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음악> Santa Lucia -파바로티- : 추후 링크가 끊어지면 음악이 안 나올 수도 있음
동영상이 안 나오거나 음악이 안 나오면 

https://www.youtube.com/watch?v=S7WtpYrM1dU <=요걸 클릭

 

과거로의 시간 여행-폼페이-

여행일자: 2006년 01월. 글쓴 일자: 2008.01.07.(다음 블로그에서 옮김)

 

 

 

태양의 도로 A1 고속도로

오늘은 이탈리아 반도 남쪽에 있는 나폴리와 폼페이를 가는 날이라 다른 때보다 더 일찍 모닝콜이 왔다. 졸린 눈을 비비며 세수를 하고 정신을 차렸다. 호텔 식당에서도 이른 시간에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특별히 배려해 주었다. 서두른다고는 하였지만 그래도 출발할 때는 이미 해가 떠올라 있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A1 고속도로를 타고 남으로 내려갔다. 앞쪽에서 비치는 햇빛 때문에 앞자리에 있던 나는 눈이 부셔 눈을 제대로 못 뜰 정도였다. 전망 좋은 자리로 생각하여 운전기사 바로 뒷자리에 앉았던 것이 실수였다. 마침 좌석에 여유가 있어 약간 뒷자리로 했던 이동하였다. 나폴리까지 내려가는 동안 소위 ‘태양의 가도’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고속도로에는 끝없이 햇빛이 쏟아 내려 반짝거렸고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도로에 반사되고 산란되는 햇빛 때문에 그것을 보고 있는 나까지도 정신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두 시간 마다 운전기사는 휴식하도록 규정되어 있어 휴게소에 들렀다. 차에서 내려 바깥에 나가 보니 잠시만 더 오래 있으면 일광 화상을 입을 것 같아 용무만 보고 얼른 차로 돌아 왔다.

 

 

             갈색 지붕을 가진 성냥갑 모양의 집과 대조를 이루는 푸른 바다

 

파란 하늘, 푸른 바다와 절묘한 대조를 이루는 노란 오렌지, 붉은 지붕의 집

빛나는 햇빛 속을 몇 시간 동안이나 달리다가 오렌지 나무가 길가나 밭 여기저기에 많이 보일 때쯤 버스에서 내린 후, 폼페이로 가는 소렌토 행 기차로 갈아탔다. 기차 내부 출입구 문 위에는 다음 행선지와 타고 있는 기차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LED 패널이 설치되어 있는 걸로 보아 제법 현대식 운행 안내 시스템을 갖춘 것 같았다. 하지만 기차 유리창은 바깥 풍경이 잘 안 보일 정도로 온통 스프레이로 그려진 낙서투성이였다.

 

차창 바깥으로 보이는 오렌지 밭엔 노란 오렌지들이 달려 있고 좀 멀리 둥그런 활모양의 바다가 보였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알고 보니 산타 루치아 만이었다. 소렌토까지 가는 중간 기차역 주변의 시가지 벽에도 온갖 낙서가 보였다. 과연 이탈리아는 낙서 천국(?)이었다. 소렌토 시가지의 가로수는 노랗게 익은 오렌지 나무였다.  대개의 주택은 붉은 갈색의 지붕으로 되어 있어 푸른색의 바다와 파란 하늘색에 절묘한 대조를 보였다.

   

 

 

     귤이 달린 오렌지 나무와 푸른 산타 루치아 만

 

시간이 정지되어 버린 비참한 현장을 찾아서

폼페이 매표소를 지나면 시간은 2000 여 년 전의 폼페이로 돌아가게 된다. 과거로의 시간 여행이 시작된다. 서기 79년 8월24일 2만 인구가 살던 폼페이가 베스비우스 화산 폭발로 화산재 등 화산 분출물에 묻혔다. 먹고 춤추고 노래하던 삶의 터전이 화산재로 묻혀 버리는 천지 재앙이 일어난 것이었다. 엎드려 꼬꾸라진 채 묻혀 죽은 사람, 아이를 끌어안고 죽은 엄마 등 비참한 현장은 그대로 박제가 되어버린 듯 그 당시 시각에 정지되어 있는 것 같았다.

 

 
화산 분출물에 묻혀 있던 사람(석고로 뜬 형태)


 




엎어진 채로 묻힌 사람 모습(석고로 재현한 형태)

 

 

화산 폭발이 멈추었을 때 폼페이는 화산재 등 화산에서 흘러나온 물질 더미가 깊이 6~7m 두께로 도시 곳곳을 뒤덮으면서 일종의 진흙 용암으로 굳어졌다. 폼페이의 유적은 16세기말에 라치비타라고 알려진 구릉 밑에 터널을 팠던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폼페이에서 벌어졌던 화산 참사의 목격담은 대(大)플리니우스의 조카 소(小)플리니우스가 미네눔의 로마 함대 사령관이었던 대플리니우스의 죽음에 대해서 묻고 있는 타키투스에게 쓴 2통의 서신에 생생하게 기록되었다고 한다.

                 

 

                곡물의 부피를 측정하기 위한 당시의 계량기(計量器)

 

사람 사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 같다.

 

폼페이를 둘러보면 급수시설, 배수 시설은 물론 공회당, 재판소, 신전. 목욕탕, 여관, 유곽(여인의 집), 시장, 공정 거래소, 원형극장 등이 있고 빵 가게, 곡물 가게 등 오늘날에 보아도 대단할 정도였다. 야광 돌을 마차가 다니던 길바닥에 박아 두어 밤중에 길을 표시하도록 하였다던 지, 비가와도 발이 젖지 않도록 징검다리 모양의 도로 건널목을 만들었던 것을 보면 당시 사람들의 지혜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도로의 징검다리-비가 오더라도 발이 안 젖게..

 

이 폼페이는 무역항이라 다른 나라에서 오는 이방인도 많이 드나들었다 한다. 항구에는 여관, 유곽(여인의 집),요릿집(식당)이 있기 마련이다. 식당 대문 옆에는 숟갈과 포크, 칼이 그려진 표시가 있어 글씨를 모르는 사람들이나 이방인에게 간판 구실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유곽(여인의 집) 방안에는 각 종 성행위 포즈를 그려 두었는데 다른 나라에서 온 이방인에게 꾀 쓸모가 있었으리라.

                                

 

                              최고의 단열재는 공기 벽(목욕탕

 

공기는 최고의 단열재 / 전염병(역병)의 원인이 된 하수 시설

또한 목욕탕에서는 엷은 판자 형태의 두개의 벽을 막아 벽과 벽 사이에 공기층 만들어 단열 효과를 얻도록 설계되어 있었고, 응결된 물이 사람 머리에 떨어지지 않도록 고안한 천정과 목욕탕 창문을 보니 당시 사람들의 과학적이고 창조적인 지혜가 느껴졌다. 그러나 배수시설은 집에서 길가 쪽으로 배수토록 되어 있어 오물들이 길 바닥으로 그냥 흘러 내려가게 되어 있었다.  배수 처리 시설의 이런 취약점이 중세까지 잘 해결되지 못해 사람들이 페스트나 전염병에 많이 희생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납으로 만들어진 당시 상수도 관(pipe) 
 
토관으로 만들어진 배수구-오물이 도로로 그냥 버려진다

 

(계속)

 

名不虛傳(이름이 헛되지 않구나)-밀라노,피사
여행일자: 2006년 01월. 글쓴 일자: 2008.01.07.(다음 블로그에서 옮김)

 

<배경음악> Volare [볼라레 :날자꾸나] : 추후 링크가 끊어지면 음악이 안 나올 수도 있음  

 아래 동영상이 안 보이면  https://www.youtube.com/embed/hQ_TJxJSGT8 <=요걸 클릭

 

入鄕循俗(입향순속)

이탈리아에서는 세가지 '레'만 해도 살수 있다고 한다.

첫째, 만자레(mangiare) - 먹고
둘째, 칸타레(cantare) - 노래하고
셋째, 아모레(amore) - 사랑하고

이 세 단어가 이 나라 사람들의 삶을 요약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그네가 다른 고장에 가서면 그 고장 풍속을 따라야 한다(入鄕循俗 입향순속,入鄕隨俗 입향수속). 入境問俗(입경문속). 入鄕從鄕(입향종향)이라고도 한다. 다른 나라 땅(異國)에 와서 제 입맛에 맞는 음식과 기호식을 파는 곳을 찾기도 쉽지 않지만, 풍경과 음식이 다른 곳을 여행하는 동안 색다른 음식과 기호 식을 맛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리라.


평소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지만, 이탈리아 국경을 통과하고 어느 휴게소에서 잠시 쉬는 동안 이탈리아 커피 맛을 보기로 한다. 이번 여행에 동행한 딸은 커피 에스프레소를 주문하고  나는 맛이라도 볼 요량으로 좀 순하고 부드러운 카푸치노를 시켰다. 카푸치노는 소위 달달한 것이 우리나라의 자판기 커피 맛으로 느껴졌으나 딸에게 얻어 마셔 본 에스프레소는 굉장히 쓴 맛으로 느껴졌다.

 

재미있는 것은 이탈리아 상인들은 돈을 주고받을 때, 직접적인 신체 접촉을 꺼리는 것이었다. 커피 요금을 미리 계산할 때 돈을 직접 손으로 받지 않고, 돈을 접시에 올려 두면 잔돈과 영수증을 접시 위에 도로 준다. 이 영수증을 다시 커피 주방장(?)이 일하는 쪽에 보내면 커피를 만들어 접시에 도로 내준다. 인솔자의 설명으로는 손과 손을 직접 접촉하는 것을 피한다고 하며 어떤 경우에는 접시에 동전이 땡그랑 소리 날 정도로 던지기까지 한다고 하면서 우리가 거기에 대해 오해 말라고 했다.    


어둠이 내린 세계적으로 유명한 별장지대인 꼬모는 호수의 불빛을 눈으로만 잠깐 스치고 지나갔다. 호수의 불빛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거리며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다. 낮에 보면 틀림없이 더 멋있는 풍경 그림이 될 것 같았다.


사소한 도로 구조물에도 과학적, 미적 감각을 볼 수 있는 밀라노
밀라노 시가지에 들어가는 진입로에서 토리노 동계 올림픽 스폰서인 삼성의 커다란 전광판을 만났다. 이국땅에서 우리나라 상품의 선전물을 통해 보는 것이지만 나의 분신을 만나는 느낌이 들어 반갑고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이탈리아의 열악한(?) 전력 사정으로 이탈리아선 그래도 부자 도시라고 알려진 밀라노의 시가지도 다소 어두운 느낌이고 가로등도 절전 모드이다.  

이탈리아의 열악한 전력 사정으로 어두운 거리

 

시내를 걸어가다 보니 보도 블록 옆의 도로 경계석의 모양이 우리나라와 조금 다르다. 보통 경계석은 직육면체의 침목 모양으로 도로와 차도를 구분 지어 일렬로 박혀 있다. 그런데 이 밀라노의 경계석의 특별한 점은 경계석과 경계석의 접촉면 모양이 일자형이 아니라 올록볼록한 요철 형태로 되어 있다. 양쪽 끝면이 서로 요철로 맞물리게 함으로써 경계석이 튕겨 나가는 것을 막고 경계석끼리 견고한 연결이 되게 하였다. 비록 도로 한 편에 쌓는 경계석이지만 이 나라 사람들의 과학적 사고방시과 건축 공학적 미적 감각을 엿볼 수 있었다.

  
名不虛傳(명불허전)
숙소로 들어가기 전에 밀라노 시내를 관광하였다. 두오모 성당은 보수 중이었다. 보수 천막 틈 사이로 들여다 본 두오모는 밤중에 보아도 아름답고 웅장한 성당으로 名不虛傳(명불허전)이었다. 내일의 일정상 밤에 보았다는 점과 수리 중이라 내부를 볼 수 없었다는 점은 아쉬움이 남았다. 며칠 전에 내린 눈 탓에 길거리의 눈은 녹았으나 응달진 성당 뒤쪽에는 눈이 조금 남아 있었다. 성당 지붕에서 땅바닥으로 바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가 조용한 밤거리에 제법 세차게 들린다.

두오모 광장 옆이 밀라노의 중심가인데 오페라로 유명한 스칼라 좌를 둘러 본 다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쇼핑 거리로 일컬어지는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를 걸어 본다. 이 갤러리아 건축물은 이탈리아 통일을 기념하기 위해 1877년에 완성했다는데, 당시로선 최첨단인 높이 47m의 높은 아치형의 유리 지붕이었다 한다. 내부 바닥은 전부 대리석으로 깔려 있어 건물 내부가 한마디로 휘황찬란(?)하다. 현재는 전통 있는 찻집 cafe 와 부띠크, 세계적인 명품 가게들이 즐비하다.

 

어두움 속에서도 아름답고 웅장한 모습의 두오모

 

아침에 일어나니 약간 쌀쌀한 겨울 날씨였다. 밀라노 길거리에서 만난 이탈리아인들은 대개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고, 심지어 어떤 여인은 차안에서도 장갑을 끼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탈리아의 겨울 날씨는 우기인데다 추워서 뼛속을 우리하게 하는 느낌이라는 현지 가이드의 설명이다. 이런 습하고 추운 이유 때문에 겨울에는 역사가 오래된 전통적 호텔(오층 이하 호텔)의 0층과 1층 객실 요금이 싸다고 한다(참고 0 층이 우리나라 1층에 해당 됨).  반대로, 이탈리아의 여름은 덮기는 하지만 습기를 많이 포함하지 않은(고온 건습 )공기여서 그늘에 가면 시원하다고 한다. 주택의 창문 바깥쪽은 흰색 줄무늬로 통풍이 가능한 창 가리개를 대어 둔 것을 볼 수 있다.  여름에 안쪽 창문을 열고 선풍기를 실내에서 돌리면 에어컨 없이도 그런 대로 시원하게 지낼 만하다고 한다.


겨울이라고는 하지만 낮에는 영상의 온도가 되었고 날씨가 맑아 우리(한국 여행객)는 옷을 가볍게 입고 다녔다. 

                                 

엠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의 높은 아치 천장

 

엠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의 바닥은 대리석 모자이크이다

   
대리석을 깔아라(?) 대리석은 까라라.
피사의 사탑을 보러 갔다. 피사로 가는 도중 세계적 대리석 생산지로 유명한 ‘까라라(carrara)라는 재미있는 이름의 지명을 지났다. 질 좋고 풍부한 대리석이 있으니 많은 성당이나 건축물이 대리석으로 만들어 졌던 것이 우연이 아니었다. 또한 300여 가지 다양한 색깔의 대리석들이 있어 색깔의 표현에 제한이 없었다고 하며 심지어 돌가루로 된 물감이 있었다고 한다.

 

건축에 쓰일 재료로는 나무가 돌보다 다루기 쉬운 것은 사실이지만, 나무보다 견고하고 수명이 오래가고 또 다루기가 그리 어렵지 않은 재료인 대리석이 흔하다 보니 건축 재료나 조각의 재료가 되었을 것이다. 이런 연유로 고대 로마 왕족이나 귀족의 욕조나 현관 바닥이 대리석으로 조각되거나 모자이크로 많이 만들어 졌을 게다.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 같은 르네상스 시대의 3대 거장 외에도 많은 예술가들이 훌륭한 대리석 조각품들을 남겼으며 또한 오늘날 이탈리아의 웬만한 호텔의 욕조나 탁자가 대리석으로 만들어 진 것도 이렇게 풍부한 대리석 덕분이리라. 대리석이 말 그대로 까라라 지방에 지천으로 깔려 있으니 부럽다 못해 샘이 났다.

또 하나 ‘바다(vada)라는 재미있는 지명을 도로 표시판에서 보았는데 Vada Sabbata라고 하는 곳으로 실제 이탈리아 주요 항구이면서 철도로 토리노와 연결되며, 제노바에서 프랑스 국경으로 가는 간선 철도와 도로가 지나는 교통의 요지라고 한다.

 

더 높이 올라가고픈 인간의 마음과 인간의 지혜
피사의 사탑은 큰 돌덩이들을 지반이 약한 곳에 올리다 보니 탑을 처음 세울 때부터 기울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최근에는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도록 첨단 공학적인 보강 조치를 했다고 한다.                 

세계에서 크기로 몇 째 가는 큰 규모의 세례당

 

피사는 피사의 사탑으로도 유명하지만 이 곳에는 세계에서 몇 째 가는 큰 그 규모의 세례당과 본당도 있다. 1탑 2당 양식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본당은 아치형의 구조물 위에 또 다른 아치를 세워 올리는 형식으로 건물 규모와 높이를 키웠다. 건물 규모를 키우기 위해 기둥과 기둥 사이 상단 부를 아치형으로 하고, 그 위에 받침돌을 놓은 후 다시 양 측에 기둥을 세우고 두 기둥 사이를 아치형으로 하여 하중을 분산을 시키고 건물의 높이를 올렸다.

  

아치 구조의 피사 두오모(대성당과 사탑(斜塔)

이렇게 대리석 돌로 만들어진 크고 웅장한 건물을 세울 수 있게 되었지만, 문제는 무게가 많이 나가므로 빗물 처리를 잘 해야 한다. 대개의 경우 낙수가 지붕에서 바로 땅 바닥에 떨어지게끔 설계되어 있다. 지붕이 건물에서 다소 돌출되어 있다 해도 바람이 불면 낙수가 벽에 부딪혀 벽이 젖을 수밖에 없다. 이런 낙숫물을 조금이라도 건물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낙수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이 빗물받이인데 이를 ‘가고일’이라 한다. 가고일의 모양은 새나 짐승처럼 단순하게 처리한 것도 있지만 괴수나 그 지방의 문장 또는 성당 관련 건물에서는 성경적 인물로 만들어 지기도 한다.  

 

한편, 건물 크기가 커질수록 무게를 줄이기 위해 창을 많이 낼 수밖에 없으며 벽체를 얇게 하는 건축 양식으로 발전하게 된다. 창이 많아지고 유리 처리 기술이 발달되고 색유리 까지 도입되니 자연히 스테인글라스가 창문에 도입되었다. 이런 특징을 가진 건축 양식을 '고딕 양식'이라 한다. 건축 구조상의 필요와 관련 기술의 발달로 이러한 건축 양식 등이 발전해 나온 것이지만 그 당시의 건축가가 이러한 양식 이름을 미리 명명한 것이 아니다. 후세의 史家나 학자들이 그런 양식의 특징을 일컬어 무슨무슨 양식으로 명칭을 붙여주어 두루 사용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공포[拱包]   

공포 [拱包] 에 대해 더 알고 싶으면 아래 링크를 클릭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63820&cid=40942&categoryId=32337

 

큰 건물을 짓겠다는 사람의 생각은 비슷하여 우리나라의 궁궐이나 큰 절집도 규모가 커지게 되자 공포[拱包]를 도입하게 된다. 공포[拱包]란 전통 목조건축에서 앞으로 내민 처마를 받치며 그 무게를 기둥과 벽으로 전달시켜주는 조립 부분으로, 결국 건물의 높이와 큰 지붕을 올리기 위해 고안한 건축 기법이다. 이러한 공포[拱包]가 기둥 위에만 있으면 柱心包 양식, 기둥과 기둥 사이에 까지 있으면 多心包 양식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공포를 올림으로써 지붕을 크게 올릴 수 있고 빗물(낙수)도 건물 벽에 덜 튀게 할 수 있게 된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 한다
로마로 가는 도중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의 어원을 말해주는 고대 로마 도로를 보게 되었다.  이 도로는 군사적 목적이 주된 것이었지만 무역 등 물자 수송 수단으로의 역할도 컸다고 한다. 이 길의 양쪽엔 기다란 기둥처럼 생긴 줄기 위로 가지가 우산처럼 뻗어 나간 소위 ‘우산 소나무’(실제로는 전나무라는 얘기도 있다) 가로수가 있는 데 독특한 모양 덕분에 군사들이 나무 그늘에서 쉬어 갈 수 있었다는 도로이다. 

     

고대 로마 도로와 우산 소나무

 

고속도로에는 자동차의 나라답게 이 나라의 대표적 자동차 회사인 피아트 자동차가 주로 보이지만 독일의 벤츠, 베엠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차종들도 다수가 눈에 띄었으며 페라리도 가끔 볼 수 있었다. 특이한 것은 배기량이 큰 것은 보기 드물었고 대개가 소형 차종이었다. 분수에 맞지 않게 큰 자동차나 큰 집을 좋아하는 우리나라 국민성에 비해 실리적이며 검소한 국민성은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되었다. 

 

이탈리아에는 도시 진입료가 있다
겨울인데도 한낮에는 일광 화상을 입을 것 같아 자외선 차단 크림을 듬뿍 바르고 다녔다. 저녁이 되자 푸른 하늘에 붉은 석양이 멋지다. 어둑해 지고 나서야 드디어 로마에 입성한다. 그런데 입성 비용이 만만치 않다, 버스 한 대당 18만원 정도의 도시 진입료가 있다. 로마 외각에서 보았던 로마는 생각보다는 그렇게 휘황찬란한 모습이 아니었다. 아마도 전기를 수입하는 에너지 수입국이라 절전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로마 시내 안 쪽에는 현대식 높은 빌딩이 많지 않아 건물에서 비춰지는 조명이 적고 우리나라 도심에서 흔한 네온사인도 보기 드물어 그런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계속)

제목: 사진이 배꼽(소위 '액박')으로 나오며 안 보일 때.

 

게시판에 올린 그림이나 사진파일이 나타나지 않고 빨간 X표 배꼽만 보일 때가 있다.
회사 컴에서는보이는데 집의 컴에서는 안보이거나 이와는 정 반대일 수도 있다.

이런 '액박'의 원인은 파일이름이 한글로 되어 있을 경우가 이거나 파일 올려 둔 주소가

변경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파일이름을 영어나 숫자로 바꿔서 올리거나 사진(그림)올려둔 주소(인터넷 주소)를

수정 해 주면 어느 컴에서나 볼수 있게 된다.


'액박'의 가장 흔한 이유는 그림(사진)이 있는 주소를 잘못 적었거나 변경되었기 때문이거나
해당 주소에 그림(사진)이 삭제되었을 경우이다.
즉,  사진(그림)을 연결해야 하는 주소(즉 그림(사진) 그림을 링크한 곳 )가 잘못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경우에는 그림(사진)을 해당 사진 갤러리에 그림(사진)을 올린 후 해당 그림(사진)의 주소를 제대로 잘 적어 주어야 그림(사진)이 보이게 될 것이다.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우선 다음 순서로 시도해 본다.
===============================================================
1) x 표 있는 곳에 커서를 대고 마우스의 오른쪽 보턴을 누르면
2) 메뉴창이 뜨는데 맨 아래 " 속성 " 을 선택하여 마우스 왼쪽 버튼을 누르면,
등록 정보 창이 뜬다.

3) 등록 정보 창에서 " 일반 " 탭에 URL 주소를 볼 수 있는데 마우스의 오른쪽
버튼을 누른 상태로 이 주소를 훓고 지나면 청색으로 덮이게 된다.

4) 청색으로 덮인 부분에 커서를 놓고 마우스 오른 버튼을 누르면 다시 작은
메뉴 창이 뜨는데 여기서 " 복사 " 를 선택하여 마우스 왼쪽 버튼으로 클릭한 후

5) 보고 있는 화면에서 키 보드에서 Ctrl 키를 누른 상태에서 L 키를 누른다.

6) 이 때 화면에 작은 창이 뜨는데 여기에 복사 했던 주소를 넣어 주고 " 확인 " 버튼을
누르면 X 표로 나타났던 곳의 실제 화면을 보게 된다.


참고로 한글로 된 파일을 항상 볼수 있는 방법을 소개 하면...

인터넷 설정을 변경해 주어야 하는데 변경방법은
1. 창의 메뉴에서 '도구->인터넷옵션'을 선택합니다.
2. 나타나는 이터넷 옵션 창의 '고급'을 선택한다
3. 나오는 목록중 탐색의 'URL을 항상 UTF-8으로 보냄'이라는 항목이 있다.
4. 'URL을 항상 UTF-8으로 보냄'이라는 부분이 체크되어 있으면 v 체크를 끈다.
5. '확인' 버튼을 누른 후에 모든 인터넷 창을 닫고 다시 시작하면 한글파일도 언제나 ok.

참고로 인터넷에 가능한 그림이나 사진파일을 올릴 때는 한글로 저장 안하는 게 좋다.
그 이유는 포토 앨범을 제공하는 웹사이트에서 한글파일은 지원하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