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약 20여 년 전) 내 나이 50도 훨씬 안 되었을 때이다.
그 때 나는 의사로 일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진료중인 보호자로 따라온 예닐곱 된 아이가 '할아버지, 사탕 주세요~'하는 것이었다. 그 때까지 나는 '할아버지'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순간 깜짝 놀라 당황했지만 아이 앞이라 '의사선생님~ 사탕하나 주세요.'라고 말해야지 라고 점잖게 얼른 타이르곤 사탕을 쥐어 주었다. 아이에겐 다음부터는 '할아버지라 부르지 말고 의사선생님이라 그래라'라고 일렀다.
그런데 며칠 뒤 그 녀석이 와서는 또 '할아버지, 사탕 주세요~'하는 것이었다. 나는 '야~ 이놈아, 내가 어째 할아버지냐? 의사선생님이지'하고 장난스럽게 윽박질렀다. 그랬더니 그 녀석이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머리가 하야니 할아버지잖아요'하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많지는 않았지만 새치 흰 머리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흰 머리 칼이 있으니 할아버지가 맞다’
조선 시대에는 사람이 죽으면 서울 성곽 안에는 묘를 쓸 수 없었다.그래서 시신을 서울 외곽 밖으로 가지고 나가 묘를 써야 했는데,이때 서소문과 광희문을 통해 시신을 밖으로 내보냈다.그런 이유로 광희문은 시신을 내어가는 문이라는 뜻의 시구문이라고 불렸다. 한편 명지대 홍순민 교수는 수구문에 대해서 부근으로 청계천 물길이 나가기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었다고 하는 말이 있으나이는 억측이다. 청계천 물길은 흥인문이 더 가깝다. 수구문이란 한강으로 출입하는 문이란 뜻이다. 더구나 이 문을 그 부근에 늘 시신이 쌓여 있었다 하여 시구문(屍口門)이라 했다는 것은 일본인들의 악의적 왜곡이다. 참조 링크:문(門) 이름에 숨은 뜻
천주교 박해시대에 수많은 사람들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포도청 등에서 신문을 받다가 순교하였다.당시 옥중에서 치명한 순교자들의 시신은 광희문을 통해서 밖으로 내버려졌다.
좌포도청 터
좌포도청 터는 현재 종로구 묘동56번지 단성사 일대(종로3가역3호선9번 출구)로 추정되고 있다.포도청 순교지는103위 성인 중 최경환 프란치스코,유대철 베드로,허임 바오로 등 스물한 분,현재 시복 추진 중인‘하느님의 종’ 124위 중 윤유일 바오로 등5위가 장살,옥사,교수 등으로 순교한 곳이다.
포도청은 원래 도적을 잡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운영되었다.그러나 점차 그 담당 업무가 확대되어 한성부민들의 생활 전반에 걸쳐 금지 조항을 위반하는 사건들을 다루었고,개항기에는 궁문수비,외국공사관의 경비,반역 죄인에 대한 심문까지도 담당하였다.
또한 지방의 중죄인을 압송,체포하여 조사하고,그 죄의 경중에 따라 의금부와 형조 등 상급기관으로 이송하는 중간기구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이벽의 집 터―수표교 인근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정조8년(1784년)겨울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되었다.
김범우의 집 터,명례방과 장악원 터
김범우의 집이 있던 명례방은 남산 아래의 여러 마을들과 지금의 을지로 입구에서 명동 성당 부근까지를 포함하고 있던 곳이다.명례방이 한국 천주교회사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게 되는 시기는1784년 말 또는1785년 초 수표교 인근 이벽의 집에서 열던 신앙 모임을 명례방 장악원 앞에 위치한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서 하게 된 때이다.
현재 명례방을 알리는 표지석은 없고 중구 을지로2가181외환은행 앞 장악원 터 표석 자리 앞쪽을 김범우의 집터로 보고 있다.
명동대성당
명동대성당
명동대성당은 옛날 조선‘한성부 남부조선 최초의 서양식 대성당으로 명례동(明禮洞)’에 속하던 지역(오늘날 중구 명동2가)에 세워진 성당으로1898년5월29일에 완공하였다.지금은 주위 고층빌딩 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북달재(종현鍾峴)’라고 불리던 남산 앞 언덕 위에 세워진 명동대성당은 도성 내 어느 곳에서나 올려다 보이던,뾰족탑이 인상적인 서양식 교회 건물로 세인의 이목을 끌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이 개항정책을 취하게 되면서 교회에 대한 정부의 박해정책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자,교회 당국은1882년4월에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본당으로 종현 본당,지금의 명동 본당을 설정했다.
명동대성당은 한국 교회 최초의 본당이며 성인 다섯 분과 순교자 네 분의 유해가 모셔진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이다.성 앵베르 주교,성 모방 신부,성 샤스탕 신부,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성 김성우 안토니오,순교자 이 에메렌시아,무명 순교자1명,푸르티에 신부,프티니콜라 신부가 모셔져 있어,기도와 참배를 위해 찾는 순례자들이 많은 성역이다.이 가운데 이 에메렌시아,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132위는 시복 대상자로 선정되었다
가회동 성당
이 곳은 과거 의금부 터로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선교사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 땅에 들어와1795년 예수부활대축일에 신자들과 함께 조선에서의 첫 미사를 계동 최인길의 집에서 봉헌하였다.
한국 천주교 초기 신앙의 중심지였던 이 지역을 관할하기 위해1949년에 가회동성당이 설립되었고, 2014년 지금의 한옥과 양옥이 어우러진 새 성전이 건립되었다.
의금부 터
의금부 터(종로구 공평동 종각역1번 출구)는 주교와 신부,평신도 지도자들이 국문을 받던 곳이다.의금부는 조선시대 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추국하는 일을 맡아 보던 관청이었으며 금부·금오·왕부라 부르기도 하였다.
박해시기,천주교 신자들은 서울의 좌․우포도청과 지방의 각 진영)및 군․현에서 문초를 받았다.그들 가운데 중죄인,즉 주교와 신부,평신도 지도자들은 국왕의 특별한 명령에 의해 의금부로 압송되어 국문(鞫問)을 받았다.
전옥서 터
전옥서 터(종로구 종로1가 종각역6번 출구)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수감되어 있던 곳이다. 전옥서는 감옥과 죄인에 관한 사무를 관장했던 관서로 전옥서에 수감되는 죄수의 대부분은 상민이었다,하지만 의금부가 육조,왕실의 계보를 편찬하고 왕족의 허물을 살피던 관아였던 만큼 종부시,사헌부 등의 죄인이나 왕족이나 양반,관리들도 수감되었다.
우포도청 터
우포도청은 서린방 혜정교 남쪽(현 동아일보 신사옥 앞 화단))에 있었으며,우포도청이 담당한 구역은 서울의 서부․북부와 경기 우도 즉 가평,개성,고양,연천,적성,파주,포천 등지였다.
우포도청은 한국 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장소이다. 1879년5월14일에 충청도 공주 지방에서 드게트 신부가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는데,이날 드게트 신부뿐만 아니라 함께 거주하던 신자들까지 잡아서 공주 감영에 수감하였다가5월29일 서울 포도청으로 이송하였다.이때는 공식적인 박해가 종료되었던 시기라 가혹한 고문이 자행되지는 않았지만,드게트 신부와 함께 투옥된 신자들은 굶주림으로 큰 고통을 받았다.결국 그 가운데 이병교 레오,김덕빈 바오로,이용헌 이시도로 등은 우포도청에서 아사로 순교하였으며 이들이 바로 한국 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들이다.
형조(刑曹)터
형조(刑曹)는 한성부 서부 적선방(종로구 세종로 세종문화회관)에 있었는데 조선시대의 중앙관서인 육조(六曹)의 하나로‘추관’또는‘추조’라고도 했으며,사헌부․한성부와 아울러 삼법사(三法司)라 일컬어지기도 했다.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많은 천주교인들이 형조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다.그 시작은 정조가 즉위한 지9년째 되던1785년에 발생한‘을사추조 적발사건’으로,신자들이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서 집회를 갖던 중,형조의 금리들에게 발각되어 형조로 압송된 사건이었다.
이후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최필공 토마스․최필제 베드로․윤운혜 루치아․정철상 가롤로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고,김천애 안드레아․유항검 아우구스티노․윤지헌 프란치스코 등은 전주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신문을 받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이광헌 아우구스티노․남명혁 다미아노․김효임 골롬바․김효주 아네스․김제준 이냐시오 성인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전장운 요한․최형 베드로 성인 등도 형조를 거쳐 갔다.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 성지
서소문 밖 네거리(중구 의주로2가16번지 서소문 공원 내)는 신유·기해·병인박해 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신자들이 참수형을 받아 순교한 장소이다.
서소문은 조선시대 수도 한성의 출입 성문이던 네 개의 도성 대문과 네 개의 소문 가운데 하나인데,서소문의 정식 이름은 소의문(昭義門)이다.당시 서소문 밖의 네거리 광장은 조선시대 공식 사형 집행지였는데,그 광장은 문안에서 아현고개와 남대문 밖 칠패시장으로 통하던 성문 밖에 생겨난 주막거리 광장이었다.이 광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주막과 주위의 시장은‘파루 인정제’때문에 생겨났습니다.즉 아침에 성문이 열리면 도성 출입이 가능하나,저녁에는 성문을 닫아 통행을 금지하니,통행인들이 문안에 들어오지 못하고,성문 밖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했기에 이들을 상대로,성문 밖에 취락이 생겨났고,광장도 생겨났던 것이다.
따라서 관에서는 중죄인을 사형에 처할 때마다, 군중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다수의 군중을 동원하기 쉽고또한 사형죄인들이 갇혀 있던 포도청이나 의금부와 가까운 서소문 밖 네거리 광장을 사형 집행 장소로 이용했다.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에서 순교자가 처음 생긴 것은1801년 신유박해 때로,한국 교회의 첫 세례자인 이승훈 베드로와 명도회 초대 회장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그리고 여회장 강완숙 골룸바와 백서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 알렉시오 등이 참수로 순교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정하상 바오로,유진길 아우구스티노 등이 이곳에서 순교하였고,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성 남종삼 요한 등이 순교하였다.이처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는 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하였으며,그중 마흔 네 명이 성인의 반열에 오르면서 한국 교회사상 가장 많은 성인이 탄생한 곳이라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중림동 약현 성당
중림동 약현 성당(중구 중림동149-2)은1892년에 건축된 서울 시내 두 번째 본당이다.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 성지를 관할하는 중림동약현 성당은의 규모는 명동 성당보다 작고,도성문 밖에 위치하고 있으나,한국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한국 최초의 고딕식 교회 건물이다.
서양식 교회 건물로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겸비한 성당 건물로1977년11월22일자로‘국가 사적 제252호’에 지정되었다.한편1998년에 화재로 내부가 불탔으나2000년에 다시 복원되었다.성당 내부 스테인드글라스가 볼 만하다.
성당 내에 있는 서소문 순교자 전시관 전시실에는 초기 한국 교회천주교회의4대 박해 당시 순교한 신자들이 사용하던 교리서,신심서적 등이 있으며,특히 서소문 순교자인 강완숙의 가계도,프랑스 선교사들의 문서류도 전시하고 있다.
경기감영 터
경기감영도- 경기감영 위치는 현 종로구 평동 164 서울적십자병원 정문 옆이다
경기감영이 설치된 것은 태종 때의 일이었다.한양으로 천도한 다음 해인1395년(태조4)에 경기 행정편제가 개편되었다.이때 광주와 수원의 관할인 군현을 갈라서 경기 좌도라 하고,양주․부평․철원․연안의 관할인 군현을 경기 우도로 하였다.그 후1413년에 경기 영역을 다시 한 번 조정하여 좌․우도로 나누지 않고 경기로 확정하면서 도관찰사를 파견하였고,감영을 수원에 설치하였다.그로부터 얼마 뒤에 감영은 경기도 광주로 옮겨졌다가 다시 한성부 내 서대문 밖 반송방(종로구 평동164서울적십자병원 정문 옆)으로 이전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최창주 마르첼리노,이중배 마르티노,원경도 요한,권상문 세바스티아노,홍인 레오 등 체포된 신자들은 경기감영으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과 문초를 받았다.그 과정에서 순교한 이가 있었는데,바로 순교자 조용삼이다.조용삼은11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었고,옥중에서‘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았다. 1801년2월에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형벌을 받았으나 약해진 몸은 더 이상의 형벌을 감당할 수 없었고,결국에는 다시 옥에 갇힌 지 며칠 만인3월27일에 숨을 거두었다.”
절두산(切頭山)순교성지
한강의 버들꽃나루라고 불렸던 양화진(마포구 합정동)에 자리 잡은 절두산 순교성지는1866년 프랑스 함대의 침입을 계기로 많은 신자들이참수(머리가 잘림)되어 처형됐던 장소이다.
가장 혹독한 박해로 일컬어지는1866부터1873까지인 병인박해 기간 동안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에서 처형되었다.그러나 아쉽게도 기록으로 확인되는 순교자는 김한여 베드로,최경원 야고보,이의송 프란치스코,김이쁜 마리아,이붕익 베드로,조 타대오 등17명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순교자5명을 포함하여22명뿐이다.
현재 병인순교100주년 기념 성당과 박물관이 서 있는 절두산 순교성지는 그 봉우리 형상이 누에머리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잠두봉’이라 불렸으나,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에서 처형된 후에‘천주교인들이 목 잘려 죽은 곳’이라는 의미의 '절두산(切頭山)'으로 불리게 되었다.
노고산 성지
노고산 성지는 마포구 백범로35(신수동)서강대학교 가브리엘관 앞이다.기해박해 때 앵베르 주교와 모방,샤스탕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한 후 이곳에4년간 묻혀 있던 장소이다.
노고산은 박해시대 여러 처형장과 가까운 이유로 많은 순교자의 시신이 매장되었던 곳이다.현재 노고산 아래 순교자들이 묻혔던 땅 위에는 예수회의 서강대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용산 신학교 성당
용산 신학교 성당(용산구 원효로4가 성심여자고등학교 내)코스트 신부가 설계한 신학교 성당으로1902년4월14일에 성당 봉헌식을 가졌다.
당시 조선 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신학교 부속 성당 건립을 위해 국내외에서 후원자를 구하던 중 프랑스인 드 사라(de Sarah)여사로부터 기부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그런데 그녀는 성당 건립 기금 후원에 앞서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순교지에 성당을 건립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웠다.뮈텔 주교는 김 신부의 순교지인 새남터는 홍수로 자주 잠기는 위치에 있어 위험하고,오히려 조선대목구에서 유일한 신학교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순교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는 점,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뒤를 계승하고자 하는 조선의 신학생들이 공부하는 곳에 신학교 성당을 건립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점을 오랜 기간 설득하여 마침내 그녀의 동의를 얻어냈다.
뮈텔 주교는 후원자의 뜻을 기리기 위해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미리내에서 이장하여 모시기로 하고, 1901년5월21일에 시복 재판 판사인 프와넬신부와 기록 서기인 드망즈 신부,안성 본당의 공베르 신부와 미리내 본당의 강도영 신부,그리고 신자30여 명이 참관한 가운데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발굴하였다.발굴된 유해는 강도영 신부 사제관에 안치하였다가5월23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 안치하였으며,성당이 완공된 이후인1902년6월23일에 성당의 제대(祭臺)에 오른편 모퉁이 바닥을 파고 그 안에 유해를 안치하였다.
김대건 신부 등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셨던 성당 출입구 상부에는 나무로 만든 명문을 부착하였는데 거기에는 성당 착공일인1869년6월9일과 성당 봉헌일인1902년4월14일,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세례명 안드레아(Andrea)의 이니셜인‘A’,성 김(Kim)의 이니셜인‘K’와 생몰연대(1821~1846)가 로마자로 새겨져 있다.
당고개 순교성지
당고개 순교성지(용산구 신계동1-57)는 기해박해 때10명의 신자들이 참수로 순교한 장소이다.당고개 순교성지는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많은 순교성인을 배출한 순교성지이다.
옛날 이곳에 민간인들이 제사 지내는 당집이 있었기에 당고개라 불렸으며 기해박해가 끝나갈 무렵에 열 명의 교우들이 순교한 곳이다. 1839년 음력 섣달그믐 경, 1년간에 걸친 기해박해의 마지막 단계에 아직 남아 있던 천주교인 다수를 서소문 밖 네거리 광장에서 처형하기로 결정했으나,이런 사실을 사전에 알게 된 서소문 근처의 상인들이 설 대목장을 봐야 하는데,사람들의 목을 베는 잔인한 처형이 이루어져서는 곤란하다며 설 대목장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처형장소를 서소문 밖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고 요청하였다.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서소문에서 남동쪽으로 내려가 한강변에 위치한 용산의 당고개에서 처형하도록 하였다.가족을 한 날에 처형하지 않는다는 국법에 따라 열 분 가운데 일곱 명은12월27일에,세 명은28일에 처형되었다.현재 그 가운데 아홉 분은 성인이 되셨고,이성례 마리아는‘하느님의 종’에 올라 있다.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는 어린 다섯 형제를 두고 남편 성인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같이 수리산 교우촌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연행되어 옥고를 치르면서 젖먹이 막내아들이 자신 옆에서 배고파 죽는 것을 보아야 하는 처절하고도 기막힌 시련과 옥 밖의 네 명의 어린 자식들에 대한 인간적인 정에 못 이겨 한때나마 주님께 등을 돌렸지만,다시 회개하고 옥에 돌아와 갖은 악형과 유혹을 이겨내고서 순교하였다.
왜고개 성지
왜고개 성지(용산구 용산동5가2-65번지)는 기해·병오·병인박해 당시 새남터 순교자들이 잠시 매장된 장소이다.왜고개는1839년 기해박해 때 군문효수의 형을 받고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 그리고188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성 남종삼 요한,성 최형 베드로 그리고 홍봉주 토마스 등이 얼마간 암매장되었던 곳이다. 왜고개는 모두 열 명의 순교자가 묻혔던 곳으로 그중 여덟 명이1984년5월6일 교황 요한 바오로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왜고개는 한자로 와현(瓦峴)또는 와서현으로 불리던 곳으로 원래 옛날부터 기와와 벽돌을 구워 공급하던 와서(瓦署)가 있었던 데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으며,서울 명동 성당과 중림동약현 성당을 지을 때 사용했던 벽돌도 이곳에서 공급해 주었다고 전해진다.
새남터 순교성지
새남터 순교성지(서울 용산구 이촌로80-8)는 기해·병오·병인박해 당시 성직자11명과 교회지도자3명이 군문효수형(軍門梟首: 사형수의 머리를 베어 간두(竿頭, 장대)에 매다는 형벌)을 받아 순교한 장소이다.남대문 밖 용산의 저습지였던 모래벌 새남터는 간혹 풀이 우거져 있기는 하나 사람이 거주하거나 농토를 일굴 수 없는 모래톱 황무지였다.조선시대 초기부터 그 북부 일부를 군사 훈련장으로 사용해 왔으며,때로는 군문효수형을 선고받은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새남터와 조선 천주교회와의 악연은1801년 신유박해 때 조선 교회 최초의 신부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박해 당국에 의해 새남터에서 처형됨으로써 비롯되었다.그 후 한강가의 쓸쓸하고 황막한 모래땅 새남터는 우리 교회에 큰 박해가 닥칠 때마다 외국인 주교나 신부 등 선교사와 우리 신자 다수가 참수 치명된 대표적 순교성지가 되었고 새남터에서 순교한 순교자들 가운데11위가1984년5월에 시성되어103위 성인 반열에 올랐다.
삼성산 성지
삼성산 성지(관악구 신림동 산57-1)는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앵베르 주교를 비롯하여 성 모방 신부와 성 샤스탕 신부의 유해가1901년 명동 대성당 지하 소성당 묘역으로 모셔질 때까지 묻혀 있던 곳이다.
금선사(金仙寺)는 북한산국립공원 남서쪽 산기슭(서울시 종로구 비봉길 137)에 있는 사찰로
조선 초, 태조 이성계 곁에서 조선의 건국과 한양 천도를 도왔던 무학대사가 창건했다.
금선사는 조선 후기 정조 임금과 관련한 설화가 전해져온다. 대구 파계사에서 수행정진 중이던 용파스님은 사찰에 부과되는 각종 부역으로 전국의 사찰이 피폐하게 되자 왕과 담판을 지으려고 서울로 올라왔다. 어느 날 임금을 만나 담판을 하였는데 임금은 왕자의 탄생을 조건으로 걸게 된다. 이후 임금의 후궁인 수빈 박씨의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아들이 태어날 것을 점지하였고 수빈 박씨가 음력 6월 18일 아들을 낳았다. 같은 날 목정굴에서 기도하던 농산스님이 앉은 채로 열반에 들었다. 이에 농산스님이 열반에 들어 수빈 박씨 몸에서 다시 태어난 것이라 여기고 해마다 이날 순조 임금의 탄신제를 올리고 있다.
금선사는 일제강점기에 전소되어 중창된 지가 60년밖에 되지 않기에 유형문화재가 많지 않다.(내용출처: 위키백과)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323(선잠로5길68)에 위치한 불교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 송광사의 말사이다. 1997년에 세워졌으므로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최고급 요정이었던 대원각(大苑閣)이 불교 사찰로 탈바꿈한 특이한 설립 이력이 있는 곳이다.
본래는 '대원각'이라는 이름의 고급 요정이었으나 요정의 주인이었던 고 김영한(법명 길상화)이 법정 스님에게 자신이 소유한 요정 부지를 시주하여 사찰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1995년 6월 13일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 말사인 '대법사'로 등록하여 사찰이 되었고, 초대 주지 로 현문이 취임하였다. 1997년에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재등록되었다.
길상사(吉祥寺)의 절 이름은 ‘길하고 상서로운 절’이란 의미로, 묘길상(妙吉祥) 곧 문수보살의 별칭에서 인용된 불교용어이며, 승보사찰(僧寶寺刹) 송광사(松廣寺)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내용출처: 위키백과)
서울시 강북구 삼양로173길 504(우이동 264) 북한산 만경대 하단부에 위치한 대한불교 조계종 계열의 사찰이다. 신라 경문왕(景文王) 2년(862)에 도선(道詵)이 세웠다. 도선은 이곳의 산세가 1,000년 뒤의 말법시대(末法時代)에 불법을 다시 일으킬 곳이라고 예견하고 절을 창건한 뒤, 큰 암석을 손으로 갈라서 마애관음보살상을 조각하였다고 한다.
그 뒤 조선 후기까지의 중건·중수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북한산성을 쌓을 때는 승병들이 이 절에서 방번(防番: 보초 임무)을 서기도 하였다. (내용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울시 종로구 숭인동 178-3 낙산 동쪽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불입종의 총본산이다. 『법화경』을 중심으로 수행과 대중 불교운동을 지향한 법화신앙(法華信仰)의 중심사찰로, 현 위치에 절을 세우면 서울이 평안하고 시민생활에 안정을 가져온다는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터를 잡았다고 한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석굴암(石窟庵), 요사채가 있다.(내용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웅전은 1975년에 착공하여 1981년 6월에 완공한 건물로서, 내부 천장이 매우 높고 지붕은 청기와를 사용하였다. 법당의 본존불은 청동불로서 합장을 한 특이한 모습이며, 좌우에는 4대 보살상, 뒤편에는 목각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또, 석굴암의 불상은 모두 북향을 하였는데, 일반적인 불상 배치법과는 달리 북쪽을 향한 것은 이북동포의 안녕과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뜻에서 취한 것이라고 한다.
대한불교 보문종의 총본산인 보문사는 고려 예종 10년(1115) 담진(曇眞) 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창건 당시부터 비구니 즉 여승들을 위한 사찰이었다. 조선 시대에도 '탑골승방'이라고 불리며 비구니들이 거처하던 도성 밖 4대 비구니사찰 가운데 하나였다.
대한불교 보문종의 실제 개조(開祖)이자 중흥조는 일제강점기에 보문사를 중창한 비구니 긍 탄(亘坦: 1885-1980)과 그 제자 보암당 은영(恩榮: 1910-1981)이다.
2017년에 보문사 극락보전을 중수할 때에 발견된 상량문에 따르면 청 건륭 12년(조선 영조 23, 1747) 처음 중건하고 도광 4년(순조 24, 1824)과 동치 4년(고종 2, 1865)에 더 중수했다. 동치 4년 상량문에는 조선 왕실의 시주를 받아 불사를 진행하고 후궁과 상궁 등 궁인에서부터 사대부, 평민에 이르기까지 불사에 동참하였다는 내용도 있다.
보문사에는 왕실에서 하사한 연(輦)수식과 인로왕번(引路王幡)을 비롯하여 조선 후기에 제작한 석가불도, 신중도, 지장보살도는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조선 전기에 제작된 묘법연화경은 국가지정문화재이다.
보암당 은영은 1971년에 오갈 데 없는 여신도들을 위하여 시자원(施慈院)이라는 양로원을 만들었는데, 여기서 순정효황후와 황후를 모셨던 마지막 궁녀들이 여생을 보냈다. 말 그대로 조선 왕실의 여인들과 마지막까지 함께한 사찰이다.
서울 서대문구 봉원사길(세브란스병원 뒤)에 위치한 한국불교태고종의 절이다. 889년(진성여왕 3)에 도선국사가 금화산 서쪽에 있는 신도의 집을 희사 받아 창건한 뒤 반야사(般若寺)라 했다고 한다. 그 뒤 고려 말 공민왕 때 태고(太古) 보우가 중건·보수하고 금화사라고 개칭했다. 1651년 봄에 큰 화재로 많은 피해가 있었고, 1655년 다시 중건하였다. 그 후 6.25때 많은 피해가 있었지만 복원을 해서 지금의 봉원사가 되었다.
구한말에는 개화파인 이동인이 이곳 봉원사에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많은 개화파 인사들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근대문명과 관련된 책을 읽고, 자주 모여 토론을 벌이고 갑신정변을 모의하기도 했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 때문에, 서재필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곳 봉원사를 ‘개화파의 온상’이라고 하였다.
봉은사는 서울시 강남구 봉은사로 531 (삼성동)에 위치한 도심 속의 고찰(古刹)로 대한불교 조계종 직영사찰이다. 본래 경기도 광주 수도산(修道山)의 산사(山寺)였지만 지금은 서울시 로 편입되어 강남구 도심 한가운데 있는 사찰이 되었다. 돈이 많은 부자(富者) 절로 소문나있다.
서기 794년 신라 원성왕 시절에 처음으로 창건된 것으로 전해진다. 원래의 이름은 '견성사(見性寺)'였고, 위치도 선릉 근처라 지금과 달랐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서 성종의 능인 선릉을 지키는 '능침사찰'이 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 많은 땅을 하사받았다. 이 때문에 절 이름을 '은혜를 받든다.'라는 뜻의 봉은(奉恩)으로 바꾸었다.
이후 불교를 사랑했던 문정왕후 때에 승과시(僧科試) 시험장이 되었다. 이 때문에 숭유억불을 국시로 삼았던 조선 유생들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았다. 그나마 능침사찰이라 회암사처럼 불태워지는 사태는 없었다. 하지만 승과고시 때문에 당시 학식 있는 사람들이 승려로 입산하였고, 휴정, 유정 같은 명망 있는 승려들이 나와 임진왜란 등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1939년에 큰 화재를 겪었으며, 1950년 6.25 전쟁 때 전각이 대부분 파괴되었다가 이후에 재건되었다. 때문에 봉은사 건물은 판전 등 소수의 건물을 제외하면 주로 1940년대와 1980년대 전후로 재건된 것들이다.
외부와 내부 모두 99.9% 순금이라고 하나 사실 금으로 지은 것이 아니고 얇은 금박을 나무에 붙인 것이라고 한다. 기존의 사찰 건물은 나무에 단청을 칠하는데,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나무가 썩고 단청이 지워진다. 이를 보수하는 비용이 생각보다 많이 들어간다. 하지만 금을 입히면 이 비용을 많이 줄일 수 있다고 한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운길산(雲吉山)에 있는 사찰로 조선전기 제7대 세조의 명으로 중창 된 사찰이다. 수종사에 대한 유래는, 1458년(세조 4) 세조가 금강산(金剛山) 구경을 다녀오다 이수두(二水頭 : 兩水里)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한밤중에 난데없는 종소리에 잠을 깬 왕이 부근을 조사하자, 주변에 바위굴이 있고, 굴 안에 18나한(羅漢)이 있었으며, 굴 안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종소리처럼 울려나와 이곳에 절을 짓고 수종사라고 하였다고 전해온다.
운길산 수종사(水鐘寺)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양수리 兩水里)를 바라볼 수 있는 저명한 경관(景觀) 전망지이다. 예부터 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의 풍광을 시·서·화로 남겼으며, 서거정(1420~1488)은 수종사를 ‘동방에서 제일의 전망을 가진 사찰’이라 하였다. 봄·여름·가을·겨울 연중 내내 신록·단풍·설경이 신비스럽고, 일출·일몰·운해 등 어느 시간의 풍광이라도 대단히 아름다운 전망을 지니고 있어 조망지점으로서 경관(景觀) 가치가 큰 곳이다.
정약용은 일생을 통해 수종사에서 지낸 즐거움을 ‘군자유삼락’에 비교할 만큼 좋아했던 곳 이다. 또한 다선(茶仙)으로 일컬어지는 초의선사가 정약용을 찾아와 한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며 차를 마신 장소로 차문화와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현재 수종사는 삼정헌(三鼎軒)이라는 다실을 지어 차 문화를 계승하고 있어 차(茶) 문화를 상징하는 사찰로 이름이 높다.
겸재 정선(1676~1759)의 경교명승첩(한강의 북한강·남한강 주변경관과 한강과 서울의 인왕산, 북악산 등의 경관을 그린 화첩으로 총 33점으로 이뤄짐)중 독백탄(獨栢灘)은 현재의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 兩水里’의 경관을 보여주는 고서화로서 그 시대의 명승지 경관과 현재의 경관을 비교 감상할 수 있어 회화 가치가 높다.
이 정각원 건물은 조선의 5대 궁궐 중 하나인 경희궁의 정전(正殿)이었던 숭정전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경희궁 전체를 완전히 해체하면서 숭정전의 목재들이 팔려 나왔고, 그 것을 일본 사찰이었던 대화정 조계사(大和町 曹溪寺)가 사들여 법당으로 사용하였다. 이 조계사는 현재의 대한불교 조계종의 조계사와는 다른 절이다.
이후 이 절의 부지에 동국대학교 건물들이 세워지자 1976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져 동국대학교 안의 법당이 되었다.
(사족) 동국대학교 근처의 서울 신라호텔 자리에는 박문사(博文寺: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사당으로 1932년 완공된 건물)가 있었다. 이때 경희궁에 있던 흥화문을 헐어 옮겨와 박문사 입구 문으로 썼다.
현재 경희궁의 원래 자리에는 새로운 숭정전으로 복원되어 있다. 원래의 (동국대)정각원을 다시 제자리로 옮기려 했으나 건물이 낡아 이전이 어려웠다. 1989년부터 6년에 걸쳐 원래 자리에 새 건물을 지어 복원했다고 발표했다. 그렇지만 복원된 경희궁 숭정전의 완성도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이제 와서 불교 건물로 사용되고 있는 정각원을 다시 회수하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
대한불교 조계종의 총본산인 조계사는 서울시 종로구 우정국로 55 (수송동)에 위치한 사찰 이다. 사찰 규모는 아담하지만 대한민국 불교 최대 종단의 본사(本寺)답게 경복궁 근정전에 맞먹는 큰 대웅전이 있고, 경내에는 천연기념물 제9호인 백송이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 재위 4년(1395)에 창건되었다고 말하나, 실질적 창건은 구한말 순종 융희 4년(1910)에 되었다. 한국 근대사가 그렇듯, 조계사도 역사는 짧지만 매우 복잡하다. 한국불교의 친일과 민족투쟁 역사의 중심에 있던 절이기도 하다.
대한제국 시절, 한국불교에는 구심점이 될 종단이 없어 계속 밀고 들어오는 일본 불교 세력에 한국 불교가 위축되었다. 이런 상황을 개탄하여 만해 한용운 등 민족적 불교 인사들이 새 종단을 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에 1902년 흥인지문(동대문) 밖 지금의 창신동 창신초등학교 자리에 원흥사(元興寺)를 창건하고, 1908년에 각 도의 사찰 대표 65인이 원종(圓宗) 종무원을 설치하였다.
조선왕조 내내 유교 성리학을 숭상하고 불교는 억제하는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해 사찰(절)도 산으로 추방당하거나 방화(放火)로 사라지는 판에, 한양도성 사대문 안에 절이 생기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게다가 1895년까지는 승려는 천민 신분으로, 도성 출입마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사대문 안에 절을 세운다는 것은 억압받던 한국 불교계에 있어 의미가 컸으며 또한 시대가 달라졌음을 뜻했다.
조계사 바로 옆에 있는 우정총국(郵征總局)은 갑신정변이 일어났던 곳으로 한국 최초의 우체국이라고 할 수 있는 건물이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은 1884년(갑신년)에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 개화파가 서구식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이다. 일본공사와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난을 일으켰다. 급진 개화파는 여러 온건 개화파들을 살해했다. 윤태준, 한규직, 이조연 등 영선사 출신이나 민씨 척족 중에서 민영목, 민태호 그리고 조영하 등 여러 온건 개화파들이 살해당했다.
고종을 속이고 새 내각을 구성해 정강 14조 등 개혁을 추진하려 했으나 청나라 군사(淸軍)가 창덕궁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고 민중들이 일본공사관을 공격하자 계획이 좌절되었다.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하며 삼일천하로 끝났다.
이 정변은 고종에게도 큰 충격을 준 사건으로 급진 개화파와 온건 개화파 모두 상당수의 인재들이 사라져 향후 근대화에 걸림돌이 되고 청의 내정간섭이 심해지는 등 큰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
서울시 은평구 진관길 73 (진관동 354번지)에 위치한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조계사 말사로 ‘북한산 진관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신라 진덕여왕 때에 처음 지었다는 유래가 있기는 하지만 이 사찰이 거의 창건 수준으로 대대적으로 중창된 것은 고려 초기의 일이었다. 고려 초 이곳은 진관(津寬)이라는 승려가 홀로 수행하던 신혈사(神穴寺)라는 이름의 작은 암자였다고 한다.
진관사가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고려 현종의 목숨을 구한 사찰임과 동시에 사찰에서 6백 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수륙대재’ 덕분이기도 하다. 땅 위, ‘수륙재’는 물속의 모든 의지할 곳 없는 영혼들과 아귀(餓鬼)를 위하여 법요를 열고 음식을 공양하는 행사이다. 진관사의 경우 조선 태조가 몸소 국가행사로 명한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 초기의 문신 권근이 태조의 명으로 지은 진관사수륙재조성기(津寬寺水陸社造成記)에 따르면 태조 6년(1397년) 태조가 이 절에 수륙사(水陸社)를 설치하고 여러 번 행차하여 수륙재를 지냈다고 한다.
이를 본받아 태종도 태종 13년(1413년) 이 절에서 아들 성녕대군(誠寧大君)을 위한 수륙재를 열고, 향과 제교서(祭敎書)를 내렸으며, 수륙재위전(水陸齋位田) 100결을 하사하여 재를 계속하게 하였다. 이후부터 진관사에서는 매년 1월 또는 2월 15일에 수륙재를 열게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진관사 수륙대재(국가무형문화재 제126호)라는 이름으로 해마다 음력 9월에 거행되고 있다.
그 뒤 세조 9년(1463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성종 1년(1470년) 벽운(碧雲)이 중건하였으며, 철종 5년(1854년)과 철종 7년(1858년)에 중수하였다. 고종 16년(1879년)에 경운(慶雲)이 대방을 중수하였다. 1908년에는 송암(松庵)이 오층석탑을 세우고 1910년에 대웅전의 삼존상을 개금하였으며 명부전을 중수하면서 지장보살상을 개금하였다. 또한 독성전과 칠성각을 새로 지었다.
그러나 6.25 전쟁 때 나한전 등 3동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1964년부터 최진관 비구니가 당우를 차례로 재건하여, 현재에는 대웅전을 비롯한 명부전, 나한전, 독성전(獨聖殿), 칠성각, 홍제루(弘濟樓), 종각(鐘閣), 일주문, 선원(禪院), 대방(大房) 등을 갖추었으며, 비구니 수도도량으로 이용하고 있다.
2009년 칠성각 보수 당시 불단 뒷면에서 3.1운동 당시에 쓰였던 태극기와 신대한 2·3호, 자유신종보, 조선독립신문 32·40호 경고문 등 국외 독립운동과 불교계의 관계를 알려주는 유물들이 새롭게 발굴되기도 했다.
중종 17년(1522) 신월(信月)선사가 창건했다. 고려 광종 때 탄문(坦文)과 법인(法印)이 현재 화계사 근처 부허동(浮虛洞)에 세운 보덕암(普德庵)을 신월이 서평군 이공(西平君李公)과 함께 현 위치로 옮긴 것이다. 광해군 10년(1618) 화재로 전소되어 도월(道月)이 중창했다. 이후 고종 3년(1866)에도 낡은 건물들을 보수했다. 구한말에는 흥선대원군이 개인적으로 후원을 하였다.
경기도 양주시 천보산에 위치했던 사찰로 숭유억불 정책을 추진한 조선왕조에서도 왕과 왕후들의 비호를 받으며 '조선의 왕사(王寺)'라고 불렸던 조선 최대의 절이었다. 선대왕들의 제사를 지내는 사찰이므로 더욱 특별히 보호받았다. 행궁으로도 기능했으므로 그 모습이 궁궐 건축에 가까웠다.
태조 이성계는 회암사를 매우 아꼈다. 나옹화상의 제자인 무학대사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였으며,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찬례(讚禮: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에 예배하고 그 공덕을 찬탄함)토록 하였다. 이성계가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회암사에서 수도생활까지 했을 정도였다. 비록 이성계는 조선의 왕이었지만 그 자신은 유학자 출신이 아니었으며, 불교문화 속에서 성장한 고려시대 인물인지라 불교를 좋아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나름대로 독실한 불자였던 세조 등에 힘입어 회암사도 계속 번창하였다. 성종 3년(1472)에는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자 대왕대비인 정희왕후가 더 크게 중창하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에도 숭유억불 정책이 존재했으나, 실제로 많은 왕족들은 불교에 관심이 있었다. 조선 초기는 왕의 권력이 신하들보다 더 강했기에, 국왕의 개인적인 생각에 따라 신료들의 반대를 누르고 사찰을 지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 유학자들의 힘이 강해지고 점점 숭유억불 정책도 강경해지던 중, 16세기 후반에 원인 모를 화재로 폐사가 되었다. 19세기에 이 절터 근처에 재건한 작은 회암사가 남아있다.
회암사는 1313년 이전에 이미 절이 창건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1326년 고려에 온 인도 승려 지공이 창건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1376년 지공의 제자인 나옹이 이 절을 중창했다.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를 이곳에 머물게 했고, 그 자신도 퇴위 후 이곳에서 생활했다. 1472년 세조비인 정희왕후의 명으로 정현조가 중창했고, 명조 때에는 보우를 신임한 문정왕후의 비호로 전국제일의 수선도량이 되었다. 왕후가 죽은 뒤 보우가 처형되고 절도 황폐해졌다. 선조 이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옛 절터 부근에는 1977년 중건한 대웅전·삼성각·영성각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 회암사지 선각왕사비(보물 제387호)·회암사지 부도(보물 제388호), 회암사지 쌍사자석등(보물 제389호) 등이 남아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조계사의 말사로 서울시 성북구 돈암동에 위치한 이 곳은 조선 시대의 사찰로 원래 한양 도성 내에 있었다.
조선 태조 5년(1396년) 태조의 정비였던 신덕왕후 강씨가 죽자 태조는 강씨의 능원인 정릉을 도성 내에 조성하고, 강씨의 원찰로써 흥천사를 지었다. 흥천사를 지은 후 태조 7년(1398년) 7월에 열린 우란분재(盂蘭盆齋: 불교에서 사후에 고통 받고 있는 자를 위해서 음력 7월 15일에 음식을 공양하는 의식)를 직접 참여하거나, 8월에는 신덕왕후의 천도회(薦度會:죽은 이의 넋을 극락으로 보내기 위해 행하는 의식 모임)에 사찰 승려들을 몸소 만나 시주하고 천도회를 주도하는 등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계모 신덕왕후를 거의 증오하다시피 했던 태종이 즉위한 뒤인 태종 3년(1403년)에 사찰에 딸린 전답과 노비의 수를 줄이고, 태종 8년(1408년)에는 절의 건물 170칸을 뜯어서 명(明) 사신들의 객사인 태평관(太平館)을 짓는데 사용했다. 그나마 사찰 자체를 없앤 것은 아니어서 태종 10년(1410년) 태조의 유지(遺旨)를 좇아 절을 수리하고 이듬해에는 사리각을 중수하였다.
세종 6년(1424년) 선교양종 통합 당시 선종에 속하게 되었다. 세종 19년(1437년)부터 세종 23년(1441년) 3월까지 왕명으로 사찰을 중수하였고, 세조 8년(1462년)에는 범종을 만들어서 이 사찰에 봉안하였으며, 옛 흥천사 부지에 의경세자의 부인이자 며느리인 한씨의 사저를 지어주기도 했다.
성종 11년(1480년) 절을 다시 중수하였으며, 연산군 10년(1504년) 대궐 안에 있던 내원당(內願堂)을 이 절로 옮겼는데, 그 해 12월에 화재로 절이 소실되어 사리각만 남았다. 중종 5년(1510년)에는 이 사리각까지 불타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고, 선조 2년(1569년) 사찰이 정릉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왕명으로 함취정(含翠亭) 옛 터로 절을 옮겨지었다.
정조 18년(1794년) 이 절의 승려 성민(聖敏), 경신(敬信) 등의 발원으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짓고 절 이름을 신흥사(神興寺)라 하였다. 그 뒤 헌종 12년(1846년) 구봉(九峰)이 칠성각(七星閣)을 지었고, 철종 1년(1849년) 성혜(性慧)가 적조암(寂照庵)을 창건하였으며, 철종 4년(1853년) 대웅전(지금의 극락전)을, 철종 6년(1855년) 명부전(冥府殿)을, 고종 2년(1865년) 대방(大房)과 요사채를 짓고 이름을 창건 당시의 이름인 흥천사로 되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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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1] (서울)성북동에 있는 사찰로법정 스님과 인연이 있는 절의 이름은?
[퀴즈2]북한산 아래에 있어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은 둘러봤을 사찰이다.이 절의 이름은
[퀴즈3]도성 밖 비구니 사찰로 왕실과 후궁,상궁 등 궁인에게 사랑받은 절 이름은?
[퀴즈4]신촌 연세대학교(세브란스병원)뒤에 있는 한국불교 태고종의 절로 서재필은
자서전에서 이곳을‘개화파의 온상’이라고 하였다.이 절의 이름은?
[퀴즈5]본래 경기도 광주 수도산(修道山)의 산사(山寺)였지만,지금은 서울시 강남구
도심 한가운데 있는 사찰이 되었다.돈이 많은 부자(富者)절로 소문난 이 절은?
[퀴즈6]경기도 남양주운길산(雲吉山)에 있는 사찰로 세조의 명으로 중창된 절이다.
두물머리(양수리)를 바라볼 수 있는 저명한 경관 전망지인 이 절의 이름은?
[퀴즈7]한국 불교 최대 종단인 조계종本寺로 근정전 크기의 대웅전이 있는 이곳은?
[퀴즈8]조계사 바로 옆에 있는 한국 최초의 우체국으로 갑신정변이 일어난 곳의 이름은?
[퀴즈9]서울시 은평구에 있는 사찰로 고려 현종의 목숨을 구한 인연으로 왕실의 지원과
보호를 받았다. 2009년3.1운동 당시에 쓰였던 태극기가 발견된 이곳은?
[퀴즈10]이성계의 비호를 받아'조선의 왕사(王寺)'라고 불렸던 경기도 양주에 있던 이
사찰의 이름은?
[요약퀴즈 정답]
[퀴즈 1] 성북동에 있는 사찰로 법정 스님과 인연이 있는 절의 이름은? 답.=> 길상사
[퀴즈 2] 북한산 아래에 있어 오르내리는 사람은 둘러봤을 절이다 이곳은? 답.=> 도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