를 담당하는 기구, 왕실 시중과 궁궐의 시설 관리를 맡는 관리기구 등이 있다. 주요 기구로는 정승, 판서 등 고위 관리들의 회의 공간인 빈청, 이조와 병조의 관원들이 들어와 인사 업무를 처리하는 정청, 사헌부와 사간원의 언관들이 언론 활동을 논의하고 준비하는 대청,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승지들의 관서인 승정원, 학문을 도야하여 왕의 주문에 대응하고 왕과 함께 경전과 역사책을 토론하는 홍문관, 외교문서를 짓는 예문관, 실록 편찬 등 역사기록을 담당하는 춘추관 등이 있다.

 

궐내각사- 현재 창덕궁의 궐내각사는 인정전의 서쪽에 궐내각사만 복원되어 있는 형편이나, 원래는 선정전의 앞뜰에도 승정원, 사간원, 선전관청, 사옹원, 대전장방 등 빽빽한 건물군으로 궐내각사가 유지되었다. 비록 복원된 것이라고는 하나 창덕궁의 궐내각사는 한국 5대궁 중에서 특히나 궁이 과거 중앙국가행정의 중심이자 치소(治所)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곳으로써 가치가 높고, 왕족과 귀족의 거처에 불과한 서양의 궁/궁전들과의 차이점을 보여주는 곳이다. 내용출처창덕궁/건축물 - 나무위키 (namu.wiki) 

 

참고 궐외각사(闕外各司) 대궐 밖 광화문 앞 세종로에 있던 육조나, 궁 밖에 있는 내수사, 비변사 등은 궐외각사라 하였다.

 

그 외 공간으로는 정규관리의 활동 공간, 군사기구, 왕실시중과 궁궐관리기구 등이 있다. 외전과 내전 동궁 주변에 왕, 왕비, 세자등 주요 인물들의 시중을 드는 내시, 궁녀, 노복, 군병들의 기거 공간이 배치되어 있다.

 

6. 삼도(三道), 폐도(陛道), 踏道(답도).

궁궐의 모든 길은 삼도(三道)로 이루어져 있는데, 삼도의 길 중에 가운데가 약간 높이 솟아있는데, 이곳을 폐도(陛道)라 하고 임금만이 다닐 수 있는 길이다. 폐도를 다니는 사람을 일러 폐하(陛下)라 한다. 폐도(陛道)는 중국의 황제에게만 부칠 수 있다 하여 조선의 임금은 폐도 대신 어도(御道)라고 부르기도 했다. 폐도를 중심으로 동쪽의 길은 문신(文臣), 서쪽의 길은 무신(武臣)이 다니는 길이다.

정전(正殿) 입구의 계단 장식인 踏道(답도)-사진은 창덕궁의 답도

정전(正殿) 입구의 계단 장식인 踏道(답도)를 보면 근정전 계단의 답도는 간략하게 형식만 갖춘 반면 자금성의 답도들은 서양의 대리석 조각에 준하는 정도로 음각과 양각이 깊고 크기도 훨씬 거대함을 알 수 있다. 정전의 정문 앞을 흐르는 금천의 크기도 다르고 궁궐의 벽을 지키는 망루인 십자각의 크기도 자금성 쪽이 더 거대하고 더 사치스럽다. 단순히 궁궐 면적만 비슷한 수준으로 확보했다고 해서 두 궁궐의 크기가 비슷하다고 하는 건 적절치 못하다. 참조 링크: 경복궁과 자금성의 비교 - 나무위키 (namu.wiki)

 

7. 동쪽은 봄, 태양을 서쪽은 가을, 달을 상징.

(경복궁에서) 근정전 앞 관리들 출입하는 동쪽 문은 日華門(일화문)으로 태양을 뜻하는 일()자가 들어가며 文臣(문신)이 드나들었고, 서쪽은 月華門(월화문)으로 달을 뜻하는 월()자가 들어가며 武臣(무신)이 출입하였다.

 

경복궁의 건물과 대문들 중 동쪽은 봄춘()자가 들어있고 서쪽에 있는 부속건물과 대문에는 가을추()자가 들어있다. 사정전 동쪽에 만춘전(萬春殿), 서쪽에 천추전(千秋殿)이 있고 경복궁의 동쪽 문은 건춘문(建春門)이며 서쪽 문을 영추문(迎秋門)이다.

 

8. 궁궐은 아니지만 궁이라는 이름으로 쓰인 건물

왕이 되기 전 머물었던 곳을 잠저(潛邸) 또는 別宮(별궁)이라 하고(:효종의 잠저인 용흥궁), 왕이 궁궐을 떠나 잠시 경유하는 궁을 行宮(행궁)이라한다. :왕이 온천욕을 위해 온양에 잠시 머물렀던 온양행궁 등이 이에 속한다.

 

혹은 "왕의 아버지" 정도의 격이 되는 사람들의 집을 가리켜 ""이라고 붙이기도 한다(:흥선 대원군의 집 운현궁)

 

  운현궁(雲峴宮)    참조 링크 1. 운현궁雲峴宮 -다음백과

                         참조 링크 2. 대원군 정치의 중심 운현궁

대원군의 사가(私家)였던 운현궁(雲峴宮)

운현궁(雲峴宮)은 한성부 중부 정선방에 있던 흥선대원군의 집이자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명복(고종)이 태어나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살던 곳이다. 이곳은 원래 지명인 구름재에서 이름을 따와 운현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운현궁은 고종이 명성황후와 가례를 치른 곳이고,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며 나랏일을 보던 곳이기도 하다. 한양 내의 궁 중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고, 소규모의 궁궐과 같이 사대문을 갖춘 곳으로 궁의 형태를 살펴볼 수 있다.

(참조 링크 운현궁에서 내용 가져옴)

 

이하 내용은 참조 링크: 대원군 정치의 중심 운현궁에서 가져 왔다.

운현궁 뒤편에는 석재를 혼용해 벽돌로 지은 르네상스식 건축물이 이국적인 풍모를 드러내고 있다. 대원군의 손자 영선군 이준용이 거처했던 양관(洋館)이다. 이 건물은 1907년 유럽여행을 마치고 온 이준용을 회유하기 위해 일제가 세운 것으로, 운현궁 후원에 있었던 흥선대원군의 할아버지 은신군과 부친인 남연군의 사당을 철거한 자리에 지었다. 1917년 이준용이 죽은 뒤 순종의 아우인 의친왕의 둘째 아들 이우가 이어받았고 한국전쟁 이후 집이 상당 부분 팔리면서 운현궁 양관도 덕성여자대학교 소유가 됐다. 이곳은 드라마 도깨비에 등장한 바 있다.

 

이하 내용은 참조 링크: 운현궁雲峴宮 다음백과 에서 가져 왔다.

고종의 등극으로 대원군이 된 이하응은 사가(私家)를 증축하여 운현궁이라고 불렀다. 이곳에서 대원군은 서원철폐, 경복궁 중건 등 개혁사업을 추진했으며, 1882년 임오군란 당시에는 이 궁에서 납치되어 중국 심양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당시 운현궁에는 창덕궁과 가깝게 왕래할 수 있는 임금 전용의 경근문과 대원군 전용의 공근문이 있었고, 담장 안에는 아재당, 안채인 이노당·노락당이 있었으며, 선조인 은신군과 남연군의 사당과 영화루도 있었다.

 

덕성여자대학교 교사로 쓰이는 양옥집은 1910년 이후 대원군의 손자 준용의 거처였으며, 일본인이 지은 건물이다

운현궁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건물이며 정원 등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내정에는 아직도 고종이 소년시절에 오르던 노송이 있어, 2품 금관자를 달아주고 대부송이라 일컫는다.

 

칠궁(七宮)    참조 링크: 칠궁

이곳은 원래 1725(영조 1) 영조가 생모이자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淑嬪崔氏)의 신위를 모시고 숙빈묘(淑嬪廟)라 하다가 뒤에 육상묘(毓祥廟)로 바꾸었으며, 1753년 육상궁(毓祥宮)으로 개칭된 곳이다. 그 뒤 1882(고종 19) 불타 없어진 것을 이듬해 다시 세웠다.

칠궁 중 하나인 연호궁

1908년 저경궁(儲慶宮대빈궁(大嬪宮연호궁(延祜宮선희궁(宣禧宮경우궁(景祐宮) 5개의 묘당을 이곳으로 옮겨 육궁이라 하다가 1929년 덕안궁(德安宮)도 옮겨와서 칠궁이라 하였다.

 

칠궁은 동서로 줄지어 있고 이에 따른 행랑, 2채의 재실 등이 배치되어 있다. 동쪽으로부터 배열된 칠궁의 순서와 모셔진 신위의 내용을 보면, 육상궁: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 연호궁: 추존된 왕 진종(眞宗)의 생모 정빈 이씨(靖嬪李氏), 덕안궁: 영친왕의 생모 순헌귀비 엄씨(純獻貴妃嚴氏), 경우궁: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綏嬪朴氏), 선희궁: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暎嬪李氏), 대빈궁: 경종의 생모 희빈 장씨(禧嬪張氏), 저경궁: 추존된 왕 원종(元宗)의 생모 인빈 김씨(仁嬪金氏) 등이다.

 

종묘(宗廟)사직(社稷)

종묘사직(宗廟社稷)이라하면 왕실과 나라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종묘(宗廟)는 유교적 예법에 따라 역대왕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왕실의 사당이며 사직(社稷)은 토지의 신인 사()와 곡식의 신인 직()에게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宗廟(종묘)    내용 및 참조 링크: 국가문화유산포탈 | 종묘 소개 (heritage.go.kr)

종묘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사당으로서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정전과 영녕전, 제례 준비에 필요한 몇몇 부속 전각으로 이루어졌다. 전각은 최소한의 색만 사용하고 화려한 단청을 하지 않았으며 장식과 기교를 최대한 절제하였다. 현재 정전에는 19실에 49, 영녕전에는 16실에 34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정전 뜰 앞에 있는 공신당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종묘제례 및 제례악    내용 및 참조 링크: 국가문화유산포탈 | 종묘 소개 (heritage.go.kr)

종묘제례 및 제례악은 2001'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 2008년부터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으로 관리되고 있다. 세계유산인 종묘에서 개최되는 행사로 유형과 무형의 세계유산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문화유산이다. 종묘제례는 왕조의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로 조선왕조의 제사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종묘대제(宗廟大祭)라고 한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와 조선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구한 역사를 이어 내려온 소중한 조상전래의 제례의식이다. 조선조에는 춘하추동 사계절과 섣달에 행하였으며 1969년 대동종약원에 의해 복원되어 지금은 매년 5월 첫째 주 일요일에 봉행되고 있다.

 

종묘대제에는 종묘제례가 봉행되며 각 제사의례에 맞추어 경건한 분위기를 고양시키기 위한 음악과 무용으로서 종묘제례악이 따른다. 제례는 신을 맞이하는 영신례(迎神禮), 초헌, 아헌, 종헌례에 이어 음복례가 행해지고, 신을 보내 드리는 송신례(送神禮)를 갖춘 후에 축()과 폐()를 망료(望燎) 위에 불사르는 것으로 끝난다.

 

종묘제례악은 우리 고유의 음률로 왕조의 창업과 기상을 노래하고 있으며 모든 행사의 순서에 맞추어 춤과 음악이 조화를 이룬다. 엄숙한 제사 의례만큼이나 장엄미가 돋보이는 종합예술로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크며 동양에서도 드물게 남아 있는 고전음악이다.

참조링크 : 종묘제례악

 

사직단    내용 출처(민족문화대백과) 및 참조 링크: 사직단

사직단의 위치는 주례(周禮)에 잘 규정되어 있는데, ‘오른쪽에 사직, 왼쪽에 종묘라 하였다. 이 규정은 법궁을 중심으로 사직은 오른쪽에, 종묘는 왼쪽에 둔다는 뜻이며, 중국이나 우리나라 모두 준수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종묘는 수도 한 곳에만 설치하는 데 반해 사직은 수도뿐만 아니라 지방 행정단위인 주현(州縣)마다 설치하였다. 주현의 사직도 관아의 서쪽, 곧 오른쪽에 세웠다.

 

사직단은 사단(社壇)과 직단(稷檀)을 따로 설치하였으며 사단은 동쪽에, 직단은 서쪽에 위치하였다. 각 단에는 다섯 가지 색깔의 흙을 덮었는데 동은 청색, 서는 백색, 남은 적색, 북은 흑색, 중앙은 황색 흙으로 하였다. 또한 각 단에는 신위를 모셨는데 사단에는 국사신(國社神)을 북향하여 모시고 후토신(后土神)을 동향하여 배향하였으며, 직단에는 국직신(國稷神)을 북향하여 모시고 후직신(后稷神)을 동향하여 배향하였다. 각 단에는 사방으로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단 둘레에는 유()라고 하는 울타리를 치고 그 유에도 사방으로 문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형식은 후대에도 크게 변화가 없었다.

 

보통 도성의 서쪽에 사직단을 설치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한성부 의인달방(儀仁達坊)에 있는데 지금의 사직공원 자리이다.

 

동묘(東廟)=동관왕묘(東關王廟)    내용 및 참조 위키백과 링크: 동관왕묘

중국 촉나라의 장수 관우(關羽)를 모신 관왕묘로,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다. 1963121일에 대한민국의 보물 제142호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 땅에서 싸운 명나라 장수들은 관우의 신령을 보는 체험을 하고 곳곳에 관왕묘를 세웠다. 이 보고를 받은 명나라는 전쟁이 끝난 뒤 조선에 관왕묘를 지으라는 요청을 하였고, 이에 동대문 밖에 1599년 공사를 시작하여 1601(선조 34) 동관왕묘를 완공하였다. 명나라 신종이 친필 현판과 함께 건축자금을 지원하였다.

.동관왕묘 – 사진출처: https://blog.naver.com/hermione555/222465522635

동관왕묘의 중심건물은 두 개의 건물이 앞뒤로 붙어 있는데, 이것은 중국의 절이나 사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다. 지붕은 높은 '()' 자 모양과 '()'자 모양이 합쳐진 '()'자 모양이다. 실내 공간도 앞뒤로 나뉘어 있는데, 앞은 제례를 위한 전실이고 뒤는 관우와 부하장군들의 조각상을 둔 본실이다.

 

관왕묘는 서울의 동서남북에 모두 지어졌는데 그 중 동관왕묘가 제일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넓은 벽돌 벽과 독특한 지붕모양, 조각상, 실내의 구성과 장식 등에서 중국풍 건축의 모습을 보여주는 17세기 제사시설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곳이다.

 

남관왕묘는 조정에서 관리하며 왕실에서도 제사를 지냈으나 1908(융희 2) 제사를 폐지하고 동관왕묘는 지방 관청으로 이괄했다. 남대문 밖에는 동묘보다 먼저 생긴 남관왕묘가 있었으며, 고종 때에는 북관왕묘와 서관왕묘를 지었다. 남관왕묘는 다른 곳으로 옮겨졌고 북관왕묘와 서관왕묘는 조선총독부가 철거했다.

 

[ 퀴즈-B ]

퀴즈1. 궁궐 내에서 대신(大臣)들이 업무를 보던 관청들이 모여 있는 곳을 무어라 하나?

         (오늘날 정부 종합청사에 해당하는 곳을 말함)

퀴즈2. 왕이 조의(朝議-아침 조회)를 할 때 왕이 계신 정전(政殿) 내부[=당상(堂上)]에서

        국사(國事에 대해 임금과 논의를 하거나 왕이 하시는 말씀(下交)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관리를(또는 그런 직책) 무어라 하는가? ( OO官 )

퀴즈3. 왕이 정사를 보는 정전(政殿) 앞마당에 각 품계에 따라 관리들이 도열하는 위치에

         (주로) 돌로 만들어 세워둔 것을 무어라 부르는가?

퀴즈4. 흥선대원군의 사저(私邸)로 대원군이 섭정을 하며 나랏일을 보던 곳이다. 고종이

         태어난 곳이며 고종이 명성황후와 가례를 치른 곳이기도 하다. 이곳의 명칭은?

퀴즈5. 종묘사직(宗廟社稷)이란 말의 뜻은? 이와 관련된 서울에 있는 장소 명칭은?

퀴즈6. 관우(關羽)를 모신 사당의 이름은?

 

[ 퀴즈-B 정답 ]

퀴즈1 . 궁궐 내에서 대신(大臣)들이 업무를 보던 관청들이 모여 있는 곳을 무어라 하나?

             (오늘날 정부 종합청사에 해당하는 곳을 말함) .=> 궐내각사

퀴즈2 . 왕이 조의(朝議-아침 조회)를 할 때 왕이 계신 정전(政殿) 내부[=당상(堂上)]에서

             국사(國事에 대해 임금과 논의를 하거나 왕이 하시는 말씀(下交)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관리를(또는 그런 직책) 무어라 하는가? .=> 堂上官(당상관)

퀴즈3답.  왕이 정사를 보는 정전(政殿) 앞마당에 각 품계에 따라 관리들이 도열하는 위치에

            (주로) 돌로 만들어 세워둔 것을 무어라 부르는가? .=> 품석(品石), 品階石(품계석)

퀴즈4 . 흥선대원군의 사저(私邸)로 대원군이 섭정을 하며 나랏일을 보던 곳?

             답.=> 운현궁(雲峴宮)

퀴즈5 . 종묘사직(宗廟社稷)이란 말의 뜻은? 이와 관련된 서울에 있는 장소 명칭은?

             답.=> 왕실과 나라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종묘(宗廟)는 역대왕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왕실의

                      사당이며 사직(社稷)은 토지의 신인 사()와 곡식의 신인 직()에게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해당 장소의 명칭은 宗廟(종묘) 사직단(社稷檀)이다.

퀴즈6 . 관우(關羽)를 모신 사당의 이름은? 동묘(東廟)=동관왕묘(東關王廟)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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