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한양) 탐구04-왕과 왕족의 호칭, 내시, 궁녀, 묘호(廟號), 왕릉, 왕비릉


 

(배경 영상,음악)  장녹수 -정미애

    추후 링크가 끊어지면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 나올 수도 있으며,

    아래 음악이나 동영상 보려면 ▷클릭, 멈추려면 stop □ 버튼 클릭.    

    아래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보이면  https://www.youtube.com/embed/SrNEkyCBqV4<=요걸 클릭

 


 

* 본문 중 밑줄 친 링크는 본문 내용을 가져오거나 참고한 곳으로 필요시 밑줄 친 link를 클릭. , 밑줄 친 링크는 현재는 연결되지만 추후 링크 주소 변경되면 연결이 안 될 수도 있음.

 

<참조한 주요 링크>

1. 왕비, 후궁의 호칭 참조링크1: 후궁 및 궁녀의 품계

2. 왕의 묘호((廟號참조링크1: 임금님의 이름과 묘호(廟號)

                     참조링크2: [조선왕 호칭/이름] ((() 묘호 차이

3. 조선왕실(선원계보) (heritage.go.kr) -국가문화유산포탈

 

* 잠깐 퀴즈! - 조선 왕과 왕족의 호칭과 묘호((廟號), 왕릉, 왕비릉에 대한 퀴즈.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 퀴즈-C ]

퀴즈1. 왕의 정실부인을 부르는 말은 무엇이며 또한 기거하던 곳을 부르는 호칭은?

퀴즈2. 왕의 정실부인(왕비)의 소생인 아들을 부르는 명칭?  

        왕의 정실부인인 아닌 후궁의 소생인 아들을 부르는 명칭은?

퀴즈3. 왕의 정실부인(왕비)의 소생인 딸을 부르는 명칭? 

        왕의 정실부인인 아닌 후궁의 소생인 딸을 부르는 명칭은?

퀴즈4. 덕혜옹주는 누구의 딸인가?

퀴즈5. 임금의 시중과 궁궐의 잡다한 일을 맡은 (거세자만이) 임명된 관리 명칭은?

퀴즈6. 임금이나 중전, 후궁을 보필하던 궁녀의 총수(우두머리) 상궁의 명칭은?

퀴즈7. 조선의 왕실이 27대 인데 이 중 장자(長子)가 왕위에 오른 분은 몇 분일까?

 

(알림)

이하 내용은 위에 소개한 참조 링크 및 본문 내용에 링크된 참고 자료에서 가져온 것이며 항목과 내용 일부는 편집, 가감된 것도 있음.

 

A.조선왕실 내용 출처 및 참조링크:  조선왕실(선원계보) (heritage.go.kr) 

조선 왕실은 왕과 왕비를 비롯해 왕세자와 왕세자빈, 왕자, 왕녀, 후궁 등이 구성원을 이룬다. 왕은 단 한명의 부인인 왕비를 두었으며, 왕비가 세상을 떠날 경우에는 그의 자리를 이어서 다음 왕비(계비繼妃)를 둔다.

 

왕비(王妃) 참조링크: 왕비-위키백과

왕비는 제후왕의 부인인 비()로서, 궁중에서 대왕대비와 왕대비 다음으로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또는 왕비를 중궁(中宮) 또는 중전(中殿)이라 부르기도 했다. 정실부인은 사별 후 재혼하지 않는 이상 단 한 명, 그 외엔 후궁으로 규정된다. 조선에서 왕비는 국왕의 비()로서 품계는 국왕과 같은 무품이었고, 내명부와 외명부의 수장이었다

 

왕세자, 왕세자빈, 대군(大君), (), 공주(公主), 옹주(翁主), 후궁(後宮)

왕의 아들 중에서 다음 대의 왕위에 오를 아들을 왕세자(王世子)라 하였고 그의 부인을 왕세자빈(王世子嬪)이라 하였다. 왕세자를 제외한 나머지 왕의 아들 중에서 왕비의 소생일 경우(嫡子적자)에는 대군(大君), 후궁의 소생일 경우에는 군()이라 하였다. 왕의 딸인 왕녀 중 왕비의 소생(嫡女적녀)일 경우에는 공주(公主), 후궁의 소생(庶女서녀)일 경우에는 옹주(翁主)라 하였다. : 덕혜옹주(참조:덕혜옹주)-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딸.

 

후궁은 사실상 왕의 부인이 아니고, 1품의 빈()부터 종4품의 숙원(淑媛)까지 품계를 받는 여관(女官)이었으며, 후궁이 되는 법은 간택 후궁이 되는 경우와 궁인 중에서 왕의 승은(承恩-여자가 임금의 사랑을 받아 밤에 동침함)을 입어 후궁이 되는 경우가 있다.

 

1897년에 대한제국으로 전환되며 왕실의 지위가 황실로 격상되어 왕을 황제, 왕비를 황후, 왕세자를 황태자, 왕세자빈을 황태자비, 왕자를 친왕이라 하였다.

 

후궁 품계

왕후(王后), 황후(皇后)는 품을 따지지 않았으며, 후궁들은 정 1~4품까지의 품이었다.

() -1품 귀인(貴人) -1품 소의(昭儀) -2품 숙의(淑儀) -2

소용(昭容) -3품 숙용(淑容) -3품 소원(昭媛) -4품 숙원(淑媛) -4

 

대원군(大院君) 참조링크: 대원군 -내용 출처 다음 백과

대원군(大院君)은 임금의 대를 이을 적자손이 없어 방계 친족이 대통을 이어받을 때, 그 임금의 친아버지에게 주던 벼슬. 즉 방계에서 왕위를 계승한 때에 그 임금의 생부에게 주는 칭호이다.

 

조선시대 전시기에 걸쳐 4명의 대원군이 있었는데, 선조의 아버지 덕흥군을 대원군으로 추존한 것이 처음이었다. 1623년 인조는 아버지 정원군을 대원군에 추존했다가 1632년 다시 원종으로 추존했다.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철종이 왕위에 옹립되었고 그의 아버지 전계군을 대원군에 추존했다.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흥선군 하응의 둘째아들 명복이 왕위에 올라 고종이 되었고 하응은 흥선대원군에 봉해졌다. 3명은 죽은 뒤에 추존되었으나, 흥선대원군만 살아 있을 때 봉해졌다. 고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조대비가 수렴청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흥선대원군이 섭정하여 국사의 모든 결정권을 가졌다. 흥선 대원군은 개항 전후 격변하는 국내외의 상황 속에서 10여 년간 권세를 누렸다.

 

내시[內侍]= 환관(宦官) 참조링크: 내시 환관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환관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궁중 잡역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고려 말기부터 국왕 측근에서 시종하는 문관인 내시(內侍)에 속하는 이들도 생겨남에 따라 그때부터 환관과 내시가 동일시되었다.

 

내시는 왕의 측근으로서 대궐 내에 상주해야 한다는 특수성 때문에 거세자만이 임명될 수 있었다. 본래는 선천적인 거세자로 충원했으나 스스로 거세하고 내시에 임명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이들도 처첩을 거느렸고 양자(養子)를 택해 가계를 이어가도록 했다. 내시의 제도는 갑오개혁을 계기로 폐지되었다.

 

궁녀(宮女) 참조링크: 궁녀

궁녀(宮女)는 왕족을 제외한 궁중 모든 여인들의 총칭을 말하는 데 궁인(宮人궁첩(宮妾내인(內人)으로도 불렸다. 보통 궁녀라 하면 상궁(尙宮)과 나인으로 분류되는 여인들을 의미한다. 궁녀는 왕이 있는 법궁(法宮, 本宮)뿐만이 아니라 제사궁(祭祀宮, 혹은 魂宮)과 별궁에 소속된 여인까지도 포함된다.

 

넓은 의미의 궁녀로 포괄되는 내역은 다음과 같다.

무수리 : 몽고말이며, 궁중 각 처소에서 막일을 담당하는 여인을 말한다.

각심이[婢子, 또는 房子] : 상궁의 처소에서 부리는 가정부·식모·침모 등의 총칭이다. 이들의 월급을 국가에서 지급했으므로 방자라고도 한다. 방자란 관청의 사환으로, 예컨대 춘향전에서의 방자와 같다.

손님 : 왕의 후궁으로서 당호(堂號)가 바쳐지고 독립 세대를 영위하는 여인의 집(후궁 집)에서 살림을 맡아하던 일종의 가정부 같은 여인이다. 대개 친정붙이이며, 보수는 후궁의 생계비에서 지출된다. 따라서 손님이라는 이름은 궁 밖에서 온 사람이라는 의미로, 무수리나 각심이와는 달리 예의를 갖춘 말이다.

의녀 : 약방 기생이라고도 한다. 약방이란 궁중 내의원(內醫院)의 별칭이며, 의녀의 소속은 내의원이지만 전신(前身)이 기생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평상시엔 궁녀들에게 침을 놓아주고 비·빈들의 해산시 조산원(助産員) 노릇을 하였다. 하지만, 궁중의 크고 작은 잔치가 있을 때에는 기생으로 변신하며 원삼(圓衫)을 입고, 머리에는 화관(花冠)을 쓰고, 손에는 색동 한삼(汗衫)을 끼고 춤을 추는 무희(舞姬)였다.

 

그리고 궁녀의 신분적 등급은 견습나인·나인·상궁의 세 종류로 나뉘며, 그 세 종류 가운데에서도 입궁 연조와 소속 부서에 따라 차등이 있었다. 같은 상궁이라도 경력에 따라 정7품도 있고 정5품도 있으며, 또 같은 정5품의 상궁도 소속 부서의 격에 따라 같을 수 없었다.

 

나인 : 궁중에서 왕족의 사생활을 시중하던 여관(女官)의 총칭으로 내인(內人)’의 전음(轉音)이다. 궁녀들은 반드시 자신들을 상궁나인이라 하여 상궁과 나인을 구분하였다. 나인과 상궁은 그들 사회에서는 차원이 다를 만큼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참조링크:나인)

 

또한, 나인 아래에는 견습나인이 있는데, 이들은 아기나인 또는 생각시로 불린다. 보통 4세부터 계례(筓禮) 전인 17세 사이의 어린이 및 소녀 나인들이다.

 

지밀·침방·수방·내소주방·외소주방·생과방·세답방·세수간·퇴선간·복이처·등촉방

지밀(至密침방(針房수방(繡房내소주방(內燒廚房외소주방·생과방(生果房세답방(洗踏房)의 일곱 부서 외에 세수간·퇴선간(退膳間복이처(僕伊處등촉방(燈燭房)의 네 부설 부소가 있다.

 

위 부서에 소속된 궁녀들을 일반 개인 가정으로 비교해보면, 지밀나인은 몸종 격으로 가장 격이 높고, 침방·수방 나인들은 침모(針母), 소주방과 생과방은 찬간(饌間)의 식모들인데, 궁중에는 무수리가 하역(下役)을 맡았다. 세답방은 표모(漂母)로서 빨래 일을 맡는데, 일반 개인 가정에서는 빨래를 보통 노비가 하고, 다리미와 다듬이질은 대개 경험이 많은 부인들이 맡는다.

 

지밀상궁[至密尙宮] 참조: 지밀상궁[至密尙宮]

조선 시대, 대전 좌우에서 임금을 모시며 잠시도 떠나지 않고 시중을 드는 상궁이다.

지밀상궁은 왕의 측근에서 항상 그림자와 같이 시위(侍衛)하여 대령상궁(待令尙宮)이라고도 했다.

 

또한, 지밀상궁 중에서 궁중 의식이나 잔치 때 왕을 비롯한 왕비·왕대비 등의 인도와 진행을 담당했던 시녀상궁(侍女尙宮)은 지밀의 서책 관리와 국상(國喪) 때 곡읍(哭泣)을 담당하기도 했다.

 

따라서 궁녀의 격은 지밀이 높고, 다음이 침방과 수방으로, 이들은 양반 부녀와 같이 치마도 외로 여며 입고 앞치마를 두르지 않고 길게 늘일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 그것은 마루 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의 성격상 소주방이나 세답방 나인같이 치마를 걷어 올릴 필요가 없기도 한 때문이다.

 

위 세 부서 외의 다른 부서는 치마를 바로 입고 앞치마를 위에 둘러 걷어 올린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각시가 있는 곳도 지밀과 침방·수방뿐이다. 나머지 부서들은 생[絲楊]을 맬 수 없으며,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다.

 

제조상궁(提調尙宮)

이러한 궁녀 사회에도 간부들이 있었는데, 총수격인 우두머리 상궁과 그 밖의 맡은 바 직책의 중요성에 따라 특별대우를 받는 궁녀들이 있었다. , 제조상궁(提調尙宮)은 큰방상궁이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많은 궁녀들 중에 어른으로 왕명을 받들고 내전(內殿)의 재산 관리를 담당했다. 또한, 아리꼬[阿里庫]상궁으로 불리는 부제조상궁은 내전의 창고(倉庫, 아랫고·下庫)의 물품을 관리했다.

 

감찰상궁(監察尙宮)

감찰상궁(監察尙宮)은 궁녀들의 상벌을 담당했으며, 감시병 구실도 겸한 두려운 존재였다. 궁궐내의 모든 궁녀들은 입궁에서 퇴출(退出)까지 원칙적으로 종신제였다.

 

그 외 왕자녀의 양육을 담당했던 보모상궁(保姆尙宮)이 있었으며, 이들 중에서 왕세자의 보모가 가장 격이 높았다.

 

궁녀의 선출

왕의 직계 및 그 배우자 외에는 후궁도 궁중에서 죽을 수 없으므로, 늙고 병들면 궁녀는 궁궐을 나가야 했다. 궁녀의 선출은 원칙적으로 10년에 한번이었지만 예외도 있었다. 지밀나인의 경우 조건이 까다로워서 상궁들이 두세 번씩 선을 보러 나갔다. 그러나 대개 연줄과 세습이라 할 수 있으며, 고모가 조카를 들여놓는 경우가 많았다.

 

궁녀의 출신 계급은 지밀과 침방·수방은 중인계급, 기타는 대개 상민계급이었다. 입궁 연령은 지밀이 가장 어려 48, 침방·수방이 613, 그 밖은 1213세가 관례였다. 궁녀는 입궁 후 15년이 되면 계례를 치르고 정식 나인이 되었다. 남색 치마에 옥색 저고리, 머리에는 개구리첩지를 단 제복이 일생 동안 그들의 복장이었다.

 

나인이 된 뒤 다시 15년이 경과되면 상궁으로 승격했으므로, 가장 빠른 45세 입궁을 기준으로 할 경우에 35세 이후라야 상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는데, 왕의 후궁이 되면 20대의 상궁도 있을 수 있었다. 이런 궁녀는 왕의 자녀를 낳기 전까지는 상궁의 신분에 머물러 있지만, 그 대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왕의 곁에서 시위만 하면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를 승은상궁(承恩尙宮)이라 했다.

 

궁녀는 원칙적으로 종신제였지만, 특별한 경우, 즉 이들이 중병이 들었을 때, 가뭄으로 궁녀 방출이 결행될 경우(, 젊은 궁녀), 모시고 있던 상전이 승하했을 경우 중도에 나갈 수도 있었다.

 

B. 왕의 명칭과 묘호(廟號)

조선 시대, 왕의 이름

이하 내용은 참조 링크: 조선 시대, 왕의 이름에서 가져 왔다.

조선 시대, 왕의 이름은 외자였다. 절대 존엄의 존재였던 왕의 이름은 함부로 말할 수도 쓸 수도 없기에 백성들의 말 사용을 배려해 잘 사용하지 않는 한자를 활용해 외자로 이름을 지었다.

 

이름과 관련한 일반 용어들

아명(兒名) : 어릴 때 정식 이름을 짓기 전에 부모가 자식을 부르는 친근한 이름.:막동

초명(初名) : 처음 이름

() : 태어날 때 받은 진짜 이름

() : 성년이 되는 관례 때 받는 이름인 관명과 함께 스스럼없이 부를 수 있도록 짓는 새로운 이름

() : 본명이나 자 이외에 따로 지어 부르는 이름 (별칭, 필명, 별호, 아호)

묘호(廟號) : 왕이 죽은 뒤 종묘에 그 신위를 모실 때 드리는 존호(尊號) 참조: 묘호

 

((() 묘호 참조링크: ((() 묘호

예기, 사기, 경국대전, 조선왕조실록 등에 공이 있는 사람은 '()'라고 하고, 덕이 있는 사람은 '()'을 붙인다고 하는 내용이 있다.

 

a. ()

1. 원칙적으로 나라를 창업한 왕에게만 사용한다. 태조는 1대 임금이므로 후대의 자손이 시조(始祖)로 삼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고려에 조()가 붙은 왕은 태조 왕건뿐이다.

 

2. 공이 있는 왕에게 조()를 붙인다.(나라를 세우거나 그에 버금가는 공을 세운 왕)

선왕의 적자가 아닌 사람이 임금이 되는 경우에 명분과 정통성을 부과하기 위해 붙인 경우가 많았다.

 

b. ()

왕위를 정통으로 계승한 왕들에게 붙이거나, 덕이 있는 왕에게 종()을 붙인다. 혹은

별다른 위기 없이 태평성대를 누린 경우에 붙인다.

 

c. ()

폐위된 왕은 자격을 박탈당하여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왕자시절의 호칭으로 불리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이 아니라, 연산군일기, 광해군일기에 따로 기록된다.

- 연산군: 중종반정으로 폐위

- 광해군: 인조반정으로 폐위

 

조선의 왕에 조()가 붙은 이유

나라를 창업한 왕이나 나라의 정통이 중단되었다가 다시 일으킨 왕에게 '()'를 쓴다. 그래서 조()가 종()에 비해서 격이 높다고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반정이나 찬탈을 통해 왕위에 오른 경우, 이를 정당화하려는 수단의 하나로 이용되면서 후손(아들)'()'에서 '()'로 추숭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외에도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쓰이기도 했다. 참고로, 중종의 경우에도 연산군을 몰아낸 공으로 묘호를 '중조'로 하자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

 

왕의 호칭(묘호)

묘호는 죽은 왕의 위패를 모시는 종묘에 올리는 이름이다. 따라서 왕이 생존해 있을 때는 묘호가 없었고,'주상', '전하', '상감' 등으로 불렸다. 왕의 3년 상을 치른 후, 왕과 고위 관료들이 묘호를 정한다. 왕의 업적을 한글자로 표현하여 신주를 종묘에 모셨다.

 

연산군과 광해군처럼 폐위되어 신주가 종묘에 들어가지 못한 왕들은 죽어서도 왕 대접을 받지 못하고 왕자 신분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종묘에 그 신위가 오르지 못했으며 따라서 묘호 또한 없으므로 단지 그들이 쫓겨난 이후나(연산군) 세자 시절에(광해군) 받은 군호로 불리고 있다. 조선조 2대 임금 정종과 6대 임금 단종은 오랫동안 묘호를 정하지 않고, 몇 백 년 동안 공정왕과 노산군으로 불리다가, 숙종 때 와서 그들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면서 비로소 정종과 단종이라는 묘호를 얻었다.

 

묘호의 예:

· 문종(文宗): 학문에 뛰어난 왕 · 성종(成宗): 제도 정비를 완성시킨 왕

· 세종(世宗): 태평성대를 이룩한 왕 · 인조(仁祖): 어진 왕

· 중종(中宗):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왕 · 태조(太祖): 나라를 세운 왕

· 태종(太宗): 나라의 기틀을 다진 왕 · 효종(孝宗): 효성이 지극한 왕

 

왕의 호칭에는 묘호 외에도 사후에 중국 황제가 지어 보내주는 시호(諡號)라는 것이 있고, 또 신하들이 그 왕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해 지어 올리는 휘호(徽號) 혹은 존호(尊號)라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태조(이성계)의 정식 호칭은 '태조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었는데, '태조'는 묘호, '강헌'은 시호, '지인계운성 문신무'는 휘호(존호)에 해당한다.

 

능호(陵號)

()’ 은임금의 무덤을 지칭하는 호칭하는 데 능은 구릉이란 의미로 구릉처럼 크고 웅장하다는 의미다. : 동구릉,

 

조선왕릉 참조링크1: 조선왕릉 - 나무위키 참조링크2: 조선왕릉 공식 홈페이지

42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태조의 추존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그 왕비들의 능까지 포함하면 총 50. 그러나 일반적으론 42기의 능만을 조선왕릉으로 표현하고 있다.

 

조선왕릉들은 주변의 지명에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잦다. 특히 아예 지명화되어버린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성북구 정릉동), 문정왕후 윤씨의 태릉(태릉선수촌), 세조의 광릉(광릉수목원) 등이 그러하다. 그 외에도 조선왕릉에서 역명을 따온 철도역인 선릉역, 선정릉역, 태릉입구역, 정릉역, 온릉역, 사릉역, 세종대왕릉역 등이나 서오릉 앞을 흐르는 창릉천과 그 일대의 행정동명인 창릉동, 그리고 해당 지역에 조성될 예정인 창릉신도시, 태종의 능침 앞을 지나는 도로인 헌릉로 및 선정릉 앞을 지나가는 도로인 선릉로와 정릉 앞을 지나가는 정릉로, 용인서울고속도로 헌릉IC 등의 지명이 그 예이다.

 

조선 왕 중 장자(長子)가 왕위를 이어 받은 왕은 몇 명이나 될까?

 조선 왕가 가계도 및 내용 참조 링크 : 조선왕실(선원계보) (heritage.go.kr) -

조선의 국왕 중 부왕의 적장자로 왕위에 오른 인물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경종, 순종으로 여덟 왕 뿐이다. 이들 중 숙종은 출생에서부터 왕세자 책봉을 거쳐 즉위에 이르기까지 가장 확고하고 뚜렷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던 왕이었다.

  '조선 왕가 가계도-'

 

  '조선 왕가 가계도2- 18대 현종-26대 고종'
.고종이후-대한황실 가계도

퀴즈1. 왕의 정실부인을 부르는 말은 무엇이며 또한 기거하던 곳을 부르는 호칭은?

퀴즈2. 왕의 정실부인(왕비)의 소생인 아들을 부르는 명칭?  

         왕의 정실부인인 아닌 후궁의 소생인 아들을 부르는 명칭은?

퀴즈3. 왕의 정실부인(왕비)의 소생인 딸을 부르는 명칭? 

         왕의 정실부인인 아닌 후궁의 소생인 딸을 부르는 명칭은?

퀴즈4. 덕혜옹주는 누구의 딸인가?

퀴즈5. 임금의 시중과 궁궐의 잡다한 일을 맡은 (거세자만이) 임명된 관리 명칭은?

퀴즈6. 임금이나 중전, 후궁을 보필하던 궁녀의 총수(우두머리) 상궁의 명칭은?

퀴즈7. 조선의 왕실이 27대 인데 이 중 장자(長子)가 왕위에 오른 분은 몇 분일까?

 

[ 퀴즈-C 정답]

퀴즈1. 왕의 정실부인을 부르는 말은 무엇이며 또한 기거하던 곳을 부르는 호칭은?

         답.=> 왕비(王妃)=중궁(中宮), 중전(中殿). 왕비가 거처하던 궁전=중궁전(中宮殿)

퀴즈2. 왕의 정실부인(왕비)의 소생인 아들을 부르는 명칭? .=> 대군(大君)

         왕의 정실부인인 아닌 후궁의 소생인 아들을 부르는 명칭은? .=> ()

퀴즈3. 왕의 정실부인(왕비)의 소생인 딸을 부르는 명칭? .=> 공주(公主)

         왕의 정실부인인 아닌 후궁의 소생인 딸을 부르는 명칭은? .=> 옹주(翁主)

퀴즈4. 덕혜옹주는 누구의 딸인가? .=> 고종

퀴즈5. 임금의 시중과 궁궐의 잡다한 일을 맡은 거세자만이 임명된 관리 명칭은?

         답.=> 내시[內侍]= 환관(宦官) 참조링크: 내시  환관

퀴즈6. 임금이나 중전, 후궁을 보필하던 궁녀의 총수(우두머리) 상궁의 명칭은?

         답.=> 제조상궁(提調尙宮). 큰방상궁이라고도 했음.

퀴즈7. 조선 왕실이 27대 인데 이 중 장자(長子)가 왕위에 오른 분은 몇 분일까? .=> 8

(계속)

서울(한양)탐구03-궁궐2-궁궐의 구조 외 운현궁, 칠궁, 종묘, 사직단, 동묘

 

(배경음악) 종묘제례악 5분 하이라이트공연-예술의 전당 2017

              추후 링크가 끊어지면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 나올 수도 있으며,

              아래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보이면 https://youtu.be/D-1-4eLjzhE <=요걸 클릭

 

* 본문 중 밑줄 친 링크는 본문 내용을 가져오거나 참고한 곳으로 필요시 밑줄 친 link를 클릭. , 밑줄 친 링크는 현재는 연결되지만 추후 링크 주소 변경되면 연결이 안 될 수도 있음.

 

<참조한 주요 자료 및 링크>

1.  궁궐 및 종묘(문화재청-heritage.go.kr)우리 궁궐 이야기

2.  서울 5대궁과 종묘에서 만나는 궁궐이야기 [ 5회 궁중문화축전 ]-10분 가량의 동영상(youtube)동영상임.

 

*조선 궁궐 잠깐 퀴즈! - 이것만 알아도 조선시대 궁 관련 내용은 좀 안다고 할 수 있다.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 퀴즈-B ]

퀴즈1. 궁궐 내에서 대신(大臣)들이 업무를 보던 관청들이 모여 있는 곳을 무어라 하나?

         (오늘날 정부 종합청사에 해당하는 곳을 말함)

퀴즈2. 왕이 조의(朝議-아침 조회)를 할 때 왕이 계신 정전(政殿) 내부[=당상(堂上)]에서

        국사(國事에 대해 임금과 논의를 하거나 왕이 하시는 말씀(下交)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관리를(또는 그런 직책) 무어라 하는가? ( OO官 )

퀴즈3. 왕이 정사를 보는 정전(政殿) 앞마당에 각 품계에 따라 관리들이 도열하는 위치에

         (주로) 돌로 만들어 세워둔 것을 무어라 부르는가?

퀴즈4. 흥선대원군의 사저(私邸)로 대원군이 섭정을 하며 나랏일을 보던 곳이다. 고종이

         태어난 곳이며 고종이 명성황후와 가례를 치른 곳이기도 하다. 이곳의 명칭은?

퀴즈5. 종묘사직(宗廟社稷)이란 말의 뜻은? 이와 관련된 서울에 있는 장소 명칭은?

퀴즈6. 관우(關羽)를 모신 사당의 이름은?

 

[ 궁궐 관련 몇 가지 용어, 단어 설명 ]

<참조 링크> 1. 국가문화유산포탈 | 궁궐의 건축 (heritage.go.kr)

                  2.국가문화유산포탈 | 궁궐의 짜임새 (heritage.go.kr)

 

정전(正殿): 왕이 조회(朝會)를 하던 궁전. 경복궁의 근정전, 창덕궁의 인정전 등이 있다.

편전(便殿): 임금이 평상시에 거처하는 궁전.

 

중궁(中宮): 1. 왕의 정실부인(왕비) 2. 궁궐의 중앙에 있는 궁궐로 왕비가 거처하는 곳.

중궁전(中宮殿): 왕비가 거처하던 궁전.

 

세자궁(世子宮) : 왕세자가 거처하던 궁전.

빈궁(嬪宮) : 1.왕세자의 아내. 2. 임금의 후궁 가운데 지위가 가장 높은 사람.

                 3. 조선 시대에, ()이나 세자빈이 거처하던 곳.

 

(알림)

본 게시물은 위에 소개한 참고 자료(밑줄 링크)의 내용과 아래 참조 자료에서 항목과 내용을 가져왔으며 내용 일부는 편집, 가감된 것도 있다. 상세한 내용은 관련 링크나 참조 링크를 보기 바람.

 

궁궐의 짜임새(구조) 내용참조 링크: 국가문화유산포탈 | 궁궐의 짜임새 (heritage.go.kr)

중국 고대부터 전해오는 궁궐 구성의 원칙적인 구성이 "오문삼조(五門)"였다. 궁궐은 궁성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내부가 몇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있다. 각 구역에는 들어가는 문이 있는데, 남에서 북으로 가면서 다섯 개의 문들이 배열되어 있다. 이 다섯 문 안에 외조, 치조, 연조라는 세 조정이 있어 "오문삼조"라는 궁의 공간구조가 형성된다.

 

조선은 삼문삼조(三門三朝)의 원칙이었는데 삼문이라 함은 고문(皐門), 치문(治門), 노문(路門)이고 삼조라 함은 외조(外朝), 치조(治朝), 연조(燕朝)이다. 참조 링크: 경복궁과 자금성의 비교 - 나무위키 (namu.wiki)

 

1. 외전(外殿)

외전은 왕이 공식적으로 신하들을 만나는 공간이다. 외전 중 핵심이 되는 공간이 바로 정전이다. 정전은 궁궐에서 외형상 가장 화려하고 권위가 있는 공간으로 조정의 조회와 사신의 응대, 각종 잔치를 벌이는 국가의 공식적인 의식을 거행하는 공간이다.

 

정전(正殿)-궁궐의 큰 행사가 열렸던 곳으로 가장 화려하고 권위가 있어 왕의 위엄을 드러내는 곳이다. 새로운 임금의 즉위식이라던가, 외국의 중요한 사신이 와서 임금님께 인사를 하던 곳이다. 정전에서는 한 달에 네 번 정도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조회를 했다. 건물 이름에 O政殿으로 된 것이 많다. : 경복궁의 勤政殿(근정전), 창덕궁의 仁政殿(인정전), 창경궁의 明政殿(명정전)

창덕궁 '인정전'과 그 아래 품석(품계석)

정전(正殿) 건물 주변은 회랑(回廊)이 둘러싸여 있어 비를 맞지 않고 다닐 수 있었다. 이 회랑 안 네모난 공간(일종의 뜰 마당)을 조정(朝廷)이라 하고, 여기엔 품석(품계석)이 있어 각 관리들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품계 내용의 출처: 다음백과

관계·위계라고도 한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3국이 각각 관의 등급을 나누고 고유의 관등명을 썼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는 신라의 관등을 그대로 적용했다. 고려 초기에는 신라와 태봉의 관계를 계승했으나 중앙집권체제가 정비되면서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여 문산계와 무산계를 정1품에서 종9품까지, 18품계로 정했다. 이 품계는 명칭만 변경되어 조선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당상관(堂上官)

조선시대 조의(朝議)를 행할 때 당상(堂上)에 있는 교의(交椅)에 앉을 수 있는 관계(官階) 또는 그 관원으로, 동반은 정3품의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상, 서반은 절충장군(折衝將軍) 이상, 종친은 명선대부(明善大夫) 이상, 의빈(儀賓)은 봉순대부(奉順大夫) 이상의 품계를 가진 사람이다.

 

이러한 당상관은 의관(醫官)·역관(譯官) 등 기술관, 또는 환관(宦官) 등에게도 간혹 제수하였으나 이는 특례이고 대부분 양반이 독점하였다.

 

고려시대는 국정의결에 2품 이상의 재추(宰樞)만이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그 폭을 정3품 당상관까지 확대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당상관은 국정을 입안, 집행하는 최고급 관료 집단이라 할 수 있다.

 

편전(便殿)-왕이 일하던 곳으로 왕이 공부도 하고 신하들과 회의도 나누던 곳이 편전이다. 편전에서 있었던 회의는 그 내용이 모두 글로 기록되어 있다.

 

2. 내전(內殿)

궁의 중앙에 위치한 내전은 왕과 왕비의 공식 활동과 일상적인 생활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위치만 궁의 중앙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궁의 핵심을 이루는 기능도 하였다. 내전은 크게 보아 대전과 중궁전으로 구성된다. 대전은 왕이 기거하는 공간이며, 중궁전은 왕비가 기거하고 활동하는 공간이다.

 

침전-임금님이 잠을 자던 공간

중궁전-가장 안쪽에 위치한 공간으로 왕비가 머물던 곳으로, 중전 또는 중궁이라고 부른다.

          예: 경복궁의 교태전, 창덕궁의 대조전

대비전-왕의 어머님이나 웃어른들이 사는 공간. : 경복궁의 자경전

 

3. 동궁(東宮)

동궁은 왕위의 계승자인 세자의 활동공간이다. 다음 왕위를 이을 세자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에 내전의 동편에 그 처소를 마련했는데 그 이유는 세자를 떠오르는 해와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경복궁의 자선당

 

4. 후원(後苑)

궁궐의 북쪽 산자락에 위치한 후원은 왕을 비롯한 궁궐 사람들의 휴식공간이다. 후원은 산골짜기, 연못, 아담한 정자 등이 주로 배치되어 있는데 후원에서는 과거 시험을 치르고 군사훈련을 했으며, 종친 모임과 같은 대규모 모임을 열기도 하였다: 경복궁의 향원정, 창덕궁 후원(=祕苑)

 

5. 궐내각사(闕內各司)

궐내각사는 궁궐 안에서 활동하는 여러 관리들이 업무를 보던 공간으로, 관서들을 이르는 말이다. 궐내각사에는 정치,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기구, 경비와 호위 등 군사 관계 업무를 담당하는 기구, 왕실 시중과 궁궐의 시설 관리를 맡는 관리기구 등이 있다. 주요 기구로는 정승, 판서 등 고위 관리들의 회의 공간인 빈청, 이조와 병조의 관원들이 들어와 인사 업무를 처리하는 정청, 사헌부와 사간원의 언관들이 언론 활동을 논의하고 준비하는 대청,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승지들의 관서인 승정원, 학문을 도야하여 왕의 주문에 대응하고 왕과 함께 경전과 역사책을 토론하는 홍문관, 외교문서를 짓는 예문관, 실록 편찬 등 역사기록을 담당하는 춘추관 등이 있다.

 

궐내각사- 현재 창덕궁의 궐내각사는 인정전의 서쪽에 궐내각사만 복원되어 있는 형편이나, 원래는 선정전의 앞뜰에도 승정원, 사간원, 선전관청, 사옹원, 대전장방 등 빽빽한 건물군으로 궐내각사가 유지되었다. 비록 복원된 것이라고는 하나 창덕궁의 궐내각사는 한국 5대궁 중에서 특히나 궁이 과거 중앙국가행정의 중심이자 치소(治所)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곳으로써 가치가 높고, 왕족과 귀족의 거처에 불과한 서양의 궁/궁전들과의 차이점을 보여주는 곳이다. 내용출처창덕궁/건축물 - 나무위키 (namu.wiki) 

 

참고 궐외각사(闕外各司) 대궐 밖 광화문 앞 세종로에 있던 육조나, 궁 밖에 있는 내수사, 비변사 등은 궐외각사라 하였다.

 

그 외 공간으로는 정규관리의 활동 공간, 군사기구, 왕실시중과 궁궐관리기구 등이 있다. 외전과 내전 동궁 주변에 왕, 왕비, 세자등 주요 인물들의 시중을 드는 내시, 궁녀, 노복, 군병들의 기거 공간이 배치되어 있다.

 

6. 삼도(三道), 폐도(陛道), 踏道(답도).

궁궐의 모든 길은 삼도(三道)로 이루어져 있는데, 삼도의 길 중에 가운데가 약간 높이 솟아있는데, 이곳을 폐도(陛道)라 하고 임금만이 다닐 수 있는 길이다. 폐도를 다니는 사람을 일러 폐하(陛下)라 한다. 폐도(陛道)는 중국의 황제에게만 부칠 수 있다 하여 조선의 임금은 폐도 대신 어도(御道)라고 부르기도 했다. 폐도를 중심으로 동쪽의 길은 문신(文臣), 서쪽의 길은 무신(武臣)이 다니는 길이다.

정전(正殿) 입구의 계단 장식인 踏道(답도)-사진은 창덕궁의 답도

정전(正殿) 입구의 계단 장식인 踏道(답도)를 보면 근정전 계단의 답도는 간략하게 형식만 갖춘 반면 자금성의 답도들은 서양의 대리석 조각에 준하는 정도로 음각과 양각이 깊고 크기도 훨씬 거대함을 알 수 있다. 정전의 정문 앞을 흐르는 금천의 크기도 다르고 궁궐의 벽을 지키는 망루인 십자각의 크기도 자금성 쪽이 더 거대하고 더 사치스럽다. 단순히 궁궐 면적만 비슷한 수준으로 확보했다고 해서 두 궁궐의 크기가 비슷하다고 하는 건 적절치 못하다. 참조 링크: 경복궁과 자금성의 비교 - 나무위키 (namu.wiki)

 

7. 동쪽은 봄, 태양을 서쪽은 가을, 달을 상징.

(경복궁에서) 근정전 앞 관리들 출입하는 동쪽 문은 日華門(일화문)으로 태양을 뜻하는 일()자가 들어가며 文臣(문신)이 드나들었고, 서쪽은 月華門(월화문)으로 달을 뜻하는 월()자가 들어가며 武臣(무신)이 출입하였다.

 

경복궁의 건물과 대문들 중 동쪽은 봄춘()자가 들어있고 서쪽에 있는 부속건물과 대문에는 가을추()자가 들어있다. 사정전 동쪽에 만춘전(萬春殿), 서쪽에 천추전(千秋殿)이 있고 경복궁의 동쪽 문은 건춘문(建春門)이며 서쪽 문을 영추문(迎秋門)이다.

 

8. 궁궐은 아니지만 궁이라는 이름으로 쓰인 건물

왕이 되기 전 머물었던 곳을 잠저(潛邸) 또는 別宮(별궁)이라 하고(:효종의 잠저인 용흥궁), 왕이 궁궐을 떠나 잠시 경유하는 궁을 行宮(행궁)이라한다. :왕이 온천욕을 위해 온양에 잠시 머물렀던 온양행궁 등이 이에 속한다.

 

혹은 "왕의 아버지" 정도의 격이 되는 사람들의 집을 가리켜 ""이라고 붙이기도 한다(:흥선 대원군의 집 운현궁)

 

  운현궁(雲峴宮)    참조 링크 1. 운현궁雲峴宮 -다음백과

                         참조 링크 2. 대원군 정치의 중심 운현궁

대원군의 사가(私家)였던 운현궁(雲峴宮)

운현궁(雲峴宮)은 한성부 중부 정선방에 있던 흥선대원군의 집이자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명복(고종)이 태어나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살던 곳이다. 이곳은 원래 지명인 구름재에서 이름을 따와 운현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운현궁은 고종이 명성황후와 가례를 치른 곳이고,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며 나랏일을 보던 곳이기도 하다. 한양 내의 궁 중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고, 소규모의 궁궐과 같이 사대문을 갖춘 곳으로 궁의 형태를 살펴볼 수 있다.

(참조 링크 운현궁에서 내용 가져옴)

 

이하 내용은 참조 링크: 대원군 정치의 중심 운현궁에서 가져 왔다.

운현궁 뒤편에는 석재를 혼용해 벽돌로 지은 르네상스식 건축물이 이국적인 풍모를 드러내고 있다. 대원군의 손자 영선군 이준용이 거처했던 양관(洋館)이다. 이 건물은 1907년 유럽여행을 마치고 온 이준용을 회유하기 위해 일제가 세운 것으로, 운현궁 후원에 있었던 흥선대원군의 할아버지 은신군과 부친인 남연군의 사당을 철거한 자리에 지었다. 1917년 이준용이 죽은 뒤 순종의 아우인 의친왕의 둘째 아들 이우가 이어받았고 한국전쟁 이후 집이 상당 부분 팔리면서 운현궁 양관도 덕성여자대학교 소유가 됐다. 이곳은 드라마 도깨비에 등장한 바 있다.

 

이하 내용은 참조 링크: 운현궁雲峴宮 다음백과 에서 가져 왔다.

고종의 등극으로 대원군이 된 이하응은 사가(私家)를 증축하여 운현궁이라고 불렀다. 이곳에서 대원군은 서원철폐, 경복궁 중건 등 개혁사업을 추진했으며, 1882년 임오군란 당시에는 이 궁에서 납치되어 중국 심양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당시 운현궁에는 창덕궁과 가깝게 왕래할 수 있는 임금 전용의 경근문과 대원군 전용의 공근문이 있었고, 담장 안에는 아재당, 안채인 이노당·노락당이 있었으며, 선조인 은신군과 남연군의 사당과 영화루도 있었다.

 

덕성여자대학교 교사로 쓰이는 양옥집은 1910년 이후 대원군의 손자 준용의 거처였으며, 일본인이 지은 건물이다

운현궁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건물이며 정원 등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내정에는 아직도 고종이 소년시절에 오르던 노송이 있어, 2품 금관자를 달아주고 대부송이라 일컫는다.

 

칠궁(七宮)    참조 링크: 칠궁

이곳은 원래 1725(영조 1) 영조가 생모이자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淑嬪崔氏)의 신위를 모시고 숙빈묘(淑嬪廟)라 하다가 뒤에 육상묘(毓祥廟)로 바꾸었으며, 1753년 육상궁(毓祥宮)으로 개칭된 곳이다. 그 뒤 1882(고종 19) 불타 없어진 것을 이듬해 다시 세웠다.

칠궁 중 하나인 연호궁

1908년 저경궁(儲慶宮대빈궁(大嬪宮연호궁(延祜宮선희궁(宣禧宮경우궁(景祐宮) 5개의 묘당을 이곳으로 옮겨 육궁이라 하다가 1929년 덕안궁(德安宮)도 옮겨와서 칠궁이라 하였다.

 

칠궁은 동서로 줄지어 있고 이에 따른 행랑, 2채의 재실 등이 배치되어 있다. 동쪽으로부터 배열된 칠궁의 순서와 모셔진 신위의 내용을 보면, 육상궁: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 연호궁: 추존된 왕 진종(眞宗)의 생모 정빈 이씨(靖嬪李氏), 덕안궁: 영친왕의 생모 순헌귀비 엄씨(純獻貴妃嚴氏), 경우궁: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綏嬪朴氏), 선희궁: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暎嬪李氏), 대빈궁: 경종의 생모 희빈 장씨(禧嬪張氏), 저경궁: 추존된 왕 원종(元宗)의 생모 인빈 김씨(仁嬪金氏) 등이다.

 

종묘(宗廟)사직(社稷)

종묘사직(宗廟社稷)이라하면 왕실과 나라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종묘(宗廟)는 유교적 예법에 따라 역대왕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왕실의 사당이며 사직(社稷)은 토지의 신인 사()와 곡식의 신인 직()에게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宗廟(종묘)    내용 및 참조 링크: 국가문화유산포탈 | 종묘 소개 (heritage.go.kr)

종묘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사당으로서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정전과 영녕전, 제례 준비에 필요한 몇몇 부속 전각으로 이루어졌다. 전각은 최소한의 색만 사용하고 화려한 단청을 하지 않았으며 장식과 기교를 최대한 절제하였다. 현재 정전에는 19실에 49, 영녕전에는 16실에 34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정전 뜰 앞에 있는 공신당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종묘제례 및 제례악    내용 및 참조 링크: 국가문화유산포탈 | 종묘 소개 (heritage.go.kr)

종묘제례 및 제례악은 2001'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 2008년부터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으로 관리되고 있다. 세계유산인 종묘에서 개최되는 행사로 유형과 무형의 세계유산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문화유산이다. 종묘제례는 왕조의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로 조선왕조의 제사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종묘대제(宗廟大祭)라고 한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와 조선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구한 역사를 이어 내려온 소중한 조상전래의 제례의식이다. 조선조에는 춘하추동 사계절과 섣달에 행하였으며 1969년 대동종약원에 의해 복원되어 지금은 매년 5월 첫째 주 일요일에 봉행되고 있다.

 

종묘대제에는 종묘제례가 봉행되며 각 제사의례에 맞추어 경건한 분위기를 고양시키기 위한 음악과 무용으로서 종묘제례악이 따른다. 제례는 신을 맞이하는 영신례(迎神禮), 초헌, 아헌, 종헌례에 이어 음복례가 행해지고, 신을 보내 드리는 송신례(送神禮)를 갖춘 후에 축()과 폐()를 망료(望燎) 위에 불사르는 것으로 끝난다.

 

종묘제례악은 우리 고유의 음률로 왕조의 창업과 기상을 노래하고 있으며 모든 행사의 순서에 맞추어 춤과 음악이 조화를 이룬다. 엄숙한 제사 의례만큼이나 장엄미가 돋보이는 종합예술로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크며 동양에서도 드물게 남아 있는 고전음악이다.

참조링크 : 종묘제례악

 

사직단    내용 출처(민족문화대백과) 및 참조 링크: 사직단

사직단의 위치는 주례(周禮)에 잘 규정되어 있는데, ‘오른쪽에 사직, 왼쪽에 종묘라 하였다. 이 규정은 법궁을 중심으로 사직은 오른쪽에, 종묘는 왼쪽에 둔다는 뜻이며, 중국이나 우리나라 모두 준수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종묘는 수도 한 곳에만 설치하는 데 반해 사직은 수도뿐만 아니라 지방 행정단위인 주현(州縣)마다 설치하였다. 주현의 사직도 관아의 서쪽, 곧 오른쪽에 세웠다.

 

사직단은 사단(社壇)과 직단(稷檀)을 따로 설치하였으며 사단은 동쪽에, 직단은 서쪽에 위치하였다. 각 단에는 다섯 가지 색깔의 흙을 덮었는데 동은 청색, 서는 백색, 남은 적색, 북은 흑색, 중앙은 황색 흙으로 하였다. 또한 각 단에는 신위를 모셨는데 사단에는 국사신(國社神)을 북향하여 모시고 후토신(后土神)을 동향하여 배향하였으며, 직단에는 국직신(國稷神)을 북향하여 모시고 후직신(后稷神)을 동향하여 배향하였다. 각 단에는 사방으로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단 둘레에는 유()라고 하는 울타리를 치고 그 유에도 사방으로 문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형식은 후대에도 크게 변화가 없었다.

 

보통 도성의 서쪽에 사직단을 설치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한성부 의인달방(儀仁達坊)에 있는데 지금의 사직공원 자리이다.

 

동묘(東廟)=동관왕묘(東關王廟)    내용 및 참조 위키백과 링크: 동관왕묘

중국 촉나라의 장수 관우(關羽)를 모신 관왕묘로,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다. 1963121일에 대한민국의 보물 제142호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 땅에서 싸운 명나라 장수들은 관우의 신령을 보는 체험을 하고 곳곳에 관왕묘를 세웠다. 이 보고를 받은 명나라는 전쟁이 끝난 뒤 조선에 관왕묘를 지으라는 요청을 하였고, 이에 동대문 밖에 1599년 공사를 시작하여 1601(선조 34) 동관왕묘를 완공하였다. 명나라 신종이 친필 현판과 함께 건축자금을 지원하였다.

.동관왕묘 – 사진출처: https://blog.naver.com/hermione555/222465522635

동관왕묘의 중심건물은 두 개의 건물이 앞뒤로 붙어 있는데, 이것은 중국의 절이나 사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다. 지붕은 높은 '()' 자 모양과 '()'자 모양이 합쳐진 '()'자 모양이다. 실내 공간도 앞뒤로 나뉘어 있는데, 앞은 제례를 위한 전실이고 뒤는 관우와 부하장군들의 조각상을 둔 본실이다.

 

관왕묘는 서울의 동서남북에 모두 지어졌는데 그 중 동관왕묘가 제일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넓은 벽돌 벽과 독특한 지붕모양, 조각상, 실내의 구성과 장식 등에서 중국풍 건축의 모습을 보여주는 17세기 제사시설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곳이다.

 

남관왕묘는 조정에서 관리하며 왕실에서도 제사를 지냈으나 1908(융희 2) 제사를 폐지하고 동관왕묘는 지방 관청으로 이괄했다. 남대문 밖에는 동묘보다 먼저 생긴 남관왕묘가 있었으며, 고종 때에는 북관왕묘와 서관왕묘를 지었다. 남관왕묘는 다른 곳으로 옮겨졌고 북관왕묘와 서관왕묘는 조선총독부가 철거했다.

 

[ 퀴즈-B ]

퀴즈1. 궁궐 내에서 대신(大臣)들이 업무를 보던 관청들이 모여 있는 곳을 무어라 하나?

         (오늘날 정부 종합청사에 해당하는 곳을 말함)

퀴즈2. 왕이 조의(朝議-아침 조회)를 할 때 왕이 계신 정전(政殿) 내부[=당상(堂上)]에서

        국사(國事에 대해 임금과 논의를 하거나 왕이 하시는 말씀(下交)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관리를(또는 그런 직책) 무어라 하는가? ( OO官 )

퀴즈3. 왕이 정사를 보는 정전(政殿) 앞마당에 각 품계에 따라 관리들이 도열하는 위치에

         (주로) 돌로 만들어 세워둔 것을 무어라 부르는가?

퀴즈4. 흥선대원군의 사저(私邸)로 대원군이 섭정을 하며 나랏일을 보던 곳이다. 고종이

         태어난 곳이며 고종이 명성황후와 가례를 치른 곳이기도 하다. 이곳의 명칭은?

퀴즈5. 종묘사직(宗廟社稷)이란 말의 뜻은? 이와 관련된 서울에 있는 장소 명칭은?

퀴즈6. 관우(關羽)를 모신 사당의 이름은?

 

[ 퀴즈-B 정답 ]

퀴즈1 . 궁궐 내에서 대신(大臣)들이 업무를 보던 관청들이 모여 있는 곳을 무어라 하나?

             (오늘날 정부 종합청사에 해당하는 곳을 말함) .=> 궐내각사

퀴즈2 . 왕이 조의(朝議-아침 조회)를 할 때 왕이 계신 정전(政殿) 내부[=당상(堂上)]에서

             국사(國事에 대해 임금과 논의를 하거나 왕이 하시는 말씀(下交)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관리를(또는 그런 직책) 무어라 하는가? .=> 堂上官(당상관)

퀴즈3답.  왕이 정사를 보는 정전(政殿) 앞마당에 각 품계에 따라 관리들이 도열하는 위치에

            (주로) 돌로 만들어 세워둔 것을 무어라 부르는가? .=> 품석(品石), 品階石(품계석)

퀴즈4 . 흥선대원군의 사저(私邸)로 대원군이 섭정을 하며 나랏일을 보던 곳?

             답.=> 운현궁(雲峴宮)

퀴즈5 . 종묘사직(宗廟社稷)이란 말의 뜻은? 이와 관련된 서울에 있는 장소 명칭은?

             답.=> 왕실과 나라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종묘(宗廟)는 역대왕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왕실의

                      사당이며 사직(社稷)은 토지의 신인 사()와 곡식의 신인 직()에게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해당 장소의 명칭은 宗廟(종묘) 사직단(社稷檀)이다.

퀴즈6 . 관우(關羽)를 모신 사당의 이름은? 동묘(東廟)=동관왕묘(東關王廟)

 

(계속)

 

 

서울(한양) 탐구02-조선의 궁궐(5대궁)


 

(배경 영상,음악)  정악 풍류- 영산회상: 국립국악원(2018.09.21) 공연

    추후 링크가 끊어지면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 나올 수도 있으며,

    아래 음악이나 동영상 보려면 ▷클릭, 멈추려면 stop □ 버튼 클릭.    

    아래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보이면  https://www.youtube.com/embed/_opLG86rrtM <=요걸 클릭

 


(주의) 

*본문중 밑줄 친 링크가 많습니다. 이는 본문 내용을 가져오거나 참고한 곳으로 필요시 밑줄 친 link를 클릭

하세요. 단, 밑줄 친 링크는 현재는 연결되지만 추후 링크 주소 변경되면 연결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참조한 주요 자료 및 링크>

1. 궐 및 종묘(문화재청-www.heritage.go.kr)

2. 조선 5대 궁궐로 떠나는 나들이 - Daum 백과

 

*조선 궁궐 잠깐 퀴즈! - 이것만 알아도 조선 궁의 알짜는 웬만큼 안다고 할 수 있다.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 퀴즈-A ]

퀴즈1. 서울에 있는 조선 시대 5대 궁궐의 이름은?

퀴즈2. 조선 시대 임금이 가장 오랫동안 政事(정사)를 보았던 궁(宮)의 이름은?

퀴즈3.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했던 궁의 이름은?

퀴즈4.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났던 궁(宮) 이름은?

퀴즈5. 고종이 아관파천 이후 환궁하여 마지막까지 살았던 궁(宮) 이름은?

퀴즈6. 조선왕조 마지막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여사가 기거한 장소로 실내의 각종 창문과 

         창호의 모양과 무늬가 매우 아름다운 이곳은 어디인가( 안에 있던 장소명)?

 

(알림)

본 게시물은 위에 소개한 참고 자료(밑줄 링크)의 내용과 아래 참조 자료에서 항목과 내용을 가져왔으며 내용 일부는 편집, 가감된 것도 있다.  상세한 내용은 관련 링크나 참조 링크를 보기 바람.

 

(조선) 궁궐의 역사     그림 및 내용출처: 국가문화유산포탈 | 궁궐의 역사 (heritage.go.kr)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5대 궁궐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경운궁) 그리고 경희궁(경덕궁)이다.

 

.경복궁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1392년)하고 나서 수도를 지금의 서울인 한양으로 옮긴 뒤 제일 먼저 종묘와 사직 그리고 궁궐인 경복궁을 세웠다(1395년). 그리고 3대 태종 때(1405년)에는 경복궁의 동쪽에 창덕궁을 창건했다.

 

.창덕궁

이로써 정궁(正宮) 경복궁과 이궁(離宮) 창덕궁 양궐 체제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임금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에 거처하는 것을 더 선호했다. 성종 때 이르러서는 세분의 대비를 위해서 창경궁을 세우게 되었다. 창경궁은 창덕궁 옆에 위치하여 창덕궁의 부속 역할을 하였다.  그 후 1592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타 없어지게 되고, 일 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선조 말 창덕궁 재건이 시작되어 1610년 광해군 때 완성되었으나 중건하고 약 10년 후 1623년 인조반정 때 외전(外殿)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고 말았다. 이후 25년간 방치되었다가 1647년에 복구되었다. 창덕궁은 이후 마지막 황제에 이르기까지 270여 년간 경복궁을 대신하여 정궁의 역할을 하였다.

 

.창경궁

창경궁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창덕궁과 함께 모두 불탔으나 1616년에 복원되었다.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으로 통명전, 양화당, 환경전 등 소실되었으나 1633년(인조 11년 통명전, 양화당, 환경전, 함인정 등 중건되었다. 

 

반면 덕수궁(경운궁)은 원래는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후손의 집이었으나 그 후 선조가 임진왜란 당시 임시로 거처하는 行宮(행궁-왕이 궁궐을 떠나 잠시 경유하는 궁)으로 사용하였다. 그 후 광해군은 이곳에서 즉위한 후 경운궁이라 이름 지어 7년간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광해군은 인왕산 아래, 지금의 사직단 뒤편에 인경궁, 그리고 그 앞쪽 지금의 새문안길가에 경덕궁(경희궁이란 이름은 영조 대에 바뀐 이름이다)을 지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몇 가지 무리한 정책으로 인하여 왕이 된지 15년이 되는 1623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나고 인조가 왕이 된다. 인조는 광해군이 지었던 인경궁을 헐어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보수하였고 경덕궁은 그대로 두어 離宮(이궁)으로 사용하였다. 이로써 창덕궁과 창경궁이 정궁이 되고 경덕궁(경희궁)이 이궁이 되는 새로운 체제가 성립되어 조선 후기 내내 지속되었다.

 

조선 후기의 正宮(정궁)으로 쓰이던 창덕궁은 고종 초년에 경복궁이 중건(1868년)되자 그 지위에 변동이 생긴다. 경복궁이 다시 정궁의 지위를 회복하고 창덕궁과 창경궁은 이궁으로 쓰이며 그때까지 이궁으로 쓰이던 경희궁은 빈 궁궐이 되었다.

 

고종은 경복궁과 창덕궁으로 오가면서 생활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고종에게 압박을 가하여 고종은 경복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다가 두 달도 못 되 다시 경복궁으로 옮기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고종과 그 비인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막아보려 했지만 오히려 일본은 일본공사 미우라의 지휘아래 일본군인, 자객들을 동원해 경복궁에서 명성황후를 살해한다. 이를 을미사변(1895)이라 한다.   참조링크: 명성황후 시해사건, 을미사변 

 

이렇게 압박을 가하는 일본을 외국의 힘으로 막아보려고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은 극비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했다(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러시아 대사관=아관 俄館으로 옮겨 거처함)이라 한다. 참조링크: 아관파천

 

.경운궁(덕수궁)

이로써 정궁인 경복궁이나 이궁인 창덕궁은 모두 빈 궁궐이 되고 만다. 다시 돌아오라는 국민들의 여망의 따라 고종은 경복궁도 창덕궁도 아닌 경운궁(덕수궁)을 확장,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1년 만에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한다. 고종은 경운궁으로 돌아간 뒤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1897년). 그러나 경운궁은 1904년의 대 화재로 인해 거의 모든 전각들이 소실되었다가 1905년-1906년에 대부분의 전각들이 복원되었다.

 

.경희궁

한편 경희궁은 광해군 때 지어진 뒤 여러 왕들이 태어나고 즉위식을 갖는 등 이궁(離宮)으로서 역할을 하다가 20세기 초 일제의 강점으로 뜯겨나가고 헐렸다. 그래서 예전의 본 모습은 오직 궁궐지의 기록을 찾아볼 수밖에 없다.

 

일제 강점기 때 수난을 당한 궁궐은 비단 경희궁뿐이 아니었다. 일제는 경복궁 흥례문 자리에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으며 창경궁에는 동물원과 식물원을 개설하여 일반인에게 관람하게 하면서 격하시켜 '창경원'이라 부르게 하였다.

 

이렇듯 조선의 5대 고궁은 국가의 흥망성쇠에 따라 그 운명을 같이 해온 우리 역사의 동반자이다. 시대가 변하여 차차 원래의 모습으로 보수, 복원되어가고 있지만 지나온 그 역사는 궁궐 각 건물의 공간 안에 현존한다. 그러기에 고궁 탐방은 단지 휴식을 취하고 볼 것을 즐기는 눈요기가 아니라 우리 선조들의 숨결을 함께 느껴볼 수 있는 역사 현장으로의 초대가 되는 셈이다.

 

(조선의) 5대 궁궐 구경(답사)하려면... 아래 링크를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

관람 시간, 관람료, 건물 설명 등은 해당 관리소 홈페이지(링크)를 참고하고, 문화해설사의 안내를 들으며 구경할 수도 있다. 참고로 창덕궁을 제외하고는 자유 관람이며, 경희궁은 무료 관람이다.

 

창덕궁 관람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다. 창덕궁은 안내에 의한 시간제 관람과 제한공개가 원칙이다. 목요일 자유관람 외에는 해설사와 함께 정해진 시간에 입장해야 한다. 옥류천(玉流川)과 낙선재(樂善齊)는 특별관람이다. 일반관람 코스에 들어가지 않는다.  

 

참조한 자료 및 내용 출처 : 조선 5대 궁궐로 떠나는 나들이  

1. 첫 번째 코스 (경복궁) ,   관람안내 링크: 경복궁 관리소 www.royalpalace.go.kr/

2. 두 번째 코스 (창경궁) ,   관람안내 링크: 창경궁 관리소 www.cgg.cha.go.kr/

3. 세 번째 코스 (창덕궁) ,   관람안내 링크: 창덕궁 관리소 www.cdg.go.kr

4. 네 번째 코스 (덕수궁) ,   관람안내 링크: 덕수궁 관리소 www.deoksugung.go.kr/

5. 다섯 번째 코스 (경희궁),  참조링크: 경희궁 - 나무위키 (namu.wiki)

..고지도에 표시된 조선의 주요 궁궐과 종묘와 사직단 - 출처: 인터넷

A.경복궁      관람안내 링크:  경복궁 관리소 www.royalpalace.go.kr/

                 내용출처: 국가문화유산포탈 | 경복궁 소개 (heritage.go.kr)

 

경복궁은 조선 왕조 제일의 法宮(법궁)이다.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창건하였고,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졌다가, 고종 때인 1867년 중건되었다. 흥선 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된 경복궁은 500여 동의 건물들이 미로같이 빼곡히 들어선 웅장한 모습이었다.

 

궁궐 안에는 왕과 관리들의 정무 시설, 왕족들의 생활공간, 휴식을 위한 후원 공간이 조성되었다. 또한 왕비의 중궁, 세자의 동궁, 고종이 만든 건청궁 등 궁궐 안에 다시 여러 작은 궁들이 복잡하게 모인 곳이기도 하다.

 

광화문-흥례문-근정문-근정전-사정전-강녕전-교태전을 잇는 중심 부분은 궁궐의 핵심 공간이며,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대칭적으로 건축되었다. 그러나 중심부를 제외한 건축물들은 비대칭적으로 배치되어 변화와 통일의 아름다움을 함께 갖추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복궁의 주요 건물          내용출처: 경복궁/건축물 - 나무위키 (namu.wiki)

광화문 光化門 링크:광화문(光化門)-경복궁의 正門(정문=南門 남문).

건춘문 建春門 링크:건춘문(建春門)-경복궁의 東門(동문)으로 봄(春)과 동쪽(東)은 예로부터 세자를 뜻하는 말이었고

                                     건춘문 근처에 동궁전이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다.

영추문 迎秋門 링크:영추문(迎秋門)-경복궁의 西門(서문)-가을을 맞이한다는 뜻.

신무문 神武門 링크:신무문(神武門)-경복궁의 북문. 풍수지리적인 문제로 닫혀 있었다.

 

동십자각 東十字閣 링크:동십자각(東十字閣) -궁성을 수비하던 망루로 경복궁에 현존하는 유일한 망루

근정전(勤政殿) 링크:근정전(勤政殿)-경복궁의 政殿(정전-왕이 정사를 보던 전각)으로 국가대례(代禮)를 거행하던

                                      장소로 다포식(多包式) 건축으로는 현존하는 것 중 국내 최대 규모이다.

 

강녕전(康寧殿)-임금의 침전(寢殿 잠을 자던 곳)으로 지붕에 용마루가 없다.

교태전(交泰殿)-왕비의 침전으로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지붕에 용마루가 없다.

 

아미산(峨嵋山)-경회루 연못을 팔 때 나온 흙으로 만든 인공산으로 3단의 화계(花階)로 된 출입구에는 2.6m 높이의 육각형 벽돌 굴뚝 4개가 있는데, 교태전의 온돌방에서 나오는 연기를 배출하기 위해 만들었다. 각 굴뚝의 여섯 벽면에는  다 양한 길상문이 아름답게 꾸며졌으며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11호로 지정되었다.

 

자경전 십장생 굴뚝-자경전 서쪽에 있는 담장으로 황토색 벽돌과 흰 삼화토를 사용해 만든 벽면에 각종 길상문자와 길상

                          도안, 기하학적 문양을 장식했다.

자경전 꽃담-미학적 가치가 뛰어나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10호로 지정되었다.

 

건청궁(乾淸宮)참조링크: 건청궁 (경복궁)-위키백과

건청궁은 1873년(고종 10년) 경복궁 중건이 끝난 뒤 고종이 흥선대원군 모르게 궁궐의 내밀한 북쪽에 국고가 아닌 사비로 지은 '궁 안의 궁'이다. 실제로 1873년부터 고종이 친정(親政)을 시작했기 때문에, 건청궁 건설은 아버지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정치적 행보라는 해석이 있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이후 버려졌다가 1909년(융희 3년) 철거되었고, 2007년 복원되었다.

 

곤녕합(坤寧閤)참조링크: 곤녕합(坤寧閤)

명성황후 민씨가 머물던 처소로 민가의 안채 역할을 하던 장소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 경복궁에 난입한 일본인에게 명성황후 민씨가 시해된 장소이며, 시신은 곤녕합 옥호루(玉壺樓)에 잠시 안치했다가 곧 건청궁 뒤쪽 녹산(鹿山)에서 불태워졌다. 이곳 역시 아관파천 이후 버려졌다가 1909년(융희 3년) 철거되었고, 2007년 복원되었다.

 

경회루(慶會樓)- 1395년(태조 년4) 경복궁 창건 때 연못을 파고 누각을 세웠으나 지대가 습해 건물이 기울자 1412년(태종 12년) 연못을 대규모로 준설해 동서 128m, 남북 113m의 방지(方池)를 조성하고 경회루를 세웠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867년(고종 4년) 중건하였다. 지금의 경회루는 정면 7칸(34.4m), 측면 5칸(28,5m)현존하는 한국의 목조 건축 중 규모가 가장 크다.

 

.경회루 -그림 출처: 조선의 궁궐 - 나무위키

향원정(香遠亭)- 경회루 서북쪽 향원지 안에 세워진 2층의 정자 누각이다. 원래는 건청궁의 후원 역할을 하는 장소였기에 건너가기 편하도록 건청궁에서 향원정을 향해 다리가 놓여있었으나 지금은 자리가 바뀌어 향원지 남쪽에서 향원정으로 향하게 놓여 있다. 창덕궁 부용정과 함께 사진이나 그림의 단골 소재인 장소이다.

.향원정

동궐도(東闕圖) - 참조링크 내용 출처: 동궐도(東闕圖) 다음백과

동궐도   사진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Donggwol-do.jpg

동궐(東闕)은 창덕궁의 별칭으로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동편에 있는 궁궐이라는 뜻으로 바로 옆에 인접한 창경궁도 함께 그려져 있다.

 

B. 창경궁    관람안내 링크:  창경궁 관리소 www.cgg.cha.go.kr/

                내용출처: 국가문화유산포탈 | 창경궁 소개 (heritage.go.kr)

 

창경궁은 경복궁, 창덕궁에 이어 세 번째로 지어진 조선시대 궁궐이다. 조선 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경복궁을 법궁으로, 창덕궁을 보조 궁궐로 사용하는 양궐 체제를 이어왔다. 그러나 역대 왕들은 경복궁보다는 창덕궁에 거처하는 것을 더 좋아하였고, 왕실 가족이 늘어나면서 차츰 창덕궁의 생활공간도 비좁아졌다. 이에 성종이 왕실의 웃어른인 세조 비 정희왕후, 예종 비 안순왕후, 덕종 비 소혜왕후 등 세 분의 대비가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창덕궁 이웃에 마련한 궁궐이 창경궁이다.

 

창경궁은 왕이 정사를 돌보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생활공간을 넓힐 목적으로 세워졌고, 또한 애초 궁궐로서 계획된 것이 아니라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살았던 수강궁에 몇몇 전각을 보태어 세운 궁궐이다. 따라서 경복궁이나 창덕궁과 비교해볼 때 그 규모나 배치 등에 다른 점이 많다.

 

우선 창경궁은 전각의 수가 많지 않고 규모가 아담하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은 자경전도 언덕에 지어졌다. 창경궁의 또 다른 독특함은 조선시대 다른 궁궐과 주요 전각들이 남향으로 지어진 것과 달리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점이다. 창경궁의 경우 정문인 홍화문과 정전인 명정전은 동쪽을 향하고, 관청 건물인 궐내각사와 내전의 주요 전각들은 남쪽을 향해 있다. 남·서·북쪽이 구릉이고, 동쪽이 평지인 지세라서 이를 거스르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왕실 가족의 생활공간으로 발전해온 궁궐이기에 내전이 외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넓은 것도 창경궁의 특색이다. 따라서 창경궁에는 왕들의 지극한 효심과 사랑, 왕과 세자의 애증, 왕비와 후궁의 갈등 등 왕실 가족 사이에 일어난 이야기도 풍부하게 전해온다. 세간에 널리 알려진 장희빈과 인현왕후,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도 사건이 일어난 현장인 창경궁에서 들으면 더 생생하게 들린다.

 

창덕궁과 함께 '동궐'로 불렸던 창경궁은 서쪽으로 창덕궁과 맞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낮은 언덕을 지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와 이어져 본래 한 영역을 이루었다.

 

C. 창덕궁    관람안내 링크: 창덕궁 관리소 www.cdg.go.kr

                내용출처: 국가문화유산포탈 | 창덕궁 소개 (heritage.go.kr)

 

창덕궁은 1405년 (태종5년) 조선왕조의 이궁(離宮)으로 지어진 궁궐이다. 경복궁의 동쪽에 자리한 창덕궁은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東闕0이라 불리기도 했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에 타자 선조는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의 복구를 선조 40년(1607)에 시작하였으며, 창덕궁은 광해군 2년(1610)에 중건이 마무리 되었다.

 

그 후 창덕궁은 1623년 3월 인조반정으로 인정전을 제외하고 또다시 불에 타는 시련을 겪었다. 인조 25년(1647)에 복구되었으나 1917년 대조전을 중심으로 내전 일곽이 손실되는 대화재가 일어났다.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 때부터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가지 총 258년 동안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하며 정사(政事)를 편 궁궐이다.

 

북한산의 매봉 기슭에 세운 창덕궁은 다른 궁궐과는 달리 나무가 유난히 많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가 탁월하여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조선시대의 뛰어난 조경을 보여주는 昌德宮後苑(창덕궁후원=秘苑 비원)을 통해 궁궐의 조경양식을 알 수 있다. 후원에는 160여 종의 나무들이 있으며, 그 중에는 300년이 넘는 나무도 있다. 창덕궁은 조선시대의 조경이 훼손되지 않고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는 귀중한 장소이다. 참조 링크: 창덕궁 후원秘苑(비원)

 

.부용지- 뒤쪽 언덕에 주합루

창덕궁의 주요 건물       내용출처: 창덕궁/건축물 - 나무위키 (namu.wiki) 

부용정(芙蓉亭)- 부용지의 정자로 정면 5, 측면 4, 배면 3칸의 자형 전각이다. 배면 한 칸은 연못에 높은 석주(石柱)를 세우고 수중누각(水中樓閣)이 되게 하여 수상과 지상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영화당(暎花堂)- 부용지 동쪽에 있는 전각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이익공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광해군 때 처은 건립되었으나 현재의 전각은 1692년(숙종 18)에 재건된 것이다. 부용정 일대에서 내력이 제일 오래된 건물이다. 정조 이전까지 왕과 신하들이 연회를 개최하거나 활을 쏘던 곳이고 이후 시험장으로 활용되었다. 영화당 앞 마당은 현재 모습과는 달리 창경궁 춘당지 바로 앞까지 넓게 열린 공간이었는데, 이 마당을 '춘당대春塘臺'라 불렀다. 공간이 매우 넓어 문과/무과시험 가리지 않고 왕이 직접 행차하여 과거시험을 지켜보고 관장했으며 이곳에서 치는 과거시험을 "춘당대시春塘臺試"라고 부르기도 했다.

 

주합루(宙合樓)- 창덕궁 부용지의 전각 중 하나로 정면 5칸, 측면 4칸, 팔작지붕 형식의 중층 전각으로 1776년(정조 원년)에 건립되었다. 주합루의 경우 2층은 주합루, 1층은 어제각이라 했으며 본래 역대 국왕들의 글과 어필을 보관하던 곳으로 이후 규장각으로 개명되었다.

 

연경당(演慶堂)- 창덕궁 후원에 위치한 전각으로 1828(순조 28)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기간에 순조의 진작례를 올리기 위해 진장각(珍藏閣) 옛터에 세워져 당시 효명세자의 왕권강화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전각이다. 궁궐의 다른 전각들과 달리 궐내에서 유일하게 민가 형식으로 지어졌다. 참고: 진작(進爵)-'진작례’란 왕실의 특별한 날에 신하들이 임금에게 술과 음식을 올리고 예를 표하는 의식이다.

 

청의정(淸漪亭)- 창덕궁 후원의 옥류천에 위치한 정자이며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궁궐에서 유일하게 팔각의 초가 지붕을 하고 있다. 익공계 사모 형식을 하고 있으며 1636(인조 14)에 세워졌다. 정자 앞으로 논을 만들어 벼를 심고, 수확 후에는 볏짚으로 정자의 지붕 이엉을 잇게 하였는데 이는 농사의 소중함을 백성들에게 일깨워주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애련정(愛蓮亭)-애련지에 위치한 전각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에 익공계 사모지붕을 하고 있다. 1692(숙종 18)에 세워졌고 액명은 중국 송나라 때 주돈이가 쓴 애련설에서 빌린 것이다.

 

관람정(觀纜亭)-관람지에 속해 있는 정자로 한반도 모양의 연못인 관람지에 놓여져 있으며 부채꼴 扇形(선형) 기와지붕을 한 굴도리집을 하고 있다.

 

존덕정(尊德亭)- 관람지에 속해 있는 정자로 동시대의 정자들과 달리 이중지붕 구조의 육각지붕으로 만들어진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어서 육우정(六隅亭) 또는 육면정(六面亭)이라고도 불렸다.

 

돈화문(敦化門)-창덕궁의 정문으로 1412(태종 12)에 건립되었고 다음 해인 1413(태종 13)에 무게 1만 5천 근의 동종을 걸어 시간을 알리게 했다. 현재 보물 제383호로 지정되어 있다. 굳이 5칸으로 지어놓고 양 옆의 2칸을 막아놓은 것은 황제국이 5문을 사용하고 제후국이 3문을 사용한다는 규정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은 셈이라고 한다.

 

인정전(仁政殿)-창덕궁의 정전으로 용마루에는 다섯 개의 이화문장이 새겨져 있다. 1405(태종 5)에 건립되어 세종 원년에 고쳐 지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광해군 원년에 재건되어 황폐화된 경복궁의 근정전을 대신해 이곳에서 국가적인 대례를 행하는 장소가 되었다.

 

궐내각사(闕內各司)-현재 창덕궁의 궐내각사는 인정전의 서편쪽 궐내각사만 복원되있는 형편이나, 원래는 선정전의 앞뜰에도 승정원, 사간원, 선전관청, 사옹원, 대전장방 등 빽빽한 건물군으로 궐내각사가 유지되었다. 비록 복원된 것이라고는 하나 창덕궁의 궐내각사는 한국 5대궁 중에서 특히나 궁이 과거 중앙국가행정의 중심이자 치소(治所)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곳으로써 가치가 높고, 왕족과 귀족의 거처에 불과한 서양의 궁/궁전들과의 차이점을 보여주는 곳이다.

 

창덕궁의 주요 궐내각사-(링크)

이문원(摛文院) 검서청(檢書廳) 봉모당(奉謨堂) 책고(冊庫)

예문관(藝文館)  홍문관(弘文館) 내의원(內醫院) 억석루(憶昔樓)

 

참고 궐외각사(闕外各司)- 대궐밖에 있었던 관청으로 광화문 앞 세종로에 있던 육조나, 궁 밖에 있는 내수사, 비변사 등은 궐외각사라 하였다.

 

희정당(熙政堂)-창덕궁의 편전으로 외양은 한식건물에 서양식 실내장식을 하고 있다. 남행각 현관의 경우 서구식 현관에 일본식이 가미되었고, 희정당도 왜곡과 변질이 가해졌다. 내부는 쪽마루에 카펫이 깔리고 창문에는 유리가 끼워졌으며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설치되는 등 전형적인 서양식 실내 장식을 하고 있는 데다가 외관의 남행각에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현관이 설치되었다. 해방 후인 1985년에 보물 제815호로 지정되었다.

 

대조전(大造殿)-왕비의 침전으로 용마루가 없다.

 

성정각(誠正閣)-창덕궁 동궁에 속한 전각으로 학문을 대하는 정성과 올바른 마음가짐을 뜻하는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이라는 말에서 따왔으며 현판의 필체는 정조의 어필이라고 전해진다. 성정각은 본래 왕세자가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었다.

   

선원전(璿源殿)- 이곳에는 태조·세조·원종·숙종·영조·정조·순조·문조·헌종·철종·고종·순종의 어진을 모시고 있다가 일제강점기인 1921년 창덕궁 후원 서북쪽에 선원전을 새로 지어 어진을 옮긴 뒤부터 구 선원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신 선원전- 창덕궁 신 신원전에 속하는 정면 14, 측면 4칸의 규모를 한 전각 중 하나로 본래 명나라 태조(太祖신종(神宗의종(毅宗)을 제사지낸 사당이었던 대보단(大報壇)과 북일영(北一營) 등이 위치하고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212곳을 헐어내 새로 선원전을 세워 역대 임금들의 어진을 모셨다. 하지만 19506.25 전쟁 때 부산으로 소개했던 어진들이 대부분 불에 타는 사고를 겪어 전각 안은 비어 있다. 현재는 일반에 개방된 곳이 아니다.

 

창덕궁 낙선재            내용 및 링크  출처1: 창덕궁/건축물 - 나무위키 (namu.wiki)

                                             출처2: 창덕궁낙선재(昌德宮樂善齋)-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낙선재

낙선재(樂善齋): 출처:창덕궁/건축물 - 나무위키 (namu.wiki)

창덕궁 낙선재 권역을 대표하는 전각으로 사랑채의 역할을 한다. 정면 6, 측면 2칸의 단층 팔작기와지붕이며 1846(헌종 12)에 단청없는 사대부가(士大夫家) 양식으로 세워졌다. 본래 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가 거주할 전각을 만들면서 헌종 본인도 같이 기거할 사랑채격으로 지은 곳으로 헌종이 추사 김정희를 접견하는 장소로 자주 사용하는 등, 헌종의 문예생활이 주로 이곳에서 이뤄졌다.

 

순종 사후(死後 죽은 후) 낙선재에 머물던 순정효황후를 위해 1930년대에 낙선재 서행랑(서쪽 행랑)을 허물고 신관을 신축했으며, 해방 후 대한제국 황실 가족이 거주한 장소이다. 1963 11 22일 일본에서 돌아온 영친왕이 1970 5 1, 이방자 여사가 1989 4 30일에 숨을 거둔 곳이기도 하다. 이방자 사후(死後 죽은 후)  1990년대에 신관을 철거하고 원래의 서쪽 행랑을 복원했다.

.낙선재 일원

이하 내용출처: 창덕궁낙선재(昌德宮樂善齋)-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847년(헌종 13)에 중건된 낙선재는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해 세워진 건물로 보물 제1764호이다. 그러나 고종 대에 들어와서 중희당과 가까운 낙선재를 종종 편전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생겼다. 특히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이후 고종은 낙선재를 집무실로 정하고 대신들과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였다. 그 후 조선왕조 마지막 영친왕 이은이 1963년부터 1970년까지 살았으며, 1966년부터 1989년까지는 이방자 여사가 기거하였다.

 

이 낙선재는 실내의 각종 창문과 창호의 모양과 무늬가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다른 곳에서 보기 드문 원형문(圓形門)이 있다. 낙선재의 후원에는 장대석으로 쌓은 화계(花階 꽃계단)가 있고 괴석 등을 전시하였다. 또 벽돌로 문양을 만들고 기와로 지붕을 얹은 아름다운 굴뚝이 있다. 화계 뒤로는 상량정(上凉亭)과 서고가 있고, 서쪽으로 소주합루와 만난다. 

 

D. 경운궁(慶運宮), 덕수궁(德壽宮)

참조 링크 1. 덕수궁 - 다음백과

참조 링크 2. 국가문화유산포탈 | 덕수궁 소개 (heritage.go.kr)

참조 링크 3. 덕수궁 관리소  www.deoksugung.go.kr/

 

덕수궁 일원

-이하 내용- 다음백과와 민족문화 백과사전에서 발췌함-

현재 덕수궁의 옛 이름인 경운궁은 처음 월산대군의 집터였던 것을 임진왜란 이후 선조의 임시거처로 사용되어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다가 광해군 때에 경운궁으로 개칭되었다.

 

고종은 1895년(고종 32)에 을미사변이후 세계 열강들 사이에서 보다 자주적인 입지를 확보하려는 계획을 도모하면서 경운궁(덕수궁)을 대대적으로 중건하였다. 1897년(광무 1)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부터 중화전을 비롯하여 정관헌, 돈덕전,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준명전, 흠문각, 함녕전, 석조전 등 많은 건물들을 지속적으로 세웠다.

 

1907년 고종은 결국 일본의 강압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났다. 고종에게 왕위를 물려받은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고종에게 장수를 비는 뜻으로 ‘德壽(덕수)’라는 궁호((宮號 궁이름)를 올린 것이 그대로 궁궐 이름 덕수궁(德壽宮)이 되었다.

 

한편 고종의 재위 말년의 약 10년간 정치적 혼란의 주무대가 되었던 덕수궁은 궁내에 서양식 건물(석조전 등)이 여럿 지어졌다. 덕수궁의 독특한 건물로 함녕전 뒤편에 있는 정관헌은 전통식 지붕 구조와 서양식 기둥 양식이 절충된 건물이다. 석조전은 내부와 외부가 모두 서양식으로 꾸며진 건물이다. 이처럼 덕수궁에 여러 서양식 건물이 남아 있는 것을 통해 고종이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점을 알 수 있다.

 

궁궐 안의 서양 건물, 석조전(石造殿) 참조링크: 석조전

.석조전

석조전은 경운궁(덕수궁) 안에 지어진 서양식 건물로 유럽의 궁정을 본 땄다. 황제가 일상생활을 하며 손님을 맞던 곳이었다. 화재 위험을 막기 위해 돌로 지었고 현관에는 대한 제국의 상징인 오얏꽃이 새겨져 있고 내부는 서양식 가구와 벽난로, 화려한 전등으로 장식했다.

 

1919년, 경운궁에 머물던 고종 황제가 세상을 뜨면서 석조전은 미술관으로 바뀌었다. 해방 이후 민주의원 의사당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린 장소이기도 하다. ​한국 전쟁 이후 국립박물관, 현대미술관, 문화재 관리국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쓰이다가 2014년 본래의 석조전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E. 경희궁(慶熙宮)   내용출처1: 경희궁 -위키백과

                          내용출처2: 경희궁 - 나무위키 (namu.wiki)

 

경희궁(慶熙宮)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 2가에 있는 조선 시대 궁궐로 광해군 9년(1617년)에 건립한 이후, 10대에 걸쳐 임금이 정사를 보았던 궁궐이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경복궁의 동쪽 궁궐인 창덕궁+창경궁을 지칭하는 '동궐'에 대비되는 경복궁의 서쪽 궁궐을 뜻하는 '서궐(西闕)'로 불렸다. 새문안 대궐, 새문동 대궐, 아주개 대궐이라고도 하였다. 조선 시대의 이궁(離宮)으로, 경운궁(덕수궁)과 홍교(虹橋 무지개다리 Arch)로 연결되어 있었다.

 

규모로 보자면 경복궁 크기의 2/3를 넘는 영역이 경희궁에 속하였고, 한양도성 서쪽 성벽 일부와 한양 서북부를 대부분 차지하던 거대한 궁궐이었다. 모두 98채의 건물이 들어섰던 경희궁은 경복궁, 창경궁과 함께 조선왕조의 3대궁으로 꼽힐 만큼 큰 궁궐이었으며 본래는 100여 동이 넘는 전각들이 있었다.

 

그러나 5대궁 가운데 가장 철저히 파괴된 궁으로서 흥선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에 의해 몇 채의 전각들을 제외하곤 전부 훼철됐고, 그나마 남아있던 부지 또한 일제강점기에 축소되어 현재 원 상태로 남아있는 건물은 정문이었던 흥화문과 정전이었던 숭정전, 그리고 후원의 정자였던 황학정까지 세 채에 불과하다.

 

[ 퀴즈-A ]

퀴즈1. 서울에 있는 조선 시대 5대 궁궐의 이름은?

퀴즈2. 조선 시대 임금이 가장 오랫동안 政事(정사)를 보았던 궁(宮)의 이름은?

퀴즈3.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했던 궁의 이름은?

퀴즈4. 명성왕후 시해 사건이 일어났던 궁(宮) 이름은?

퀴즈5. 고종이 아관파천 이후 환궁하여 마지막까지 살았던 궁(宮) 이름은?

퀴즈6. 조선왕조 마지막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여사가 기거한 장소로 실내의 각종 창문과 

         창호의 모양과 무늬가 매우 아름다운 이곳은 어디인가( 안에 있던 장소명)?

-------------------------------------------------------

[ 퀴즈-A 정답]

퀴즈1 답. 서울에 있는 조선 시대 5대 궁궐의 이름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경운궁), 경희궁.

퀴즈2. 답. 조선 시대 임금이 가장 오랫동안 政事(정사)를 보았던 궁(宮)의 이름은? 창덕궁

퀴즈3. 답.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했던 궁의 이름은? 창경궁

퀴즈4. 답. 명성왕후 시해 사건이 일어났던 궁(宮) 이름은? 경복궁

퀴즈5. 답. 고종이 아관파천 이후 환궁하여 마지막까지 살았던 궁(宮) 이름은? 덕수궁

퀴즈6. 답. 조선왕조 마지막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여사가 기거한 장소로 실내의 각종 창문과 

             창호의 모양과 무늬가 매우 아름다운 이곳은 어디인가( 안에 있던 장소명)?  낙선재

 

(계속)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