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한양) 탐구08-(서울)한강의 나루, 살꽂이다리 箭串橋(전곶교)


 

(배경 영상,음악)  경기민요 한강수타령, 매화타령 -KBS 전주 국악한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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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터, 포구, () 하천(河川), ()의 이름은 지명이나 지하철역명에 많이 반영되어 있다.

 

[요약 퀴즈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퀴즈 1] 태조 이성계가 함흥차사후 태종에게 화살을 쐈다는 중랑천 하류의 옛 다리 이름은?

[퀴즈 2] 나루 인근에 몽촌토성·풍납토성 등과 연결되는 아차산성이 있으며, 옛날부터 중요한

                 교통로였고 오늘날은 서울부산간 교통로가 이 지역을 지나고 있다. 나루 이름은?

[퀴즈 3] 과천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한강의 나루로 우리말(=노들나루)인 이 나루의 漢字名?

[퀴즈 4] 소금과 젓갈을 실은 배들이 모여들어 도성의 소금과 젓갈은 거의 모두 이곳에서 공급

                 됐다. 결빙기를 제외하고는 京江商人과 배들로 붐비고 활기를 띠었다. 이 나루 이름은?

[퀴즈 5] 서울에서 양천(陽川)을 지나 강화로 가는 조선 시대 교통의 요지였으며, 삼남 지방에서

                 한강을 통하여 운송되어 오는 곡식을 하역하던 나루이다. 이 나루의 이름은?

[퀴즈 6] 양화나루 인근에 있는 이곳은 누에머리를 닮았다하여 잠두봉이라 불린다. 많은 천주

                 교도들이 참수당한 곳으로 천주교의 순교성지가 되었다. 머리가 잘렸다 해서 oo?

 

한강 다리가 세워진 곳은 유명 나루터, 포구였다. (2019.01.04 기사)

내용출처: http://www.seni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971

 

역사적으로 한강은 한반도 중부지방을 동에서 서로 흘러가는 젖줄로써 일찍부터 그 가치를 인정받아 왔다. 그 중 광나루에서 양화진까지 조선시대 한양에 인접한 경강(京江-서울의 한강)에는 광나루, 두모포, 한강진 등 11개의 나루와 포구가 있었다.

 

이 나루와 포구는 한양과 전국 각지를 연결하는 주요 도로가 지나는 길목이었고 상업의 중심지였다. 경기도 광주로 가는 길은 동대문에서 시작하여 왕십리를 지나 살꽂이다리, 광진(廣津 광나루)을 거치고 용인으로 가는 길은 광희문에서 한강진(漢江津 한강나루)을 지난다. 과천으로 통하는 길은 남대문에서 동작진(銅雀津 동작나루)을 건너는 등 한양 남쪽 지방으로 향하는 대로(大路)는 모두 한강을 건너야 했다.

 

근대에 들어 육로교통 수단이 발달되면서 배로 한강의 남쪽과 북쪽을 연결하던 나루와 포구 자리에 다리가 들어섰다. 1900년 한강철교, 1917년 한강인도교 건설 등을 필두로 하여 수많은 다리가 놓여 있다. 한강의 다리 건설은 길을 이어줌과 동시에 강남(영동)개발, 여의도개발, 잠실개발 등 서울의 발전을 견인해왔다.

 

이러한 다리들은 하나같이 옛 길과 나루터 자리에 건설되었다. 노량진에는 한강대교(1한강교)가 놓였고 양화진에는 양화대교(2한강교)가 한강진에는 한남대교(3한강교)가 들어섰다. 마포나루에 들어 선 것이 마포대교(서울대교)이고 송파진에는 잠실대교가 서빙고나루에는 잠수교와 반포대교가 만들어지는 등 예전 나룻배가 다니던 길 위로 다리가 들어선 것이다.

 

이 다리는 조선시대와 같이 주요 지역을 잇는 길이기도 하다. 목포에서 임진각을 거쳐 신의주를 잇는 국도1호선이 1996년까지 한강대교(1한강교)를 거쳐 갔고 서울에서 인천과 강릉으로 이어지는 국도6호선은 양화대교(2한강교)를 지난다.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도 신설 당시 한남대교(3한강교)가 시작점이었던 점 등으로 보아 나루와 포구가 있던 자리에 건설된 한강의 다리는 근래에도 교통의 중심지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서울의 발전을 위해 추진된 부도심 건설은 교량 건설과 함께 하였다. 비행장이던 여의도를 부도심으로 개발하는 사업에는 마포대교(서울대교)가 한강 수변의 버려져 있던 저습지였던 강남 영동지구를 개발하는 사업은 한남대교(3한강교)가 활성화 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강다리의 이름은 제1한강교->한강대교, 2한강교->양화대교, 서울대교->마포 대교로 지금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한강대교의 건설로 만들어진 노들섬, 여의도 건설로 인해 변화된 서강대교 아래 밤섬, 서울 수돗물 정수장이었던 양화대교 아래의 선유도 등 한강에 있는 섬의 옛 모습 등 서울의 옛 모습은 서울역사박물관 홈페이지(www.museum.seoul.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19.01.04. 기사 내용)

 

살꽂이다리=살곶이다리     참조 링크: 살꽂이다리

살꽂이다리또는 살곶이다리라고 하였고 한자명으로 箭串橋(전곶교)라고 한다. 성동구 사근동 102번지 남쪽 현재 성동교 동쪽에 위치해 있는 돌다리로서 중랑천에 놓여 있다. 조선시대 다리로는 가장 길었으며 濟盤橋(제반교)라고도 불렀다. 현재는 중간 부분이 훼손된 채 양쪽 가장자리만이 원형을 보존하고 있으며 사적 제160호로 지정되어 있다.

살꽂이다리(箭串橋 전곶교-화살이 꽂힌 다리)

함흥차사(咸興差使)와 살꽂이다리(箭串橋 전곶교-화살이 꽂힌 다리)

함흥차사(咸興差使)       참조 링크: 함흥차사 -고사성어대사전

조선 초기, 방석(芳碩)의 변(1차 왕자의 난)이 있은 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정종(定宗)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고향인 함흥에 은거했다. 그 후 형제들을 살해하면서까지(2차 왕자의 난) 왕위를 차지한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은 분노한 태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함흥으로 차사를 보냈다. 하지만 태조가 번번이 활을 쏘아 차사들을 죽이거나 가두어 돌려보내지 않았다. 여기에 서 유래하여 함흥차사는 심부름 간 사람이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살꽂이다리(箭串橋(전곶교)-화살이 꽂힌 다리)로 불리게 된 까닭...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거쳐 태종으로 등극하자 함흥으로 내려가 한양으로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이방원의 등극을 부정하였다. 그 후 태조 이성계는 태종과 신하들의 간곡한 청으로 함흥에서 돌아오게 되는데, 태종이 이곳 중랑천 하류 한강 가에서 천막을 치고 아버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 태조가 태종을 향해 활을 쏘았으나 맞히지 못하고 화살이 땅에 꽂혔다, 그 후 이 지역을 화살이 꽂힌 곳이라 하여 살꽂이혹은 살곶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다리는 한강이 아니라 중랑천에 있는 다리이다.

 

한강의 유래      내용 출처: https://hangang.seoul.go.kr/archives/249 -서울시 한강사업본부

한사군과 삼국시대 초기의 한강은 한반도의 중간 허리부분을 띠처럼 둘렀다는 뜻에서 帯水(대수) 라 불렀고, 고구려에서는 '아리수' 라 했으며, 백제는 '욱리하' 라고 했다. 또 신라는 상류를 '이하', 하류를 '왕봉하' 라 불렀다. 한편 '삼국사기' '신라편' 지리지에는 한강을 '한산하' 또는 '북독' 이라고도 했다. 백제가 동진과 교통하여 중국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한강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고쳐서 '漢水(한수)'라 불렀고, 그 뒤부터 옛 이름은 사라지고 '한수' 또는 '漢江(한강)' 이라고 불리어졌다.

 

고려 때는 큰 물줄기가 맑고 밝게 뻗어내리는 긴 강이란 뜻으로 '열수' 라고 불렀으며, 모래가 많아 '사평도' 또는 '사리진' 이라고도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경강(京江)'이라고도 불렀다.

 

한강은 본래 우리말 '한가람'에서 비롯된 말로 '''크다, 넓다, 길다'는 의미이며, '기람'은 강의 고어로 한강’='크고 넓은 강' 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위치에 따라 다르게 불린 한강의 이름들      출처 링크: 한강 [漢江] 서울지명사전

한강이란 한남동 앞에 흐르는 강의 별명으로서 이곳에 한강진과 제천정 등이 있었다. 뚝섬에서 옥수동 앞강을 동호, 한남동 앞을 한강, 동작동 앞을 동작강, 노량진 앞을 노들강, 용산 앞을 용호 · 용산강, 마포 앞을 마포강, 서강 앞을 서강, 김포 북쪽을 조강이라고 불렀다.

 

한강의 포구와 나루 (-배대는 곳)      출처 링크: 포구 교역-문화원형백과

(알림) 이하 내용은 링크: 포구 교역-(문화원형백과 한강 생활문화)에서 가져 왔다.

우리말로 개, 한자말로 포()는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을 말한다. 서해 바닷물이 동작진(:나루 진)까지 올라왔다고 하는데 그 위로도 두모포(斗毛浦), 개포(開浦) 등이 있는 것을 보면 포라는 명칭이 붙기 위해서 반드시 바닷물이 드나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과거 삼개 즉 마포가 한강 물자유통의 중심이었던 것은 배들이 조수의 힘으로 가장 멀리 올라 올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한강 하류지역에 발달한 포구로는 하류로부터 조강포(祖江浦), 이산포(二山浦), 행주외리, 양천, 후포, 염창, 양화진, 서강, 마포, 용산 등 아랫강 포구와 서빙고, 한강리, 수철리, 뚝섬, 송파 등 윗강 포구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포구 가운데 용산과 마포가 규모와 기능 면에서 월등하였다.

 

-알림-

한강의 나루를 설명에, 나루 지명의 단순 링크는 다음백과를 참조하였고, 내용은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일부를 가져왔으며, 링크: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들-1에서 주로 가져왔다아래 각 나루의 설명은 한강 상류부터 내려오면서이다.

 

광나루       내용 출처 링크: 광나루

광진구 광장동에 양진(楊津광장(廣壯광진(廣津광진도(廣津渡) 등의 명칭으로도 불리었으며, 진취락(津聚落)을 형성하였던 곳이다. 한강의 중하류에 위치한 광나루는 교통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서울에서 부산까지 연결되는 영남로의 주된 간선로는 아니었으나, 부산으로 향하는 도로의 길목에 위치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파발로가 지나서, 광나루의 교통상 기능은 지속적으로 중요시되었다.

 

광진원(廣津院)이 광나루 북쪽 언덕에 위치하였으며, 도승(渡丞)이 있어 사람들의 내왕을 조사하기도 하였다. 당시 좌도수참전운판관(左道水站轉運判官)이 겸직으로 이 지역의 조운을 관장하였을 정도로, 광나루는 서울 주변의 중요한 나루터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북쪽에는 백제 초기 몽촌토성·풍납토성 등과 연결되는 아차산성이 있으며, 고대부터 교통로로서 중요하였고 오늘날은 서울부산간 교통로가 이 지역을 지나고 있다.

 

송파나루(松坡津 송파진)       내용 참조링크: 송파나루,송파진

현재의 송파구 석촌호 부근에 있던 나루터로서, 도성에서 전곶교를 건너 신천진을 지나 만나게 된다. 송파에서 잠실로 연결하였으며, 광주,이천으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도선장은 조선 후기에 발달하였다. 본래 이 부근에서 가장 큰 도선장은 삼전도였는데, 병자호란 이후 기피 경향이 있어 정부에서 송파진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 상공업의 발전과 함께 유명한 장시로 성장하여, 객주,거간을 비롯한 도선주들이 모여들었다. 송파진에는 9척의 진선이 있어 통행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송파진별장은 인근의 광진,삼전도,신천진의 나루까지 관장하였다.

 

신천나루(新川津 신천진)      내용 참조링크: 신천진

오늘날의 송파구 신천동에 있던 나루터로서, 신천동에서 뚝섬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삼전도(新川津 삼전도)      내용 참조링크: 삼전도 

서울시 송파구 삼전동에 있었던 나루로 삼밭나루라고도 불렸다. 한강 상류의 남안에 위치하여 서울과 부리도(浮里島, 또는 蠶室島인 현재의 잠실지역)를 연결하는 나루터로서 교통의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한강나루(漢江鎭 한강진) 내용 참조링크: 한강진  -서울지명사전

오늘날의 한남동과 강남구 신사동을 잇는 나루 겸 군영(軍營)이 있었다. (누를진)

 

한강도(漢江渡) 내용 참조링크: 한강도(漢江渡)

한강은 본래 서울의 남산 기슭 지금의 한남동 앞의 강을 일컬었다. 따라서 한강도는 한강나루라는뜻으로 한강진(漢江津)이라고도 하였다. 한강나루는 도성의 정남에 위치했다고 하였으며, 한남동 도선장 부근을 일컬었다.

 

그 강안 맞은편은 사평나루로, 고려 때는 사평도 또는 사리진으로 불렀다. 조선시대는 제일의 나루터로 판교역을 지나 용인,충주로 통하는 대로의 요충지였다.

 

사평나루(沙平渡 사평도)       내용 참조링크: 사평나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용산구 한남동과 연결되었다. 사평도(沙平渡 : 모래펄나루)의 다른 명칭으로 고대에는 사리진도(沙里津渡 : 모래펄나루)라 불렸다. 사평리는 한강진의 맞은편이라 하였고 한강진은 현재의 한남대교(漢南大橋) 서쪽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보아, 한강도는 현재 한남대교 부근으로 추측된다.

 

동작나루(銅雀津)        참조 링크: 동작나루

동작나루는 동작진(銅雀津)’ 또는 동작도(銅雀渡)’라고도 하였다. 중요 간선도로가 지나가는 나루터는 아니었으나 서울에서 과천으로 가는 도로의 길목에 위치하여 많은 사람의 이용이 있었다.

진선(津船)5척 배치되어 있었으며, 이 나루터 부근에는 모노리탄(毛老里灘, 尾老里灘)과 기도(碁島)가 위치하였다.

 

이하 내용은 참조링크: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들-1 에서 가져 왔다.

동작진(銅雀津)은 현재의 동작동 강변에 있었던 도선장 (渡船場)으로 일명 동재기라고도 한다. 도성에서 과천으로 빠지는 길목으로서 본래 노량진 관할이었으나 외방의 과객, 사대부의 왕래가 빈번한 곳인데 약간의 사선(私船)만이 비치되어 있어서 교통이 불편하였다.

 

그리하여이곳의 관리가 문제화 되던 중 영조 4(1728) 이인좌(李麟左)의 난을 계기로 나루의 관리를 철저히 하고자 별장(別將)을 파견하고 이어서 영조 22(1746)에는 노량진의 나룻배 3척을 이관하여 진도(津渡)로서의 체모를 살렸다. 1857년 철종은 이곳에 주교(舟橋 배다리)를 만들고 인릉(仁陵)에 왕래하였다. 근대에 이르기 까지 나룻배가 오갔는데 1917년 한강 인도교가 세워지면서 제구실을 잃었다. 현재 이곳에 1984년 거대한 동작대교가 건설되어 자동차와 전동차까지 운행하게 되었다.

 

개포(開浦)       내용 출처: 개포

강남구 개포동에 있던 마을로서, 마을 앞에 양재천 갯벌이 있어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개펄개패 또는 개포동이라고도 불렀다.

 

반포(盤浦)       내용 출처: 반포 서울지명사전

이 마을로 흐르는 개울이 서리서리 굽이쳐 흐른다고 하여 서릿개라 하고 이를 한자로 표기한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는데, 뒤에 한자 표기가 盤浦(반포)로 바뀌었다.

 

흑석나루(黑石津)       이하 내용은 참조링크: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들-1 에서 가져 왔다.

흑석진(黑石津)은 현재의 동작구 흑석동 강변에 있었던 나루이다. 도성에서 수원이나 과천 방향으로 왕래 하려면 노량진이나 한강도를 이용하여야 하는데 통행량이 많고 기찰(일종의 검문)

심하여 민간인들은 사선(私船)으로 운행되는 배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수참이 폐지되고 또한 인근에 동작진이 개설되면서 기능을 잃어갔다.

* 수참(水站): 조선시대 한강 수계(水系)의 포구에 위치하여 조창의 기능과 목재 등 각종 물품의

                             운송, 사객(使客)의 이동 보조의 역할을 하도록 인원과 선박 등을 배치한 시설.

 

마포나루(麻浦津)       이하 내용은 참조링크:서울 한강과 주변의 옛 모습들-1 에서 가져 왔다.

서울의 마포구 마포동 강변에 있었던 나루로 삼개나루라고도 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도성에서 서남쪽으로 10리 지점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의 여의도를 지나 시흥 방면으로 빠지는 길목이다. 나루가 크지 않아서 본래 관선(官船)은 없었고, 사선(私船) 몇 척이 있어서 행인을 건네주었다.

1894년 한강의 마포(삼개)나루-사진 이사벨라 버드 비숍 촬영

조선 후기에 상업이 발달하면서 선상(船商)들이 한강을 거슬러 이곳에 와서 장사를 하였다. 인천 제물포에서 어물, 젓갈 소금 등을 실고 뱃길을 따라 서울 마포까지 그리고 한강을 따라 상류까지 상인들의 배가 다니며 돌아갈 때는 곡물을 싣고 갔다. .특히 소금과 젓갈을 실은 배들이 모여들어 도성의 소금과 젓갈은 거의 모두 이곳에서 공급되었다. 예로부터 마포나루에는 새우젓을 파는 사람들이 많아 '마포 새우젓 장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나루터에는 창고를 지어놓고 소금, 젓갈, 생선 등을 위탁 판매하거나 중개하는 객주, 여각 등이 생겨났고, 京江商人(경강상인)들의 활발한 상업활동이 있었다. 결빙기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배들로 붐비고 활기를 띠었다.

 

노량진(露梁津) = 노들나루       내용 출처 링크: 노량진

노량진(露梁津)은 노도진(露渡津노량진도(鷺梁津渡노들나루라고도 불리었다. 이 나루는 서울과 과천·시흥을 연결해주는 구실을 하였는데, 조선시대 9대 간선로 중에서 충청도와 전라도 방면으로 향하는 제6·7·8호 간선로의 길목이었다.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였던 나루터여서 사람들의 이용이 많았으며, 도승(渡丞)이 한 사람 배치되어 관리를 맡았다. 나루 남쪽 언덕에는 노량원(鷺梁院)이 위치하여 있었으며, 세금을 거두었다. 관내는 과천의 신촌리(新村里사촌리(沙村里곽계(槨契형제정계(兄弟井契마포강(麻浦江)이었다. 이 나루에 속하였던 진선(津船)10척이었고, 관선(官船)15척이었다.

 

영등포(永登浦)        내용 출처 링크: 영등포 

영등포는 왕성하게 번성하고 있던 이웃의 노량나루(鷺梁津)에 치여 내내 밀렸다. 영등포란 나루터는 지금의 한강성심병원 건너편 여의도 샛강에서 여의도의 사라진 옛 양말산(羊馬山)을 오가며 한강 밤섬(栗島)과 마포를 연결하는 소규모 나루터이었다. <경조오부도 왼쪽 하단에 영등포 여의도 율도(栗島)가 보인다. 英登浦로 표기한 점이 눈이 띤다. 그 아래쪽에는 방학곶(放鶴串) 지명이 보인다. 오늘날 영등포와 관련이 깊은 지명이다.

 

영등포란 명칭의 유래는 음력 2월 초하루를 영등일(靈登日)로 하여 보름까지 여의도 샛강에서 영등굿이 성행하였다. 늘 소원하는 것을 이곳 한강에서 빌면 다 들어주는 명당으로 알려져 '靈登'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 영등(靈登)永登(영등)"으로 변형표기된 것이라고 한다. '영등(永登)'과 물가 마을을 뜻하는 '()'를 합친 영등포가 되었다.

 

지금의 영등포역 주변에 소머리제(牛頭峴)가 있었다. "멀리 동쪽으로 왕성(王城)을 바라볼 수 있어 궁궐을 사모하는 사람이 의례히 이 재에 오른다"라는 말에서 영등포(永登浦)가 연유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양화나루(楊花)        참조 링크: 양화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 시대 삼진(三鎭)의 하나였던 양화진(楊花鎭)이 위치하였던 서울에서 양천(陽川)을 지나 강화로 가는 조선 시대 주요 간선 도로상에 위치하였던 교통의 요지였으며, 삼남 지방에서 한강을 통하여 운송되어 오는 곡식을 저장하던 오강 중의 하나로 농산물의 재분배 기능을 담당하던 중요 지역이었다.

 

또한, 서울의 천연 방어선을 이루는 한강의 중요 지역으로, 진대를 마련하고 진장(鎭將)을 두어 수비하게 하여 군사상 중요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도승(渡丞)이 배치되었으나 뒤에는 별장(別將)으로 바뀌었으며, 호조의 점검청(點檢廳)이 있었다. 나루터의 관할은 어영청에서 하였으며, 양화진에 속한 선박은 모두 10척이었다.

 

양화진(楊花鎭)광흥창(廣興倉)        참조 링크: 광흥창(廣興倉) -두산백과

광흥창은 고려시대에는 충렬왕(忠烈王) 때 설치하였는데, 조선시대에 관리들의 녹봉(祿俸)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1392(태조 1) 호조(戶曹)의 예속기관으로 서울 서교(西郊) 와우산(臥牛山:서울시 마포구 창전동) 아래에 설치하였다. 전국에서 올라온 세곡을 모으는 곳이었는데 한강 양화진에 도착한 세곡선(稅穀船)에서 하역한 쌀을 광흥창에 저장하였다. 그리고 광흥창은 관원들에게 녹봉을 지급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쌀과 옷감을 녹봉으로 지급하였다.

 

잠두봉(蠶頭峰)절두산 성지(切頭山 聖地)        내용 출처: 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

잠두봉, 절두산(折頭山)

잠두봉(蠶頭峰-누에머리 모양의 봉우리)지역은 한강의 동북쪽 강변(옛 당인리 발전소 근처)에 있는 곳으로 사적 제399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한강 가운데에서 경치가 아름답고 정자가 많기로 이름났던 지역이었다. 하지만 천주교도가 박해를 당하고 순교한 곳으로 지금도 순교자 묘지가 남아 있으며, 개화의 선각자였던 김옥균(金玉均)이 처형된 곳이기도 하다.

 

1866년 천주교를 탄압한 병인박해로 병인양요가 발생하여 프랑스 함대가 양화나루까지 진출했다가 퇴각하자, 이에 격분한 흥선대원군의 지시에 의해 잠두봉에서 많은 천주교도들이 참수 당함에 따라 천주교의 순교성지가 되었다.(折頭山 절두산-머리가 잘린 산).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6/6b/Jeoldusan.jpg/408px-Jeoldusan.jpg

 

(현재) 한강 유람선 나루들         출처 링크:https://hangang.seoul.go.kr/archives/249

다음은 한강 유람선의 나루들로 상류에서 하류 순으로 배치하여 각 나루 이름별로 연결 링크를 적었다. 자세한 내용 보려면 지명(나루이름)을 클릭하면 된다.

(상류) 광나루  잠실  뚝섬잠원  이촌  잠원,  이촌  반포  망원,  반포  여의도  난지,  강서  양화 (하류)

 

[요약 퀴즈 

[퀴즈 1] 태조 이성계가 함흥차사후 태종에게 화살을 쐈다는 중랑천 하류의 옛 다리 이름은?

[퀴즈 2]  나루 인근에 몽촌토성·풍납토성 등과 연결되는 아차산성이 있으며, 옛날부터 중요한

                교통로였고 오늘날은 서울부산간 교통로가 이 지역을 지나고 있다.  나루 이름은?

[퀴즈 3] 과천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한강의 나루로 우리말(=노들나루)인 이 나루의 漢字名?

[퀴즈 4] 소금과 젓갈을 실은 배들이 모여들어 도성의 소금과 젓갈은 거의 모두 이곳에서 공급

                 됐다. 결빙기를 제외하고는 京江商人과 배들로 붐비고 활기를 띠었다. 이 나루 이름은?

[퀴즈 5] 서울에서 양천(陽川)을 지나 강화로 가는 조선 시대 교통의 요지였으며, 삼남 지방에서

                 한강을 통하여 운송되어 오는 곡식을 하역하던 나루이다. 이 나루의 이름은?

[퀴즈 6] 양화나루 인근에 있는 이곳은 누에머리를 닮았다하여 잠두봉이라 불린다. 많은 천주

                 교도들이 참수당한 곳으로 천주교의 순교성지가 되었다. 머리가 잘렸다 해서 oo?

 

=== [퀴즈 답] ===

[퀴즈 1] 이성계가 함흥차사후 태종에게 화살을 쐈다는 옛 다리 이름은? .=> 살꽂이다리

[퀴즈 2] 나루 인근에 몽촌토성·풍납토성 등과 연결되는 아차산성이 있으며, 옛날부터 중요한

                교통로(오늘날은 서울부산간 교통로) 지나는 있다. 나루 이름은? .=> 광나루

[퀴즈 3] 과천 가는 길목의 나루로 우리말(=노들나루)인 이 나루의 漢字名? .=> 露梁津(노량진)

[퀴즈 4] 소금과 젓갈을 실은 배들이 모여들어 도성의 소금과 젓갈은 거의 모두 이곳에서 공급

                됐다. 京江商人과 배들로 붐비고 활기를 띠었다. 이 나루 이름은? .=> 마포나루

[퀴즈 5] 서울에서 양천(陽川)-강화로 가는 조선 시대 교통의 요지였으며, 삼남 지방에서 한강을

                통하여 운송되어 오는 곡식을 하역하던 나루이다. 이 나루의 이름은? .=> 양화진

[퀴즈 6] 양화나루 인근에 있는 이곳은 많은 천주 교도들이 참수당한 곳으로 천주교의 순교성지

               가 되었다. 머리가 잘렸다 해서 oo? .=> 절두산(切頭山)

(계속)

서울(한양) 탐구07-청계천에 놓인 22개의 다리와 사연 (scrap)

 

< 참고영상>: 청계천을 살려라-역사채널e -

추후 링크가 끊어지면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 나올 수도 있으며, 아래 동영상 보려면 ▷클릭   

아래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보이면  https://www.youtube.com/embed/TW8zvCusM7o<=요걸 클릭

 

[요약퀴즈]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퀴즈 1] 서울의 하천(河川) 중 서울 도심을 통과하면서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하천의 이름은?

[퀴즈 2] 청계천 다리 중 청계천 수위 측정을 했던 다리 이름은?

[퀴즈 3] 청계천 다리 중  도성 안 중심통로였으며, 주변에 시전(市廛-오늘날의 상가商街)이 위치하고 있어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다리 이름은?

[퀴즈 4] 청계천 물줄기가 도성을 빠져나가는 지점에 다섯 칸의 수문이 홍예(무지개 다리 Arch)로

           건설된 다리이름은?

 

"청계천에 관한 좋은 참고자료 사이트"=> 청계천박물관 홈페이지 www.seoul.go.kr (강추) 

 

청계천(淸溪川)   내용출처: 청계천 -다음백과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북악산ㆍ인왕산의 부근에서 발원하여 시가지 중심부를 서쪽에서 동쪽

으로 통과하여 중랑천으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청계천에는 모두 24개의 다리가 있었는데 광교(廣橋)ㆍ수표교(水標橋)ㆍ관수교ㆍ오간수교(五間水橋) 등이 유명하였다. 그 중 수표교는 수위 측정을 위한 수표석(水標石)과 함께 유명하다. 수표석(水標石)은 1973년 10월에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졌다. 청계천 다리에는 조선 시대 전설과 풍류를 말하는 세시풍속이 있는데 연날리기와 답교(踏橋)는 특히 유명하다.

 

수표교((水標橋)      내용출처: 수표교 -서울시설공단

수표교((水標橋)  

1441년(세종 23)에 다리 옆에 개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서 수표(水標)를 세운 이후부터는 수표교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주변에 있는 마을은 수표동 (水標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수표는 하천수위를 과학적, 계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기구로 측우기와 함께 세종 때 만들어진 대표적인 과학 기기의 하나이다.

 

수표는 청천의 마전교 서쪽과 한강변에 세워졌는데, 처음에는 물 속에 돌을 놓고 그 위에 구멍을 파서 나무로 만든 기둥을 세웠다. 나무기둥에는 눈금을 새겨 수위를 알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나무로 만든 수표는 쉽게 망가져 15세기 성종 때 돌기둥으로 교체하였다.

 

수표교는 광통교와 함께 청계천에 있던 가장 유명한 다리로 다리밟기, 연날리기 등이 행해지던 대표적인 민속놀이 공간이었으며, 사람의 통행이 많았던 만큼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전해진다. 특히 수표교에는 숙종과 장희빈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가 남아있다.

 

광통교(廣通橋)        내용 및 사진 출처: 광통교 -위키백과

광통교(廣通橋)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린동 124번지 부근에 있었던 다리인데, 광통방에 있는 큰 다리였으므로 처음에는 대광통교(大廣通橋)라 하였다. 오늘날은 이 지역을 광교(通橋)로 부른다.

 

광통교는 육조거리-운종가-숭례문으로 이어지는 도성 안 중심통로였으며, 주변에 시전(市廛-오늘날의 상가商街)이 위치하고 있어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다리였다. 정월 대보름이 되면 도성의 많은 남녀가 이 곳에 모여 답교(踏橋)놀이를 하던 곳으로 유명하였다.

 

오간수교(五間水橋)     내용출처: 오간수교 -서울지명사전 사진 출처: 오간수교-위키백과

오간수교(五間水橋)의 옛모습    -출처- 위키백과  

청계천 물줄기가 도성을 빠져나가는 지점, 즉 동대문에서 을지로5가로 가는 성벽 아래 청계천 6가에 있던 조선시대의 수문(水門)이다. 이 다리는 조선시대 한성에 성곽을 쌓으면서 청계천 물이 원활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다섯 칸의 수문이 홍예(虹蜺-무지개 다리 Arch)로 설치되어 오간수다리 · 오간수문 등으로 불렀다홍예 위에 성곽을 쌓아 올렸으며, 아치 모양의 구멍을 서로 연결하여 성벽 안쪽으로 장대석을 연결하여 다리를 놓았다. 

 

(알림) 다음 내용은 아래 원글을 scrap한 후 그림을 확대한 것임.

원글: 청계천에 놓인 22개의 다리와 사연(<=클릭) 2007.12.17 게시글

    (참고: 같은 제목의 게시글 중 이 게시일이 가장 빠른 것임)    

 

 

 

 

 

 

[퀴즈 1] 서울의 하천(河川) 중 서울 도심을 통과하면서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하천의 이름은?

[퀴즈 2] 청계천 다리 중 청계천 수위 측정을 했던 다리 이름은?

[퀴즈 3] 청계천 다리 중  도성 안 중심통로였으며, 주변에 시전(市廛-오늘날의 상가商街)이 위치하고 있어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다리 이름은?

[퀴즈 4] 청계천 물줄기가 도성을 빠져나가는 지점에 다섯 칸의 수문이 홍예(무지개 다리 Arch)로

           건설된 다리이름은?

 

- [퀴즈 답] -

[퀴즈 답1] 서울 도심을 통과하면서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하천의 이름은? .> 청계천

[퀴즈 답2] 청계천 다리 중 청계천 수위 측정을 했던 다리 이름은? .> 수표교

[퀴즈 답3] 청계천 다리 중 도성 안 중심통로였으며, 주변에 시전(市廛=상가商街)이 위치하고

              있어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다리 이름은? .> 광통교(광교)

[퀴즈 답4] 청계천 물줄기가 도성을 빠져나가는 지점에 다섯 칸의 수문이 홍예(무지개 다리 Arch)로 

              건설된 다리이름은? .> 오간수교(五間水橋)

(계속)

 

서울(한양) 탐구06-서울의 산(),하천(河川),()


 

(배경 영상,음악)  남촌 -소프라노 강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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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문 중 밑줄 친 링크는 본문 내용을 가져오거나 참고한 곳으로 필요시 밑줄 친 link를 클릭.

   단, 밑줄 친 링크는 현재는 연결되지만 추후 링크 주소 변경되면 연결이 안 될 수도 있음.

 

대동여지도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중 한양의 (북쪽, 동쪽 일부) 산과 산줄기 모습

그림출처: www.seoul.go.kr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일부)’-철종 12년(1861)

   그림  출처 링크

http://old.koreaa2z.com/digitaldaedong/area.php?kind=3&type=&sub=D00_07&kr=%C1%A6%B1%E2%C7%F6

 

()이나 하천(河川), ()의 이름들은 지명이나 지하철역 이름에 많이 반영되어 있다.

[ 요약 퀴즈 ]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A. 서울의 산()

[퀴즈 A-1] 서울 도심 바로 남쪽에 있어 남산(南山)으로 불리는 이 산의 옛 이름은?

[퀴즈 A-2] 서울 바로 북쪽에 있는 진산(鎭山)으로 삼각산으로도 불리는 산의 이름은?

[퀴즈 A-3] 서울 북동쪽에 있는 명산으로 5개의 암봉(岩峰)이 아름다운 이 산의 이름은?

[퀴즈 A-4] 서울 남쪽 경계에 있는 화강암 산으로 풍수지리상 불()산인 이 산은?

 

B. 서울의 하천(河川)

[퀴즈 B-1] 서울 도심을 통과하면서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하천의 이름은?

[퀴즈 B-2] 서울 정릉천과 서울 북동쪽의 미아동, 수유동, 우이동, 도봉동과 노원구 지역의 

            물도 유입되어 합쳐진다. 사근동에서 청계천과 합류(14개 지류)한 뒤,

            금호동과 성수동의 강변북로 교량 아래에서 한강에 합류되는 하천의 이름은?

[퀴즈 B-3] 경기도 용인시 법화산에서 발원해 성남시를 거쳐 서울 종합운동장 옆 한강에 

            합류하는 하천의 이름은?

[퀴즈 B-4] 경기도 의왕시의 청계산 서남쪽에서 발원하여 군포시를 거쳐 산본천, 호계천과 

            합류하고, 시흥 수암리에서 발원한 목감천과 합류한 후 서울시에 들어와

            도림천과 합류한 뒤 양화동 서쪽 끝에서 한강으로 들어가는 하천의 이름은?

 

C. 서울의 성()

[퀴즈 C-1] 산 정상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성벽을 빙 둘러 마치 머리띠를 두른 것처럼

            성()을 쌓는 방식을 oo식 산성이라 하나?

[퀴즈 C-2] 산의 계곡을 포용하고, 계곡을 둘러싼 산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는 방식을

             oo식 산성이라 하나?

[퀴즈 C-3] 북한산의 산성으로 백제가 132년에 포곡식 석축산성으로 축조했으나 신라,

            고구려의 치열한 쟁탈지가 되었고 신라 진흥왕은 553년 이곳에 순수비를 세웠다

            이후 조선 숙종(1711)대규모로 축성한 이 산성의 이름은?

[퀴즈 C-4] 병자호란때 인조가 이 성에 들어가 47일간 항전하다, 끝내 삼전도(三田渡)

            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게되었다. 이 성의 이름은?

[퀴즈 C-5] 서쪽으로 한강을 끼고 충적대지상에 구축된 평지토성으로 위례성(慰禮城)으로  

            추정되고 있는 이 토성(土城)의 이름은?

[퀴즈 C-6] 한강 남쪽 성내천(城內川)의 언덕에 자리 잡은 토성(土城)으로 서진(西晉)대 

            도기 조각이 나와 축성 시기는 3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된다. 성의 외벽은 경사 

            면을 깎아내어 급경사와 단을 만들고 두 번째 단에는 목책(木柵)을 설치한 이 

            토성(土城)의 이름은?

[퀴즈 C-7]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 한강변에 축조한 성으로 서울시 광진구

             (워커힐 호텔 뒷산에) 있는 이 석성(石城)의 이름은?

[퀴즈 C-8]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산성으로 임진왜란 당시 권율(權慄) 장군의 

            행주대첩에 큰 역할을 한 이 성()의 이름은 무엇인가?

  

A. 서울의 산() 

                      사진 및 내용 출처: 위키백과 (서울의  목록) 서울지명사전에서 가져 왔다.

 

서울의 산() 가나다순-

개운산 - 안암산, 陳石山(진석산)으로 불리며, 성북구 안암동에 있다. 개운사를 품고 있다.

개화산(開化山) - 강서구 개화동에 있는 산으로서, 주룡산, 봉화뚝이라고도 한다.

관악산 - 높이 632m인 관악산은 서울 관악, 경기 시흥, 과천, 안양에 위치하며 벼랑 위에 자리 잡은 연주대가 유명하다.

구룡산 - 높이 283.2m. 서울 서초구에 위치하며 산이 높지 않아 아침저녁으로 운동을 즐기기에 제격인 산이다.

 

굴봉산 - 구로구 오류동 개봉동에 있는 산으로서 굴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145.6m·143m·105m의 세 봉우리가 나란히 솟아 있어 삼각산이라고도 한다.

궁산(宮山) -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에 있는 산이다.

낙산 - 낙산(駱山)은 산모양이 낙타의 등과 같다고 하여 낙타산(일명 타락산)으로 불린다.

       서울시 종로구와 동대문구 성북구에 걸쳐 자리한 산으로 서울 도성의 좌청룡(左靑) 

       동산(東山)에 해당된다. 풍수지리상 서쪽 우백호의 인왕산과 대치된다.

 

남산(옛 이름은 목멱산) - 높이 262m. 서울 중구, 용산구에 위치. 옛 이름은 목멱산이다.

노고산 - 높이 106m인 노고산은 서강대학교 뒤편에 위치하며 밋밋한 구릉성의 산이다.

대모산 - 높이 293m. 서울 강남구에 위치하며 근처 아파트 주민들이 휴식공간으로 자주 찾는 산이다.

 

도봉산 - 서울 북동쪽 경계에 있으며 최고봉인 자운봉(紫雲峰 739.5m)과 만장봉(萬丈峰

          선인봉(仙人峰), 오봉(五峰여성봉 등 5岩峰과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산이다.

매봉재산 -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있으며 서리풀 공원과 이어지는 방배근린공원이 있다.

 

배봉산 - 높이 105.7m인 배봉산은 산전체가 공원으로 전농동과 휘경동에 속해 있다.

백련산 - 높이 215.5m의 백련산은 서울 은평구, 서대문구에 위치한 낮은 산으로 산내에는

          백련사가 있다. 응암동, 구파발, 홍은동 일대 주민들이 자주 찾는 산이다.

봉화산 - 높이 137,9m. 중랑구 신내동과 묵동, 중화동, 상봉동에 둘러싸여 있다.

 

북악산 - 높이 342m. 경복궁의 뒤쪽에 위치하며 산 정상을 따라 동서를 이어주는 길

         (북악스카이웨이)은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로 사랑 받고 있다.

북한산 높이 836.5m. 서울 북쪽 경계에 있으며 백운대, 인수봉, 국망봉(만경대)의 세 봉우리가 있어

          삼각산(三角山)으로 불린다. 세계적으로 드물게 수도 아주 가까이에 있는 명산으로 국립공원이다.

          인수봉은 바위 타는 사람(rock climber)의 성지이다.

불암산 - 높이 508m. 서울 동쪽 경계에 있으며 사찰로는 불암사가 있고 정상부분 전체가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다.

 

삼각산 => 북한산

삼성산 - 높이 480.9m인 삼성산은 서울 관악구, 구로구, 경기 안양시에 위치하며 원효대사가 

          의상, 윤필과 입산수도(入山修道)하였다 해서 삼성산(三聖山)이라 부른다.

성산 - 마포구 성산 제1동에 있는 산으로서, 성메, 성미라고도 한다. 산이 성과 같이 둘러있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수도산 -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산으로서, 봉은사 뒤에 있는 해발 75m의 산이다

수락산 - 높이 638m. 서울 동쪽 경계에 있으며 금류폭포와 내원암이 있는 바위 경치가 뛰어난 산이다.

 

아차산 - 높이 287m. 서울 중랑구와 경기 구리시에 위치하며, 삼국시대의 전략 요충지로

          온달장군의 전설이 전해 온다. 대성암, 석곽분, 봉수대 등이 있다.

안산 - 높이 295.9m인 안산은 무악산(毋岳山)으로 불리며,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하여 서울 시내가

        한 눈에 보이며 봉원사와 봉수대가 있다.

연희산(연희고지) - 서대문구 연희 제1,2동에 있는 높이 88m, 65m, 104m의 고지를 통틀어 일컫는다.

오패산(=벽오산) - 강북구 번동, 미아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 매봉짜, 빡빡산이라고도 한다.

와룡산 - 구로구 궁동에 있는 산으로서, 항굴 앞산으로 소가 누운 형상인 데서 유래된 이름 이다.

         궁동산, 궁동와룡산이라고도 한다.

와우산 - 마포구 서강동에 있는 산으로 홍익대학교 뒷산이다. 소가 누운 모양의 산이다.

 

용마산 - 높이 595.7m. 경기도 광주에 위치하고 있지만 교통이 편리해 찾는 사람이 많다.

용왕산 - 높이 해발 78m로 옛날에는 엄지산(嚴知山)이라고 불렸다. 양천구 목동에 있다.

우면산 - 높이 293m로 서울 서초구, 과천시 경계를 이루며 예술의 전당 뒤편에 있다.

우장산 - 높이 98.9m로 화곡5동 및 화곡6동 및 발산2동에 걸쳐 분포해있는 화곡동의 진산(鎭山)이다.

응봉산 - 응봉산은 성동구 응봉동에 자리한 해발81M의 산이지만 남쪽으로 한강을 내려다 보이고

          봄이면 온통 개나리꽃의 향연을 볼 수 있는 개나리동산이다.

인릉산 높이 327m. 순조의 능인 인릉의 朝山이 되는 데서 유래된 이름으로.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다.

인왕산 - 높이 338.2m의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하는 산으로 바위가 아름답고 정상에서 보는 (서울)도시 풍경이 멋지다

         풍수지리상 서쪽 우백호(右白虎)에 해당한다.

일자산 - 일자산(一字山)은 서울특별시 강동구, 경기도 하남시 경계에 있는 산이다.

    

천마산 - 높이 144.4m인 천마산은 서울 마천동과 하남시 사이에 위치하며 면적은 174,710 이다.

          정상에서 송파구 일대가 한눈에 들어와 전망이 좋다.

청계산 - 높이 618m. 서울 남쪽 경계(서울 서초구, 경기 과천시, 의왕시, 성남시), 정상에서

          과천 서울대공원, 서울랜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경마장이 한눈에 보인다.

청량산 - 높이 480m. 하남시와 광주군 사이에 위치하며, 산 안에 남한산성도립 공원이 위치하고 있다.

 

탑산 - 강서구 가양동에 있는 산으로서, 탑이 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호암산 - 높이 390m로 관악산 전체의 서쪽에 위치한다. 금주산, 금지산이라고도 한다.

         산세가 호랑이 형상을 닮아 일명 호암산(虎巖山)이라고도 한다.

 

화장산 - 동작구에 있는 국립현충원의 주산으로서, 공작봉이라도 한다.

 

B. 서울의 하천(河川)

서울시 안에 있는 하천은 모두 35개이다.

내용 참조 한 곳: <서울의 역사와 문화> 홈페이지 링크주소: http://history.seoul.go.kr

 

서울시 안에 있는 하천은 모두 35개이다. 이 가운데 국가 하천은 한강, 중랑천, 안양천 3개가 있고 지방 1급 하천으로는 청계천이 있다. 나머지 31개의 하천은 모두가 지방 2급 하천이다. 31개의 크고 작은 지방 2급 하천들은 북쪽과 남쪽으로 흘러 한강으로 합류하여 서해 바다로 들어간다.


그러나 서울시에 있는 총 31개의 지방 2급 하천 가운데 하천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하천들이 많다. 이미 완전히 복개가 된 하천으로는 만초천, 면목천, 월곡천, 녹번천, 봉원천, 삼성천이 있으며 홍제촌, 도림천 등은 반복개(半覆蓋) 상태이다.

 

서울의 하천     

 그림참조 링크: https://50plus.or.kr/upload/im/2018/05/c0b0f18c-3ab3-4a60-b99e-603bcad1d0ab.jpg

 

서울에 있는 하천들을 한강을 중심으로 나눠보면..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

(서울)북동쪽에 위치: 도봉천, 방학천, 당현천, 우이천, 대동천, 가오천, 화계천, 월곡천,

(서울)동쪽에 위치: 묵동천, 면목천, 전농천, 중랑천,

(서울)중앙에 위치: 청계천

(서울)정북쪽에 위치: 정릉천, 성북천, 삼청천

(서울)서북쪽에 위치: 홍제천, 봉원천, 만초천, 녹번천, 불광천, 난지천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

(서울)남동쪽에 위치: 고덕천, 성내천, 여의천, 양재천, 세곡천, 탄천

(서울)남쪽에 위치: 반포천, 사당천, 샛강

(서울)남서쪽에 위치: 대방천, 봉천천, 신림천, 도림천, 오류천, 시흥천,

목감천(개화천), 안양천

   

지방1급 하천 : 1개소 (청계천)

지방2급 하천 : 31개소  (갈색은 한강 북쪽에 ,분홍색은 한강 남쪽에 위치)
- 한강 수계 : 홍제천, 봉원천, 반포천, 탄천, 성내천, 고덕천
- 중랑천 수계 : 도봉천, 방학천, 당현천, 우이천, 목동천, 면목천, 전농천
- 안양천 수계 : 개화천(목감천), 도림천, 시흥천
- 청계천 수계 : 성북천, 정릉천
- 홍제천 수계 : 불광천
- 반포천 수계 : 사당천
- 탄천 수계 : 양재천, 세곡천
- 우이천 수계 : 화계천, 가오천, 대동천
- 도림천 수계 : 대방천, 봉천천
- 개화천 수계 : 오류천
- 정릉천 수계 : 월곡천
- 불광천 수계 : 녹번천
- 양재천 수계 : 여의천

 

중랑천(中浪川)  내용출처: 중랑천-서울지명사전

경기도 의정부시 수락산 북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양주군에서는 광사천, 어둔천과 합류되고, 의정부시에서는 부용천, 백석천, 회룡천, 호원천 등의 지류와 합류되어 서울특별시로 유입되어 총 14개 지류를 합류하여 한강으로 유입되는 국가하천이다. 

 

서울 정릉천과 서울 북동쪽의 미아동, 수유동, 우이동, 도봉동과 노원구 지역의 물도 합류되고 사근동에서 청계천과 합류(14개 지류)한 뒤, 금호동과 성수동의 강변북로 교량 아래에서 한강에 합류된다. 서울에서는 성북구, 강북구, 도봉구, 노원구, 중랑구, 동대문구, 성동구 등 7개구를 거치는 동안 각 행정자치구의 자연스런 경계 역할을 한다. 과거 중랑천은 도봉동에서는 서원천(書院川)’, 상계동 부근에서는 한강의 새끼 강이라는 뜻으로 샛강이라고 불렸다.

 

청계천(淸溪川)  내용출처: 청계천-다음백과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북악산인왕산의 부근에서 발원하여 시가지 중심부를 서쪽에서 동쪽

으로 통과하여 중랑천으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청계천에는 모두 24개의 다리가 있었는데 광교(廣橋)수표교(水標橋)관수교오간수교(五間水橋) 등이 유명하였다. 그 중 수표교는 수위 측정을 위한 수표석(水標石)과 함께 유명하다. 수표석(水標石)197310월에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졌다.

 

청계천 다리에는 조선 시대 전설과 풍류를 말하는 세시풍속이 있는데 연날리기와 답교(踏橋)는 특히 유명하다.

 

탄천(炭川)    내용출처: 탄천-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기도 용인시 법화산에서 발원해 성남시와 서울특별시 강남구·송파구를 지나 서울 종합운동장 근처에서 한강으로 유입되는 하천이다. 탄천은 성남시의 옛 지명인 탄리(炭里)에서 비롯되었다. 탄리는 지금의 성남시 태평동·수진동·신흥동 등에 해당하는 곳으로 과거에는 독정이·숯골 등의 마을이 있었다. 조선 경종 때 남이(南怡) 장군의 6대손인 탄수(炭叟) 남영(南永)이 이곳에 살았는데, 그의 호 탄수에서 탄골 또는 숯골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안양천(安陽川)     내용출처: 안양천 -서울지명사전

길이는 35.1이고 서울의 한강지류 가운데 중랑천 다음으로 규모가 크다. 갈천, 앞개울, 대천, 인덕원천(상류), 학고개천(중류), 기탄, 오목내(하류)라고도 한다.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청계산 서남쪽에서 발원하여 왕곡천과 오전천을 합류한 후 군포시를 거쳐, 다시 당정천과 산본천, 호계천을 합류한 후 안양천 지류 가운데 두 번째로 큰 유역면적을 가지고 있는 학의천을 만난다.

 

다시 수리산에서 발원한 수암천과 합류하고, 다시 삼성천을 만나고 시흥시 수암리에서 발원한 목감천을 만나고 서울특별시 경계를 넘어서는 도림천과 합류한 뒤 양화동 서쪽 끝에서 한강으로 들어간다.

 

C. 서울의 성()들    참조할 만한 홈페이지: 한강사업본부www.seoul.go.kr

 

-(알림)- 이하 내용은 해당 참조 링크에서 가져 온 것으로 내용을 편집 가감하였다.

 

산성의 축조 방식

테뫼식(山頂式) 산성: 산 정상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성벽을 빙 둘러 마치 머리띠를  두른 것처럼 성을 쌓은 것.

포곡식(包谷式) 산성: 산의 계곡을 포용하고, 계곡을 둘러싼 산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는 방식의 산성

 

북한산성    참조링크1:북한산성 다음백과 , 북한산성 -사진출처 위키백과

 

-사진출처- 위키백과

북한산성(北漢山城)은 북한산에 쌓은 산성이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산1-1번지에 위치한다.

북한산성(北漢山城)은 북한산성은 백제가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뒤 도성을 지키기 위해 쌓은 포곡식 석축산성으로 132년에 축조했다. 고구려, 신라의 치열한 쟁탈지가 되었고 신라는 553년 이곳에 진흥왕순수비를 세웠다. 이후 고려 현종이 성을 증축했으며 숙종(1711년)때 대규모의 축성 공사를 실시해서 석성을 완성했다.

 

현재 삼국시대 토성은 약간 남아 있을 뿐이고, 대부분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이 남아 있다. 14개의 문, 3개의 장대와 함께 유사시 어가를 북한산성으로 옮길 행궁을 건립하였다. 둘레가 7,620()이다.

 

지형에 따라 성벽 없이 여장(女檣)만 쌓은 곳도 있는데, 그 길이는 1,457보이다. 여장(女檣)이란 성벽 위에 설치한 낮은 담장으로 적을 관측하고 공격하면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 진 것으로 여자도 넘을 수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탕춘대성(蕩春臺城)     내용 및 사진 출처: 홍지문 및 탕춘대성 -위키백과

탕춘대성 암문(暗門) -사진 출처: 위키백과 -

홍지문 및 탕춘대성(弘智門 蕩春臺城)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1976623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

 

탕춘대성은 인왕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북쪽의 능선을 따라 내려가다가 사천을 지나 북한산 서남쪽의 비봉 아래까지 연결하여 축성한 산성이다. 이 산성의 명칭을 탕춘대성이라고 한 것은 현재 세검정이 있는 동쪽 약 100m 되는 산봉우리에 탕춘대(蕩春臺)가 있었던 것에서 연유한 것이며, 한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성(西城)이라고 하였다.

 

조선왕조 숙종은 왕 37(1711)에는 북한산성을 축성하였고 다시 탕춘대성을 축조하였다. 탕춘대성 전체의 길이는 약 4km 이었고 성내에 연무장(鍊武場)으로 탕춘대 터(오늘날 서울세검정초등학교)에 연융대(鍊戎臺)를 설치하는 한편, 비상시를 대비하여 선혜청(宣惠廳) 창고와 군량창고인 상·하 평창(平倉)을 설치하였다. 그 후 탕춘대성의 축성과 함께 그 성안을 총융청(摠戎廳) 기지로 삼고, 군영도 배치하였다.

 

현존하는 탕춘대성은 도성이나 북한산성과 같이 주 성벽과 여장(女墻)을 쌓았으며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일정한 간격으로 성구(城口)를 뚫어 놓았다. 현재 홍지문이 복원되어 있고, 상명대학교 북쪽으로 성곽이 남아있다.

 

남한산성(南漢山城)     내용 출처: 남한산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남한산성 서장대(일명 守禦將臺) 사진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남한산성(南漢山城)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시기에 축조되어 조선시대 수도 한양을 지키던 성곽이다. 흔히 북한산성(北漢山城)과 함께 조선의 도성인 한양의 방어를 위하여 쌓은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성벽의 바깥쪽은 경사가 급한데 비해 안쪽은 경사가 완만하여, 방어에 유리하면서도 적의 접근은 어려운 편이다. 봉암성(蜂巖城), 한봉성(漢峰城), 신남성(新南城) 3개의 외성과 5개의 옹성도 함께 연결되어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성벽과 성 안에는 많은 시설물과 건물이 있었지만, ··남문루와 장대(將臺돈대(墩臺((암문·우물 등의 방어 시설과 관청, 군사훈련 시설 등이 있다.

 

남한산성의 수비는 총융청이 맡아 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다. 여기에는 전····후의 5(五管)이 소속되었는데 전영장(前營將)은 남장대(南將臺), 중영장은 북장대에, 후영장과 좌영장은 동장대에, 우영장은 서장대에 진을 치고 있었다. 지금은 서장대(일명 守禦將臺)만 남아 있다

 

남한산성의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게 인정되어 20146월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신규 등재되었다.

 

'삼전도(三田渡)의 굴욕'      관련 링크: 삼전도의 굴욕 - 나무위키

1637224(인조 15년 음력 130)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일으키고 한양으로 빠르게 남하하자 조선의 왕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 하였다. 하지만 청군이 길을 막아 강화도로 갈 수 없게 되었고 이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한다.

 

그러나 남한산성에 피신하였던 백성들이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힘들어하는 상황과 성내의 물자가 떨어지자 47일간 대항하였지만 끝내 청나라와 치욕스러운 강화(말이 강화조약이지 항복이나 다름없었다)를 맺으니 이를 삼전도의 굴욕이라 한다. 삼전도(三田渡)는 서울시 송파구 삼전동에 있었던 나루로 삼밭나루라고도 불렸다.

 

인조는 세자와 신하들을 이끌고 남한산성 문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의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며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풍납토성(風納土城)     내용출처: 풍납동토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흔히 풍납토성(風納土城)=풍납동토성(風納洞土城)이라고도 하는 데 삼국사기백제본기(百濟本紀)에 나오는 위례성(慰禮城)으로 추정하는 견해이다. 또한, 평고성을 풍납토성으로 보고, 이 성이 서울 광진구 광장동 뒷산에 있는 아차산성(阿且山城)과 연결되어 방어적 기능을 담당했던 성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서북쪽으로 한강에 직면하고 있고, 강 맞은편에는 아차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남쪽으로 성내천을 사이에 두고 2.5km 거리에 몽촌토성이 있으며, 동쪽으로 이성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풍납토성은 서쪽으로 한강을 끼고 충적대지상에 구축한 순수 평지토성으로 약간 동쪽으로 치우친 남북 장타원형을 띠고 있다. , 북벽과 남벽은 짧은 벽으로 직선에 가깝고, 동벽과 서벽은 단벽에서 둔각을 이루며 꺾이는데, 그중 동벽은 중앙부가 완만한 형태를 띠고 있다.

풍납토성은 현재 북벽과 동벽, 남벽 등 일부가 약 2.1정도가 남아 있으며, 유실된 서벽을 포함한다면 전체 길이 3.5에 달하는 거대한 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몽촌토성(夢村土城)     내용출처: 서울몽촌토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풍납토성과 함께 백제가 성립된 시기에 만들어진 도성(都城)이다. 성벽 조사에서 출토된 중국 서진(西晉)대 전문 도기 조각이 나오므로 토성을 축조한 연대의 상한은 3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된다.삼국사기등에 기록된 것처럼, 고구려의 남진에 의해서 한성(漢城)이 함락되고 웅진으로 천도하였던 475년까지 백제의 도성으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판축 성토에 의한 토성 축성은 백제 한 성기를 중심으로 한 백제 토성의 유형과 축성 방법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기준으로 알려져 있다. 몽촌토성은 한강 남안 성내천(城內川)을 끼고 있는 언덕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성의 외벽은 언덕 경사면을 깎아내어 급경사와 단을 만들고 두 번째 단에는 목책(木柵)을 설치하였다. 현재 목책은 본성의 서북벽·동벽과 외성 등 3곳에서 확인되었는데, 생토암반층에 큰 나무를 박아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 보조기둥을 세웠다. 목책의 높이는 2m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이 목책은 발굴 조사된 원래의 목책 기둥 자리를 따라 그 위에 추정 복원한 것이다.

 

몽촌토성의 북쪽 기슭에는 1992년 몽촌역사관이 건립되어 한강 유역을 포함한 백제문화의 대표적인 유적과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암사동·명일동·역삼동의 선사시대 주거지와 가락동·방이동·석촌동의 고분군, 몽촌토성의 유적 모형과 출토 유물을 전시하여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아차산성(阿嵯山城)      내용출처: 아차산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서울특별시 광진구에 있는(워커힐 호텔 뒷산에 있는) 아차산의 경사진 산허리 윗부분을 둘러쌓은 테뫼식(山頂式) 산성으로. 삼국시대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 축조한 성이다.

 

아차산성(阿嵯山城)은 아단성(阿旦城장한성(長漢城광장성(廣壯城) 등으로 불리는데 <광개토왕비문>의 영락 6년조에 광개토왕이 백제로부터 공취한 58성 가운데 아단성의 이름이 보인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이끈 군대가 백제의 한성을 함락시킴에 따라 개로왕이 생포되어 아단성 아래서 처형되었다. 이렇게 아단성은 고구려 군대가 주둔한 군사진지였으며, 그 뒤 77년간 한강 유역을 통치한 고구려의 전방기지로서 기능하였다.

 

또 조선 후기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아차산에는 양진성과 아차산고성이라는 2개의 성곽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양진성은 나루를 방비하기 위한 성곽으로 현존하는 유구나 문헌자료를 통해 볼 때 아차산의 지봉(芝峰)을 따라 광나루 북방에 위치한 광진성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아차산고성은대동여지도에 보이는 망우리 쪽 아차산에 소재하고 있는 성곽을 아차산고성의 유지(遺址 남은 터)로 보고 있다.

 

아차산성은 석축성으로 기본 형태는 테뫼식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산 정상부를 돌아가며 축성한 테뫼식과는 달리 아차산 능선 말단부의 남쪽 지역을 적절히 이용하여 작은 계곡이 포함되도록 함으로써 성 내에 우물과 작은 계곡이 흐르는 포곡형 산성에 가까운 형태이다.

 

한편 장한성의 유구(遺構 남아 있는 구조물)는 본래 뚝도 부근의 한강변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고지를 따라 아차산에 이르고 다시 망우리에 이르는 산줄기를 따라 용마봉에 못 미치는 벼랑바위산에 이르기까지 산마루를 따라 석성 터가 있으며, 구리시 아천동까지 그 유구가 나타난다. 이를 장성 또는 장한성이라 하는 데 신증동국여지승람한성부 고적조에 '장한성이 한강 위에 있는데 신라 때 여기에 중요한 진영을 두었으며 고구려에 의해 점령당하였다가 군사를 동원하여 수복하고, 장한성가(長漢城歌)를 지어 그 공을 기리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성은 산 정상이나 산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토성이나 석성이 아니고 산 정상을 지나 등선을 따라 일직선 형태로 축조된 성벽으로 하남시 춘궁리에 있는 이성산성과 축성양식이 같은 신라시대의 산성으로 특히 삼국통일 전쟁 수행을 위한 북진기지 가운데서도 군사적 요충으로 추정된다.

 

행주산성((幸州山城)     내용출처: 행주산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행주산성은 삼국시대부터 토축(土築) 산성이 있었다. 행주산성이 처음 축성된 것은 통일신라시대(78세기경으로 추정)로 추정하고 있다. 강안(江岸)의 돌출된 산봉우리를 택하여 산 정상부를 에워싼 소규모의 내성(內城)과 북쪽으로 전개된 작은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外城)의 이중구조를 하고 있으며 둘레가 약 1,000m.

 

백제의 초기 영역에는 서해안으로의 수운(水運)과 관계된 중요한 거점이었으며, 특히 나당전쟁(羅唐戰爭) 때까지 남북교통의 요충에 해당하여 고구려와 신라의 공방전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행주(幸州) 산성은 해발 124.8m의 덕양산의 해발 70100m에 이르는 능선을 따라 축조되어 있는 테뫼식(山頂式) 산성으로, 남쪽은 한강이 연하여 있고, 동남쪽으로는 창릉천(昌陵川)이 산성을 돌아 한강으로 흘러들고 있어 자연적인 해자(垓字)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산성의 동남쪽과 남쪽 일대는 자연 경사가 매우 급하여 자연적인 요새로서의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 행주산성에서 조선시대 임진왜란(권율(權慄) 장군의 행주대첩) 당시 부녀자들까지 동원되어 관민(官民)이 일치단결하여 싸웠다. 특히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서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여기에서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 행주대첩으로 인하여 조선군과 명나라 군사가 사기를 회복하여 왜적을 남으로 쫓고 정부가 환도(還都)하게 되었으니 그 의의는 실로 크다 하겠다.

 

호암산성(虎巖山城)   내용출처1: 서울호암산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내용출처2:한강의 어제와 오늘 (서울시사편찬위원회 발간, 2001.10.)수록내용 발췌함

호암산성(虎巖山城)은 금천구 시흥2동 산 93번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리상으로 서울의 남서쪽에 해당된다. 산성의 입지조건으로 볼 때 호암산성은 안양 금천 일대의 평야를 관할하는 요새지로서 서쪽의 해안과 북쪽으로 침입하는 적에 대한 공격과 방비를 위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해발 347m의 조그만 봉우리를 최고봉으로 하는 산 정상의 성 내부는 비교적 평탄지형을 이루고 있다. 유적의 동쪽으로 직선거리 약 2km 지점에 해발 629m의 관악산 정상인 연주대가 위치하고, 동남방 1km 지점에 해발 460m의 삼성산 정상이 위치하고 있다.

 

문무왕 12(672)'한산주에 주장성(晝長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주목된다. 출토된 유물·유적과 지리적 입지조건을 바탕으로 문헌기록과 비교 검토한 결과, 호암산성의 축성 시기는 문무왕 12년경으로 보고 있다. 신라가 당나라와의 전쟁 때 한강을 넘어 수원 지역으로 내려가는 육로와 남양만으로 침입하는 해로를 가장 효과적으로 방어 공격하기 위해 세워진 요새지였다고 하겠다.

 

또한 호암산성 발굴에서 통일신라시대 이외에 고려시대의 유물도 많이 출토되었고, 임진왜란 당시 한성 수복을 위해 행주산성과 연합한 전라병사 선거이(宣居怡) 장군이 인솔하는 조선 군사들이 주둔한 곳이기도 하다.

 

[ 요약 퀴즈 ]

[퀴즈 C-4] 병자호란때 인조가 이 성에 들어가 47일간 항전하다, 끝내 삼전도(三田渡)

            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게되었다. 이 성의 이름은?

[퀴즈 C-5] 서쪽으로 한강을 끼고 충적대지상에 구축된 평지토성으로 위례성(慰禮城)으로  

            추정되고 있는 이 토성(土城)의 이름은?

[퀴즈 C-6] 한강 남쪽 성내천(城內川)의 언덕에 자리 잡은 토성(土城)으로 서진(西晉)대 

            도기 조각이 나와 축성 시기는 3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된다. 성의 외벽은 경사 

            면을 깎아내어 급경사와 단을 만들고 두 번째 단에는 목책(木柵)을 설치한 이 

            토성(土城)의 이름은?

[퀴즈 C-7]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 한강변에 축조한 성으로 서울시 광진구

             (워커힐 호텔 뒷산에) 있는 이 석성(石城)의 이름은?

[퀴즈 C-8]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산성으로 임진왜란 당시 권율(權慄) 장군의 

            행주대첩에 큰 역할을 한 이 성()의 이름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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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 퀴즈 답 ]

A. 서울의 산()

[퀴즈 A-1] 서울 도심 바로 남쪽에 있는 남산(南山)옛 이름은? .=> 목멱산(木覓山)

[퀴즈 A-2] 서울 북쪽에 있는 서울의 진산(鎭山) 불리는 산의 이름은? .=> 북한산

[퀴즈 A-3] 서울 북동쪽에 있는 5개의 암봉(岩峰)이 아름다운 이 산은? .=> 도봉산

[퀴즈 A-4] 서울 남쪽에 있는 화강암 산으로 풍수상 불()산인 이 산은? .=> 관악산

 

B. 서울의 하천(河川)

[퀴즈 B-1] 서울 도심을 통과하면서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하천의 이름은? .=> 청계천

[퀴즈 B-2] 서울 정릉천과 서울 북동쪽 미아동, 수유동, 우이동, 도봉동과 노원구 지역의

            물이 사근동에서 청계천과 합류되어 한강에 합류되는 하천은? .=> 중랑천

[퀴즈 B-3] 용인시, 성남시를 거쳐 종합운동장 옆 한강에 합류하는 하천은? .=> 탄천

[퀴즈 B-4] 경기도 의왕시, 군포시를 거쳐 산본천, 호계천과 합류하고, 시흥 목감천과

            합류하고 도림천과 합류 후 한강으로 들어가는 하천의 이름은? .=> 안양천

 

C. 서울의 성()

[퀴즈 C-1] 정상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성벽을 빙 둘러 마치 머리띠를 두른 것처럼

            성()을 쌓는 방식을 oo식 산성이라 하나? .=> 테뫼식(山頂式)

[퀴즈 C-2] 산의 계곡을 포용하고, 계곡을 둘러싼 산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는 방식을

            oo식 산성이라 하나? .=> 포곡식(包谷式) 산성

[퀴즈 C-3] 신라 진흥왕이 순수비를 새웠던 산의 이름은? .=> 북한산성

[퀴즈 C-4] 병자호란때 인조가 이 성에 들어가 47일간 항전하다, 끝내 삼전도(三田渡)

              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게되었다. 이 성의 이름은? .=> 남한산성

[퀴즈 C-5] 위례성(慰禮城)으로 추정되고 있는 토성(土城)의 이름은? .=> 풍납토성

[퀴즈 C-6] 한강 남쪽 성내천(城內川)의 언덕에 자리 잡은 토성(土城)으로 서진(西晉) 도기 조각이 나와

            축성 시기는 3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된다. 성의 외벽은 경사면을 깎아내어 급경사와 단을 만들고

            두 번째 단에는 목책(木柵)을 설치한 이 토성(土城)의 이름은? .=> 몽촌토성

[퀴즈 C-7]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 한강변에 축조한 성으로 서울시 광진구 (워커힐 호텔 뒷산에) 있는

            이 석성(石城)의 이름은? .=> 아차산성

[퀴즈 C-8]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산성으로 임진왜란 당시 권율(權慄) 장군의 행주대첩에 큰 역할을 한

            이 성()의 이름은 무엇인가? .=> 행주산성

  (계속)

 

서울(한양) 탐구05-조선시대 한양(서울)지도, 한양도성(성곽)4대문, 4소문



 

(배경 영상,음악)  수제천(壽齊天)-국립국악원-

    추후 링크가 끊어지면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 나올 수도 있으며,

    아래 음악이나 동영상 보려면 ▷클릭, 멈추려면 stop □ 버튼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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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중 밑줄 친 링크는 본문 내용을 가져오거나 참고한 곳으로 필요시 밑줄 친 link를 클릭. , 밑줄 친 링크는 현재는 연결되지만 추후 링크 주소 변경되면 연결이 안 될 수도 있음.

 

<참조한 주요 링크>

1. 조선시대 서울의 옛지도- https://blog.daum.net/sonsang4/13741884

2. 서울 성곽 일주하기(한 바퀴 돌기):

    참조링크2-1: 서울성곽   참조링크2-2 성곽둘레길:서울한양도성

    참조링크2-3: 서울의 성곽 상세 참고자료(PDF): 서울의 성곽 -WebViewer (seoul.go.kr)

3. 사대문(四大門) 참조자료3-1: 사대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자료3-2: [조선시대] 4대문-한국역사해설진흥원

4. 사소문(四小門) 참조한 자료 및 내용 출처: 사소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잠깐 퀴즈! -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주요 산, 도성(성곽)4대문, 4소문에 대한 퀴즈.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 퀴즈-D ]

1.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동서남북의 주요 산 이름(조선시대 불렸던 이름)?

    ①북쪽 산 동쪽 산 남쪽 산 서쪽 산

2. 한양도성의 주요 출입구였던 4대문의 이름은? (, 북쪽은 별로 통행하지 않음)

    ①북쪽 문 동쪽 문 남쪽 문 서쪽 문

3. 한양도성의 (4대문 말고) 소규모 출입구였던 4소문의 이름은?

    ①동북쪽 문 동남쪽 문 남서쪽 문 서북쪽 문

 

(알림)

이하 내용은 위에 소개한 참조 링크 및 본문 내용에 링크된 참고 자료에서 가져온 것이며 항목과 내용 일부는 편집, 가감된 것도 있음.

 

조선시대 한양의 모습이 담긴 지도

「경도오부 북한산성부도(京都五部北漢山城附圖)」-조선 영조 7(1731)년 경,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내용 출처: 조선시대 서울의 옛지도- https://blog.daum.net/sonsang4/13741884

   

경복궁을 비롯한 주요 궁궐, 육조 및 4大門, 4小門 위치, 서울을 둘러싸는 주요 산과 성곽, 외곽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길들이 그려져 있다.  

도성도(都城圖)」(부분) -조선 영조 26(1750)년 경 제작,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도성 안팎의 주요도로는 굵은 붉은 선으로, 간선도로는 가는 붉은 선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북악산과 인왕산 기슭에서 흘러 내려오는 하천들과 다리 명칭들이 표시되어 있다. 석주(石柱)만 남아있는 경회루 등 임진왜란 이후 복구되지 않은 경복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 성곽 일주하기(한 바퀴 돌기): 참조 링크1: 서울성곽   참조 링크2:서울한양도성

                                  참조링크3: 서울의 성곽 상세 참고자료(PDF): 서울의 성곽 -WebViewer (seoul.go.kr)

출처 및 저자: 서울시 간행물-서울특별시사 편찬위원회

 

한양 도성 성곽은 둘레 약 17로 조선왕조가 수도를 방어·수호하기 위해 쌓은 성곽으로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산은 북쪽의 백악산(白嶽山 링크:백악산-오늘날 북악산)을 시작으로 동쪽의 낙산(駱山 링크:낙산-낙타같이 생긴 산), 남쪽의 목멱산(木覓山 링크:목멱산-남산의 옛 이름),, 서쪽의 인왕산(仁王山 링크:인왕산)이 한양(서울) 중앙부를 둘러싸고 있다.

 

한양 도성의 성곽은 이들 4개의 산을 연결한 구간과 숙종 때 축성된 탕춘대성과 북한산성 행궁지 등을 연결한 조선시대 성곽을 말한다. 도심 바깥으로 탕춘대성, 북한산성이 서울을 둘러싸고 있고 홍지문(弘智門)蕩春臺城(탕춘대성)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출처:홍지문 및 탕춘대성

 

한양도성 성곽 둘레길

한양(서울)도성 성곽 둘레길

- 성곽 둘레길 참조 링크모음 

 [한양도성 백악구간] http://rblr.co/0ZVfb     [한양도성 낙산구간http://rblr.co/0ZVfi

 [한양도성 목멱구간] http://rblr.co/0ZXDC    [한양도성 인왕구간] http://rblr.co/0ZXDb

 [탕춘대성http://rblr.co/0ZcfR                [북한산성 행궁지http://rblr.co/0ZgmA

 

사대문(四大門) -요약-

조선시대 (한양) 도성에서 동쪽의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서쪽의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남쪽의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북쪽의 숙청문(肅淸門 1523년 이후 숙정문肅靖門으로 개칭) 등 사대문(四大門)이 있다.

 

서울의 4대문과 보신각에 담긴 뜻은 공자의 가르침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으로,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에 돈의문(敦義門), 남쪽에 숭례문(崇禮門), 북쪽에 홍지문(弘智門)숙정문(肅靖門), 중앙에 보신각(普信閣)이 있다.

 

유교의 오상(五常)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로 어질고, 의롭고, 예의 바르고, 지혜로움, 신뢰를 말한다.

 

사소문(四小門) -요약-

사소문(四小門)은 동북의 홍화문(弘化門, 후에 惠化門, 속칭 동소문), 남서의 소덕문(昭德門, 후에 昭義門, 속칭 서소문), 동남의 광희문(光熙門, 속칭 水口門), 서북의 창의문(彰義門, 속칭 紫霞門)을 통틀어 이르는 명칭이다. 1457(세조 3) 4소문 외에 남소문(南小門)을 개설하였다가 1469(예종 1) 폐문하였다.

 

조선시대 도성 문 내역(요약표)

구분 방위 문 이름 문화
가치
위치 용도 내용
4대문 홍인지문
(동대문)
보물1 종로
669
동쪽 관문 기가 약해 산맥의 뜻 지()를 넣었다고 함
돈의문
(서대문)
  종로구
신문로2
중국과의
관문
일제 때 철거
숭례문
(남대문)
국보1 남대문로
429
한양의
관문
궁궐에 직면한 관악산의 불기운을 막기 위해 현판을 세로로 썼다함
숙정문
(북대문)
사적10 삼청동
2-1
평상시
닫침
문을 열어놓으면 음기가 침범(풍기문란)한다 하여 폐쇄
4소문 동북 혜화문
(동소문)
성북구
동소문동
양주,포천 관문 일제 때 철거 후
1994년 복원
동남 광화문
(수구문)
중구
광희동
시신출구 1975년도 복원
서남 소의문
(서소문)
중구
서소문
  일제 때 철거
서북 창의문
(자하문)
종로구
청운동
북대문
역할
1958년 보수

 

4대문(四大門)

이하 내용과 사진은 참조자료1: 사대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자료2: [조선시대] 4대문-한국역사해설진흥원 에서 가져 왔다.

 

(동쪽)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흥인지문(=동대문) -사진 출처: 문화재청

흥인지문은 태조 때 1397(태조 6)1차 완공되었다. 1451(문종 1)에 중수를 시작하여

1453(단종 1)에 끝냈다. 이 문의 현판은 오행(五行)의 동쪽을 나타내는 인(仁)을 포함하며, 동대문 일대가 서울 도성 안에서 가장 낮은 지역으로 바로 남쪽에 청계천이 흐르고 있으므로, 땅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 1869년(고종 6) 개축하면서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고 ‘之’자를 보강하였다고 한다.

 

흥인문은 주위 지형의 열악한 조건을 보완하고자 옹성을 두른 것이 특징이다. 이 옹성은 문 앞쪽에 반달 모양으로 둥글게 축성되어 옹성 안에 들어온 적을 앞뒤에서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왜적이 가장 먼저 입성하였다.

 

(서쪽)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돈의문(敦義門) -사진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돈의문은 도성의 2차 공사가 끝나면서 다른 성문과 함께 건축되었다. 처음에는 경희궁 서쪽 언덕 지점에 위치하여 서전문(西箭門)이라 불리었다. 그러다가 1422년(세종 4) 2월에 도성을 고쳐 쌓게 되면서 서전문을 헐고 그보다 남쪽 지점에 새로 돈의문을 세웠다. 이후로 돈의문은 통칭 ‘새문[新門]’이라 불리게 되었다. 돈의문은 의주(義州) 국도의 관문으로 황해도와 평안도를 거쳐 중국으로 통하였다.

 

일제에 의해 철거되어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지금의 신문로 큰길과 정동에서 평동으로 통하는 길이 교차하는 마루턱에 위치하였다. 이괄(李适)의 난과 을미사변에 관련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남쪽)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사진 출처 : 한국관광공사

숭례문은 도성의 정문으로 청계천과 만초천(蔓草川)을 가르는 언덕에 세워져 있다. 도성 8문 가운데 가장 웅장하고 규모가 크며 서울의 얼굴 구실을 하였다. 남대문의 건축은 홍예(虹霓 Arch)와 문루 등 그 구조에 특별히 유의하였는데 1396년에 시작하여 1398년(태조 7) 2월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되었다.

 

1448년(세종 30) 숭례문의 지대를 높여 남산과 인왕산의 지맥을 연결시켜 경복궁을 아늑하게 껴안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풍수지리설과 당시의 여론에 따라 다시 건축하였다. 이때의 숭례문이 오늘에 전하는 것인데 1479년(성종 10)에 중수되었다. 한편 1962년 개수 공사 때 세종과 성종 때 개축 또는 중수한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숭례문의 현판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글씨로 전하는데, 다른 도성문과 다르게 횡액(橫額)이 아니라 종액(縱額-세로로 써진 편액)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오행사상에 따른 것으로 ‘예(禮)’자는 오행의 화(火)에 해당하는 글자인 까닭에 불이 타오르는 형상에 따라 세워서 달았다고 한다. 혹은 한양의 조산(朝山)인 한강 건너의 관악산이 오행의 화(火)에 해당되어 그 불기운이 도성을 범접하게 되므로 숭례문의 현판을 세워 맞불로 도성을 보호하고자 했다는 전설이 있다.   

 

(북쪽) 숙정문(肅靖門) 또는 숙청문(肅淸門)

숙정문(肅靖門) -사진 출처 : 두산백과

숙청문은 한양의 주산(主山)인 북악의 동쪽 마루턱에 위치하였으나 그 규모는 대문의 형식을 갖추지 못하고 소문(小門)의 규모였으며 오랫동안 문루마저 갖추지 못하였다. 숙청문의 원래 자리는 지금 자리의 약간 서쪽에 위치하였었다가 1504년(연산군 10)에 옮겨졌다. 숙청문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1413년(태종 13)에 폐문되었는데, 즉 북쪽은 음(陰)에 해당되어 이 문을 열어 놓으면 음기가 번성하여 도성 안의 부녀자들이 놀아나 풍기가 어지러워지기 때문에 문을 꼭꼭 닫아둔다고 하였다.

 

숙청문은 위치상 통행에는 거의 이용되지 않았고, 단지 장마가 지면 비 그치기를 기원하는 영제(禜祭), 즉 기청제(祈晴祭)를 여기에서 거행하였다. 또 예종 때부터는 가뭄이 들면 양기가 많은 남대문을 닫고 음기 서린 북대문을 열어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를 지냈다. 숙청문은 중종 이후 모든 기록에 ‘숙정문(肅靖門)’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현재 새로 복원한 문루에도 ‘肅靖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

이상 내용과 사진은 참조자료1: 사대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자료2: [조선시대] 4대문-한국역사해설진흥원 에서 가져 왔다

 

(중앙) 보신각(普信閣) 참조 자료: 보신각-위키백과-

보신각(普信閣) -사진 출처 : 위키백과

보신각(普信閣) 또는 종각(鐘閣) 서울시 종로구 관철동 종로사거리에 있는 전통 2 한옥 누각이다보신각종을 걸어 놓기 위해 만든 것으로 정면 5, 측면 4칸의 구조로 되어 있다. 1396(조선 태조 5) 창건했다가, 1869(조선 고종 6), 1979 8월에 재건했다. 보신각 터(普信閣址)라는 명칭으로 1997 1110일에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사소문(四小門)    참조한 자료 및 내용 출처: 사소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북의 홍화문(弘化門, 후에 惠化門, 속칭 동소문), 남서의 소덕문(昭德門, 후에 昭義門, 속칭 서소문), 동남의 광희문(光熙門, 속칭 水口門), 서북의 창의문(彰義門, 속칭 紫霞門)을 통틀어 이르는 명칭이다. 1457(세조 3) 4소문 외에 남소문(南小門)을 개설하였다가 1469(예종 1) 폐문하였다.

 

(동북의) 홍화문(弘化門, 후에 혜화문惠化門, 속칭 동소문)

           참조자료1: 혜화문(惠化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자료2: 화문-위키백과

혜화문(惠化門)-사진 출처 : 위키백과

홍화문((弘化門)은 혜화동에서 삼선동으로 뚫린 길 마루턱에 자리 잡아 도성에서 함경도 등 북방과 직결되는 관문이었다. 1484(성종 15) 창경궁이 완공되어 그 정문을 홍화문이라 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해 1511(중종 6) 혜화문으로 개칭하였다. 혜화문은 도성의 소문 가운데 하나였지만 대문의 구실을 하였다.

 

즉 경원가도(京元街道)가 여기서 연결되어 있었고, 북대문인 숙청문(肅淸門, 후에 肅靖門)이 항상 닫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문을 통행하였다. 그리고 여진(女眞)의 사신이 조공하기 위하여 한양에 입성할 때 이용하던 문이기도 하다.

 

처음 건립하였을 때의 문루는 언젠가 없어지고 1744(영조 20) 어영청(禦營廳)에 명하여 문루를 건축하였다. 이후 일제의 도시계획이라는 명목 아래 문루는 1928년에 헐리고, 홍예와 석문마저 1939년에 사라진 것을 1994년 길 마루턱 북쪽에 복원하였다.

 

(남서의) 소덕문(昭德門, 후에 소의문 昭義門, 속칭 서소문)    참조자료: 소의문 이야기

소의문(昭義門)= 서소문) -사진출처: 소의문 이야기 -Daum 백과

소덕문은 서소문동에서 의주로로 넘어가는 길 마루턱에 위치한다. 1472(성종 3) 예종비 장순왕후(章順王后) 한씨의 시호를 피하여 소의문으로 개칭하였다.

 

이 문은 도성 안 백성들이 죽어서 도성 서쪽으로 운구할 때 이용되는 문이었다. 서소문 밖에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시전의 하나인 칠패시전(七牌市廛)이 있어 발달하던 성업 활동의 중심무대가 되었다.

 

1396(태조 5) 건축 당시에는 다른 성문과 같이 문루가 있었으나 언젠가 없어지고 1743(영조 19) 다시 문루를 건축하였다. 1914년 일제에 의해 철거되어 서소문동이라는 지명만 남아 있다.

 

(동남의) 광희문(光熙門), 속칭 水口門 또는 시구문(屍口門)    참조자료: 광희문

광희문(光熙門= 水口門) -사진 출처 : 한국관광공사

광희문은 1396년 도성 축성 때 건축되었다. 문이름은 광명의 문을 의미하나 개천 수구(水口)에 가까운 곳에 있어 수구문이라 불렀으며, 도성 안 장례 행렬이 동쪽 성 밖으로 나갈 때 통과하는 문이어서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하였다.

 

동대문과 남대문 사이의 중구 광희동에 있어 남소문이라 할 수 있으나 따로 도성에서 한강 나루터로 바로 통하는 문이 필요하게 되어 세조 때 장충단공원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마루턱에 별도의 남소문을 건축하였다.

 

한편 명지대 홍순민 교수는  수구문에 대해서 부근으로 청계천 물길이 나가기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었다고 하는 말이 있으나 이는 억측이다. 청계천 물길은 흥인문이 더 가깝다. 수구문이란 한강으로 출입하는 문이란 뜻이다. 더구나 이 문을 그 부근에 늘 시신이 쌓여  있었다 하여 시구문(屍口門)이라 했다는 것은 일본인들의 악의적 왜곡이다. 참조 링크:  문(門) 이름에 숨은 뜻

 

그러나 남소문 건립 후 의경세자(懿敬世子 : 성종의 아버지, 德宗)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풍수 지리적으로나 실용적으로나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12년 만에 폐문되었다.

 

조선 전기 왜국 사신들은 옥수동의 한강 두모포(豆毛浦)나루를 거쳐 광희문을 통하여 인현동에 있던 지정 숙소인 동평관(東平館)에 머물렀다. 1915년경 문루가 자연 붕괴된 이래 홍예(虹蜺 Arch)만 남아 있었는데, 1975년 서울 성곽을 수축하면서 홍예 석축을 해체하여 남쪽으로 15m 이전 복원하면서 문루 12평도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서북의) 창의문(彰義門, 속칭 紫霞門)

           참조링크1:서울 창의문 자하문(紫霞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링크2:창의문  -위키백과

창의문(彰義門)=자하문(紫霞門) -사진 출처 : 한국관광공사

창의문은 의로움을 표창한다는 뜻으로 자하문(紫霞門)으로도 불렸고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도성을 축조할 때 함께 축조되었는데, 1413(태종 13) 지리도참설에 따라 일시적으로 문이 닫히기도 했다. 그러나 1422(세종 4) 숙청문과 함께 군인의 출입문으로 하였고, 궁궐의 담장 축조나 국가의 큰 공사가 있을 때 일시 열어 통행하였다.

 

1623년에는 인조반정의 반정군(反正軍)이 홍제원(弘濟院)에 집결하였다가 세검정을 거쳐 이 창의문을 열고 도성에 들어와 광해군을 쫓아냄으로써 인조 정권이 창출되었다. 1741(영조 17) 성문과 문루를 개수하면서 인조반정의 반정공신 1등에서 3등까지의 공신 이름을 새긴 현판을 걸었으며, 지금도 전해 오고 있다.

 

창의문은 서울 성곽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완형을 지니고 있으며 지금도 성곽의 일부가 연결되어 있다. 창의문 구조의 특징으로, 문 밖의 지세가 마치 지네의 형상과 같아 그 기세를 제압하고자 지네와 상극인 닭의 모형을 나무로 만들어 추녀에 매달아 놓았다.

 

[ 퀴즈-D ]

1.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동서남북의 주요 산 이름(조선시대 불렸던 이름)?

    ①북쪽 산 동쪽 산 남쪽 산 서쪽 산

2. 한양도성의 주요 출입구였던 4대문의 이름은? (, 북쪽은 별로 통행하지 않음)

    ①북쪽 문 동쪽 문 남쪽 문 서쪽 문

3. 한양도성의 (4대문 말고) 소규모 출입구였던 4소문의 이름은?

    ①동북쪽 문 동남쪽 문 남서쪽 문 서북쪽 문

 

[ 퀴즈-D 정답]

1.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동서남북의 주요 산 이름(조선시대 불렸던 이름)?

   ①북쪽 답.=> 백악산 동쪽 답.=> 낙산 남쪽 답.=> 목멱산 서쪽 답.=> 인왕산

2. 한양도성의 주요 출입구였던 4대문의 이름은? (, 북쪽은 별로 통행하지 않음)

   ①북쪽: 숙정문(肅靖門) 또는 숙청문(肅淸門)  동쪽: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③남쪽: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서쪽: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3. 한양도성의 (4대문 말고) 소규모 출입구였던 4소문의 이름은?

   ①동북쪽: 홍화문(弘化門, 惠化門, 속칭 동소문) 동남쪽:광희문(光熙門, 속칭 水口門)

   ③남서쪽: 소덕문(昭德門, 昭義門, 속칭 서소문) 서북쪽:창의문(彰義門, 속칭 紫霞門)

 

(계속)

서울(한양) 탐구04-왕과 왕족의 호칭, 내시, 궁녀, 묘호(廟號), 왕릉, 왕비릉


 

(배경 영상,음악)  장녹수 -정미애

    추후 링크가 끊어지면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 나올 수도 있으며,

    아래 음악이나 동영상 보려면 ▷클릭, 멈추려면 stop □ 버튼 클릭.    

    아래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보이면  https://www.youtube.com/embed/SrNEkyCBqV4<=요걸 클릭

 


 

* 본문 중 밑줄 친 링크는 본문 내용을 가져오거나 참고한 곳으로 필요시 밑줄 친 link를 클릭. , 밑줄 친 링크는 현재는 연결되지만 추후 링크 주소 변경되면 연결이 안 될 수도 있음.

 

<참조한 주요 링크>

1. 왕비, 후궁의 호칭 참조링크1: 후궁 및 궁녀의 품계

2. 왕의 묘호((廟號참조링크1: 임금님의 이름과 묘호(廟號)

                     참조링크2: [조선왕 호칭/이름] ((() 묘호 차이

3. 조선왕실(선원계보) (heritage.go.kr) -국가문화유산포탈

 

* 잠깐 퀴즈! - 조선 왕과 왕족의 호칭과 묘호((廟號), 왕릉, 왕비릉에 대한 퀴즈.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 퀴즈-C ]

퀴즈1. 왕의 정실부인을 부르는 말은 무엇이며 또한 기거하던 곳을 부르는 호칭은?

퀴즈2. 왕의 정실부인(왕비)의 소생인 아들을 부르는 명칭?  

        왕의 정실부인인 아닌 후궁의 소생인 아들을 부르는 명칭은?

퀴즈3. 왕의 정실부인(왕비)의 소생인 딸을 부르는 명칭? 

        왕의 정실부인인 아닌 후궁의 소생인 딸을 부르는 명칭은?

퀴즈4. 덕혜옹주는 누구의 딸인가?

퀴즈5. 임금의 시중과 궁궐의 잡다한 일을 맡은 (거세자만이) 임명된 관리 명칭은?

퀴즈6. 임금이나 중전, 후궁을 보필하던 궁녀의 총수(우두머리) 상궁의 명칭은?

퀴즈7. 조선의 왕실이 27대 인데 이 중 장자(長子)가 왕위에 오른 분은 몇 분일까?

 

(알림)

이하 내용은 위에 소개한 참조 링크 및 본문 내용에 링크된 참고 자료에서 가져온 것이며 항목과 내용 일부는 편집, 가감된 것도 있음.

 

A.조선왕실 내용 출처 및 참조링크:  조선왕실(선원계보) (heritage.go.kr) 

조선 왕실은 왕과 왕비를 비롯해 왕세자와 왕세자빈, 왕자, 왕녀, 후궁 등이 구성원을 이룬다. 왕은 단 한명의 부인인 왕비를 두었으며, 왕비가 세상을 떠날 경우에는 그의 자리를 이어서 다음 왕비(계비繼妃)를 둔다.

 

왕비(王妃) 참조링크: 왕비-위키백과

왕비는 제후왕의 부인인 비()로서, 궁중에서 대왕대비와 왕대비 다음으로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또는 왕비를 중궁(中宮) 또는 중전(中殿)이라 부르기도 했다. 정실부인은 사별 후 재혼하지 않는 이상 단 한 명, 그 외엔 후궁으로 규정된다. 조선에서 왕비는 국왕의 비()로서 품계는 국왕과 같은 무품이었고, 내명부와 외명부의 수장이었다

 

왕세자, 왕세자빈, 대군(大君), (), 공주(公主), 옹주(翁主), 후궁(後宮)

왕의 아들 중에서 다음 대의 왕위에 오를 아들을 왕세자(王世子)라 하였고 그의 부인을 왕세자빈(王世子嬪)이라 하였다. 왕세자를 제외한 나머지 왕의 아들 중에서 왕비의 소생일 경우(嫡子적자)에는 대군(大君), 후궁의 소생일 경우에는 군()이라 하였다. 왕의 딸인 왕녀 중 왕비의 소생(嫡女적녀)일 경우에는 공주(公主), 후궁의 소생(庶女서녀)일 경우에는 옹주(翁主)라 하였다. : 덕혜옹주(참조:덕혜옹주)-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딸.

 

후궁은 사실상 왕의 부인이 아니고, 1품의 빈()부터 종4품의 숙원(淑媛)까지 품계를 받는 여관(女官)이었으며, 후궁이 되는 법은 간택 후궁이 되는 경우와 궁인 중에서 왕의 승은(承恩-여자가 임금의 사랑을 받아 밤에 동침함)을 입어 후궁이 되는 경우가 있다.

 

1897년에 대한제국으로 전환되며 왕실의 지위가 황실로 격상되어 왕을 황제, 왕비를 황후, 왕세자를 황태자, 왕세자빈을 황태자비, 왕자를 친왕이라 하였다.

 

후궁 품계

왕후(王后), 황후(皇后)는 품을 따지지 않았으며, 후궁들은 정 1~4품까지의 품이었다.

() -1품 귀인(貴人) -1품 소의(昭儀) -2품 숙의(淑儀) -2

소용(昭容) -3품 숙용(淑容) -3품 소원(昭媛) -4품 숙원(淑媛) -4

 

대원군(大院君) 참조링크: 대원군 -내용 출처 다음 백과

대원군(大院君)은 임금의 대를 이을 적자손이 없어 방계 친족이 대통을 이어받을 때, 그 임금의 친아버지에게 주던 벼슬. 즉 방계에서 왕위를 계승한 때에 그 임금의 생부에게 주는 칭호이다.

 

조선시대 전시기에 걸쳐 4명의 대원군이 있었는데, 선조의 아버지 덕흥군을 대원군으로 추존한 것이 처음이었다. 1623년 인조는 아버지 정원군을 대원군에 추존했다가 1632년 다시 원종으로 추존했다.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철종이 왕위에 옹립되었고 그의 아버지 전계군을 대원군에 추존했다.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흥선군 하응의 둘째아들 명복이 왕위에 올라 고종이 되었고 하응은 흥선대원군에 봉해졌다. 3명은 죽은 뒤에 추존되었으나, 흥선대원군만 살아 있을 때 봉해졌다. 고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조대비가 수렴청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흥선대원군이 섭정하여 국사의 모든 결정권을 가졌다. 흥선 대원군은 개항 전후 격변하는 국내외의 상황 속에서 10여 년간 권세를 누렸다.

 

내시[內侍]= 환관(宦官) 참조링크: 내시 환관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환관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궁중 잡역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고려 말기부터 국왕 측근에서 시종하는 문관인 내시(內侍)에 속하는 이들도 생겨남에 따라 그때부터 환관과 내시가 동일시되었다.

 

내시는 왕의 측근으로서 대궐 내에 상주해야 한다는 특수성 때문에 거세자만이 임명될 수 있었다. 본래는 선천적인 거세자로 충원했으나 스스로 거세하고 내시에 임명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이들도 처첩을 거느렸고 양자(養子)를 택해 가계를 이어가도록 했다. 내시의 제도는 갑오개혁을 계기로 폐지되었다.

 

궁녀(宮女) 참조링크: 궁녀

궁녀(宮女)는 왕족을 제외한 궁중 모든 여인들의 총칭을 말하는 데 궁인(宮人궁첩(宮妾내인(內人)으로도 불렸다. 보통 궁녀라 하면 상궁(尙宮)과 나인으로 분류되는 여인들을 의미한다. 궁녀는 왕이 있는 법궁(法宮, 本宮)뿐만이 아니라 제사궁(祭祀宮, 혹은 魂宮)과 별궁에 소속된 여인까지도 포함된다.

 

넓은 의미의 궁녀로 포괄되는 내역은 다음과 같다.

무수리 : 몽고말이며, 궁중 각 처소에서 막일을 담당하는 여인을 말한다.

각심이[婢子, 또는 房子] : 상궁의 처소에서 부리는 가정부·식모·침모 등의 총칭이다. 이들의 월급을 국가에서 지급했으므로 방자라고도 한다. 방자란 관청의 사환으로, 예컨대 춘향전에서의 방자와 같다.

손님 : 왕의 후궁으로서 당호(堂號)가 바쳐지고 독립 세대를 영위하는 여인의 집(후궁 집)에서 살림을 맡아하던 일종의 가정부 같은 여인이다. 대개 친정붙이이며, 보수는 후궁의 생계비에서 지출된다. 따라서 손님이라는 이름은 궁 밖에서 온 사람이라는 의미로, 무수리나 각심이와는 달리 예의를 갖춘 말이다.

의녀 : 약방 기생이라고도 한다. 약방이란 궁중 내의원(內醫院)의 별칭이며, 의녀의 소속은 내의원이지만 전신(前身)이 기생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평상시엔 궁녀들에게 침을 놓아주고 비·빈들의 해산시 조산원(助産員) 노릇을 하였다. 하지만, 궁중의 크고 작은 잔치가 있을 때에는 기생으로 변신하며 원삼(圓衫)을 입고, 머리에는 화관(花冠)을 쓰고, 손에는 색동 한삼(汗衫)을 끼고 춤을 추는 무희(舞姬)였다.

 

그리고 궁녀의 신분적 등급은 견습나인·나인·상궁의 세 종류로 나뉘며, 그 세 종류 가운데에서도 입궁 연조와 소속 부서에 따라 차등이 있었다. 같은 상궁이라도 경력에 따라 정7품도 있고 정5품도 있으며, 또 같은 정5품의 상궁도 소속 부서의 격에 따라 같을 수 없었다.

 

나인 : 궁중에서 왕족의 사생활을 시중하던 여관(女官)의 총칭으로 내인(內人)’의 전음(轉音)이다. 궁녀들은 반드시 자신들을 상궁나인이라 하여 상궁과 나인을 구분하였다. 나인과 상궁은 그들 사회에서는 차원이 다를 만큼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참조링크:나인)

 

또한, 나인 아래에는 견습나인이 있는데, 이들은 아기나인 또는 생각시로 불린다. 보통 4세부터 계례(筓禮) 전인 17세 사이의 어린이 및 소녀 나인들이다.

 

지밀·침방·수방·내소주방·외소주방·생과방·세답방·세수간·퇴선간·복이처·등촉방

지밀(至密침방(針房수방(繡房내소주방(內燒廚房외소주방·생과방(生果房세답방(洗踏房)의 일곱 부서 외에 세수간·퇴선간(退膳間복이처(僕伊處등촉방(燈燭房)의 네 부설 부소가 있다.

 

위 부서에 소속된 궁녀들을 일반 개인 가정으로 비교해보면, 지밀나인은 몸종 격으로 가장 격이 높고, 침방·수방 나인들은 침모(針母), 소주방과 생과방은 찬간(饌間)의 식모들인데, 궁중에는 무수리가 하역(下役)을 맡았다. 세답방은 표모(漂母)로서 빨래 일을 맡는데, 일반 개인 가정에서는 빨래를 보통 노비가 하고, 다리미와 다듬이질은 대개 경험이 많은 부인들이 맡는다.

 

지밀상궁[至密尙宮] 참조: 지밀상궁[至密尙宮]

조선 시대, 대전 좌우에서 임금을 모시며 잠시도 떠나지 않고 시중을 드는 상궁이다.

지밀상궁은 왕의 측근에서 항상 그림자와 같이 시위(侍衛)하여 대령상궁(待令尙宮)이라고도 했다.

 

또한, 지밀상궁 중에서 궁중 의식이나 잔치 때 왕을 비롯한 왕비·왕대비 등의 인도와 진행을 담당했던 시녀상궁(侍女尙宮)은 지밀의 서책 관리와 국상(國喪) 때 곡읍(哭泣)을 담당하기도 했다.

 

따라서 궁녀의 격은 지밀이 높고, 다음이 침방과 수방으로, 이들은 양반 부녀와 같이 치마도 외로 여며 입고 앞치마를 두르지 않고 길게 늘일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 그것은 마루 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의 성격상 소주방이나 세답방 나인같이 치마를 걷어 올릴 필요가 없기도 한 때문이다.

 

위 세 부서 외의 다른 부서는 치마를 바로 입고 앞치마를 위에 둘러 걷어 올린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각시가 있는 곳도 지밀과 침방·수방뿐이다. 나머지 부서들은 생[絲楊]을 맬 수 없으며,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다.

 

제조상궁(提調尙宮)

이러한 궁녀 사회에도 간부들이 있었는데, 총수격인 우두머리 상궁과 그 밖의 맡은 바 직책의 중요성에 따라 특별대우를 받는 궁녀들이 있었다. , 제조상궁(提調尙宮)은 큰방상궁이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많은 궁녀들 중에 어른으로 왕명을 받들고 내전(內殿)의 재산 관리를 담당했다. 또한, 아리꼬[阿里庫]상궁으로 불리는 부제조상궁은 내전의 창고(倉庫, 아랫고·下庫)의 물품을 관리했다.

 

감찰상궁(監察尙宮)

감찰상궁(監察尙宮)은 궁녀들의 상벌을 담당했으며, 감시병 구실도 겸한 두려운 존재였다. 궁궐내의 모든 궁녀들은 입궁에서 퇴출(退出)까지 원칙적으로 종신제였다.

 

그 외 왕자녀의 양육을 담당했던 보모상궁(保姆尙宮)이 있었으며, 이들 중에서 왕세자의 보모가 가장 격이 높았다.

 

궁녀의 선출

왕의 직계 및 그 배우자 외에는 후궁도 궁중에서 죽을 수 없으므로, 늙고 병들면 궁녀는 궁궐을 나가야 했다. 궁녀의 선출은 원칙적으로 10년에 한번이었지만 예외도 있었다. 지밀나인의 경우 조건이 까다로워서 상궁들이 두세 번씩 선을 보러 나갔다. 그러나 대개 연줄과 세습이라 할 수 있으며, 고모가 조카를 들여놓는 경우가 많았다.

 

궁녀의 출신 계급은 지밀과 침방·수방은 중인계급, 기타는 대개 상민계급이었다. 입궁 연령은 지밀이 가장 어려 48, 침방·수방이 613, 그 밖은 1213세가 관례였다. 궁녀는 입궁 후 15년이 되면 계례를 치르고 정식 나인이 되었다. 남색 치마에 옥색 저고리, 머리에는 개구리첩지를 단 제복이 일생 동안 그들의 복장이었다.

 

나인이 된 뒤 다시 15년이 경과되면 상궁으로 승격했으므로, 가장 빠른 45세 입궁을 기준으로 할 경우에 35세 이후라야 상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는데, 왕의 후궁이 되면 20대의 상궁도 있을 수 있었다. 이런 궁녀는 왕의 자녀를 낳기 전까지는 상궁의 신분에 머물러 있지만, 그 대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왕의 곁에서 시위만 하면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를 승은상궁(承恩尙宮)이라 했다.

 

궁녀는 원칙적으로 종신제였지만, 특별한 경우, 즉 이들이 중병이 들었을 때, 가뭄으로 궁녀 방출이 결행될 경우(, 젊은 궁녀), 모시고 있던 상전이 승하했을 경우 중도에 나갈 수도 있었다.

 

B. 왕의 명칭과 묘호(廟號)

조선 시대, 왕의 이름

이하 내용은 참조 링크: 조선 시대, 왕의 이름에서 가져 왔다.

조선 시대, 왕의 이름은 외자였다. 절대 존엄의 존재였던 왕의 이름은 함부로 말할 수도 쓸 수도 없기에 백성들의 말 사용을 배려해 잘 사용하지 않는 한자를 활용해 외자로 이름을 지었다.

 

이름과 관련한 일반 용어들

아명(兒名) : 어릴 때 정식 이름을 짓기 전에 부모가 자식을 부르는 친근한 이름.:막동

초명(初名) : 처음 이름

() : 태어날 때 받은 진짜 이름

() : 성년이 되는 관례 때 받는 이름인 관명과 함께 스스럼없이 부를 수 있도록 짓는 새로운 이름

() : 본명이나 자 이외에 따로 지어 부르는 이름 (별칭, 필명, 별호, 아호)

묘호(廟號) : 왕이 죽은 뒤 종묘에 그 신위를 모실 때 드리는 존호(尊號) 참조: 묘호

 

((() 묘호 참조링크: ((() 묘호

예기, 사기, 경국대전, 조선왕조실록 등에 공이 있는 사람은 '()'라고 하고, 덕이 있는 사람은 '()'을 붙인다고 하는 내용이 있다.

 

a. ()

1. 원칙적으로 나라를 창업한 왕에게만 사용한다. 태조는 1대 임금이므로 후대의 자손이 시조(始祖)로 삼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고려에 조()가 붙은 왕은 태조 왕건뿐이다.

 

2. 공이 있는 왕에게 조()를 붙인다.(나라를 세우거나 그에 버금가는 공을 세운 왕)

선왕의 적자가 아닌 사람이 임금이 되는 경우에 명분과 정통성을 부과하기 위해 붙인 경우가 많았다.

 

b. ()

왕위를 정통으로 계승한 왕들에게 붙이거나, 덕이 있는 왕에게 종()을 붙인다. 혹은

별다른 위기 없이 태평성대를 누린 경우에 붙인다.

 

c. ()

폐위된 왕은 자격을 박탈당하여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왕자시절의 호칭으로 불리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이 아니라, 연산군일기, 광해군일기에 따로 기록된다.

- 연산군: 중종반정으로 폐위

- 광해군: 인조반정으로 폐위

 

조선의 왕에 조()가 붙은 이유

나라를 창업한 왕이나 나라의 정통이 중단되었다가 다시 일으킨 왕에게 '()'를 쓴다. 그래서 조()가 종()에 비해서 격이 높다고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반정이나 찬탈을 통해 왕위에 오른 경우, 이를 정당화하려는 수단의 하나로 이용되면서 후손(아들)'()'에서 '()'로 추숭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외에도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쓰이기도 했다. 참고로, 중종의 경우에도 연산군을 몰아낸 공으로 묘호를 '중조'로 하자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

 

왕의 호칭(묘호)

묘호는 죽은 왕의 위패를 모시는 종묘에 올리는 이름이다. 따라서 왕이 생존해 있을 때는 묘호가 없었고,'주상', '전하', '상감' 등으로 불렸다. 왕의 3년 상을 치른 후, 왕과 고위 관료들이 묘호를 정한다. 왕의 업적을 한글자로 표현하여 신주를 종묘에 모셨다.

 

연산군과 광해군처럼 폐위되어 신주가 종묘에 들어가지 못한 왕들은 죽어서도 왕 대접을 받지 못하고 왕자 신분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종묘에 그 신위가 오르지 못했으며 따라서 묘호 또한 없으므로 단지 그들이 쫓겨난 이후나(연산군) 세자 시절에(광해군) 받은 군호로 불리고 있다. 조선조 2대 임금 정종과 6대 임금 단종은 오랫동안 묘호를 정하지 않고, 몇 백 년 동안 공정왕과 노산군으로 불리다가, 숙종 때 와서 그들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면서 비로소 정종과 단종이라는 묘호를 얻었다.

 

묘호의 예:

· 문종(文宗): 학문에 뛰어난 왕 · 성종(成宗): 제도 정비를 완성시킨 왕

· 세종(世宗): 태평성대를 이룩한 왕 · 인조(仁祖): 어진 왕

· 중종(中宗):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왕 · 태조(太祖): 나라를 세운 왕

· 태종(太宗): 나라의 기틀을 다진 왕 · 효종(孝宗): 효성이 지극한 왕

 

왕의 호칭에는 묘호 외에도 사후에 중국 황제가 지어 보내주는 시호(諡號)라는 것이 있고, 또 신하들이 그 왕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해 지어 올리는 휘호(徽號) 혹은 존호(尊號)라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태조(이성계)의 정식 호칭은 '태조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었는데, '태조'는 묘호, '강헌'은 시호, '지인계운성 문신무'는 휘호(존호)에 해당한다.

 

능호(陵號)

()’ 은임금의 무덤을 지칭하는 호칭하는 데 능은 구릉이란 의미로 구릉처럼 크고 웅장하다는 의미다. : 동구릉,

 

조선왕릉 참조링크1: 조선왕릉 - 나무위키 참조링크2: 조선왕릉 공식 홈페이지

42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태조의 추존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그 왕비들의 능까지 포함하면 총 50. 그러나 일반적으론 42기의 능만을 조선왕릉으로 표현하고 있다.

 

조선왕릉들은 주변의 지명에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잦다. 특히 아예 지명화되어버린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성북구 정릉동), 문정왕후 윤씨의 태릉(태릉선수촌), 세조의 광릉(광릉수목원) 등이 그러하다. 그 외에도 조선왕릉에서 역명을 따온 철도역인 선릉역, 선정릉역, 태릉입구역, 정릉역, 온릉역, 사릉역, 세종대왕릉역 등이나 서오릉 앞을 흐르는 창릉천과 그 일대의 행정동명인 창릉동, 그리고 해당 지역에 조성될 예정인 창릉신도시, 태종의 능침 앞을 지나는 도로인 헌릉로 및 선정릉 앞을 지나가는 도로인 선릉로와 정릉 앞을 지나가는 정릉로, 용인서울고속도로 헌릉IC 등의 지명이 그 예이다.

 

조선 왕 중 장자(長子)가 왕위를 이어 받은 왕은 몇 명이나 될까?

 조선 왕가 가계도 및 내용 참조 링크 : 조선왕실(선원계보) (heritage.go.kr) -

조선의 국왕 중 부왕의 적장자로 왕위에 오른 인물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경종, 순종으로 여덟 왕 뿐이다. 이들 중 숙종은 출생에서부터 왕세자 책봉을 거쳐 즉위에 이르기까지 가장 확고하고 뚜렷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던 왕이었다.

  '조선 왕가 가계도-'

 

  '조선 왕가 가계도2- 18대 현종-26대 고종'
.고종이후-대한황실 가계도

퀴즈1. 왕의 정실부인을 부르는 말은 무엇이며 또한 기거하던 곳을 부르는 호칭은?

퀴즈2. 왕의 정실부인(왕비)의 소생인 아들을 부르는 명칭?  

         왕의 정실부인인 아닌 후궁의 소생인 아들을 부르는 명칭은?

퀴즈3. 왕의 정실부인(왕비)의 소생인 딸을 부르는 명칭? 

         왕의 정실부인인 아닌 후궁의 소생인 딸을 부르는 명칭은?

퀴즈4. 덕혜옹주는 누구의 딸인가?

퀴즈5. 임금의 시중과 궁궐의 잡다한 일을 맡은 (거세자만이) 임명된 관리 명칭은?

퀴즈6. 임금이나 중전, 후궁을 보필하던 궁녀의 총수(우두머리) 상궁의 명칭은?

퀴즈7. 조선의 왕실이 27대 인데 이 중 장자(長子)가 왕위에 오른 분은 몇 분일까?

 

[ 퀴즈-C 정답]

퀴즈1. 왕의 정실부인을 부르는 말은 무엇이며 또한 기거하던 곳을 부르는 호칭은?

         답.=> 왕비(王妃)=중궁(中宮), 중전(中殿). 왕비가 거처하던 궁전=중궁전(中宮殿)

퀴즈2. 왕의 정실부인(왕비)의 소생인 아들을 부르는 명칭? .=> 대군(大君)

         왕의 정실부인인 아닌 후궁의 소생인 아들을 부르는 명칭은? .=> ()

퀴즈3. 왕의 정실부인(왕비)의 소생인 딸을 부르는 명칭? .=> 공주(公主)

         왕의 정실부인인 아닌 후궁의 소생인 딸을 부르는 명칭은? .=> 옹주(翁主)

퀴즈4. 덕혜옹주는 누구의 딸인가? .=> 고종

퀴즈5. 임금의 시중과 궁궐의 잡다한 일을 맡은 거세자만이 임명된 관리 명칭은?

         답.=> 내시[內侍]= 환관(宦官) 참조링크: 내시  환관

퀴즈6. 임금이나 중전, 후궁을 보필하던 궁녀의 총수(우두머리) 상궁의 명칭은?

         답.=> 제조상궁(提調尙宮). 큰방상궁이라고도 했음.

퀴즈7. 조선 왕실이 27대 인데 이 중 장자(長子)가 왕위에 오른 분은 몇 분일까? .=> 8

(계속)

서울(한양)탐구03-궁궐2-궁궐의 구조 외 운현궁, 칠궁, 종묘, 사직단, 동묘

 

(배경음악) 종묘제례악 5분 하이라이트공연-예술의 전당 2017

              추후 링크가 끊어지면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 나올 수도 있으며,

              아래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보이면 https://youtu.be/D-1-4eLjzhE <=요걸 클릭

 

* 본문 중 밑줄 친 링크는 본문 내용을 가져오거나 참고한 곳으로 필요시 밑줄 친 link를 클릭. , 밑줄 친 링크는 현재는 연결되지만 추후 링크 주소 변경되면 연결이 안 될 수도 있음.

 

<참조한 주요 자료 및 링크>

1.  궁궐 및 종묘(문화재청-heritage.go.kr)우리 궁궐 이야기

2.  서울 5대궁과 종묘에서 만나는 궁궐이야기 [ 5회 궁중문화축전 ]-10분 가량의 동영상(youtube)동영상임.

 

*조선 궁궐 잠깐 퀴즈! - 이것만 알아도 조선시대 궁 관련 내용은 좀 안다고 할 수 있다.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 퀴즈-B ]

퀴즈1. 궁궐 내에서 대신(大臣)들이 업무를 보던 관청들이 모여 있는 곳을 무어라 하나?

         (오늘날 정부 종합청사에 해당하는 곳을 말함)

퀴즈2. 왕이 조의(朝議-아침 조회)를 할 때 왕이 계신 정전(政殿) 내부[=당상(堂上)]에서

        국사(國事에 대해 임금과 논의를 하거나 왕이 하시는 말씀(下交)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관리를(또는 그런 직책) 무어라 하는가? ( OO官 )

퀴즈3. 왕이 정사를 보는 정전(政殿) 앞마당에 각 품계에 따라 관리들이 도열하는 위치에

         (주로) 돌로 만들어 세워둔 것을 무어라 부르는가?

퀴즈4. 흥선대원군의 사저(私邸)로 대원군이 섭정을 하며 나랏일을 보던 곳이다. 고종이

         태어난 곳이며 고종이 명성황후와 가례를 치른 곳이기도 하다. 이곳의 명칭은?

퀴즈5. 종묘사직(宗廟社稷)이란 말의 뜻은? 이와 관련된 서울에 있는 장소 명칭은?

퀴즈6. 관우(關羽)를 모신 사당의 이름은?

 

[ 궁궐 관련 몇 가지 용어, 단어 설명 ]

<참조 링크> 1. 국가문화유산포탈 | 궁궐의 건축 (heritage.go.kr)

                  2.국가문화유산포탈 | 궁궐의 짜임새 (heritage.go.kr)

 

정전(正殿): 왕이 조회(朝會)를 하던 궁전. 경복궁의 근정전, 창덕궁의 인정전 등이 있다.

편전(便殿): 임금이 평상시에 거처하는 궁전.

 

중궁(中宮): 1. 왕의 정실부인(왕비) 2. 궁궐의 중앙에 있는 궁궐로 왕비가 거처하는 곳.

중궁전(中宮殿): 왕비가 거처하던 궁전.

 

세자궁(世子宮) : 왕세자가 거처하던 궁전.

빈궁(嬪宮) : 1.왕세자의 아내. 2. 임금의 후궁 가운데 지위가 가장 높은 사람.

                 3. 조선 시대에, ()이나 세자빈이 거처하던 곳.

 

(알림)

본 게시물은 위에 소개한 참고 자료(밑줄 링크)의 내용과 아래 참조 자료에서 항목과 내용을 가져왔으며 내용 일부는 편집, 가감된 것도 있다. 상세한 내용은 관련 링크나 참조 링크를 보기 바람.

 

궁궐의 짜임새(구조) 내용참조 링크: 국가문화유산포탈 | 궁궐의 짜임새 (heritage.go.kr)

중국 고대부터 전해오는 궁궐 구성의 원칙적인 구성이 "오문삼조(五門)"였다. 궁궐은 궁성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내부가 몇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있다. 각 구역에는 들어가는 문이 있는데, 남에서 북으로 가면서 다섯 개의 문들이 배열되어 있다. 이 다섯 문 안에 외조, 치조, 연조라는 세 조정이 있어 "오문삼조"라는 궁의 공간구조가 형성된다.

 

조선은 삼문삼조(三門三朝)의 원칙이었는데 삼문이라 함은 고문(皐門), 치문(治門), 노문(路門)이고 삼조라 함은 외조(外朝), 치조(治朝), 연조(燕朝)이다. 참조 링크: 경복궁과 자금성의 비교 - 나무위키 (namu.wiki)

 

1. 외전(外殿)

외전은 왕이 공식적으로 신하들을 만나는 공간이다. 외전 중 핵심이 되는 공간이 바로 정전이다. 정전은 궁궐에서 외형상 가장 화려하고 권위가 있는 공간으로 조정의 조회와 사신의 응대, 각종 잔치를 벌이는 국가의 공식적인 의식을 거행하는 공간이다.

 

정전(正殿)-궁궐의 큰 행사가 열렸던 곳으로 가장 화려하고 권위가 있어 왕의 위엄을 드러내는 곳이다. 새로운 임금의 즉위식이라던가, 외국의 중요한 사신이 와서 임금님께 인사를 하던 곳이다. 정전에서는 한 달에 네 번 정도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조회를 했다. 건물 이름에 O政殿으로 된 것이 많다. : 경복궁의 勤政殿(근정전), 창덕궁의 仁政殿(인정전), 창경궁의 明政殿(명정전)

창덕궁 '인정전'과 그 아래 품석(품계석)

정전(正殿) 건물 주변은 회랑(回廊)이 둘러싸여 있어 비를 맞지 않고 다닐 수 있었다. 이 회랑 안 네모난 공간(일종의 뜰 마당)을 조정(朝廷)이라 하고, 여기엔 품석(품계석)이 있어 각 관리들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품계 내용의 출처: 다음백과

관계·위계라고도 한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3국이 각각 관의 등급을 나누고 고유의 관등명을 썼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는 신라의 관등을 그대로 적용했다. 고려 초기에는 신라와 태봉의 관계를 계승했으나 중앙집권체제가 정비되면서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여 문산계와 무산계를 정1품에서 종9품까지, 18품계로 정했다. 이 품계는 명칭만 변경되어 조선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당상관(堂上官)

조선시대 조의(朝議)를 행할 때 당상(堂上)에 있는 교의(交椅)에 앉을 수 있는 관계(官階) 또는 그 관원으로, 동반은 정3품의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상, 서반은 절충장군(折衝將軍) 이상, 종친은 명선대부(明善大夫) 이상, 의빈(儀賓)은 봉순대부(奉順大夫) 이상의 품계를 가진 사람이다.

 

이러한 당상관은 의관(醫官)·역관(譯官) 등 기술관, 또는 환관(宦官) 등에게도 간혹 제수하였으나 이는 특례이고 대부분 양반이 독점하였다.

 

고려시대는 국정의결에 2품 이상의 재추(宰樞)만이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그 폭을 정3품 당상관까지 확대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당상관은 국정을 입안, 집행하는 최고급 관료 집단이라 할 수 있다.

 

편전(便殿)-왕이 일하던 곳으로 왕이 공부도 하고 신하들과 회의도 나누던 곳이 편전이다. 편전에서 있었던 회의는 그 내용이 모두 글로 기록되어 있다.

 

2. 내전(內殿)

궁의 중앙에 위치한 내전은 왕과 왕비의 공식 활동과 일상적인 생활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위치만 궁의 중앙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궁의 핵심을 이루는 기능도 하였다. 내전은 크게 보아 대전과 중궁전으로 구성된다. 대전은 왕이 기거하는 공간이며, 중궁전은 왕비가 기거하고 활동하는 공간이다.

 

침전-임금님이 잠을 자던 공간

중궁전-가장 안쪽에 위치한 공간으로 왕비가 머물던 곳으로, 중전 또는 중궁이라고 부른다.

          예: 경복궁의 교태전, 창덕궁의 대조전

대비전-왕의 어머님이나 웃어른들이 사는 공간. : 경복궁의 자경전

 

3. 동궁(東宮)

동궁은 왕위의 계승자인 세자의 활동공간이다. 다음 왕위를 이을 세자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에 내전의 동편에 그 처소를 마련했는데 그 이유는 세자를 떠오르는 해와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경복궁의 자선당

 

4. 후원(後苑)

궁궐의 북쪽 산자락에 위치한 후원은 왕을 비롯한 궁궐 사람들의 휴식공간이다. 후원은 산골짜기, 연못, 아담한 정자 등이 주로 배치되어 있는데 후원에서는 과거 시험을 치르고 군사훈련을 했으며, 종친 모임과 같은 대규모 모임을 열기도 하였다: 경복궁의 향원정, 창덕궁 후원(=祕苑)

 

5. 궐내각사(闕內各司)

궐내각사는 궁궐 안에서 활동하는 여러 관리들이 업무를 보던 공간으로, 관서들을 이르는 말이다. 궐내각사에는 정치,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기구, 경비와 호위 등 군사 관계 업무를 담당하는 기구, 왕실 시중과 궁궐의 시설 관리를 맡는 관리기구 등이 있다. 주요 기구로는 정승, 판서 등 고위 관리들의 회의 공간인 빈청, 이조와 병조의 관원들이 들어와 인사 업무를 처리하는 정청, 사헌부와 사간원의 언관들이 언론 활동을 논의하고 준비하는 대청,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승지들의 관서인 승정원, 학문을 도야하여 왕의 주문에 대응하고 왕과 함께 경전과 역사책을 토론하는 홍문관, 외교문서를 짓는 예문관, 실록 편찬 등 역사기록을 담당하는 춘추관 등이 있다.

 

궐내각사- 현재 창덕궁의 궐내각사는 인정전의 서쪽에 궐내각사만 복원되어 있는 형편이나, 원래는 선정전의 앞뜰에도 승정원, 사간원, 선전관청, 사옹원, 대전장방 등 빽빽한 건물군으로 궐내각사가 유지되었다. 비록 복원된 것이라고는 하나 창덕궁의 궐내각사는 한국 5대궁 중에서 특히나 궁이 과거 중앙국가행정의 중심이자 치소(治所)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곳으로써 가치가 높고, 왕족과 귀족의 거처에 불과한 서양의 궁/궁전들과의 차이점을 보여주는 곳이다. 내용출처창덕궁/건축물 - 나무위키 (namu.wiki) 

 

참고 궐외각사(闕外各司) 대궐 밖 광화문 앞 세종로에 있던 육조나, 궁 밖에 있는 내수사, 비변사 등은 궐외각사라 하였다.

 

그 외 공간으로는 정규관리의 활동 공간, 군사기구, 왕실시중과 궁궐관리기구 등이 있다. 외전과 내전 동궁 주변에 왕, 왕비, 세자등 주요 인물들의 시중을 드는 내시, 궁녀, 노복, 군병들의 기거 공간이 배치되어 있다.

 

6. 삼도(三道), 폐도(陛道), 踏道(답도).

궁궐의 모든 길은 삼도(三道)로 이루어져 있는데, 삼도의 길 중에 가운데가 약간 높이 솟아있는데, 이곳을 폐도(陛道)라 하고 임금만이 다닐 수 있는 길이다. 폐도를 다니는 사람을 일러 폐하(陛下)라 한다. 폐도(陛道)는 중국의 황제에게만 부칠 수 있다 하여 조선의 임금은 폐도 대신 어도(御道)라고 부르기도 했다. 폐도를 중심으로 동쪽의 길은 문신(文臣), 서쪽의 길은 무신(武臣)이 다니는 길이다.

정전(正殿) 입구의 계단 장식인 踏道(답도)-사진은 창덕궁의 답도

정전(正殿) 입구의 계단 장식인 踏道(답도)를 보면 근정전 계단의 답도는 간략하게 형식만 갖춘 반면 자금성의 답도들은 서양의 대리석 조각에 준하는 정도로 음각과 양각이 깊고 크기도 훨씬 거대함을 알 수 있다. 정전의 정문 앞을 흐르는 금천의 크기도 다르고 궁궐의 벽을 지키는 망루인 십자각의 크기도 자금성 쪽이 더 거대하고 더 사치스럽다. 단순히 궁궐 면적만 비슷한 수준으로 확보했다고 해서 두 궁궐의 크기가 비슷하다고 하는 건 적절치 못하다. 참조 링크: 경복궁과 자금성의 비교 - 나무위키 (namu.wiki)

 

7. 동쪽은 봄, 태양을 서쪽은 가을, 달을 상징.

(경복궁에서) 근정전 앞 관리들 출입하는 동쪽 문은 日華門(일화문)으로 태양을 뜻하는 일()자가 들어가며 文臣(문신)이 드나들었고, 서쪽은 月華門(월화문)으로 달을 뜻하는 월()자가 들어가며 武臣(무신)이 출입하였다.

 

경복궁의 건물과 대문들 중 동쪽은 봄춘()자가 들어있고 서쪽에 있는 부속건물과 대문에는 가을추()자가 들어있다. 사정전 동쪽에 만춘전(萬春殿), 서쪽에 천추전(千秋殿)이 있고 경복궁의 동쪽 문은 건춘문(建春門)이며 서쪽 문을 영추문(迎秋門)이다.

 

8. 궁궐은 아니지만 궁이라는 이름으로 쓰인 건물

왕이 되기 전 머물었던 곳을 잠저(潛邸) 또는 別宮(별궁)이라 하고(:효종의 잠저인 용흥궁), 왕이 궁궐을 떠나 잠시 경유하는 궁을 行宮(행궁)이라한다. :왕이 온천욕을 위해 온양에 잠시 머물렀던 온양행궁 등이 이에 속한다.

 

혹은 "왕의 아버지" 정도의 격이 되는 사람들의 집을 가리켜 ""이라고 붙이기도 한다(:흥선 대원군의 집 운현궁)

 

  운현궁(雲峴宮)    참조 링크 1. 운현궁雲峴宮 -다음백과

                         참조 링크 2. 대원군 정치의 중심 운현궁

대원군의 사가(私家)였던 운현궁(雲峴宮)

운현궁(雲峴宮)은 한성부 중부 정선방에 있던 흥선대원군의 집이자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명복(고종)이 태어나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살던 곳이다. 이곳은 원래 지명인 구름재에서 이름을 따와 운현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운현궁은 고종이 명성황후와 가례를 치른 곳이고,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며 나랏일을 보던 곳이기도 하다. 한양 내의 궁 중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고, 소규모의 궁궐과 같이 사대문을 갖춘 곳으로 궁의 형태를 살펴볼 수 있다.

(참조 링크 운현궁에서 내용 가져옴)

 

이하 내용은 참조 링크: 대원군 정치의 중심 운현궁에서 가져 왔다.

운현궁 뒤편에는 석재를 혼용해 벽돌로 지은 르네상스식 건축물이 이국적인 풍모를 드러내고 있다. 대원군의 손자 영선군 이준용이 거처했던 양관(洋館)이다. 이 건물은 1907년 유럽여행을 마치고 온 이준용을 회유하기 위해 일제가 세운 것으로, 운현궁 후원에 있었던 흥선대원군의 할아버지 은신군과 부친인 남연군의 사당을 철거한 자리에 지었다. 1917년 이준용이 죽은 뒤 순종의 아우인 의친왕의 둘째 아들 이우가 이어받았고 한국전쟁 이후 집이 상당 부분 팔리면서 운현궁 양관도 덕성여자대학교 소유가 됐다. 이곳은 드라마 도깨비에 등장한 바 있다.

 

이하 내용은 참조 링크: 운현궁雲峴宮 다음백과 에서 가져 왔다.

고종의 등극으로 대원군이 된 이하응은 사가(私家)를 증축하여 운현궁이라고 불렀다. 이곳에서 대원군은 서원철폐, 경복궁 중건 등 개혁사업을 추진했으며, 1882년 임오군란 당시에는 이 궁에서 납치되어 중국 심양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당시 운현궁에는 창덕궁과 가깝게 왕래할 수 있는 임금 전용의 경근문과 대원군 전용의 공근문이 있었고, 담장 안에는 아재당, 안채인 이노당·노락당이 있었으며, 선조인 은신군과 남연군의 사당과 영화루도 있었다.

 

덕성여자대학교 교사로 쓰이는 양옥집은 1910년 이후 대원군의 손자 준용의 거처였으며, 일본인이 지은 건물이다

운현궁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건물이며 정원 등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내정에는 아직도 고종이 소년시절에 오르던 노송이 있어, 2품 금관자를 달아주고 대부송이라 일컫는다.

 

칠궁(七宮)    참조 링크: 칠궁

이곳은 원래 1725(영조 1) 영조가 생모이자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淑嬪崔氏)의 신위를 모시고 숙빈묘(淑嬪廟)라 하다가 뒤에 육상묘(毓祥廟)로 바꾸었으며, 1753년 육상궁(毓祥宮)으로 개칭된 곳이다. 그 뒤 1882(고종 19) 불타 없어진 것을 이듬해 다시 세웠다.

칠궁 중 하나인 연호궁

1908년 저경궁(儲慶宮대빈궁(大嬪宮연호궁(延祜宮선희궁(宣禧宮경우궁(景祐宮) 5개의 묘당을 이곳으로 옮겨 육궁이라 하다가 1929년 덕안궁(德安宮)도 옮겨와서 칠궁이라 하였다.

 

칠궁은 동서로 줄지어 있고 이에 따른 행랑, 2채의 재실 등이 배치되어 있다. 동쪽으로부터 배열된 칠궁의 순서와 모셔진 신위의 내용을 보면, 육상궁: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 연호궁: 추존된 왕 진종(眞宗)의 생모 정빈 이씨(靖嬪李氏), 덕안궁: 영친왕의 생모 순헌귀비 엄씨(純獻貴妃嚴氏), 경우궁: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綏嬪朴氏), 선희궁: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暎嬪李氏), 대빈궁: 경종의 생모 희빈 장씨(禧嬪張氏), 저경궁: 추존된 왕 원종(元宗)의 생모 인빈 김씨(仁嬪金氏) 등이다.

 

종묘(宗廟)사직(社稷)

종묘사직(宗廟社稷)이라하면 왕실과 나라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종묘(宗廟)는 유교적 예법에 따라 역대왕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왕실의 사당이며 사직(社稷)은 토지의 신인 사()와 곡식의 신인 직()에게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宗廟(종묘)    내용 및 참조 링크: 국가문화유산포탈 | 종묘 소개 (heritage.go.kr)

종묘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사당으로서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정전과 영녕전, 제례 준비에 필요한 몇몇 부속 전각으로 이루어졌다. 전각은 최소한의 색만 사용하고 화려한 단청을 하지 않았으며 장식과 기교를 최대한 절제하였다. 현재 정전에는 19실에 49, 영녕전에는 16실에 34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정전 뜰 앞에 있는 공신당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종묘제례 및 제례악    내용 및 참조 링크: 국가문화유산포탈 | 종묘 소개 (heritage.go.kr)

종묘제례 및 제례악은 2001'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 2008년부터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으로 관리되고 있다. 세계유산인 종묘에서 개최되는 행사로 유형과 무형의 세계유산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문화유산이다. 종묘제례는 왕조의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로 조선왕조의 제사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종묘대제(宗廟大祭)라고 한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와 조선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구한 역사를 이어 내려온 소중한 조상전래의 제례의식이다. 조선조에는 춘하추동 사계절과 섣달에 행하였으며 1969년 대동종약원에 의해 복원되어 지금은 매년 5월 첫째 주 일요일에 봉행되고 있다.

 

종묘대제에는 종묘제례가 봉행되며 각 제사의례에 맞추어 경건한 분위기를 고양시키기 위한 음악과 무용으로서 종묘제례악이 따른다. 제례는 신을 맞이하는 영신례(迎神禮), 초헌, 아헌, 종헌례에 이어 음복례가 행해지고, 신을 보내 드리는 송신례(送神禮)를 갖춘 후에 축()과 폐()를 망료(望燎) 위에 불사르는 것으로 끝난다.

 

종묘제례악은 우리 고유의 음률로 왕조의 창업과 기상을 노래하고 있으며 모든 행사의 순서에 맞추어 춤과 음악이 조화를 이룬다. 엄숙한 제사 의례만큼이나 장엄미가 돋보이는 종합예술로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크며 동양에서도 드물게 남아 있는 고전음악이다.

참조링크 : 종묘제례악

 

사직단    내용 출처(민족문화대백과) 및 참조 링크: 사직단

사직단의 위치는 주례(周禮)에 잘 규정되어 있는데, ‘오른쪽에 사직, 왼쪽에 종묘라 하였다. 이 규정은 법궁을 중심으로 사직은 오른쪽에, 종묘는 왼쪽에 둔다는 뜻이며, 중국이나 우리나라 모두 준수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종묘는 수도 한 곳에만 설치하는 데 반해 사직은 수도뿐만 아니라 지방 행정단위인 주현(州縣)마다 설치하였다. 주현의 사직도 관아의 서쪽, 곧 오른쪽에 세웠다.

 

사직단은 사단(社壇)과 직단(稷檀)을 따로 설치하였으며 사단은 동쪽에, 직단은 서쪽에 위치하였다. 각 단에는 다섯 가지 색깔의 흙을 덮었는데 동은 청색, 서는 백색, 남은 적색, 북은 흑색, 중앙은 황색 흙으로 하였다. 또한 각 단에는 신위를 모셨는데 사단에는 국사신(國社神)을 북향하여 모시고 후토신(后土神)을 동향하여 배향하였으며, 직단에는 국직신(國稷神)을 북향하여 모시고 후직신(后稷神)을 동향하여 배향하였다. 각 단에는 사방으로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단 둘레에는 유()라고 하는 울타리를 치고 그 유에도 사방으로 문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형식은 후대에도 크게 변화가 없었다.

 

보통 도성의 서쪽에 사직단을 설치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한성부 의인달방(儀仁達坊)에 있는데 지금의 사직공원 자리이다.

 

동묘(東廟)=동관왕묘(東關王廟)    내용 및 참조 위키백과 링크: 동관왕묘

중국 촉나라의 장수 관우(關羽)를 모신 관왕묘로,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다. 1963121일에 대한민국의 보물 제142호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 땅에서 싸운 명나라 장수들은 관우의 신령을 보는 체험을 하고 곳곳에 관왕묘를 세웠다. 이 보고를 받은 명나라는 전쟁이 끝난 뒤 조선에 관왕묘를 지으라는 요청을 하였고, 이에 동대문 밖에 1599년 공사를 시작하여 1601(선조 34) 동관왕묘를 완공하였다. 명나라 신종이 친필 현판과 함께 건축자금을 지원하였다.

.동관왕묘 – 사진출처: https://blog.naver.com/hermione555/222465522635

동관왕묘의 중심건물은 두 개의 건물이 앞뒤로 붙어 있는데, 이것은 중국의 절이나 사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다. 지붕은 높은 '()' 자 모양과 '()'자 모양이 합쳐진 '()'자 모양이다. 실내 공간도 앞뒤로 나뉘어 있는데, 앞은 제례를 위한 전실이고 뒤는 관우와 부하장군들의 조각상을 둔 본실이다.

 

관왕묘는 서울의 동서남북에 모두 지어졌는데 그 중 동관왕묘가 제일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넓은 벽돌 벽과 독특한 지붕모양, 조각상, 실내의 구성과 장식 등에서 중국풍 건축의 모습을 보여주는 17세기 제사시설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곳이다.

 

남관왕묘는 조정에서 관리하며 왕실에서도 제사를 지냈으나 1908(융희 2) 제사를 폐지하고 동관왕묘는 지방 관청으로 이괄했다. 남대문 밖에는 동묘보다 먼저 생긴 남관왕묘가 있었으며, 고종 때에는 북관왕묘와 서관왕묘를 지었다. 남관왕묘는 다른 곳으로 옮겨졌고 북관왕묘와 서관왕묘는 조선총독부가 철거했다.

 

[ 퀴즈-B ]

퀴즈1. 궁궐 내에서 대신(大臣)들이 업무를 보던 관청들이 모여 있는 곳을 무어라 하나?

         (오늘날 정부 종합청사에 해당하는 곳을 말함)

퀴즈2. 왕이 조의(朝議-아침 조회)를 할 때 왕이 계신 정전(政殿) 내부[=당상(堂上)]에서

        국사(國事에 대해 임금과 논의를 하거나 왕이 하시는 말씀(下交)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관리를(또는 그런 직책) 무어라 하는가? ( OO官 )

퀴즈3. 왕이 정사를 보는 정전(政殿) 앞마당에 각 품계에 따라 관리들이 도열하는 위치에

         (주로) 돌로 만들어 세워둔 것을 무어라 부르는가?

퀴즈4. 흥선대원군의 사저(私邸)로 대원군이 섭정을 하며 나랏일을 보던 곳이다. 고종이

         태어난 곳이며 고종이 명성황후와 가례를 치른 곳이기도 하다. 이곳의 명칭은?

퀴즈5. 종묘사직(宗廟社稷)이란 말의 뜻은? 이와 관련된 서울에 있는 장소 명칭은?

퀴즈6. 관우(關羽)를 모신 사당의 이름은?

 

[ 퀴즈-B 정답 ]

퀴즈1 . 궁궐 내에서 대신(大臣)들이 업무를 보던 관청들이 모여 있는 곳을 무어라 하나?

             (오늘날 정부 종합청사에 해당하는 곳을 말함) .=> 궐내각사

퀴즈2 . 왕이 조의(朝議-아침 조회)를 할 때 왕이 계신 정전(政殿) 내부[=당상(堂上)]에서

             국사(國事에 대해 임금과 논의를 하거나 왕이 하시는 말씀(下交)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관리를(또는 그런 직책) 무어라 하는가? .=> 堂上官(당상관)

퀴즈3답.  왕이 정사를 보는 정전(政殿) 앞마당에 각 품계에 따라 관리들이 도열하는 위치에

            (주로) 돌로 만들어 세워둔 것을 무어라 부르는가? .=> 품석(品石), 品階石(품계석)

퀴즈4 . 흥선대원군의 사저(私邸)로 대원군이 섭정을 하며 나랏일을 보던 곳?

             답.=> 운현궁(雲峴宮)

퀴즈5 . 종묘사직(宗廟社稷)이란 말의 뜻은? 이와 관련된 서울에 있는 장소 명칭은?

             답.=> 왕실과 나라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종묘(宗廟)는 역대왕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왕실의

                      사당이며 사직(社稷)은 토지의 신인 사()와 곡식의 신인 직()에게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해당 장소의 명칭은 宗廟(종묘) 사직단(社稷檀)이다.

퀴즈6 . 관우(關羽)를 모신 사당의 이름은? 동묘(東廟)=동관왕묘(東關王廟)

 

(계속)

 

 

서울(한양) 탐구02-조선의 궁궐(5대궁)


 

(배경 영상,음악)  정악 풍류- 영산회상: 국립국악원(2018.09.21)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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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한 주요 자료 및 링크>

1. 궐 및 종묘(문화재청-www.heritage.go.kr)

2. 조선 5대 궁궐로 떠나는 나들이 - Daum 백과

 

*조선 궁궐 잠깐 퀴즈! - 이것만 알아도 조선 궁의 알짜는 웬만큼 안다고 할 수 있다.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 퀴즈-A ]

퀴즈1. 서울에 있는 조선 시대 5대 궁궐의 이름은?

퀴즈2. 조선 시대 임금이 가장 오랫동안 政事(정사)를 보았던 궁(宮)의 이름은?

퀴즈3.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했던 궁의 이름은?

퀴즈4.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났던 궁(宮) 이름은?

퀴즈5. 고종이 아관파천 이후 환궁하여 마지막까지 살았던 궁(宮) 이름은?

퀴즈6. 조선왕조 마지막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여사가 기거한 장소로 실내의 각종 창문과 

         창호의 모양과 무늬가 매우 아름다운 이곳은 어디인가( 안에 있던 장소명)?

 

(알림)

본 게시물은 위에 소개한 참고 자료(밑줄 링크)의 내용과 아래 참조 자료에서 항목과 내용을 가져왔으며 내용 일부는 편집, 가감된 것도 있다.  상세한 내용은 관련 링크나 참조 링크를 보기 바람.

 

(조선) 궁궐의 역사     그림 및 내용출처: 국가문화유산포탈 | 궁궐의 역사 (heritage.go.kr)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5대 궁궐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경운궁) 그리고 경희궁(경덕궁)이다.

 

.경복궁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1392년)하고 나서 수도를 지금의 서울인 한양으로 옮긴 뒤 제일 먼저 종묘와 사직 그리고 궁궐인 경복궁을 세웠다(1395년). 그리고 3대 태종 때(1405년)에는 경복궁의 동쪽에 창덕궁을 창건했다.

 

.창덕궁

이로써 정궁(正宮) 경복궁과 이궁(離宮) 창덕궁 양궐 체제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임금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에 거처하는 것을 더 선호했다. 성종 때 이르러서는 세분의 대비를 위해서 창경궁을 세우게 되었다. 창경궁은 창덕궁 옆에 위치하여 창덕궁의 부속 역할을 하였다.  그 후 1592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타 없어지게 되고, 일 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선조 말 창덕궁 재건이 시작되어 1610년 광해군 때 완성되었으나 중건하고 약 10년 후 1623년 인조반정 때 외전(外殿)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고 말았다. 이후 25년간 방치되었다가 1647년에 복구되었다. 창덕궁은 이후 마지막 황제에 이르기까지 270여 년간 경복궁을 대신하여 정궁의 역할을 하였다.

 

.창경궁

창경궁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창덕궁과 함께 모두 불탔으나 1616년에 복원되었다.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으로 통명전, 양화당, 환경전 등 소실되었으나 1633년(인조 11년 통명전, 양화당, 환경전, 함인정 등 중건되었다. 

 

반면 덕수궁(경운궁)은 원래는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후손의 집이었으나 그 후 선조가 임진왜란 당시 임시로 거처하는 行宮(행궁-왕이 궁궐을 떠나 잠시 경유하는 궁)으로 사용하였다. 그 후 광해군은 이곳에서 즉위한 후 경운궁이라 이름 지어 7년간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광해군은 인왕산 아래, 지금의 사직단 뒤편에 인경궁, 그리고 그 앞쪽 지금의 새문안길가에 경덕궁(경희궁이란 이름은 영조 대에 바뀐 이름이다)을 지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몇 가지 무리한 정책으로 인하여 왕이 된지 15년이 되는 1623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나고 인조가 왕이 된다. 인조는 광해군이 지었던 인경궁을 헐어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보수하였고 경덕궁은 그대로 두어 離宮(이궁)으로 사용하였다. 이로써 창덕궁과 창경궁이 정궁이 되고 경덕궁(경희궁)이 이궁이 되는 새로운 체제가 성립되어 조선 후기 내내 지속되었다.

 

조선 후기의 正宮(정궁)으로 쓰이던 창덕궁은 고종 초년에 경복궁이 중건(1868년)되자 그 지위에 변동이 생긴다. 경복궁이 다시 정궁의 지위를 회복하고 창덕궁과 창경궁은 이궁으로 쓰이며 그때까지 이궁으로 쓰이던 경희궁은 빈 궁궐이 되었다.

 

고종은 경복궁과 창덕궁으로 오가면서 생활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고종에게 압박을 가하여 고종은 경복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다가 두 달도 못 되 다시 경복궁으로 옮기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고종과 그 비인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막아보려 했지만 오히려 일본은 일본공사 미우라의 지휘아래 일본군인, 자객들을 동원해 경복궁에서 명성황후를 살해한다. 이를 을미사변(1895)이라 한다.   참조링크: 명성황후 시해사건, 을미사변 

 

이렇게 압박을 가하는 일본을 외국의 힘으로 막아보려고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은 극비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했다(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러시아 대사관=아관 俄館으로 옮겨 거처함)이라 한다. 참조링크: 아관파천

 

.경운궁(덕수궁)

이로써 정궁인 경복궁이나 이궁인 창덕궁은 모두 빈 궁궐이 되고 만다. 다시 돌아오라는 국민들의 여망의 따라 고종은 경복궁도 창덕궁도 아닌 경운궁(덕수궁)을 확장,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1년 만에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한다. 고종은 경운궁으로 돌아간 뒤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1897년). 그러나 경운궁은 1904년의 대 화재로 인해 거의 모든 전각들이 소실되었다가 1905년-1906년에 대부분의 전각들이 복원되었다.

 

.경희궁

한편 경희궁은 광해군 때 지어진 뒤 여러 왕들이 태어나고 즉위식을 갖는 등 이궁(離宮)으로서 역할을 하다가 20세기 초 일제의 강점으로 뜯겨나가고 헐렸다. 그래서 예전의 본 모습은 오직 궁궐지의 기록을 찾아볼 수밖에 없다.

 

일제 강점기 때 수난을 당한 궁궐은 비단 경희궁뿐이 아니었다. 일제는 경복궁 흥례문 자리에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으며 창경궁에는 동물원과 식물원을 개설하여 일반인에게 관람하게 하면서 격하시켜 '창경원'이라 부르게 하였다.

 

이렇듯 조선의 5대 고궁은 국가의 흥망성쇠에 따라 그 운명을 같이 해온 우리 역사의 동반자이다. 시대가 변하여 차차 원래의 모습으로 보수, 복원되어가고 있지만 지나온 그 역사는 궁궐 각 건물의 공간 안에 현존한다. 그러기에 고궁 탐방은 단지 휴식을 취하고 볼 것을 즐기는 눈요기가 아니라 우리 선조들의 숨결을 함께 느껴볼 수 있는 역사 현장으로의 초대가 되는 셈이다.

 

(조선의) 5대 궁궐 구경(답사)하려면... 아래 링크를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

관람 시간, 관람료, 건물 설명 등은 해당 관리소 홈페이지(링크)를 참고하고, 문화해설사의 안내를 들으며 구경할 수도 있다. 참고로 창덕궁을 제외하고는 자유 관람이며, 경희궁은 무료 관람이다.

 

창덕궁 관람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다. 창덕궁은 안내에 의한 시간제 관람과 제한공개가 원칙이다. 목요일 자유관람 외에는 해설사와 함께 정해진 시간에 입장해야 한다. 옥류천(玉流川)과 낙선재(樂善齊)는 특별관람이다. 일반관람 코스에 들어가지 않는다.  

 

참조한 자료 및 내용 출처 : 조선 5대 궁궐로 떠나는 나들이  

1. 첫 번째 코스 (경복궁) ,   관람안내 링크: 경복궁 관리소 www.royalpalace.go.kr/

2. 두 번째 코스 (창경궁) ,   관람안내 링크: 창경궁 관리소 www.cgg.cha.go.kr/

3. 세 번째 코스 (창덕궁) ,   관람안내 링크: 창덕궁 관리소 www.cdg.go.kr

4. 네 번째 코스 (덕수궁) ,   관람안내 링크: 덕수궁 관리소 www.deoksugung.go.kr/

5. 다섯 번째 코스 (경희궁),  참조링크: 경희궁 - 나무위키 (namu.wiki)

..고지도에 표시된 조선의 주요 궁궐과 종묘와 사직단 - 출처: 인터넷

A.경복궁      관람안내 링크:  경복궁 관리소 www.royalpalace.go.kr/

                 내용출처: 국가문화유산포탈 | 경복궁 소개 (heritage.go.kr)

 

경복궁은 조선 왕조 제일의 法宮(법궁)이다.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창건하였고,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졌다가, 고종 때인 1867년 중건되었다. 흥선 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된 경복궁은 500여 동의 건물들이 미로같이 빼곡히 들어선 웅장한 모습이었다.

 

궁궐 안에는 왕과 관리들의 정무 시설, 왕족들의 생활공간, 휴식을 위한 후원 공간이 조성되었다. 또한 왕비의 중궁, 세자의 동궁, 고종이 만든 건청궁 등 궁궐 안에 다시 여러 작은 궁들이 복잡하게 모인 곳이기도 하다.

 

광화문-흥례문-근정문-근정전-사정전-강녕전-교태전을 잇는 중심 부분은 궁궐의 핵심 공간이며,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대칭적으로 건축되었다. 그러나 중심부를 제외한 건축물들은 비대칭적으로 배치되어 변화와 통일의 아름다움을 함께 갖추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복궁의 주요 건물          내용출처: 경복궁/건축물 - 나무위키 (namu.wiki)

광화문 光化門 링크:광화문(光化門)-경복궁의 正門(정문=南門 남문).

건춘문 建春門 링크:건춘문(建春門)-경복궁의 東門(동문)으로 봄(春)과 동쪽(東)은 예로부터 세자를 뜻하는 말이었고

                                     건춘문 근처에 동궁전이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다.

영추문 迎秋門 링크:영추문(迎秋門)-경복궁의 西門(서문)-가을을 맞이한다는 뜻.

신무문 神武門 링크:신무문(神武門)-경복궁의 북문. 풍수지리적인 문제로 닫혀 있었다.

 

동십자각 東十字閣 링크:동십자각(東十字閣) -궁성을 수비하던 망루로 경복궁에 현존하는 유일한 망루

근정전(勤政殿) 링크:근정전(勤政殿)-경복궁의 政殿(정전-왕이 정사를 보던 전각)으로 국가대례(代禮)를 거행하던

                                      장소로 다포식(多包式) 건축으로는 현존하는 것 중 국내 최대 규모이다.

 

강녕전(康寧殿)-임금의 침전(寢殿 잠을 자던 곳)으로 지붕에 용마루가 없다.

교태전(交泰殿)-왕비의 침전으로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지붕에 용마루가 없다.

 

아미산(峨嵋山)-경회루 연못을 팔 때 나온 흙으로 만든 인공산으로 3단의 화계(花階)로 된 출입구에는 2.6m 높이의 육각형 벽돌 굴뚝 4개가 있는데, 교태전의 온돌방에서 나오는 연기를 배출하기 위해 만들었다. 각 굴뚝의 여섯 벽면에는  다 양한 길상문이 아름답게 꾸며졌으며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11호로 지정되었다.

 

자경전 십장생 굴뚝-자경전 서쪽에 있는 담장으로 황토색 벽돌과 흰 삼화토를 사용해 만든 벽면에 각종 길상문자와 길상

                          도안, 기하학적 문양을 장식했다.

자경전 꽃담-미학적 가치가 뛰어나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10호로 지정되었다.

 

건청궁(乾淸宮)참조링크: 건청궁 (경복궁)-위키백과

건청궁은 1873년(고종 10년) 경복궁 중건이 끝난 뒤 고종이 흥선대원군 모르게 궁궐의 내밀한 북쪽에 국고가 아닌 사비로 지은 '궁 안의 궁'이다. 실제로 1873년부터 고종이 친정(親政)을 시작했기 때문에, 건청궁 건설은 아버지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정치적 행보라는 해석이 있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이후 버려졌다가 1909년(융희 3년) 철거되었고, 2007년 복원되었다.

 

곤녕합(坤寧閤)참조링크: 곤녕합(坤寧閤)

명성황후 민씨가 머물던 처소로 민가의 안채 역할을 하던 장소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 경복궁에 난입한 일본인에게 명성황후 민씨가 시해된 장소이며, 시신은 곤녕합 옥호루(玉壺樓)에 잠시 안치했다가 곧 건청궁 뒤쪽 녹산(鹿山)에서 불태워졌다. 이곳 역시 아관파천 이후 버려졌다가 1909년(융희 3년) 철거되었고, 2007년 복원되었다.

 

경회루(慶會樓)- 1395년(태조 년4) 경복궁 창건 때 연못을 파고 누각을 세웠으나 지대가 습해 건물이 기울자 1412년(태종 12년) 연못을 대규모로 준설해 동서 128m, 남북 113m의 방지(方池)를 조성하고 경회루를 세웠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867년(고종 4년) 중건하였다. 지금의 경회루는 정면 7칸(34.4m), 측면 5칸(28,5m)현존하는 한국의 목조 건축 중 규모가 가장 크다.

 

.경회루 -그림 출처: 조선의 궁궐 - 나무위키

향원정(香遠亭)- 경회루 서북쪽 향원지 안에 세워진 2층의 정자 누각이다. 원래는 건청궁의 후원 역할을 하는 장소였기에 건너가기 편하도록 건청궁에서 향원정을 향해 다리가 놓여있었으나 지금은 자리가 바뀌어 향원지 남쪽에서 향원정으로 향하게 놓여 있다. 창덕궁 부용정과 함께 사진이나 그림의 단골 소재인 장소이다.

.향원정

동궐도(東闕圖) - 참조링크 내용 출처: 동궐도(東闕圖) 다음백과

동궐도   사진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Donggwol-do.jpg

동궐(東闕)은 창덕궁의 별칭으로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동편에 있는 궁궐이라는 뜻으로 바로 옆에 인접한 창경궁도 함께 그려져 있다.

 

B. 창경궁    관람안내 링크:  창경궁 관리소 www.cgg.cha.go.kr/

                내용출처: 국가문화유산포탈 | 창경궁 소개 (heritage.go.kr)

 

창경궁은 경복궁, 창덕궁에 이어 세 번째로 지어진 조선시대 궁궐이다. 조선 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경복궁을 법궁으로, 창덕궁을 보조 궁궐로 사용하는 양궐 체제를 이어왔다. 그러나 역대 왕들은 경복궁보다는 창덕궁에 거처하는 것을 더 좋아하였고, 왕실 가족이 늘어나면서 차츰 창덕궁의 생활공간도 비좁아졌다. 이에 성종이 왕실의 웃어른인 세조 비 정희왕후, 예종 비 안순왕후, 덕종 비 소혜왕후 등 세 분의 대비가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창덕궁 이웃에 마련한 궁궐이 창경궁이다.

 

창경궁은 왕이 정사를 돌보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생활공간을 넓힐 목적으로 세워졌고, 또한 애초 궁궐로서 계획된 것이 아니라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살았던 수강궁에 몇몇 전각을 보태어 세운 궁궐이다. 따라서 경복궁이나 창덕궁과 비교해볼 때 그 규모나 배치 등에 다른 점이 많다.

 

우선 창경궁은 전각의 수가 많지 않고 규모가 아담하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은 자경전도 언덕에 지어졌다. 창경궁의 또 다른 독특함은 조선시대 다른 궁궐과 주요 전각들이 남향으로 지어진 것과 달리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점이다. 창경궁의 경우 정문인 홍화문과 정전인 명정전은 동쪽을 향하고, 관청 건물인 궐내각사와 내전의 주요 전각들은 남쪽을 향해 있다. 남·서·북쪽이 구릉이고, 동쪽이 평지인 지세라서 이를 거스르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왕실 가족의 생활공간으로 발전해온 궁궐이기에 내전이 외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넓은 것도 창경궁의 특색이다. 따라서 창경궁에는 왕들의 지극한 효심과 사랑, 왕과 세자의 애증, 왕비와 후궁의 갈등 등 왕실 가족 사이에 일어난 이야기도 풍부하게 전해온다. 세간에 널리 알려진 장희빈과 인현왕후,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도 사건이 일어난 현장인 창경궁에서 들으면 더 생생하게 들린다.

 

창덕궁과 함께 '동궐'로 불렸던 창경궁은 서쪽으로 창덕궁과 맞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낮은 언덕을 지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와 이어져 본래 한 영역을 이루었다.

 

C. 창덕궁    관람안내 링크: 창덕궁 관리소 www.cdg.go.kr

                내용출처: 국가문화유산포탈 | 창덕궁 소개 (heritage.go.kr)

 

창덕궁은 1405년 (태종5년) 조선왕조의 이궁(離宮)으로 지어진 궁궐이다. 경복궁의 동쪽에 자리한 창덕궁은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東闕0이라 불리기도 했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에 타자 선조는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의 복구를 선조 40년(1607)에 시작하였으며, 창덕궁은 광해군 2년(1610)에 중건이 마무리 되었다.

 

그 후 창덕궁은 1623년 3월 인조반정으로 인정전을 제외하고 또다시 불에 타는 시련을 겪었다. 인조 25년(1647)에 복구되었으나 1917년 대조전을 중심으로 내전 일곽이 손실되는 대화재가 일어났다.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 때부터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가지 총 258년 동안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하며 정사(政事)를 편 궁궐이다.

 

북한산의 매봉 기슭에 세운 창덕궁은 다른 궁궐과는 달리 나무가 유난히 많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가 탁월하여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조선시대의 뛰어난 조경을 보여주는 昌德宮後苑(창덕궁후원=秘苑 비원)을 통해 궁궐의 조경양식을 알 수 있다. 후원에는 160여 종의 나무들이 있으며, 그 중에는 300년이 넘는 나무도 있다. 창덕궁은 조선시대의 조경이 훼손되지 않고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는 귀중한 장소이다. 참조 링크: 창덕궁 후원秘苑(비원)

 

.부용지- 뒤쪽 언덕에 주합루

창덕궁의 주요 건물       내용출처: 창덕궁/건축물 - 나무위키 (namu.wiki) 

부용정(芙蓉亭)- 부용지의 정자로 정면 5, 측면 4, 배면 3칸의 자형 전각이다. 배면 한 칸은 연못에 높은 석주(石柱)를 세우고 수중누각(水中樓閣)이 되게 하여 수상과 지상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영화당(暎花堂)- 부용지 동쪽에 있는 전각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이익공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광해군 때 처은 건립되었으나 현재의 전각은 1692년(숙종 18)에 재건된 것이다. 부용정 일대에서 내력이 제일 오래된 건물이다. 정조 이전까지 왕과 신하들이 연회를 개최하거나 활을 쏘던 곳이고 이후 시험장으로 활용되었다. 영화당 앞 마당은 현재 모습과는 달리 창경궁 춘당지 바로 앞까지 넓게 열린 공간이었는데, 이 마당을 '춘당대春塘臺'라 불렀다. 공간이 매우 넓어 문과/무과시험 가리지 않고 왕이 직접 행차하여 과거시험을 지켜보고 관장했으며 이곳에서 치는 과거시험을 "춘당대시春塘臺試"라고 부르기도 했다.

 

주합루(宙合樓)- 창덕궁 부용지의 전각 중 하나로 정면 5칸, 측면 4칸, 팔작지붕 형식의 중층 전각으로 1776년(정조 원년)에 건립되었다. 주합루의 경우 2층은 주합루, 1층은 어제각이라 했으며 본래 역대 국왕들의 글과 어필을 보관하던 곳으로 이후 규장각으로 개명되었다.

 

연경당(演慶堂)- 창덕궁 후원에 위치한 전각으로 1828(순조 28)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기간에 순조의 진작례를 올리기 위해 진장각(珍藏閣) 옛터에 세워져 당시 효명세자의 왕권강화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전각이다. 궁궐의 다른 전각들과 달리 궐내에서 유일하게 민가 형식으로 지어졌다. 참고: 진작(進爵)-'진작례’란 왕실의 특별한 날에 신하들이 임금에게 술과 음식을 올리고 예를 표하는 의식이다.

 

청의정(淸漪亭)- 창덕궁 후원의 옥류천에 위치한 정자이며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궁궐에서 유일하게 팔각의 초가 지붕을 하고 있다. 익공계 사모 형식을 하고 있으며 1636(인조 14)에 세워졌다. 정자 앞으로 논을 만들어 벼를 심고, 수확 후에는 볏짚으로 정자의 지붕 이엉을 잇게 하였는데 이는 농사의 소중함을 백성들에게 일깨워주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애련정(愛蓮亭)-애련지에 위치한 전각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에 익공계 사모지붕을 하고 있다. 1692(숙종 18)에 세워졌고 액명은 중국 송나라 때 주돈이가 쓴 애련설에서 빌린 것이다.

 

관람정(觀纜亭)-관람지에 속해 있는 정자로 한반도 모양의 연못인 관람지에 놓여져 있으며 부채꼴 扇形(선형) 기와지붕을 한 굴도리집을 하고 있다.

 

존덕정(尊德亭)- 관람지에 속해 있는 정자로 동시대의 정자들과 달리 이중지붕 구조의 육각지붕으로 만들어진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어서 육우정(六隅亭) 또는 육면정(六面亭)이라고도 불렸다.

 

돈화문(敦化門)-창덕궁의 정문으로 1412(태종 12)에 건립되었고 다음 해인 1413(태종 13)에 무게 1만 5천 근의 동종을 걸어 시간을 알리게 했다. 현재 보물 제383호로 지정되어 있다. 굳이 5칸으로 지어놓고 양 옆의 2칸을 막아놓은 것은 황제국이 5문을 사용하고 제후국이 3문을 사용한다는 규정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은 셈이라고 한다.

 

인정전(仁政殿)-창덕궁의 정전으로 용마루에는 다섯 개의 이화문장이 새겨져 있다. 1405(태종 5)에 건립되어 세종 원년에 고쳐 지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광해군 원년에 재건되어 황폐화된 경복궁의 근정전을 대신해 이곳에서 국가적인 대례를 행하는 장소가 되었다.

 

궐내각사(闕內各司)-현재 창덕궁의 궐내각사는 인정전의 서편쪽 궐내각사만 복원되있는 형편이나, 원래는 선정전의 앞뜰에도 승정원, 사간원, 선전관청, 사옹원, 대전장방 등 빽빽한 건물군으로 궐내각사가 유지되었다. 비록 복원된 것이라고는 하나 창덕궁의 궐내각사는 한국 5대궁 중에서 특히나 궁이 과거 중앙국가행정의 중심이자 치소(治所)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곳으로써 가치가 높고, 왕족과 귀족의 거처에 불과한 서양의 궁/궁전들과의 차이점을 보여주는 곳이다.

 

창덕궁의 주요 궐내각사-(링크)

이문원(摛文院) 검서청(檢書廳) 봉모당(奉謨堂) 책고(冊庫)

예문관(藝文館)  홍문관(弘文館) 내의원(內醫院) 억석루(憶昔樓)

 

참고 궐외각사(闕外各司)- 대궐밖에 있었던 관청으로 광화문 앞 세종로에 있던 육조나, 궁 밖에 있는 내수사, 비변사 등은 궐외각사라 하였다.

 

희정당(熙政堂)-창덕궁의 편전으로 외양은 한식건물에 서양식 실내장식을 하고 있다. 남행각 현관의 경우 서구식 현관에 일본식이 가미되었고, 희정당도 왜곡과 변질이 가해졌다. 내부는 쪽마루에 카펫이 깔리고 창문에는 유리가 끼워졌으며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설치되는 등 전형적인 서양식 실내 장식을 하고 있는 데다가 외관의 남행각에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현관이 설치되었다. 해방 후인 1985년에 보물 제815호로 지정되었다.

 

대조전(大造殿)-왕비의 침전으로 용마루가 없다.

 

성정각(誠正閣)-창덕궁 동궁에 속한 전각으로 학문을 대하는 정성과 올바른 마음가짐을 뜻하는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이라는 말에서 따왔으며 현판의 필체는 정조의 어필이라고 전해진다. 성정각은 본래 왕세자가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었다.

   

선원전(璿源殿)- 이곳에는 태조·세조·원종·숙종·영조·정조·순조·문조·헌종·철종·고종·순종의 어진을 모시고 있다가 일제강점기인 1921년 창덕궁 후원 서북쪽에 선원전을 새로 지어 어진을 옮긴 뒤부터 구 선원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신 선원전- 창덕궁 신 신원전에 속하는 정면 14, 측면 4칸의 규모를 한 전각 중 하나로 본래 명나라 태조(太祖신종(神宗의종(毅宗)을 제사지낸 사당이었던 대보단(大報壇)과 북일영(北一營) 등이 위치하고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212곳을 헐어내 새로 선원전을 세워 역대 임금들의 어진을 모셨다. 하지만 19506.25 전쟁 때 부산으로 소개했던 어진들이 대부분 불에 타는 사고를 겪어 전각 안은 비어 있다. 현재는 일반에 개방된 곳이 아니다.

 

창덕궁 낙선재            내용 및 링크  출처1: 창덕궁/건축물 - 나무위키 (namu.wiki)

                                             출처2: 창덕궁낙선재(昌德宮樂善齋)-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낙선재

낙선재(樂善齋): 출처:창덕궁/건축물 - 나무위키 (namu.wiki)

창덕궁 낙선재 권역을 대표하는 전각으로 사랑채의 역할을 한다. 정면 6, 측면 2칸의 단층 팔작기와지붕이며 1846(헌종 12)에 단청없는 사대부가(士大夫家) 양식으로 세워졌다. 본래 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가 거주할 전각을 만들면서 헌종 본인도 같이 기거할 사랑채격으로 지은 곳으로 헌종이 추사 김정희를 접견하는 장소로 자주 사용하는 등, 헌종의 문예생활이 주로 이곳에서 이뤄졌다.

 

순종 사후(死後 죽은 후) 낙선재에 머물던 순정효황후를 위해 1930년대에 낙선재 서행랑(서쪽 행랑)을 허물고 신관을 신축했으며, 해방 후 대한제국 황실 가족이 거주한 장소이다. 1963 11 22일 일본에서 돌아온 영친왕이 1970 5 1, 이방자 여사가 1989 4 30일에 숨을 거둔 곳이기도 하다. 이방자 사후(死後 죽은 후)  1990년대에 신관을 철거하고 원래의 서쪽 행랑을 복원했다.

.낙선재 일원

이하 내용출처: 창덕궁낙선재(昌德宮樂善齋)-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847년(헌종 13)에 중건된 낙선재는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해 세워진 건물로 보물 제1764호이다. 그러나 고종 대에 들어와서 중희당과 가까운 낙선재를 종종 편전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생겼다. 특히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이후 고종은 낙선재를 집무실로 정하고 대신들과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였다. 그 후 조선왕조 마지막 영친왕 이은이 1963년부터 1970년까지 살았으며, 1966년부터 1989년까지는 이방자 여사가 기거하였다.

 

이 낙선재는 실내의 각종 창문과 창호의 모양과 무늬가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다른 곳에서 보기 드문 원형문(圓形門)이 있다. 낙선재의 후원에는 장대석으로 쌓은 화계(花階 꽃계단)가 있고 괴석 등을 전시하였다. 또 벽돌로 문양을 만들고 기와로 지붕을 얹은 아름다운 굴뚝이 있다. 화계 뒤로는 상량정(上凉亭)과 서고가 있고, 서쪽으로 소주합루와 만난다. 

 

D. 경운궁(慶運宮), 덕수궁(德壽宮)

참조 링크 1. 덕수궁 - 다음백과

참조 링크 2. 국가문화유산포탈 | 덕수궁 소개 (heritage.go.kr)

참조 링크 3. 덕수궁 관리소  www.deoksugung.go.kr/

 

덕수궁 일원

-이하 내용- 다음백과와 민족문화 백과사전에서 발췌함-

현재 덕수궁의 옛 이름인 경운궁은 처음 월산대군의 집터였던 것을 임진왜란 이후 선조의 임시거처로 사용되어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다가 광해군 때에 경운궁으로 개칭되었다.

 

고종은 1895년(고종 32)에 을미사변이후 세계 열강들 사이에서 보다 자주적인 입지를 확보하려는 계획을 도모하면서 경운궁(덕수궁)을 대대적으로 중건하였다. 1897년(광무 1)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부터 중화전을 비롯하여 정관헌, 돈덕전,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준명전, 흠문각, 함녕전, 석조전 등 많은 건물들을 지속적으로 세웠다.

 

1907년 고종은 결국 일본의 강압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났다. 고종에게 왕위를 물려받은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고종에게 장수를 비는 뜻으로 ‘德壽(덕수)’라는 궁호((宮號 궁이름)를 올린 것이 그대로 궁궐 이름 덕수궁(德壽宮)이 되었다.

 

한편 고종의 재위 말년의 약 10년간 정치적 혼란의 주무대가 되었던 덕수궁은 궁내에 서양식 건물(석조전 등)이 여럿 지어졌다. 덕수궁의 독특한 건물로 함녕전 뒤편에 있는 정관헌은 전통식 지붕 구조와 서양식 기둥 양식이 절충된 건물이다. 석조전은 내부와 외부가 모두 서양식으로 꾸며진 건물이다. 이처럼 덕수궁에 여러 서양식 건물이 남아 있는 것을 통해 고종이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점을 알 수 있다.

 

궁궐 안의 서양 건물, 석조전(石造殿) 참조링크: 석조전

.석조전

석조전은 경운궁(덕수궁) 안에 지어진 서양식 건물로 유럽의 궁정을 본 땄다. 황제가 일상생활을 하며 손님을 맞던 곳이었다. 화재 위험을 막기 위해 돌로 지었고 현관에는 대한 제국의 상징인 오얏꽃이 새겨져 있고 내부는 서양식 가구와 벽난로, 화려한 전등으로 장식했다.

 

1919년, 경운궁에 머물던 고종 황제가 세상을 뜨면서 석조전은 미술관으로 바뀌었다. 해방 이후 민주의원 의사당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린 장소이기도 하다. ​한국 전쟁 이후 국립박물관, 현대미술관, 문화재 관리국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쓰이다가 2014년 본래의 석조전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E. 경희궁(慶熙宮)   내용출처1: 경희궁 -위키백과

                          내용출처2: 경희궁 - 나무위키 (namu.wiki)

 

경희궁(慶熙宮)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 2가에 있는 조선 시대 궁궐로 광해군 9년(1617년)에 건립한 이후, 10대에 걸쳐 임금이 정사를 보았던 궁궐이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경복궁의 동쪽 궁궐인 창덕궁+창경궁을 지칭하는 '동궐'에 대비되는 경복궁의 서쪽 궁궐을 뜻하는 '서궐(西闕)'로 불렸다. 새문안 대궐, 새문동 대궐, 아주개 대궐이라고도 하였다. 조선 시대의 이궁(離宮)으로, 경운궁(덕수궁)과 홍교(虹橋 무지개다리 Arch)로 연결되어 있었다.

 

규모로 보자면 경복궁 크기의 2/3를 넘는 영역이 경희궁에 속하였고, 한양도성 서쪽 성벽 일부와 한양 서북부를 대부분 차지하던 거대한 궁궐이었다. 모두 98채의 건물이 들어섰던 경희궁은 경복궁, 창경궁과 함께 조선왕조의 3대궁으로 꼽힐 만큼 큰 궁궐이었으며 본래는 100여 동이 넘는 전각들이 있었다.

 

그러나 5대궁 가운데 가장 철저히 파괴된 궁으로서 흥선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에 의해 몇 채의 전각들을 제외하곤 전부 훼철됐고, 그나마 남아있던 부지 또한 일제강점기에 축소되어 현재 원 상태로 남아있는 건물은 정문이었던 흥화문과 정전이었던 숭정전, 그리고 후원의 정자였던 황학정까지 세 채에 불과하다.

 

[ 퀴즈-A ]

퀴즈1. 서울에 있는 조선 시대 5대 궁궐의 이름은?

퀴즈2. 조선 시대 임금이 가장 오랫동안 政事(정사)를 보았던 궁(宮)의 이름은?

퀴즈3.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했던 궁의 이름은?

퀴즈4. 명성왕후 시해 사건이 일어났던 궁(宮) 이름은?

퀴즈5. 고종이 아관파천 이후 환궁하여 마지막까지 살았던 궁(宮) 이름은?

퀴즈6. 조선왕조 마지막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여사가 기거한 장소로 실내의 각종 창문과 

         창호의 모양과 무늬가 매우 아름다운 이곳은 어디인가( 안에 있던 장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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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퀴즈-A 정답]

퀴즈1 답. 서울에 있는 조선 시대 5대 궁궐의 이름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경운궁), 경희궁.

퀴즈2. 답. 조선 시대 임금이 가장 오랫동안 政事(정사)를 보았던 궁(宮)의 이름은? 창덕궁

퀴즈3. 답.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했던 궁의 이름은? 창경궁

퀴즈4. 답. 명성왕후 시해 사건이 일어났던 궁(宮) 이름은? 경복궁

퀴즈5. 답. 고종이 아관파천 이후 환궁하여 마지막까지 살았던 궁(宮) 이름은? 덕수궁

퀴즈6. 답. 조선왕조 마지막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여사가 기거한 장소로 실내의 각종 창문과 

             창호의 모양과 무늬가 매우 아름다운 이곳은 어디인가( 안에 있던 장소명)?  낙선재

 

(계속)

 

 

서울(한양)탐구02-조선의 궁궐(5대궁)

(주의) 

*본문중 밑줄 친 링크가 많습니다. 이는 본문 내용을 가져오거나 참고한 곳으로 필요시 밑줄 친 link를 클릭

하세요. 단, 밑줄 친 링크는 현재는 연결되지만 추후 링크 주소 변경되면 연결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참조한 주요 자료 및 링크>

1. 궐 및 종묘(문화재청-www.heritage.go.kr)

2. 조선 5대 궁궐로 떠나는 나들이 - Daum 백과

 

*조선 궁궐 잠깐 퀴즈! - 이것만 알아도 조선 궁의 알짜는 웬만큼 안다고 할 수 있다.

                          정답은 본문 내용 및 이 글 끝에...

 

[ 퀴즈-A ]

퀴즈1. 서울에 있는 조선 시대 5대 궁궐의 이름은?

퀴즈2. 조선 시대 임금이 가장 오랫동안 政事(정사)를 보았던 궁(宮)의 이름은?

퀴즈3.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했던 궁의 이름은?

퀴즈4.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났던 궁(宮) 이름은?

퀴즈5. 고종이 아관파천 이후 환궁하여 마지막까지 살았던 궁(宮) 이름은?

퀴즈6. 조선왕조 마지막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여사가 기거한 장소로 실내의 각종 창문과 

         창호의 모양과 무늬가 매우 아름다운 이곳은 어디인가( 안에 있던 장소명)?

 

(알림)

본 게시물은 위에 소개한 참고 자료(밑줄 링크)의 내용과 아래 참조 자료에서 항목과 내용을 가져왔으며 내용 일부는 편집, 가감된 것도 있다.  상세한 내용은 관련 링크나 참조 링크를 보기 바람.

 

(조선) 궁궐의 역사     그림 및 내용출처: 국가문화유산포탈 | 궁궐의 역사 (heritage.go.kr)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5대 궁궐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경운궁) 그리고 경희궁(경덕궁)이다.

 

.경복궁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1392년)하고 나서 수도를 지금의 서울인 한양으로 옮긴 뒤 제일 먼저 종묘와 사직 그리고 궁궐인 경복궁을 세웠다(1395년). 그리고 3대 태종 때(1405년)에는 경복궁의 동쪽에 창덕궁을 창건했다.

 

.창덕궁

이로써 정궁(正宮) 경복궁과 이궁(離宮) 창덕궁 양궐 체제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임금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에 거처하는 것을 더 선호했다. 성종 때 이르러서는 세분의 대비를 위해서 창경궁을 세우게 되었다. 창경궁은 창덕궁 옆에 위치하여 창덕궁의 부속 역할을 하였다.  그 후 1592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타 없어지게 되고, 일 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선조 말 창덕궁 재건이 시작되어 1610년 광해군 때 완성되었으나 중건하고 약 10년 후 1623년 인조반정 때 외전(外殿)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고 말았다. 이후 25년간 방치되었다가 1647년에 복구되었다. 창덕궁은 이후 마지막 황제에 이르기까지 270여 년간 경복궁을 대신하여 정궁의 역할을 하였다.

 

.창경궁

창경궁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창덕궁과 함께 모두 불탔으나 1616년에 복원되었다.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으로 통명전, 양화당, 환경전 등 소실되었으나 1633년(인조 11년 통명전, 양화당, 환경전, 함인정 등 중건되었다. 

 

반면 덕수궁(경운궁)은 원래는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후손의 집이었으나 그 후 선조가 임진왜란 당시 임시로 거처하는 行宮(행궁-왕이 궁궐을 떠나 잠시 경유하는 궁)으로 사용하였다. 그 후 광해군은 이곳에서 즉위한 후 경운궁이라 이름 지어 7년간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광해군은 인왕산 아래, 지금의 사직단 뒤편에 인경궁, 그리고 그 앞쪽 지금의 새문안길가에 경덕궁(경희궁이란 이름은 영조 대에 바뀐 이름이다)을 지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몇 가지 무리한 정책으로 인하여 왕이 된지 15년이 되는 1623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나고 인조가 왕이 된다. 인조는 광해군이 지었던 인경궁을 헐어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보수하였고 경덕궁은 그대로 두어 離宮(이궁)으로 사용하였다. 이로써 창덕궁과 창경궁이 정궁이 되고 경덕궁(경희궁)이 이궁이 되는 새로운 체제가 성립되어 조선 후기 내내 지속되었다.

 

조선 후기의 正宮(정궁)으로 쓰이던 창덕궁은 고종 초년에 경복궁이 중건(1868년)되자 그 지위에 변동이 생긴다. 경복궁이 다시 정궁의 지위를 회복하고 창덕궁과 창경궁은 이궁으로 쓰이며 그때까지 이궁으로 쓰이던 경희궁은 빈 궁궐이 되었다.

 

고종은 경복궁과 창덕궁으로 오가면서 생활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고종에게 압박을 가하여 고종은 경복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다가 두 달도 못 되 다시 경복궁으로 옮기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고종과 그 비인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막아보려 했지만 오히려 일본은 일본공사 미우라의 지휘아래 일본군인, 자객들을 동원해 경복궁에서 명성황후를 살해한다. 이를 을미사변(1895)이라 한다.   참조링크: 명성황후 시해사건, 을미사변 

 

이렇게 압박을 가하는 일본을 외국의 힘으로 막아보려고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은 극비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했다(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러시아 대사관=아관 俄館으로 옮겨 거처함)이라 한다. 참조링크: 아관파천

 

.경운궁(덕수궁)

이로써 정궁인 경복궁이나 이궁인 창덕궁은 모두 빈 궁궐이 되고 만다. 다시 돌아오라는 국민들의 여망의 따라 고종은 경복궁도 창덕궁도 아닌 경운궁(덕수궁)을 확장,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1년 만에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한다. 고종은 경운궁으로 돌아간 뒤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1897년). 그러나 경운궁은 1904년의 대 화재로 인해 거의 모든 전각들이 소실되었다가 1905년-1906년에 대부분의 전각들이 복원되었다.

 

.경희궁

한편 경희궁은 광해군 때 지어진 뒤 여러 왕들이 태어나고 즉위식을 갖는 등 이궁(離宮)으로서 역할을 하다가 20세기 초 일제의 강점으로 뜯겨나가고 헐렸다. 그래서 예전의 본 모습은 오직 궁궐지의 기록을 찾아볼 수밖에 없다.

 

일제 강점기 때 수난을 당한 궁궐은 비단 경희궁뿐이 아니었다. 일제는 경복궁 흥례문 자리에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으며 창경궁에는 동물원과 식물원을 개설하여 일반인에게 관람하게 하면서 격하시켜 '창경원'이라 부르게 하였다.

 

이렇듯 조선의 5대 고궁은 국가의 흥망성쇠에 따라 그 운명을 같이 해온 우리 역사의 동반자이다. 시대가 변하여 차차 원래의 모습으로 보수, 복원되어가고 있지만 지나온 그 역사는 궁궐 각 건물의 공간 안에 현존한다. 그러기에 고궁 탐방은 단지 휴식을 취하고 볼 것을 즐기는 눈요기가 아니라 우리 선조들의 숨결을 함께 느껴볼 수 있는 역사 현장으로의 초대가 되는 셈이다.

 

(조선의) 5대 궁궐 구경(답사)하려면... 아래 링크를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

관람 시간, 관람료, 건물 설명 등은 해당 관리소 홈페이지(링크)를 참고하고, 문화해설사의 안내를 들으며 구경할 수도 있다. 참고로 창덕궁을 제외하고는 자유 관람이며, 경희궁은 무료 관람이다.

 

창덕궁 관람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다. 창덕궁은 안내에 의한 시간제 관람과 제한공개가 원칙이다. 목요일 자유관람 외에는 해설사와 함께 정해진 시간에 입장해야 한다. 옥류천(玉流川)과 낙선재(樂善齊)는 특별관람이다. 일반관람 코스에 들어가지 않는다.  

 

참조한 자료 및 내용 출처 : 조선 5대 궁궐로 떠나는 나들이  

1. 첫 번째 코스 (경복궁) ,   관람안내 링크: 경복궁 관리소 www.royalpalace.go.kr/

2. 두 번째 코스 (창경궁) ,   관람안내 링크: 창경궁 관리소 www.cgg.cha.go.kr/

3. 세 번째 코스 (창덕궁) ,   관람안내 링크: 창덕궁 관리소 www.cdg.go.kr

4. 네 번째 코스 (덕수궁) ,   관람안내 링크: 덕수궁 관리소 www.deoksugung.go.kr/

5. 다섯 번째 코스 (경희궁),  참조링크: 경희궁 - 나무위키 (namu.wiki)

..고지도에 표시된 조선의 주요 궁궐과 종묘와 사직단 - 출처: 인터넷

A.경복궁      관람안내 링크:  경복궁 관리소 www.royalpalace.go.kr/

                 내용출처: 국가문화유산포탈 | 경복궁 소개 (heritage.go.kr)

 

경복궁은 조선 왕조 제일의 法宮(법궁)이다.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창건하였고,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졌다가, 고종 때인 1867년 중건되었다. 흥선 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된 경복궁은 500여 동의 건물들이 미로같이 빼곡히 들어선 웅장한 모습이었다.

 

궁궐 안에는 왕과 관리들의 정무 시설, 왕족들의 생활공간, 휴식을 위한 후원 공간이 조성되었다. 또한 왕비의 중궁, 세자의 동궁, 고종이 만든 건청궁 등 궁궐 안에 다시 여러 작은 궁들이 복잡하게 모인 곳이기도 하다.

 

광화문-흥례문-근정문-근정전-사정전-강녕전-교태전을 잇는 중심 부분은 궁궐의 핵심 공간이며,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대칭적으로 건축되었다. 그러나 중심부를 제외한 건축물들은 비대칭적으로 배치되어 변화와 통일의 아름다움을 함께 갖추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복궁의 주요 건물          내용출처: 경복궁/건축물 - 나무위키 (namu.wiki)

광화문 光化門 링크:광화문(光化門)-경복궁의 正門(정문=南門 남문).

건춘문 建春門 링크:건춘문(建春門)-경복궁의 東門(동문)으로 봄(春)과 동쪽(東)은 예로부터 세자를 뜻하는 말이었고

                                     건춘문 근처에 동궁전이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다.

영추문 迎秋門 링크:영추문(迎秋門)-경복궁의 西門(서문)-가을을 맞이한다는 뜻.

신무문 神武門 링크:신무문(神武門)-경복궁의 북문. 풍수지리적인 문제로 닫혀 있었다.

 

동십자각 東十字閣 링크:동십자각(東十字閣) -궁성을 수비하던 망루로 경복궁에 현존하는 유일한 망루

근정전(勤政殿) 링크:근정전(勤政殿)-경복궁의 政殿(정전-왕이 정사를 보던 전각)으로 국가대례(代禮)를 거행하던

                                      장소로 다포식(多包式) 건축으로는 현존하는 것 중 국내 최대 규모이다.

 

강녕전(康寧殿)-임금의 침전(寢殿 잠을 자던 곳)으로 지붕에 용마루가 없다.

교태전(交泰殿)-왕비의 침전으로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지붕에 용마루가 없다.

 

아미산(峨嵋山)-경회루 연못을 팔 때 나온 흙으로 만든 인공산으로 3단의 화계(花階)로 된 출입구에는 2.6m 높이의 육각형 벽돌 굴뚝 4개가 있는데, 교태전의 온돌방에서 나오는 연기를 배출하기 위해 만들었다. 각 굴뚝의 여섯 벽면에는  다 양한 길상문이 아름답게 꾸며졌으며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11호로 지정되었다.

 

자경전 십장생 굴뚝-자경전 서쪽에 있는 담장으로 황토색 벽돌과 흰 삼화토를 사용해 만든 벽면에 각종 길상문자와 길상

                          도안, 기하학적 문양을 장식했다.

자경전 꽃담-미학적 가치가 뛰어나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10호로 지정되었다.

 

건청궁(乾淸宮)참조링크: 건청궁 (경복궁)-위키백과

건청궁은 1873년(고종 10년) 경복궁 중건이 끝난 뒤 고종이 흥선대원군 모르게 궁궐의 내밀한 북쪽에 국고가 아닌 사비로 지은 '궁 안의 궁'이다. 실제로 1873년부터 고종이 친정(親政)을 시작했기 때문에, 건청궁 건설은 아버지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정치적 행보라는 해석이 있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이후 버려졌다가 1909년(융희 3년) 철거되었고, 2007년 복원되었다.

 

곤녕합(坤寧閤)참조링크: 곤녕합(坤寧閤)

명성황후 민씨가 머물던 처소로 민가의 안채 역할을 하던 장소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 경복궁에 난입한 일본인에게 명성황후 민씨가 시해된 장소이며, 시신은 곤녕합 옥호루(玉壺樓)에 잠시 안치했다가 곧 건청궁 뒤쪽 녹산(鹿山)에서 불태워졌다. 이곳 역시 아관파천 이후 버려졌다가 1909년(융희 3년) 철거되었고, 2007년 복원되었다.

 

경회루(慶會樓)- 1395년(태조 년4) 경복궁 창건 때 연못을 파고 누각을 세웠으나 지대가 습해 건물이 기울자 1412년(태종 12년) 연못을 대규모로 준설해 동서 128m, 남북 113m의 방지(方池)를 조성하고 경회루를 세웠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867년(고종 4년) 중건하였다. 지금의 경회루는 정면 7칸(34.4m), 측면 5칸(28,5m)현존하는 한국의 목조 건축 중 규모가 가장 크다.

 

.경회루 -그림 출처: 조선의 궁궐 - 나무위키

향원정(香遠亭)- 경회루 서북쪽 향원지 안에 세워진 2층의 정자 누각이다. 원래는 건청궁의 후원 역할을 하는 장소였기에 건너가기 편하도록 건청궁에서 향원정을 향해 다리가 놓여있었으나 지금은 자리가 바뀌어 향원지 남쪽에서 향원정으로 향하게 놓여 있다. 창덕궁 부용정과 함께 사진이나 그림의 단골 소재인 장소이다.

.향원정

동궐도(東闕圖) - 참조링크 내용 출처: 동궐도(東闕圖) 다음백과

동궐도   사진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Donggwol-do.jpg

동궐(東闕)은 창덕궁의 별칭으로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동편에 있는 궁궐이라는 뜻으로 바로 옆에 인접한 창경궁도 함께 그려져 있다.

 

B. 창경궁    관람안내 링크:  창경궁 관리소 www.cgg.cha.go.kr/

                내용출처: 국가문화유산포탈 | 창경궁 소개 (heritage.go.kr)

 

창경궁은 경복궁, 창덕궁에 이어 세 번째로 지어진 조선시대 궁궐이다. 조선 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경복궁을 법궁으로, 창덕궁을 보조 궁궐로 사용하는 양궐 체제를 이어왔다. 그러나 역대 왕들은 경복궁보다는 창덕궁에 거처하는 것을 더 좋아하였고, 왕실 가족이 늘어나면서 차츰 창덕궁의 생활공간도 비좁아졌다. 이에 성종이 왕실의 웃어른인 세조 비 정희왕후, 예종 비 안순왕후, 덕종 비 소혜왕후 등 세 분의 대비가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창덕궁 이웃에 마련한 궁궐이 창경궁이다.

 

창경궁은 왕이 정사를 돌보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생활공간을 넓힐 목적으로 세워졌고, 또한 애초 궁궐로서 계획된 것이 아니라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살았던 수강궁에 몇몇 전각을 보태어 세운 궁궐이다. 따라서 경복궁이나 창덕궁과 비교해볼 때 그 규모나 배치 등에 다른 점이 많다.

 

우선 창경궁은 전각의 수가 많지 않고 규모가 아담하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은 자경전도 언덕에 지어졌다. 창경궁의 또 다른 독특함은 조선시대 다른 궁궐과 주요 전각들이 남향으로 지어진 것과 달리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점이다. 창경궁의 경우 정문인 홍화문과 정전인 명정전은 동쪽을 향하고, 관청 건물인 궐내각사와 내전의 주요 전각들은 남쪽을 향해 있다. 남·서·북쪽이 구릉이고, 동쪽이 평지인 지세라서 이를 거스르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왕실 가족의 생활공간으로 발전해온 궁궐이기에 내전이 외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넓은 것도 창경궁의 특색이다. 따라서 창경궁에는 왕들의 지극한 효심과 사랑, 왕과 세자의 애증, 왕비와 후궁의 갈등 등 왕실 가족 사이에 일어난 이야기도 풍부하게 전해온다. 세간에 널리 알려진 장희빈과 인현왕후,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도 사건이 일어난 현장인 창경궁에서 들으면 더 생생하게 들린다.

 

창덕궁과 함께 '동궐'로 불렸던 창경궁은 서쪽으로 창덕궁과 맞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낮은 언덕을 지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와 이어져 본래 한 영역을 이루었다.

 

C. 창덕궁    관람안내 링크: 창덕궁 관리소 www.cdg.go.kr

                내용출처: 국가문화유산포탈 | 창덕궁 소개 (heritage.go.kr)

 

창덕궁은 1405년 (태종5년) 조선왕조의 이궁(離宮)으로 지어진 궁궐이다. 경복궁의 동쪽에 자리한 창덕궁은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東闕0이라 불리기도 했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에 타자 선조는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의 복구를 선조 40년(1607)에 시작하였으며, 창덕궁은 광해군 2년(1610)에 중건이 마무리 되었다.

 

그 후 창덕궁은 1623년 3월 인조반정으로 인정전을 제외하고 또다시 불에 타는 시련을 겪었다. 인조 25년(1647)에 복구되었으나 1917년 대조전을 중심으로 내전 일곽이 손실되는 대화재가 일어났다.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 때부터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가지 총 258년 동안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하며 정사(政事)를 편 궁궐이다.

 

북한산의 매봉 기슭에 세운 창덕궁은 다른 궁궐과는 달리 나무가 유난히 많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가 탁월하여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조선시대의 뛰어난 조경을 보여주는 昌德宮後苑(창덕궁후원=秘苑 비원)을 통해 궁궐의 조경양식을 알 수 있다. 후원에는 160여 종의 나무들이 있으며, 그 중에는 300년이 넘는 나무도 있다. 창덕궁은 조선시대의 조경이 훼손되지 않고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는 귀중한 장소이다. 참조 링크: 창덕궁 후원秘苑(비원)

 

.부용지- 뒤쪽 언덕에 주합루

창덕궁의 주요 건물       내용출처: 창덕궁/건축물 - 나무위키 (namu.wiki) 

부용정(芙蓉亭)- 부용지의 정자로 정면 5, 측면 4, 배면 3칸의 자형 전각이다. 배면 한 칸은 연못에 높은 석주(石柱)를 세우고 수중누각(水中樓閣)이 되게 하여 수상과 지상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영화당(暎花堂)- 부용지 동쪽에 있는 전각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이익공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광해군 때 처은 건립되었으나 현재의 전각은 1692년(숙종 18)에 재건된 것이다. 부용정 일대에서 내력이 제일 오래된 건물이다. 정조 이전까지 왕과 신하들이 연회를 개최하거나 활을 쏘던 곳이고 이후 시험장으로 활용되었다. 영화당 앞 마당은 현재 모습과는 달리 창경궁 춘당지 바로 앞까지 넓게 열린 공간이었는데, 이 마당을 '춘당대春塘臺'라 불렀다. 공간이 매우 넓어 문과/무과시험 가리지 않고 왕이 직접 행차하여 과거시험을 지켜보고 관장했으며 이곳에서 치는 과거시험을 "춘당대시春塘臺試"라고 부르기도 했다.

 

주합루(宙合樓)- 창덕궁 부용지의 전각 중 하나로 정면 5칸, 측면 4칸, 팔작지붕 형식의 중층 전각으로 1776년(정조 원년)에 건립되었다. 주합루의 경우 2층은 주합루, 1층은 어제각이라 했으며 본래 역대 국왕들의 글과 어필을 보관하던 곳으로 이후 규장각으로 개명되었다.

 

연경당(演慶堂)- 창덕궁 후원에 위치한 전각으로 1828(순조 28)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기간에 순조의 진작례를 올리기 위해 진장각(珍藏閣) 옛터에 세워져 당시 효명세자의 왕권강화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전각이다. 궁궐의 다른 전각들과 달리 궐내에서 유일하게 민가 형식으로 지어졌다. 참고: 진작(進爵)-'진작례’란 왕실의 특별한 날에 신하들이 임금에게 술과 음식을 올리고 예를 표하는 의식이다.

 

청의정(淸漪亭)- 창덕궁 후원의 옥류천에 위치한 정자이며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궁궐에서 유일하게 팔각의 초가 지붕을 하고 있다. 익공계 사모 형식을 하고 있으며 1636(인조 14)에 세워졌다. 정자 앞으로 논을 만들어 벼를 심고, 수확 후에는 볏짚으로 정자의 지붕 이엉을 잇게 하였는데 이는 농사의 소중함을 백성들에게 일깨워주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애련정(愛蓮亭)-애련지에 위치한 전각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에 익공계 사모지붕을 하고 있다. 1692(숙종 18)에 세워졌고 액명은 중국 송나라 때 주돈이가 쓴 애련설에서 빌린 것이다.

 

관람정(觀纜亭)-관람지에 속해 있는 정자로 한반도 모양의 연못인 관람지에 놓여져 있으며 부채꼴 扇形(선형) 기와지붕을 한 굴도리집을 하고 있다.

 

존덕정(尊德亭)- 관람지에 속해 있는 정자로 동시대의 정자들과 달리 이중지붕 구조의 육각지붕으로 만들어진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어서 육우정(六隅亭) 또는 육면정(六面亭)이라고도 불렸다.

 

돈화문(敦化門)-창덕궁의 정문으로 1412(태종 12)에 건립되었고 다음 해인 1413(태종 13)에 무게 1만 5천 근의 동종을 걸어 시간을 알리게 했다. 현재 보물 제383호로 지정되어 있다. 굳이 5칸으로 지어놓고 양 옆의 2칸을 막아놓은 것은 황제국이 5문을 사용하고 제후국이 3문을 사용한다는 규정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은 셈이라고 한다.

 

인정전(仁政殿)-창덕궁의 정전으로 용마루에는 다섯 개의 이화문장이 새겨져 있다. 1405(태종 5)에 건립되어 세종 원년에 고쳐 지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광해군 원년에 재건되어 황폐화된 경복궁의 근정전을 대신해 이곳에서 국가적인 대례를 행하는 장소가 되었다.

 

궐내각사- 현재 창덕궁의 궐내각사는 인정전의 서편쪽 궐내각사만 복원되있는 형편이나, 원래는 선정전의 앞뜰에도 승정원, 사간원, 선전관청, 사옹원, 대전장방 등 빽빽한 건물군으로 궐내각사가 유지되었다. 비록 복원된 것이라고는 하나 창덕궁의 궐내각사는 한국 5대궁 중에서 특히나 궁이 과거 중앙국가행정의 중심이자 치소(治所)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곳으로써 가치가 높고, 왕족과 귀족의 거처에 불과한 서양의 궁/궁전들과의 차이점을 보여주는 곳이다.

 

창덕궁의 주요 궐내각사-(링크)

이문원(摛文院) 검서청(檢書廳) 봉모당(奉謨堂) 책고(冊庫)

예문관(藝文館)  홍문관(弘文館) 내의원(內醫院) 억석루(憶昔樓)

 

참고 궐외각사- 대궐밖에 있었던 관청으로 광화문 앞 세종로에 있던 육조나, 궁 밖에 있는 내수사, 비변사 등은 궐외각사라 하였다.

 

희정당(熙政堂)-창덕궁의 편전으로 외양은 한식건물에 서양식 실내장식을 하고 있다. 남행각 현관의 경우 서구식 현관에 일본식이 가미되었고, 희정당도 왜곡과 변질이 가해졌다. 내부는 쪽마루에 카펫이 깔리고 창문에는 유리가 끼워졌으며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설치되는 등 전형적인 서양식 실내 장식을 하고 있는 데다가 외관의 남행각에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현관이 설치되었다. 해방 후인 1985년에 보물 제815호로 지정되었다.

 

대조전(大造殿)-왕비의 침전으로 용마루가 없다.

 

성정각(誠正閣)-창덕궁 동궁에 속한 전각으로 학문을 대하는 정성과 올바른 마음가짐을 뜻하는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이라는 말에서 따왔으며 현판의 필체는 정조의 어필이라고 전해진다. 성정각은 본래 왕세자가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었다.

   

선원전(璿源殿)- 이곳에는 태조·세조·원종·숙종·영조·정조·순조·문조·헌종·철종·고종·순종의 어진을 모시고 있다가 일제강점기인 1921년 창덕궁 후원 서북쪽에 선원전을 새로 지어 어진을 옮긴 뒤부터 구 선원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신 선원전- 창덕궁 신 신원전에 속하는 정면 14, 측면 4칸의 규모를 한 전각 중 하나로 본래 명나라 태조(太祖신종(神宗의종(毅宗)을 제사지낸 사당이었던 대보단(大報壇)과 북일영(北一營) 등이 위치하고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212곳을 헐어내 새로 선원전을 세워 역대 임금들의 어진을 모셨다. 하지만 19506.25 전쟁 때 부산으로 소개했던 어진들이 대부분 불에 타는 사고를 겪어 전각 안은 비어 있다. 현재는 일반에 개방된 곳이 아니다.

 

창덕궁 낙선재            내용 및 링크  출처1: 창덕궁/건축물 - 나무위키 (namu.wiki)

                                             출처2: 창덕궁낙선재(昌德宮樂善齋)-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낙선재

낙선재(樂善齋): 출처:창덕궁/건축물 - 나무위키 (namu.wiki)

창덕궁 낙선재 권역을 대표하는 전각으로 사랑채의 역할을 한다. 정면 6, 측면 2칸의 단층 팔작기와지붕이며 1846(헌종 12)에 단청없는 사대부가(士大夫家) 양식으로 세워졌다. 본래 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가 거주할 전각을 만들면서 헌종 본인도 같이 기거할 사랑채격으로 지은 곳으로 헌종이 추사 김정희를 접견하는 장소로 자주 사용하는 등, 헌종의 문예생활이 주로 이곳에서 이뤄졌다.

 

순종 사후(死後 죽은 후) 낙선재에 머물던 순정효황후를 위해 1930년대에 낙선재 서행랑(서쪽 행랑)을 허물고 신관을 신축했으며, 해방 후 대한제국 황실 가족이 거주한 장소이다. 1963 11 22일 일본에서 돌아온 영친왕이 1970 5 1, 이방자 여사가 1989 4 30일에 숨을 거둔 곳이기도 하다. 이방자 사후(死後 죽은 후)  1990년대에 신관을 철거하고 원래의 서쪽 행랑을 복원했다.

.낙선재 일원

이하 내용출처: 창덕궁낙선재(昌德宮樂善齋)-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847년(헌종 13)에 중건된 낙선재는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해 세워진 건물로 보물 제1764호이다. 그러나 고종 대에 들어와서 중희당과 가까운 낙선재를 종종 편전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생겼다. 특히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이후 고종은 낙선재를 집무실로 정하고 대신들과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였다. 그 후 조선왕조 마지막 영친왕 이은이 1963년부터 1970년까지 살았으며, 1966년부터 1989년까지는 이방자 여사가 기거하였다.

 

이 낙선재는 실내의 각종 창문과 창호의 모양과 무늬가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다른 곳에서 보기 드문 원형문(圓形門)이 있다. 낙선재의 후원에는 장대석으로 쌓은 화계(花階 꽃계단)가 있고 괴석 등을 전시하였다. 또 벽돌로 문양을 만들고 기와로 지붕을 얹은 아름다운 굴뚝이 있다. 화계 뒤로는 상량정(上凉亭)과 서고가 있고, 서쪽으로 소주합루와 만난다. 

 

D. 경운궁(慶運宮), 덕수궁(德壽宮)

참조 링크 1. 덕수궁 - 다음백과

참조 링크 2. 국가문화유산포탈 | 덕수궁 소개 (heritage.go.kr)

참조 링크 3. 덕수궁 관리소  www.deoksugung.go.kr/

 

덕수궁 일원

-이하 내용- 다음백과와 민족문화 백과사전에서 발췌함-

현재 덕수궁의 옛 이름인 경운궁은 처음 월산대군의 집터였던 것을 임진왜란 이후 선조의 임시거처로 사용되어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다가 광해군 때에 경운궁으로 개칭되었다.

 

고종은 1895년(고종 32)에 을미사변이후 세계 열강들 사이에서 보다 자주적인 입지를 확보하려는 계획을 도모하면서 경운궁(덕수궁)을 대대적으로 중건하였다. 1897년(광무 1)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부터 중화전을 비롯하여 정관헌, 돈덕전,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준명전, 흠문각, 함녕전, 석조전 등 많은 건물들을 지속적으로 세웠다.

 

1907년 고종은 결국 일본의 강압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났다. 고종에게 왕위를 물려받은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고종에게 장수를 비는 뜻으로 ‘德壽(덕수)’라는 궁호((宮號 궁이름)를 올린 것이 그대로 궁궐 이름 덕수궁(德壽宮)이 되었다.

 

한편 고종의 재위 말년의 약 10년간 정치적 혼란의 주무대가 되었던 덕수궁은 궁내에 서양식 건물(석조전 등)이 여럿 지어졌다. 덕수궁의 독특한 건물로 함녕전 뒤편에 있는 정관헌은 전통식 지붕 구조와 서양식 기둥 양식이 절충된 건물이다. 석조전은 내부와 외부가 모두 서양식으로 꾸며진 건물이다. 이처럼 덕수궁에 여러 서양식 건물이 남아 있는 것을 통해 고종이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점을 알 수 있다.

 

궁궐 안의 서양 건물, 석조전(石造殿) 참조링크: 석조전

.석조전

석조전은 경운궁(덕수궁) 안에 지어진 서양식 건물로 유럽의 궁정을 본 땄다. 황제가 일상생활을 하며 손님을 맞던 곳이었다. 화재 위험을 막기 위해 돌로 지었고 현관에는 대한 제국의 상징인 오얏꽃이 새겨져 있고 내부는 서양식 가구와 벽난로, 화려한 전등으로 장식했다.

 

1919년, 경운궁에 머물던 고종 황제가 세상을 뜨면서 석조전은 미술관으로 바뀌었다. 해방 이후 민주의원 의사당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린 장소이기도 하다. ​한국 전쟁 이후 국립박물관, 현대미술관, 문화재 관리국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쓰이다가 2014년 본래의 석조전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E. 경희궁(慶熙宮)   내용출처1: 경희궁 -위키백과

                          내용출처2: 경희궁 - 나무위키 (namu.wiki)

 

경희궁(慶熙宮)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 2가에 있는 조선 시대 궁궐로 광해군 9년(1617년)에 건립한 이후, 10대에 걸쳐 임금이 정사를 보았던 궁궐이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경복궁의 동쪽 궁궐인 창덕궁+창경궁을 지칭하는 '동궐'에 대비되는 경복궁의 서쪽 궁궐을 뜻하는 '서궐(西闕)'로 불렸다. 새문안 대궐, 새문동 대궐, 아주개 대궐이라고도 하였다. 조선 시대의 이궁(離宮)으로, 경운궁(덕수궁)과 홍교(虹橋 무지개다리 Arch)로 연결되어 있었다.

 

규모로 보자면 경복궁 크기의 2/3를 넘는 영역이 경희궁에 속하였고, 한양도성 서쪽 성벽 일부와 한양 서북부를 대부분 차지하던 거대한 궁궐이었다. 모두 98채의 건물이 들어섰던 경희궁은 경복궁, 창경궁과 함께 조선왕조의 3대궁으로 꼽힐 만큼 큰 궁궐이었으며 본래는 100여 동이 넘는 전각들이 있었다.

 

그러나 5대궁 가운데 가장 철저히 파괴된 궁으로서 흥선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에 의해 몇 채의 전각들을 제외하곤 전부 훼철됐고, 그나마 남아있던 부지 또한 일제강점기에 축소되어 현재 원 상태로 남아있는 건물은 정문이었던 흥화문과 정전이었던 숭정전, 그리고 후원의 정자였던 황학정까지 세 채에 불과하다.

 

[ 퀴즈-A ]

퀴즈1. 서울에 있는 조선 시대 5대 궁궐의 이름은?

퀴즈2. 조선 시대 임금이 가장 오랫동안 政事(정사)를 보았던 궁(宮)의 이름은?

퀴즈3.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했던 궁의 이름은?

퀴즈4. 명성왕후 시해 사건이 일어났던 궁(宮) 이름은?

퀴즈5. 고종이 아관파천 이후 환궁하여 마지막까지 살았던 궁(宮) 이름은?

퀴즈6. 조선왕조 마지막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여사가 기거한 장소로 실내의 각종 창문과 

         창호의 모양과 무늬가 매우 아름다운 이곳은 어디인가( 안에 있던 장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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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퀴즈-A 정답]

퀴즈1 답. 서울에 있는 조선 시대 5대 궁궐의 이름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경운궁), 경희궁.

퀴즈2. 답. 조선 시대 임금이 가장 오랫동안 政事(정사)를 보았던 궁(宮)의 이름은? 창덕궁

퀴즈3. 답.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했던 궁의 이름은? 창경궁

퀴즈4. 답. 명성왕후 시해 사건이 일어났던 궁(宮) 이름은? 경복궁

퀴즈5. 답. 고종이 아관파천 이후 환궁하여 마지막까지 살았던 궁(宮) 이름은? 덕수궁

퀴즈6. 답. 조선왕조 마지막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여사가 기거한 장소로 실내의 각종 창문과 

             창호의 모양과 무늬가 매우 아름다운 이곳은 어디인가( 안에 있던 장소명)?  낙선재

 

(계속)

 

서울(한양)  탐구01-서울의 명칭 유래와 간단 역사

 

서울의 명칭 유래      출처: <서울의 역사와 문화> 침조링크: http://history.seoul.go.kr

 

(노래: 서울의 찬가 -패티 김-) :추후 링크가 끊어지면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 나올 수도 있으며,
           아래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보이면 https://www.youtube.com/embed/XqaPNkNLu8A   <=요걸 클릭
       

 

서울의 어원          출처: 서울특별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서라벌(徐羅伐), 서벌, 서야벌, 서나벌이라 하였는데 훈민정음의 창제 후 "셔ᄫᅳᆯ"이라는 표기가 등장하였고 조선시대의 서울의 한자 음차 표기는 이십일도회고시, 한경지략, 증보문헌비고의 서울(徐菀), 동사강목, 북학의의 서울(徐蔚), 대동지지의 서울(徐鬱), 앙엽기에서 서올(徐兀)이 등장하였다.

 

"서울"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나,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수도를 뜻하는 신라 계통의 고유어인 서라벌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때 한자 가차 표기인 서라벌이 원래 어떤 의미였을지에 대해서도 여러 학설이 존재한다. 삼국사기 등에서 서라벌을 금성으로도 표기했다는 점과 신라까지 포함하여 "[: , ]-[: , ]", '새로운 땅'이라는 뜻으로 새기는 견해가 있다. 고대-중세 한국어에서 서라벌을 정확히 어떻게 발음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확인된 바가 없으며, 그 발음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훈민정음의 창제 후 "셔ᄫᅳᆯ"이라는 표기가 등장하고 나서부터이다.

 

서울의 한자 음차 표기로는 이십일도회고시, 한경지략, 증보문헌비고의 서울(徐菀), 동사강목, 북학의의 서울(徐蔚), 대동지지의 서울(徐鬱), 앙엽기의 서올(徐兀) 등이 있다. 이처럼 조선 시대에 서울은 한양, 한성(漢城) 외에도 서울(셔ᄫᅳᆯ), 경도(京都), 경부(京府), 경사(京師), 경성(京城), 경조(京兆) 등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김정호의 수선전도에서 알 수 있듯 수선(首善)으로 표기된 예도 있다. 이 중 한양과 한성을 제외하면 모두 수도를 뜻하는 일반명사들로서 '서울'이 원래는 서울 지역(사대문 안과 성저십리)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 수도를 뜻하는 일반명사였다는 방증이다. 국어사전에서는 일반명사 '서울''한 나라의 중앙 정부가 있고, 경제, 문화, 정치 등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도시'라고 정의하고 있다. 1910101일에 일제가 한성부를 경성부로 개칭하면서 일제강점기에 서울은 주로 경성으로 불렸으며, 1945년 광복 후에는 '경성'이란 말은 도태되고 거의 '서울'로 부르게 되었다.

 

서울특별시- 개정 로마자 표기: Seoul Teukbyeolsi 공식 표기: Seoul Special City

서울의 로마자 표기 'Seoul'19세기 프랑스 선교사들이 서울을 쎄-(Sé-oul)로 표기한 데서 비롯되었다. 오늘날 프랑스에서는 서울을 'Séoul'로 표기하고, 스페인어권에서는 'Seúl'로 쓰나 모두 '쎄울'로 읽는다. , 영미권에서는 일반적으로 'Seoul'로 쓰고 영혼을 뜻하는 단어 'Soul'와 같은 '쏘울'로 읽는다. 서울시에서는 이러한 점을 착안하여 20061113일 서울시의 서브슬로건(Sub slogan)Soul of Asia로 지정하였다.

 

서울의 명칭 유래

아래 내용은 <서울의 역사와 문화>(참조 링크: http://history.seoul.go.kr)에서 요약 추출한 내용이다.

서울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삼국시대 신라 때로 보고 있다. 삼국사기삼국유사의 신라 혁거세왕에 대한 내용을 보면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 사라(斯羅), 사로(斯盧)라고 했고, 이후 이것이 도읍의 명칭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름들은 수도()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고, 그것이 오늘날의 서울이라는 말로 변하게 되었다.

 

삼국시대 서울은 백제 온조왕 때(기원전 18)부터 제21대 개로왕 때(475)까지 약 500년 동안 백제의 수도였다. 오늘날 송파구에 남아있는 풍납토성이 당시의 왕성이었고, 위례성, 혹은 한성으로 불리었다. 그러다가 신라가 진흥왕 때에 한강 유역을 장악하면서 신주(新州)를 설치하였고(552), 선덕왕 때에는 서울 지역을 한산주(漢山州)로 개칭(637),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전국을 9주로 나누게 되면서 경덕왕 때에 한산주를 한주(漢州)로 고치게 된다(757).

 

고려시대에 들어오면서 서울 지역은 초기에는 양주(楊州)로 불렸다. 그 후 문종 때에 남경(南京)으로 승격되었다가(1067), 원간섭기인 충렬왕 때에 중앙과 지방 조직을 개편하면서 한양부(漢陽府)로 바뀌게 되었다(1308).

 

이후 조선이 건국되면서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게 되었고(1394),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의 수도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아울러 조선시대 정식 명칭은 한성부(漢城府)였다. 이외에도 당시 만들어진 고지도나 문집 등에는 한양, 경도, 경성 등으로 표기되기도 했다.

 

한편 일제강점기에는 한성부를 경성부로 개칭하고 경기도에 예속된 하위 관청으로 격하시켰다. 그리고 대외적인 정식 명칭은 일본어 발음인 게이조라고 불렀다. 물론 경성이라는 단어는 원래 삼국시대부터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널리 쓰였던 것이었으나 이 시기 이후부터 경성이라는 단어는 역사적 혹은 문화적으로 일제강점과 관련된 단어로 변하게 되었다.

 

해방 직후 서울은 서울, 경성, 한성 등 혼재된 이름을 사용했다. 심지어 미군정 표기와 서울시 자체 표기가 다를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1년 후인 1946815일자로 서울특별자유시로 이름이 바뀌었고, 경기도와 대등한 관계의 행정기관이 된다. 그러다가 정부수립 이후인 194911월 지방자치법이 공포되면서 서울특별시로 정해져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고려 왕조 말 평양에서 서울로의 한양 천도(遷都 서울을 옮기는 것)계획이 있었다.

출처1: 태고_보우와_한양천도(황인규)

https://history.seoul.go.kr/nuri/bbs/bbs.php?sub_type=view&b_idx=650&pidx=149259269293&didx=125&bs_idx=125&s_where=&s_text=&search_status=&s_cate=&s_recom=&s_year=&s_month=&s_day=&page_num=2

출처2:

https://history.seoul.go.kr/nuri/bbs/bbs.php?sub_type=view&b_idx=653&pidx=149259269293&didx=125&bs_idx=125&s_where=&s_text=&search_status=all&s_cate=&s_recom=&s_year=&s_month=&s_day=&page_num=1

 

고려 왕조 말 공민왕대 승려 太古 普愚(보우)도 한양 천도(遷都 서울을 옮기는 것)를 주장한 바 있다. 한양 천도를 결정할 때 중요한 고려 요소는 풍수지리와 도참설이다. 보우의 남경(한양)천도 주장은 고려초 이래 불교계의 國家裨補思想(국가비보사상)의 흐름속에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공양왕은 29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 짧은 기간 동안 한양에 있었다. 그러나 보우는 신돈이 집권한 1365년 이후 불교계에 이렇다고 할 시책을 펴지 못하다가 이어 보우가 지방으로 축출되면서 한양 천도는 무산되고 말았다.

 

공양왕은 이성계를 비롯한 공신들의 추대에 의해 국왕이 되었다. 공양왕의 한양 천도는 공민왕 5(1356)의 반원 운동과 달리, 왜구에 대한 정치세력 간의 갈등에서 일어난 일시적 遷都(천도) 巡駐(순주=왕이 3(개경·평양·한양)을 돌아가면서 머무는 것)라고 보거나, 왕권을 지키려는 공양왕 세력과 이성계 세력 간의 갈등과정으로 보는 시각이다,

 

공민왕의 한양 천도 노력은 궁궐 축조까지 시작되었음에도 좌절되었다. 이후 우왕 역시 한양 천도를 결정하고, 이곳에서 몇 달간 머물렀다. 공양왕의 한양 천도는 이후 조선왕조 개창 이후 새로운 수도로 선정하는 기준이 되었다.

 

조선이 개국하며 한양(서울)이 수도로 결정되었다출처: <서울의 역사와 문화> 참조 링크: http://history.seoul.go.kr 

아래 내용은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참조한 것으로 요약 편집하였다.

 

14세기 말 15세기 초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재편되는 가운데, 한반도에서도 새로운 나라가 등장했다. 500년 가까이 이어져 온 고려 왕조가 무너지고 조선이 세워진 것이다. 1392년 태조 이성계는 유교사회를 지향하는 조선을 창건하고, 그로부터 2년 뒤(13941028) 새 나라의 수도를 서울(당시 한양)로 옮겼다.

 

조선이 개국되고 정도전과 無學大師(무학대사)의 의견을 수렴하여 한양을 도읍지로 정했다. 한양(서울)의 인문지리적 측면, 경제·군사적 이점, 효율적인 국토 이용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였다. 이때부터 서울은 단순히 국토의 중앙이 아니라 조선 역사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한양(서울)의 풍수와 궁궐 입지

조선시대 서울은 진산인 삼각산(오늘날의 북한산)에서 이어지는 산세를 따라 白岳(백악-북쪽), 仁王(인왕-서쪽), 駱山(낙산-동쪽), 木覓(목멱-남쪽) 이렇게 4개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仁王山(인왕-서쪽)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청계천에 모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남쪽으로 굽이쳐 한강에 합류한다. 산과 물이 조화를 이룬 자연 형세를 배경으로 성곽과와 성문이 자리 잡고, 그 안에 궁궐, 종묘와 사직, 관아와 시전 등의 시설물이 입지했다.

창덕궁과 창경궁의 인정문.        사진 출처 : < 서울의 역사와 문화 >

1395년 경복궁과 종묘·사직단의 완공을 시작으로 1405년 창덕궁이 낙성되었으며, 의정부와 육조, 사헌부·사간원 등의 통치 기구가 오늘날 광화문 앞 세종로 일대에 자리했다.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 중등 교육기관인 4부 학당도 四大門(사대문) 안에 건립했다. 이로써 서울은 조선 정치·행정의 중심지 모습을 구축해 나갔다.

 

한강은 전국에서 거둔 세금을 서울로 운송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변방의 급한 소식은 봉수를 통해 중앙으로 보고되었다.

 

한편 16세기 말 17세기 초 동아시아 국제 정세 속에서 조선은 1592년 임진왜란과 1636년 병자호란 등의 전쟁을 겪게 된다. 이러한 전쟁 경험은 조선 사회를 비롯해 서울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조선의 국왕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을 정비하는 한편, 한양도성의 무너진 부분을 수축하고 북한산성을 축조하는 등 수도의 방위 체계를 수립해 나갔다.

 

한양(서울)은 정치·행정,상업의 중심지

이후 서울은 정치·행정의 중심지일 뿐 아니라, 상업 중심의 도시적인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인구가 증가하고 신분별로 지역별 주거지 특징이 나타나기도 했다. 청계천 북쪽 일대인 북촌은 종로구 가회동 일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주로 양반 관료들이 모여 살았고, 청계천 이남 지역인 남촌은 중구 필동을 중심으로 가난한 선비들과 서민들이 모여 살았다.

 

종로 일대에 형성된 市廛(시전=상설점포)은 도성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상업지역이 종로 중심인 시전에서 벗어나 청계천변 일대, 동대문 이현과 남대문 칠패시장까지 확대된다. 여기에 한강의 용산·마포·서강·송파 등 포구를 중심으로 한 京江商人(경강상인- 참조 링크:경강상인)들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새로운 학문과 (서양)종교 천주교의 도래

이러한 사회변화는 서울의 학문과 문화의 변화를 동반했다. 새롭고 실용적인 학문을 추구하는 실학이 일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했고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북학파도 출현했다. 실학의 대두와 함께 서양의 과학기술이 조선에 들어왔고 천주교 사상이 함께 전파되기도 했다. 초기 천주교는 학문적 차원에서 연구되다가 차츰 신앙으로 발전했으나 성리학적 세계관을 부정하는 교리 때문에 박해를 받았고 현재 양화대교 옆 잠두봉(참조: 절두산 성지)에서 많은 천주교 신자가 처형되었다.

 

진경산수화와 풍속화에는 한양의 모습이 담겨있어

18세기 서울 일대를 진경산수화풍으로 묘사한 정선은 관념적이고 명분론적인 사고를 대신해 현실에 대한 자각과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서울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와 함께 서민들의 생활풍속이나 여항의 모습을 담은 풍속화는 조선 후기 도시 문화를 생생하게 전달해 준다. 특히 이 시기에는 여항인들이 서울의 문학과 예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이는 조선 후기 서울의 또 다른 특징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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