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여행기3-아나톨리아,위스크다르,우치히사르,데린구유

여행일자: 2007년 05월. 다음 블로그에서 옮김

 

넓디넓은 아나톨리아 평원           참조링크: 다음 백과 아나톨리아 

 그림 출처: 다음백과 .https://100.daum.net/multimedia/900_ANd9GcT4LuUJQXH1PpJj8WQcrEqtOlrlnfo2sVfffEWSSckxSONZBz8dhzdg4o19

그림 출처: 다음백과: https://100.daum.net/multimedia/900_ANd9GcT4LuUJQXH1PpJj8WQcrEqtOlrlnfo2sVfffEWSSckxSONZBz8dhzdg4o19

 

아나톨리아(Anatolia) 평원은 북부 해안지역은 흑해에 접해 있고 남으로는 지중해에 접해 있는 데 터키 땅의 거의 전부이다. 아나톨리아 지역의 평균 고도는 약 1,000-1,5000m이며 이 지역의 남쪽은 서에서 동으로 뻗어있는 해발 2,000-3,000m의 셉투스(Septus)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다. 기후는 여름에 고온 건조하여 반 건조(스텝)지역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평지가 635mm, 산지가 762mm로 일부에서는 벼농사가 가능하지만 주로 밀,보리농사를 짓는다. 중부 내륙의 고원지대는 한서(추위와 더위)의 차가 심하여 겨울에는 -15° C, 여름에는 37° C를 넘는다. 고원지대에서는 하천이 거의없고 나무도 보기 힘들어 사막 풍경처럼 경관이 단조롭다. 다만, 마르마라해 연안은 지중해성, 흑해성 기후의 양쪽 특성을 가진다(비가 많음).

 

안탈리아에서 아스펜도스를 거쳐 카파도키아로 자동차로 가는 여정은 아나톨리아 평원을 거쳐 가야하는데 그 거리가 만만치 않다. 쉬지 않고 버스로 달리더라도 8시간 이상의 장시간이 걸린다. 대부분의 여행사 프로그램은 넓은 아나톨리아 평원을 통과할 때 중간 지점인 콘야나 악사라이까지 이동 후 잠을 자고, 다음 날 나머지 구간을 이동하는 스케줄로 움직인다. 토로스 산맥을 넘어 아나톨리아 평원을 가로질러 가는데, 삼사십 분을 버스가 달려가도 일직선으로 뻗은 길이 계속 이어지는 곳도 있었다.

.일직선으로 쭉 뻗어 있는 아나톨리아 평원의 도로

한참을 달린 후 점심을 먹기 위해 어느 강변 식당에 닿았다. 마침 이 식당 바로 앞쪽에 제법 큰(?) 강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강변에는 나무들이 제법 숲을 형성하고 있었다. 터키에서는 이때껏 산을 넘을 때나 평원을 거쳐 이동하는 동안 강을 거의 보지 못했으며 더구나 강에 물이 차있는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강물 줄기들은 대개 乾川(건천)이어서 물이 거의 보이지 않았고 물이 있더라도 강물 줄기가 바닥으로 조금씩 흘러가는 게 대부분이었다.

터키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물이 가득차 있는 강

식사 후 식당 주위를 둘러보다가 마을 주민이 이맘(이슬람 종교 지도자)에게 아스피린을 사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의료 시설이 없어 취약한 마을에는 이런 이맘이 약품 외에도 간단한 가재도구와 생필품 등을 이동하면서 판매한다고 한다. 약품 내용을 흘낏 보니 기생충 약도 있었는데 오지인 이곳에서는 적당한 약품 목록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맘(종교지도자)에게 약을 사고 있는 노파

오후 이동 시간에는 식곤증에다 피로하기도 하고 주위 풍광의 변화도 없기에 아예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어느 새인가 깨어 보니 저녁 노을을 배경으로 이슬람 사원이 보였다. 규모가 작은 마을인 이곳 호텔에서 저녁을 먹는 동안 뜻밖에도 몇 사람의 연주자(물론 남자)들이 ‘위스크다르’ 연주를 들려준다. 이국적인 장소에서 이곳과 관련된 노래를 듣는 것도 여행의 즐거운 재미로 생각되었다.

.‘위스크다르’를 연주해 주었던 터키 연주자들 

 <배경음악> ‘위스크다르’ 추후 링크가 끊어지면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 나올 수도 있으며, 아래 동영상 보려면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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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크다르라는 터키 민요의 원래 제목은 ‘캬팁’이다.

* 이하 ‘위스크다르’ 관련 인터넷 검색에서 요약 *

위스크다르는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에 있는 마을의 이름이다. 위스크다르라는 터키 민요의 원래 제목은 ‘캬팁’인데, 캬팁이란 서기, 비서정도의 공무원을 말한다. 스크다르는 그 옛날 위스크다르의 처녀가 해협을 건너 이스탄불을 바라보면서 캬팁이라는 노래를 불렀음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이 민요는 부르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느리게 부르면 구슬픈 곡조가 되고, 빠르게 부르면 흥이 생기는 그런 노래이다. 노랫말을 보면 위스크다르에 살고 있는 처녀가 젊은 공무원을 사모하는 연가이다.

 

캬팁의 가사를 우리말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위스크다르 가는 길에 비가 내리네

내 님의 외투 자락이 땅에 끌리네

내 님이 잠에서 덜 깨어 눈이 감겼네

우리 서로 사랑하는데 누가 막으리

내 님의 깃달린 셔츠도 너무 잘 어울리네

 

위스크다르 가는 길에 손수건을 놓았네

내 님을 위한 손수건에 사랑을 담았네

어느새 내 님이 바로 옆에 있네

우리 서로 사랑하는데 누가 막으리

내 님의 깃달린 셔츠도 너무 잘 어울리네 

 

땅속에 굴을 파서 만든 지하 도시

다음날 아침, 이웃한 모스크에서 앰프로 방송하는 요란한 코란 음송소리에 잠을 깼다. 코란 음송 앰프 소리가 처음엔 마치 공습 경보처럼 들렸기에 깜짝 놀라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곧 이슬람 예배 알리는 소리임을 알고선 긴장된 마음이 풀렸다. 때마침 아침 햇살을 받은 모스크의 첨탑이 황금 촛대처럼 빛을 띠고 있었다. 황금 촛대-그것은 마치 이슬람을 지켜온 지혜의 촛불인양 느껴졌다.

 

터키에서 지하도시로 유명한 '데린 구유'는 '깊은 우물'이라는 뜻인데, 이곳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살기 위해 땅속에 굴을 파서 만들었다 한다. 지하 동굴은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숙여야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다.

.땅속 지하 도시 내부에 나 있는 통로 

. 지하도시에서 사용되었던 맷돌

 

땅굴 속 동굴 지하 도시에는 예배소, 부엌, 식당, 마구간, 회의실, 술 저장소, 창고, 우물, 환기구가 있어 지하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하였다. 하지만, 외부인들의 침입을 막기 위한 여러 가지 함정과 장치를 만들어 두었다. 이를테면 교묘히 숨긴 입구와 연자방아 돌처럼 생긴 출입문, 발을 잘못 디디면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든 함정과 다른 곳으로 탈출하기(빠져나가기) 위한 비밀 통로도 만들어져 있다.

 

지하 13개 층까지 파내려간 이 데린쿠유 지하도시의 깊이는 약 60m라고 하며 지하도시들을 연결하는 비밀통로가 있다고 한다. 

 관광객들을 위한 입구  사용할 수 없는 출입구  지하수  굴뚝 겸 환기구  교회  돌문( ENTRADA : 입구 SALIDA : 출구 ) (출처) https://t1.daumcdn.net/cfile/blog/2665553853CC424307

데린쿠유 (Derinkuyu) 지하도시 단면도  (출처) https://t1.daumcdn.net/cfile/blog/2665553853CC424307

동굴은 지하 속에서 이리저리 연결되었는데, 지하도시의 수직 단면을 본다면 흡사 개미집처럼 생겼다. 우치히사르 지역에는 이런 땅속 지하도시가 여럿 있으며 그 규모가 지하 10 몇층까지 내려가는 것도 있다고 한다.

.지하도시 입구의 노천 가게에 걸린 싸구려 카펫

(계속)

터키 여행기2 -파묵칼레, 히에라폴리스, 아스펜도스, 벨리댄스, 나자르 본쥬

여행일자: 2007년 05월. 다음 블로그에서 옮김


<배경영상음악>: 벨리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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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花城(목화성 cotton castle) 파묵칼레

멀리서 보면 새하얀 언덕이 마치 ‘하얀 목화송이를 펼쳐 놓은 듯하다’ 해서 ‘木花城(목화성)’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파묵칼레를 찾아 갔다. 파묵칼레는 신기한 모습의 거대한 석회 덩어리가 있는 지역으로 이 지역의 온천수에 포함된 탄산칼슘이 침전되어 바위가 되었다. 아니 바위 덩어리가 아니라 커다란 산등성이 전체가 석회로 뒤덮이게 되었다. 이 지역은 따뜻한 온천수가 있고 공기가 좋아서 고대 시대 때부터 휴양 도시였다 한다. 하지만 이곳은 인구 규모나 시설 등으로 보아 아직도 시골 동네 느낌이 나는 온천 마을이었다. 으리으리한 대형 호텔은 없다고 해도, 몇 안 되는 호텔에서 저녁이면 벨리 댄스 공연을 구경할 수 있다.

 

.흡사 계단식 논처럼 보이는 석회 언덕

석회 언덕이 보이는 파묵칼레 입구 마을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있었다. 결혼 적령기의 처녀가 있는 집에서는 지붕 위에 빈 병을 꽂아 두었다 한다. 만약 그 집 처녀와 결혼할 의향이 있는 사람은 그 병을 깨뜨려 그 집 처녀에게 청혼하는 풍습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이런 방식의 청혼 풍습은 없어져 버리고 전설이 되어 버렸다 한다.

 

.파묵칼레 석회 언덕 아래로 온천 마을이 보인다.

밀이 익어 가는 밀밭 옆을 지나 파묵칼레 읍내 마을의 상가와 거리를 둘러보았다. 흡사 시골 마을 시장 같은 분위기가 났다. 은으로 공예품을 만드는 가게 입구에 걸려 있던 ‘나자르 본쥬’가 나의 눈을 끌었다. 터키의 아이콘중 하나인 나자르 본쥬(Nazar boncu)는 ‘행운의 눈’으로 터키인들은 행운을 가져 온다고 믿고 있다.

 

.터키의 아이콘인 나자르 본쥬 ‘행운의 눈’

이것은 독특한 짙은 청색의 터키석으로 만들어 졌는데 터키 사람의 눈동자 색깔과 모습을 닮았다. 열쇠고리에서부터 자동차 내부나 집안의 출입구, 상점의 출입구 등 어디에나 걸려 있다. 이는 터키에서 흔히 보이는 國父(국부) 아타투르크의 모습만큼이나 여기저기서 많이 볼 수 있다. 

 

한국인에게 호감을 보이는 터키인

터키인의 모습도 딱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애매하지만 굳이 표현한다면 검은 머리칼과 구레나룻 수염을 가진 유럽과 아시아인의 중간 모습이랄까. 터키 상점의 주인이나 점원은 거의가 남자이다. 음식점이나 차를 마시는 다방에도 남자가 써빙하였다. 일반 관광지의 가게도 남자 점원 아니면 남자 주인이 나와서 손님을 맞는다. 이슬람 국가에서는 여인네가 외간 남자를 만나는 것 자체가 금기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을 시장 골목의 채소 파는 좌판에서 아줌마 상인을 보았는데 얼굴을 거의다 가린 차림이었다.

 

마을 시장통을 오고가는 중에 터키 상인들이 한국어로 말을 걸어 왔다. 한국 관광객을 呼客(호객)하는 의미가 주목적이지만, 우리 한국인에게 호감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인들이 그만큼 많이 온다는 반증이기도 하였다. 가게에 들어가니 그네들의 전통차인 사과차와 가벼운 스낵 종류를 권하며 접대해 주었는데 그들의 정겨운 인심을 보여 주었다. 상인뿐만 아니라 대개의 터키인들이 外地人(외지인)에 대해 관용적이라 한다.

 

터키 사람들이 특히 한국인에게 더 잘 대해 주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2002년 월드컵 때 터키와 준결승전(3.4위전)에서 터키와 우리나라가 맞붙었을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들에게 보여준 우정이 이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축구 경기장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터키 선수단을 따뜻이 응원해 주었다는 것이었다. 또한 터키는 6.25 때 우리나라에 파병한 국가이며 미국, 영국 다음으로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이러한 이유로 터키인들은 우리나라를 ‘형제의 국가’라고 부르고 있고, 특히 터키의 노인들(할아버지)들은 한국에 대해 많은 애정을 갖고 있다고 한다.

 

성(聖)스러운 도시라기보다는 죽은 자들의 도시인 히에라폴리스(hierapolis)

.히에라폴리스에 남아 있는 로마 흔적

파묵칼레 지역 바로 옆에 있는 ‘히에라폴리스’는 하얀 석회 언덕의 아름다운 경관 때문에 고대에는 성(聖)스러운 지역으로 불렸다고 하며, 마땅한 의료(치료) 시설이 없던 로마 시대 당시에는 귀족 원로들의 온천 휴양지로 유명했었다 한다.

 

.히에라폴리스에 남아 있는 잘 보존된 고대 원형극장. 

이곳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자 도시 형태를 갖게 되었고 원형극장과, 공회당, 식당, 신전 건물, 개선문 등이 세워졌다. 이런 고대 유적과 더불어 독특한 석회 언덕이 있기 때문에 이곳은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질병을 고치기 위해서 왔거나 휴양을 위해서 왔거나, 많은 귀족들이 결국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고 이곳 히에라폴리스 언덕 주변에 묻히게 되었다. 그 결과 그들의 유해를 넣었던 많은 石棺(석관)들이 이곳저곳에 도열하듯이 남게 되고, 나중에는 석관 묻을 장소가 협소해지자 오늘날의 납골당과 비슷한 형태인 무덤도 생겼다 한다. 이렇듯 히에라폴리스(hierapolis)의 황량한 언덕에는 죽은 자들의 무덤들이 셀 수 없이 널려져 있기 때문에 ‘聖스러운 도시’라기보다 차라리 ‘죽은 자들의 도시’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히에라폴리스에 널려 있는 석관들

방치되고 있는 많은 무덤들과 폐허가 되어 버린 고대 도시가 죽은 듯 고요한데, 바람에 나부끼는 풀 몇 포기와 도마뱀 몇 마리만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 생명체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터키 남부의 휴양 도시 안탈리아 

터키 남부 안탈리아에 들어오면 도시 한쪽 옆에 송곳처럼 높게 솟은 산(토로스)을 끼고 있는 시원한 바다를 만나게 된다. 안탈리아는 아름다운 해변과 도시 주변에 로마시대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고, 기온 또한 따뜻하여 터키 남부 지중해 연안 중 가장 많은 여행자가 몰리는 곳이라고 한다.

 

.안탈리아 해변의 깨끗한 해변과 자갈들 

터키에서 가장 아름답게 펼쳐진 해변 중 한 곳이며, 바닷물 또한 어느 해변보다도 깨끗하고 아름답다고 한다. 오월이면 흰 눈이 남아 있는 토로스 산정에서 스키를 타고, 해변에서는 일광욕과 해수욕, 원드 써핑을 할 수도 있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한 곳에서 여름과 겨울 스포츠를 동시에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라고 한다.

 

터키에서 가장 원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는 거대한 아스펜도스 로마 원형극장

.음향 반향이 완벽하다는 거대한 아스펜도스 로마 원형극장(오페라 공연 준비 중인 무대)

안탈랴에서 조금(차로 30분) 동쪽으로 올라가면 보존이 잘 된 로마시대 때 지은 아스펜도스 로마 원형극장이 있다. 가장 위쪽의 처마부분을 빼고는 정교한 구조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규모도 대단히 크지만 오늘날 기준으로 보아도 완벽한 음향 반향을 가지고 있다 한다. 조명 시설 몇 개만 추가하면 훌륭한 오페라 공연 극장으로 손색이 없다고 한다. 요즘도 주말이면 오페라가 공연되고 있어 야외 오페라의 진수를 맛볼 수 있으며, 매년 8~9월이면 오페라 축제가 열린다. 이 곳의 오페라 공연은 이탈리아 베로나의 오페라 축제만큼이나 유명하다.  

(계속)

 

 

 

터키 여행기1( 2007.05~06)    여행일자: 2007년 05월. 다음 블로그에서 옮김

 

<화질 좋은 터키 소개 영상> 제목:Watchtower of Turkey 가:Leonardo Dalessandri 처: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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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관련 추천 사이트(추천)

    1.터키문화관광부 한국홍보사무소  https://www.youtube.com/embed/z7yqtW4Isec<=요걸 클릭

 

     2.터키 여행 추천 책자:ENJOY 터키 김지선 외(강추): ENJOY 터키 <=요걸 클릭

 

터키에서 만나게 될 과거의 유적-

오늘날 터키인들은 99%이상이 이슬람 종교를 갖고 있다. 이슬람교는 마호메트가 창시하여 메카를 성지(聖地)로, 코란을 경전으로 삼고 있는데, 칼리프(마호메트 후계자)와 모스크(이슬람 사원), 그믐달, 별, 칼로 상징된다. 따라서 과거의 터키 문화유산들은 이슬람 문화와 관련된 것이 대부분일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많은 이슬람 문화재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터키 땅의 과거 내력을 보면 단순히 그렇게 얘기할 수 없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 문명, 트로이 유적, 헬레니즘 시대의 페르가몬 왕국의 유적, 로마 유적, 이슬람 유적 등 여러 문명의 자취가 남아 있다. 터키 땅의 대부분이 세계 문명의 시발점 중의 하나이면서 교차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무궁무진한 역사적 유물들이 터키에 숨겨져 있다.

 

유럽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이스탄불을 제외한 터키 땅의 대부분은 아시아 지역에 있는 아나톨리아(anatolia)로, 이곳은 11세기에 터키 민족이 도래하기 이전부터도 여러 민족과 나라의 흥망과 성쇠가 있었던 곳이었다. 아나톨리아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교차로였다.

 

여행사의 관광 상품의 프로그램이 역사적 순차를 따라 방문하게끔 의도된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들의 여정의 시작과 끝은 고대 유적 지역으로부터 시작하여 근세 유적 지역으로 마무리 되었다.

 

터키 제 3의 도시 이즈미르와 에페소스

한국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약 12시간의 비행 끝에 이스탄불에 내렸다. 다음날의 일정상 밤 10시에 이즈미르로 출발하는 터키 국내선 비행기로 다시 바꿔타고, 이즈미르에 있는 호텔에 도착하니 현지 시간으로 새벽 1시가 다 되었다. 이즈미르는 지중해(에게 해)에 면한 터키 서부 해안 도시로 이스탄불, 앙카라에 이어 터키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지만 지진이 많아서인지 초고층 건물은 보기 드물었다.

 

이즈미르는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들 가운데 하나로 발굴을 통해 트로이의 첫 번째 도시와 같은 시기인 BC 3000~2000년경에도 도시가 형성되었다 한다. BC 1000년경의 유물로 알려진 도자기가 출토되면서 이 도시가 그리스의 도시였음이 입증되었다. 이스탄불과 마찬가지로 지정학적 요충지로 지난 5,000년 동안 지속적으로 중요한 역사적 역할을 해왔다.

 

천국의 열쇠와 십자가

.성모 마리아의 집 입구에 있는 열쇠 구멍 형태의 세례식 장소

 

.사도 요한의 교회에 있는 십자가 형태이면서도 열쇠 구멍 형태를 가진 세례식 장소


불불산에 위치한 이곳 성모 마리아의 집(성모 마리아 교회)은 예수가 죽은 후 마리아가 이곳에서 살았다고 추정된다고 한다. 예전에 어떤 수녀님의 기도하는 중에 계시된(?) 내용을 기록하였었는데, 후일 어떤 신부님이 그 글에 쓰인 내용을 추적하다 보니 이곳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전설(傳說)을 들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이곳을 성지로 공인하였다.


이곳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 있는 사도 요한의 교회는 사도 요한이 이곳에서 살다가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곳에 4세기경 교회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성모 마리아의 집 입구에 있던 세례식 장소와 사도 요한의 교회에 있는 십자가 형태의 세례식 장소가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나 열쇠 구멍 형태인 것이 인상에 남았다.

 

.에페스 고고학 박물관(Efes Müzesi)의 아르테미스 상


에페소스(Efesos, Efesus)

이곳은 이즈미르에서도 멀지 않으므로 배를 타고 지중해 바다 연안을 크루즈 여행을 한다면 빠뜨릴 수 없는 여행지이다.  에페소스는 에게 해안을 따라 이즈미르에서 남쪽으로 약 7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데 우리말 성경에는 에페소스를 에베소로 적고 있다. 에페소스는 기원전 10세기에 이오니아인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알렉산더대왕 이후 에페소스는  로마의 중요한 도시가 되었고, 에게 해안에서 금융과 상업의 중심지로 중요한 대도시가 되었다 한다.

 

.지금 봐서도 규모가 대단한 케르소스 도서관

 

.그리스어로 승리의 여신 니케아(영어로 NIKE 나이키)


그 당시에는 인구 25만 명을 가진 큰 도시로 예술가와 돈 많은 상인들이 몰려들었고 철학, 문학 등 학문의 중심지이기도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인근에 흐르는 카이스터 강의 범람으로 항구 쪽으로 흙이 쌓이면서 항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고, 말라리아 전염병이 번지면서 사람들이 이 도시를 떠나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로선 세계에서 몇 번째로 큰 규모의 도시가 자연의 힘과 모기에 의해 몰락하였던 것이다.


완벽하고 잘 짜인 대규모 도시 에페소스에서 느낀 당시 사람들의 영감과 영혼

하지만 남아 있는 에페소스의 정교하고 화려한 건축물과 조각들을 보면 그 때 당시의 아름답고 화려한 도시 모습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여러 신전들과 조각과 분수대, 원형극장과 공회장, 케르소스 도서관, 대리석이 깔린 길(보도), 목욕탕과 공중 화장실, 시장터 등 그야말로 오늘날의 도시 기준으로 보아도 완벽하고 훌륭한 도시 구조물은 다 있다. 어디하나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하고 잘 짜인 대규모 도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떻게 이런 정교하고 아름다운 건축 예술품을 만들 수 있었는지 그 시대의 건축 기술과 장인들의 실력이 놀랍기만 하다. 돌조각에 장인들은 그들의 영감과 영혼을 불어 넣었을 것이다. 당시 그들이 갖고 있었던 과학 기술과 건축과 예술, 문화적 소양이 그들이 만든 건축물과 예술품에 잘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작은 공연장 또는 회의장소로 사용되었을 법한 장소

 

.이 곳 계단  좌석 옆의 사자 발모양 조각.

 

도리아 양식

도리아 양식의 기둥은 엔타시스(배흘림) 기법으로 기둥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기둥의 굵

기가 가늘어 지는 것이 특징이다.

 

.직선적, 남성적, 장엄함을 보이는 도리아 양식.

 

이오니아 양식

이오니아 양식의 기둥은 여성적이고 우아하며 기둥머리엔 양뿔 모양의 소용돌이 장식이 특징이며 아래 위 기둥의 굵기가 비슷하다. 

 

코린트 양식

기둥머리를 아칸서스 나뭇잎 모양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것은 코린트 양식의 특징이다. 

나뭇잎 모양으로 화려하게 장식한코린트 양식 

.무너지고 남은 존재이지만 당시의 위엄을 보여 준다.

 

후문 쪽 입구로 나오는데 관광객들을 위해 옛 모습으로 분장하고 볼거리를 보여 주었다. 항상 있는 것은 아니지만 관광지에서 뜻하지 않게 만나는 이런 event는 여행의 즐거움을 더해 주었다.

 

.옛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당시 공연 영상을 보려면 동영상 보려면 ▷클릭   

동영상이 안보이면

다음 링크를 클릭: https://play-tv.kakao.com/embed/player/cliplink/6457674?service=daum_blog 

 

Sema(세마의식) - 2008년도에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무형문화 유산 등재되었음.
후문 쪽 입구로 나오는데 관광객들을 위해 옛 모습으로 분장하고 볼거리를 하얀 모자를 쓰고 긴 치마를 입은 수도승들이 빙글빙글 돌며 추는 세마는 신을 향한 소통을 의미하는 종교의식이다. 오른손은 하늘로 왼손을 땅을 향하며 한 방향으로 계속 회전한다. 하늘을 향한 오른손은 알라를 영접하고 땅으로 뻗은 왼손은 알라의 평화, 사랑, 관용을 뜻한다. 같은 방향으로 끝없이 돌면서 명상과 움직임만으로 신과 합일 상태에 다다른다. 이러한 의식은 신과 교감하는 과정으로 여겨진다.

(계속)

 

유럽 여행기 마지막 - 끝은 또 다른 시작 -
여행일자: 2006년 01월. 글쓴 일자: 2008.01.07.(다음 블로그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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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하지 않았던 흥겨운 축제

베네치아에서 인스부르크까지의 旅程은 이번 여행에서 최장 시간의 버스 여행길이었다.

거기까지 가는 동안 노을 저물어 가는 알프스 산의 모습과 아름다운 석양을 볼 수 없었더라면 지루한 여행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북으로 올라 갈수록 이제까지 보기 힘들었던 눈 덮인 산과 계곡, 마을들이 나타났다.

  
인스부르크의 상징인 '황금 지붕'

 
         Bierwirt 호텔 홈페이지에 있는 사진
 
          
Bierwirt 호텔 복도 통로에서

 

인스부르크에 도착하였을 때는 깜깜한 저녁이었다. 인스브루크는 8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알프스의 중심 도시로 2회에 걸친 동계 올림픽 개최지이자 스키의 본고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겨울 밤바람이 寒氣(한기)를 느끼게 하여 장갑을 꺼내 끼었다. 건물 지붕에는 눈이 쌓인 곳도 있었고 길바닥은 얼어 있는지 걸을 때마다 자박자박 소리가 났다. 시내에서는 전차 철로가 자동차 도로 위에 깔려 있고 전차용 전선이 흡사 거미줄처럼 하늘에 걸려 있었다. 마치 路面(노면) 전차가 다니는 오래된 도시를 재현한 영화 세트장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일정상 내일 아침 일찍 독일로 출발해야 하므로 늦은 시간에 황금지붕(Golden Dachl)을 찾았다. 햇빛이라도 비추어졌더라면 그야말로 황금색의 지붕을 볼 수 있었을 지는 모르겠지만, 깜깜한 밤에 본 황금 지붕은 더 이상의 황금 지붕이 아니었다. 다시 한번 이 곳이 유럽 여행의 4대 썰렁(?)한 곳 중의 하나임을 확인해야 했다.  ‘유럽 여행의 4대 썰렁(?)한 곳’이란  유명세에 비해 규모나 감동(?)이 별로인 장소를 말하는 데, 벨기에 브뤼셀의 오줌싸개 동상, 덴마크 코펜하겐의 인어공주,  독일 라인 강의 로렐라이 언덕,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의 황금 지붕을 흔히 말한다.

 

뜻하지 않게 참여했던 오스트리아 민속 공연(?)

우리가 묵은 호텔(inns and restaurants)은 1615년부터 여행객을 받아온 Bierwirt 라는 곳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칠 즈음 식당 통로쪽 어디선가 발을 구르는 소리와 함께 음악이 들려 왔다. 잠시 후 깃털 모자를 쓰고 흰 색 셔츠 옷에 갈기가 너덜너덜한 숄을 두른 사람들이 식당으로 들어 왔다. 동물 모습으로 분장한 것 같았다. 이어서 코가 꼬부라지고 검은 속옷에 하얀 스웨터 복장을 하고 붉은 두건을 쓴 마녀와, 사냥꾼 복장에 채찍을 든 포수가 가면을 쓴 채 들어왔다.

마녀로 분장한 사람  
   민속 공연을 한 사람들과 함께
 

 

이들은 사냥하는 모습을 표현하는지 흥겨운 몸동작으로 춤을 추며 요란한 발 구르는 소리를 내었다. 일순 식당 안은 흥겨운 아코디언 소리와 장단을 맞춘 발 구르는 소리로 인해 떠들썩한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장소가 그리 넓지 않은 식당이었지만 식탁과 의자를 한쪽으로 치운 약간의 공간이 플로어 스테이지가 되어 손님(여행객)과 공연단과의 오스트리아 민속춤이 벌어졌다. 흡사 삼삼칠박수를 연상케 하는 리듬과 손님들의 박수가 호흡을 맞춘다. “쿵짝짝! 쿵짝짝! 짝짝짝짝 쿵짝짝!”

 

유치원 아이들처럼 무릎 아래까지 오는 양말을 신고 흰 제복에 멜방을 한 것이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은 그네들과, 오스트리아 춤을 모르던 우리나라 여행객들이 함께 플로어에서 폴짝폴짝, 빙글빙글 돌아가며 圓舞(원무)를 추고 장단을 맞추며 흥을 즐겼다. 나도 플로어로 뛰어 나가 어설픈 손짓과 몸짓으로 이들의 공연에 참여하였지만, 몇 번 춤추며 빙글빙글 돌아가니 공연단의 모습이 불꽃놀이 때 떨어지는 불꽃 실처럼 보이며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소리가 들리나요? ‘쿵짝짝 쿵짝짝 짝짝짝짝 쿵짝짝’  눈이 온 Bierwirt 호텔 앞의 예쁜 눈사람 장식

 

춤을 배우지 못한 것이 분명한 우리 여행팀 여자가 그네들에게 손을 내밀어 춤을 청해도 그들은 기꺼이 청을 들어 주었다. 무도회는 어느새 다 같이 빙글빙글 돌며 좁은 식당 안을 한바탕 축제의 자리로 만들었다. 잠시의 휴식을 하던 그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우리들이 고맙다고 치는 박수에도 다시 한번 음악을 연주하며 앙코르 공연과 춤을 보여 주었다.

                  

                   당시의 음악과 춤 장면을 동영상으로 보려면 [춤 잠깐 보려면] 동영상 클릭!

 

어느 누가 초빙한 팀도 아니고 호텔에서 미리 계획한 공연도 아니었다. 이들은 이 지방의 청년들로 가면 축제를 며칠 앞두고 토요일 저녁 한바탕의 마당놀이를 즐기는 중이었다. 그들의 놀이에(축제 준비 연습 공연이었는데) 우리가 끼어들기 한 것이었다.

 

공연을 마친 그들과 기념 촬영을 마치고 아쉬움이 남아 호텔 밖을 나오니, 바닥엔 흰 눈이 쌓여 있고 호텔 입구엔 눈사람 장식이 보였다. 생각지도 않았던 순간에 즐겁고 행복한 추억을 가질 수 있었다. 또다시 이런 즐거운 추억의 시간을 어찌 가질 수 있을까? 또 다시 어느 때 이곳을 다시 찾아온들 오늘 같은 즐거운 한바탕의 춤 소동을 즐길 수 있을까? 이들과의 민속춤 축제 이벤트는 한마디로 각본 없는 한편의 드라마였다. 뜻밖의 흥겨운 오스트리아 민속 공연은 이번 여행의 白眉(백미)였다.

 

하이델베르크를 거쳐 프랑크푸르트 공항으로

원래 오스트리아와 독일 코스는 귀국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거쳐 가는 곳으로, 한 두 군데 정도 관광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다음날은 마지막 일정인 하이델베르크로 향했다. 가는 도중 보이는 주위 풍경은 온통 눈 덮인 산지와 구릉이었다. 크리스마스 장식하는 트리처럼 뾰족하게 생긴 검초록색 나무들이 삼림을 이루어 질서 정연하게 빼곡히 심어져 있었다. 하이델베르크 까지 버스로 가는 동안 여행 인솔자는 우리가 지나온 일정을 되짚어 주며 정리해 주었다.

 
 
프리드리히의 가족묘로 사용된 성령교회 
 


  눈위에 새 발자국조차 보이지 않아
 고즈녁하다 못해 시간이 정지된 듯한 왕궁의 안뜰
 

 

대학도시 하이델베르크는 짙은 녹색의 숲을 배경으로 한 고풍스러운 옛 성들의 모습이 인상적인 도시인데,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의 무대이기도 하다. 이곳 겨울은 다른 남부 지역에 비해 기간이 길고 추운 날씨들이 많다고 한다. 어쩌면 이런 까닭에 이곳에서 우울하고 어두운 분위기의 음악과 사색을 추구하는 철학이 발달했을지도 모르겠다. 네카강 건너 언덕에는 ‘철학자의 길’이라고 이름 붙은 숲길이 있을 정도로 많은 예술가와 철학가, 신학자들을 배출했다고 한다. 

 
   古城에서 내려다 본 하이델베르크의 모습

  네카 강의 옛 다리에서 본 古城의 모습

 

눈 덮인 하이델베르크 古城(고성)에 올랐다. 겨울 날씨에 코끝이 시큰하였지만, 눈 위에 새 발자국조차 보이지 않고 바람도 미동(微動)하지 않았다. 고즈넉하다 못해 시간이 정지된 듯한 고성 안에는 연분홍색의 왕궁들이 우리들을 맞이했다. 이 지역에는 붉은 砂巖(사암)이 많아 지붕과 벽돌 등이 붉은색을 띈 건축물이 많다고 한다. 시원한 겨울 공기를 마신 다음 프리드리히 궁 지하에 있는 세계 최대의 맥주통을 둘러보았다. 포도주를 시음하고 기념으로 포도주잔을 구입하는 사람도 있었다. 궁 안 다른 쪽에는 醫藥史(의약사) 박물관이 있었다고 하나 일정이 촉박하여 방문하지 못하여 아쉬웠다.  

 

프리드리히 5세가 사랑하는 부인을 위해 세운
엘리자베스 문
  
 

 

세계 대전으로 파괴되고 남은 왕궁 모습


古城(고성) 전망대에서 갈색 지붕들이 퍼레이드를 하고 있는 하이델베르크 시내를 내려다보니 마치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도시 군데군데가 하얀 눈에 쌓여 있는 가운데, 네카 강의 옛 다리와 특히 다리 입구 쪽에 있는 쌍둥이 탑은 우리들을 동화의 나라 온 것처럼 느끼게 해 주었다.

 

古城에서 시내로 걸어 내려오는 데  길이 얼어 있었다.  미끄러워 발에 힘을 주며 내리막길을 내려오니 장단지가 땅겼다.  고성을 내려 와 시내에 있는 면세점을 들렀다. 우리 일행들은 쌍둥이 칼과 휘슬러 밥솥 등 독일의 명품(?)을 사는 등 여러 기념품들을 샀다. 성수기 때에는 두 세 팀만 몰려도 좁게 느껴질 것 같은 매장 크기였다.

   

네카 강 옛 다리 입구의 쌍둥이 탑문  
   

하이델 베르그 성 아래에 있는 마리아상(마돈나상)   
 

 

이번 여행의 마무리는 네카 강의 옛 다리로 걸어나가, 쌀쌀하지만 시원한 강바람을 마시며 단체 기념사진을 찍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여행 인솔자는 좋은 일행을 만난 것과 우리들이 아무 탈없이 여행을 마쳐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우리 일행들도 능력있는 인솔자를 만나 여행의 모든 과정이 차질없이 잘 진행되었고,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었던 것에 대해 박수로써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인솔자의 노련함을 볼 수 있었던 한 예를 보면, 같은 지역에 다른 한국 여행 팀이 있을 경우 남보다 한 박자 먼저 식당을 찾아가 식사를 하거나 먼저 관광을 시작하는 소위 ‘치고 빠지는 스타일’의 스케줄로 움직였다. 이 때문에 식사 대기시간이나 관광 대기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한국으로 출발하기위해 프랑크푸르트 공항으로 갔다. 이탈리아에 들어오며 지금까지 줄곳 운전을 해준 기사에게 무사고 운전과 그간의 수고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운전기사는 이탈리아 남쪽 섬 시칠리아 출신이며 50세가 넘었다. 운전하면서도 휘파람을 부르고, 수시로 휴대폰으로 누군가와 수다를 떨며 얘기하는 활달한 사람이었다.

 

끝은 새로운 시작

비행기가 이륙하여 그간을 일정들을 머리 속에서 되돌려 보는 동안 어느 듯 잠이 들었다. 기내식을 주는 시간이 되어 소란스러움 때문에 잠시 꿈꾸었던 회상 테이프는 끊어졌다. 회상이 끝났다고 꿈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끝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말이 있지만, 언젠가 다시 그곳을 찾아 가고 싶다하는 꿈(마음)이 슬슬 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두고두고 꺼내 봐도 행복한 순간순간들은 어느 새 그리움이 되어 내 마음속에 남았다.

(끝)

발상의 전환으로 이루어 낸 轉禍爲福(전화위복)의 도시 -베니스-   

여행일자: 2006년 01월. 글쓴 일자: 2008.01.07.(다음 블로그에서 옮김)

 

<배경음악>: ‘바다로 가자 Vieni sul mar’-카루소(Enrico Caru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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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본섬 건너편에 있는 조르지오 마조레 성당(Basilica di San Giorgio)

 

살인적인 베네치아의 物價

베네치아는 물가가 비싸다 한다. 상수도와 전기를 섬까지 끌어 와야 하고, 하수 처리물을 섬 바깥으로 내보내야 하는 등 사회 간접 비용이 많이 들기도 하거니와, 물건이 섬까지 들어오는 운송비가 많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섬 안에서는 숙박할 수 있다고 해도 가격이 엄청나게 비싸다고 한다.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베니스 근처 거리가 좀 떨어진 곳(차로 10~15분정도 먼 곳은 30분정도)에 지어진 숙박 시설을 이용한다고 한다. 우리 여행 팀도 베네치아 근교의 한 호텔에서 旅裝(여장)을 풀었다.

                         

베네치아-아드리아 만에서의 일출

 

아침에 일어나니 마침 일출 시각이라 해 뜨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해뜨기 직전까지 바다 쪽은 아직 검은 빛깔이었다. 해가 솟을 무렵이 되자 수평선 쪽의 하늘과 바다 빛깔이 붉은 색을 띄더니, 곧 이어 뽀얀 얼굴의 둥근 해가 노란 목테를 두르고 수평선 위로 솟아올랐다. 쑥쑥 콩나물 자라듯이 하늘로 해가 금방금방 높이 올라갔다. 파란 하늘에는 하얀 비행기 구름이 멋지게 한 획을 그어 영역 표시를 해놓았다.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중세의 한 해변 마을 같은 베네치아의 풍경
베네치아의 옛모습를  상상케하는 대운하의 건물들 

 

여행 중 학교(?)를 다 녀오다

호텔을 체크아웃하고 나올 때였다. 인솔자가 호텔에서는 공짜이니 학교를 다녀오라고 말했다. 여기서 학교란 화장실을 말하는 이태리 여행하는 동안 우리 팀이 약속하여 쓰던 은어(?)였다. 수업료란 화장실에 들어갈 때 내는 팁 또는 화장실 사용료를 암시한다.

 

우리들(여행객)이 화장실을 왜 지금 가라고 하지 어리둥절해 하자 여행 인솔자가 그 까닭을 설명해 주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베네치아에서는 수업료(?)가 엄청 비싸다는 것이었다. 베네치아가 섬이다보니 화장실 사용료가 비싸단다(1유로 정도-참고로 다른 이탈리아 지역은 10-20센트). 왜냐하면 오물을 pipeline을 통해 정화 처리 시설이 있는 육지로 보내서 처리하니까 화장실 시설 이용료가 비싸다고 한다.

                            

섬과 운하와 다리로 만들어진 인공 도시 베네치아(베니스)
베네치아로 들어가기 위해서 (페리)배 터미널로 가야 했다. 제법 큰 배(여기선 버스라 함)로 갈아타고 베네치아 섬으로 갔다. 배를 타고 가는 동안 바다에서 베네치아를 보니 흡사 그림에서 보던 중세의 한 해변 마을처럼 보였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대형 크레인과 큰 배가 있는 현대식 큰 항구 도시 모습으로 바뀌었다. 유럽 여행을 꿈꾸는 이들이 프랑스의 파리와 더불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도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살고 싶은 도시 중 하나인 베네치아(베니스)로 오게 된 것이었다. 

 

시장이 열리는 공판장 건물  

창틀 모양이 다양한 아름다운 저택

 

베니스는 영화제가 열리는 리도 섬, 크리스 털(유리) 공업이 발달한 무라노 섬 등 6개의 자연 섬과 177 갈래 운하, 400 여 개의 다리로 이루어진 인공 도시이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으로 유명한 이곳은 중세부터 무역업이 발달하여 이곳 사람들이 실크로드를 왕래하였고, 동방견문록을 쓴 마르코 폴로도 이곳 출신이라 한다.



발상의 전환으로 이루어 낸 轉禍爲福의 도시

언제부터 이 도시를 만들게 되었을까? 베네치아가 처음 생길 때는 쫓겨난 사람들이 만들기 시작했다. 살기 좋은 평원 지방에서 쫓겨나 이곳 바닷가까지 밀려온 사람들이 바닷가 개펄에 나무 파일 (pile)을 박고 땅을 다지고 개척을 했다고 한다. 바다 밑을 북돋우고 땅을 만들고 그 위에 건물을 짓고 다리를 놓아 水上 도시 국가를 건설했다고 하니, 요즘으로 말해자면 간척지 개발이나 토지 개발에 해당하는 사업이었던 셈이다.

 

11세기 초에는 베니스 商船들이 아드리아 海를 거쳐 발칸 반도, 소아시아 등 동방으로부터 융단, 향료 등을 이곳으로 들여왔고, 반대로 이 지방의 소금, 고기, 양털을 수출했다고 한다. 이 도시의 기본 골격은 13세기에 거의 완성을 하였고 14세기까지 이곳은 해상 무역의 중심지로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였으며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이탈리아 최강의 公國이 되었다 한다.

 

'바다의 도시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베네치아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어느 나라도 한번은 전성기를 이룩한다. 그러나 베네치아처럼 끊임없는 노력으로 전성기를 길게 지속하면서도 형태를 달리해 여러 번 가꾸어 간 例는 달리 찾아보기 어렵다"

 

베니스가 이렇게 번창하는 데는 地政學적인 위치도 중요했겠지만, 이 지방 사람들의 개척 정신과 도전 정신, 훌륭한 상술, 항해술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생각되었다.  

                            



CASINO VENEZIA - 대운하 기슭에 있다.


고기 모양의 지도- 무수한 섬과 水路가 보인다. (사진 출처) 인터넷

                                                                                                                                             

물고기 모습의 베네 치아

베네치아는 지도상으로 보면 마치 물고기 모양이다. 물고기의 창자에 해당되는 S자형의 카날 그란데 운하(大運河)가 중심 수로(水路)인데, 넓은 만곡부가 입을 벌린 모습으로 입구를 열어 도시 가운데를 관통하고, 창자의 출구 쪽에 산마르르코 광장이 자리하고 있다.


베네치아의 수많은 운하는 118개 섬 사이를 이어주는 水路 역할을 한다. 대운하를 끼고 옛 수녀원, 성당, 상인 조합 건물들이 있고 리알토 다리와 레초나코 궁전을 볼 수 있었다. 16세기에는 목조 다리였던 리알토 다리를 軍船이 다닐 수 있게 가운데를 높여 재건했다고 한다.  

                           

베네치아의 명물 리 알토 다리-한편의 액자그림이다

 

그란데 운하 주위에는 神의 집이라 할 수 있는 교회(성당)뿐만 아니라 궁전이나 귀족 저택 등이 지어져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이곳이 상류층 귀족이나 왕족이 선호했던 곳임을 알 수 있었다. 건물들은 비잔틴과 고딕 또는 두 양식이 복합된 양식들로 지어졌지만 바로크 양식의 건물과 심지어 이슬람 양식(아랍風)의 건물도 볼 수 있었다.

                            

한쪽이 약간 침하하고 대운하 기슭의 저택

 

그러나 1천년간 도도한 아름다움을 뽐내던 베네치아가 지반 침하와 해수면 상승, 잦은 선박 통행으로 인한 건물 벽면의 침식 등으로 섬 전체가 조금씩 물에 잠기면서 가라앉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물고기가 물 속으로 잠수하는 것은 당연하지!'라는 썰렁한(?) 농담이 사실이 아니길 빌었다.

 

베네치아의 중심 – 산마르코(San Marco) 성당, 산마르코 광장, 두칼레 궁전

값을 매길 수 없는 산마르코 교회(성당)  
황금빛으로 빛나는 산마르코 성당 dome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해야 하는 산마르코 성당(Basilica di San Marco)   참조 링크: 산 마르코 대성당 - 나무위키

베네치아에 중심관장인 산마르코 광장 한켠에는 산마르코 성당이 있다.  X선 검사기를 통과해야 하는 등 엄격한 보안검사가 있었다. 성당 안에 값진 보물이  많아서 인지는 몰라도 배낭을 메고 들어가거나 큰 백을 가지고 성당 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입구에서 통제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까다로왔던  보안 검사의 이유를 알것 같았다.  성당 천정과 벽에 도배된 어마어마한 양의 황금빛에 우리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야말로 누런 것은 모두 황금으로 칠해 지거나 황금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니, 가격을 셈해 보는 것은 엄두도 나지 않거니와 오히려 무덤덤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베네치아의 사회, 정치 중심지 였던 산마르코 광장

지난 수세기 동안 산마르코 광장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광장 중의 하나로 손꼽혔다. 엄청난 크기의 산마르코 광장은 크기가 축구장 넓이만한 규모이다.  산마르코 광장을 지키는 비둘기 떼들이 관광객을 친구처럼 여기는지 주위로 몰려들었다. 이 광장에는 유명한 카페가 많은데 1720년에 개업한 유서 깊은 Florian 카페(꽃 다방)는 괴테, 바이런이 드나들었다 하며, 스탕달, 뒤마, 바이런이 자주 찾았던 카페 Quadri Venezia도 유명하다고 한다.

 

이 광장 주변에는 종탑, 시계탑과 법정, 산마르코 교회와 두칼레 궁전이 각기 제 모습을 봐 달라고 뽐내고 있었다. 주차 타워처럼 생긴 높이가 100미터가 넘는 종탑은 이전의 화려했던  榮華(영화)를 보여 준다.  산마르코 광장 주변의 풍물을 즐기며  카페에서 한 때를 보내는 것도 멋진 추억이 될 것이다. 

 

두칼레 궁전과 탄식 의 다리

불꽃모양 아치(arch) 기둥 위에는 목걸이 장식같은 tondo(벽면의 원형 돋을새김)와 로버 모양의 기둥 머리가 건물의 아름다움을 대변해준다. 두칼레 궁전 중앙 벽에는 성 마르코(St. Marco)를 상징하는 사자 문장이 걸려 있어 베네치아의 Icon(아이콘)을 알려준다. 

 불꽃모양 아치(arch) 기둥 위에는 목걸이 장식같은 tondo
아치(arch) 기둥이 멋진 두칼레 궁전과 분홍색의 크리스털 가로등

두칼레 궁전 옆에는 소위 ‘탄식의 다리’가 있다. 죄수(囚人)들이 다리를 건너 감옥으로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오기 어려워 탄식과 한숨을 쉬었다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이 다리가 더욱 유명해진 것은 카사노바가 이 감옥에 갇힌 적이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털 공업 및 유리공업이 발달하여서인지, 이곳의 가로등은 일반 유리가 아닌 크리스털로 만들어졌다. 가로등을 싸고 있는 연분홍빛 원통 부분이 크리스털이다. 아쉽게도 낮 관광이라 밤 풍경은 볼 수 없었다.


산마르코 광장에서 가로등 불빛 아래 커피 한잔과 함께 멋진 음악을 들으며 바다를 바라보는 느낌은 어떨까? 이 곳을 다녀간 많은 시인과 음악가들의 멋진 작품이 우연은 아닌 것 같았다.

 

Mime은 또 하나의 Mime을 만들고                           

백색 석고 분장으로 연기중인 마임 예술가.(사진 :인터넷)

 

베네치아 거리를 이동하는 중에 재미있는 광경을 보고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가면을 쓴 얼굴에다 얼굴 주위와 목 부위를 온통 흰색으로 칠을 하고 하얀 옷에 장갑을 낀 사람이 마임(mime)을 하고 있었다. 마치 조각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지나가던 사람이 이것이 과연 조각인지 아닌지 움직이는 낌새를 느껴 보려는지 그 역시 미동도 않고 보고 있었다. 데칼코마니 같은 두 사람의 모습이 나에게는 또 하나의 마임처럼 느껴졌다.

 

 Master(匠人 장인)의 손길로 만들어지는 유리(크리스털) 작품

 마침 가면 축제를 한참 준비 중인 산마르코 광장 한 편에서는 환경 보호론자들이 데모(퍼포먼스)를 벌이고 있었다. 이들 때문에 산마르코 성당 관람에 지장이 있어 크리스털(유리) 박물관을 먼저 갔다. 유리 박물관 관람은 예약제로 되어 있어 정해진 시간에만 관람을 할 수 있었다.

 

달궈진 유리를 불거나 잘라서 멋있는 병이나 유리 조각품을 만드는 유리 세공의 달인(마스터)을 볼 수 있었다. 유리를 마치 엿장수 엿 주무르듯이 하였다. 유리 공예 전시실에는 갖가지 유리 제품들이 저마다의 스타일을 뽐내면서 여행자를 유혹하였다. 으리으리한 샹들리에, 멋진 크리스털 조각품, 술잔, 거울 등 여자들 정신 빼놓기 십상인 아기자기한 액세서리들이 즐비하였다. 이런 크리스 제품 중 고가품이나 작품성이 있는 것은 장인들의 이름과 제품의 고유 넘버가 새겨져 있다.  두드리면 종소리가 나는 크리스 그릇도 재미있었지만, 유리 쟁반을 망치로 때려 보이며 깨지지 않음을 과시하였는데 과연 유리에 무슨 금속을 배합했길래 저렇게 단단한 지 궁금하였다.

  

교통수단은 전부 배이고 바퀴달린 운송이라고는 자전거조차도 볼 수 없었다.
도시 전체가 온통 섬이다 보니 교통수단은 거의 전부가 배다. 이웃집(섬)에 가는 것도 배가 더 편리하다고 하며, 배에서 내리면 바로 현관 입구인 집도 흔히 볼 수 있었다. 배의 수송 인원이나 운송 속도에 따라 수상 버스, 수상택시(바포레또)로 나뉘고, 앰뷸런스 배, 화장실 오물 수거용 배도 있으며 야채 장사도 배에서 장사를 한다. 과장해서 말하면 이 섬 안에서 바퀴 달린 물건이라고는 유모차뿐이라고 한다. 워낙 섬이 많고 좁으니 차들이 시원하게 달릴 곳도 없겠지만 그네들의 환경 보존에 대한 열망과 관심은 본받을 만했다.                                        

                          

섬과 섬을 연결하는 전형적인 다리를 지나는 곤돌라

낭만적인 곤돌라

운하의 도시 베니스를 더욱 낭만적인 곳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곤돌라다. 이탈리아어로 '흔들리다'는 뜻을 가진 곤돌라는 길이 10m 이내 너비1.2m~1.6m의 폭이 좁은 배로, 뱃머리와 선미가 휘어져 약간 삐딱한 모습이며 한쪽으로만 노를 젓기 때문에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하다. 노를 젓기도 하지만 수로가 좁은 곳에서는 뱃사공이 수로 옆 건물 벽을 손이나 발로 밀어 방향을 틀거나, 지상에 튀어 나온 부분을 교묘히 발로 밀어 내며 앞으로 나아간다. 미로처럼 얽혀 있는 운하를 빠져나가는 곤돌라는 대중교통 수단이기보다는 관광선이기 때문에 탑승료가 비싸다.

 

곤돌라를 타면 곤돌 리오네(곤돌라 가수)가 노래를 들려주기도 하는데, 우리는 가수가 없는 싼 배를 탔다. 그렇지만 일행 중 교회 성가대 하시는 분이 이탈리아 칸초네를 불러 주어 우리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이 때 부른 노래 곡목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여행하는 도중 기대하지 않았던 이런 삽화(揷話) 같은 에피소드들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법이다.                             

베네치아의 포토 포인트(사진: 인터넷) - 건너편에 보이는 것은 산 마조레 성당

 
수상택시(바포레또)를 타고 대운하를 다 보고 나오면 약간 넓은 바다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배를 처음 탔던 주차장(?)까지(여객선 터미널) 바포레또가 꽤 빠른 속력으로 007 썬더볼 작전에서 나왔던 장면을 연출해 보인다. 배가 빠른 속력으로 S 자나 Z를 그리며 내달리면 원심력에 사람들은 배 바깥으로 떨어질까 ‘악’소리를 지르게 댄다. 그러나 늘 그런 장면이 연출되는 것은 아니고 바포레또 운전수가 흥이 나고 해양 경찰 단속이 없을 때 그런 액션을 보여준다고 한다. 바포레또의 S 자 묘기가 이번 여행의 피날레를 장식해 주는구나! 라고 느꼈다.

아직도 베네치아에서 볼거리가 많지만 다음 행선지인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로까지 가는 여정이 남아 있어 점심 식사 후 바로 출발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는 것이 단체 여행의 단점이라고 느꼈다.
(계속)

 

꽃, 꽃, 꽃의 도시 피렌체
 

여행일자: 2006년 01월. 글쓴 일자: 2008.01.07.(다음 블로그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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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제 -    문예부흥의 꽃을 피우고, 두오모의 꽃봉오리 쿠폴라와 플로렌스(꽃) 이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 피렌체

하얀색, 분홍색, 녹색의 대리석 모자이크로 된 장식된 피렌체의 두오모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피렌체의 부호(富豪) 프란체스코 델 조콘다를 위해 그 부인인 엘리자베타(Elisabetta)를 그린 초상을 그린 것이 ‘모나리자’이다. 이 ‘모나리자’ 배경 풍경이 이곳 피렌체이다. 피렌체는 아펜니노 산맥 중앙의 분지 지역 토스카나 지방에 있으며 이탈리아 교통의 要地(요지)로 영어로 표기하면 ‘플로렌스’ 즉 ‘꽃’이다.

 

베키오 다리 위에는 금은 세공 보석상들이 즐비하다. 연무가 끼어 도시가 신비감이 든다.

도시 이름에 걸맞게 오늘날 이 도시에서는 자동차 배기가스를 줄이기 위해 전지 자동차나 자전거를 주로 이용하도록 권장하여 공해 없는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피렌체는 꽃처럼 아름다운 도시라는 이름과 달리 개똥, 말똥이 거리에 많았다. 우리도 그랬지만 한국 단체 여행객들이 뒷사람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 '개똥!' 하고 외치고 다니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보이는 피렌체 시가지와 꽃봉오리처럼 생긴 두오모 쿠폴라(지붕)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집시의 음악을 들으며

피렌체를 조망하기 위해 미켈란젤로 언덕에 올랐다. 마침 집시(?)들이 광장 한곳에서 바이올린과 전자 오르간으로 음악을 연주하며 멜랑콜리한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언덕 아래 붉은 지붕들이 늘어선 피렌체 시내를 내려다 보니, 시가지 속에 두오모의 쿠폴라(둥근 돔지붕)가 꽃봉오리처럼 솟아 있었다. 흐릿한 날씨 속에 쓸쓸한 분위기의 노래가 붉은 갈색 두오모 지붕 색깔과 어울린다. 이색적이고 멋진 아름다운 풍광과 음악을 마음 깊은 곳에 새겨두었다. 피렌체의 여행 앨범에 꽂아 두고, 생각나면 한 번씩 꺼내보고 되뇌고 싶은 광경이었다.

 

르네상스(문예부흥)가 처음 꽃 핀 도시 피렌체

모든 사상과 예술이 오로지 가톨릭교회와 신을 중심(神本主義)으로 이루어져 오던 유럽의 중세문화가, 15-16세기를 거치면서 人本主義 즉 사람을 중심으로 한 철학과 예술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 르네상스(문예부흥)이다. 쉽게 말하자면 그림을 그려도 종교화 성화만 그리다가 이제 사람 나오는 그림도 그리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 시작점에 바로 피렌체가 있고 단테와 다 빈치 그리고 미켈란젤로가 있었다.        

 

       
       산 지오반니 세례당의 ‘천국의 문’-복제품- 
  
   단테의 생가 앞 보도블록에 나타난 단테의 얼굴(?)

 

단테의 생가 앞에서 단테의 얼굴을 보다

단테의 생가 앞 보도 블록에는 누가 일부러 만들었는지 우연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물을 뿌리면 단테의 얼굴이 나타나는 곳이 있었다. 신곡을 쓴 단테는 이전의 라틴 문학보다 구어체 이탈리아어로 글을 썼기 때문에, 접근하기 어려웠던 문학을 쉬운 언어로 평민에게 선물해 주었다. 단테 외에 괴테, 세르반테스도 이탈리아어로 글을 썼다. 한편 르네상스의 3대 문학가로는 단테 외에  데카메론을 쓴 보카치오와 페트라르카가 유명하다. 피렌체는 단테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르네상스 3대 미술가(미켈란젤로, 다 빈치, 라파엘로)들이 활동하고 그들이 산책하며 걸었던 거리가 피렌체의 거리이다. 나도 피렌체의 거리를 걸으며 先人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기로 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문화도 그렇게...

문예 부흥이 생길 당시 토스카나는 중앙 정부로부터 독립된 하나의 도시국가 형태였다. 그 당시 이 지방의 실권자였던 메디치 가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음으로써 더욱 더 르네상스가 발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도 이탈리아가 유행의 첨단을 가고 있고 세계적인 명품을 많이 갖고 있지만, 르네상스 당시에만 하더라도 프랑스 귀족들은 이 곳에서 사온 물건을 사교계에 자랑하였다고 한다. 문화의 속성상 고급문화 상부 문화가 저급, 하부 문화로 전파되듯이,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솟아난 르네상스의 불꽃은 프랑스로 나아가 전 유럽에 큰 불길을 일으키게 되었을 것이다.

 

중세시대 여자들의 복장을 보면 목은 졸라매고, 귓불이 늘어지고, 가슴이 크다. 화장실이 마땅한 게 없어 치마폭을 넓게 해서 소변 통을 감추고 다녔다고 한다. 이러한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서 몇 가지 발명이 있게 되었는데, 소변보는 동안 옷이 안 젖게 하이힐이 발명되었고, 처진 여성 유방을 보완하기 위해 브래지어가 발명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소위 크라운 형태라는 보석 반지 알을 집는 기술은 반지업계의 혁명적인 기술로 피렌체의 반지 세공 기술이 최고라고 한다.

 

중세 시대 피렌체에서 활동했던 길드 상인조합에선 민주적 절차에 따라 서로 의논했다고 한다. casino 도 원래 귀족 고급 사교장으로 種子 돈 꿔주는 貸付業 기능이었다고 하는데 이런 것들이 은행 업무의 효시가 되었다고 한다. casino 에는 성직자들도 밤에 놀러 왔다고 하며, 남자들은 턱시도 차림만 허용되었고 여자들은 진주 목걸이 치장에 기다란 손 장갑을 끼고 출입하였다 한다. 고전 명화에서 흔히 보는 무도회에 나오는 남여 복장을 연상하면 될 듯하다.

 

피렌체의 명물과 명품

피노키오의 무대가 피렌체이어서인지 쇼핑 가게에서는 장난감이 제법 보이지만, 거리의 많은 상점은 단일 품목만 파는 가게들로 명장들의 명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토스카 지역에 있는 구찌 본사 규모는 그리 크기 않으나 소량 생산이지만 명품 생산을 하는 곳으로 명성이 높다. 특히  보석 가공과 가죽 세공의 세계적인 명성은 몇 대를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이 곳의 명산품인 발사믹 식초는 샐러드에 사용하면 맛이 독특하다고 하여 구입해 봤는데, 생각보다 신맛이 강한 것 같았다. 또한 올리브 오일로 만든 아토피용 비누가 있어 그걸로 머리를 감아 보았는데 머리칼이 오히려 뻣뻣해지는 느낌이었다. 판매하는 사람 말로는 이 비누의 특성이 그렇다고 하며, 뻣뻣한 기운을 없애기 위해 린스로 행구면 아토피 효과가 없어지니까 식초 한 방울을 넣은 물로 머리를 행구라는 설명이 있었는데 의학적, 화학적 메커니즘은 잘 모르겠다.

        

꽃의 성모마리아 대성당(두오모)의 붉은 쿠폴라(지붕)가 마치 꽃봉오리처럼 아름답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두오모(대성당) 꽃의 산타 마리아 대성당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두오모(대성당)는 꽃의 산타 마리아 대성당(Santa Maria del Fiore)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데 3만 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규모라고 한다. 대리석 모자이크 장식의 벽체는 장관을 연출하며, 내부는 전성기 고딕형인 뾰죽한 아치들로 받쳐져 있는데 천정 원개는 미켈란젤로의 불후의 명작인 "최후의 심판"이 프레스코 형식으로 그려져 있고 제단 왼쪽으로는 그의 미완의 대작인"피에타"가 있다. 흰색과 핑크, 녹색의 대리석으로 된 외관은 장엄하면서도 꽃의 산타 마리아라는 명성에 걸맞는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또한 두오모 옆의 조토의 종탑 또한 두오모 못지않게 훌륭하게 장식되어 있는데, 이곳에 올라가면 두오모의 모습을 잘 감상 할 수 있다 한다. 하지만 두오모나 조토의 종탑을 올라 가려면 시간 여유가 좀 더 있어야 하는데, 여행 일정상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다양한 대리석 모자이크로 장식된 두오모와 조토의 종탑
바다의 신(Neptune)조각이 있는 분수

 

피렌체 거리는 박물관 거리

피렌체 거리 여기저기에 유적들이 널려 있고 예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시뇨리아 광장은 피렌체의 보석이자 조각 전시장이다.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에 전시된 조각품들 중에는 진품도 있고 모조품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다비드 조각상(모작)의 눈알이 보는 각도에 따라 돌아간다는 것이다. 조각상의 눈알이 돌아가는 느낌은 착시 현상인지는 모르지만, 착한 사람의 눈에만 그렇게 보인다는 현지 가이드의 농담을 들었다.       

 다비드(복제품) -진품은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다.

쟘 볼로냐의 명작 ‘사비나 여인의 겁탈’은 대리석으로 조각한 것으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골격과 근육의 표현이 훌륭하고 아름다우며, 각 인물들의 표정과 긴장된 자세는 압권이다. 구름이 약간 낀 날씨여서 해 그림자는 거의 없었다. 야외 조각품을 감상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날씨였다.



       쟘 볼로냐의 명작 ‘사비나 여인의 겁탈’

          (세부 확대)-섬세한 근육 묘사가 놀랍다.

                            

                                            

                                                     베키오 궁전(국기가 꽂힌 곳)과 그 옆의 우피치 미술관

 

시뇨리아 광장의 한쪽 옆에 있 우피치 미술관은 르네상스 시대 걸작을 모아 놓은 미술관인데, 늘 인기가 많아 미술관의 입장 대기시간은 예약을 하지 않은 경우 평균 2-3시간이라고 한다. 언젠가 다시 이 곳에 와서 우피치 미술관을 보리라 생각했다.

 

붉게 물든 석양이 검푸른 저녁하늘로 바뀌는 동안 버스를 달려 베네치아로 들어 왔을 때는 이미 깜깜한 밤이 되었다.

베네치아로 가는 동안에 만난 석양 풍경

(계속)

개선 행진 속에는 숨겨진 뜻이 있지 않았을까? -로마-

 

여행일자: 2006년 01월. 글쓴 일자: 2008.01.07.(다음 블로그에서 옮김) 

<배경음악>:추후 링크가 끊어지면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 나올 수도 있으며, 아래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보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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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 중 <개선 행진곡>: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 공연 중

 

  고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콜로세움 앞 도로

문화 관광 산업의 한 요소인 컨텐츠(얘깃거리) 

로마에 오게 되면 맨 먼저 듣게 되는 단어는 아마 ROMA와 AMOR(사랑)라는 단어이지 싶다. 우연이겠지만 이것 또한 로마에 관한 또 하나의 얘깃거리가 된다. 관광 여행할 때는 대개 그 지역의 이름난 곳이나 명승고적을 찾게 되는데, 그런 곳은 소위 얘깃거리(Episode)가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의 명승고적이나 거리도 좀 더 많은 얘깃거리들을 개발하여 관광객들이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런 얘깃거리를 하루아침에 만들어 낼 수는 없겠지만, 오래된 우리 역사와 전통 속에는 그런 얘깃거리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이런 얘깃거리를 찾아 개발하여 우리의 관광 상품의 모티브로 삼을 수는 없을까?

 

고대 로마의 건축물이나 장신구에서 영감을 얻거나 그 모양을 모방 또는 변형시킨다는 이태리의 명품 디자이너의 얘기를 들은 바가 있다. 한편 우리나라 축구 응원단의 ‘붉은 악마’의 디자인도 ‘蚩尤(치우)’의 모습을 형상화한 디자인이라고 들었다. 이처럼 문화 속에 담겨 있는 재료들을 산업 디자인 또는 영화나 게임 산업의 캐릭터나 episode로 접목 시킨다던지 문화 관광 산업의 컨텐츠로 응용 개발하면 좋을 것 같다.

         

  호텔 주변을 산책하다 수집한 우산소나무(?) 솔방울이 제법 굵다.

중세 로마 모습을 상상해 보며...

로마 시내(舊 시가)에선 큰 버스의 출입이 금지되므로 시내 관광을 하려면 상당한 발품을 팔아야 했다. 로마 거리에서는 요란한 빌딩이나 네온사인이나 전봇대를 볼 수 없고 시끌벅적한 노래나 음악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다만 요란한 스쿠터 소리가 귀에 거슬릴 뿐이었다.

 

가로등이 거미줄에 매달린 벌레처럼 대롱대롱 촌스럽게(?) 거리 가운데에 매달려 있다. 가게 쇼윈도의 전등과 스테인리스 창틀, 오토바이, 자동차, 그리고 휴대폰만 보이지 않는다면 중세 모습으로 돌아가게 될 것 같다.

        

콜로세움 앞의 마차. 사진 모델 로마 병사도 있다.

건물이 오래되어서 보기 뭐하다 구시대의 잔재다 해서 때려 부수고 헐어 버린 뒤, 아파트나 빌딩을 지어 올리는 우리의 모습과는 아주 다르다. 오랜 세월 王都로 훌륭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 서울도 잘 개발하면 로마 못지않은 관광지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하는 바램을 가져 보았다. 좋은 관광지가 되려면 풍경도 볼만해야 하겠지만 그 속에 담고 있는 얘기가 풍성하고 재미있어야 할 것이다.

 

로마 구경을 이곳 저곳 다닐 때 여러 동선(動線)을 그려 볼 수 있겠지만 대개 무슨 무슨 언덕을 거쳐 가게 되어 있다. 이 중 오늘날의 영어의 어원이 되는 언덕들의 이름이 있다. 팔라티노 palatino에서 palace 왕궁의 어원이, 캄피돌리오 에서 capital 수도의 어원이 만들어 졌다고 한다.

 

안전사고를 막기 위한 옛사람들의 지혜

로마의 관광은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콜로세움은 1층은 도리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의 아치로 여러 양식이 복합돼 있는데, 오늘날에 보아도 그 규모가 굉장히 크고 놀랍다. 물론 이 곳에 출입하는 사람들의 순서도 신분에 따라 배정하였겠지만, 안전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충분한 개수의 출입구와 통로 배치를 잘 만들어 놓아 수많은 군중들이 불과 15분 내에 다 빠져 나올 정도라고 한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서울역 귀성객 압사 사건에서 보듯이, 계단이 있는 곳에 많은 사람이 서로 내려가려고 밀치다보면 넘어져서 사고가 날 개연성이 높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옛사람들의 지혜는 놀랄 만하다. 만약, 개수가 적고 조그만 출입구였다면 아무리 질서를 잘 지킨다해도 안전사고를 피할 수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전쟁의 傷痕(상흔) 탄환 자국이 남아 있는 콜로세움

그리고 콜로세움의 부서진 담장에 새겨진 전쟁(세계대전)의 상흔도 놓치지 말고 봐야 한다. 전쟁 때 입은 총탄 자국들이 보는 이에게도 아픔으로 다가온다.

 

고대 로마의 배꼽 ‘포로 로마노’

                       

로마의 배꼽 표지가 있는 돌판      -사진 출처:인터넷-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우측 뒤는 콜로세움의 일부

 

콜로세움 옆에 있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개선문을 지나 포로 로마노로 들어갔다. 포로 로마노는 ‘로마 광장의 뜻’으로 고대 로마의 정치, 사법, 상업, 종교 활동의 중심지로 화려했던 고대 로마의 배꼽이자 노란 자위 터이다. 실제 ‘로마의 배꼽(UMBILICUS URBIS ROMAE)’이란 돌 판이 벽에 붙어 있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흙먼지가 날리는 그야말로 황성 옛터의 모습이다. 포로 로마노 내부에는 아직도 발굴 중인 모습을 볼 수 있고, 비포장된 길 옆엔 유적지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곳도 있었다.

          

(좌)티투스 개선문 , (그 아래) 베스타 신전, (우) 카스트로 폴록스 신전 기둥

포로 로마노에서 가장 신성시 된 베스타 신전에선, 여섯 명의 처녀가 30년 동안 신전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지켜야 했고 그 30년 동안에는 처녀성을 유지해야 했다고 한다. 이를 어길 경우 생매장 당했다는 얘기를 들어 보면 당시의 여성관이 어떠했는지 짐작된다.

 

한편, 가톨릭 성당 구조의 원형에 해당하는 바실리카를 포로 로마노에서 볼 수 있다. 학생 때 세계사 시간에 무턱대고 외웠던 단어 중 하나인 바실리카가 문득 오래된 앨범에서 끄집어낸 사진처럼 나타났다. 바실리카는 로마시대의 법정이나 상업거래소, 집회장, 때로는 궁정 등에도 사용된 직사각형 평면의 공공 건축물인데, 내부(회당 포함)는 중앙의 폭넓은 본당을 끼고 좌우로 각각 1열의 측랑을 갖춘 3랑(廊) 구성이다. 유럽의 오래된 성당의 내부 구조가 대개 다 이런 모습이다.

         

포로 로마노에서 시저를 만나 본다.

이곳 포로 로마노는 시저를 화장한 곳으로 알려진 곳과 로마시대의 최고 정치기관이었던 원로원이 있어 시저를 빼고선 얘기가 안 된다. 고대 로마는 평민 대표 호민관 제도 도입과 12헌법을 도입하여 최초의 평민을 위한 성문법이 만들어 지긴 했었지만 여전히 귀족 중심의 국가였다.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명연설가였던 시저(카이사르)가 함께 3두 정치(트로이카) 체제로 고대 로마를 이끌었지만, 결국 황제 지배 체제로 넘어가게 된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veni, vidi, vici)’의 세 마디로 된 간단 명료한 전쟁 보고와 함께 시저가 죽기 직전 말했다는 '브루투스 너마저도...'는 시저의 말 중 가장 유명한 말일 것이다. 시저는 人心의 향방을 정확하게 아는 민중파 정치가로서 사회 개혁의 실효를 거두었다. ‘동지 여러분!, 너와 나는 하나’, ‘시민 여러분’ 이것도 그의 말이다. 그는 명연설가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대중과 부하의 마음을 잘 읽고 선동할 수 있었다는 것이 성공의 이유였을 것이다. 그의 성공의 또 다른 이유는 빠른 정보통신인 파발을 사용하였다는 것인데, 정보가 빨라야 성공한다는 것은 오늘날에도 적용되는 얘기일 것이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개선문

 

현존하는 로마의 개선문중 가장 오래된 티투스 아치와 독특한 우산 모양의 소나무(?)

개선 행진 뒤에는 숨은 뜻이 있지 않았을까?

포로 로마노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개선문 말고도 고대 로마 당시 사용 되었던 개선문이 두 개나 더 있다. 전쟁에서 돌아 온 군인들이 로망에 입성했더라도 이 개선문을 거쳐 행진하여 군중들의 환호를 받고 황제에게 보고를 하지 않고선 아직 일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전쟁터에 나간 군인들이 사람을 죽였던 정신적 충격을 군중의 환호 속에 다소나마 떨어내어야 했을 것이고, 이런 요란스러운 한바탕 축제가 군인들에겐 씻김굿이었을 것이다. 사람을 쳐 죽이고 찔러 죽였던 끔직한 악몽에 시달리지 않고 잠을 자려면 어떤 형식이 되었건 정신적 치료가 필요했으리라.

        

 

끝이 아득한 큰 규모의 전차 경주장

‘유럽 여행 4대 썰렁’ 중 ‘로마의 썰렁(?)’

포로 로마노를 나와 팔라티노 언덕을 거쳐 로마 전차 경주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 곳은 소위 ‘유럽여행 4대 썰렁’ 중의 하나라는 가이드의 말이 있었지만, 그 규모는 오늘날 보아도 만만치 않게 크고 관중석 등 시설이 잘 설계되어 있다. 아마도 썰렁이라고 말했던 사람들은 벤허 영화에서 보았던 웅장하고 멋진 전차 경주장을 상상했던 탓이 아니었을까?

 

참고로 방금 말한 로마의 전차 경주장 외에 ‘유럽 여행 4대 썰렁’ 에 대해 몇 개 더 언급해 보면 다음과 같다. 덴마크 코펜하겐의 항구에 설치되어 있는 인어 공주 동상, 벨기에 브뤼셀의 오줌싸게 동상,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의 황금지붕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이름과 소문과 달리 그 규모가 작고 초라하거나, 주위 풍경이 지저분하고 조악하여 이러한 ‘썰렁’이라는 악평을 받고 있다 한다.

 

로마를 배경으로 한 영화 ‘로마의 휴일’

로마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중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 펙이 주연한 ‘로마의 휴일’일 것이다. 이 영화를 만드는데 돈을 댄 사람이 마피아들이라는 얘기도 흥미롭지만, 더 재미있는 것은 1953년에 만든 이 영화에서 유럽 통합을 얘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버스로 이동 중간에 인솔자가 이 비디오를 틀어 주어 감상할 수 있었다. 여행의 의미와 재미를 배가시켜 주려는 투어 인솔자의 세심한 배려가 고마왔다.

 

대부분의 외국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새로운 출발로 설정된다.

‘로마의 휴일’은 로마의 명승고적을 영화 배경으로 한 코믹 사랑 얘기이다. 우리나라와 달리 외국의 로맨스(사랑) 영화는 가슴 아픈(슬픈?) 장면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이 영화에서도 미국 서부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인공의 떠나가기를 보여 준다. 대개의 서부 영화의 결말은 서부의 총잡이가 마을의 평화를 이루어 낸 뒤 그를 사랑(연모) 하는 여인을 두고 떠나는 장면으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 옛날 얘기 같았으면 결혼하여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더라! 식의 해피 엔딩으로 끝났겠지만, 서부 영화는 항상 마지막 장면이 새로운 출발로 설정되어 진다.

 

이 ‘로마의 휴일’에서는 서로 사랑하지만 공주(오드리 헵번)와 기자(그레고리 펙)는 다시 자신의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기자회견 장면에서 기자 는 공주를 사랑하기 때문에, 톱뉴스가 될 수도 있는 그녀의 로마에서의 여러 사건(해프닝) 사진들을 신문사에 건네지 않고 선물이라며 그녀에게 몰래 주게 된다. 결국 이 둘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별을 함으로써 새로운 삶을 향해 나가게 된다.

 

‘로마의 휴일’에 소개된 명소를 몇 군데 둘러본다.

전차 경주장을 돌아보고 길을 따라 내려오면 이 영화에서 ‘진실의 입’ 으로 유명해진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틴 교회가 나온다. 교회의 입구 왼쪽 벽에 ‘진실의 입’이 있는데 실제로는 로마시대 하수구 뚜껑이었다 한다. 흉악한 얼굴 모습은 바다의 神인 트리톤의 얼굴로서 거짓말쟁이가 손을 넣으면 입이 다물어 진다는 전설이 있다.                    

 

진실의 입에 손을 넣고.- '로마의 휴일‘ 따라하기

영화에선 기자(그레고리 펙)가 여기에다 손을 넣고선 악! 소리를 질러 대며 빼려는 액션을 취하자 당황한 공주(헵번)가 ‘진실의 입’속에 들어간 손과 팔을 잡아당기는 모습으로 촬영되었다. 관광객들도 또한 그러한 포즈로 사진을 찍고 즐거워한다. 로마의 휴일 때문에 흉악한 실제 모습과 달리 로맨틱한 명소가 되어 항상 사진 찍으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비수기에 방문한 나도 이곳에 들어가는데 대기 시간이 30분 이상이 걸렸다. 성수기에는 아침 일찍 서둘러야 대기 시간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유명한 트레비 분수에선 젤라토(아이스크림)를 먹으며 동전을 던져 본다. 뒤돌아서서 이 분수에 동전을 던져넣으면 로마를 다시 방문할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동전이야 안 던진들 어떠랴만 그래도 이곳에 와서 이런 동전 던지기와 아이스크림 먹기는 하나의 추억이 될 것이다.

                    

젤라토를 먹으며  트래비 분수에서 동전 던지기

로마는 곳곳에 분수가 있어 과연 분수의 도시라 할 만하다. 이런 분수들은 로마인들의 治水 능력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뜨거운 여름 더위에 분수 물줄기를 뿌려댐으로써 광장을 다소나마 식히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으리라 짐작되었다'

 

스페인 광장 앞의 분수. 우리가 갔을 때는 겨울이었고 보수 중이라 사진은 인터넷에서 가져왔다

 스페인 광장은 ‘로마의 휴일’에서 공주가 아이스크림 먹었던 장소로 유명해졌지만, 요즈음은 광장을 더럽힌다 해서 스페인 광장(계단)에서 아이스크림 먹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17세기에 스페인 대사관이 있었던 곳이라 그 이름이 스페인광장이 되었다고 하는데, 바쁜 일정이 아니라면 한두 시간 잠시 일정을 접고 독서나 일광욕으로 시간을 보내기에 좋은 곳이다. 계단 앞에 있는 돛단배 모양의 분수가 눈에 띄는데 유명 건축가 베르니니의 아버지인 피에트로가 만든 것이라 한다. 로마를 찾기 전 이  ‘로마의 휴일’ 영화를 통해 50여 년 전의 로마 모습을 한번 보고 간다면 보다 즐거운 旅程(여정)이 되지 않을까.

 

(계속)

주의 영광을 위해 예술가들은 자신의 혼을 바치고...-바티칸-

여행일자: 2006년 01월. 글쓴 일자: 2008.01.07.(다음 블로그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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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냐정원(바티칸 박물관 앞뜰)과 귀족의 상징인 솔방울

 

바티칸 박물관과 시스티나 성당, 베드로 성당

어제는 폼페이에서 고대를 만났지만 오늘은 로마에서 중세를 만나러 가기로 한다. 로마 시내와 바티칸을 하루에 관광할 때는 반드시 바티칸을 먼저 가도록 해야 한다. 특히 여름철에는 바티칸 박물관 입장 대기에만 몇 시간 소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관람 순서는 바티칸 박물관과 시스티나 성당, 베드로 성당 순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바티칸 박물관 역시 세계적 박물관이다 보니 자세히 보려면 하루라도 모자랄 것이지만, 몇 시간 내에 관람을 끝내야 하는 우리 같은 단체 관람객들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몇 가지만 골라 관람 할 수밖에 없다. 우리말로 인쇄된 박물관 안내장이 있었는데 국력 신장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 대기업의 사회 문화 기부의 덕택이다. 작지만 자긍심과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피에타 상의 성모 마리아는 너무 젊다  

Pieta(신이여 불쌍히 여기소서!’의 뜻)는 마리아가 예수의 시신을 무릎에 안은 구도의 작품을 말한다. 종교적, 예술적 의미가 어떤 지는 모르겠지만, 예수에 비해 너무나 젊은 성모 마리아이다. 

 

 

                  미켈란젤로의 Pieta 像

 

꿈틀대는 대리석 라오콘의 군상

바티칸 박물관에서 라오콘의 군상과 카라칼라 황제 목욕탕에서 가져온 조각품 등을 둘러 본 다음, 미켈란젤로의 역작인 [천지창조]와 시스티나 성당 제단 벽화를 감상하였다.

                          

 

                                           살아 꿈틀대는 근육이 인상적인 라오콘의 群像 

 

라오콘의 군상에 대해서는 미술 사학자 노성두 님의 글 중 일부를 옮겨 본다.

참고 사이트: http://www.royalwine.net/cgi-bin/ez/ezboard.cgi?db=db03&action=read&dbf=2&page=3&depth=1

 

(앞부분 생략)

부풀어 오른 사지의 근육과 제멋대로 표류하는 뼈대의 긴장을 꿈틀대는 대리석으로 옮겨낸 헬레니즘 바로크의 표현적 수사학 앞에서 그들은 말을 잃고 말았다. 고대 미술은 오직 優美로운 조화와 절제된 崇嚴의 형식이라고 알았던 그들에게 라오콘의 격정 형식은 사뭇 생소할 수밖에. 하루아침에 아프로디테의 감미로운 이념으로부터 라오콘의 절박한 사상으로 건너뛰기란 스튁스 강의 이편과 저편보다 더 까마득했을 것이다.

 

라오콘 군상은 소용돌이치는 피라미드 구성으로 짜였다. 활처럼 긴장한 아버지의 척추가 소용돌이의 종축이다. 차가운 바다뱀의 공격을 받은 인간의 뜨거운 절망이 가망 없는 사투를 벌인다. 조형의 이분법은 안으로 조여드는 뱀들의 내향적 공세와 가망 없는 탈출을 꿈꾸는 외향적 수세의 균형을 가까스로 붙들었다.

 

왼편에 선 작은아들은 옆구리가 물렸다. 큰아들은 살아날 수 있을까? 아버지가 큰아들을 돌아보는 순간 뱀은 공격방향을 선회한다. 사제가 뱀 머리를 움켜쥐었으나 손아귀를 미끄럽게 빠져 나온 뱀이 그의 옆구리에 독니를 박아 넣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은 목신의 그것처럼 헝클어진 수세미가 되고 죽음을 예감하는 그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때였을 것이다. 라오콘의 힘없이 내뻗은 왼발이 경직되고 근육과 힘살이 간단없이 얼어붙은 것은. 또 하늘을 올려보는 그의 눈에서 빛이 사그라든 것은...

(이하 생략)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그린 [천지창조]는 세계 최대의 천장 벽화라고 한다. 미켈란젤로가 천장 밑에 세운 작업대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천장에 물감을 칠하는 작업을 하여 완성하였다 한다. 이로 인해 미켈란젤로는 작업대에서 떨어지기도 하였고 목과 눈에 이상이 생기기도 하였지만 많은 신체적 고통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4년 만에 이 대작을 완성하였다 한다. 이 작품에서 그의 신앙에 대한 충성심과 예술혼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처음에 천지창조를 비교적 세밀하게 그렸으나 나중에는 그림을 단순화 시켜 그렸다 한다. 불편한 자세로 오랫동안 그림을 계속 그리기 힘든 점도 있었겠지만, 천장에 있는 그림과 바닥에서 그것을 보는 사람 눈과의 거리가 먼 관계로 세부 내용을 단순화 시켜야 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천지창조 천장화의 일부분과  중앙 확대(부분)   사진 출처: 인터넷                                        

 

 

               
예술가로서의 긍지와 자존심

한편 시스티나 성당 제단 벽화 [최후의 심판圖]는 작품 속의 인물들이 처음에는 모두 나체로 그려졌다 한다. ‘최후의 심판’을 그리는 작업 현장을 방문한 비아지오 체세나라라는 추기경이 벌거벗은 인물들에 대해 나쁘게 평하자 미켈란젤로는 그를 지옥의 使臣 미노스로 응징(?)해 그려 놓았다.  한편 이 그림 속에는 자신이 핍박 받을 것을 암시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 놓았다. 또 교황 율리우스 2세가 핑계를 대며 자신을 만나주지 않자 작업을 팽개치고 로마를 떠나 피렌체로 내려 가버렸다. 교황이 다시 그를 부르기 위해 돈과 선물 등 온갖 선심 공세와 회유 끝에 그를 다시 불러 왔다는 얘기는 권력 앞에서도 당당했던 그의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을 보여준다.

 

시스티나 성당을 관람하는 하는 중에는 세 가지를 금하고 있다. ‘떠들지 말 것, 사진이나 비디오 찍지 말 것, 바닥에 드러눕지 말 것’이 그것이다. 천장화는 목덜미가 아파 3분도 계속 쳐다보기가 어려웠다. 정말이지 누울 수 있다면 누워서 감상하고픈 심정이었다. 시스티나 성당은 크기나 규모에 비해 베드로 성당에 비해 턱없이 작았지만 이 두 작품이 있음으로써 이 성당의 중요성이나 비중이 그에 못지않은 것 같았다. 예배를 보는 거룩한 성소인 성당에서 함부로 행동해서도 안 되겠지만, 아름답고 훌륭한 작품을 눈으로 마음만으로 감상하기에는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부족한 영상 자료에 대한 아쉬움은 나중에 로마 시내에서 DVD와 책자를 구입하여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다.

                          

 

                  최후의 심판圖 -미켈란젤로- 사진 출처: 인터넷
 
한편 시스티나 성당 옆에 있는 베드로 성당은 그 규모가 가히 세계 최대라고 한다. 가톨릭의 최고 수장인 교황님이 계시고, 성당내의 많은 보물, 성물, 역대 교황님의 무덤과 자취들이 있다는 점으로 볼 때 성당의 최고 우두머리라는 것에 이의를 달지 못할 것이다. 베드로 성당의 형식적인 내용을 보더라도 천정은 금덩이로 되어 있고 성당 제대 뒤쪽 창문에 표현된 성령의 비둘기는 빛을 통과 시키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다. 내부에는 청동 주조로 만들어진 베르니니의 天蓋(천개를 비롯하여 피에타 상, 베드로상 등 유명 걸작품이 성당 내부 이곳저곳에 보석처럼 자리하고 있다. 성당이라 기다 보다 오히려 예술 박물관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대리석으로 가공된 아름다운 光窓과 성령의 비둘기

                          

                          베드로 성당 내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과 天蓋(천개)


 

예술가들의 끼는 통한다.

베드로 성당 안에 있는 사자 石像 2마리를 보다가 재미있는 대조적인 점을 발견 했다. 그것은 우측 사자와 좌측 사자가 서로 다른 포즈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한 마리는 입을 벌린 채 눈을 뜨고 앞발은 벌리고 꼬리를 감고 있지만, 다른 한 마리는 입을 다문 채 눈을 감고 앞발은 모으고 꼬리를 펴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다른 모습으로 조형을 만드는 것은 우리나라 속리산 쌍사자 석등의 두 마리 사자와 토함산 석굴암 앞쪽의 金剛力士(금강역사)의 모습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입을 벌린 모습의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와 입을 다문 모습의 '훔금강 力士'

이 사진은 법주사 청동 대불 아래에 조각된 금강역사로 석굴암의 금각역사를 모조한 것이다.

 

 

금강역사는 인왕역사(仁王力士)라고도 하며, 입을 벌리고 오른쪽을 지키시는 분이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 입을 다물고 왼쪽을 지키시는 분이 밀적금강(密蹟金剛)이다. ‘나라연’은 힘이 몹시 세다는 뜻이며 ‘밀적’은 자취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동양 서양을 불문하고 공통적인 현상이 아닌가 한다. 양측의 조형이 비슷하지만 왼손과 오른손이 서로 다르듯이, 작가가 똑같은 모습으로 조각하는 것을 피한다는 점으로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둘 다 똑 같으면 재미(?)없을 테니까 말이다.  

                          

 

                  성 베드로 성당 정면 테라스 위의 聖人(성인) 조각상 들

 

베드로 광장은 몸통, 성당 돔은 성인의 머리, 광장 회랑은 팔에 해당하며 전체적으로 열쇠(KEY) 모양이라고 한다. 이 얘기는 성당이 지어질 때 성당 구조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처음부터 의도된 내용이었는지, 후세 사람들이 얘기를 갖다 붙였는지는 모르지만 재미있게 생각되었다.

                     

 

                    베드로 성당 광장의 列柱 
 

이에 덧붙여 바울과 베드로의 비교도 알아 둘 만 하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 자였으며 참수 당하였고, 말씀의 검, 성령의 검으로 상징된다. 한편 베드로는 로마 시민권자가 아니었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으며, 천국의 열쇠, 성령의 비둘기로 상징 묘사된다.

 

스위스 용병이 지키고 있는 베드로 성당을 조금만 걸어 나오면 바티칸을 벗어나 이탈리아 영토로 들어가게 된다. 검문이 없음은 물론이려니와 국경 표시도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하는 사이 로마 시내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제 로마를 보게 된다. 현대 오늘과 중세가 공존하는 로마를 둘러보러 간다.

(계속)

여행일자: 2006년 01월. 글쓴 일자: 2008.01.07.(다음 블로그에서 옮김)

우리는 일생동안 몇 번이나 바다 한가운데에서 해넘이를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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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라 쏘렌토로’

‘쏘렌토’라는 말을 들으면 '돌아오라 소렌토로'라는 칸소네가 떠오른다. 1902년 9월 수상이던 차나르델리가 소렌토에 와서 머물고 있었는데, 원래 소렌토 우체국을 세워 달라는 청원노래였다 한다. 

♬♪♩ 돌아오라 소렌토로  ♩♪♬

아름다운 저 바다와 그리운 그 빛난 햇빛

내 맘 속에 잠시라도 떠날때가 없도다

 

향기로운 꽃 만발한 아름다운 동산에서

내게 준 고귀한 언약 어이하여 잊을까

 

멀리 떠나간 벗이여 나는 홀로 사모하여

잊지 못할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노라

돌아오라

이 곳을 잊지 말고

돌아오라 소렌토로 돌아오라 

시인 겸 화가였던 잠바티스타 쿠르티스 쿠르티스가 가사를 쓰고,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그의 동생 에르네스토 쿠르티스가 곡을 썼다. 쏘렌토의 호텔 임페리얼 트라몬타노의 안내판에는 잠바티스타 쿠르티스(Giambattista de Curtis, 1860~1926)가  ‘돌아오라 소렌토로’를 이 호텔 테라스에서 작곡했다고 쓰여져 있으며, 소렌토역 가까이에 잠바티스타의 흉상이 있고 맞은편에는 ‘돌아오라 소렌토로’ 노래 비석이 서 있다.


왕과 귀족의 별장 카프리 섬

카프리 섬 서쪽 언덕 산위에서의 항구 쪽 조망

 

날씨가 좋아 카프리 섬으로 가는 배가 운행이 된다 하기에 카프리 섬을 가기로 하였다. 찬란한 햇빛이 바다에 부딪혀  화살처럼 사방으로 튕켜 나온다. 가이드가 ‘여행하는 동안 날씨 좋은 것은 누구 덕분인가요?’라고 하자 대개의 여행객들은 ‘아, 내가 유럽에 오니 날씨가 이렇게 좋네!’라고 내 덕분이라는 답을 했다. 그러자 가이드는  ‘내가 가이드 할 때마다 날씨가 좋으니 가이드 덕분이지요!’ 라고 말했다. 그러자 여행 총괄을 맡은 인솔자는 ‘무슨 소리! 그게 다 인솔자 탓이지!’라고  한마디 더 거들자 함께 여행하던 모두가 한바탕 웃었다.

 

실제 이탈리아 겨울은 雨期라서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배가 안 뜨는 경우가 많아 운이 좋은 여행객들이라야 카프리 섬으로 들어 갈 수가 있다고 한다. 세기적 테너 카루소가 임종이 가까워졌을 무렵 카프리에 그토록 가고 싶어 했지만 끝내 배가 뜨지 않아 가보지 못하고 카프리가 보이는 호텔 객실에서 임종을 했다는 애틋한 얘기도 들었다.

 

 카프리로 가는 배가 떠나는  vittoria 호텔 앞 소렌토 항구 바다에 햇빛이 일렁이고 있다.    

 

큰 파도가 거의 없는 ‘산타 루치아‘ 만
이 호텔 바로 아래에 있는 선착장에서 카프리로 가는 페리를 탔다. 배가 카프리로 건너가는 이 해안이 유명한 ‘산타 루치아‘이다.  ‘산타 루치아‘ 는 '거룩한 빛'이라는 뜻이다. 바다에 일렁거리는 햇빛이 울렁증을 일으킬 정도로 반짝거린다. 나폴리가 세계 3대 미항이 라는 얘기가 전혀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타 루치아 만은 나폴리와 소렌토를 잇는 해안이 반원형을 만들고 그 앞 바다에 이스키아 섬과 카프리 섬이 떠 있어 방파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산타 루치아‘ 만은 큰 파도인 너울을 볼 수 없다고 한다. 우리가 탄 배가 지나면서 만든 파동이 간섭현상을 일으켜 엇갈리는 동심원 물결을 만들며 바다에 퍼져 나갔다. 

 

꼬불꼬불하고 좁은 절벽 산길에선 저절로 괴성이…

길이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같은 카프리 도로는 대형차의 운행이 불가능하여 소형차들이 주로 다녔다. 카프리 소방차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크기라 한다. 우리가 탄 미니버스도 절벽같은 산을 깎아 만든 길을 꼬불꼬불 지그재그로 올라갔다.

2차선 교행이 힘들어 한 차선씩 교대로 신호를 받아 차량이 움직이는 좁은 산길 구간도 있었다. 도로 중에는 차도 양측에 교각(기둥)을 세우고 그 위로 교량 형태의 도로를 만든 곳도 있었다. 도르르 말린 리본처럼 나선식으로 한 바퀴 돌아가게 된 곳이었다. 이 리본 형태의 도로를 돌아갈 때 차창 오른쪽에 앉아 있던 나는 몸이 길 바깥으로 쏠리는 느낌이 들어 나 자신도 모르게 발에 힘이 주어졌다. 일행들도 ‘아~악~!’ 하고 괴성을 질렀다. 이 곳 운전기사는 그것을 즐기는지 괴성이 없는 손님들이 많을 경우에는 약간의 원심력이 더 생기도록 급커브를 좀더 크고 빠르게 돈다는 얘기를 들었다. 믿거나 말거나...

 

작은 고추가 맵다

카프리는 규모는 작지만 세계 명품의 견본 시장이라고 할 정도로 명품들이 가게마다 걸려 있다. 소위 부자 동네이니 여기서 새로 나온 명품이 선보인다고 한다. 이 곳 명품 거리를 지나 아우구스투스 별장 터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카프리 섬 아래 쪽 바다를 조망해 보았다. 석회암 성분이 녹아 있어서인지 바다 빛깔이 옥색을 띄지만 바닥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았다. 

황제 별장이 보이는 전망대에서의 투명한 옥빛 바다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가슴 깊이 심호흡으로 흡인했다가 내쉴 때 배도 쑥 내 밀어본다. 마치 황제나 귀족이 이 곳 바닷가를 거닐었을 때 이런 식으로 거드름을 피며 행동하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을 해보면서 말이다. 기암절벽과 산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 하늘빛을 보니 과연 로마 황제들이나 세계의 내로라하는 부자들이 이 곳을 별장지로 선호할 만하다고 느꼈다.  

 

꼬불꼬불 한 산길을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

 

현지 가이드도 쓸모가 있긴 있구나!

카프리 관광을 마치고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배를 타러 가는 시간이 촉박하여 항구 쪽으로 내려가는 벤츠 택시를 탄다고 한다. 아뿔싸! 아침에 이곳에 올라올 때 타고 온 버스 속에 우산과 옷가지가 든 가방을 두고 온 것이 생각났다. 카프리 언덕에 올라온 다음 하차할 때 차안에 가방을 그냥 두고 왔던 것이었다. 날씨가 너무 좋아 우산과 점퍼가 필요없었기에 버스 안에 가방을 두고 내렸었다. 지금까지는 한번 버스를 타면 같은 버스로 계속 이동했었기에 갈 때도 같은 버스를 타리라고 생각한 것이 불찰이었던 것이었다.

 

가이드와 카프리 현지인 가이드가 아침에 올라올 때 탔던 버스를 황급히 이리저리 연락하여 찾아보기로 하고, 나는 일행과 함께 일단 항구로 먼저 출발키로 하였다. 결국 버스 주차환승 지역에서 나의 물건을 찾았다며, 항구로 내려오는 택시 속에서 잃어버린 물건을 건네받았다.

 

카프리에서 진행되는 우리 여행팀의 행사(일정)에는 우리 한국인 가이드가 전부 길 안내와 설명을 하였고 현지인 가이드는 아무런 일(안내나 설명)도 하지 않았다. 얼핏 실제하는 일도 없이 현지 규정상 현지 가이드를 고용해야 하니 명목상 그 인원을 채우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는 현지 가이드들에 대해 좀 떨떠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분실 사건으로 동분서주(이리 고 저리 뛰고)했으니 현지 가이드들도 오늘은 제몫을 했네' 하고 속으로 웃었다.

 

    산타루치아 만 배에서 일몰을 보며 커피 한잔을...

 
       산타 루치아 만 배위에서 맞이한 석양과 일몰

 

일생동안 바다 위에서 해넘이를 몇 번이나 볼 수 있을까
카프리를 떠난 페리가 나폴리로 한참 가고 있는데 해가 지기 시작한다. 나폴리의 산타 루치아 만에서 겨울 석양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뱃사람이 아니라면 바다 위에서 해가 넘어 가는 순간을 몇 번이나 볼 수 있을까?

 

수평선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 태양은 아직 너무 눈부셔 직접 볼 수 없다. 수평선에 가까워질수록 태양은 노랑빛이 되다가 점점 붉은색을 띠게 되고 결국은 눈부신 옷자락을 벗어 던져버린다. 불그레한 노을 끝에서 태양은 발가벗은 모습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였다. 태양이 수평선에 키스를 하는 순간 배위의 사람들이 일제히 ‘와~!’하는 함성을 지른다. 다들 태양의 일몰 모습을 잠시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사진과 비디오로 열심히 찍어댄다. 태양의 일몰이 끝나고도 석양의 모습을 담느라고 정신이 없다. 나는 매점에서 사온 커피 한잔을 마시며 이 행복한 일몰을 마음 속 깊이 새겨 두었다.

 

나폴리 항구 쪽에선 불빛이 켜지기 시작한다. 마치 반딧불이 하나 둘 나타나는 것 같다. 나폴리 항구가 가까워 오자 그 불빛은 전등 불빛으로 바뀌었다.

 

       ‘산타 루치아’

 

창공에 빛난 별. 물위에 흐르고  바람은 고요히 불어오누나.

내 배는 살같이 바다를 지난다. 산타 루치아 산타 루치아  

                             
   (계속) 

 

<배경음악> Santa Lucia -파바로티- : 추후 링크가 끊어지면 음악이 안 나올 수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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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의 시간 여행-폼페이-

여행일자: 2006년 01월. 글쓴 일자: 2008.01.07.(다음 블로그에서 옮김)

 

 

 

태양의 도로 A1 고속도로

오늘은 이탈리아 반도 남쪽에 있는 나폴리와 폼페이를 가는 날이라 다른 때보다 더 일찍 모닝콜이 왔다. 졸린 눈을 비비며 세수를 하고 정신을 차렸다. 호텔 식당에서도 이른 시간에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특별히 배려해 주었다. 서두른다고는 하였지만 그래도 출발할 때는 이미 해가 떠올라 있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A1 고속도로를 타고 남으로 내려갔다. 앞쪽에서 비치는 햇빛 때문에 앞자리에 있던 나는 눈이 부셔 눈을 제대로 못 뜰 정도였다. 전망 좋은 자리로 생각하여 운전기사 바로 뒷자리에 앉았던 것이 실수였다. 마침 좌석에 여유가 있어 약간 뒷자리로 했던 이동하였다. 나폴리까지 내려가는 동안 소위 ‘태양의 가도’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고속도로에는 끝없이 햇빛이 쏟아 내려 반짝거렸고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도로에 반사되고 산란되는 햇빛 때문에 그것을 보고 있는 나까지도 정신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두 시간 마다 운전기사는 휴식하도록 규정되어 있어 휴게소에 들렀다. 차에서 내려 바깥에 나가 보니 잠시만 더 오래 있으면 일광 화상을 입을 것 같아 용무만 보고 얼른 차로 돌아 왔다.

 

 

             갈색 지붕을 가진 성냥갑 모양의 집과 대조를 이루는 푸른 바다

 

파란 하늘, 푸른 바다와 절묘한 대조를 이루는 노란 오렌지, 붉은 지붕의 집

빛나는 햇빛 속을 몇 시간 동안이나 달리다가 오렌지 나무가 길가나 밭 여기저기에 많이 보일 때쯤 버스에서 내린 후, 폼페이로 가는 소렌토 행 기차로 갈아탔다. 기차 내부 출입구 문 위에는 다음 행선지와 타고 있는 기차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LED 패널이 설치되어 있는 걸로 보아 제법 현대식 운행 안내 시스템을 갖춘 것 같았다. 하지만 기차 유리창은 바깥 풍경이 잘 안 보일 정도로 온통 스프레이로 그려진 낙서투성이였다.

 

차창 바깥으로 보이는 오렌지 밭엔 노란 오렌지들이 달려 있고 좀 멀리 둥그런 활모양의 바다가 보였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알고 보니 산타 루치아 만이었다. 소렌토까지 가는 중간 기차역 주변의 시가지 벽에도 온갖 낙서가 보였다. 과연 이탈리아는 낙서 천국(?)이었다. 소렌토 시가지의 가로수는 노랗게 익은 오렌지 나무였다.  대개의 주택은 붉은 갈색의 지붕으로 되어 있어 푸른색의 바다와 파란 하늘색에 절묘한 대조를 보였다.

   

 

 

     귤이 달린 오렌지 나무와 푸른 산타 루치아 만

 

시간이 정지되어 버린 비참한 현장을 찾아서

폼페이 매표소를 지나면 시간은 2000 여 년 전의 폼페이로 돌아가게 된다. 과거로의 시간 여행이 시작된다. 서기 79년 8월24일 2만 인구가 살던 폼페이가 베스비우스 화산 폭발로 화산재 등 화산 분출물에 묻혔다. 먹고 춤추고 노래하던 삶의 터전이 화산재로 묻혀 버리는 천지 재앙이 일어난 것이었다. 엎드려 꼬꾸라진 채 묻혀 죽은 사람, 아이를 끌어안고 죽은 엄마 등 비참한 현장은 그대로 박제가 되어버린 듯 그 당시 시각에 정지되어 있는 것 같았다.

 

 
화산 분출물에 묻혀 있던 사람(석고로 뜬 형태)


 




엎어진 채로 묻힌 사람 모습(석고로 재현한 형태)

 

 

화산 폭발이 멈추었을 때 폼페이는 화산재 등 화산에서 흘러나온 물질 더미가 깊이 6~7m 두께로 도시 곳곳을 뒤덮으면서 일종의 진흙 용암으로 굳어졌다. 폼페이의 유적은 16세기말에 라치비타라고 알려진 구릉 밑에 터널을 팠던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폼페이에서 벌어졌던 화산 참사의 목격담은 대(大)플리니우스의 조카 소(小)플리니우스가 미네눔의 로마 함대 사령관이었던 대플리니우스의 죽음에 대해서 묻고 있는 타키투스에게 쓴 2통의 서신에 생생하게 기록되었다고 한다.

                 

 

                곡물의 부피를 측정하기 위한 당시의 계량기(計量器)

 

사람 사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 같다.

 

폼페이를 둘러보면 급수시설, 배수 시설은 물론 공회당, 재판소, 신전. 목욕탕, 여관, 유곽(여인의 집), 시장, 공정 거래소, 원형극장 등이 있고 빵 가게, 곡물 가게 등 오늘날에 보아도 대단할 정도였다. 야광 돌을 마차가 다니던 길바닥에 박아 두어 밤중에 길을 표시하도록 하였다던 지, 비가와도 발이 젖지 않도록 징검다리 모양의 도로 건널목을 만들었던 것을 보면 당시 사람들의 지혜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도로의 징검다리-비가 오더라도 발이 안 젖게..

 

이 폼페이는 무역항이라 다른 나라에서 오는 이방인도 많이 드나들었다 한다. 항구에는 여관, 유곽(여인의 집),요릿집(식당)이 있기 마련이다. 식당 대문 옆에는 숟갈과 포크, 칼이 그려진 표시가 있어 글씨를 모르는 사람들이나 이방인에게 간판 구실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유곽(여인의 집) 방안에는 각 종 성행위 포즈를 그려 두었는데 다른 나라에서 온 이방인에게 꾀 쓸모가 있었으리라.

                                

 

                              최고의 단열재는 공기 벽(목욕탕

 

공기는 최고의 단열재 / 전염병(역병)의 원인이 된 하수 시설

또한 목욕탕에서는 엷은 판자 형태의 두개의 벽을 막아 벽과 벽 사이에 공기층 만들어 단열 효과를 얻도록 설계되어 있었고, 응결된 물이 사람 머리에 떨어지지 않도록 고안한 천정과 목욕탕 창문을 보니 당시 사람들의 과학적이고 창조적인 지혜가 느껴졌다. 그러나 배수시설은 집에서 길가 쪽으로 배수토록 되어 있어 오물들이 길 바닥으로 그냥 흘러 내려가게 되어 있었다.  배수 처리 시설의 이런 취약점이 중세까지 잘 해결되지 못해 사람들이 페스트나 전염병에 많이 희생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납으로 만들어진 당시 상수도 관(pipe) 
 
토관으로 만들어진 배수구-오물이 도로로 그냥 버려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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