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에는 모두 24개의 다리가 있었는데 광교(廣橋)ㆍ수표교(水標橋)ㆍ관수교ㆍ오간수교(五間水橋) 등이 유명하였다. 그 중 수표교는 수위 측정을 위한 수표석(水標石)과 함께 유명하다. 수표석(水標石)은 1973년 10월에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졌다. 청계천 다리에는 조선 시대 전설과 풍류를 말하는 세시풍속이 있는데 연날리기와 답교(踏橋)는 특히 유명하다.
1441년(세종 23)에 다리 옆에 개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서 수표(水標)를 세운 이후부터는 수표교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주변에 있는 마을은 수표동 (水標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수표는 하천수위를 과학적, 계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기구로 측우기와 함께 세종 때 만들어진 대표적인 과학 기기의 하나이다.
수표는 청계천의 마전교 서쪽과 한강변에 세워졌는데, 처음에는 물 속에 돌을 놓고 그 위에 구멍을 파서 나무로 만든 기둥을 세웠다. 나무기둥에는 눈금을 새겨 수위를 알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나무로 만든 수표는 쉽게 망가져 15세기 성종 때 돌기둥으로 교체하였다.
수표교는 광통교와 함께 청계천에 있던 가장 유명한 다리로 다리밟기, 연날리기 등이 행해지던 대표적인 민속놀이 공간이었으며, 사람의 통행이 많았던 만큼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전해진다. 특히 수표교에는 숙종과 장희빈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가 남아있다.
청계천 물줄기가 도성을 빠져나가는 지점, 즉 동대문에서 을지로5가로 가는 성벽 아래 청계천 6가에 있던 조선시대의 수문(水門)이다. 이 다리는 조선시대 한성에 성곽을 쌓으면서 청계천 물이 원활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다섯 칸의 수문이 홍예(虹蜺-무지개 다리 Arch)로설치되어 오간수다리 · 오간수문 등으로 불렀다. 홍예 위에 성곽을 쌓아 올렸으며, 아치 모양의 구멍을 서로 연결하여 성벽 안쪽으로 장대석을 연결하여 다리를 놓았다.
서울시 안에 있는 하천은 모두 35개이다. 이 가운데 국가 하천은 한강, 중랑천, 안양천 3개가 있고 지방 1급 하천으로는 청계천이 있다. 나머지 31개의 하천은 모두가 지방 2급 하천이다. 31개의 크고 작은 지방 2급 하천들은 북쪽과 남쪽으로 흘러 한강으로 합류하여 서해 바다로 들어간다.
그러나 서울시에 있는 총 31개의 지방 2급 하천 가운데 하천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하천들이 많다. 이미 완전히 복개가 된 하천으로는 만초천, 면목천, 월곡천, 녹번천, 봉원천, 삼성천이 있으며 홍제촌, 도림천 등은 반복개(半覆蓋) 상태이다.
경기도 의정부시 수락산 북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양주군에서는 광사천, 어둔천과 합류되고, 의정부시에서는 부용천, 백석천, 회룡천, 호원천 등의 지류와 합류되어 서울특별시로 유입되어 총 14개 지류를 합류하여 한강으로 유입되는 국가하천이다.
서울 정릉천과 서울 북동쪽의 미아동, 수유동, 우이동, 도봉동과 노원구 지역의 물도 합류되고 사근동에서 청계천과 합류(총 14개 지류)한 뒤, 금호동과 성수동의 강변북로 교량 아래에서 한강에 합류된다. 서울에서는 성북구, 강북구, 도봉구, 노원구, 중랑구, 동대문구, 성동구 등 7개구를 거치는 동안 각 행정자치구의 자연스런 경계 역할을 한다. 과거 중랑천은 도봉동에서는 ‘서원천(書院川)’, 상계동 부근에서는 한강의 새끼 강이라는 뜻으로 ‘샛강’이라고 불렸다.
경기도 용인시 법화산에서 발원해 성남시와 서울특별시 강남구·송파구를 지나 서울 종합운동장 근처에서 한강으로 유입되는 하천이다. 탄천은 성남시의 옛 지명인 탄리(炭里)에서 비롯되었다. 탄리는 지금의 성남시 태평동·수진동·신흥동 등에 해당하는 곳으로 과거에는 독정이·숯골 등의 마을이 있었다. 조선 경종 때 남이(南怡) 장군의 6대손인 탄수(炭叟) 남영(南永)이 이곳에 살았는데, 그의 호 탄수에서 탄골 또는 숯골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북한산성(北漢山城)은 북한산에 쌓은 산성이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산1-1번지에 위치한다.
북한산성(北漢山城)은 북한산성은 백제가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뒤 도성을 지키기 위해 쌓은 포곡식 석축산성으로 132년에 축조했다. 고구려, 신라의 치열한 쟁탈지가 되었고 신라는 553년 이곳에 진흥왕순수비를 세웠다. 이후 고려 현종이 성을 증축했으며 숙종(1711년)때 대규모의 축성 공사를 실시해서 석성을 완성했다.
현재 삼국시대 토성은 약간 남아 있을 뿐이고, 대부분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이 남아 있다. 14개의 문, 3개의 장대와 함께 유사시 어가를 북한산성으로 옮길 행궁을 건립하였다. 둘레가 7,620보(步)이다.
지형에 따라 성벽 없이 여장(女檣)만 쌓은 곳도 있는데, 그 길이는 1,457보이다. 여장(女檣)이란 성벽 위에 설치한 낮은 담장으로 적을 관측하고 공격하면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 진 것으로 여자도 넘을 수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홍지문 및 탕춘대성(弘智門 및 蕩春臺城)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1976년 6월 23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
탕춘대성은 인왕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북쪽의 능선을 따라 내려가다가 사천을 지나 북한산 서남쪽의 비봉 아래까지 연결하여 축성한 산성이다. 이 산성의 명칭을 탕춘대성이라고 한 것은 현재 세검정이 있는 동쪽 약 100여m 되는 산봉우리에 탕춘대(蕩春臺)가 있었던 것에서 연유한 것이며, 한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성(西城)이라고 하였다.
조선왕조 숙종은 왕 37년(1711)에는 북한산성을 축성하였고 다시 탕춘대성을 축조하였다. 탕춘대성 전체의 길이는 약 4km 이었고 성내에 연무장(鍊武場)으로 탕춘대 터(오늘날 서울세검정초등학교)에 연융대(鍊戎臺)를 설치하는 한편, 비상시를 대비하여 선혜청(宣惠廳) 창고와 군량창고인 상·하 평창(平倉)을 설치하였다. 그 후 탕춘대성의 축성과 함께 그 성안을 총융청(摠戎廳) 기지로 삼고, 군영도 배치하였다.
현존하는 탕춘대성은 도성이나 북한산성과 같이 주 성벽과 여장(女墻)을 쌓았으며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일정한 간격으로 성구(城口)를 뚫어 놓았다. 현재 홍지문이 복원되어 있고, 상명대학교 북쪽으로 성곽이 남아있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시기에 축조되어 조선시대 수도 한양을 지키던 성곽이다. 흔히 북한산성(北漢山城)과 함께 조선의 도성인 한양의 방어를 위하여 쌓은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성벽의 바깥쪽은 경사가 급한데 비해 안쪽은 경사가 완만하여, 방어에 유리하면서도 적의 접근은 어려운 편이다. 봉암성(蜂巖城), 한봉성(漢峰城), 신남성(新南城) 등 3개의 외성과 5개의 옹성도 함께 연결되어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성벽과 성 안에는 많은 시설물과 건물이 있었지만, 동·서·남문루와 장대(將臺)·돈대(墩臺)·보(堡)·누(壘)·암문·우물 등의 방어 시설과 관청, 군사훈련 시설 등이 있다.
남한산성의 수비는 총융청이 맡아 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다. 여기에는 전·좌·중·우·후의 5관(五管)이 소속되었는데 전영장(前營將)은 남장대(南將臺)에, 중영장은 북장대에, 후영장과 좌영장은 동장대에, 우영장은 서장대에 진을 치고 있었다. 지금은 서장대(일명 守禦將臺)만 남아 있다
남한산성의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게 인정되어 2014년 6월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신규 등재되었다.
1637년 2월 24일(인조 15년 음력 1월 30일)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일으키고 한양으로 빠르게 남하하자 조선의 왕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 하였다. 하지만 청군이 길을 막아 강화도로 갈 수 없게 되었고 이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한다.
그러나 남한산성에 피신하였던 백성들이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힘들어하는 상황과 성내의 물자가 떨어지자 47일간 대항하였지만 끝내 청나라와 치욕스러운 강화(말이 강화조약이지 항복이나 다름없었다)를 맺으니 이를 ‘삼전도의 굴욕’이라 한다. 삼전도(三田渡)는 서울시 송파구 삼전동에 있었던 나루로 삼밭나루라고도 불렸다.
인조는 세자와 신하들을 이끌고 남한산성 문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의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며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흔히 풍납토성(風納土城)=풍납동토성(風納洞土城)이라고도 하는 데 『삼국사기』백제본기(百濟本紀)에 나오는 위례성(慰禮城)으로 추정하는 견해이다. 또한, 평고성을 풍납토성으로 보고, 이 성이 서울 광진구 광장동 뒷산에 있는 아차산성(阿且山城)과 연결되어 방어적 기능을 담당했던 성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서북쪽으로 한강에 직면하고 있고, 강 맞은편에는 아차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남쪽으로 성내천을 사이에 두고 2.5km 거리에 몽촌토성이 있으며, 동쪽으로 이성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풍납토성은 서쪽으로 한강을 끼고 충적대지상에 구축한 순수 평지토성으로 약간 동쪽으로 치우친 남북 장타원형을 띠고 있다. 즉, 북벽과 남벽은 짧은 벽으로 직선에 가깝고, 동벽과 서벽은 단벽에서 둔각을 이루며 꺾이는데, 그중 동벽은 중앙부가 완만한 형태를 띠고 있다.
풍납토성은 현재 북벽과 동벽, 남벽 등 일부가 약 2.1㎞ 정도가 남아 있으며, 유실된 서벽을 포함한다면 전체 길이 3.5㎞에 달하는 거대한 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풍납토성과 함께 백제가 성립된 시기에 만들어진 도성(都城)이다. 성벽 조사에서 출토된 중국 서진(西晉)대 전문 도기 조각이 나오므로 토성을 축조한 연대의 상한은 3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된다.『삼국사기』등에 기록된 것처럼, 고구려의 남진에 의해서 한성(漢城)이 함락되고 웅진으로 천도하였던 475년까지 백제의 도성으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판축 성토에 의한 토성 축성은 백제 한 성기를 중심으로 한 백제 토성의 유형과 축성 방법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기준으로 알려져 있다. 몽촌토성은 한강 남안 성내천(城內川)을 끼고 있는 언덕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성의 외벽은 언덕 경사면을 깎아내어 급경사와 단을 만들고 두 번째 단에는 목책(木柵)을 설치하였다. 현재 목책은 본성의 서북벽·동벽과 외성 등 3곳에서 확인되었는데, 생토암반층에 큰 나무를 박아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 보조기둥을 세웠다. 목책의 높이는 2m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이 목책은 발굴 조사된 원래의 목책 기둥 자리를 따라 그 위에 추정 복원한 것이다.
몽촌토성의 북쪽 기슭에는 1992년 몽촌역사관이 건립되어 한강 유역을 포함한 백제문화의 대표적인 유적과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암사동·명일동·역삼동의 선사시대 주거지와 가락동·방이동·석촌동의 고분군, 몽촌토성의 유적 모형과 출토 유물을 전시하여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서울특별시 광진구에 있는(워커힐 호텔 뒷산에 있는) 아차산의 경사진 산허리 윗부분을 둘러쌓은 테뫼식(山頂式) 산성으로. 삼국시대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 축조한 성이다.
아차산성(阿嵯山城)은 아단성(阿旦城)·장한성(長漢城)·광장성(廣壯城) 등으로 불리는데 <광개토왕비문>의 영락 6년조에 광개토왕이 백제로부터 공취한 58성 가운데 아단성의 이름이 보인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이끈 군대가 백제의 한성을 함락시킴에 따라 개로왕이 생포되어 아단성 아래서 처형되었다. 이렇게 아단성은 고구려 군대가 주둔한 군사진지였으며, 그 뒤 77년간 한강 유역을 통치한 고구려의 전방기지로서 기능하였다.
또 조선 후기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아차산에는 양진성과 아차산고성이라는 2개의 성곽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양진성은 나루를 방비하기 위한 성곽으로 현존하는 유구나 문헌자료를 통해 볼 때 아차산의 지봉(芝峰)을 따라 광나루 북방에 위치한 광진성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아차산고성은《대동여지도》에 보이는 망우리 쪽 아차산에 소재하고 있는 성곽을 아차산고성의 유지(遺址 남은 터)로 보고 있다.
아차산성은 석축성으로 기본 형태는 테뫼식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산 정상부를 돌아가며 축성한 테뫼식과는 달리 아차산 능선 말단부의 남쪽 지역을 적절히 이용하여 작은 계곡이 포함되도록 함으로써 성 내에 우물과 작은 계곡이 흐르는 포곡형 산성에 가까운 형태이다.
한편 장한성의 유구(遺構 남아 있는 구조물)는 본래 뚝도 부근의 한강변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고지를 따라 아차산에 이르고 다시 망우리에 이르는 산줄기를 따라 용마봉에 못 미치는 벼랑바위산에 이르기까지 산마루를 따라 석성 터가 있으며, 구리시 아천동까지 그 유구가 나타난다. 이를 장성 또는 장한성이라 하는 데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 고적조에 '장한성이 한강 위에 있는데 신라 때 여기에 중요한 진영을 두었으며 고구려에 의해 점령당하였다가 군사를 동원하여 수복하고, 장한성가(長漢城歌)를 지어 그 공을 기리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성은 산 정상이나 산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토성이나 석성이 아니고 산 정상을 지나 등선을 따라 일직선 형태로 축조된 성벽으로 하남시 춘궁리에 있는 이성산성과 축성양식이 같은 신라시대의 산성으로 특히 삼국통일 전쟁 수행을 위한 북진기지 가운데서도 군사적 요충으로 추정된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행주산성은 삼국시대부터 토축(土築) 산성이 있었다. 행주산성이 처음 축성된 것은 통일신라시대(7∼8세기경으로 추정)로 추정하고 있다. 강안(江岸)의 돌출된 산봉우리를 택하여 산 정상부를 에워싼 소규모의 내성(內城)과 북쪽으로 전개된 작은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外城)의 이중구조를 하고 있으며 둘레가 약 1,000m다.
백제의 초기 영역에는 서해안으로의 수운(水運)과 관계된 중요한 거점이었으며, 특히 나당전쟁(羅唐戰爭) 때까지 남북교통의 요충에 해당하여 고구려와 신라의 공방전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행주(幸州) 산성은 해발 124.8m의 덕양산의 해발 70∼100m에 이르는 능선을 따라 축조되어 있는 테뫼식(山頂式) 산성으로, 남쪽은 한강이 연하여 있고, 동남쪽으로는 창릉천(昌陵川)이 산성을 돌아 한강으로 흘러들고 있어 자연적인 해자(垓字)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산성의 동남쪽과 남쪽 일대는 자연 경사가 매우 급하여 자연적인 요새로서의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 행주산성에서 조선시대 임진왜란(권율(權慄) 장군의 행주대첩) 당시 부녀자들까지 동원되어 관민(官民)이 일치단결하여 싸웠다. 특히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서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여기에서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 행주대첩으로 인하여 조선군과 명나라 군사가 사기를 회복하여 왜적을 남으로 쫓고 정부가 환도(還都)하게 되었으니 그 의의는 실로 크다 하겠다.
호암산성(虎巖山城)은 금천구 시흥2동 산 93번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리상으로 서울의 남서쪽에 해당된다. 산성의 입지조건으로 볼 때 호암산성은 안양 금천 일대의 평야를 관할하는 요새지로서 서쪽의 해안과 북쪽으로 침입하는 적에 대한 공격과 방비를 위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해발 347m의 조그만 봉우리를 최고봉으로 하는 산 정상의 성 내부는 비교적 평탄지형을 이루고 있다. 유적의 동쪽으로 직선거리 약 2km 지점에 해발 629m의 관악산 정상인 연주대가 위치하고, 동남방 1km 지점에 해발 460m의 삼성산 정상이 위치하고 있다.
문무왕 12년(672)의 '한산주에 주장성(晝長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주목된다. 출토된 유물·유적과 지리적 입지조건을 바탕으로 문헌기록과 비교 검토한 결과, 호암산성의 축성 시기는 문무왕 12년경으로 보고 있다. 신라가 당나라와의 전쟁 때 한강을 넘어 수원 지역으로 내려가는 육로와 남양만으로 침입하는 해로를 가장 효과적으로 방어 공격하기 위해 세워진 요새지였다고 하겠다.
또한 호암산성 발굴에서 통일신라시대 이외에 고려시대의 유물도 많이 출토되었고, 임진왜란 당시 한성 수복을 위해 행주산성과 연합한 전라병사 선거이(宣居怡) 장군이 인솔하는 조선 군사들이 주둔한 곳이기도 하다.
한양 도성 성곽은 둘레 약 17㎞로 조선왕조가 수도를 방어·수호하기 위해 쌓은 성곽으로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산은 북쪽의 백악산(白嶽山링크:백악산-오늘날 북악산)을 시작으로 동쪽의 낙산(駱山 링크:낙산-낙타같이 생긴 산), 남쪽의 목멱산(木覓山 링크:목멱산-남산의 옛 이름),, 서쪽의 인왕산(仁王山 링크:인왕산)이 한양(서울) 중앙부를 둘러싸고 있다.
한양 도성의 성곽은 이들 4개의 산을 연결한 구간과 숙종 때 축성된 탕춘대성과 북한산성 행궁지 등을 연결한 조선시대 성곽을 말한다. 도심 바깥으로 탕춘대성, 북한산성이 서울을 둘러싸고 있고 홍지문(弘智門)은 蕩春臺城(탕춘대성)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출처:홍지문 및 탕춘대성
흥인지문은 태조 때 1397년(태조 6)에 1차 완공되었다. 1451년(문종 1)에 중수를 시작하여
1453년(단종 1)에 끝냈다. 이 문의 현판은 오행(五行)의 동쪽을 나타내는 인(仁)을 포함하며, 동대문 일대가 서울 도성 안에서 가장 낮은 지역으로 바로 남쪽에 청계천이 흐르고 있으므로, 땅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 1869년(고종 6) 개축하면서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고 ‘之’자를 보강하였다고 한다.
흥인문은 주위 지형의 열악한 조건을 보완하고자 옹성을 두른 것이 특징이다. 이 옹성은 문 앞쪽에 반달 모양으로 둥글게 축성되어 옹성 안에 들어온 적을 앞뒤에서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왜적이 가장 먼저 입성하였다.
(서쪽)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돈의문(敦義門) -사진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돈의문은 도성의 2차 공사가 끝나면서 다른 성문과 함께 건축되었다. 처음에는 경희궁 서쪽 언덕 지점에 위치하여 서전문(西箭門)이라 불리었다. 그러다가 1422년(세종 4) 2월에 도성을 고쳐 쌓게 되면서 서전문을 헐고 그보다 남쪽 지점에 새로 돈의문을 세웠다. 이후로 돈의문은 통칭 ‘새문[新門]’이라 불리게 되었다. 돈의문은 의주(義州) 국도의 관문으로 황해도와 평안도를 거쳐 중국으로 통하였다.
일제에 의해 철거되어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지금의 신문로 큰길과 정동에서 평동으로 통하는 길이 교차하는 마루턱에 위치하였다. 이괄(李适)의 난과 을미사변에 관련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남쪽)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사진 출처 : 한국관광공사
숭례문은 도성의 정문으로 청계천과 만초천(蔓草川)을 가르는 언덕에 세워져 있다. 도성 8문 가운데 가장 웅장하고 규모가 크며 서울의 얼굴 구실을 하였다. 남대문의 건축은 홍예(虹霓 Arch)와 문루 등 그 구조에 특별히 유의하였는데 1396년에 시작하여 1398년(태조 7) 2월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되었다.
1448년(세종 30) 숭례문의 지대를 높여 남산과 인왕산의 지맥을 연결시켜 경복궁을 아늑하게 껴안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풍수지리설과 당시의 여론에 따라 다시 건축하였다. 이때의 숭례문이 오늘에 전하는 것인데 1479년(성종 10)에 중수되었다. 한편 1962년 개수 공사 때 세종과 성종 때 개축 또는 중수한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숭례문의 현판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글씨로 전하는데, 다른 도성문과 다르게 횡액(橫額)이 아니라 종액(縱額-세로로 써진 편액)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오행사상에 따른 것으로 ‘예(禮)’자는 오행의 화(火)에 해당하는 글자인 까닭에 불이 타오르는 형상에 따라 세워서 달았다고 한다. 혹은 한양의 조산(朝山)인 한강 건너의 관악산이 오행의 화(火)에 해당되어 그 불기운이 도성을 범접하게 되므로 숭례문의 현판을 세워 맞불로 도성을 보호하고자 했다는 전설이 있다.
(북쪽) 숙정문(肅靖門)또는 숙청문(肅淸門)
숙정문(肅靖門) -사진 출처 : 두산백과
숙청문은 한양의 주산(主山)인 북악의 동쪽 마루턱에 위치하였으나 그 규모는 대문의 형식을 갖추지 못하고 소문(小門)의 규모였으며 오랫동안 문루마저 갖추지 못하였다. 숙청문의 원래 자리는 지금 자리의 약간 서쪽에 위치하였었다가 1504년(연산군 10)에 옮겨졌다. 숙청문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1413년(태종 13)에 폐문되었는데, 즉 북쪽은 음(陰)에 해당되어 이 문을 열어 놓으면 음기가 번성하여 도성 안의 부녀자들이 놀아나 풍기가 어지러워지기 때문에 문을 꼭꼭 닫아둔다고 하였다.
숙청문은 위치상 통행에는 거의 이용되지 않았고, 단지 장마가 지면 비 그치기를 기원하는 영제(禜祭), 즉 기청제(祈晴祭)를 여기에서 거행하였다. 또 예종 때부터는 가뭄이 들면 양기가 많은 남대문을 닫고 음기 서린 북대문을 열어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를 지냈다. 숙청문은 중종 이후 모든 기록에 ‘숙정문(肅靖門)’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현재 새로 복원한 문루에도 ‘肅靖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보신각(普信閣) 또는종각(鐘閣)은서울시종로구관철동종로사거리에 있는 전통 2층한옥 누각이다. 보신각종을 걸어 놓기 위해 만든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구조로 되어 있다. 1396년(조선태조 5년) 창건했다가, 1869년(조선고종 6년), 1979년 8월에 재건했다. 보신각 터(普信閣址)라는 명칭으로 1997년 11월 10일에서울특별시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되었다.
홍화문((弘化門)은 혜화동에서 삼선동으로 뚫린 길 마루턱에 자리 잡아 도성에서 함경도 등 북방과 직결되는 관문이었다. 1484년(성종 15) 창경궁이 완공되어 그 정문을 홍화문이라 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해 1511년(중종 6) 혜화문으로 개칭하였다. 혜화문은 도성의 소문 가운데 하나였지만 대문의 구실을 하였다.
즉 경원가도(京元街道)가 여기서 연결되어 있었고, 북대문인 숙청문(肅淸門, 후에 肅靖門)이 항상 닫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문을 통행하였다. 그리고 여진(女眞)의 사신이 조공하기 위하여 한양에 입성할 때 이용하던 문이기도 하다.
처음 건립하였을 때의 문루는 언젠가 없어지고 1744년(영조 20) 어영청(禦營廳)에 명하여 문루를 건축하였다. 이후 일제의 도시계획이라는 명목 아래 문루는 1928년에 헐리고, 홍예와 석문마저 1939년에 사라진 것을 1994년 길 마루턱 북쪽에 복원하였다.
광희문은 1396년 도성 축성 때 건축되었다. 문이름은 ‘광명의 문’을 의미하나 개천 수구(水口)에 가까운 곳에 있어 수구문이라 불렀으며, 도성 안 장례 행렬이 동쪽 성 밖으로 나갈 때 통과하는 문이어서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하였다.
동대문과 남대문 사이의 중구 광희동에 있어 남소문이라 할 수 있으나 따로 도성에서 한강 나루터로 바로 통하는 문이 필요하게 되어 세조 때 장충단공원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마루턱에 별도의 남소문을 건축하였다.
한편 명지대 홍순민 교수는 수구문에 대해서 부근으로 청계천 물길이 나가기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었다고 하는 말이 있으나 이는 억측이다. 청계천 물길은 흥인문이 더 가깝다. 수구문이란 한강으로 출입하는 문이란 뜻이다. 더구나 이 문을 그 부근에 늘 시신이 쌓여 있었다 하여 시구문(屍口門)이라 했다는 것은 일본인들의 악의적 왜곡이다. 참조 링크:문(門) 이름에 숨은 뜻
그러나 남소문 건립 후 의경세자(懿敬世子 : 성종의 아버지, 德宗)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풍수 지리적으로나 실용적으로나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12년 만에 폐문되었다.
조선 전기 왜국 사신들은 옥수동의 한강 두모포(豆毛浦)나루를 거쳐 광희문을 통하여 인현동에 있던 지정 숙소인 동평관(東平館)에 머물렀다. 1915년경 문루가 자연 붕괴된 이래 홍예(虹蜺 Arch)만 남아 있었는데, 1975년 서울 성곽을 수축하면서 홍예 석축을 해체하여 남쪽으로 15m 이전 복원하면서 문루 12평도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창의문은 ‘의로움을 표창한다’는 뜻으로 자하문(紫霞門)으로도 불렸고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도성을 축조할 때 함께 축조되었는데, 1413년(태종 13) 지리도참설에 따라 일시적으로 문이 닫히기도 했다. 그러나 1422년(세종 4) 숙청문과 함께 군인의 출입문으로 하였고, 궁궐의 담장 축조나 국가의 큰 공사가 있을 때 일시 열어 통행하였다.
1623년에는 인조반정의 반정군(反正軍)이 홍제원(弘濟院)에 집결하였다가 세검정을 거쳐 이 창의문을 열고 도성에 들어와 광해군을 쫓아냄으로써 인조 정권이 창출되었다. 1741년(영조 17) 성문과 문루를 개수하면서 인조반정의 반정공신 1등에서 3등까지의 공신 이름을 새긴 현판을 걸었으며, 지금도 전해 오고 있다.
창의문은 서울 성곽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완형을 지니고 있으며 지금도 성곽의 일부가 연결되어 있다. 창의문 구조의 특징으로, 문 밖의 지세가 마치 지네의 형상과 같아 그 기세를 제압하고자 지네와 상극인 닭의 모형을 나무로 만들어 추녀에 매달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