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특집 ‘한국의 구곡’|<1>어디서 유래했나?] ‘한국의 구곡’ 전국 102개 최초 공개



국립수목원에서 2021년까지 연구사업… 중국 주자가 무이산에 ‘무이구곡’ 첫 설정

여름 특집으로 ‘한국의 구곡九曲’을 마련했다. 말만 들어도 시원하다. 그런데 구곡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제법 있는 듯하다. 구곡 자체의 인문학적 개념을 배제한 채 간단히 말하면, 계곡의 다른 이름이다. 조금 격조 있는 표현으로는 굽이쳐 흐르는 풍경 있는 계곡을 가리킨다.

여름에는 대개 시원한 계곡이 있는 산을 찾는다. 거기서 경관 좋고 풍류를 즐길 만한 곳이 있으면 구곡이라 보면 된다. 조선 선비들 기준으로 ‘자연과 더불어 은둔생활하면서 후학을 가르치고 음풍농월하기 좋은 계곡’으로 보면 된다. 지금 남아 있는 서원들 주변에는 틀림없이 구곡이 있다. 서원이 없더라도 풍광이 좋으면 십중팔구 구곡과 관련이 있다.

시원한 계곡 중심으로 행해지는 여름 등산은 계곡을 따라 오르기도 하고 계곡에서 아예 머무르기도 한다. 계곡 주위 바위엔 다양한 석각들이 눈에 띈다. 누군가의 이름부터 고사성어까지 다양하다. 그중에 ‘1곡一曲’, ‘2곡二曲’ 등 뭔가 의미 있는 듯한 석각이 눈길을 끈다. 이른바 ‘구곡’이다.

구곡이 무엇이고, 어디서 유래했고, 언제 전국적으로 확산됐는지 살펴보자. 그런데 구곡을 파악하기 위해선 ‘산수山水’의 개념을 먼저 알아야 한다. 동양 사상인 유교나 불교, 도교의 근본 목적은 모두 깨달음, 즉 도道의 체득에 있다. 이보다 1,000여 년 뒤에 나온 주자의 성리학도 근본은 깨달음에 있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朝聞道 夕死可矣” 했다. 노자도 <도덕경>에 “도를 도라 하면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라고 했다. 불교는 “실체 없는 마음 본원의 자리를 깨닫는 게 도”라고 했다. 이른바 득도得道다. 도를 향한 본질은 같으면서도 방향성에 있어 조금씩 차이를 드러냈다.

근원자리는 山, 변화하는 자리는 水

도를 향한 본질, 즉 진리의 체득을 이들 사상에서는 공통적으로 산과 물의 이치에 비유했다. 흔들림 없는 인식과 판단 이전의 근원 자리를 산山에 비유했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세계를 물水에 비유했다. 이는 노자의 무위자연과 일맥상통한다.

1,000여 년 뒤 주자의 성리학에서는 이理와 기氣로써 나타내려고 했다. 성리학은 이와 기로써 깨달음을 얻으려고 했다. 理는 깨달음의 본성이고, 氣는 나타나는 현상세계를 말한다. 이기일원론은 깨달음이 나타나는 현상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고, 이기이원론은 깨달음이 보이는 현상과 다르다는 설명이다.

부산대 강기래 생명산업융합연구원은 “조선시대까지 학문의 궁극적 목적은 깨달음에 있으며,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물처럼 쉴 새 없이 생동감을 가지고 흐르면서, 산처럼 변하지 않는 진리를 산수라는 자연에 빗대 표현했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산수란 개념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고 그 속에 무궁무진한 철학적 개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산수의 개념에 더해서, 구九의 개념도 의미심장하다. 중국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르면, ‘구는 양수의 변變이며, 그 굽은 것이 다 끝난 모양을 본뜬 것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단순한 아홉 개의 개념이 아니라 굽이쳐 흐르는 모양이 극에 달한 모습을 가리킨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따라서 구곡의 개념은 진리를 깨닫기 위해 변화무쌍한 水와 흔들리지 않는 山의 모습이 굽이쳐 흐르는 극에 달한 계곡과 어울린 현상을 가리킨다고 보면 무리가 없겠다. 

유교는 초기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외향적 학문의 성격에서 정치와 학문적 발전과 질곡을 겪으면서 점차 수기안인修己安人의 내면적 학문으로 변해 간다. 이러한 내면적 평안을 위한 자기 수행 학문의 길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인물이 바로 주자이다.

주자는 이와 기의 발현과 그 관찰을 통한 심성의 체득을 목표로 했다. 이러한 심성, 즉 진리의 체득을 위한 수신의 장소와 도구로서 산과 물이 있는 자연을 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굽이쳐 흐르는 물의 모양에도 ‘구’라는 동양사상을 접목해 구곡이라는 개념을 탄생시켰다.   

주자는 공자 사후 1,500여 년이 지난 뒤 공자의 가르침인 도의 실체적 체득을 위한 행위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 고민의 해결점이 된 기본적인 장소가 산과 물이 있는 자연의 깊은 탐구로부터 시작된다. 그게 바로 무이구곡武夷九曲이다.

근본적인 깨달음을 표현한 도처럼 연원을 알 수 없는 공간으로부터 시작된 물줄기의 흐름에 대한 특정한 경관과 장소를 결합해 명칭을 부여하면 비로소 하나의 개인적 영역성을 가진 공간으로 변화한다. 이러한 공간에 대한 명칭은 타인들의 인식에 오르내리면서 자연스럽게 명명자의 사적인 공간으로의 역할도 하게 된다. 또한 영역성의 표시로 바위에 암각문을 새기고 시문을 남기기도 했다.

주자는 구곡을 경영하면서 자연과의 합일을 통한 궁극적인 깨달음에 이르기를 바랐고, 세상의 이치를 터득하기 위한 수신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바라보기도 했으며, 유교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장소로 활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실제 중국에는 유교의 성지라고 해서 유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하고 희한한 신앙 복합체로 뒤섞여 있다. 다시 말해 유교의 성지이지만 유교의 비중이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이산의 장소 정체성은 유·불·선 문화적 혼재로 인한 신비감과 도가의 수많은 유적, 선가에서 일컫는 36동천 중 16번째인 승진원화동천이라는 상징성 등 문화적 다양성으로 인해 경외감이 느껴질 정도다. 여기에 중국의 광활하고 기이한 자연이 주는 신비감으로 더욱 깊이를 더한다. 자연의 웅대한 스케일은 인간을 압도하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인간이 진리를 체득하기 위한 도구로 자연을 활용하기에 전혀 손색이 없다.

배를 타고 가는 중국 무이산의 무이구곡과는 달리 한국의 구곡은 하천을 따라 올라가면서 자연을 감상하는 구곡으로 변화했다. 사진 중국여유국
배를 타고 가는 중국 무이산의 무이구곡과는 달리 한국의 구곡은 하천을 따라 올라가면서 자연을 감상하는 구곡으로 변화했다. 사진 중국여유국
산은 이, 수는 기로서 道를 체득

주자의 학문, 즉 성리학은 고려 말 안향(1243~1306)에 의해 최초로 한반도로 유입된다. 구곡의 개념으로서보다는 신학문의 개념으로 들어왔다. 그보다 조금 뒤에 근재 안축(1282~1348)에 의해 순흥지역에 ‘죽계구곡’이 한반도 최초의 구곡으로 설정된다.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현재 소수서원)이 바로 그 계곡 옆에 자리 잡고 있다. 16세기 이황·이이를 중심으로 성리학이 심화되는 시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구곡이 정착되기 시작한다. 이른바 학주자學朱子·존주자尊朱子로 주자를 추앙하면서 조선 유학자들은 성리학의 기본 사상과 실천 철학으로 인식하면서 구곡이 확산된다.

하지만 우리의 자연환경은 중국의 자연환경과 스케일에서 너무 차이가 난다. 구곡의 모티프는 유지하지만 그 지역의 하천지형적 특성과 실정에 부합하는 이미지의 재구성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 무이구곡에 비해 산상의 수직요소보다는 산하의 국부적 수평요소가 우세경관요소로 작용하면서 소沼·담潭·석石 등에 이름 붙이기로 약간 변형된 형태로 자리 잡는다.

국내에는 무이구곡처럼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갈 만한 장소가 드문 관계로 하천 형태와 기능적 텍스트성으로서의 결속구조는 다소 이완된 채 도학적 사고나 풍류적 향유에 의존한 구곡문화가 텍스트성의 내적구조를 지배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조선의 구곡은 중국의 무이구곡을 받아들이지만 성리학적 이념을 배경으로 하는 조선의 사회 속에서 제작자의 목적이나 의도, 자연환경에 따라 재해석되고 이름 붙여지는 과정을 거친다.

결국 주자의 성리학적 구곡사상의 핵심은 자연에서 도를 체득하기 위한 도교문화적 상황과 유교의 경세제민經世濟民적 사대부 사고관과 융합된 조선의 새로운 유교문화로 정착하게 된다. 즉 도교와 유교가 결합된 사유방식으로 나타난다. 이후에는 도를 체득하기 위한 과정은 없어지고 풍류만 남는, 즉 본질은 없어지고 껍데기만 남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한편 국내의 구곡연구는 학자들마다 간헐적으로 이뤄져 오다가 국립수목원에서 2017년부터 2021년까지 ‘산림역사자료 고찰을 통한 산수문화의 현대적 활용연구’라는 주제로 집중적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현재 남한의 구곡은 총 102개로 나타났다. 국내 최초로 현장 답사를 통해 공식적으로 집계하는 데 성공했다. 그동안 국내 학자들은 150개, 170개, 200여 개, 250여 개 등 각자 편의대로 다양한 구곡 수를 발표해 왔다.

강기래 부산대 연구원은 “공식적으로 확인된 구곡은 102개이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많다. 시나 문헌으로만 남은 구곡도 상당수 있어 그동안 구곡 수에 혼란이 있었다. 흔적이 없는 구곡까지 포함하면 실제 250개 정도 된다. 하지만 현장을 찾을 수 없고 실체가 없는, 즉 시와 구전으로만 전하는 구곡을 이번 조사를 통해 상당수 확인했다”고 말했다.

구곡은 사상적 의미 포함, 팔경은 수려한 자연만

국립수목원은 이번 조사에서 구곡과 팔경八景에 대해서도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구곡은 자연을 통해 이와 기의 진리를 체득하는 사상적 의미가 강하게 배어 있는 자연공간인 반면, 팔경은 경승이라는 수려한 자연현상에 더 큰 비중을 두는 차이가 있다. 팔경의 연원인 소상팔경瀟湘八景은 호남성 소강瀟江과 상강湘江이 만나는 지점의 팔경이 시화로 만들어진 데서 유래한다. 이후 팔경도 조선으로 유입돼,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지금 전하는 웬만한 팔경문화는 여기에서 유래한다고 보면 된다.

현재 남아 있는 구곡과 팔경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가장 심취한 산수문화로 꼽을 수 있다. 그 산수문화가 지금 한민족의 심성에 그대로 남아 등산문화로 전승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관광공사가 추천하는 '국내 섬 여행지'

 

 

 

1. 여수 사도


요즘 대한민국의 핫 플레이스가 되고 있는 여수! 여수 엑스포를 구경하러 가서,

근처 여행지를 둘러보는 분들이 많으신데요.

여수가 감춰 놓은 섬~ 사도를 강추 합니다!

걸어서 1시간 정도면 둘러볼 수 있는 작은 섬이지만,

사도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데! 두구두구~~

사도가 유명한 이유는 바로 공룡 발자국 때문!

아시아에 손꼽히는 공룡발자국 화석 산지로 무려 7천만 년 전에

형성된 3,800여 점의 공룡발자국이 늘어서 있다고 합니다. 

<1박 2일> 전남 여수 사도 편을 기억하시는지요?^^

사도 여행 키워드는 사도 공룡화석 뿐 아니라,

초승달처럼 구부러진 모래사장과 그 주변의 거북바위,

얼굴바위 등 신비로운 자연경관입니다.

매년 음력 2월 15일 경이면 인근 추도 사이와 바다가 갈라지는

일명 모세의 바닷길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는 데요.

여름 휴가철에는 보지 못하겠네요~^^;;

대신 주민들의 어선이나 보트로 함께 여행할 수 있다고 하니,

공룡을 좋아하는 어린 자녀가 있는 분들이라면 다녀오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2. 통영 대매물도, 소매물도


<1박 2일>에 소개되어 유명세를 얻고,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통영 앓이를 하게 만든 그 섬! 바로 매물도입니다.

통영에서 약 27km 떨어진 곳에 있는데요.

매물도는 본 섬인 대매물도와 소매물도, 그리고 등대섬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특히 70여 가구가 채 되지 않는 대매물도에 있는 당금마을과 대항마을을 거치는

5km의 놀랍도록 아름다운 해안 탐방로는 여행자들의 사랑을 끊임없이 받고 있는 곳이라고 해요. 


통영여행에서 유명한 것은 바로 이 녀석! 통영 꿀빵입니다.

보기만 해도 침이 줄줄~~~ 얼른 집어 입에 쏙 넣고 싶은 기분인데요.

생각보다 그렇게 달지는 않다고 해요.

뭔가를 가미하지 않고 국산 팥앙금만을 사용했기 때문에 그런지..?

겉에 발린 꿀도, 설탕물처럼 심하게 달거나 하지 않다고 합니다.

가게마다 종류가 약간씩 다른데요. 해바라기 씨나 견과류가 붙어 있는 것도 있고..

여하튼 꿀빵 먹으로 통영으로 마구 달려가고 싶습니다.

3. 울릉도


전 세계 배낭여행의 바이블, 론리플래닛이 선정한 세계의 시크릿 아일랜드, 울릉도!

역시 우리나라 섬 여행에서 울릉도를 빼놓을 수는 없겠죠?

캬아~~ 저,저,저 에메랄드 빛 파도 좀 보라지요~

울릉도 여행의 키워드는 굽이굽이 해안도로 따라 걷는 하이킹 코스와

봉래폭포, 성인봉, 나리분지의 산채비빔밥과 울릉도 오징어,

그리고 저 멀리 독도까지 포함하겠습니다. 



한 번 갔다 온 사람들은 모두 이 곳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매혹의 섬 울릉도.

저는 개인적으로 울릉도 하면 명이나물이 생각나는데요.

제가 좋아하는 반찬이라, 철마다 한 번씩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먹는다는..

특히 요즘처럼 입맛 없는 계절엔 딱입니다요.^^ 


또 한가지 놓칠 수 없는 울릉도의 특산물, 호박막걸리! 캬~~

저 막걸리 안에 노란 호박이 동동 떠다니는 게 보이십니까?

방금 본 통영 꿀빵도 잊혀지게 만드는 비쥬얼이지요?

벌써 마음은 울릉도로 뛰쳐나가고 있습니다.^^

걸죽하고 고소한 호박 맛! 가히 엑설런트!! 물론 집집마다 식당마다

모두 제각각 조금씩 맛이 다르다고 하는데요.

맛깔스런 노랑색 막걸리를 고르는 것이 포인트라고 합니다^^ 

색다른 삶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아늑한 쉼터가 되어주는 섬.

아름다운 포구와 순박한 사람들 속에서 느린 여행을 즐기고 싶으시다면,

우리나라 구석구석 예쁜 섬들을 찾아 떠나 보는 건 어떨까요?

육지와 뚝 떨어진 섬이야말로, 도시의 삶에 지친 우리들에게

마음의 평화와 위안을 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악돌이 박영래의 만화 산행 특별부록지도 코스가이드 | 성치산 성봉] 염천炎天 잊게 하는 폭포 12개가 염주念珠처럼 이어져


물벼락 맞게 되는 폭포마다 옛 선비들이 운치 있는 이름 새겨 더욱 볼 만

왕사봉(718m)에서 북쪽 대둔산 방면으로 이어가는 금남정맥으로 약 4km 거리에 769m봉이 있다. 769m봉에서 남동으로 가지 치는 능선이 있다. 성치지맥이다. 이 성치지맥은 충남 금산군 남이면과 전북 진안군 주천면 경계를 이루며 나아간다.

성치지맥은 용덕고개에서 살짝 가라앉았다가 약 3km 거리에 성치산城峙山(670.4m)을 들어 올린다. 이후 성치지맥은 약 3.5km 거리에 성봉城峰(645m)을 빚어 놓은 다음, 약 6km 거리인 솔재(13번국도가 넘는 고개)를 지나 약 2km 더 나아간 목사리재에 이른다. 성치지맥은 목사리재에서 북으로 방향을 튼다. 목사리재를 뒤로하는 성치지맥은 약 20km를 북진하다 금산군 제원면 소사봉(308.9m)에 이른다. 이후 성치지맥 잔릉들은 봉황천과 금강에 가라앉는다.   

성봉 산 이름의 유래는 정확하지 않다. 금산군에서 성봉 정상에 설치한 성봉 안내판에는 ‘…전략 … 두 봉우리에 모두 성城자가 들어 있지만 성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이 내용은 맞는 말이다. 성치산과 성산 사방 어디에도 성곽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반남 박씨潘南朴氏 집안으로 이 산 아래 사기소마을에서 1846년에 태어나 48세 때인 1894년 일어난 동학란 때 이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한 지곡 박기서 행의비芝谷 朴琦緖 行義碑에는 ‘전략…十二瀑布십이폭포가 있는 絶景절경인 茂芝峰무지봉 골짝에서 生長생장하였다 하여 號호를 芝谷지곡…’이라는 내용이 음각되어 있다. 따라서 현재 성봉의 옛날 이름이 ‘무지봉’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특히 성봉은 예나 지금이나 여름철 뜨거운 불 같은 더위를 뜻하는 염천焰天을 잊게 하는 계곡산행코스로 인기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성봉 북사면 무자치골에는 폭포가 12개나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무자치골 12폭포는 ‘금산 8경’에 들 정도로 흔치 않은 풍광과 시원함을 느낄 수 있는 명소이다.〈금산군지〉를 비롯한 이 지역 옛 문헌들을 보면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이라는 이태백의 시구를 가져다 이곳 폭포들의 아름다움을 치켜세우고 있다.

성치산과 성봉은 시원한 폭포수들뿐만 아니라 산릉마다 노송 어우러진 암릉지대와도 만나기 때문에 산행의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다. 

[악돌이 박영래의 만화 산행 특별부록지도 코스가이드 | 성치산 성봉]
[악돌이 박영래의 만화 산행 특별부록지도 코스가이드 | 성치산 성봉]
525m봉에서 10분 올라간 곳인 신동봉 못미처 낙타등바위에서 뒤돌아본 신동저수지. 저수지 왼쪽이 사기소마을.

→ 성치산 등산코스는 신동리 사기소 마을~무자치골 제6폭 구지소 유천폭포~제 11폭 금룡폭포~525m봉 북서릉~신동봉~성봉 북릉, 구석리 모티마을~무자치골 제5폭 죽포동천폭포~제6폭포(구지소 유천폭포)~525m봉 북서릉 갈림길~제12폭 산학폭포~신동봉 갈림길~신동봉~성봉 북릉, 신동봉 갈림길~무자치골 상류 삼거리~635m봉 북릉 경유 성봉을 오르고 내리는 코스들이 가장 많이 이용된다. 이 경우 산행을 길게 하려면 성봉~635m봉~성치지맥~성치산 정상으로 향하면 된다. 이 경우 하산은 용덕고개에 이른 다음, 북쪽 흑암리 광대정, 남쪽 용덕리로 향하면 된다. 흑암리에서 등산코스는 상기 코스를 역으로 광대정마을~용덕고개~성치지맥~성치산 정상~공터 삼거리~635m봉 경유 성봉에 이르는 종주코스 하나뿐이다. 상기 코스들을 신동리 사기소마을 들머리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소개한다.   

신동리 사기소마을~무자치골 제 6폭 구지소 유천폭포~제 11폭 금룡폭포~525m봉 북서릉~신동봉~성산 북릉~성산 정상〈사기소마을 기점 약 5.5 km·3시간  안팎 소요〉

[악돌이 박영래의 만화 산행 특별부록지도 코스가이드 | 성치산 성봉]
[악돌이 박영래의 만화 산행 특별부록지도 코스가이드 | 성치산 성봉]
성봉과 12폭포에 대한 새로운 정보들을 알려준 사기소마을 박천영옹(오른쪽).

‘사기소’라는 지명은 언뜻 사기그릇(도자기)을 굽는 가마터가 있었던 곳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기소 마을 최고령인 박천영(81세)옹은 “사기소 본래지명은 으뜸 원元을 시작으로 선비 사士, 터 기基에 지역 소所를 써서 ‘원사기소’라고 해요. 옛날 공부실력이 으뜸이었던 선비들이 들어와 공부를 했던 장소라는 뜻이지요”라고 알려주었다.

이어 박옹은 “어렸을 적에 증조부님이 12폭포들 대부분 이름들을 지으셨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박옹의 증조부(지곡 박기서)는 동학란 때 의병 300명을 거느리고 당시 관군과 일본군들을 상대로 금산지역 안전을 지키는 데 공을 세운 분이다. 지곡 선생은 동학란 이후 사기소마을에 서당을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악돌이 박영래의 만화 산행 특별부록지도 코스가이드 | 성치산 성봉]
신동봉 정상에서 남으로 본 성봉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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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폭 금룡폭포를 지나자마자 나오는 삼거리(푯말 없고, 산악회 표지기 다수)에서 왼쪽 오르막이 525m봉 북서릉 길이다. 525m봉 북서릉은 가팔라서 초심자나 노약자는 하산 길로 이용하면 좋을 듯하다. 낙타등바위에서 오른쪽 우회길이 안전하다. 

구석리 모티마을~무자치골 제5폭 죽포동천 폭포~제6폭 구지소 유천폭포~ 525m봉 북서릉 갈림길~제12폭 산학폭포~신동봉 갈림길~신동봉~성산 정상〈약 5km·3시간 30분 안팎 소요〉

[악돌이 박영래의 만화 산행 특별부록지도 코스가이드 | 성치산 성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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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폭인 구지소 유천폭포에서 내려다 본 제5폭 죽포동폭포 하단부의 소沼.

죽포동천 폭포상단부 구지소 유천폭포 옆 너럭바위에는 ‘시원한 바람을 허리춤에 차고 있다’는 뜻인 ‘풍패風佩’라고 음각되어 있다. 제7폭인 고래폭포는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마치 수염고래 입口처럼 생겼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제8폭인 명설폭포는 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폭포수가 겨울철 세차게 불어대는 눈보라雪 소리鳴 같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제9폭인 운옥폭포는 경사진 너럭바위에 담潭이 6개가 연이어져 있다. 제10폭인 거북폭포는 계곡길 쪽 바위가 거북 머리이고, 그 오른쪽 담이 거북의 몸체라고 한다. 제11폭인 금룡폭포는 암반위로 흘러내리는 긴 물줄기가 비단錦색 용 같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제12폭인 산학폭포는 신선이 학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 모습이라 해석해서 이름이 지어진 것이다. 이곳 주민들은 폭포 아래 크고 작은 담과 소들을 말에게 물 먹이기에 좋은 곳이라 해서 ‘말구쇠’라 부르고 있다. 

[악돌이 박영래의 만화 산행 특별부록지도 코스가이드 | 성치산 성봉]
‘시원한 바람을 허리춤에 차고 있다’고 해석되는 유천폭포 옆 풍패風佩 각자刻字.
[악돌이 박영래의 만화 산행 특별부록지도 코스가이드 | 성치산 성봉]

신동봉 갈림길에서 왼쪽 계류 건너 신동봉으로 오르는 길은 525m봉 북서릉 같이 다소 가파른 편이다. 

모티마을~무자치골(12폭포)~신동봉 갈림길~무자치골 상류~635m봉 북릉~성봉 정상〈약 6.5km·3시간 30분 안팎 소요〉

[악돌이 박영래의 만화 산행 특별부록지도 코스가이드 | 성치산 성봉]
12폭포 중 가장 마지막 상류에 있는 산학폭포.
[악돌이 박영래의 만화 산행 특별부록지도 코스가이드 | 성치산 성봉]
성봉 정상비석.

신동봉 갈림길에서 무자치골 상류로 들어서면 왼쪽 계곡이 온통 반석지대다. 경사도가 거의 평지같아 다리쉼 하며 탁족을 즐기기 그만이다. 마지막 합수점 왼쪽 삼거리(↗성봉 1.5km 푯말)에서 오른쪽 오르막길이 635m봉 북릉 길이다. 삼거리에서 직진하는 계곡으로 가도 된다. 계곡 길을 다 오른 곳은 성봉 정상 북릉 안부(성봉 0.3km → 푯말)이다. 안부에서 정상 실제거리는 약 100m밖에 안 된다.

용덕고개~성치지맥~성치봉~635m봉~ 성산 정상〈약 6.5km· 4시간 30분~ 5시간 안팎 소요〉

[악돌이 박영래의 만화 산행 특별부록지도 코스가이드 | 성치산 성봉]

[악돌이 박영래의 만화 산행 특별부록지도 코스가이드 | 성치산 성봉]
성치봉 들머리인 용덕고개 금산군 안내석. 전주~주천을 경유해 온 직행버스가 금산군 흑암리 쪽으로 넘어가고 있다.

성치산 정상은 무명봉 삼거리에서 서쪽으로 약 150m 거리에 있다. 무명봉에서 남동으로 2분 거리인 전망바위에서는 동으로 신동봉과 성봉, 남동으로 봉화산, 봉화산 뒤로는 덕유산이 눈에 들어온다. 남서쪽으로는 주천면소재지와 그 뒤편 구봉산, 운장산, 연석산, 명도봉 등이 시야에 와 닿는다. 

교통

■ 서울→금산 강남고속버스터미널(전철 3, 7, 9호선) 경부선 11번 및 12번 승차장 에서 1일 8회(06:30〔일반 고속버스〕, 08:05〔일〕, 11:30〔우등〕, 13:30〔일〕, 15:05〔우〕, 17:05〔일〕, 18:40〔우〕) 운행. 요금 일반 1만1,700원, 우등 1만 7,200원. 1시간 40분 소요.

■ 서울→대전 강남고속버스터미널 경부선 11번 및 12번 승차장에서 10~15분 간격(06:10~23:45)으로 수시 운행. 요금 일반 9,600원, 우등 1만4,900원. 2시간 소요.

■ 대전→금산 복합버스터미널(구 동부터미널)에서 마전~새말 경유 10~20분 간격(06:10~22:30)으로 수시 운행. 요금 4,100원. 40분 소요.

■ 금산→신동리 사기소 1일 3회(06:30, 11:30, 18:10) 운행.

■ 신동리 사기소→금산 1일 3회(06:30, 12:10, 18:40) 운행.

■ 금산→양대(용수목 삼거리)~12폭포→흑암 1일 8회(06:20~19:00) 운행.

■ 흑암→12폭포~양대→금산 1일 8회(06:45~19:30) 운행.

※금산 시내(군내)버스는 시외버스터미널 정문에서 나와 서쪽 도보로 2분 거리(약 50m)인 다리에서 왼쪽(남쪽) 길로 약 100m 거리 ‘내 나이가 어때서 한의원(택시 승강장 옆)’ 앞 시내버스정류장에서 승차.

유의점은 정류장에 붙어 있는 남일 방면, 남이 방면 버스시간표(A4 용지 크기여서 시력 좋지 않으신 분은 안경 끼어야 글씨 보임)에 행선지들이 모두 ‘사, 신정, 평’식으로 마치 암호처럼 쓰여 있다. 이 때문에 외지인들은 이 암호들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운전기사분께 행선지 물어보고 승차하실 것. 특히 2018년 5월 8일자로 시간표에 변동이 있으므로 주의. 

문의 금산시내버스 041-754-2830.

문의 금산택시 충남개인택시 금산군지부 041-754-3143, 금산 비단뫼 개인택시 대표 080-753-1000.

■ 금산→용덕고개(시외버스) 1일 4회(10:20, 13:25, 14:40, 18:05) 운행하는 주천 경유 전주행 버스 이용. 이 시외버스편은 미리 버스기사에게 용덕고개에서 성치산 등산하려 하니 잠시 세워 달라고 부탁하면 정차해 준다. 이 버스편은 용덕고개 넘어 주천 경유 전주까지 운행한다. 용덕고개 넘어 용덕리까지 2,100원. 고개까지 25분 안팎 소요.

■ 주천→용덕고개(시외버스) 1일 4회(09:45, 13:05, 15:45, 17:45) 운행하는 금산행 버스 이용. 이 시외버스도 용덕고개에서 세워 준다. 이 버스편은 상기 버스시각 1시간 전에 전주를 출발한다. 요금 금산 2,600원. 25분 소요. 전주~주천 요금 6,700원. 1시간 소요.

■ 용덕고개→금산 15:30~17:30 사이에 용덕고개로 하산한 경우에는 상기 주천 발 15:45, 17:45발 금산행 시외버스를 기다렸다가 타고 나올 수 있다.

■ 주천→용덕고개(군내버스) 1일 4회(07:40, 09:40, 14:00, 17:40) 운행하는 용덕리행 이용, 고개 남쪽 산재마을 입구 삼거리 하차. 고갯마루까지 도보 3 분.

■ 용덕고개 남쪽 산재마을 입구→주천(군내버스) 1일 4회(07:57, 09:22, 15:37, 17:22) 운행.

문의 주천정류소(터미널슈퍼) 063-432-6515. 주천 개인모범택시 063-432-6129, 010-8711-6122(차승호). 

식사(지역번호 충청남도 041)

■ 용수목 삼거리 일원 13번 국도에서 서쪽 구석리 방면 12폭포로(路) 진입로인 용수목 삼거리에 자리한 고향가든(752-9272), 옛날전통짜장(754-2589) 등 이용. 용수목 삼거리 일원을 이곳 주민들은 ‘양대리’라고 부른다.

■ 구석리 일원 12폭포 들목인 모티 마을(구석 1리)에서 남쪽 잠수교 건너 간 무자치골 입구 이슬농원(010-7179-1006), 이슬농원에서 2분 더 들어간 십이폭포 탁배기 휴게소(010-8955-2257), 탁배기휴게소에서 7분 거리 십이폭포민박(010-6348-7041) 등 이용. 표고버섯재배장인 이슬농원에서 인삼튀김, 도토리묵, 야채전, 시원한 각종 음료수 등을 판다. 십이폭포 탁배기 휴게소에서 피라미 미꾸라지 빙어튀김, 도토리묵, 인삼튀김, 인삼동동주등을 판다.

두 식당 모두 이곳으로 하산하는 산악회들이 해단식 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 용덕리 일원(지역번호 063) 용덕고개 남쪽 1.7km 거리 등나무가든(432-0968) 한 곳이 있다.

■ 주천면소재지 일원(지역번호 063) 주천터미널마트에서 남쪽 주천파출소 방향 낙원식당(433-7303), 미가정육점 식당(010-2229-7731), 민주네 포장마차(010-9167-5159), 주천식당(432-6683), 파출소 맞은편 양지식당(433-0300) 등 이용. 

세계문화유산 오른 통도사 등 7곳  고즈넉한 천년의 안식처로 떠나자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8/09/2018080901928.html



'종이 봉황'이 내려앉았다는 봉정사, 대웅전에 佛像 없는 통도사… 
아는 만큼 보이는 한국美의 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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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주 부석사를 찾은 가족이 범종루 앞 ‘108 계단’을 오르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부석사에는 불자뿐만 아니라 연인, 가족 단위 방문객이 부쩍 늘었다./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경북 영주 부석사 불이문(不二門)인 안양루(安養樓)에 가까워지자 똑 닮은 삼층석탑 두 개가 보였다. 석탑 사이에 놓인 약숫물에 개구리 두 마리가 짝짓기 중이다. 연인 한 쌍이 그 모습을 보고 킥킥거렸다. 곧 한 가족이 몰려왔다. 남자 아이가 "우와, 쟤넨 하나야 둘이야?"라고 소리치자, "절에서 그런 말 하면 안 돼"라며 부부가 이구동성 말렸다.'둘이 아니다'는 뜻을 가진 불이문을 지나야 사찰의 중심에 닿을 수 있다. 너와 나, 만남과 이별,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불국토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다. 뜻 모르고 보면 평범한 나무문이겠지만, 의미를 알고 나면 주변 풍경도 다르게 다가온다. 한국의 미(美)를 재발견한 대표적인 미술사학자 최순우(1961~1984)가 저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서서'에서 부석사 무량수전의 아름다움을 극찬하며 '아는 만큼 느낀다'고 한 것도 그 이유일 테다.

지난 6월 통도사, 부석사, 봉정사,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가 '산사(山寺),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절로 여행을 떠나는 이들이 크게 늘고 있다. 조계종 관계자는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아 찾는 이 적었던 봉정사가 특히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했다.

지난 3일 찾은 부석사 무량수전 앞은 금요일 저녁임에도 관광객으로 붐볐다. 친구와 함께 불타는 금요일 '불금' 대신 '불금(佛金)'을 보내러 왔다는 대학원생 권지아(28)씨는 "역사학을 전공한 친구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대해 알려준다고 해 따라왔다"며 "그냥 나무 기둥인 것 같은데 친구에게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아름다워 보인다"고 했다.종교에 상관없이 절은 오랫동안 한국인의 마음의 안식처였다. 1000년 넘게 자리를 지켜온 산사는 한국의 역사와 아름다움이 함축된 곳. 그 배경을 알고 나면 사찰이 주는 고즈넉함이 더 깊어진다. 이미 가 본 절도 달라 보이는, 처음 간다면 놓치지 말고 관찰해야 할 산사의 포인트를 소개한다.

유네스코는 통도사, 부석사, 봉정사,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 일곱 절을 ‘산사(山寺)’라는 이름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다. 산사는 말 그대로 산에 있는 절. 전 세계에 많은 절이 있지만, 한국처럼 산에 사찰이 있는 경우는 드물다. 다른 나라는 스님이 탁발하거나 집과 절을 오가는 경우가 많아 도심 주변에 절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한국 산사의 가치를 유네스코가 높게 평가한 이유다.



한국에 전통 사찰로 등록된 절은 약 1000개다. 널리 알려진 다른 사찰도 많은데 일곱 곳만 세계문화유산으로 이름을 올린 이유도 궁금하다. 산사 세계유산등재추진위원회는 ‘법에 규정된 전통 사찰’ ‘산지에 위치’ ‘국가 지정문화재 보유’ ‘7~9세기 창건’ ‘사찰 관련 역사적 자료의 신빙성’ ‘원 지형 보존’ ‘승려 교육기관 운영’이라는 기준에 모두 들어맞는 곳이 선정된 일곱 사찰이었다고 밝혔다.

예를 들어, 전남 순천의 송광사 역시 규모가 크고 역사가 깊은 절이지만 7~9세기에는 사찰 규모가 100여 칸에 지나지 않았고 승려도 30~40명 수준이었기 때문에 한국 불교 초기의 역사성을 담고 있다고 보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유네스코 산사 7곳불자가 아닌, 절에 대해 모르는 이들이 일곱 사찰로 여행을 떠나기 전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산사의 공통적인 구조다. 모두 조선 시대 때 중건돼 사찰의 구조가 정형화된 모습을 하고 있다.

절 입구에 도착하면 절의 출입문 격인 일주문이 나온다. 그 문을 지나면 사천왕이 지키는 천왕문이 등장한다. 마지막이 사찰의 중심으로 가는 불이문이다. 이어 탑과 몇 곳의 전각이 더 배치돼 있고 너른 마당 계단 위에 절의 핵심인 대웅전이 있다. 이 구조가 조계종이 정한 ‘산지 가람’의 주요 요건이다.

구조는 비슷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찰마다 색깔이 각양각색이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산사에 들렀을 때 꼭 빼먹지 않고 봐야 할 곳을 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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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사 대웅전에서 바라본 경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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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등산 중턱에 자리 잡은 봉정사는 주변 산이 절을 살포시 감싸안은 형세로 편안한 느낌이 든다. 오른쪽은 봉정사 일주문.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종이 봉황 내려앉은 봉정사

봉황은 왜 이곳을 골랐을까. 경북 안동 서후면에 있는 봉정사(鳳停寺)는 말 그대로 ‘봉황이 머무른 곳’이란 뜻이다. 672년 능인대사가 천등산에 절을 짓기로 결심했다. 절터를 찾기 위해 종이 봉황을 접어 하늘로 날렸는데, 내려앉은 곳이 지금 봉정사 자리다. 대웅전 앞에서 산세를 둘러보면 봉황이 쉬고 갈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절 중 가장 덜 알려졌던 곳이다. 절 규모가 작아 전각의 수도 다른 곳에 비해 적다. 유네스코는 봉정사의 규모가 너무 작다며 세계문화유산 등재 보류 권고를 내린 적도 있다. 하지만 오히려 작은 규모가 봉정사의 고즈넉한 맛을 더한다.

봉정사는 ‘한국의 건축 박물관’이라 불리기도 한다. 고려 시대 때 지어진 극락전(국보 제15호)이 있다. 한국에 남은 목조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장식인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통일신라의 주심포 양식을 따른다.

대웅전(국보 제311호)은 기둥 위는 물론 기둥 사이에도 공포가 있는 다포 양식이다. 조선 전기 건물로 추정된다. 대웅전에는 다른 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툇마루도 있다. 입구인 만세루에 있는 태극 문양과 함께 절에 스민 조선 시대 유교의 흔적이다. 1999년 방한한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가장 한국적인 풍경’을 보고 싶다며 들른 곳으로, 작지만 한국의 역사가 함축된 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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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는 일몰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태백산맥이 품은 부석사

부석사(浮石寺)에 가면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한국 절은 대개 아늑한 산속에 자리 잡고 있지만, 경북 영주 부석면의 부석사는 가파른 산등성이에 기다랗게 놓였다. 덕분에 무량수전까지 올라가는 내내 뒤를 돌아보게 된다. 부석사 입구인 천왕문에서 무량수전까지 이어진 가파른 108계단을 오르면서도 숨이 차지 않는 이유다.

압도적인 경관에 빠져 산을 오르다 보면 그 끝에 ‘無量壽殿(무량수전)’ 네 글자가 세로 두 줄로 적힌 현판이 나타난다. 고려 공민왕의 친필로 알려졌다. 무량수전 기둥은 아래와 위는 좁지만 중간이 볼록해 항아리처럼 보이는 것이 특징. 이를 배흘림기둥이라고 하는데 구조적으로 편안해 보인다.

무량수전 안에는 진흙으로 빚은 특별한 불상이 있다. 소조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45호)이다. 대개 전각 문을 열고 들어서면 불상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무량수전의 이 불상은 측면을 바라본다. 통일신라 시대 문무왕의 명을 받은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하며 동해를 수호하기 위해 동쪽을 바라보게 한 것 아니냐는 설이 유력하다.

부석사에서 차로 달리면 1시간 거리에 봉정사가 있다. 압도적인 풍경을 자랑하는 부석사와 고즈넉한 봉정사를 모두 찾아 비교해보는 것도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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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는 산속이지만 비교적 평탄한 지대에 절을 지어 단아한 전경을 뽐낸다. /조계종
●부처 진신사리가 있는 통도사

경남 양산 하북면 통도사(通度寺) 입구에는 수백 년 된 금강송 수천 그루가 있다. 그 아래를 거닐면 바람이 춤을 추고 서늘한 소나무가 반긴다. 그래서 이 길의 이름은 ‘무풍한송로(舞風寒松路)’.

통도사는 일주문부터 대웅전에 이르는 길이 평탄하다. 마치 평지에 있는 사찰이라는 착각이 들지만, 고개를 들어보면 높게 솟은 영취산이 굽어보고 있어 기분이 오묘하다. 영취산은 고대 인도 부처가 설법한 산이다. 통도사 뒤편 산이 마치 인도 영취산과 닮아 영취산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통도사라는 이름은 ‘산의 모양이 석가모니가 직접 불법을 설한 인도 영취산과 통한다’는 뜻이라는 설이 있다.

통도사의 가장 큰 특징은 대웅전에 불상이 없다는 것이다.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어 불상을 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대신 건물 뒤쪽에 있는 금강계단(국보 제290호)에 진신사리를 봉안했다. 덕분에 이곳은 모든 불교 신도의 성지. 그래서 통도사라는 이름이 ‘승려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금강계단을 통과해야 한다’라는 뜻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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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 대웅전과 그 앞에 놓인 석탑. /조계종
아름다운 다리 놓인 선암사

전남 순천 승주읍 선암사(仙巖寺)는 아름다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다리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선암사 향하는 길 계곡 위에 놓인 승선교(보물 제400호)가 그 주인공. 잘 다듬은 자연 암반을 쌓아 무지개 모양으로 만든 한국의 대표적인 아치형 다리다. 승선교가 계곡물에 비치면 마치 둥그런 원처럼 보이는데, 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이가 많다.

선암사는 조계산 자락에 자리한다. 창건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529년 아도화상이 세웠다는 기록과 875년 도선국사가 지었다는 기록이다. 선암사의 깊은 연륜은 입구에서부터 느껴진다. 고려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이곳을 거쳐 간 수많은 고승의 승탑(사리를 담은 탑)이 가장 먼저 눈에 띄기 때문이다.

눈여겨볼 만한 탱화가 곳곳에 많다. 각 전각과 암자에 보관된 불화만 100여 점이라고 한다. 대웅전 석가모니불 뒤에 걸린 탱화는 그 크기로 방문객을 압도한다. 1765년 그려진 초대형 영산회상도로, 가로 3.65m, 세로 6.5m에 달한다.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불과 8대 보살, 10대 제자, 그리고 12명의 신장상이 그려져 있다.

선암사에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뒷간이 있다. 맞배지붕에 마룻바닥을 댄 목조건물로 T자형 모습을 하고 있다. 전남 지방에서 평면 구성을 한 측간 건물 중 가장 오래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14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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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에는 국내 유일하게 남은 목탑인 팔상전이 있다. /조계종
●국내 유일 목탑 있는 법주사 

왠지 법주사(法住寺) 천왕문은 다른 절보다 더 섬뜩하다. 사천왕의 표정이 더 험악하고 눈도 더 깊어 보인다. 그럴 것이 법주사 천왕문은 조선 인조 때 벽암대사가 절을 중건하며 세운 것이 지금까지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찰 사천문 중 가장 잘 만들어진 것으로 꼽힌다.

눈을 사로잡는 것은 높이 33m의 거대한 금동미륵대불이다. 신라 제36대 혜공왕 때 승려 진표가 청동으로 주조한 후 1000여년간 유지됐다가 조선 시대 흥선대원군이 당백전(當百錢)의 재료로 쓰기 위해 훼손했다. 이후 시멘트로 지어졌다가 다시 청동으로 지었는데 부식이 진행돼 다시 그 위에 금박을 입혔다. 속리(俗理)에 따라 부처의 모습도 바뀐 셈이다.

법주사는 533년에 의신 스님이 세웠다. ‘호서 지방 제일 가람’이란 별칭답게 법주사 경내와 암자에는 국보 3점, 보물 12점, 시도유형문화재 22점 등 문화재로 가득하다. 특히 국내 유일하게 남은 목탑인 5층 건물 팔상전(국보 제55호)이 가장 유명하다. 부처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표현한 그림인 ‘팔상도’가 있는 건물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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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곡사 대광보전 앞 오층석탑은 라마교 양식을 따라 만들어 모양이 특이하다. /조계종
백범의 자취 남은 마곡사 

충남 공주 사곡면 마곡사(麻谷寺)는 사찰 중심에 계곡이 흐른다. 주변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택리지’와 ‘정감록’에는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좋은 땅으로 기록됐다. 조선 시대 세조는 마곡사를 ‘만세에 망하지 않을 땅’이라고 평가했다. 7세기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온 뒤 세웠다고도 하고, 9세기 보조선사 체칭이 지었다는 설도 있다.

대광보전 앞에 놓인 오층석탑(보물 제799호)의 모양이 특이하다. 다른 사찰 탑과 달리 상부가 금속으로 돼 있어 마치 탑이 모자를 쓴 모습이다. 라마교의 탑과 비슷하다. 고려 말기 원나라의 영향을 받을 때 라마교 양식을 본뜬 탑이 만들어졌는데,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백범 김구의 자취가 곳곳에 남은 절이기도 하다. 1896년 백범은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인을 처단했다. 이에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탈옥했고, 마곡사로 숨어들었다. 이후 머리를 깎고 한동안 승려로 살았다. 백범은 광복 후 이곳을 다시 찾아 대광보전 옆에 향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지금 향나무 왼쪽 기와집에 백범의 사진과 휘호 등이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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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우를 자유롭게 배치한 것이 특징인 대흥사. /조계종
●땅끝 대흥사 

전남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大興寺)는 한국 국토 최남단 대륜산에 있는 절이다. 대둔사(大芚寺)라고 불리기도 한다. 독특한 공간 구성이 대흥사의 가장 큰 특징. 금당천이 절을 가로질러 흐르고, 이를 사이에 두고 북쪽과 남쪽으로 마치 흩뿌려놓듯 당우를 자유롭게 배치했다.

544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했다. 여러 고승에 의해 중건을 거듭하며 교종과 선종을 모두 아우르는 대도량이 됐다. 특히 임진왜란의 승병장이었던 서산대사 이후로 사찰의 규모가 확장되었다. 이 서산대사를 기리기 위해 1789년 정조 때 지은 사당, 표충사가 있다.

대흥사에서 1시간가량 두륜산을 오르면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 제308호)을 만날 수 있다. 암반은 가로 8m, 세로 6m나 된다. 정면 중앙에는 4.2m 크기의 불상이 새겨져 있다. 10세기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1000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아직 그 모양이 선명하다.





설악이 감춰둔 또 하나의 단풍 명소 열린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2016.09월

46년만에 만경대 개방… 오색약수터~만경대 5.2㎞ 둘레길도

중국 유명 관광지인 장자제(張家界·장가계) 못지않은 비경으로 이름난 강원도 양양군 설악산 오색지구의 남설악 만경대(해발 560m)가 46년 만에 다시 자태를 드러낸다.
    
설악산국립공원사무소와 강원 양양군번영회는 19일 "원시림 보존을 위해 탐방객 출입을 통제해 왔던 용소폭포~만경대구간을 이르면 내달 1일부터 일반에 개방한다"고 밝혔다. 용소폭포~만경대 구간은 설악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지난 1970년 3월 24일부터 원시림 보존과 안전사고 예방 등을 위해 출입 통제됐다.

내달 개방 탐방로 지도
'많은 경관을 바라볼 수 있다'는 뜻을 담은 남설악 만경대(萬景臺)는 속초시 설악동 외설악 화채능선 만경대, 인제군 북면 내설악 오세암 만경대와 함께 설악산의 3대 만경대이다.

양양군 서면 오색리 흘림계곡과 주전계곡 사이에 자리 잡은 남설악 만경대의 정상부엔 가로 5m, 세로 5m의 자연 전망대가 있어 독주암과 만물상 등 '작은 금강산'으로 불리는 남설악의 빼어난 경관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40여 년간 출입이 통제됐던 만경대 탐방로는 태곳적 원시림의 모습도 간직하고 있다. 이곳이 개방되면 설악산 가을 단풍 관광의 거점인 오색약수터를 출발해 선녀탕~용소폭포~오색약수터로 이어지는 기존 3.4㎞의 탐방로가 오색약수터~만경대~오색약수터 5.2㎞ 구간으로 새롭게 단장된다. 만경대에서 오색약수터로 곧장 내려올 수도 있다.

46년 만에 열리는 '작은 금강산'… 남설악 만경대 내달 1일부터 개방
46년 만에 열리는 '작은 금강산'… 남설악 만경대 내달 1일부터 개방 - '작은 금강산'으로 불리는 남설악의 비경(境)이 46년 만에 우리 곁으로 다가온다. 설악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지난 1970년 3월 24일 이후 원시림 보존을 위해 출입 통제됐던 강원도 양양군 설악산 오색지구의 남설악 만경대(萬景臺·해발 560m)가 이르면 다음 달 1일부터 일반에게 개방되는 것이다. 석양빛을 받고 있는 사진 오른쪽 위 바위 부근이 만경대이다. 태곳적 원시림의 모습을 품고 있는 이곳이 개방되면 용소폭포~만경대~오색약수터로 이어지는 탐방로 1.8㎞를 걸을 수 있다. 오색약수터를 출발해 선녀탕, 용소폭포, 만경대를 거쳐 오색약수터로 돌아오는 '만경대 둘레길' 5.2㎞ 구간도 완성된다.
/양양군 번영회
매년 80만여 명의 관광객을 부르는 설악산 단풍의 3대 명소로는 외설악의 천불동, 내설악의 가야동, 남설악의 흘림골을 친다. 이 중 오색 흘림골 탐방로는 잇단 낙석 사고로 지난해 11월부터 전면 폐쇄 중이다. 그러자 양양군번영회와 지역 주민들은 만경대 둘레길을 개방해 관광객 유치에 도움을 달라고 설악산국립공원사무소에 요청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내 생에 꼭 봐야 할 베스트 10 답사지


《길지 않은 인생, 누군가 속삭인다.

“만일 내일 인생이 끝난다면?” 정신이 번쩍 든다.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삶의 무게는 천근만근,
우리 삶은 앞만 보고 내달리는 기관차 같다.
큰 숨을 쉬고 눈을 돌려보자. 역사가, 문화가 내 옆에 있다.
이전 세대의 나, 다른 공간의 내가 호흡했던 숨결이 느껴진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인간의 치열한 삶의 체취가 물씬 느껴지는 역사와 문화의 현장으로 떠나자.
더 늦게 전에…
선조들의 치열한 삶의 정신이 녹아 있는, 이야기와 전설이 어우러진 유적지 10곳을 전문가들의 추천을 받아 소개한다.》



○선비의 기품과 단종의 애조(哀調)가…




 

해질 녘 방문한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서원의 만대루. 1527년 서애 유성룡 선생이 글을 쓰고 후학을 양성했던 곳이다. 노을 질 무렵, 복례문(입구)을 지나 만대루(유림들이 앉아 시를 읊던 곳) 밑을 지나쳐 서원 중앙에 있는 입교당(교실) 마루에 걸터앉는다.

만대루 기둥 너머 보이는 옥빛 낙동강과 그 뒤에 있는 병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햇살을 받은 병산은 산 굽이굽이 빛이 교차하면서 한 폭의 병풍이 된다.


홍매나무, 무궁화나무, 청매나무, 350년 된 목백일홍이 어우러진 사원은 금세라도 유림들이 걸어나올 듯한 고즈넉한 분위기를 만든다. 미술사학자들이 한국 최고의 서원으로 꼽는 병산서원의 만대루는 인공 건축물이 아닌, 자연의 숲 같다. 건축구조 속 기둥은 휘어지면 휘어진 대로, 곧으면 곧은 대로, 나무 모양 그대로 사용해 자연미가 물씬 풍긴다. 기둥 주춧돌까지도 자연석을 깎지 않고 그대로 이용했고 서원 전체가 단청을 입히지 않은 나무 색 그대로여서 서애의 손때를 느낄 수 있다. 24년간 이곳을 지킨 류시석(50) 씨에게 커피 한잔 얻어먹는 건 덤.


 ‘슬픈 왕자’ 단종의 비사(悲史)와 전설이 얽힌 강원 영월군 청령포. 1452년 12세에 왕위에 오른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1457년 유배된 곳이다.


남한강 상류의 지류인 서강(西江)이 곡류하여 반도 모양의 지형을 이룬 청령포는 동·북·서쪽이 깊은 강이고 남쪽이 절벽인 천혜의 유배지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경치가 오히려 슬픈 비극과 부조화를 이룬다. 사약을 받고 단종이 짧은 생을 마감한 관풍헌에는 국내에서 가장 큰 소나무인 관음송(수령 600년·단종의 슬픈 말소리를 듣고(音), 비참한 모습을 봤다고(觀)해서 생긴 이름)이 쓸쓸히 서 있다.


 

○천년 문화재의 보고(寶庫)

불국토(佛國土)가 따로 없다. 천 길 물줄기를 한꺼번에 절벽 아래로 쏟아내듯 경주 남산 금오봉(468m)과 고위봉(494m) 두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40여 개의 계곡과 산줄기에는 100여 곳의 절터, 60여 의 석불, 40여 기의 탑이 있다. 순례길만 70여 곳. 


삼릉골로 올라가 용장골을 거쳐 칠불암으로 내려오는 산길이 전문가들의 추천 코스. 남산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암자 상선암에 있는 마애석가여래대불좌상의 살진 두 뺨과 입 언저리는 친숙한 신라인의 미소 그 자체다. 


이건무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일본 사람들까지 경주 남산을 불국토라고 생각한다”며 “신라는 불교를 통일의 원천으로 삼았으며 석굴암, 불국사 등 절정의 예술도 여기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천년고토의 유물에 관심이 끌린다면 백제의 불상을 비교해보는 것도 좋다. 서산 마애삼존불, 태안 마애삼존불을 찾아가자. 6세기 말 제작된 두 불상은 한국 최초의 마애불이자 백제의 은은한 미소를 담고 있다. 조유전 토지박물관장은 “불상은 정면만이 아니라 빙 돌아가면서 봐야 조각 자체가 뛰어난 걸 알 수 있다. 또 같은 불상의 표정을 한 사람은 미소로 보지만 다른 사람은 울음으로 보기도 하다”고 말했다.


전북 익산 미륵사지에는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를 유혹하기 위해 노래를 퍼뜨린 서동(백제 무왕)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들은 사랑을 이룬 뒤 미륵산 앞을 지나다 연못에서 미륵불을 보고 이곳에 미륵사를 세웠다. 전문가들의 추천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국보 11호인 미륵사지 석탑(서탑) 때문. 동탑은 조선시대 완전히 무너져 없어졌다가 1993년 화강암으로 복원됐다. 20세기 동탑과 1000년 전 서탑의 대비가 묘하다.


 

○동병상련의 유산



기울어져 가던 조선조 후기 동시대를 살면서 당쟁을 혁파하고 부국강병의 같은 꿈을 염원했던 군신(君臣) 정조와 다산 정약용. 두 사람에 얽힌 수원 화성과 다산초당은 그들의 ‘꿈’(수원 화성)과 ‘좌절’(다산초당)을 상징한다.


정조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 건축물이자 다산의 실사구시적 건축기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수원시 장안구 수원 화성은 화강암이 아닌 전돌(얇은 돌)로 성곽을 쌓아 경고하면서도 실용미가 돋보이는 조선 후기의 걸작. 


정약용이 40세에 황사영 백서 사건(신유박해 이후)에 연루되어 58세까지 무려 18년간 유배생활을 했던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마을 다산초당. 그곳에 가면 목민심서를 쓰고 화성 행공을 위해 거중기를 설계하던 다산의 나라 사랑과 한(恨)이 서리서리 녹아 있다.


다산초당, 동암, 서암, 천일각 등의 건물과 주변 다산사경으로 불리는 정석바위, 약천, 다조, 연지석가산, 백련사 주변 동백림(천연기념물 제151호)도 한 번에 둘러보자.



○민족 기상의 유산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가보자. 한반도에도 원시의 흔적이 살아 숨쉬는 울산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암각화와 반구대 암각화가 나온다. 천전리 암각화에는 기하학적 무늬와 고래, 상어, 사슴, 반인반수 등의 이미지가, 대곡천 하류의 반구대 암각화에는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성기, 고래 잡는 사람, 함정에 빠진 호랑이 등이 새겨져 있다. 


암각화 속 사냥꾼의 역동성은 ‘불멸의 이순신’의 기백으로 계승된다. 충무공 유적지인 경남 통영시 한산도 제승당은 삼도수군통제사를 맡은 장군이 한산도 본영을 세운 곳. 유람선을 타고 한산도에 이르는 길, 한산도 나루터에서 제승당으로 향하는 해안길의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불멸’의 꿈을 잃어버린 왕국도 추천됐다. 사라진 왕국 대가야의 비밀이 잠든 경북 고령군 지산동 대가야 고분군. 5세기 전후 대가야 왕족들의 무덤 수백 기가 있다. 꼭 봐야 할 유물은 5세기 후반 조성된 44호분. 국내 최초로 확인된 대규모 순장 고분으로 대형 석실 3개, 소형 석곽 32개로 이루어졌으며 36명의 인골이 발굴된 곳이다.


○ 해학의 유산

추사 김정희의 생가인 추사고택과 해남 윤씨의 녹우당. 조선후기의 실학자이며 대표적인 서예가였던 김정희의 생가인 충남 예산군 신암면 고택은 예술가의 숭고한 혼이 담긴 공간. 북쪽으로 600m쯤 올라가면 천연기념물 제106호인 백송을 볼 수 있다. 이 나무는 우리나라에 몇 그루 없는 희귀종으로 남도 명문 해남 윤씨 윤선도 윤두서의 종가인 전남 해남군 해남읍 녹우당 앞 높이 30m 은행나무와 묘한 동질감이 느껴진다. 녹우당에서는 조선시대 초상화의 최고 명작 윤두서의 ‘자화상’을 꼭 챙겨 볼 것.



글=김윤종 기자 3Dzozo@donga.com     디자인=김성훈 기자


○자문에 응해 준 분들

고은기 연세대 국학연구원 교수, 김봉건 국립문화재연구소장, 김성구 국립 경주박물관, 김우림 서울역사박물관장, 신광섭 민속박물관장, 신영훈 한옥문화원장, 안휘준 문화재위원장, 이건무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이태호 명지대학교 교수, 조유전 토지박물관장, 최광식 고려대 박물관장 (가나다순)

혜곡 '최순우 옛집'을 찾다

여행일자: 2008년 10월. 다음 블로그에서 옮김

 

      <배경영상 또는 음악>:  - 옛동산에 올라 - 이은상 시, 홍난파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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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미술관을 나와 건너편에 보이는 서울 성곽을 올라가 보았다. 성곽 위에서 보니 성곽 그림자가 드리워진 城北洞(성북동) 계곡 건너편 언덕 숲속으로 뿌연 매연 속에 간송 미술관이 흐릿하게 보였다. 성곽은 옛것도 제법 남아 있었지만 나중에 보수한 것이 상당수 있었다. 잠시 산책을 한 후, 삼선교 쪽으로 내려오다 [최순우 옛집]을 찾아갔다.

 

.서울 성곽-위쪽으로 가면 성균관 뒤쪽->청와대로 연결된다.

‘National Trust(국민신탁) 운동’의 결실 1호

[최순우 옛집]은 삼선교에서 700미터 올라가다 좌측으로 난 샛길 골목 어귀에 있다. 이곳에서 최순우 선생은 많은 藝人(예인)과 문화인들을 만나고 글을 쓰셨다 한다. 대문을 들어 가 집안 구조를 살펴보면 조그만 안뜰을 중심으로 한옥 처마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는 것 같은 ㅁ(미음자)형 집이다.

 

최순우 옛집 입구
.최순우 옛집의 그리 넓지 않은 안뜰

 

[최순우 옛집]은 우리나라의 내셔날 트러스트 운동의 결실 1호로 기록된 곳이다. National Trust(국민신탁) 운동이란 새로운 시민환경 운동으로서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귀중한 자연과 문화유산을 보존하자는 사회적 운동을 말한다. 최순우 선생이 돌아가시고 사시던 집이 남의 손에 넘어가 헐릴 위기에 놓이자, 시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이 집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한다. 국립박물관장을 역임하신 고 최순우 선생은 우리 문화를 가르치시고 알리는 데 많은 일을 하신 분으로,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서서]라는 그의 책을 통해서 그와 만난 일이 있다.

 

 

오른쪽 대문채를 지나 담 구석에는 돌로 만든 나지막한 문인석이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나그네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서 있다. 마루 입구에 전시된 서간들과 전각(특별전시 중인 이기우 님 전각)을 구경하고 안방을 창문 틈으로 들여다보았다. 방안에는 전시물들이 있긴 하지만 내부로 들어갈 수는 없고, 방안과 마루 내부는 사진 촬영이 안되니 먼 발치에서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껴볼 수밖에 없다.

 

 

‘배려해 주는 마음’

뒤뜰로 돌아가면 조그만 돌거북을 얹어 놓은 맷돌과 돌확이 눈에 들어온다. 맷돌에서 내려온 물이 돌확에 담겨 있어 식물들의 수반 구실을 하고 있다. 후원 뒤쪽에는 작은 키의 소나무 몇 그루와 발갛게 익은 감나무가 있었고, 바닥에는 도토리들이 떨어져 있었다. 후원에는 상사화, 생강나무 등 이름표를 매단 여러 식물들이 심어져 있었다. 계절마다 다 양한 꽃과 나무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을 분위기 나는 최순우 옛집의 장독대 풍경

 

後園(후원) 오른쪽 구석에는 장독들이 얌전히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는데, 앞쪽 장독들은 국화꽃을 안고 서있었다. 돌의자를 몇 개 빙둘러놓아 만들어진 작은 공간에 음료수와 컵이 놓인 작은 탁자가 있었다. 사람들이 차 한 잔을 나누며 다리도 쉬고 있었다. 비록 가옥 내부는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방문한 사람들을 배려해 주는 문화의 향기가 우러나는 한옥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침 근대 전각의 대가 철농 이기우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기에, 그의 전각을 모조한 기념 스탬프와 최순우 선생의 얼굴 모습이 담긴 기념 스탬프도 받았다.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라는 최순우 선생의 책과 한옥 관련 자료를 구입하였다. 관심있는 책을 손에 넣었더니 며칠은 차오르는 행복감에 뿌듯해 질 것 같았다.   

 

.옛집 방문 기념 및 이기우 님의 전각展 기념 스탬프

 

.도로로 튀어나와 통행에 위험을 주고 있는 축대


쫓겨난 ‘성북동 비둘기’

[최순우 옛집]을 나와 길을 내려오다 보니 비탈에서 발을 뻗어내린 축대가 길을 막았다. 마치 성벽의 석축처럼 생긴 것이 사람 다니는 길을 턱하니 막고 있었다. 시각 장애인에게는 큰 위협이 될 것 같았다. ‘걷고 싶은 거리’가 되려고 하기 전 ‘보행자를 위한 거리’가 먼저 되어야 할 것 같다. 소외된 것은 사람뿐이 아니었다. 쫓겨난 ‘성북동 비둘기’들이 전깃줄에 매달려 있었다.

 

 ‘성북동 비둘기’    -  김광섭 -   <1968년>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 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鄕愁)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사라진 추억의 장소’

삼선교에 거의 다 왔을 무렵 7~8층 높이의 ‘나폴xx 과자점’ 빌딩이 웅장하게 솟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쪽 벽에 창문이 있었지만 1~2 층을 제외한 건물의 대부분은 검회색 외벽으로 막혀 있었다. 건물 외양에서 대화를 거부하는 답답함을 느꼈다. 이름은 ‘나폴xx ’그대로였지만 예전 그 모습이 아닐 뿐더러 예전 그 자리도 아니어서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이미 사라진 혜화동 로터리의 ‘아카데미 빵집’ 과 ‘동양서림’과 마찬가지로 나에게는 사라진 추억의 장소였다.

.답답함이 느껴진 ‘나폴~ 과자점’ 외벽

 

빠르고 멋지게 생긴 최신식 지하철이 덜컹거리며 지나던 옛 전차를 대신할 수 없는 것처럼, 크고 웅장하고 새로운 것이라고 해서 추억인 담긴 옛것을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움은 마음속에 담아 둘 수밖에 없었다.

(끝)  

 

 

간송(澗松) 미술관’에서 보았던 것.

여행일자: 2008년 10월. 다음 블로그에서 옮김

      <배경영상 또는 음악>:  Come September -빌리본 악단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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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澗松) 미술관    참조링크: 간송미술관 - 나무위키

간송 미술관은 간단히 말해 우리문화재의 寶庫(보고=보물창고)이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귀중한 문화재의 상당수가 여기에 있다. 국보급 문화재만도 10여 점이 넘고 우표에도 등장하는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과 훈민정음 해례본, 동국정운 원본, 신윤복의 미인도와 김득신의 파적도, 겸재 정선의 작품 등 국보 12점, 보물 32점, 서울시 지정문화재 4점 등 한국의 그 어느 박물관에 못지않은 준 높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미술관 입구를 들어가는 모퉁이에 다다를 즈음 뱀꼬리처럼 늘어선 사람들의 줄이 보였다. 마침 모 방송국에 ‘바람의 화원’이라는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이 등장하는 드라마가 있어서인지 이 전시회에 구경꾼이 더 많이 모인 듯하다. 이른 시간인데도 벌써 사람들이 이렇게 줄을 많이 섰다니... ‘아! 미술관쪽을 먼저 보고, 동네 구경은 나중에 할 걸…….’ 하는 때늦은 후회가 들었다. 뱀꼬리 같던 긴 줄이 줄어들며 미술관에 입장하기까지는 한 시간 남짓 시간이 더 걸렸다.

 

.智拳印(지권인=손가락을 말아쥐고 있는 수인(手印)을 하고 있는 비로자나 불상
.서울 도 심 속이지만 깊은 숲속에 온듯한 간송 박물관 내부

간송 미술관 경내는 숲이 제법 우거져 있어 도심 속 別天地(별천지)인 듯 했다. 숲속 이곳저곳에는 보물찾기할 때 보물을 숨겨 놓듯이 文人石, 호랑이 石物, 石座佛(석좌불-앉아 있는 모습의 돌부처), 삼층석탑 등 몇 가지 石物들이 감춰진 듯 서 있었다. 미술관에 들어가기 전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는 듯하다. 

 

작고 소박하지만 우리문화재의 걸작들을 수장하고 있는 ‘보화각’  참조링크:간송미술관 - 나무위키

전시가 열리고 있는 보화각은 70년 전인 1938년에 지어진 2층 콘크리트 건물이다. 한쪽에 둥근 테라스가 살짝 달려있는 직사각형 건물인데, 창은 직사각형으로 큼지막하게 뚫려 있고 도난과 방습에 도움이 되게끔 아래층 창에는 바깥쪽으로 철문을 덧대었다. 건물 외벽은 누리끼리한 데다 빗물 흘러내린 자국이 묻어 거무튀튀하였고, 구석진 곳은 거미들이 집을 지어 놓았다. 알록달록 단풍이 든 담쟁이가 건물 외벽을 감싸고 올라가 소박한 건물의 모습에 고풍스러운 맛을 더해 주었다.

 

.귀여운 호랑이상이 궁금한 듯 얼굴을 내 밀었다. 
.담쟁이덩굴이 기어오르고 있는 보화각 외벽

‘보화각’은 간송 전형필 선생이 어려운 여건이었던 일제 강점기 하에서도 우리나라의 귀중한 문화재를 수집 보관한 곳으로, 작고 소박하지만 우리나라의 보물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보화각 설립 70주년 기념 書畵大展(서화 대전)]의 전시 의도는 세종대왕 시대부터 고종에 이르는 약 오백년간의 書畵 중 각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을 보여주는 자리라고 한다. 글씨를 볼 줄 모르는 나로서는 그림에만 중점을 두었는데, 畵題(화제)라든지 작품에 대한 설명은 구입한 圖錄(도록)을 통해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시험 전날 벼락공부하는 학생처럼  이 전시회를 보러가기 전에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 이라는 책을 다시 읽어 보았는데, 이런 한국 미술 전시회를 보러 가기 전에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전시된 ‘보화각’의 작품 중 - 미인도, 마상청앵도, 풍죽 

전시장(보화각)은 전시된 작품의 무게나 방문한 사람 수에 비해서 너무나 좁았다. 작품이 걸린 벽쪽 외에 전시장 가운데에도 진열장이 배치되어 관람 통로가 좁아진데다가 사람들이 너무 많아 어깨가 부딪힐 정도였다. 한편, 전시된 대분의 그림의 크기가 노트 크기 정도로 그리 크지 않아서, 서너 사람이 그림을 보느라 진열장 앞을 가로막으면 나머지 사람들은 어깨 너머로 보거나 진열장 측면에서 흘낏 볼 수 있을 뿐이었다. 한마디로 제대로 그림 감상하기가 어려웠다.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

그림이 다소 큰 그림인 신윤복 ‘미인도’ 앞에서는 감상을 대기하는 줄이 밀려 있다. 역시나 사람들은 보아서 알기 쉽고 자주 본 것에 관심과 흥미가 있게 마련이다. ‘미인도’에 그려져 있는 미인은 요즘의 미적 기준으로 보아도 미인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 미인상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요즘은 큰 눈에 쌍꺼풀, 짙은 눈썹, 거기에다 짙은 화장에다 요란한 귀걸이를 걸치는 게 미인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던가. 그러나, 만약 그 당시의 사람들이 오늘날의 미인의 모습을 보았다면 오히려 ‘복 없는 여인’이나 ‘惡女(악녀)’라고 손가락질 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단원 김홍도의 ‘馬上聽鶯(마상청앵-말 위에서 꾀꼬리 소리를 듣다)’

단원 김홍도의 ‘馬上聽鶯(마상청앵-말 위에서 꾀꼬리 소리를 듣다)’은 봄나들이 나섰던 젊은 선비가 말을 타고 가다가 길가 버드나무에서 꾀꼬리 한 쌍이 노니는 것을 보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꾀꼬리 소리에 취한 선비가 문득 멈춰 서서 고개를 들어 소리가 들리는 쪽을 올려다보고, 말구종 총각도 덩달아 멈춰 그 쪽으로 시선을 옮기고 있다. 우상에서 좌하로 내리 꽂히는 대각선 구도 속에 버드나무가지와 꾀꼬리가 상하로 배치되어 있다.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멋진 배치 구도가 아닐 수 없다.

 

이 그림에 대한 설명이랄 수 있는 畵題(화제)는 단원 친구 이인문이 지은 글로 알려져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리따운 사람이 꽃 밑에서

 천 가지 소리로 생황을 부는 듯하고

 시인의 술동이 앞에 황금 귤 한 쌍이 놓인 듯하다.

 어지러운 금북(북은 베 짜는 도구)이 버드나무 언덕 누비니,

 아지랑이 비 섞어 봄 강을 짜낸다.“

 출처: 간송문화 도록 해설에서


꾀꼬리 소리를 생황의 봄노래로, 황금빛 귤은 꾀꼬리에 비유한 것이다. 거기에다 버들가지 사이로 오르내리는 새의 움직임을 비단을 짜는 북의 움직임으로 묘사한 솜씨는 보통이 아니다. 이 그림을 제대로 읽어낸 사람의 畵題가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肝膽相照(간담상조), 以心傳心(이심전심)의 세계이다. 

 

.이정의 ‘風竹(풍죽)’-그림출처:인터넷

조선 최고의 묵죽화가인 이정의 ‘風竹(풍죽)’은 강한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대나무의 모습을 표현한 것인데 그림 앞에 서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바람 맞고 있는 대나무 잎들의 절묘한 표현과 배경으로 옅게 처리된 대나무 줄기들이 현장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황집중의 ‘포도'-그림출처:인터넷

‘文人畵(문인화)’는 그림을 읽어야 한다.

위에 언급한 작품 외에도 ‘포도’ ‘괴석 ’산수도‘ 등 조선시대 중 각 시대를 대표하는 여러 그림들을 훑어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圖式的으로 느껴지는 文人畵(문인화)는 그림 속에 나오는 그림이 상징하는 바를 알아야 이해가 되었다. 예를 들어 ‘오이와 고슴도치’는 ‘대대손손 자손이 이어지번영하라’는 의미이고 ‘포도’ 역시 자손을 상징한다. 그 외에도 ‘나비’는 장수를, ‘여치’는 부지런한 아낙네를 상징한다고 한다. 문인화는 그림을 읽어 내어야 한다는 말을 실감하였다. 우리나라 오천원권에도 이런 대나무, 수박, 여치, 도라지꽃 등 문인화가 등장한다.

.정선의 '草田舂黍(초전용서-풀밭의 방아깨비)'

안타깝게도 정선의‘초전용서-풀밭의 방아깨비)’에 보이는 것처럼 습기에 그림들이 눌어붙거나 벌레 먹은 작품들도 볼 수 있었다.

 

전시회를 보러온 사람들이 밀려오므로 나만 조금 더 오래 보겠다고 그 자리를 고수할 수 없었기에  模寫畵(모사화)라도 살 요량으로 입구로 빠져 나왔다. 사고자 했던 [마상청앵도]는 품절이라 구하지 못하고 다음을 기약했다.

  

‘그림의 어려운(?) 한자 제목은 누가 붙였나’

그림에 붙여진 제목들은 한자가 대부분으로 작가가 붙인 것은 드물다 한다. 예를 들어 ‘馬上聽鶯(마상청앵)‘, ‘林間急灘(임간급탄- 숲속 시내의 급한 여울’)처럼 이런 제목들은 후대의 소장가나 학자들이 그림 속의 화제나 내용 등과 관련하여 붙인 것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 나마 다행스럽게  한자 제목 옆에 한글 설명을 달아 놓았다.

 

‘간송미술관’에서 느낀 관람의 불편함과 아쉬움   참조 링크: 간송미술관 | 간송미술문화재단

전시 장소의 협소는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감상을 위해 입장객들의 수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인터넷 사전 예약제 등을 통해 입장 시간을 안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한편, 전시관인 보화각 입구의 좁은 골목에 있던 공작새 새장과 보화각 현관 앞에 떡 버티고 있던 중국풍 사자상은 이 곳 간송 미술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 보화각 입구에 떡 버티고 서 있는 중국풍(?)의 사자상
.정원에 있는 또 다른  사자상

(사족) 
미술관 내부는 촬영금지라, 옛그림들은 인터넷 서핑으로 가져 온 것이다. 

(계속)

 

   간송 미술관에서 날아온 가을 편지

     여행일자: 2008년 10월. 다음 블로그에서 옮김

         <배경영상 또는 음악>:  옛날은 가고 없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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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전형필과 간송미술관인 '보화각'       참조링크: 간송미술관 - 나무위키

가을이 내려 앉아 가로수 나무에도 단풍이 울긋불긋 물들어 있던 며칠 전, 간송 미술관에서 [보화각 설립 70주년 기념 書畵大展(서화 대전)]이 열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간송 미술관은 봄가을(5월 중순,10월 중순)에 전시회를 열고 있는데, 가을 전시회 소식이었던 것이었다. 간송(澗松) 전형필 선생은 일제강점기 때 문화재가 일본으로 반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고서화와 골동품 등을 수집했다. 1934년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개설하여 본격적으로 골동품과 문화재를 수집하는 한편, 1938년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개설하여 서화뿐만 아니라 석탑·석불·불도 등의 문화재를 수집·보존하는 데 힘썼다.  참조링크:간송 전형필

간송미술관 입구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그립던 친구를 찾아가는 마음으로 일요일 아침 고속버스에 올랐다. 고속버스를 내린 후 간송 미술관이 있는 성북동을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삼선교’로 가기로 했다.  

 

나와 인연이 있던 ‘三仙橋(삼선교)’ 

1966년 초겨울 이제 만 12살된 시골 소년이 서울의 중학교 입학 시험을 보기위해 난생 처음으로 서울에 도착했다. 청량리역에 내리니 10시간 이상의 기차 여행 끝이라 배도 고팠지만 겨울인지라 寒氣(한기)도 느꼈던 것 같다. 내가 살던 시골보다 서울엔 높은 건물들이 많을 것이라 예상했던 것이지만, 소년의 눈에 놀랍게 비친 것은 네온사인과 전봇대에 붙은 모 제약사의 감기약 ‘x피린’ 광고였다. 시골에서는 한번도 보지도 못했던 네온사인과 광고판이었던 것이었다. 청량리에서 전차를 타고 친척이 살던 ‘삼선교’를 가기 위해선 종로4가에서 돈암동행 전차를 갈아타야 했다. 당시 돈암동행 전차 종점은 미아리 고개 밑 태극당 빵집 앞이었다.

 

그 당시 ‘삼선교’에서 전차를 내려 성북동쪽 언덕을 올라가 친척이 살던 한옥집에 며칠 신세를 졌었다. 이것이 나와 삼선교의 첫 만남이었다. 그 후 혜화동에 있는 학교를 다니면서 삼선교와의 인연은 이어졌다. 삼선교 남동쪽에 있는 한성대 바로 앞 동네 자취방에서 아침 저녁으로 걸어서 이곳을 지나갔다. 몇 년 후 미아삼거리 쪽으로 이사를 간 후로도 하루에 두 번씩 20번(아륙교통) 시내버스로 이곳을 지나갔기에 나의 중고 시절은 줄 곳 삼선교를 거쳐갔던 것이다. 당시에 이곳을 지나 다녔던 버스회사로는 범진여객, 승원여객, 아륙교통, 한남여객, 한진운수 등이 있었다. 

.70년대에 다녔던 시내버스-이곳은 당시 '서울시민 회관' 앞. 사진 출처: 인터넷 서핑

 

三仙橋(삼선교)’에서 세 분의 신선은 커녕 ‘삼선교’도 찾아볼 수가 없더라.

.지하철 입구 겨우 괄호 속에 쓰 여 있는 '삼선교' 글자

 

지하철 안내도에서 ‘삼선교’를 찾으니 삼선교로 써있어야 할 곳에는 ‘한성대입구역’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정작 ‘삼선교’라는 글자는 ‘한성대입구역’에 내린 다음에서야 볼 수 있었다. ‘한성대입구역’ 이름 다음 괄호 속에 (삼선교)라고 쓰인 것을 겨우 찾아내었다. 그것도 눈에 불을 켜서 열심히 찾아야 볼 수 있엇다. 삼선교역을 나와 길거리의 표지판을 보아도 여기저기에 ‘간송미술관’의 표지판이며, ‘최순우 옛집’의 표지판은 있었지만, ’삼선교‘는커녕 ’삼선‘이라는 글자도 좀체 찾아보기 어려웠다.

.城北川 (성북천)  복개도로 (위쪽이 삼청동 방향)

 

’삼선교‘에 도착한 시각은 아침 10시가 되기 전이었다.10시부터 미술 전시장이 열린다하니 간송미술관까지 마을버스를 타고 갈까도 생각하였지만, 걸어서 10여분 거리이니 오랜만에 여기에 온 김에 나는 길거리를 구경하며 걸어가기로 하였다.

 

城北川(성북천) 복개도로 옆 인도에 누군가 국화꽃 화분을 내놓아 향기나는 꽃길이 되었다. 노란 국화와 자주빛 국화꽃들이 환한 얼굴로 반가운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城北川 (성북천=도성 북쪽을 흐르는 개천의 뜻) 의 내력.

 

‘城北川(성북천)’은 어디에?

그 당시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흰 泡沫(포말 ,물거품)을 띄며 흘러내리던 성북천은 이젠 복개도로가 되어 흔적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느 누가 ‘삼선교는 성북천을 건너는 다리’라고 설명해 주지 않으면, 이 도로 밑으로 개천(성북천)이 흐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을까? 아울러 경복궁 동쪽의 복개도로 아래로 三淸川이 흐르고 있음을 아는 이가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도 겹쳐 지나갔다.

.60-70년대의 모습이 그려진 담벼락 벽화 -선술집-
.옛 영화 포스트를 그려 놓은 블록 담벼락

 

나의 옛 기억을 확인시켜주려는 듯이 도로 옆 블록 담벼락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누군가는 조악한 그림이라 할른 지 몰라도, 옛 시절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작가의 마음이 전해져 왔다. 조금 더 가다보니 길모퉁이에 이제는 보기 드문 공중목욕탕이 나타났다. 제대로 된 시간 여행을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보기드문 공중목욕탕

 

그 당시 삼선동쪽 언덕 꼭대기엔 수도 펌프장(pump 가압시설)이 있어 가정집 물이 잘 나오게 수압을 가압시켜 주었었다. 머리를 돌려 언덕배기쪽에 있던 친척집이 있던 자리를 떠올려보며 그 시절 시간 여행을 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얼기설기 얽힌 전선줄과 어지럽게 배치된 벽돌집들이 시야에 들어오자 머릿속에 맴돌던 영상은 사라지고 과거로의 시간여행은 그걸로 끝이었다.

.아직 골목 안쪽에 한옥들이 남아 있긴 하지만, 전신줄이 어지러운  언덕쪽 모습.

(계속)

명동 스쳐 지나가기 -2-

글쓴 일자: 2008.10.25.(다음 블로그에서 옮김)

 

(노래: 사월과 오월 - 옛사랑, 화(和), 바다의 여인)  :추후 링크가 끊어지면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 나올 수도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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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날 젊은이들이 장발을 한 채로 고고장을 드나들었던 사보이 호텔의 흔적을 찾기 위해 명동길을 둘러보았다. 한때 국내 최고의 예술 극장 무대였던 명동 예술극장(구 시공관)은 복원공사 중이었다. 명동 성당 길로 돌아가다 보니 명동 로얄호텔이 있었다. 70년대에는 장발족들이 이곳 고고장을 메웠을 것이었다. 30여 년 전 그때 그 시절의 고고파티장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떠들썩하고 먼지 자욱했던 고고파티장 회상 장면이 잠깐 지나간 후, 그 당시 장발 단속에 걸려 파출소에서 갇혔을 때의 상황과 연결되어져서 바로 답답합이 느껴졌다.

 

(좌)명동성모 병원이 보이는 길, (우)명동 성당의 붉은 벽돌의 양관

일부러 찾아 가본 명동 성당은 안타깝게도 보수 공사로 인해 철골 구조물 사이에 끼어 신음하고 있었다. 철골 대를 받쳐 놓은 종탑 부위는 상처가 난 듯 중환자의 모습으로 드러나 있다. 아름다웠던 종탑의 이전 모습을 크게 인쇄하여 흉물스런 철골 모습을 가려주었더라면 좋을 것 같았다. 이처럼 문화재 보수 공사를 할 때는 관광객을 위해 가림막에라도 보수 이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서비스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나마 성당 입구 우측의 붉은 벽돌색의 양관 건물과 좌측의 주교관이 높다란 빌딩 사이로 옛 모습을 살짝 보여주어 아쉬움을 덜어주었다.

 

. (좌)보도 블럭 연석의 무당벌레, (우)명당 성당 입구의 성모상과 기도처

보도블록과 차도 사이에는 무당벌레 모습의 돌기둥이 보도 경계를 따라 놓여져 있다. 도시 공간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즐거운 마음이 들었다. 조금 전 문화재를 보러온 사람들을 배려 부족에 대한 섭섭했던 느낌은 이 무당벌레 보도 경계석과 파란 하늘을 보니 금방 녹아 없어져 버렸다.
명동 성모병원 앞에 있는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기도를 올리는 모습의 신자들의 모습을 잠깐 보고, 중앙 극장 쪽을 가려했으나 공연 시간이 가까웠기에 그곳은 가지 못하였다.

YWCA 후문을 따라 내려가니 향린교회가 보인다. 70년대 당시 반골적인(?) 인사들이 주최했던 세미나와 기도회에 참석하곤 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중 생각나는 분은 전신 화상의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키에르케골에 대한 강의를 해주셨던 채규철 선생님이 생각났다.

 

(좌) 김태풍 님                                                               (우)백순진 님

드디어 YWCA 뒤편 ‘청개구리’의 태동지인 ‘마루’홀에 들어갔다. 수많은 포크 스타들이 이 곳에서 노래하고 흔적을 남겼다. ‘마루’홀 입구에서는 예매 담당자가 신분증을 대조하며 예매 리스트를 확인하고 입장표를 주었다. 공연 시간이 가까워서인지 예매 담당자가 가지고 있던 예매 리스트는 오신 분들의 명단이 거의 체크된 상태였다. 담당자는 ‘4월과5월’의 공연 팸플릿과 사오모 모임 안내가 씌어진 명함 크기의 금색 card를 주었다. 

4월과5월의 주역이신 학무님(백순진 님)과 태풍님은 관객으로 오신 손님과 인사와 담소를 하시고 계셨다. 나도 인사를 하니 태풍님께서 포도주를 손수 주신다. 학무님은 약간 술기운 이 오르셨는지 아니면 공연 전 긴장의 탓인지 약간 상기된 듯 보였다. 나는 술을 감사하게 받고 사인북을 펼치고 두 분께 기념 사인을 받았다. 안면이 있는 사오모 회원과 청개구리, 바람새 회원과도 인사와 악수를 나누고 사인을 받았다.

 

'4월과 5월'의 앨범 자켓과 모임 걸개 banner

일반 회원이 많이 오셔서 공연 좌석이 모자랄까봐 밖에서 기다리다가, 공연 시작 바로 전에서야 하나 남아 있던 앞자리 한쪽을 차지했다. 마침 앉은 자리 바로 앞에는 카페 지기인 훈장님이 계셨다. 무대 정면은 아니지만 오히려 앞자리인데다가 ‘4월과 5월’님이 연주하는 쪽이어서 두 분의 노래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들을 수 있었다.

 

intro background로 흐르던 잔잔한 드럼 소리와 건반 소리가 잦아들고 이윽고 ‘디디딩 딩딩~' 기타 울림이 터져 나왔다. ‘4월과5월’ 두 분의 노래가 시작 되었다. [바다의 여인]이었다. 
 

(노래): 바다의 여인 -4월과5월-' : 추후 링크가 끊어지면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 나올 수도 있으며, 음악을 들으려면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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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여인 / 사월과오월 (1976)
바닷가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
바닷가에서 추억을 맺은 사람
손잡고 해변을 단둘이 거닐며
파도소리 들으며 사랑을 약속했던

그러나 부서진 파도처럼
쓸쓸한 추억만 남기고 가버린
바다의 여인아

손잡고 해변을 단둘이 거닐며
파도소리 들으며 사랑을 약속했던
그러나 부서진 파도처럼
쓸쓸한 추억만 남기고 가버린
바다의 여인아

그러나 부서진 파도처럼
쓸쓸한 추억만 남기고 가버린
바다의 여인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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