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한양) 탐구09-(서울)한강변의 亭子(정자)

<배경음악>: 국악한마당 -KBS전주| 계면조 계락 '청산도' -하윤주

추후 링크가 끊어지면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 나올 수도 있으며, 아래 동영상 보려면 ▷클릭   

아래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보이면  https://www.youtube.com/embed/Mu5T2t4GX6g<=요걸 클릭

 

* 본문 중 밑줄 친 링크는 본문 내용을 가져오거나 참고한 곳으로 필요시 밑줄 친 link를 클릭.

, 밑줄 친 링크는 현재는 연결되지만 추후 링크 주소 변경되면 연결이 안 될 수도 있음.

 

[요약퀴즈]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퀴즈 1] (서울)한강의 상류에 있던 정자로 일명 '회행정(回行亭)'로 불렸던 정자의 이름은?

[퀴즈 2] 한명회(韓明澮, 14151487)의 별장이었던 한강 정자의 이름은?

[퀴즈 3] 정조의 효심이 묻어나는 정자로 노들강(한강) 건너 풍광이 멋진 정자 이름은?

[퀴즈 4] 처음에 희우정(喜雨亭)이라 불렸던 양화나루(楊花津) 서쪽에 있는 정자의 이름은?

[퀴즈 5] 경기도 파주시에 있는 정자로 황희 정승이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친구 삼아

           여생을 보내던 임진강 하류의 절경 지역에 있는 이 정자의 이름은?

 

한강의 亭子(정자)

다음 내용은 참조 링크: 한강의 정자 https://hangang.seoul.go.kr/archives/249 문헌에서 가져 온 것이다.

                              (상세한 내용은 원문을 클릭)

 

한강 상류로부터 하류 순으로 정리 배치하였고, 일부 내용을 추가하거나 편집, 요약하였다.

화양정(華陽亭) 일명 '회행정(回行亭)'

화양정(華陽亭)은 광진구 화양동 110번지 32·34호에 있던 정자이다. 이 일대는 태조가 한양으로 도성을 정할 당시 말을 먹이는 목장이었는데, 세종 14(1432)에 낙천정 북쪽 언덕에 정자를 세웠다. 정자의 이름은 동지중추원사 유사눌(柳思訥)주서(周書)가운데 '말을 화산 양지에 돌려보낸다(歸馬于華山之陽)'란 뜻을 취하여 '화양(華陽)'이라 하였다.

 

남쪽으로 한강의 흐름이 보이고 북쪽으로는 삼각산·도봉산·수락산·용마봉이 한 눈에 들어오는 국립목장 살꽂이벌(箭串坪 전곶평) 언덕 위에 있는 이 정자에서 세종은 방목한 말들이 떼 지어 노는 광경을 즐겼다고 한다.

 

한편 이 정자는 일명 '회행정(回行亭)'이라고 한다. 그 연유는 단종과 명성왕후와 관련이 있다. 세조 3(1457) 621일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다음날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영월로 귀양 갈 때 이 화양정에서 전송하였는데 "화양정, 화양정"하고 중얼거리며 이 길이 부디 다시 되돌아 올 수 있는 회행길이 되었으면 하고 떠났으나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이에 사람들이 슬퍼하며 그 원혼이나마 돌아오기를 비는 마음에서 화양정을 회행정으로 부르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고종 19(1882)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나 명성왕후가 변복(變服)을 하고 창덕궁 뒷문으로 나와 장호원으로 피해갈 때 광나루까지 가던 도중 이 곳 화양정에서 잠시 쉬어갔다고 한다. 뒷날 명성왕후가 창덕궁으로 환궁하게 되자 사람들이 '정말 화양정이 회행정이 되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화양정은 그 규모가 매우 웅장하였다고 한다. 사각정(四角亭)으로서 기둥 둘레가 한아름이 넘었으며 그 내부가 100여 칸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화양정은 1911721일 낙뢰(落雷)로 무너지고, 지금 이곳에는 서울시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된 650년이 넘는 고목을 비롯한 7그루의 느티나무 고목만 서 있다. 1987년에 서울시에서 표석(標石)을 설치하여 그 자취를 알리고 있다.

 

낙천정(樂天亭)

(복원된) 낙천정(樂天亭)

낙천정(樂天亭)은 조선 태종이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고 머물던 정자로, 광진구 자양동 446번지 현대아파트 단지 내에 있다. 이곳은 원래 화양동에서 동남쪽으로 한강변을 끼고 거슬러 올라간 곳 언덕 위였다. 이 언덕은 모양이 시루를 엎어 놓은 것 같다고 하여 시리미(甑山 증산) 또는 대산(臺山)이라 하였으며 후에 발산(鉢山)이라 하였다. 대산은 표고 42.8m 밖에 안되었으나 한강이 발아래 감돌아 흐르고 강 건너 잠실동·신천동과 그 멀리 남한산성이 병풍같이 둘러섰고, 남쪽에 청계산·관악산, 그리고 서쪽에는 남산이 한 눈에 들어오는 승지(勝地)였다.

 

태종은 그 18(1418) 왕위를 아들 세종에게 양위한 후 그해 9월 이 곳에 이궁(離宮)과 그에 딸린 정자를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인 세종 1(1419) 2월 낙성하고, 좌의정 박은(?)에게 명하여 정자의 이름을 짓게 하니 주역(周易)계사편의 '낙천지명고불우(樂天知命故不憂)'의 구절을 따서 '낙천(樂天)'이라 불렀다. 또한 의정부 제조 변계량(卞季良)에게 <낙천정기(樂天亭記)>를 짓게 하고 한성부윤 권홍(權弘)으로 하여금 이를 쓰게 하여 94일 판각하여 정자에 달았다.

 

태종은 낙천정에 행차하여 종종 중요한 정무를 친히 듣고 결정하기도 하고, 종친간의 화목을 다짐하기도 하였다. 즉 세종 1년 이 곳에서 세종과 함께 왜구에 대비하기 위하여 삼판선(三板船)을 꾸미게 하였고, 이해 6월 체찰사 이종무(李從茂) 등이 삼도 수군을 거느리고 대마도(對馬島)를 쳐서 평정하고 돌아오니, 그들을 위하여 환영연을 성대히 베풀고 상을 주었다. 세종 2년 정월부터 상왕(태종)과 대비인 원경왕후(元敬王后) 민 씨가 아예 이곳으로 옮겨 거처하게 되므로 왕은 수시로 나가 양전(兩殿)에 문안한 후 유숙(留宿 머물다 자고 옴)하고 돌아옴은 물론 왕비 또한 때때로 낙천정에 나가 문안드렸다. 4월에는 중국사신을 접대하였더니 사신이 감탄하여 하늘이 마련해 준 선경(仙境)이라 칭송하였다 하며, 때때로 상왕은 왕과 함께 이곳에서 매사냥을 즐겼다 한다. 세종 35월에는 오위진(五衛陣)이라는 군사훈련을 사열한 일도 있다.

 

세종 4(1422) 5월 상왕이 승하한 후 세종은 이 정자를 둘째 딸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하사하여 부마인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과 함께 아름다운 풍물을 즐기게 하였다. 성종 3(1472)에는 양잠을 장려하기 위한 잠실(蠶室)로도 이용되었다.

 

정자가 퇴락하여 없어진 후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 터는 도시개발로 인해 강변도로와 주택지가 되어 있었는데, 1987년에 서울시에서 한강변 문화유적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그 자취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1991년에는 옛 대산 기슭 부분 자양동 673번지에 새로이 정면 3, 측면 2, 주심포 팔작지붕의 정자를 건립하여 그 자취를 알리고 있다. 하지만 원래 위치는 그곳이 아니었다.

 

천일정(天一亭)

천일정(天一亭)은 남산 줄기가 동남쪽으로 뻗어나가 한강에 닿는 강안(江岸), 용산구 한남동 459번지에 있었다. 고려시대의 절 터였던 이곳에 조선 성종 때의 문신 김국광(金國光, 14151480)이 처음으로 정자를 지었으며,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소유를 거쳐, 한때 민영휘(閔泳徽, 18521935)의 소유이기도 하였다. 정자의 이름은 당나라 왕발(王勃)등왕각(藤王閣)서문에 있는'추수공장천일색(秋水共長天一色)'의 시구를 취하여 이름 지었다 한다.

 

3,000나 되는 넓은 터전에 동쪽으로 아늑한 안채가 있고 정남향으로 조금 높은 터에 청원당(淸遠堂)이란 현판이 걸려 있었으며, 그 아래 조금 낮은 터에 강을 내려다보고 바깥사랑채 격인 천일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강변 높은 곳에 축대를 쌓고, 앞쪽으로 돌출된 누의 아래로는 사각 장초석을 세웠고 팔작지붕을 하였었다.

 

멀리 강 건너 압구정이 바라보이던 곳으로 19506·25전쟁 때 폭격 맞아 없어졌고 지금은 그 부근에 한남대교가 놓여 있다.

 

압구정(狎鷗亭)        참조 링크: 압구정 -문화원형백과

압구정(狎鷗亭)은 강남구 압구정동 산 310번지 일대인 동호대교 옆 현대아파트 11동 뒤편에 있었으며, 세조 때의 권신인 상당부원군 한명회(韓明澮, 14151487)의 별장이었다. 명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예겸(倪謙)이 지은 '압구정'이란 정자의 이름은 한명회의 생활과는 다르게 부귀공명 다 버리고 강가에서 해오라기와 벗하여 지낸다는 뜻을 지니고 있어 이곳을 지나가는 문인·유지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하였다 한다.

 

이 정자는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곳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는데, 압구정의 배 띄우기는 경도승경(京都勝景) 중의 하나였다. 그 후 한명회는 관직을 사퇴하고 이곳에서 여생을 지내려 하니 성종 7(1476)에는 왕이 압구정시(狎鷗亭詩)를 친제(임금이 친히 시제를 내림)하여 하사하였고 조정 문신들도 차운(次韻)하니 그 시가 수백편이나 되었다 한다.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압구정도(狎鷗亭圖)〉

정자의 모습은 겸재(謙齋) 정선(鄭敾)압구정도(狎鷗亭圖)에 높은 언덕 위에 정자가 있는데 마루 둘레에 난간을 돌리고 팔작지붕을 한 형태로 그려져 있어, 소박한 일반적인 정자와는 달리 비교적 규모도 크고 주위 경치와 어울려 화려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9세기 말에는 박영효(朴泳孝, 18611939)의 소유가 되었으나, 갑신정변으로 박영효가 국적(國賊)으로 일체의 재산이 몰수될 때 이 정자도 헐렸다. 이후 1970년대 영동개발에 따라 현대아파트가 들어서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동네이름으로 남게 되었으며, 근래에 표석을 설치하여 압구정 터임을 밝혀 놓았다.

 

제천정(濟川亭)

제천정(濟川亭)은 조선시대 한강변에 위치했던 왕실(王室) 소유의 정자로,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와 함께 사랑을 받았던 대표적인 정자이다. 제천정은 보광동 강가 언덕 즉 한남대교 북쪽 어귀에서 서쪽으로 바라보이는 용산구 한남동 537번지 일대에 있었다. 세조 2(1456)에 세웠으며, 세조로부터 명종 18(1563)에 이르기까지 한강변 정자 가운데서 왕이 가장 자주 찾은 곳이었다.

 

이곳은 경도십영(京都十詠)에도 있듯이 '제천완월(濟川翫月)'이라 하여 달구경의 경치가 좋은 곳으로 꼽혔던 곳으로 광희문(光熙門)을 나와 남도지방으로 내려가는 길목 나루터 옆에 있었기 때문에 왕이 선릉(宣陵)이나 정릉(靖陵)에 친히 제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러 쉬기도 하였으며, 또한 중국사신이 오면 으레 이정자에 초청하여 풍류를 즐기게 하였다.

 

성종은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세상을 떠난 뒤 이 제천정에 자주 나와 정자의 규모가 작고 좁다 하여 이를 크게 고쳐 짓기도 하였다. 또한 명종 13(1558)에는 임금이 이 정자에 올라 수전(水戰)을 관람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인조 2(1624) 이괄(李适)의 난으로 왕이 왕대비와 함께 종묘와 사직단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공주(公州) 로 피난갈 때, 밤에 한강을 건너면서 이 제천정에 불을 질러 그 불빛에 의지하여 강을 건넜다는 것으로 미루어 이 때 불타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58년에 발행된 서울명소고적에 의하면 이 정자 건물은 청일전쟁 때까지도 남아 있었으며, 그 후 왕실로부터 미국인 언더우드(H. G. Underwood)에게 불하하였는데, 뒤에 어느 틈에 없어졌는지 그 자리마저 황량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효사정(孝思亭)

사진 및 내용 출처 : http://www.discovery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308007  

 

효사정(孝思亭)은 조선 초기 문인 노한이 모친을 그리워하며 지은 정자로 한강 변에 자리해 한강 조망이 좋다. 조선 초기 문신 노한(1376~1443)이 어머니를 여의고 3년 동안 시묘를 했던 곳에 지은 정자다. 노한은 시묘 살이 후에도 묘소를 떠나지 못해, 묘소 북쪽 바위 언덕의 효사정에 올라가 부모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효사정이라는 이름은 노한과 동서지간이었던 호조참판 강석덕이 효를 생각하는 정자라는 뜻을 담아 지었다. 당시 효사정은 효의 상징이었으며, 한강 변 정자 중 경관이 가장 좋은 곳으로 칭송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서울시 우수 조망명소로 선정됐을 정도로 풍광이 아름답다.

 

옛 효사정은 조선 성종 때 헐렸다. 지금의 효사정은 1993년 일본 신사가 있던 자리에 정면 3, 측면 2칸의 정자를 새로 지은 것이다. 효사정에 관한 옛 기록을 참고해 제자리를 찾아보았으나 주변 환경이 많이 변해 찾지 못하고, 옛터와 가까운 곳에 지었다고 한다. 지하철 9호선 흑석역 1번 출구에서 약 1분 걸으면 도착한다.

 

용왕봉저정(龍驤鳳翥亭)      참조 링크: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 - sillokwiki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은 동작구 노량진로3214-7 (본동)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 후기의 누정(樓亭)으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었다. 정조는 효심이 지극한 군주로 비명에 간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추모하는 일에 정성을 다 하였다. 사도세자의 원묘(園墓)는 처음에는 영우원(永祐園)이라 하여 지금 서울시립대학교 뒷산인 배봉산(拜峰山)에 있었는데 그 규모가 작고 초라하였다. 이를 가슴 아파하던 정조가 178911월에 화산(華山, 수원)으로 옮긴 후 현륭원(顯隆園)이라 하고, 해마다 친히 참배하였다.

 

정조가 수원에 갈 때마다 노들강(한강)에 배다리(舟橋)를 설치하고 건넜는데, 시간이 걸렸으므로 강을 건넌 후에 잠시 어가(御駕)를 머물게 하고 쉴 자리가 필요하여 작은 언덕에 행궁(行宮)으로 이 누정을 지었던 것이다. 당시의 모습은 이신(爾信)의 그림 <노량진주교(鷺梁津舟橋)><행궁도(行宮圖)>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이 누정은 정조 13(1789)에 건립을 시작하여 2년 후에 완공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원래 이 집 터는 노저(露渚) 이양원(李陽元, 15331592)의 집 터였다고 한다. 용양봉저정이란 이름은 '용이 뛰놀고 봉()이 높이 나른다'는 뜻으로, 이곳이 국왕이 잠시 머무는 행궁 구실을 하였으므로 곧 국왕 행차가 성대함을 뜻하는 것이다. 또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점심을 들었기 때문에 일명 '주정소(晝停所)'라 부르기도 하였다.

 

또 이 누정은 매우 크고 화려하여 여기서 내려다보면 강 언덕의 푸른 수림(樹林) 아래로 한강의 맑은 물결이 내려다보이고, 저 멀리 눈을 돌리면 남산 북악 사이로 서울 장안의 풍경이 그림같이 펼쳐져 있으므로 전망도 매우 좋은 곳이다. 수고롭게 강을 건너 이곳에서 간단한 연석(宴席)을 마련하고 서늘한 바람, 맑은 공기를 곁들여 술을 한잔 든다는 것 또한 흥취 있는 일이었다. 정조는 이른 아침 일찍 용양봉저정에 올라 이와 같은 정경의 일면을 읊은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이 행궁에 정문(正門)과 누정 등 두 세 채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종 때 유길준(兪吉濬)에게 하사된 후 전전하다가 1930년 일본인 이케다(池田)의 손에 들어가 건물 일부를 철거하고 부근 5,300여 평에 온천·욕장·운동장·식당 등을 둔 오락장으로 삼고 이름도 '용봉정(龍鳳亭)'으로 고쳐 부르는 수난을 당했다. 광복 후 이를 국유(國有)로 환원하여, 오락시설을 철거하고 원래의 이름으로 고쳤다.

 

현존하는 건물은 2단의 나지막한 기단 위에 사각기둥을 세웠으며, 건평 10평에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층 팔작지붕이다. 중앙부는 온돌방으로 꾸미고 사방에는 띠살 분합(分閤)을 달았으며, 방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퇴칸(퇴칸:집채의 원래 칸살 밖에 붙여 딴 기둥을 세워 만든 칸살)을 설치하여 마루를 꾸몄다. 정면 중앙 3칸은 개방되어 디딤돌을 통해 마루로 올라가게 되었고, 둘레에는 난간을 돌렸다. 네모 기둥머리에는 초익공(初翼工)을 결구(結構)하고, 이중량(二重樑)을 둔 5량구조(五樑構造) 겹처마 집으로 간결하면서도 격식을 갖춘 특수기능의 건물이다.

 

심원정(心遠亭)

심원정(心遠亭)은 용산구 원효로487번지에 있던 정자인데, 임진왜란 때 왜군과 명나라 군이 화전(和戰)을 위한 교섭을 벌였던 장소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쟁이 일어난 지 1개월도 못되어 수도 한성이 함락되었던 전세는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조선 관군의 수습,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 명나라 군의 원군(援軍) 등으로 점차 조·명 연합군 측이 우세해졌다.

 

특히 행주대첩(幸州大捷)으로 자신을 얻은 조선군이 한성을 향해 일대 반격 내지 소탕전을 전개하려고 할 무렵, 왜군은 평양 전투에서 패배하여 남산 산록을 중심으로 이 곳 용산 일대에 모두 후퇴 결집하고 있었다. 왜군들은 모두 이곳으로 쫓겨 들어와 무기와 식량 부족이 심각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한성을 탈출해야 한다는 절박한 사정에 놓여 있었고, 명나라는 전쟁을 더 이상 끌면서 확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행주대첩 이후 자력(自力)으로 한성을 탈환할 것을 도모하고 있던 조선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 초기부터 일기 시작했던 화의론(和議論)이 대두되었다. 사실상의 작전권을 장악하고 있던 명군은 왜군 측의 화의에 대한 요구를 구실 삼아 조선 측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화의를 진행시켰다. 이러한 화의에 대한 명나라와 왜군의 강화회담이 한강 특히 용산강(龍山江)과 이 곳 심원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 강화회담의 진행으로 용산강 일대를 차지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육상의 적을 섬멸하려던 우리 군의 작전계획은 차질을 빚었으나, 이 곳 심원정과 용산강 일대는 임진왜란 전쟁사에 있어서 한 전환점을 이룬 전적지(戰蹟址)로서의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그 후 이곳은 고종 때에는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의 별장이 되기도 하였으며, 현재는 정자는 없고 '왜명강화지처(倭明講和之處)'라고 음각(陰刻)된 비()가 남아 있다. 또 강화를 체결한 후 기념식수한 것이라 전해지고 있는 천연기념물 제6호로 지정된 백송(白松)과 느티나무 고목이 있어 옛 역사의 현장을 느끼게 한다.

 

망원정(望遠亭) = 희우정(喜雨亭)

복원된 망원정(望遠亭) -사진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망원정(望遠亭)은 양화나루(楊花津) 서쪽 언덕인 마포구 망원동 137, 207-1번지 일대에 있었다. 태종의 아들이자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1486)의 별장으로 세종 6(1424)에 건립되었다. 이 정자는 처음에는 희우정(喜雨亭)이라 하였는데, 세종 7(1425) 왕이 농사 형편을 살피러 이곳에 거둥하였다가 새 정자에 올랐을 때 때마침 기다리던 비가 내려 온 들판을 흡족하게 적시므로 왕이 매우 기뻐하여 정자의 이름을 희우정이라 붙인 것이라 한다. 효령대군은 이러한 왕의 행차와 명명(命名)에 깊이 감사하여 부제학(副提學) 신장(申檣)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고, 변계량(卞季良)에게 기문(記文)을 짓게 하였다.

 

변계량의 기문과 망원정의 주변 풍광을 노래한 시들에 의하면 정자가 사치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으며, 강변에 매우 가깝게 있고 누각 형식의 건물로 둘레에 난간이 돌려져 있었으며, 주위에는 소나무와 버드나무가 울창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작가 미상의 희우정 그림을 보면 강가 절벽 암반 위에 덤벙주초석(자연석을 가공 없이 그대로 사용한 초석)을 놓고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건물로서, 마루 둘레에는 난간을 돌리고 팔작지붕을 한 모습이다.

 

세종 27(1445) 왕이 이곳에 거둥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천(?)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포를 발사하며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을 하게하고, 세자와 대군 등이 희우정 서쪽 봉우리에 올라 관람하였다. 따라서 이 부근은 경치 좋은 명소로서만이 아니라 수륙군(水陸軍)의 훈련장으로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종 15(1484)에는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1488)이 정자를 고쳐 짓고 이름을 망원정이라 하였다. 이는 이 정자에 오르면 연희평(延禧坪)의 넓은 들판을 건너 도성 서북쪽의 산악지대를 바라볼 수도 있고, 또 동남쪽으로 한강을 끼고 펼쳐진 산야의 먼 경치를 잘 바라볼 수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성종은 세종 때의 예에 의하여 매년 봄 가을 이곳에 나와 농사 형편을 시찰하고 또 수전 연습을 관람하였으며 문인 명사들과 시주(詩酒)를 즐기기도 하였다.

 

그 후 연산군 12(1506)에는 연산군의 향락행위를 위하여 한강 명소인 망원정을 크게 확장할 것을 명하였다. 이 때 지붕은 초가로 하고 건물은 천 여 명이 앉을 만큼 크게 짓게 하며, 정자 위에서 바라다 보이는 건물은 모두 철거하도록 하였으며, 정자의 이름도 수려정(秀麗亭)으로 고치게 하였다. 그러나 이해 9월 중종반정으로 모든 공사는 중지되고 철거됨에 따라 망원정도 다시 옛 모습으로 명사들이 즐기는 명소가 되었다. 이곳은 경치가 매우 좋아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던 연회장으로도 사용되었으며 잠두봉(蠶頭峰)과 가깝기 때문에 잠두봉을 찾는 길에 이곳에 들르는 사신도 있었다.

 

그러나 망원정은 1925년 을축년(乙丑年) 대홍수 때에 유실되어 마포구 망원동 동명에서만 그 자취를 찾을 수 있었다. 그후 서울시에서는 1986년에 한강변 문화유적 복원계획의 일환으로 문헌 고증과 현지 발굴조사를 통해 망원정을 복원하기로 결정하였다. 망원정 복원공사는 1988620일부터 19891020일까지 시행되었으며, 원래 위치에서 약간 벗어나 마포구 동교로8안길 23 (합정동)에 대지 341.5평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2층 팔작기와집 누각으로 복원되었다. 그리고 1990년에 망원정 터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9호로 지정 보전하고 있다.

 

반구정(伴鷗亭)       참조 링크: 반구정 -위키백과

갈매기를 벗삼는 반구정(伴鷗亭)-(복원)

서울에 압구정(狎鷗亭)이 있다면 서울시에 속한 정자는 아니지만 갈매기와 노닌다는 반구정(伴鷗亭)은 경기도 파주시에 있다. 조선 세종 때 유명한 정승이었던 황희(13631452)가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친구 삼아 여생을 보내던 곳이다. 임진강 하류의 절경 지역에 세워진 정자로 경기도의 문화재자료 제12호로 지정되었다.

 

바로 위쪽에 앙지대(仰止臺)가 있으며, 낙하진과 가깝게 있어 원래는 낙하정이라 불렀다.

분단의 현실을 체감할 수 있는 철조망이 반구정 언덕과 임진강을 가로 막아 낙조가 들면 더없는 슬픔과 아름다움을 한꺼번에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미수 허목선생이 지은 반구정기(伴鷗亭記)를 보면 정자는 파주 서쪽 15리 임진강 아래에 있고 조수 때마다 백구가 강 위로 모여들어 들판 모래사장에 가득하다. 9월이면 갈매기가 손으로 온다. 서쪽으로 바다는 30리 이다.’라고 아름다운 풍광을 묘사해 놓았다.

 

반구정은 황희가 죽은 후 조상을 추모하는 전국의 선비들이 유적지로 보호하여 오다가 한국전쟁 때 모두 불타 버렸다. 그 뒤 이 근처의 후손들이 부분적으로 복구해 오다가 1967년 크게 고쳐지었다. 건물 규모는 앞면 2· 옆면 2칸이며기둥 윗부분과 옆면 등에 꽃무늬 장식을 돌려 붙였다.

 

[요약퀴즈]

[퀴즈 1] (서울)한강의 상류에 있던 정자로 일명 '회행정(回行亭)'로 불렸던 정자의 이름은?

[퀴즈 2] 한명회(韓明澮, 14151487)의 별장이었던 한강 정자의 이름은?

[퀴즈 3] 정조의 효심이 묻어나는 정자로 노들강(한강) 건너 풍광이 멋진 정자 이름은?

[퀴즈 4] 처음에 희우정(喜雨亭)이라 불렸던 양화나루(楊花津) 서쪽에 있는 정자의 이름은?

[퀴즈 5] 경기도 파주시에 있는 정자로 황희 정승이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친구 삼아

           여생을 보내던 임진강 하류의 절경 지역에 있는 이 정자의 이름은?

 

[요약퀴즈 정답]

[퀴즈 1] 한강 상류의 정자로 일명 '회행정(回行亭)'로 불렸던 정자의 이름은? .=>화양정

[퀴즈 2] 한명회(韓明澮, 14151487)의 별장이었던 한강 정자의 이름은? .=>압구정

[퀴즈 3] 정조의 효심이 묻어나는 노들강 건너의 정자는?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

[퀴즈 4] 희우정(喜雨亭)이라고도 불렸던 양화나진서쪽에 있는 정자의 이름은? .=>망원정

[퀴즈 5] 경기도 파주에 있는 정자로 황희 정승이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친구 삼아

여생을 보낸 임진강 하류 절경 지역의 정자의 이름은? .=>반구정(伴鷗亭)

 

(계속)

 

서울(한양) 탐구10-(서울의) 사찰()

 

<배경 영상 음악>  삼귀의(三歸依)와 반야심경(般若心經) 등 

삼귀의(三歸依)는 삼보[三寶]인 불[佛]. 법[法]. 승[僧]에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은 불교의 중심이 되는 경전으로《대반야바라밀다경》의 요점을 간략하게 설명한 짧은 경전으로, 당나라 삼장법사인 현장(玄裝)이 번역한 것이다. 260자로 되어 있다.

 

 추후 링크가 끊어지면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 나올 수도 있으며, 

 아래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보이면   https://www.youtube.com/embed/cN0ArYAF7oM/span>  <=요걸 클릭

 

 

* 본문 중 밑줄 친 링크는 본문 내용을 가져오거나 참고한 곳으로 필요시 밑줄 친 link를 클릭.

, 밑줄 친 링크는 현재는 연결되지만 추후 링크 주소 변경되면 연결이 안 될 수도 있음.

 

[요약퀴즈]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퀴즈 1] (서울) 성북동에 있는 사찰로 법정 스님과 인연이 있는 절의 이름은?

[퀴즈 2] 북한산 아래에 있어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은 둘러봤을 사찰이다. 이 절의 이름은

[퀴즈 3] 도성 밖 비구니 사찰로 왕실과 후궁, 상궁 등 궁인에게 사랑받은 절 이름은?

[퀴즈 4] 신촌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뒤에 있는 한국불교 태고종의 절로 서재필은

           자서전에서 이곳을 개화파의 온상이라고 하였다. 이 절의 이름은?

[퀴즈 5] 본래 경기도 광주 수도산(修道山)의 산사(山寺)였지만, 지금은 서울시 강남구

           도심 한가운데 있는 사찰이 되었다. 돈이 많은 부자(富者) 절로 소문난 이 절은?

[퀴즈 6] 경기도 남양주 운길산(雲吉山)에 있는 사찰로 세조의 명으로 중창된 절이다.

           두물머리(양수리)를 바라볼 수 있는 저명한 경관 전망지인 이 절의 이름은?

[퀴즈 7] 국 불교 최대 종단인 조계종 本寺로 근정전 크기의 대웅전이 있는 이곳은?

[퀴즈 8] 조계사 바로 옆에 있는 한국 최초의 우체국으로 갑신정변이 일어난 곳의 이름은?

[퀴즈 9] 서울시 은평구에 있는 사찰로 고려 현종의 목숨을 구한 인연으로 왕실의 지원과

            보호를 받았다. 20093.1운동 당시에 쓰였던 태극기가 발견된 이곳은?

[퀴즈10] 이성계의 비호를 받아 '조선의 왕사(王寺)'라고 불렸던 경기도 양주에 있던 이

            사찰의 이름은?   

    

내용출처:    (불교)/한국 - 나무위키

[나무위키]-링크 홈페이지 현 위치(주소)
관문사(觀門寺) www.gwanmunsa.org/main 서울 서초구 우면동  
금선사(金仙寺) www.geumsunsa.org/ 서울 종로구 비봉길 137
길상사(吉祥寺) http://kilsangsa.info/ 서울 성북구 성북동 323(선잠로568)
도선사(道詵寺) www.doseonsa.org/ 서울 강북구 삼양로173 504(우이동 264)
묘각사(妙覺寺) www.myogaksa.net/ 서울 종로구 숭인동 178-3
보문사(普門寺) http://www.bomunsa.or.kr/ 서울 성북구 보문동3가 168
봉원사(奉元寺) http://bongwonsa.or.kr/ 서울 서대문구 봉원사길 120
봉은사(奉恩寺) www.bongeunsa.org 서울 강남구 봉은사로 531 (삼성동)
수국사(守國寺) www.suguksa.org/ 서울 은평구 구산동
수종사(水鐘寺) x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1060
연화사(蓮花寺) x 서울 동대문구 제기로31 10-3(회기동) 
정각원(正覺院) https://jeonggak.dongguk.edu/ 서울 중구 필동로1길 30
조계사(曹溪寺) www.jogyesa.kr/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55
진관사(津寬寺) www.jinkwansa.org/ 서울 은평구 진관길 73
호압사(虎壓寺) www.hoapsa.org/ 서울 금천구 호암로 278
회암사(檜巖寺) www.hoeamsa.com/ 경기도 양주시 회암사길 281
화계사(華溪寺) www.hwagyesa.org/ 서울 강북구 화계사길 117
흥천사(興天寺) www.heungcheonsa.net/ 서울 성북구 흥천사길 29

조계사, 봉은사, 진관사, 화계사, 금선사, 묘각사에서 등에서 운영하는 템플스테이(템플라이프)에 참여하면 사찰 체험과 함께 그 절의 내력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알림-

이 글 내용은 [나무위키 www.namu.wiki]에서 대부분 가져왔지만, ‘가나다순으로 배열하고 편집 요약하였다.

원문을 보려면 클릭=> (불교)/한국 - 나무위키

 

* 1: 사찰 설명 중 금선사’ ‘도선사’ ‘묘각사’ ‘수국사를 제외한 나머지는 [나무위키]에서 가져 왔다.

* 2: 경기도 지역의 사찰이지만 수종사는 태조 이성계, ‘회암사는 세조와 관련이 깊어 본 자료에 포함

시켰다.

 

 

 - 가나다순  -

관문사(觀門寺)    참조 링크: 관문사(觀門寺)   www.gwanmunsa.org/main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에 위치한 대한불교천태종 사찰로 1970년 천태종 중창조(重創祖)였던 상월원각대조사가 큰 천태사원을 세우라는 유지를 받들어 시작했다. 1996113일 법당 상량식을 거쳐 19971231일에 불사를 마쳤다.

 

금선사(金仙寺)   참조 링크: 금선사(金仙寺)    www.geumsunsa.org/

금선사(金仙寺)는 북한산국립공원 남서쪽 산기슭(서울시 종로구 비봉길 137)에 있는 사찰로

조선 초, 태조 이성계 곁에서 조선의 건국과 한양 천도를 도왔던 무학대사가 창건했다.

 

금선사는 조선 후기 정조 임금과 관련한 설화가 전해져온다. 대구 파계사에서 수행정진 중이던 용파스님은 사찰에 부과되는 각종 부역으로 전국의 사찰이 피폐하게 되자 왕과 담판을 지으려고 서울로 올라왔다. 어느 날 임금을 만나 담판을 하였는데 임금은 왕자의 탄생을 조건으로 걸게 된다. 이후 임금의 후궁인 수빈 박씨의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아들이 태어날 것을 점지하였고 수빈 박씨가 음력 618일 아들을 낳았다. 같은 날 목정굴에서 기도하던 농산스님이 앉은 채로 열반에 들었다. 이에 농산스님이 열반에 들어 수빈 박씨 몸에서 다시 태어난 것이라 여기고 해마다 이날 순조 임금의 탄신제를 올리고 있다.

 

금선사는 일제강점기에 전소되어 중창된 지가 60년밖에 되지 않기에 유형문화재가 많지 않다.(내용출처: 위키백과)

    

길상사(吉祥寺)   참조 링크: 길상사(吉祥寺)    http://kilsangsa.info/

길상사 사진출처: 위키백과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 323(선잠로5 68)에 위치한 불교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 송광사의 말사이다1997년에 세워졌으므로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최고급 요정이었던 대원각(大苑閣)이 불교 사찰로 탈바꿈한 특이한 설립 이력이 있는 곳이다.

 

본래는 '대원각'이라는 이름의 고급 요정이었으나 요정의 주인이었던 고 김영한(법명 길상화)이 법정 스님에게 자신이 소유한 요정 부지를 시주하여 사찰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1995613일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 말사인 '대법사'로 등록하여 사찰이 되었고, 초대 주지 로 현문이 취임하였다. 1997년에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재등록되었다.

 

길상사(吉祥寺)의 절 이름은 길하고 상서로운 절이란 의미로, 묘길상(妙吉祥) 곧 문수보살의 별칭에서 인용된 불교용어이며, 승보사찰(僧寶寺刹) 송광사(松廣寺)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내용출처: 위키백과)

 

도선사(道詵寺)       참조 링크: 도선사(道詵寺)   홈피:  www.doseonsa.org/

서울시 강북구 삼양로173504(우이동 264) 북한산 만경대 하단부에 위치한 대한불교 조계종 계열의 사찰이다. 신라 경문왕(景文王) 2(862)에 도선(道詵)이 세웠다. 도선은 이곳의 산세가 1,000년 뒤의 말법시대(末法時代)에 불법을 다시 일으킬 곳이라고 예견하고 절을 창건한 뒤, 큰 암석을 손으로 갈라서 마애관음보살상을 조각하였다고 한다.

 

그 뒤 조선 후기까지의 중건·중수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북한산성을 쌓을 때는 승병들이 이 절에서 방번(防番: 보초 임무)을 서기도 하였다. (내용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묘각사(妙覺寺)     참조 링크: 묘각사(妙覺寺)   홈피:  www.myogaksa.net/

서울시 종로구 숭인동 178-3 낙산 동쪽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불입종의 총본산이다. 법화경을 중심으로 수행과 대중 불교운동을 지향한 법화신앙(法華信仰)의 중심사찰로현 위치에 절을 세우면 서울이 평안하고 시민생활에 안정을 가져온다는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터를 잡았다고 한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석굴암(石窟庵), 요사채가 있다.(내용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웅전은 1975년에 착공하여 19816월에 완공한 건물로서, 내부 천장이 매우 높고 지붕은 청기와를 사용하였다. 법당의 본존불은 청동불로서 합장을 한 특이한 모습이며, 좌우에는 4대 보살상, 뒤편에는 목각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 석굴암의 불상은 모두 북향을 하였는데, 일반적인 불상 배치법과는 달리 북쪽을 향한 것은 이북동포의 안녕과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뜻에서 취한 것이라고 한다.

 

보문사(普門寺)     참조 링크: 보문사(普門寺)    홈피:  http://www.bomunsa.or.kr/

대한불교 보문종의 총본산인 보문사는 고려 예종 10(1115) 담진(曇眞) 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창건 당시부터 비구니 즉 여승들을 위한 사찰이었다. 조선 시대에도 '탑골승방'이라고 불리며 비구니들이 거처하던 도성 밖 4대 비구니사찰 가운데 하나였다.

 

대한불교 보문종의 실제 개조(開祖)이자 중흥조는 일제강점기에 보문사를 중창한 비구니 긍 탄(亘坦: 1885-1980)과 그 제자 보암당 은영(恩榮: 1910-1981)이다.

 

2017년에 보문사 극락보전을 중수할 때에 발견된 상량문에 따르면 청 건륭 12(조선 영조 23, 1747) 처음 중건하고 도광 4(순조 24, 1824)과 동치 4(고종 2, 1865)에 더 중수했다. 동치 4년 상량문에는 조선 왕실의 시주를 받아 불사를 진행하고 후궁과 상궁 등 궁인에서부터 사대부, 평민에 이르기까지 불사에 동참하였다는 내용도 있다.

 

보문사에는 왕실에서 하사한 연()수식과 인로왕번(引路王幡)을 비롯하여 조선 후기에 제작한 석가불도, 신중도, 지장보살도는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조선 전기에 제작된 묘법연화경은 국가지정문화재이다.

 

보암당 은영은 1971년에 오갈 데 없는 여신도들을 위하여 시자원(施慈院)이라는 양로원을 만들었는데, 여기서 순정효황후와 황후를 모셨던 마지막 궁녀들이 여생을 보냈다. 말 그대로 조선 왕실의 여인들과 마지막까지 함께한 사찰이다.

 

봉원사(奉元寺)     참조 링크: 봉원사(奉元寺)    홈피: http://bongwonsa.or.kr/

서울 서대문구 봉원사길(세브란스병원 뒤)에 위치한 한국불교태고종의 절이다. 889(진성여왕 3)에 도선국사가 금화산 서쪽에 있는 신도의 집을 희사 받아 창건한 뒤 반야사(般若寺)라 했다고 한다. 그 뒤 고려 말 공민왕 때 태고(太古) 보우가 중건·보수하고 금화사라고 개칭했다. 1651년 봄에 큰 화재로 많은 피해가 있었고, 1655년 다시 중건하였다. 그 후 6.25때 많은 피해가 있었지만 복원을 해서 지금의 봉원사가 되었다.

 

구한말에는 개화파인 이동인이 이곳 봉원사에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많은 개화파 인사들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근대문명과 관련된 책을 읽고, 자주 모여 토론을 벌이고 갑신정변을 모의하기도 했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 때문에, 서재필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곳 봉원사를 개화파의 온상이라고 하였다.

 

봉은사(奉恩寺)     참조 링크: 봉은사(奉恩寺)   홈피: www.bongeunsa.org

(일제시대의) 봉은사 사진출처:국립중앙박물관

봉은사는 서울시 강남구 봉은사로 531 (삼성동)에 위치한 도심 속의 고찰(古刹)로 대한불교 조계종 직영사찰이다. 본래 경기도 광주 수도산(修道山)의 산사(山寺)였지만 지금은 서울시 로 편입되어 강남구 도심 한가운데 있는 사찰이 되었다. 돈이 많은 부자(富者) 절로 소문나있다.

 

서기 794년 신라 원성왕 시절에 처음으로 창건된 것으로 전해진다. 원래의 이름은 '견성사(見性寺)'였고, 위치도 선릉 근처라 지금과 달랐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서 성종의 능인 선릉을 지키는 '능침사찰'이 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 많은 땅을 하사받았다. 이 때문에 절 이름을 '은혜를 받든다.'라는 뜻의 봉은(奉恩)으로 바꾸었다.

 

이후 불교를 사랑했던 문정왕후 때에 승과시(僧科試) 시험장이 되었다. 이 때문에 숭유억불을 국시로 삼았던 조선 유생들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았다. 그나마 능침사찰이라 회암사처럼 불태워지는 사태는 없었다. 하지만 승과고시 때문에 당시 학식 있는 사람들이 승려로 입산하였고, 휴정, 유정 같은 명망 있는 승려들이 나와 임진왜란 등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1939년에 큰 화재를 겪었으며, 19506.25 전쟁 때 전각이 대부분 파괴되었다가 이후에 재건되었다. 때문에 봉은사 건물은 판전 등 소수의 건물을 제외하면 주로 1940년대와 1980년대 전후로 재건된 것들이다.

 

수국사(守國寺)     참조 링크: 수국사(守國寺)    홈피: www.suguksa.org/

- ‘수국사관련 이 부분의 내용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가져온 것이다. -

서울시 은평구 구산동에 있는 절이다. 크기는 5층짜리 건물 정도로 20세기에 지어졌다.

외부와 내부 모두 99.9% 순금이라고 하나 사실 금으로 지은 것이 아니고 얇은 금박을 나무에 붙인 것이라고 한다. 기존의 사찰 건물은 나무에 단청을 칠하는데,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나무가 썩고 단청이 지워진다. 이를 보수하는 비용이 생각보다 많이 들어간다. 하지만 금을 입히면 이 비용을 많이 줄일 수 있다고 한다.

 

수종사(水鐘寺)     내용출처: 수종사(水鐘寺)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운길산(雲吉山)에 있는 사찰로 조선전기 제7대 세조의 명으로 중창 된 사찰이다. 수종사에 대한 유래는, 1458(세조 4) 세조가 금강산(金剛山) 구경을 다녀오다 이수두(二水頭 : 兩水里)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한밤중에 난데없는 종소리에 잠을 깬 왕이 부근을 조사하자, 주변에 바위굴이 있고, 굴 안에 18나한(羅漢)이 있었으며, 굴 안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종소리처럼 울려나와 이곳에 절을 짓고 수종사라고 하였다고 전해온다.

 

두물머리를 깨우는 종소리를 들어보려면 요걸 클릭. 추후 링크가 끊어지면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 나올 수도 있으며, 아래 동영상 보려면 ▷클릭=> https://youtu.be/bnsWLJBgGfg

 

 

운길산 수종사(水鐘寺)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양수리 兩水里)를 바라볼 수 있는 저명한 경관(景觀) 전망지이다. 예부터 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의 풍광을 시··화로 남겼으며, 서거정(1420~1488)은 수종사를 동방에서 제일의 전망을 가진 사찰이라 하였다. ·여름·가을·겨울 연중 내내 신록·단풍·설경이 신비스럽고, 일출·일몰·운해 등 어느 시간의 풍광이라도 대단히 아름다운 전망을 지니고 있어 조망지점으로서 경관(景觀) 가치가 큰 곳이다.

 

정약용은 일생을 통해 수종사에서 지낸 즐거움을 군자유삼락에 비교할 만큼 좋아했던 곳 이다. 또한 다선(茶仙)으로 일컬어지는 초의선사가 정약용을 찾아와 한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며 차를 마신 장소로 차문화와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현재 수종사는 삼정헌(三鼎軒)이라는 다실을 지어 차 문화를 계승하고 있어 차() 문화를 상징하는 사찰로 이름이 높다.

 

겸재 정선(1676~1759)의 경교명승첩(한강의 북한강·남한강 주변경관과 한강과 서울의 인왕산, 북악산 등의 경관을 그린 화첩으로 총 33점으로 이뤄짐)중 독백탄(獨栢灘)은 현재의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 兩水里의 경관을 보여주는 고서화로서 그 시대의 명승지 경관과 현재의 경관을 비교 감상할 수 있어 회화 가치가 높다.

 

연화사(蓮花寺)     참조 링크: 연화사(蓮花寺)

서울시 동대문구 제기로3110-3(회기동)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원찰로 세워진 사찰이다.

 

정각원(正覺院)     참조 링크: 정각원(正覺院)    홈피: www.heungcheonsa.net/

이 정각원 건물은 조선의 5대 궁궐 중 하나인 경희궁의 정전(正殿)이었던 숭정전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경희궁 전체를 완전히 해체하면서 숭정전의 목재들이 팔려 나왔고, 그 것을 일본 사찰이었던 대화정 조계사(大和町 曹溪寺)가 사들여 법당으로 사용하였다. 이 조계사는 현재의 대한불교 조계종의 조계사와는 다른 절이다.

 

이후 이 절의 부지에 동국대학교 건물들이 세워지자 1976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져 동국대학교 안의 법당이 되었다.

 

(사족) 동국대학교 근처의 서울 신라호텔 자리에는 박문사(博文寺: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사당으로 1932년 완공된 건물)가 있었다. 이때 경희궁에 있던 흥화문을 헐어 옮겨와 박문사 입구 문으로 썼다.

 

현재 경희궁의 원래 자리에는 새로운 숭정전으로 복원되어 있다. 원래의 (동국대)정각원을 다시 제자리로 옮기려 했으나 건물이 낡아 이전이 어려웠다. 1989년부터 6년에 걸쳐 원래 자리에 새 건물을 지어 복원했다고 발표했다. 그렇지만 복원된 경희궁 숭정전의 완성도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이제 와서 불교 건물로 사용되고 있는 정각원을 다시 회수하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

 

조계사(曹溪寺)     참조 링크: 조계사(曹溪寺)    홈피: www.jogyesa.kr/

조계사 대웅전

대한불교 조계종의 총본산인 조계사는 서울시 종로구 우정국로 55 (수송동)에 위치한 사찰 이다. 사찰 규모는 아담하지만 대한민국 불교 최대 종단의 본사(本寺)답게 경복궁 근정전에 맞먹는 큰 대웅전이 있고, 경내에는 천연기념물 제9호인 백송이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 재위 4(1395)에 창건되었다고 말하나, 실질적 창건은 구한말 순종 융희 4(1910)에 되었다. 한국 근대사가 그렇듯, 조계사도 역사는 짧지만 매우 복잡하다. 한국불교의 친일과 민족투쟁 역사의 중심에 있던 절이기도 하다.

 

대한제국 시절, 한국불교에는 구심점이 될 종단이 없어 계속 밀고 들어오는 일본 불교 세력에 한국 불교가 위축되었다. 이런 상황을 개탄하여 만해 한용운 등 민족적 불교 인사들이 새 종단을 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에 1902년 흥인지문(동대문) 밖 지금의 창신동 창신초등학교 자리에 원흥사(元興寺)를 창건하고, 1908년에 각 도의 사찰 대표 65인이 원종(圓宗) 종무원을 설치하였다.

 

조선왕조 내내 유교 성리학을 숭상하고 불교는 억제하는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해 사찰()도 산으로 추방당하거나 방화(放火)로 사라지는 판에, 한양도성 사대문 안에 절이 생기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게다가 1895년까지는 승려는 천민 신분으로, 도성 출입마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사대문 안에 절을 세운다는 것은 억압받던 한국 불교계에 있어 의미가 컸으며 또한 시대가 달라졌음을 뜻했다.

 

갑신정변(甲申政變)과 우정총국(郵征總局)      참조 링크: 갑신정변 -나무위키

우정총국(郵征總局)

조계사 바로 옆에 있는 우정총국(郵征總局)은 갑신정변이 일어났던 곳으로 한국 최초의 우체국이라고 할 수 있는 건물이다.

 

갑신정변(甲申政變)1884(갑신년)에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 개화파가 서구식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이다. 일본공사와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난을 일으켰다. 급진 개화파는 여러 온건 개화파들을 살해했다. 윤태준, 한규직, 이조연 등 영선사 출신이나 민씨 척족 중에서 민영목, 민태호 그리고 조영하 등 여러 온건 개화파들이 살해당했다.

 

고종을 속이고 새 내각을 구성해 정강 14조 등 개혁을 추진하려 했으나 청나라 군사(淸軍)가 창덕궁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고 민중들이 일본공사관을 공격하자 계획이 좌절되었다.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하며 삼일천하로 끝났다.

 

이 정변은 고종에게도 큰 충격을 준 사건으로 급진 개화파와 온건 개화파 모두 상당수의 인재들이 사라져 향후 근대화에 걸림돌이 되고 청의 내정간섭이 심해지는 등 큰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

 

진관사(津寬寺)     참조 링크: 진관사(津寬寺)   홈피:  www.jinkwansa.org/

진관사

서울시 은평구 진관길 73 (진관동 354번지)에 위치한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조계사 말사로 북한산 진관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신라 진덕여왕 때에 처음 지었다는 유래가 있기는 하지만 이 사찰이 거의 창건 수준으로 대대적으로 중창된 것은 고려 초기의 일이었다. 고려 초 이곳은 진관(津寬)이라는 승려가 홀로 수행하던 신혈사(神穴寺)라는 이름의 작은 암자였다고 한다.

 

진관사가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고려 현종의 목숨을 구한 사찰임과 동시에 사찰에서 6백 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수륙대재덕분이기도 하다. 땅 위, ‘수륙재는 물속의 모든 의지할 곳 없는 영혼들과 아귀(餓鬼)를 위하여 법요를 열고 음식을 공양하는 행사이다. 진관사의 경우 조선 태조가 몸소 국가행사로 명한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 초기의 문신 권근이 태조의 명으로 지은 진관사수륙재조성기(津寬寺水陸社造成記)에 따르면 태조 6(1397) 태조가 이 절에 수륙사(水陸社)를 설치하고 여러 번 행차하여 수륙재를 지냈다고 한다.

 

이를 본받아 태종도 태종 13(1413) 이 절에서 아들 성녕대군(誠寧大君)을 위한 수륙재를 열고, 향과 제교서(祭敎書)를 내렸으며, 수륙재위전(水陸齋位田) 100결을 하사하여 재를 계속하게 하였다. 이후부터 진관사에서는 매년 1월 또는 215일에 수륙재를 열게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진관사 수륙대재(국가무형문화재 제126)라는 이름으로 해마다 음력 9월에 거행되고 있다.

 

그 뒤 세조 9(1463) 화재로 소실된 것을 성종 1(1470) 벽운(碧雲)이 중건하였으며, 철종 5(1854)과 철종 7(1858)에 중수하였다. 고종 16(1879)에 경운(慶雲)이 대방을 중수하였다. 1908년에는 송암(松庵)이 오층석탑을 세우고 1910년에 대웅전의 삼존상을 개금하였으며 명부전을 중수하면서 지장보살상을 개금하였다. 또한 독성전과 칠성각을 새로 지었다.

 

그러나 6.25 전쟁 때 나한전 등 3동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1964년부터 최진관 비구니가 당우를 차례로 재건하여, 현재에는 대웅전을 비롯한 명부전, 나한전, 독성전(獨聖殿), 칠성각, 홍제루(弘濟樓), 종각(鐘閣), 일주문, 선원(禪院), 대방(大房) 등을 갖추었으며, 비구니 수도도량으로 이용하고 있다.

 

2009년 칠성각 보수 당시 불단 뒷면에서 3.1운동 당시에 쓰였던 태극기와 신대한 2·3, 자유신종보, 조선독립신문 32·40호 경고문 등 국외 독립운동과 불교계의 관계를 알려주는 유물들이 새롭게 발굴되기도 했다.

 

호압사(虎壓寺)      참조 링크: 호압사(虎壓寺)   홈피:  www.hoapsa.org/

서울시 금천구 시흥 2동 호암산(虎巖山) 아래에 위치한 대한불교 조계종 사찰로 조계사의 말사(末寺)이다.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봉은사의 말사였다고 한다.)

 

화계사(華溪寺)      참조 링크: 화계사(華溪寺)   홈피:  www.hwagyesa.org/

화계사(華溪寺) 대웅전

중종 17(1522) 신월(信月)선사가 창건했다. 고려 광종 때 탄문(坦文)과 법인(法印)이 현재 화계사 근처 부허동(浮虛洞)에 세운 보덕암(普德庵)을 신월이 서평군 이공(西平君李公)과 함께 현 위치로 옮긴 것이다. 광해군 10(1618) 화재로 전소되어 도월(道月)이 중창했다. 이후 고종 3(1866)에도 낡은 건물들을 보수했다. 구한말에는 흥선대원군이 개인적으로 후원을 하였다.

 

회암사(檜巖寺)      참조 링크: 회암사(檜巖寺)   홈피:  www.hoeamsa.com/

경기도 양주시 천보산에 위치했던 사찰로 숭유억불 정책을 추진한 조선왕조에서도 왕과 왕후들의 비호를 받으며 '조선의 왕사(王寺)'라고 불렸던 조선 최대의 절이었다. 선대왕들의 제사를 지내는 사찰이므로 더욱 특별히 보호받았다. 행궁으로도 기능했으므로 그 모습이 궁궐 건축에 가까웠다.

 

태조 이성계는 회암사를 매우 아꼈다. 나옹화상의 제자인 무학대사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였으며,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찬례(讚禮: (), (), () 삼보(三寶)에 예배하고 그 공덕을 찬탄함)토록 하였다. 이성계가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회암사에서 수도생활까지 했을 정도였다. 비록 이성계는 조선의 왕이었지만 그 자신은 유학자 출신이 아니었으며, 불교문화 속에서 성장한 고려시대 인물인지라 불교를 좋아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나름대로 독실한 불자였던 세조 등에 힘입어 회암사도 계속 번창하였다. 성종 3(1472)에는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자 대왕대비인 정희왕후가 더 크게 중창하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에도 숭유억불 정책이 존재했으나, 실제로 많은 왕족들은 불교에 관심이 있었다. 조선 초기는 왕의 권력이 신하들보다 더 강했기에, 국왕의 개인적인 생각에 따라 신료들의 반대를 누르고 사찰을 지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 유학자들의 힘이 강해지고 점점 숭유억불 정책도 강경해지던 중, 16세기 후반에 원인 모를 화재로 폐사가 되었다. 19세기에 이 절터 근처에 재건한 작은 회암사가 남아있다.

 

회암사지(檜巖寺址)     참조 링크: 회암사지 -다음백과

회암사는 1313년 이전에 이미 절이 창건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1326년 고려에 온 인도 승려 지공이 창건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1376년 지공의 제자인 나옹이 이 절을 중창했다.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를 이곳에 머물게 했고, 그 자신도 퇴위 후 이곳에서 생활했다. 1472년 세조비인 정희왕후의 명으로 정현조가 중창했고, 명조 때에는 보우를 신임한 문정왕후의 비호로 전국제일의 수선도량이 되었다. 왕후가 죽은 뒤 보우가 처형되고 절도 황폐해졌다. 선조 이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옛 절터 부근에는 1977년 중건한 대웅전·삼성각·영성각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 회암사지 선각왕사비(보물 제387회암사지 부도(보물 제388), 회암사지 쌍사자석등(보물 제389) 등이 남아 있다.

 

흥천사(興天寺)     참조 링크: 흥천사(興天寺)   홈피:  www.heungcheonsa.net/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조계사의 말사로 서울시 성북구 돈암동에 위치한 이 곳은 조선 시대의 사찰로 원래 한양 도성 내에 있었다.

 

조선 태조 5(1396) 태조의 정비였던 신덕왕후 강씨가 죽자 태조는 강씨의 능원인 정릉을 도성 내에 조성하고, 강씨의 원찰로써 흥천사를 지었다. 흥천사를 지은 후 태조 7(1398) 7월에 열린 우란분재(盂蘭盆齋: 불교에서 사후에 고통 받고 있는 자를 위해서 음력 715일에 음식을 공양하는 의식)를 직접 참여하거나, 8월에는 신덕왕후의 천도회(薦度會:죽은 이의 넋을 극락으로 보내기 위해 행하는 의식 모임)에 사찰 승려들을 몸소 만나 시주하고 천도회를 주도하는 등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계모 신덕왕후를 거의 증오하다시피 했던 태종이 즉위한 뒤인 태종 3(1403)에 사찰에 딸린 전답과 노비의 수를 줄이고, 태종 8(1408)에는 절의 건물 170칸을 뜯어서 명() 사신들의 객사인 태평관(太平館)을 짓는데 사용했다. 그나마 사찰 자체를 없앤 것은 아니어서 태종 10(1410) 태조의 유지(遺旨)를 좇아 절을 수리하고 이듬해에는 사리각을 중수하였다.

 

세종 6(1424) 선교양종 통합 당시 선종에 속하게 되었다. 세종 19(1437)부터 세종 23(1441) 3월까지 왕명으로 사찰을 중수하였고, 세조 8(1462)에는 범종을 만들어서 이 사찰에 봉안하였으며, 옛 흥천사 부지에 의경세자의 부인이자 며느리인 한씨의 사저를 지어주기도 했다.

 

성종 11(1480) 절을 다시 중수하였으며, 연산군 10(1504) 대궐 안에 있던 내원당(內願堂)을 이 절로 옮겼는데, 그 해 12월에 화재로 절이 소실되어 사리각만 남았다. 중종 5(1510)에는 이 사리각까지 불타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고, 선조 2(1569) 사찰이 정릉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왕명으로 함취정(含翠亭) 옛 터로 절을 옮겨지었다.

 

정조 18(1794) 이 절의 승려 성민(聖敏), 경신(敬信) 등의 발원으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짓고 절 이름을 신흥사(神興寺)라 하였다. 그 뒤 헌종 12(1846) 구봉(九峰)이 칠성각(七星閣)을 지었고, 철종 1(1849) 성혜(性慧)가 적조암(寂照庵)을 창건하였으며, 철종 4(1853) 대웅전(지금의 극락전), 철종 6(1855) 명부전(冥府殿), 고종 2(1865) 대방(大房)과 요사채를 짓고 이름을 창건 당시의 이름인 흥천사로 되돌렸다.

 

[요약퀴즈]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퀴즈 1] (서울) 성북동에 있는 사찰로 법정 스님과 인연이 있는 절의 이름은?

[퀴즈 2] 북한산 아래에 있어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은 둘러봤을 사찰이다. 이 절의 이름은

[퀴즈 3] 도성 밖 비구니 사찰로 왕실과 후궁, 상궁 등 궁인에게 사랑받은 절 이름은?

[퀴즈 4] 신촌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뒤에 있는 한국불교 태고종의 절로 서재필은

           자서전에서 이곳을 개화파의 온상이라고 하였다. 이 절의 이름은?

[퀴즈 5] 본래 경기도 광주 수도산(修道山)의 산사(山寺)였지만, 지금은 서울시 강남구

           도심 한가운데 있는 사찰이 되었다. 돈이 많은 부자(富者) 절로 소문난 이 절은?

[퀴즈 6] 경기도 남양주 운길산(雲吉山)에 있는 사찰로 세조의 명으로 중창된 절이다.

           두물머리(양수리)를 바라볼 수 있는 저명한 경관 전망지인 이 절의 이름은?

[퀴즈 7] 국 불교 최대 종단인 조계종 本寺로 근정전 크기의 대웅전이 있는 이곳은?

[퀴즈 8] 조계사 바로 옆에 있는 한국 최초의 우체국으로 갑신정변이 일어난 곳의 이름은?

[퀴즈 9] 서울시 은평구에 있는 사찰로 고려 현종의 목숨을 구한 인연으로 왕실의 지원과

            보호를 받았다. 2009 3.1운동 당시에 쓰였던 태극기가 발견된 이곳은?

[퀴즈10] 이성계의 비호를 받아 '조선의 왕사(王寺)'라고 불렸던 경기도 양주에 있던 이

            사찰의 이름은 

 

[요약퀴즈 정답]

[퀴즈 1] 성북동에 있는 사찰로 법정 스님과 인연이 있는 절의 이름은? .=> 길상사

[퀴즈 2] 북한산 아래에 있어 오르내리는 사람은 둘러봤을 절이다 이곳은? .=> 도선사

[퀴즈 3] 비구니 사찰로 왕실, 후궁, 상궁 등 궁인에게 사랑받은 절 이름은? .=> 보문사

[퀴즈 4] 세브란스병원 뒤에 있는 한국불교 태고종의 절로 서재필은 자서전에서 이곳을

            ‘개화파의 온상이라고 하였다. 이 절의 이름은? .=> 봉원사

[퀴즈 5] 본래 경기도 광주 수도산(修道山)의 산사(山寺)였지만, 지금은 서울시 강남구

           도심 한가운데 있고, 돈이 많은 부자(富者) 절로 소문난 이 절은? .=> 봉은사

[퀴즈 6] 경기도 남양주 운길산(雲吉山)에 있는 사찰로 세조의 명으로 중창된 절이다.

           양수리를 바라볼 수 있는 저명한 경관 전망지인 이 절의 이름은? .=> 수종사

[퀴즈 7] 국 불교 최대 종단인 조계종 本寺인 이곳은? .=> 조계사

[퀴즈 8] 한국 최초의 우체국으로 갑신정변이 일어났던 곳의 이름은? .=> 우정총국

[퀴즈 9] 서울시 은평구에 있는 절로 고려 현종의 목숨을 구한 인연으로 왕실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 3.1운동 당시에 쓰였던 태극기가 발견된 이곳은? .=> 진관사

[퀴즈10] 조선왕실의 비호를 받아 '조선의 왕사(王寺)'라고 불렸던 경기도 양주에 있던 이

            사찰의 이름은? .=> 회암사

(계속)

 

서울(한양) 탐구08-(서울)한강의 나루, 살꽂이다리 箭串橋(전곶교)


 

(배경 영상,음악)  경기민요 한강수타령, 매화타령 -KBS 전주 국악한마당

    추후 링크가 끊어지면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 나올 수도 있으며,

    아래 음악이나 동영상 보려면 ▷클릭, 멈추려면 stop □ 버튼 클릭.    

    아래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보이면  https://www.youtube.com/embed/D124Y4Kyt2c<=요걸 클릭

 


 

* 본문 중 밑줄 친 링크는 본문 내용을 가져오거나 참고한 곳으로 필요시 밑줄 친 link를 클릭.

  단, 밑줄 친 링크는 현재는 연결되지만 추후 링크 주소 변경되면 연결이 안 될 수도 있음.

 

나루터, 포구, () 하천(河川), ()의 이름은 지명이나 지하철역명에 많이 반영되어 있다.

 

[요약 퀴즈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퀴즈 1] 태조 이성계가 함흥차사후 태종에게 화살을 쐈다는 중랑천 하류의 옛 다리 이름은?

[퀴즈 2] 나루 인근에 몽촌토성·풍납토성 등과 연결되는 아차산성이 있으며, 옛날부터 중요한

                 교통로였고 오늘날은 서울부산간 교통로가 이 지역을 지나고 있다. 나루 이름은?

[퀴즈 3] 과천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한강의 나루로 우리말(=노들나루)인 이 나루의 漢字名?

[퀴즈 4] 소금과 젓갈을 실은 배들이 모여들어 도성의 소금과 젓갈은 거의 모두 이곳에서 공급

                 됐다. 결빙기를 제외하고는 京江商人과 배들로 붐비고 활기를 띠었다. 이 나루 이름은?

[퀴즈 5] 서울에서 양천(陽川)을 지나 강화로 가는 조선 시대 교통의 요지였으며, 삼남 지방에서

                 한강을 통하여 운송되어 오는 곡식을 하역하던 나루이다. 이 나루의 이름은?

[퀴즈 6] 양화나루 인근에 있는 이곳은 누에머리를 닮았다하여 잠두봉이라 불린다. 많은 천주

                 교도들이 참수당한 곳으로 천주교의 순교성지가 되었다. 머리가 잘렸다 해서 oo?

 

한강 다리가 세워진 곳은 유명 나루터, 포구였다. (2019.01.04 기사)

내용출처: http://www.seni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971

 

역사적으로 한강은 한반도 중부지방을 동에서 서로 흘러가는 젖줄로써 일찍부터 그 가치를 인정받아 왔다. 그 중 광나루에서 양화진까지 조선시대 한양에 인접한 경강(京江-서울의 한강)에는 광나루, 두모포, 한강진 등 11개의 나루와 포구가 있었다.

 

이 나루와 포구는 한양과 전국 각지를 연결하는 주요 도로가 지나는 길목이었고 상업의 중심지였다. 경기도 광주로 가는 길은 동대문에서 시작하여 왕십리를 지나 살꽂이다리, 광진(廣津 광나루)을 거치고 용인으로 가는 길은 광희문에서 한강진(漢江津 한강나루)을 지난다. 과천으로 통하는 길은 남대문에서 동작진(銅雀津 동작나루)을 건너는 등 한양 남쪽 지방으로 향하는 대로(大路)는 모두 한강을 건너야 했다.

 

근대에 들어 육로교통 수단이 발달되면서 배로 한강의 남쪽과 북쪽을 연결하던 나루와 포구 자리에 다리가 들어섰다. 1900년 한강철교, 1917년 한강인도교 건설 등을 필두로 하여 수많은 다리가 놓여 있다. 한강의 다리 건설은 길을 이어줌과 동시에 강남(영동)개발, 여의도개발, 잠실개발 등 서울의 발전을 견인해왔다.

 

이러한 다리들은 하나같이 옛 길과 나루터 자리에 건설되었다. 노량진에는 한강대교(1한강교)가 놓였고 양화진에는 양화대교(2한강교)가 한강진에는 한남대교(3한강교)가 들어섰다. 마포나루에 들어 선 것이 마포대교(서울대교)이고 송파진에는 잠실대교가 서빙고나루에는 잠수교와 반포대교가 만들어지는 등 예전 나룻배가 다니던 길 위로 다리가 들어선 것이다.

 

이 다리는 조선시대와 같이 주요 지역을 잇는 길이기도 하다. 목포에서 임진각을 거쳐 신의주를 잇는 국도1호선이 1996년까지 한강대교(1한강교)를 거쳐 갔고 서울에서 인천과 강릉으로 이어지는 국도6호선은 양화대교(2한강교)를 지난다.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도 신설 당시 한남대교(3한강교)가 시작점이었던 점 등으로 보아 나루와 포구가 있던 자리에 건설된 한강의 다리는 근래에도 교통의 중심지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서울의 발전을 위해 추진된 부도심 건설은 교량 건설과 함께 하였다. 비행장이던 여의도를 부도심으로 개발하는 사업에는 마포대교(서울대교)가 한강 수변의 버려져 있던 저습지였던 강남 영동지구를 개발하는 사업은 한남대교(3한강교)가 활성화 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강다리의 이름은 제1한강교->한강대교, 2한강교->양화대교, 서울대교->마포 대교로 지금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한강대교의 건설로 만들어진 노들섬, 여의도 건설로 인해 변화된 서강대교 아래 밤섬, 서울 수돗물 정수장이었던 양화대교 아래의 선유도 등 한강에 있는 섬의 옛 모습 등 서울의 옛 모습은 서울역사박물관 홈페이지(www.museum.seoul.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19.01.04. 기사 내용)

 

살꽂이다리=살곶이다리     참조 링크: 살꽂이다리

살꽂이다리또는 살곶이다리라고 하였고 한자명으로 箭串橋(전곶교)라고 한다. 성동구 사근동 102번지 남쪽 현재 성동교 동쪽에 위치해 있는 돌다리로서 중랑천에 놓여 있다. 조선시대 다리로는 가장 길었으며 濟盤橋(제반교)라고도 불렀다. 현재는 중간 부분이 훼손된 채 양쪽 가장자리만이 원형을 보존하고 있으며 사적 제160호로 지정되어 있다.

살꽂이다리(箭串橋 전곶교-화살이 꽂힌 다리)

함흥차사(咸興差使)와 살꽂이다리(箭串橋 전곶교-화살이 꽂힌 다리)

함흥차사(咸興差使)       참조 링크: 함흥차사 -고사성어대사전

조선 초기, 방석(芳碩)의 변(1차 왕자의 난)이 있은 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정종(定宗)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고향인 함흥에 은거했다. 그 후 형제들을 살해하면서까지(2차 왕자의 난) 왕위를 차지한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은 분노한 태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함흥으로 차사를 보냈다. 하지만 태조가 번번이 활을 쏘아 차사들을 죽이거나 가두어 돌려보내지 않았다. 여기에 서 유래하여 함흥차사는 심부름 간 사람이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살꽂이다리(箭串橋(전곶교)-화살이 꽂힌 다리)로 불리게 된 까닭...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거쳐 태종으로 등극하자 함흥으로 내려가 한양으로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이방원의 등극을 부정하였다. 그 후 태조 이성계는 태종과 신하들의 간곡한 청으로 함흥에서 돌아오게 되는데, 태종이 이곳 중랑천 하류 한강 가에서 천막을 치고 아버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 태조가 태종을 향해 활을 쏘았으나 맞히지 못하고 화살이 땅에 꽂혔다, 그 후 이 지역을 화살이 꽂힌 곳이라 하여 살꽂이혹은 살곶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다리는 한강이 아니라 중랑천에 있는 다리이다.

 

한강의 유래      내용 출처: https://hangang.seoul.go.kr/archives/249 -서울시 한강사업본부

한사군과 삼국시대 초기의 한강은 한반도의 중간 허리부분을 띠처럼 둘렀다는 뜻에서 帯水(대수) 라 불렀고, 고구려에서는 '아리수' 라 했으며, 백제는 '욱리하' 라고 했다. 또 신라는 상류를 '이하', 하류를 '왕봉하' 라 불렀다. 한편 '삼국사기' '신라편' 지리지에는 한강을 '한산하' 또는 '북독' 이라고도 했다. 백제가 동진과 교통하여 중국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한강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고쳐서 '漢水(한수)'라 불렀고, 그 뒤부터 옛 이름은 사라지고 '한수' 또는 '漢江(한강)' 이라고 불리어졌다.

 

고려 때는 큰 물줄기가 맑고 밝게 뻗어내리는 긴 강이란 뜻으로 '열수' 라고 불렀으며, 모래가 많아 '사평도' 또는 '사리진' 이라고도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경강(京江)'이라고도 불렀다.

 

한강은 본래 우리말 '한가람'에서 비롯된 말로 '''크다, 넓다, 길다'는 의미이며, '기람'은 강의 고어로 한강’='크고 넓은 강' 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위치에 따라 다르게 불린 한강의 이름들      출처 링크: 한강 [漢江] 서울지명사전

한강이란 한남동 앞에 흐르는 강의 별명으로서 이곳에 한강진과 제천정 등이 있었다. 뚝섬에서 옥수동 앞강을 동호, 한남동 앞을 한강, 동작동 앞을 동작강, 노량진 앞을 노들강, 용산 앞을 용호 · 용산강, 마포 앞을 마포강, 서강 앞을 서강, 김포 북쪽을 조강이라고 불렀다.

 

한강의 포구와 나루 (-배대는 곳)      출처 링크: 포구 교역-문화원형백과

(알림) 이하 내용은 링크: 포구 교역-(문화원형백과 한강 생활문화)에서 가져 왔다.

우리말로 개, 한자말로 포()는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을 말한다. 서해 바닷물이 동작진(:나루 진)까지 올라왔다고 하는데 그 위로도 두모포(斗毛浦), 개포(開浦) 등이 있는 것을 보면 포라는 명칭이 붙기 위해서 반드시 바닷물이 드나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과거 삼개 즉 마포가 한강 물자유통의 중심이었던 것은 배들이 조수의 힘으로 가장 멀리 올라 올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한강 하류지역에 발달한 포구로는 하류로부터 조강포(祖江浦), 이산포(二山浦), 행주외리, 양천, 후포, 염창, 양화진, 서강, 마포, 용산 등 아랫강 포구와 서빙고, 한강리, 수철리, 뚝섬, 송파 등 윗강 포구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포구 가운데 용산과 마포가 규모와 기능 면에서 월등하였다.

 

-알림-

한강의 나루를 설명에, 나루 지명의 단순 링크는 다음백과를 참조하였고, 내용은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일부를 가져왔으며, 링크: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들-1에서 주로 가져왔다아래 각 나루의 설명은 한강 상류부터 내려오면서이다.

 

광나루       내용 출처 링크: 광나루

광진구 광장동에 양진(楊津광장(廣壯광진(廣津광진도(廣津渡) 등의 명칭으로도 불리었으며, 진취락(津聚落)을 형성하였던 곳이다. 한강의 중하류에 위치한 광나루는 교통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서울에서 부산까지 연결되는 영남로의 주된 간선로는 아니었으나, 부산으로 향하는 도로의 길목에 위치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파발로가 지나서, 광나루의 교통상 기능은 지속적으로 중요시되었다.

 

광진원(廣津院)이 광나루 북쪽 언덕에 위치하였으며, 도승(渡丞)이 있어 사람들의 내왕을 조사하기도 하였다. 당시 좌도수참전운판관(左道水站轉運判官)이 겸직으로 이 지역의 조운을 관장하였을 정도로, 광나루는 서울 주변의 중요한 나루터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북쪽에는 백제 초기 몽촌토성·풍납토성 등과 연결되는 아차산성이 있으며, 고대부터 교통로로서 중요하였고 오늘날은 서울부산간 교통로가 이 지역을 지나고 있다.

 

송파나루(松坡津 송파진)       내용 참조링크: 송파나루,송파진

현재의 송파구 석촌호 부근에 있던 나루터로서, 도성에서 전곶교를 건너 신천진을 지나 만나게 된다. 송파에서 잠실로 연결하였으며, 광주,이천으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도선장은 조선 후기에 발달하였다. 본래 이 부근에서 가장 큰 도선장은 삼전도였는데, 병자호란 이후 기피 경향이 있어 정부에서 송파진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 상공업의 발전과 함께 유명한 장시로 성장하여, 객주,거간을 비롯한 도선주들이 모여들었다. 송파진에는 9척의 진선이 있어 통행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송파진별장은 인근의 광진,삼전도,신천진의 나루까지 관장하였다.

 

신천나루(新川津 신천진)      내용 참조링크: 신천진

오늘날의 송파구 신천동에 있던 나루터로서, 신천동에서 뚝섬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삼전도(新川津 삼전도)      내용 참조링크: 삼전도 

서울시 송파구 삼전동에 있었던 나루로 삼밭나루라고도 불렸다. 한강 상류의 남안에 위치하여 서울과 부리도(浮里島, 또는 蠶室島인 현재의 잠실지역)를 연결하는 나루터로서 교통의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한강나루(漢江鎭 한강진) 내용 참조링크: 한강진  -서울지명사전

오늘날의 한남동과 강남구 신사동을 잇는 나루 겸 군영(軍營)이 있었다. (누를진)

 

한강도(漢江渡) 내용 참조링크: 한강도(漢江渡)

한강은 본래 서울의 남산 기슭 지금의 한남동 앞의 강을 일컬었다. 따라서 한강도는 한강나루라는뜻으로 한강진(漢江津)이라고도 하였다. 한강나루는 도성의 정남에 위치했다고 하였으며, 한남동 도선장 부근을 일컬었다.

 

그 강안 맞은편은 사평나루로, 고려 때는 사평도 또는 사리진으로 불렀다. 조선시대는 제일의 나루터로 판교역을 지나 용인,충주로 통하는 대로의 요충지였다.

 

사평나루(沙平渡 사평도)       내용 참조링크: 사평나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용산구 한남동과 연결되었다. 사평도(沙平渡 : 모래펄나루)의 다른 명칭으로 고대에는 사리진도(沙里津渡 : 모래펄나루)라 불렸다. 사평리는 한강진의 맞은편이라 하였고 한강진은 현재의 한남대교(漢南大橋) 서쪽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보아, 한강도는 현재 한남대교 부근으로 추측된다.

 

동작나루(銅雀津)        참조 링크: 동작나루

동작나루는 동작진(銅雀津)’ 또는 동작도(銅雀渡)’라고도 하였다. 중요 간선도로가 지나가는 나루터는 아니었으나 서울에서 과천으로 가는 도로의 길목에 위치하여 많은 사람의 이용이 있었다.

진선(津船)5척 배치되어 있었으며, 이 나루터 부근에는 모노리탄(毛老里灘, 尾老里灘)과 기도(碁島)가 위치하였다.

 

이하 내용은 참조링크: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들-1 에서 가져 왔다.

동작진(銅雀津)은 현재의 동작동 강변에 있었던 도선장 (渡船場)으로 일명 동재기라고도 한다. 도성에서 과천으로 빠지는 길목으로서 본래 노량진 관할이었으나 외방의 과객, 사대부의 왕래가 빈번한 곳인데 약간의 사선(私船)만이 비치되어 있어서 교통이 불편하였다.

 

그리하여이곳의 관리가 문제화 되던 중 영조 4(1728) 이인좌(李麟左)의 난을 계기로 나루의 관리를 철저히 하고자 별장(別將)을 파견하고 이어서 영조 22(1746)에는 노량진의 나룻배 3척을 이관하여 진도(津渡)로서의 체모를 살렸다. 1857년 철종은 이곳에 주교(舟橋 배다리)를 만들고 인릉(仁陵)에 왕래하였다. 근대에 이르기 까지 나룻배가 오갔는데 1917년 한강 인도교가 세워지면서 제구실을 잃었다. 현재 이곳에 1984년 거대한 동작대교가 건설되어 자동차와 전동차까지 운행하게 되었다.

 

개포(開浦)       내용 출처: 개포

강남구 개포동에 있던 마을로서, 마을 앞에 양재천 갯벌이 있어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개펄개패 또는 개포동이라고도 불렀다.

 

반포(盤浦)       내용 출처: 반포 서울지명사전

이 마을로 흐르는 개울이 서리서리 굽이쳐 흐른다고 하여 서릿개라 하고 이를 한자로 표기한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는데, 뒤에 한자 표기가 盤浦(반포)로 바뀌었다.

 

흑석나루(黑石津)       이하 내용은 참조링크: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들-1 에서 가져 왔다.

흑석진(黑石津)은 현재의 동작구 흑석동 강변에 있었던 나루이다. 도성에서 수원이나 과천 방향으로 왕래 하려면 노량진이나 한강도를 이용하여야 하는데 통행량이 많고 기찰(일종의 검문)

심하여 민간인들은 사선(私船)으로 운행되는 배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수참이 폐지되고 또한 인근에 동작진이 개설되면서 기능을 잃어갔다.

* 수참(水站): 조선시대 한강 수계(水系)의 포구에 위치하여 조창의 기능과 목재 등 각종 물품의

                             운송, 사객(使客)의 이동 보조의 역할을 하도록 인원과 선박 등을 배치한 시설.

 

마포나루(麻浦津)       이하 내용은 참조링크: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들-1 에서 가져 왔다.

서울의 마포구 마포동 강변에 있었던 나루로 삼개나루라고도 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도성에서 서남쪽으로 10리 지점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의 여의도를 지나 시흥 방면으로 빠지는 길목이다. 나루가 크지 않아서 본래 관선(官船)은 없었고, 사선(私船) 몇 척이 있어서 행인을 건네주었다.

1894년 한강의 마포(삼개)나루-사진 이사벨라 버드 비숍 촬영

조선 후기에 상업이 발달하면서 선상(船商)들이 한강을 거슬러 이곳에 와서 장사를 하였다. 인천 제물포에서 어물, 젓갈 소금 등을 실고 뱃길을 따라 서울 마포까지 그리고 한강을 따라 상류까지 상인들의 배가 다니며 돌아갈 때는 곡물을 싣고 갔다. .특히 소금과 젓갈을 실은 배들이 모여들어 도성의 소금과 젓갈은 거의 모두 이곳에서 공급되었다. 예로부터 마포나루에는 새우젓을 파는 사람들이 많아 '마포 새우젓 장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나루터에는 창고를 지어놓고 소금, 젓갈, 생선 등을 위탁 판매하거나 중개하는 객주, 여각 등이 생겨났고, 京江商人(경강상인)들의 활발한 상업활동이 있었다. 결빙기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배들로 붐비고 활기를 띠었다.

 

노량진(露梁津) = 노들나루       내용 출처 링크: 노량진

노량진(露梁津)은 노도진(露渡津노량진도(鷺梁津渡노들나루라고도 불리었다. 이 나루는 서울과 과천·시흥을 연결해주는 구실을 하였는데, 조선시대 9대 간선로 중에서 충청도와 전라도 방면으로 향하는 제6·7·8호 간선로의 길목이었다.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였던 나루터여서 사람들의 이용이 많았으며, 도승(渡丞)이 한 사람 배치되어 관리를 맡았다. 나루 남쪽 언덕에는 노량원(鷺梁院)이 위치하여 있었으며, 세금을 거두었다. 관내는 과천의 신촌리(新村里사촌리(沙村里곽계(槨契형제정계(兄弟井契마포강(麻浦江)이었다. 이 나루에 속하였던 진선(津船)10척이었고, 관선(官船)15척이었다.

 

영등포(永登浦)        내용 출처 링크: 영등포 

영등포는 왕성하게 번성하고 있던 이웃의 노량나루(鷺梁津)에 치여 내내 밀렸다. 영등포란 나루터는 지금의 한강성심병원 건너편 여의도 샛강에서 여의도의 사라진 옛 양말산(羊馬山)을 오가며 한강 밤섬(栗島)과 마포를 연결하는 소규모 나루터이었다. <경조오부도 왼쪽 하단에 영등포 여의도 율도(栗島)가 보인다. 英登浦로 표기한 점이 눈이 띤다. 그 아래쪽에는 방학곶(放鶴串) 지명이 보인다. 오늘날 영등포와 관련이 깊은 지명이다.

 

영등포란 명칭의 유래는 음력 2월 초하루를 영등일(靈登日)로 하여 보름까지 여의도 샛강에서 영등굿이 성행하였다. 늘 소원하는 것을 이곳 한강에서 빌면 다 들어주는 명당으로 알려져 '靈登'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 영등(靈登)永登(영등)"으로 변형표기된 것이라고 한다. '영등(永登)'과 물가 마을을 뜻하는 '()'를 합친 영등포가 되었다.

 

지금의 영등포역 주변에 소머리제(牛頭峴)가 있었다. "멀리 동쪽으로 왕성(王城)을 바라볼 수 있어 궁궐을 사모하는 사람이 의례히 이 재에 오른다"라는 말에서 영등포(永登浦)가 연유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양화나루(楊花)        참조 링크: 양화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 시대 삼진(三鎭)의 하나였던 양화진(楊花鎭)이 위치하였던 서울에서 양천(陽川)을 지나 강화로 가는 조선 시대 주요 간선 도로상에 위치하였던 교통의 요지였으며, 삼남 지방에서 한강을 통하여 운송되어 오는 곡식을 저장하던 오강 중의 하나로 농산물의 재분배 기능을 담당하던 중요 지역이었다.

 

또한, 서울의 천연 방어선을 이루는 한강의 중요 지역으로, 진대를 마련하고 진장(鎭將)을 두어 수비하게 하여 군사상 중요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도승(渡丞)이 배치되었으나 뒤에는 별장(別將)으로 바뀌었으며, 호조의 점검청(點檢廳)이 있었다. 나루터의 관할은 어영청에서 하였으며, 양화진에 속한 선박은 모두 10척이었다.

 

양화진(楊花鎭)광흥창(廣興倉)        참조 링크: 광흥창(廣興倉) -두산백과

광흥창은 고려시대에는 충렬왕(忠烈王) 때 설치하였는데, 조선시대에 관리들의 녹봉(祿俸)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1392(태조 1) 호조(戶曹)의 예속기관으로 서울 서교(西郊) 와우산(臥牛山:서울시 마포구 창전동) 아래에 설치하였다. 전국에서 올라온 세곡을 모으는 곳이었는데 한강 양화진에 도착한 세곡선(稅穀船)에서 하역한 쌀을 광흥창에 저장하였다. 그리고 광흥창은 관원들에게 녹봉을 지급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쌀과 옷감을 녹봉으로 지급하였다.

 

잠두봉(蠶頭峰)절두산 성지(切頭山 聖地)        내용 출처: 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

잠두봉, 절두산(折頭山)

잠두봉(蠶頭峰-누에머리 모양의 봉우리)지역은 한강의 동북쪽 강변(옛 당인리 발전소 근처)에 있는 곳으로 사적 제399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한강 가운데에서 경치가 아름답고 정자가 많기로 이름났던 지역이었다. 하지만 천주교도가 박해를 당하고 순교한 곳으로 지금도 순교자 묘지가 남아 있으며, 개화의 선각자였던 김옥균(金玉均)이 처형된 곳이기도 하다.

 

1866년 천주교를 탄압한 병인박해로 병인양요가 발생하여 프랑스 함대가 양화나루까지 진출했다가 퇴각하자, 이에 격분한 흥선대원군의 지시에 의해 잠두봉에서 많은 천주교도들이 참수 당함에 따라 천주교의 순교성지가 되었다.(折頭山 절두산-머리가 잘린 산).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6/6b/Jeoldusan.jpg/408px-Jeoldusan.jpg

 

(현재) 한강 유람선 나루들         출처 링크:https://hangang.seoul.go.kr/archives/249

다음은 한강 유람선의 나루들로 상류에서 하류 순으로 배치하여 각 나루 이름별로 연결 링크를 적었다. 자세한 내용 보려면 지명(나루이름)을 클릭하면 된다.

(상류) 광나루  잠실  뚝섬잠원  이촌  잠원,  이촌  반포  망원,  반포  여의도  난지,  강서  양화 (하류)

 

[요약 퀴즈 

[퀴즈 1] 태조 이성계가 함흥차사후 태종에게 화살을 쐈다는 중랑천 하류의 옛 다리 이름은?

[퀴즈 2]  나루 인근에 몽촌토성·풍납토성 등과 연결되는 아차산성이 있으며, 옛날부터 중요한

                교통로였고 오늘날은 서울부산간 교통로가 이 지역을 지나고 있다.  나루 이름은?

[퀴즈 3] 과천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한강의 나루로 우리말(=노들나루)인 이 나루의 漢字名?

[퀴즈 4] 소금과 젓갈을 실은 배들이 모여들어 도성의 소금과 젓갈은 거의 모두 이곳에서 공급

                 됐다. 결빙기를 제외하고는 京江商人과 배들로 붐비고 활기를 띠었다. 이 나루 이름은?

[퀴즈 5] 서울에서 양천(陽川)을 지나 강화로 가는 조선 시대 교통의 요지였으며, 삼남 지방에서

                 한강을 통하여 운송되어 오는 곡식을 하역하던 나루이다. 이 나루의 이름은?

[퀴즈 6] 양화나루 인근에 있는 이곳은 누에머리를 닮았다하여 잠두봉이라 불린다. 많은 천주

                 교도들이 참수당한 곳으로 천주교의 순교성지가 되었다. 머리가 잘렸다 해서 oo?

 

=== [퀴즈 답] ===

[퀴즈 1] 이성계가 함흥차사후 태종에게 화살을 쐈다는 옛 다리 이름은? .=> 살꽂이다리

[퀴즈 2] 나루 인근에 몽촌토성·풍납토성 등과 연결되는 아차산성이 있으며, 옛날부터 중요한

                교통로(오늘날은 서울부산간 교통로) 지나는 있다. 나루 이름은? .=> 광나루

[퀴즈 3] 과천 가는 길목의 나루로 우리말(=노들나루)인 이 나루의 漢字名? .=> 露梁津(노량진)

[퀴즈 4] 소금과 젓갈을 실은 배들이 모여들어 도성의 소금과 젓갈은 거의 모두 이곳에서 공급

                됐다. 京江商人과 배들로 붐비고 활기를 띠었다. 이 나루 이름은? .=> 마포나루

[퀴즈 5] 서울에서 양천(陽川)-강화로 가는 조선 시대 교통의 요지였으며, 삼남 지방에서 한강을

                통하여 운송되어 오는 곡식을 하역하던 나루이다. 이 나루의 이름은? .=> 양화진

[퀴즈 6] 양화나루 인근에 있는 이곳은 많은 천주 교도들이 참수당한 곳으로 천주교의 순교성지

               가 되었다. 머리가 잘렸다 해서 oo? .=> 절두산(切頭山)

(계속)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