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왕 루트비히 2세가 지은 성으로는 ‘백조의 城(노이슈반슈타인城)’ 외에도 ‘린더호프城’과 ‘헤렌킴제城’이 있다.
알펜가도에 있는 작은 마을 오버암머가우(Oberammergau)를 지나 린더호프성을 찾았다. 오버암머가우는 10년마다 공연되는 '예수 수난극' 마을로 유명하다. 린더호프성은 1874년 바이에른(Bayern) 왕국의 루트비히 2세가 베르사이유 궁을 본떠 만든 성으로 루트비히 2세가 생전에 완성한(1878년) 유일한 성이다. 로코코 양식의 장식과 상아로 만든 샹들리에가 있는 거울의 방은 화려하기가 그지없다. 성 주변에 조성된 넓은 정원과 인공폭포, 황금 조각상이 있는 분수와 바그너 오페라를 감상하기 위해 만든 비너스의 동굴 등 볼거리가 많다. 성 내부는 가이드 투어(독일어 또는 영어)이지만, 국내 유명 여행사인 H여행사에서 만들어 비치해둔 한글 안내서가 있으므로 창구에서 미리 신청하면 이를 얻어 볼 수 있다.
배경 영상,음악) 차이콥스키-백조의 호수 모음곡 작품번호 20a - 1번. 정경 추후 링크가 끊어지면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 나올 수도 있으며, 아래 음악이나 동영상 보려면 ▷클릭, 멈추려면 stop □ 버튼 클릭. 아래 음악이나 동영상이 안보이면https://www.youtube.com/embed/KM35-1AHkoM<=요걸 클릭
지난 2월 구정(설)을 앞두고 남부 독일을 자동차로 둘러보았다. 한국에서 남부 독일을 여행하려면 뮌헨 공항이나 프랑크푸르트 공항으로 들어가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구정 대목이라 비행기 표가 잘 없었다. 우리들의 일정과 잘 맞고 가격도 적당한 표를 찾다보니 스위스 취리히 왕복편이 있어 취리히로 들어갔다. 대한항공의 취리히行은 오스트리아 빈(wien)에 내렸다가(transit 약 2시간 반 경유) 취리히로 가는 것이었는데, 귀국 편은 빈 경유를 않고 취리히에서 인천으로 직행하였다.
아래 내용은 개인적인 자료 정리를 위해 이번 여행 지역 관련 명소나 관련 지식을 인터넷으로 모은 내용이며, 필요시 직접 찍은 사진과 간략한 소감을 덧붙였다.
Zurich(취리히) 북쪽 보덴호(湖) 부근 라인강 상류의 마을 슈타인 암 라인(Stein am Rhein 라인강의 보석)은 작고 깔끔한 도시이다. 크기가 작은 마을인데 중심지인 시청사 광장에 있는 건물 외벽은 벽화로 장식되어 동화 마을에 온 듯했다. 벽 화 중 오래된 것은 1520년에 그려진 것도 있었고, 자갈 박힌 조용한 마을길에 마차가 달그락 거리며 지나가면 중세 도시 의 느낌이 들었다.
중부 유럽에서 가장 큰 폭포 라인폭포(Rhein Fall)
스위스 취리히에서 독일 퓌센 쪽으로 이동하는 도중 라인 폭포와 상트 갈렌에 들렀다. 스위스 라인 폭포는 독일과 가까운 스위스 국경도시 샤프하우젠(Schaffhausen)에 있는 라인강 상류에 있는 폭포이다. 라인 폭포는 라인강의 유일한 폭포이며 중부 유럽에서 가장 웅장하고 큰 규모의 폭포이다.
스위스 취리히에서 독일 퓌센 쪽으로 이동하는 도중 라인 폭포와 상트 갈렌에 들렀다. 스위스 라인 폭포는 독일과 가까운 스위스 국경도시 샤프하우젠(Schaffhausen)에 있는 라인강 상류에 있는 폭포이다. 라인 폭포는 라인강의 유일한 폭포이며 중부 유럽에서 가장 웅장하고 큰 규모의 폭포이다.
영어로는 Rhine, 네덜란드어로는 Rijn, 프랑스어로는 Rhin, 독일어로는 Rhein으로 쓴다. 강의 길이가 약 1,320km로 스위스의 알프스 산지에서 발원하여 보덴호로 흘러든 다음, 스위스 바젤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독일(서쪽,북쪽), 네덜란드를 지나 북해로 흘러든다. 본류(本流)는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오스트리아,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여러 나라를 거치며, 운하에 의해서 지중해, 흑해, 발트해 등과 연결된다. 그 중 독일을 흐르는 부분이 가장 길어 라인강(Rhein)을 대표적 이름으로 쓰고 있다.
스위스 북동부의 알프스 산맥 입구 독일 국경 근처에 있는 상트 갈렌은 취리히에서 차로 1 시간 거리(85km)에 있는 역사 깊은 도시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상트 갈렌 수도원 도서관이 있다. 씨레나포티크(Seelenapotheke 그리스어:'ΨΥΧΗΣ ΙΑΤΡΕΙΟΝ 영혼을 치유하는 곳') 라 불리는 상트 갈렌 수도원 도서관(Stiftsbezirk St. Gallen 링크:Stiftsbibliothek St. Gallen ? Wikipedia)은 1758~1767년 피터 춤에 의해 건축된 로코코 스타일의 건물이다.
도서관 바닥은 물론 책장과 선반 등이 목제로 되어 있고, 바닥 보호를 위해 덧신을 신어야 했다. 천정, 벽면은 석회(STUCCO)로 마감되었는데 특히 천정화가 유명하다.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상트 갈렌 수도원 도서관은 생각보다 규모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았으나 , 다른 유적지에 비해 입장료가 비싼 편이었다.
참고로 이 도서관은 스위스 패스 소지자는 입장료가 무료이며, 11월 하순~12 월 중순 3주간 휴무한다
.
상트 갈렌 수도원 도서관에는 8세기에서 15세기까지의 문서 등을 포함하여 13만권의 서적이 보관되어 있는데, 2,700년 된 이집트 의 미라 쉐피니스(Shepenese)와 830년에 제작된 갈렌 수도원의 설계도, 성경 필사본, 베네딕트 수도회 규칙, 그레고리안 성가 악보, 궁정 서사시(敍事詩), 중세 아일랜드어 원고, 가장 오래된 독일어 도서 등 귀중한 문서들이 보관, 전시되어 있다. 인쇄술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전이라 도서(책)들은 양피지(羊皮紙)에 쓰인 필사본이 대부분이었는데, 손으로 정성스레 쓰인 필사본에는 수도사들의 땀 냄새가 느껴지는 듯하였다.
당시 일반 사람들은 글자를 잘 몰랐겠지만 성직자들이나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글자(라틴어나, 희랍어(그리스어)를 알았을 것이며 이들이 성경이나 여러 정보(지식)들을 전파하였을 것이다. 수도사들은 왕이나 왕자, 제후들을 교육하는 ‘선생님’이었으며, 수도원은 오늘날의 ‘학교’ 역할을 하였다. 수도원은 정보가 모이고 전달되고 창출되는 곳이었고 학예, 문화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실험과학을 지지한 중세의 대표적 인물인 베이컨(Roger Bacon)이 수도사였고, 멘델의 유전 법칙을 발견한 멘델도 수도사였다. 참고 링크:그리스도교 (17) 수도원 운동(2) 탁발수도사, 도미닉수도원, 프란체스코...
상트 갈렌(St.Gallen)에서는 수도원 도서관과 바로크식 대성당도 보아야 하지만, 독특한 모양의 창문인 퇴창(退窓-벽 밖으로 쑥 튀어 나오게 만든 창문)을 봐야 한다. 이 도시에서는 1650년에서 1720년 사이에 퇴창 만 들기 붐이 있었다. 낙타 퇴창, 펠리컨 퇴창, 백조 퇴창 등 총 111개의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퇴창(退窓)이 보존되고 있다.
독일 남부 지방을 여행한다는 것은 바이에른 주(州)를 여행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일 남부에 위치한 바이에른 州는 독일 연방 16개 주 중 면적이 최대(독일 면적의 1/5 정도) 이며, 인구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다음으로 많다. 스위스·오스트리아·체코와 국경을 접하는 바이에른 주는 뮌헨이 주도이며, 도나우강 상류가 통과하고 알프스 산맥 쪽으로 독일에서 가장 높은 추크슈피체산이 있다. 바이에른 주 깃발(州旗)은 흰색과 하늘색의 교차 무늬가 있는 데, 독일의 명차 BMW의 로고도 이 바이에른 주의 깃발을 모티브로 하여 만들었다 한다.
기원전에 게르만족 부족 바바리족(Bavarii)이 들어와서 지명의 기원이 되었는데 788년 프랑크 왕국에 점령되었고 1180년 비텔스바흐 왕조가 시작되었다. 1255년부터는 각 제후들이 할거하다가, 1505년에 재통일되어 選諸侯國(선제후국)이 되었다. 이후 바이에른은 종교개혁에 반대하고, 반종교개혁 운동의 선봉에 서서 가톨릭 세력이 강하게 남게 되었다. 1618년 30년 전쟁 때 막시밀리안 1세는 합스부르크 편에 서서 싸워 영토를 넓히고 1623년 그는 선제후(選諸侯)가 되었다.
참고: 選諸侯(선제후 독:Kurfurst 영:Elector)는 중세 신성로마 황제(대독일제국왕) 선출에 참여할 권리를 지닌 신성로마제국의 일곱 제후들을 말한다. 13세기 중기부터 황제의 선거권은 교회 제후 3인(마인츠, 쾰른, 트리어 3대 대주교)과 세속 제후 4인(라인궁중백, 작센공,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보헤미아왕)에 한정되어 왔다. 1356년에 신성로마 황제 카를 4세(재위 1347-1378)는 뉘른베르크 및 메츠의 제국의회에서 발포한 제국법인 금인칙서(金印勅書 Golden Bull)를 통해 교황이 독일 정치문제에 간섭하는 것을 막고 다수결의 원리에 입각한 선제후( 選諸侯) 제도를 확립했다.
이후 바이에른은 18세기에 오스트리아·스페인의 왕위계승 전쟁에 휘말리는 수모를 받다가 1777년 팔츠의 카를 테오도어가 바이에른의 군주가 되면서 팔츠와 바이에른은 통합되었다. 18세기~19세기 초 여러 전쟁에 휘말렸는데 프랑스 편에 가담해 영토를 확장했으나,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편에 가담했다 패배하였고,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는 프로이센에 가담하여 승리하였다. 1871년 1월에 독일제국에 가맹하였고, 독일제국 아래에서 바이에른 왕국은 다른 구성국에 비해 큰 자치권을 보유하였다.
독일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고 1918년 11월 7일 군주 루트비히 3세가 퇴위당하면서 공산 주의자 쿠르트 아이스너가 새 공화국을 선포하고 총리로 취임하였으나 1919년 암살되었다. 바이에른은 그 해 8월 바이마르 공화국의 한 주로 편입되어 공산주의 정부는 단명으로 끝나게 되었다. 이후 아돌프 히틀러가 이곳을 연고로 활동했고, 1933년 나치스는 독일의 정권을 잡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하자 바이에른은 미국의 점령 하에 놓였고, 지리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라인강 유역의 팔츠 지역은 바이에른에서 떨어져 프랑스 점령 하에 놓였다. 1949년 성립된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을 구성하는 한 州가 되어 현재의 바이에른 州가 되었다.
독일 바이에른 지방의 성(城)과 궁전, 박물관을 둘러볼 때는 통합 입장권인 바바리안 팔라스 티켓(참조 링크: (http://www.schloesser.bayern.de/englisch/palace/index.htm)을구매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뮌헨의 레지덴츠 궁전, 님펜부르크 궁전, 린더호프성, 노인슈반슈타인성, 뷔르츠부르크 레지덴츠궁전, 밤베르크 노이제 레지덴츠 등 바이에른 주의 주요 성(城)과 궁전을 구경할 수 있다. 참고로 독일의 고성(古城) 투어 시에는 시간별로 정해진 가이드 안내로 구경해야 하는데 영어나 독일어로 안내해 준다. 하지만 사람이 덜 찾는 고성이나 비수기에는 영어 가이드 투어가 없는 경우도 있다.
독일에는 괴테 街道(Goette Strasse), 로만틱 街道 (Romantische Strasse), 환상 街道(Fantastische Strasse), 동화(童話) 街道(메르헨 街道 Marchen Strasse), 고성(古城) 街道(Burgen Strasse), 에리카 街道(Erika Strasse), 알펜 街道(Alpen Strasse) 등 아름다운 길이 유명한데 이들은 각각 다른 매력을 가진 독일 최고의 여행 루트이다.(참고: Strasse는 원래 독일어로 Straße(길,거리 街)인데 표기 편의상 Strasse로 사용함)
독일에는 80여개의 관광가도가 있는데, 그 중 위에서 말한 7개의 도로가 독일 관광국에서 추천하는 자동차 관광루트이다.
그런데 이런 관광가도를 자동차로 가다 보면 속도 제한이 없다고 알려진 아우토반(Autobahn)을 달리게 되는데 실제 아우토반에는 속도 제한이 있는 곳도 있다. 독일의 고속도로(아우토반)에서 다른 차의 속도에 맞춰 달리다 보면 시속 130km은 보통이고 나도 모르는 사이 160km 이상으로 달리게 된다. 한편 상당히 먼 뒤쪽에 있다고 생각했던 차가 눈 깜짝할 사이에 나를 추월하면 가슴이 철렁하게 된다. 아주 빠른 속력으로 추월하기(지나가기) 때문에 국내의 고속도로에서의 주행(추월) 감각과는 큰 차이가 있어 주의를 해야 한다.
한편 일반 국도에서도 그렇지만 독일인들은 자동차의 운전 예절을 잘 지킨다. 아우토반에서도 추월차선은 말 그대로 추월할 때만 사용하고 추월이 끝났으면 주행차선으로 복귀한다. 추월 차선을 유지하며 장시간(수 분 이상) 계속 운행하는 차는 볼 수 없다.
우리의 남부 독일 여행 일정은 주로 바이에른 지방을 둘러보는 것.
우리의 남독일 일정은 주로 남부 독일을 돌아보는 것이었는데, 취리히에서 퓌센(Fussen)을 거쳐 알펜가도, 로만틱가도, 고성가도, 환상가도를 거쳐 프랑스의 동쪽 끝 알자스(Alsace) 지방의 꼴마흐(Colmar)를 경유 취리히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
이번 나의 남부 독일 루트: (스)취리히-상트갈렌-(독)퓌센-추 크슈피체山-뮌헨-아우구스부르크-울름-뉘른베르크-밤베르크-바이로이트-뷔르츠부르크-로텐부르크-하이델베르크-슈투트가르트-튀빙겐-Hohenzollern城-프라이부르크-(프)스트라스부르-(프)꼴마흐-(스)바젤-루체른-취리히
스위스의 상트 갈렌에서 알펜가도(Alpenstrasse)를 따라 린다우를 거쳐 퓌센(Fussen)으로 갔다. 퓌센(Fussen)은 뷔르츠부르크에서 시작된 로만틱가도의 종착지이다.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독일 남부 지방 퓌센(Fussen)을 찾는 것은 ‘백조의 성’을 구경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퓌센(Fussen)의 대표 명승지 노인슈반스타인城(Neuschwanstein Schloss)은 새로운(Neu) 백조(schwan) 石 (stein) 城(Schloss) 즉 ‘신백조석성(新白鳥石城)’이란 뜻이다.(참고: 독일어 Schloß가 城인데 표기 편의상 Schloss로 사용함).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중 백조의 전설 에서 모티브를 얻어 지었다는 노이슈반슈타인 성 내부에는 ‘백조의 성’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천정, 벽화뿐만 아니라 의자 등받이, 손잡이, 탁자 받침, 문고리, 기둥 장식 등이 온통 백조 그림이나 문양, 조각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이 성은 루트비히 2세가 지은 것으로 1892년 완성되었다고 백과사전에 적혀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가 죽은 다음 이 성이 완성되었는데, 그의 죽음과 관련하여 슬프면서도 미스터리(Mystery)한 사연이 있다.
바이에른의 왕 루트비히 2세는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 바그너가 게르만 민족의 신화를 토대로 한 오페라 작품들을 쓰자 루트비히도 게르만 민족의 신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루트비히 2세는 1862년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후 그의 아버지가 쓰던 호엔슈방가우 성이 게르만 민족의 신화를 모두 담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노이슈반슈타인 성 외에도 다른 여러 곳에 건축물을 지었는데, 결국 국고를 낭비하고 수많은 빚을 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1886년 루트비히 2세는 의료진으로부터 정신병자 판정을 받게 되었고, 왕위에서 퇴위당한 지 3일 만에 슈타른베르거 호수에 빠져 익사했다. 그의 사인은 자살로 공식 발표되었으나 실제로는 타살되지 않았나 하는 의문점이 있다 한다. (내용 출처-한국어 위키백과)
루트비히 2세의 환상적인 꿈이 담긴 이 ‘백조의 성’은 주변 경관 또한 인상적이어서 많은 사람들을 이곳으로 불러 모으고 있는데, 미국 월트디즈니사의 디즈니랜드城은 이 ‘백조의 성’을 본떠 만들었다 한다.
겨울에 본 백조의 성은 주위가 온통 눈으로 덮여 있어 차분한 분위기였다. 숲길을 지나는 데 나무에 쌓였던 눈이 후드득 떨어졌다. 동화 속의 한 장면인양 운치 있고 아름다웠다. ‘백조의 성’ 주변은 눈에 덮인 검은 숲(슈바르츠발트 Schwarzwald)이었는데, 성 건너편 언덕에는 눈 덮인 설원에 스키어들이 겨울을 만끽하고 있었다.
41. 시말서(始末書,しまつよ) -> 경위서 42. 식상(食傷,しよくよう) -> 싫증남, 물림 43. 십팔번(十八番,じゆうはちばん) -> 장기, 애창곡(일본 가부끼 문화의 18번째) 44. 애매(曖昧,あいまい) -> 모호(더구나 "애매모호"라는 말은 역전앞과 같은 중복된 말이다) 45. 역할(役割,やくわり) -> 소임, 구실, 할 일
46. 오지(奧地,おくち) -> 두메, 산골 47. 육교(陸橋,りつきよう) -> 구름다리(얼마나 아름다운 낱말인가?) 48. 이서(裏書,うらがき) -> 뒷보증, 배서 49. 이조(李朝,りちよう) -> 조선(일본이 한국을 멸시하는 의미로 이씨(李氏)의 조선(朝鮮)이라는 뜻의 '이조'라는 말을 쓰도록 함.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를 일본제국이 '민비'로 부른 것과 같은 맥락이다.) 50. 인상(引上,ひきあげ) -> 올림
51. 입구(入口,いりぐち) -> 들머리("들어가는 구멍"이라는 표현은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다. 오히려 "들어가는 머리"라는 말은 얼마나 정겨운가?) 52. 입장(立場,たちば) -> 처지, 태도, 조건 53. 잔고(殘高,ざんだか) -> 나머지, 잔액 54. 전향적(前向き的,まえむきてき) -> 적극적, 발전적, 진취적 55. 절취선(切取線,きりとりせん) -> 자르는 선
56. 조견표(早見表,はやみひよう) -> 보기표, 환산표 57. 지분(持分,もちふん) -> 몫 58. 차출(差出,さしだし) -> 뽑아냄 59. 천정(天井,てんじょう) -> 천장(天障) : 하늘의 우물이라고 보는 것은 일본인이고,
우리나라는 하늘을 가로막는 것이란 개념을 가지고 있다. 60. 체념(諦念,てりねん) -> 단념, 포기
귀족 작위(爵位:귀족의 지위(地位)나 계급(階級))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우선 근본이 되는 봉건제에 대해 간단히 알아 보자. 물론 여기서 말하는 봉건제는 유럽의 Feudalism(봉건제 封建制)을 말하는 것이다. 개념적으로 말하자면, 봉건제도는 은대지 제도(恩貸地 beneficium)와 종사 제도(從士制 comnitatus)의 결합품이다.
은대지 제도(恩貸地制 beneficium)란 중세 전기 유럽에서, 봉건 군주가 가신(家臣)에게 은대지를 주는 대가로 군역 따위의 봉사 의무를 요구한 제도이다. 종사 제도(從士制)는 주군에게 충성을 다하고, 주군은 종사에게 무기ㆍ식량 따위를 주는 주종(主從) 관계 제도이다.
중세 초기의 혼란했던 시대에 프랑크 제국이 건설되고 나서 왕은 봉신(封臣)들에게 병역 의무의 대가로 토지의 용익권(用益權-일종의 사용권)을 주었다. 봉신들은 토지에서 나오게 되는 재산으로 자신과 병사들을 무장시키고 왕이 소집할 경우 전쟁에 나갔다. 하지만 여전히 이 토지는 왕의 것이었고,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토지는 봉신의 죽음과 함께 다시 왕에게로 귀속되었다.
하지만, 관습적으로 이러한 토지는 군사적으로 복무할 적당한 후계자가 있다면 충성 서약을 통해 상속되기도 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토지의 용익권을 부여하는 은대지의 개념에서 상속이 허가되는(죽을 때까지 평생 보장되는) 종신은대지(終身恩貸地), 즉 봉토(封土 feodum)로서 하사되기도 하였다.
원칙적으로는 왕은 봉토를 몰수하거나 상속을 거부할 권리가 있지만, 시대가 흘러가면서 점차 토지와 작위(爵位 귀족의 지위)는 계승되는 것이 일반화 되었으며, 왕이 함부로 작위를 박탈하거나 상속을 거부할 수 없는 권리로 여겨지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귀족들은 결혼관계를 통해 횡적으로 결속되어 있었기에 왕이 뚜렷한 이유 없이 봉토를 몰수한다면, 다수 귀족들의 반발과 사회적 공감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작위의 상속은 일반적으로 가문의 힘이 흩어지지 않게 장자(長子 큰 아들) 상속을 원칙적으로 했으며, 결혼을 통해 귀족들 간에 횡적으로 연결되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남자 상속자가 없는 경우에도 봉토와 작위는 완전히 몰수되지 않고 잠재적으로 상속은 이루어졌다. 작위가 없는 남자가 결혼 관계를 통해 작위를 물려받는 경우, 엄밀히 따지면 '아내의 작위를 대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상속은 두 사람의 자녀 대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중세 유럽의 작위(爵位)는 국가와 시대마다 조금씩 달랐다. 작위가 잘 체계화 되어 있던 프랑스를 기준으로 볼 때 귀족에는 크게 9가지 단계가 있었다
0. 귀족의 혈통을 가진 자(mark of nobility)를 소지한 자.
(성씨 앞에 [프랑스]=de:드, le:르, [독일]=von:폰, [네덜란드]=van:판,
[에스파냐 & 이탈리아]=de:데, di:디 등이 붙는 사람)
남자 / 여자 남자 / 여자 남자 / 여자 1. 기사 - (프) Chevalier / Dame (영) Knight / Dame (독) Ritter / Frau 2. 남작 - (프) Baron / Baronne (영) Baron / Baroness (독) Freiherr / Freifrau 3. 자작 - (프) Viscomte / Viscomtesse (영) Viscount / Viscountess (독) Landgraf / Landgräfin 4. 백작 - (프) Comte / Comtesse (영) Count / Countess (독) Graf / Gräfin 5. 후작 - (프) Marquis / Marquise (영) Marquis / Marquise (독) Markgraf / Markgräfin 6. 공작 - (프) Duc / Duchesse (영) Duke / Duchess (독) Herzog / Herzogin 7. 왕자 - (프) Prince / Princesse (영) Prince / Princess (독) Prinz / Prinzessin 8. 왕 - (프) Roi / Reine (영) King / Queen (독) König / Königin 9. 황제 - (프) Empereur / Imperatrice (영) Emperor / Empress (독) Kaiser/Kaiserin
* 엄밀히 따지자면 0과 1, 그리고 8과 9는 '귀족 작위 Noble Title'에 포함되지 않는다. * 영국의 경우 영국내의 백작은 Earl 이라고 하고, 유럽 대륙의 백작은 Count 라고 한다. * 여공작, 여백작 등 여성이 실제로 작위를 계승, 소유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대부분의 경우 여성이
Peerage(귀족, 귀족 계급)에 포함되지 않는다.(전자는 왕족의 지위에 해당하며, 후자는 관직이다.)
公爵(공작 Duke)은 라틴어 dux에서 나온 말이다.
로마 시대에는 지방 군대의 지휘관을 의미하는 말이었지만, 로마 멸망 후 프랑크 왕국에서 넓은 영토를 가진 사회적 지도자에게 이 용어를 가져다 사용했다. 흔히 '왕이 되지 못한 왕족이 갖는 작위'라는 오해가 널리 퍼져있지만, 실제로는 1600년대까지 공작의 작위는 대체로 왕실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다.
侯爵(후작 Marquess)은 국경지대(marches)의 봉토를 소유한 백작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국경은 특별한 주의가 필요한 지역이었고, 때문에 충성심 높은 신하들에게 맡겨졌다. 백작은 하나 이상의 영지를 소유할 수 없다는 프랑크 왕국의 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직위였기 때문에 백작보다 한 단계 위로 여겨졌다. 후작은 때로는 변경백(邊境伯)이라고 하기도 한다. 변경백(邊境伯)이란 프랑크왕국과 중세 독일제국에서 마르크(Mark 邊境區)의 행정을 담당한 지방관이다.
伯爵(백작 Count)은 라틴어 comes에서 왔다. 로마시대 코메스는 황제를 측근에서 모시는 관리였으며, 프랑크 왕국에서는 지방사령관을 의미했다. 영국에서 백작을 뜻하는 단어 얼(Earl)은 노르만 어에서 지도자를 의미하는 얄(Jarl)에서 나왔다. 일반적으로 공작이나 후작에 비해 하위 작위라는 느낌이 강하지만, 몇몇 강대한 백작들은 공작과도 능히 그 세력을 겨눌 만 했으며 (예컨대 백년전쟁 당시의 아르마냐크 백작의 권세는 대단했다.), 때로 어떤 백작들은 공작으로 지위가 격상되는 일도 있었다. 백작이라는 단어에서 나라(country) 라는 영어 단어가 파생되기도 했다.
子爵(자작 Viscount)은 본래 백작(count)의 보좌관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프랑크 왕국의 vicecomites는 백작의 대리인이나 부관으로 백작 대신 영지를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백작의 작위가 세습하는 것이 일상화 된 이후 자작의 작위 역시 세습되는 것으로 변했으나, 꽤 오랜 기간 동안 자작이라는 작위는 그 자신의 독립적 권력을 얻지 못했다. 나중에 자작의 작위는 백작으로 만들 만큼의 가치는 없는 사람들에게 수여되기도 했다.
男爵(남작 Baron)은 프랑크 왕국에서 자유민을 의미하던 단어 baro에서 나왔다. 로마 멸망-중세 초기의 혼란기에서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보다 권력 있는 상급자에게 보호를 요청하고 종사(從士) 관계를 맺기를 바랬다. 이렇게 종사 관계를 통해 큰 땅을 소유한 영지를 남작령(barony)라고 불렀고, 만약 이 땅의 주인이 귀족이라면 남작(baron), 평민이라면 남작령의 주인(seigneur de la baronnie)이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남작령은 18세기 말까지도 자유롭게 매매할 수 있었고, 이런 이유로 남작은 소소한 귀족 작위라는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영국의 작위 체계에서는 남작은 왕으로부터 직접 토지를 하사받은 귀족을 의미했다. 영국내 귀족의 상당수는 남작이었기 때문에 영국에서 'Baron'이라는 말은 귀족, 혹은 영주를 의미하는 말로도 사용된다.
실제로는 9단계 이상이나 되는 많은 작위를 모두 사용하는 곳은 몇몇 국가뿐이었다. 예를 들자면 옛 영국(앵글로-색슨 족이 지배하던 시기)에서는 위의 표에 대치시켜보면 1, 2, 4, 7, 8에 해당하는 작위들 밖에 없었다. 한편, 국가에 따라서는 저 작위들 사이에 추가로 들어가는 작위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핀란드, 스웨덴,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지에서는 기사의 종자도 귀족에 준하는 신분으로 대접받았다. 또, 영국에서는 국가 재정을 늘이기 위해 남작 아래에 준남작(Baronet)이라는 귀족신분을 만들기도 했으며, 스페인에서는 '식민지 총독'을 공작과 왕족 사이의 귀족으로 대접했고, 독일에서는 후작(변경백(邊境伯)=Markgraf)과 공작(Herzog)사이에 Fürst라는 신분이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지배자는 대공(Archduke) 이라고 했고, 주권을 행사한 공작들을 대공(Grand Duke)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작위 체계는 국가에 따라서 단 3가지(기사, 백작, 왕)만 있는 곳에서 열 가지 정도로 복잡하게 나뉜 곳까지 다양하다. 본래 백작(Count)의 부관지위를 가진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던 자작(Viscount) 계급이 없는 국가가 많은 편이다.
유럽 귀족의 작위는 기본적으로 개개인의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기보다는 땅에 귀속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때문에 상당수의 귀족들은 다수의 작위를 보유하기도 했고, 때로는 이 작위들을 분할 상속 하거나 결혼 예물로 증여하기도 했다.
예컨대, 아키텐 공령과 가스코뉴 공령, 그리고 푸아티에 백령을 동시에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키텐과 가스코뉴의 공작이자 푸아티에 백작"인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딸을 결혼시키려 하는데 상대방이 능력은 매우 뛰어나지만 작위는 가지고 있지 않다면 딸에게 푸아티에 백령의 권한을 주어 결혼대상자(사위)를 푸아티에 백작의 권한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절대왕정 시기 이전까지는 귀족의 작위가 반드시 그 귀족의 권력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강대한 부와 권력을 가진 백작이 공작과 대등하게 권력다툼을 하거나, 엄청난 부를 가진 남작에게 후작이나 공작이 돈을 빌리러 오는 일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작위를 번역하면서 중국식 오훈작(공/후/백/자/남) 체계에 맞추어 번역하다
보니, Prince와 Duke 를 번역할 때처럼 의미가 잘못 전달될 수 있는 부분도 종종 생긴다.
본래 Prince 라는 말은 '왕자' 뿐만이 아니라 공작위를 나타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지배
자, 군주라는 의미를 갖기도 한다. 예를 들어 Prince of Wales 라고 하면 '웨일즈 왕자'가 아니라 '웨일즈의 지배자', '웨일즈 공작'으로서 대대로 영국 황태자에게 수여되는 작위이다. 어느 영화에서는 이걸 '웨일즈 왕자'라고 번역해서 빈축을 산 일이 있었다.
사유재산의 포기와 독신생활이 공통적인 특징이며 집중적인 명상과 여러 형태의 고행이 수반되기도 한다. 수도생활에 전념하고 있는 사람을 불교에서는 ‘승려’ 또는 ‘수행자’라 하고, 가톨릭에서는 ‘수도자’라 하고 이슬람에서는 ‘수피(sufi)’라고 한다. 또한 신자들의 영성(靈性)을 개발하고 완벽한 종교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많은 종교에서는 평신도들에게도 수도생활이 권장된다.
수도회의 제도가 독특한 형태로 가장 체계화되어 있는 종교가 가톨릭이기 때문에 수도회라고 하면 보통 가톨릭의 경우를 일컫는 것이 상례이다. 수도원(修道院)은 수도사들이 공동생활을 하는 주거장소를 말하는데, 가톨릭에서 정규 수도원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 6명의 서원(誓願-하느님의 뜻에 따른다는 약속)하는 수도자가 있어야 하고, 성직수도회의 경우는 6명 중 4명이 신품성사(神品聖事-교회의 성사를 집행할 수 있는 신권을 주는 성사, 신부 자격을 얻는 성사)를 거친 사제이어야 한다.
회원들도 교리법에 의하여 합법적으로 인가된 회칙에 따라 공식 서원을 한 사람들로 구성되는데, 이들을 수사(修士) 또는 수녀(修女)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 나라에 전적으로 봉사하기 위하여 가정과 재산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에 끝까지 복종한 것을 본보기로 하여 가난과 독신, 그리고 수도규칙과 수도원장에 대한 순종을 세가지 복음적 권고라 하여 가톨릭 수도생활의 원형으로 삼고 있다. 수도자의 교회 내 신분은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중간이 아니라 특수한 은사의 부름(聖召)을 받아 이바지하는 신분이므로 성직자냐 평신도냐에 관계없이 수도자가 될 수 있다.
수도생활의 근거는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론, 구약에서는 본래 의미의 수도생활에 대한 언급이 없으나 구약의 예언자 가운데 엘리야와 예레미야는 은둔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에 대한 헌신과 독신생활을 함으로써 수도생활의 선구자로 간주될 만하다. 구약 말기에 나타난 에세네파(Essener派)와 쿰란집단도 공동생활의 강조, 복종의 규율, 독신제와 재산 포기에 의한 가난을 신조로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수도생활의 전형적인 모습은 예수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예수는 천국을 위한 독신생활과 가난을 가르쳤고,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뜻에 복종한 완전한 순명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완전한 자의 길을 가르쳤다고 간주된다.
제도로서의 수도회
제도로서의 수도회가 처음 생긴 것은 4세기경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은수자(隱修者)= 독수도자(獨修道者) =독수자(獨修者 Solitary)라 하여 사막이나 광야에 머물면서 하느님과의 보다 밀접한 관계를 맺으려는 이가 있었다.
그 중 파도바 성인 안토니오(성안토니오)가 가장 유명하며 수도자의 아버지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런 수도생활은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주로 이집트와 팔레스티나, 그리고 시리아 지방에서 성행하였다. 후대로 내려와서 독수도(獨修道) 생활과 함께 집단 수도생활이 나타났다.
성 바코미오는이전의 독수생활과는 전혀 다른 집단 수도생활을 처음으로 주도한 사람이다. 이와 같이 집단적인 수도회가 생김에 따라 독수생활이 불가능했던 여자들도 세속을 떠나 복음적 권고를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성 아나타시오가≪성 안토니오전≫을 저술하여 수도생활의 이상을 서방에 소개하자 많은 사람들이 이를 추종하게 되었고 그 영향으로 서방에도 수도회가 나타나게 되었다.
서방의 초기 수도제도는 이집트 수도생활의 영향을 받아 독수도자(獨修道者 Solitary)와 회수도자(會修道者)= 단체수도자(團體修道者) =공동체수도자(共同體修道者)의 제도를 혼합한 것이었다. 그 뒤 발전을 거듭하여 유명한 ‘성 베네딕토 규칙’이 나타나게 되었고, 8세기부터 13세기까지 모든 서방의 수도회는 이 규칙을 따르게 되었다.
이 규칙의 특징은 정주제도(定住制度)로서 한 번 어느 수도회에서 서원하게 되면 다른 수도회로 옮길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에 수도회가 안정된 자립적 공동체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13세기까지만 해도 수도자 중에는 사제가 거의 없었다. 성 바코미오, 성 베네딕토(베네딕토St. Benedictus) 모두 평신도였다. 당시 수도자들은 만일 신품을 받으면 겸손의 덕을 지키기 어렵고 하느님을 찾는 일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주교들은 수도회가 훌륭한 인재양성소임을 파악하고 사목상의 필요에 의하여 일부 수도자들로 하여금 신품을 받도록 하여 사제가 되게 하였다.
그에 따라 사목에 알맞은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아우구스티노 수도회)가 형성되었다. 이 밖에도 설교를 목적으로 하는 노르베르토회(크산텐의노르베르토)와 이단 알비파를 회개시킬 목적으로 창설된 도미니코회(도미니코 수도회)도 나타났다. 특히,도미니코회는 정주제도를 폐지하여 회원들이 자유로이 돌아다니면서 설교하게 하였고, 학문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하여 예수회와 쌍벽을 이루며 세계적인 학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성 도미니코(성도미니코)와 같은 시대 사람으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아시시의프란치스코)가 있는데, 그는 이전의 수도회를 본받지 않고 오직 예수와 사도들의 생활방식에 따라 사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또한 이 수도회는 개인적인 가난과 청빈뿐 아니라 단체적인 가난도 요구하였기 때문에 회원들은 구걸하는 경우가 많아 ‘탁발 수도회’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한편, 예언자 엘리야가 가르멜 산에서 극기 생활한 것을 본받아 1247년에는 가르멜수도회(가르멜회)가 창설되었다.
16세기에 성녀 테레사와 십자가 성 요한은 이 수도회를 개혁하여 신비적 관상생활(觀想生活)을 하는 가르멜회의 영성을 결정짓게 하였다. 중세가 지난 뒤 종교개혁이 이루어지고 계몽주의가 성행하는 등 가톨릭에 대한 도전이 거세지는 가운데 성 이냐시오는 포교 사업을 위하여1534년 ‘예수중대’를 조직하였으며, 나아가 여기에서 예수회(예수회 Society of Jesus)가 형성되었다. 이 회는 이전보다 더욱 집중적인 조직을 가지며 완전한 순명과 철저한 학문연구로 유명하였다.
예수회 이후의 수도회는 대부분 일정한 목적을 띠고 세워졌는데 성 요한 수도회(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는 병자의 간호, 성 요한 돈 보스코의 살레시오회(살레시오회)는 청소년 교육, 이탈리아 돈 알베리오네의 성 바오로 수도회(성 바오로 수도회)는 출판과 매스컴의 사도직을 목적으로 하는 등이다.
수도서원을 하지 않는 많은 단체(재속회)-예:선교회
이 밖에도 외관상 수도회와 같지만 회원들이 수도서원을 하지 않는 많은 단체들이 생겨났다. 그 중 1663년에 창설된 파리 외방 전교회(파리 외방전교회)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이런 단체는 주로 재속 신부들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최근에는 수도자라는 명칭을 거부하고 사회인으로서 복음적 권고를 지키려는 자들이 많이 생겼는데 이들 집단을 재속회라고 한다.
수녀회
대체로 여자의 수도생활은 남자보다 훨씬 엄격하여 남자에게는 사회활동을 허락하면서도 여자에게는 기도와 희생의 사도직만을 맡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근대에 들어서는 여자 수도자에게도 대부분 외부활동을 허락하고 있지만, 수녀회 중에는 외부사람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는 곳도 있다. 수적으로 수녀가 수사보다 훨씬 많으며 교회 내 자선사업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한국의 수도회연원 및 변천]
엄격하게 보면 우리나라 가톨릭교회의 창립기부터 동정녀와 은수자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홍유한(洪儒漢)은 소백산 기슭에서 자발적으로 은수생활을 했으며, 강완숙(姜完淑:골롬바)을 중심으로 독신자와 동정녀의 공동체가 생겨났음을 미루어 볼 때 나름대로 수도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는 유교사회의 엄격한 사회규범 속에서 동정생활을 하기 위하여 동정부부의 길을 택한 사례까지도 있었다. 그러나 박해시대에는 공식적인 수도생활이 불가능하였다.
최초로 정식 수도회가 형성된 것은 1888년(고종 25)으로 조불수호통상조약(고종 23) 체결 2년 후였다. 이때 처음으로 한국에 진출한 수도회는 프랑스 샤르트르에 본원을 둔 성 바오로회였다.
이 회는 당시 조선교구장이었던 주교 블랑(Blanc)이 선교·구제·교육 사업을 위한 수도자를 요청하여 들어온 것으로, 2명의 수녀가 한국에 온 뒤 4명의 조선인 수녀 지원자를 선발하여 곧바로 양로원과 고아원을 운영하였다.
두 번째는 독일 남부 오틸리엔에 본부를 둔 성 베네딕토회로 1908년 진출하였으며 남자 수도회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주교 블랑의 후임인 주교 뮈텔의 초청으로 한국에 온 이 수도회는 고등교육과 포교를 통하여 교회와 사회의 지성인 양성에 목적을 두고 서울에 수도원과 학교를 설립, 고등교육과 기술교육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1920년 원산교구를 담당하게 되면서 포교를 위한 평범한 수도회가 되었다. 최초로 들어온 이 두 수도회는 조선교구장의 초청으로 왔기 때문에 주로 교구사업을 돕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1910년 국권상실 이후 일제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자 교회 발전에 커다란 장애가 따랐다. 그러나 많은 수도회들이 한국에 진출 혹은 국내에서 형성되어 한국교회의 내적인 충실을 이루게 하였다.
1924년 평양교구에 진출한 메리놀 수녀회와 이 수녀회를 기반으로 창설된 영원한 도움 성모회(1932), 남자 성 베네딕토회를 돕고 협력하기 위하여 1925년 진출한 포교 성 베네딕토회, 경상도지역에서 한국인 처녀들이 공동체로 형성한 예수 성심 시녀회(1935), 1937년 캐나다에서 한국에 진출했으나 당시 국제간의 알력으로 감옥에서 고생한 성 프란시스코회, 1939년 진출한 가르멜 수녀회 등이 그것이다. 특히 미국의 동방선교를 위하여 창설된 메리놀 수도회는 평양교구를 맡아 본당사업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 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활동이 중단되었으나 8·15광복 후 재개하여 의료 활동을 중심으로 많은 일을 행하고 있다. 예수 성심 시녀회는 영천군에서 처녀 6명이 ‘삼덕당’이란 이름의 공동체를 이루어 본당일을 도우며 가난한 가정의 자녀를 지도하면서 시작되었다. 1952년 9월에는 교황청의 윤허로 정식 수녀회로 인준 받았으며, 1963년 1월 수녀회 회칙을 허락받아 그 해 첫 번째 종신 서원자를 냈다.
8·15광복 후 혼란의 와중에서도 교황 바오로11세의 교회지역화 회칙에 따라 한국인 성향에 맞는 수도회의 창설에 힘을 기울여 1946년 4월 21일 한국 순교복자 수녀회가 세워졌다. 신부 방유룡을 중심으로 창설된 이 수도회는 한국의 초대신부 김대건(金大建)의 순교 100주년이 되는 해에, 우리나라 순교 선열을 주보로 삼고 순교정신을 바탕으로 생활하면서 한국에서의 구원사업과 한국 고유문화를 보존하고 계승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으며, 1951년 12월 교황청의 정식인가를 받았다.
또한 방유룡 중심으로 1953년 한국 순교복자 성직 수도회가 순교자 현양과 출판·교육·의료사업의 목적으로 창설, 1956년 교황청의 인가를 받고 1957년 최초의 허원자 12명을 배출하였다. 그 밖에 신부 윤을수에 의하여 1958년 6월에 세워진 성체회, 1960년 선종환 신부에 의하여 창설된 성모 영보 수녀회, 1964년에 세워진 거룩한 말씀의 회, 성모 성심 수도 수녀회 등이 있다.
8·15광복과 더불어 남한에서는 수도회가 많은 발전을 거듭하였으나 북한에서는 공산주의화가 진행되면서 수도회들이 혹심한 박해를 받았다. 특히 덕원·연길지역에서 활동하였던 성 베네딕토회와 평양지역에서 활약하였던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성 바오로회는 수도원 건물, 사업기관·토지 등을 몰수당하였고 순교까지 치러야 하였다.
6·25전쟁 이후 한국사회를 부흥시키고 가톨릭 신앙을 다시 굳건히 하기 위하여 많은 수도회가 등장했다. 살레시오 수도회·예수회·예수 고난회·성 바오로 수도회·예수의 작은 형제회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도회가 이 시기에 나타났다.
1988년 현재 한국에는 30여 개의 남자 수도회와 60여 개의 수녀회가 있다. 그러나 외국에서 들어온 수도회는 물론 방인 수도회라 하더라도 대체로 서구적 수도생활의 모방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수도회의 한국적 토착화의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하나의 과제로 남아 있다.
여자에 비하여 남자의 수도생활은 부진한 편으로 1997년 현재 수녀는 7,574명인 데 비하여 수사는 1,095명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대다수의 수녀들이 일선의 모든 사목활동을 맡고 있다는 점이 한국 수도회의 특성 중 하나이다.
수도회를 성격상 분류하면 봉쇄 수도회라고도 불리는 관상 수도회, 사회적 복음전파를 목적으로 하는 활동 수도회, 전통적 수도생활 방식과는 달리 이 세상 속에서 활동하는 재속회로 나눈다. 우리나라의 대부분 남·녀수도회는 활동 수도회에 속한다.
역사상 수도회는 변화하는 시대상황 속에서 부닥치는 교회의 여러 문제를 복음적으로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는데, 역사적으로 굴곡이 많았던 한국사회 속에서의 수도회도 결국 마찬가지의 양상을 보여 왔다고 여겨진다.
참고문헌『한국종교연감 96-97』(한국종교사회연구소, 고려한림원, 1997)
『오늘의 수도자들』(한국수도장상연합회, 분도출판사, 1987)
『결혼성소와 수도성소』(박대식, 가톨릭출판사, 1985)
『한국천주교회사』(류홍렬, 가톨릭출판사,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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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수도회의 목록(LIST 와 링크 바로가기)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황청 또는 교구의 인준을 거쳐 수도회를 창설해왔다. 대표적으로 교황청의 인가를 받은 수도회 가운데 일부를 다음 목록에 나열한다. 주요 가톨릭 수도회 -바로가기-(대표적인 몇 개 list) -끝-
시칠리아 섬 동해안 제2의 도시 카타니아 북동쪽 55km에 타오르미나(Taormina)가 있다. 이 시칠리아 동쪽 끝 이오니아 해변에 있는 타오르미나는 해발 200m 절벽 위에 있는 마을인데, 비록 크지 않은 산 위 마을이지만 크루즈가 기항할 정도로 유럽 사람들에겐 인기 있는 휴양지이다. 괴테는 이곳을 ‘작은 천국’이라 했고 모파상은 ‘타오르미나는 사람의 눈과 정신, 상상력 등 인간의 모든 것을 유혹한다.’라고 말했다 한다. 승용차가 없을 경우에는 아래쪽 마을의 타오르미나 역 광장에서 윗마을(언덕)로 올라가는 버스를 타거나 케이블카를 타야 한다.
잘 만들어진 무대 장치 같은 타오르미나의 고대 원형 극장(Teatro Greco)과 주변 풍경
고대 원형 극장의 옛 모습이 그려진 그림
타오르미나는 그리스 원형 극장(Teatro Greco)을 보기 위해서 갔다. 먼저 보았던 시라쿠사의 원형 극장이 이곳보다 계단 객석의 규모가 더 크고 온전히 남아 있는데 비해, 타오르미나의 원형 극장은 돌 아치와 코린트式 기둥이 일부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 타오르미나 산언덕에 지어진 그리스 원형 극장에 들어가 객석(계단)에 서니 “와~~!!” 하는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그것은 원형 극장과 주위 풍광이 잘 설계된 무대 장치 장치를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원형극장 무대에는 부서지고 남은 아치(arch)와 몇 개 남지 않은 코린트식 기둥이 서 있고, 무대 뒤를 보면 멀리 연기를 뿜는 애트나 화산이 보였다. 에트나 산 정상엔 흰 눈이 쌓여 있고 산 아래쪽에는 나무와 집들이 점점(點點)이 박힌 마을이 보이다가 산자락 끝은 지중해 푸른 바다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이런 풍광 속에서 공연을 보는 소감을 어떨까? 과거 수 천 년 전 이곳에서 공연되었던 것은 아마도 그리스 비극이었을 것이다. 요즘에는 여름이면 비극 공연뿐만 아니라 오페라, 음악 공연 등 다양한 공연이 열린다 한다.
타오르미나의 원형극장 계단 꼭대기에 올라 원형 극장 뒤편을 내려다보면 지중해(이오니아 해)의 Naxos Bay (낙소스 만)과 정원석처럼 박힌 예쁜 섬들이 보인다. 눈을 돌려 타오르미나 마을 언덕 꼭대기 위를 올려다보면, 높이 서있는 타우로산(Monte Tauro)에 사나세토 성(Sanaceto Castle)이 그림처럼 걸려 있다. 그야말로 가슴이 탁 트이는 시원한 바람과 멋진 경치가 연극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이런 비현실적인 타오르미나의 고대 극장 풍경은 이것에 온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광경일 것이다.
타오르미나 고대 극장 계단 뒤 언덕 끝에서 내려다보이는 이오니아 해의 낙소스 만(Naxos bay)
유네스코 자연 유산에 등록된 에트나 화산 (Mount Etna)은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섬 동부에 있는 활화산이다. 그리스어로 ‘나는 타오른다 Aitne(aithō)’라는 뜻을 가진 에트나(Etna) 화산은 유럽에서 가장 높은 활화산으로 현재 고도는 3,329m이지만, 1865년 이 화산의 정상은 20세기말보다 51m나 높았다 한다. 그간 몇 번의 폭발 결과 정상 부분이 날아가 버려 높이가 낮아졌기 때문이다. ‘불의 신의 대장간’이라는 별명답게 1669, 1693, 1832년의 분화가 특히 컸으며, 최근에 들어 와서도 1971년부터 10년에 한 번꼴로 불을 뿜었는데 지난 2002년 폭발 시에는 화산재가 북아프리카까지 날아가고 공항과 도로가 폐쇄되었다 한다. 에트나 화산은 요즘도 연기를 내뿜고 있으며, 가장 위험한 화산 중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관광객들에게 관람이 허용된 산이다.
에트나 화산 분출 장면. 출처:CNN 기상 캐스터 Mari Ramos 트위터 2014년 8월 14일 오전 6시 21분 게재
타오르미나뿐만 아니라 카타니아에서는 관광 상품(엽서, 열쇠고리, 자석)뿐만 아니라 관광 안내 책자나 홍보 자료에 폭발하는 에트나(Etna) 화산의 폭발 장면을 볼 수 있다.
시칠리아 섬 동남부 에트나 산 기슭에 있는 카타니아는 지중해(이오니아 해)에 면해 있어 크루즈 여객선이 정박하는 유서 깊은 항구 도시이다. 시칠리아의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인, 비잔틴, 아랍인, 노르만인에게 차례로 정복되었으며 시칠리아 왕국의 아라곤 군주, 부르봉 왕가들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특히 1943년에는 폭격과 치열한 전투로 시가지가 크게 파괴되었다.
카타니아는 시칠리아에서 州都(주도) 팔레르모 다음 가는 제 2의 도시로, 공업·교통 중심지이며 이탈리아에서 가장 교역이 활발한 항구이다. 에트나 화산에서 캐내는 유황과 넓은 카타니아 평야에서 재배되는 오렌지, 레몬, 올리브, 포도 등의 작물이 유명하다.
전체 크기 105m x 125 m로 추정되는 로마 원형 극장의 일부: 관람석 계단이 남아 있다
활화산인 에트나 산에 가까운 카타니아의 주요 건물들은 화산 폭발과 지진에 의한 파괴와 재건이 반복되었다. 카타니아 로마 원형 극장은 화산 폭발과 지진으로 지하에 반쯤 묻혀 있고, 현재 남아 있는 오래된 성당이나 주요 건물은 18세기 이후 지어진 바로크 건축물이 대부분이다. 건축 재료로 주로 화산 응회암을 이용했기 때문에 옛 시가지는 대체로 짙은 회색을 띠고 있다. 카타니아의 두오모 광장 주변에는 로마 극장 유적 외 아가타 대성당과 1232년 프리드리히 2세가 건설한 우르시노성이 있다.
성 아가타의 유물과 작곡가 빈센초 벨리니의 무덤이 있는 카타니아 대성당
1693년의 지진 이후 건축가 프라 피올라모 팔라초토와 조반니 바티스타 바카리니(1702~68)가 새로 세운 카타니아 대성당에는 성 아가타의 유물과 이곳 태생의 작곡가 빈센초 벨리니의 무덤이 있다. 카나티아에는 이곳 출신의 유명한 작곡가(벨리니)와 작가(베르가)의 이름 딴 공원과 거리 이름이 있다. 오페라 '몽유병 여인' 을 작곡한 벨리니(Vincenzo Bellini 1801~1835)는 이탈리아 가극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고, 소설가, 단편작가, 극작가로 활동한 베르가(Giovanni Verga)는 이탈리아 사실주의 대표적 작가이다.
18세기 궁전들로 둘러싸인 두오모 광장에 있는 오벨리스크를 등에 업은 검은색 코끼리 조각상은 에트나 화산의 현무암을 이용해 만든 것인데, 카타니아의 상징물로 카타니아 시청과 축구팀의 깃발에도 등장한다.
카타니아 상징 검은 현무암의 코끼리분수
시칠리아에서 강도를 만나다
시칠리아나 남부 이탈리아에는 관광객을 노리는 범죄가 많다는 얘기는 이미 알고 있었다. 소매치기, 사기, 야바위, 물건 바꿔치기, 퍽치기(사람을 퍽치고 물건 뺏는 것), 날치기(물건을 빼앗아 달아나는 것. 특히 오토바이 날치기), 낚아채기 등 그들의 수법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나름대로 조심을 하였다. 그래서 위험지역은 밤늦게 다니지 않도록 하였고, 가방(bag 백)은 cross로 매고 길을 갈 때도 차도 쪽으로 bag이 가지 않도록 하거나 보호자(남자)가 여자들을 보호하며 이동해야 했다. 그런데 우리가 당했던 것은 관광 책자나 인터넷에서도 들어 보지 못한 것이었다.
카타니아 시내를 막 벗어나려는 T자 교차로에서였다. 맞은편에서 오토바이를 탄 남자가 내 진행 방향을 가로막으며 좌회전하려다가 멈추었다. 나는 이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데 왜 안 지나가지(오토바이 운전이 미숙한 분인가)라고 생각하였다. 바로 그 때 운전석 뒤쪽 문이 열리더니 또 다른 남자가 아내의 핸드백을 낚아채려고 하였다. 순간 아내는 가방 끈을 꽉 움켜쥐었고, 옆에 있던 딸도 엄마의 가방이 뺏기지 않도록 힘을 보탰다. 조수석의 아들은 안전벨트 락(lock)이 걸려 뒷자리까지 팔이 닿지 않았지만, 그놈의 눈을 쳐다보고 욕지거리 섞인 고함을 질렀다. 아내가 안전벨트를 매지 않았더라면 가방을 빼앗기거나 차도로 사람이 끌려 나갔을 것이었다. 그네들도 이쪽의 저항이 만만치 않자 포기하고 도망쳐 버렸다. 강도당했던 순간은 수 초 밖에 안 걸렸지만 아내는 손가락의 인대가 늘어나 한 동안 손가락이 아파 고생했고 그 때가 생각날 때마다 가슴이 벌렁거린다 하였다. 가방 안에 있던 돈과 귀중품도 문제였지만 만약 여권을 잊어 버렸다면 우리의 남은 여행 일정은 엉망이 되었을 것이었다. 자동차 뒷문이 밖에서 열린 까닭은 자동차가 달리면 자동으로 문 잠금(door lock) 장치가 작동되지 않는 차종이었던 것이었다. 그 후 다른 도시에서 차량을 빌릴 때는 문 잠금(door lock) 장치를 꼭 확인하였다.
비니키 입은 여자를 보러 로마 시대 저택(Villa Romana del Casale)에 가다
시칠리아 중앙부 산속 마을 피아차 아르메리나(Piazza Armerina)에 있는 고대 로마 시대 저택을 보러 갔다. 4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저택의 주인은 알 수 없으나 큰 규모와 다양하고 많은 양의 예술품과 장식물로 보아 상류층 부자의 소유였을 것이라 한다. 신전, 바실리카, 체력 단련실, 목욕탕, 연회실 등의 바닥과 벽이 온통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식당의 세 벽면에도 신화의 여러 장면들이 모자이크로 묘사되어 있는데 그 중 ‘헤라클레스의 모험’ 장면이 유명하다. 야생동물의 사냥과 운동선수, 대전차 경기 등 독창적이고 사실적인 모자이크가 매우 인상적인 이 저택은 당시의 사회 경제 모습과 구조를 생생하게 잘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예술적으로도 매우 아름다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사냥 장면이 생생한 모자이크
비잔틴(Byzantine) 시대와 아랍(Arab) 지배 당시에도 일부 건물이 사용되었지만 그 후 버려지다시피 되어 농경지로 사용되다가 19세기 초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 졌다. 지금은 모자이크로 된 유적을 보호하기 위해 지붕을 덮었고, 집 지을 때 쓰는 비개를 설치하고 통행을 위한 통로(깔판)를 만들어 관람객이 모자이크를 밟지 않고 다니며 구경할 수 있게 하였다.
비키니 차림의 운동선수
erotic 한 모자이크
비키니 차림의 운동선수 중 누가 일등인지는 설명을 따로 하지 않아도 알겠고, 사냥 장면에선 그 생생함이 그대로 전달된다. 안주인 방(침실)에 있던 性的(성적 erotic) 모자이크는 그것을 만든 당시 예술가의 위트와 재치가 느껴진다.
시칠리아를 제대로 다 둘러보려면...
시칠리아 어느 도시나 마을을 가도 시내 중심엔 성당이 있고 마차가 굴러 가던 자갈길이 있다. 문만 열면 맞은편 집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골목길엔 빨래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골목을 따라 가다 보면 어느 새 해변에 이르기도 한다. 팔레르모 구시가지 중심에는 옛 건물이 많이 남아 있는 데, 석조 건물을 개조한 한 호텔의 승강기는 구형으로 그 안에 들어가면 철망에 갇힌 느낌이 들어 폐쇄 공포증 환자는 이용하기가 힘들 것 같았다.
창을 열면 이웃과 대화가 가능한 팔레르모 뒷골목
팔레르모 구시가지 한 호텔의 구형 승강기
지중해 중앙에 위치한 시칠리아는 과거 유럽 해상 무역의 중심지로서 큰 부를 축척할 수 있
었고, 여러 민족의 지배를 받은 결과 풍요롭고 복합적인 문화와 예술을 창출할 수 있었다.
그리스, 로마, 비잔틴, 중세 문화 유적뿐만 아니라, 바다와 산과 구릉지에다 에트나 화산도
있어 자연 풍광이 다양하여 마치 지리, 역사, 종교, 문화가 모두 들어 있는 백과사전을 들여
다 보는 것 같았다.
다녀 본 곳은 ▶팔레르모 ▶아그리젠토 ▶시라쿠사 ▶타오르미나 ▶카타니아 ▶아르메리나 이렇게 몇 군데만 다녔지만, 시칠리아는 생각보다 굉장히 커서 3일 일정으로는 아쉬움만 남는 여행이었다. 영화 시네마천국, 말레나, 그랑블루, 일 포스티노 등 많은 영화가 촬영된 시칠리아의 곳곳을 다 둘러보려면 적어도 일주일은 걸릴 것이다.
시칠리아 여행경로(팔레르모-아그리젠토-시라쿠사-타오르미나-카타니아-아르메리나-팔레르모) 시칠리아의 음식과 “뽀꾸 디 쌀레 (Un poco di sale 소금 조금만)”시칠리아는 섬이므로 각종 해산물이 풍부한데, 고등어 파스타나, 멸치 파스타, 정어리 파스타는 시칠리아 인들이 즐겨 먹는 메뉴이다. 새우나 가재, 조개나 오징어 등 해산물을 주재료로 하는 요리 외에도 스테이크 요리도 유명세를 얻고 있다. 다양하고 품질 좋은 재료로 만든 파스타, 피자, 샐러드, 구이, 튀김 요리 등이 그야말로 山海珍味이다. 하지만, 파스타 특히 해산물이나 치즈가 들어간 요리를 시킬 때는 "뽀꾸 디 쌀레 (Un poco di sale 소금 조금만)" 를 말하는 게 좋다. 인터넷과 관광 안내서에는 유명 맛집들이 소개되어 있지만 팔레르모 요리협회에서 추천한다는 추천장이 걸려 있는 소위 ‘팔레르모 맛집’도 시내 골목이나 전통 시장 골목 등에 숨겨져 있다. 팔레르모의 전통시장인 부치리아(vucciria) 시장을 구경하고 이탈리아 돌체(dolce-부드럽고 달콤함)의 대표 과자인 시칠리아 명물 cannoli(까놀리)를 먹어 보았다. cannoli는 작은 관(little tube)의 뜻으로 만두 껍데기처럼 돌돌 말린 속에다 라코다 치즈를 넣어 튀긴 건데, 아이들의 입맛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내 입맛에는 너무 달아 반쪽 먹기도 힘들었다.
아그리젠토(Agrigento, 시칠리아어: Girgenti)는 팔레르모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시칠리아 남쪽 해안 도시인데,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아크라가스(Akragas)로 로마 시대에는 아그리겐툼(라틴어: Agrigentum)으로 불렸다.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인들에 의해 건설된 아그리젠토는 과거 시칠리아에서 크게 번창했던 도시로, 그리스의 서정시인 핀다로스(Pindaro)는 '인간이 만든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 했다 한다.
다른 관광객들도 그랬겠지만 우리는 아그리젠토에 있는 그리스 신전을 보기 위해 이곳을 찾아갔다. 이 유적의 입장 마감 시간이 늦가을엔 오후 3시 반으로 이르기 때문에 서둘러 팔레르모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팔레르모에서 이곳까지 오는 길은 고속도로가 없고 산과 고개를 넘어야 하는 길이었다. 가는 도중 한쪽 차로를 막고 도로 공사하는 곳이 여러 군데 있어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고, 심지어 터널을 막고 공사 중인 곳도 있어 약 4~50분을 더 돌아가야 했다. 소요 시간을 여유 있게 잡지 않았더라면 입장 마감 시간에 도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참고로 자가용이 아닌 대중교통(기차, 버스)으로 아그리젠토를 갈 수도 있다. 팔레르모에서는 기차로 2시간 30분, 버스로 2시간 소요되며, 시칠리아 동쪽에 있는 제2의 도시 카타니아에서는 기차로 4시간, 버스로 3시간 소요된다. 기차가 더 오래 걸리는 것은 해변을 따라 빙 둘러 가기 때문이다. 아그리젠토에서는 고고학 유적지인 La valle dei templi(신전의 계곡)를 오가는 시내버스가 있다.
그리스 신전(神殿) 도시 아그리젠토
고대 지중해 지역에서 가장 위대한 도시 중의 하나인 아그리젠토는 기원전 6세기 그리스의 식민지(Akragas)가 된 후 팔라리스 군주시기에 ‘지하의 신들을 위한 신전(Chthonic temples)’이라 불리는 신전들이 건설되었고, 테로(Thero) 군주의 지배(BC488~BC473)동안 절정을 맞았다. 기원전 480년 히메라(Himera) 전투에서 카르타고를 무찌른 이후 시칠리아 북쪽 및 동쪽 해안으로 지배권을 넓히기도 하였으나, 기원전 262년 로마의 식민지(Agrigentum)가 되었다. 이후 AD 828년 사라센 족에게 점령당해 식민지(Kerkent 또는 Girgent)가 되었다가, 1087년 시칠리아의 노르만족 정복자 루제로 백작 1세에 의해 라틴 주교관구가 수립되었다. 노르만 민족 지배이후 지르젠티(Girgenti)로 불리기 시작하였으며 1927년까지 지르젠티라고 불렸다.
수령이 오래된 올리브 나무를 지나 헤라 신전에 올라가면 주위의 아그리젠토 구릉지와 지중해가 잘 보인다.
하늘을 향해 솟은 도리아식 그리스 신전(神殿)들
셰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아그리젠토의 고고학 유적(Archaeological Area of Agrigento) 지역은 La valle dei templi(신전의 계곡)으로 불리는 데, 실제 유적은 계곡으로 둘러싸인 언덕 위에 있으므로 내 나름대로 이곳의 별명을 ‘아그리젠토 언덕’으로 붙이겠다.
아그리젠토 유적지 동쪽 입구를 지나 오랜 세월을 말해주는 밑둥치 둘레가 굵은 올리브 나무를 뒤로 하고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헤라 신전(Tempio di Hera Lachia)에 오르면, 주위의 구릉지와 지중해가 잘 보이고 멀리 서쪽으로 ‘아그리젠토 언덕’ 길 끝에 콘코르디아 신전이 조그맣게 보인다. 이곳에 있는 신전들의 정면은 모두 동쪽을 향하고 있는데,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의 붉은 빛을 생명(피)의 근원으로 여겼기 때문이라 한다.
아그리젠토의 하이라이트 콘코르디아 신전(Tempio della concordia)
Concordia(콘코르디아) 신전은 현존하는 그리스 신전 중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신전으로, 기원전 43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Concordia(콘코르디아)는 그리스 신화에서 Harmonia(harmony 조화)나 Pax(peace 평화)를 상징하는 여신이다. 지붕이 없긴 하지만 도리아식 신전의 온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는 이 신전이 오늘날까지 훌륭히 보존될 수 있었던 까닭은 597년 교회로 개조되었기 때문이다.
주위가 계곡이므로 땅으로부터 솟아난 듯한 ‘아그리젠토 언덕’ 위에 돌 축대를 쌓고, 다시 그 위에 기둥을 높이 세워 지어진 콘코르디아 신전은 하늘을 예배하기 위한 신전임이 틀림없다. 이 신전 앞에는 태양을 향해 너무 높이 날아오르다 날개를 붙인 초가 녹아 바다로 떨어진 ‘추락한 이카루스(Ikaro Caduto 영:Icarus Fallen 2011년 청동 작품)’가 누워 있다.
콘코르디아 신전 앞의 추락한 이카루스(Ikaro Caduto 영: Icarus Fallen)
‘아그리젠토 언덕’에는 콘코르디아 사원 말고도 거대한 제단이 있던 제우스 신전이 있는데 도리아식 건축물들 가운데 가장 크고 독창적이라 하지만 1749~63년 엠페도클레 港(항)의 방파제를 짓기 위해 이 신전의 돌을 가져다 썼기 때문에 현재는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어른 양팔로 대여섯 명이 둘러쌀 정도의 굵직한 기둥들이 열병식을 하는 헤라클레스 신전(폭 28M, 길이 78M) 앞에 서면 그 위압감에 주눅이 들 수밖에 없다. 아그리젠토 박물관에는 남자가 돌을 이고 있는 듯 한 모습의 텔라몬(Telamon 사람 모양의 기둥)을 비롯한 그리스인들의 탁월한 예술과 문화의 자취를 볼 수 있다.
구경을 마치고 나오는데 때마침 동쪽 하늘에 무지개가 떠 있었고 콘코르디아 사원 언덕에서는 일몰과 석양을 감상할 수 있었다. 길이가 수 Km에 달하는 광활한 ‘아그리젠토 언덕’에서 무지개와 석양을 동시에 보니 잠시이긴 하였지만 마치 딴 세상에 와 있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고대의 유물과 아름답고 환상적인 풍경을 감상하는 동안 시간과 공간을 잠시 잊었던 이곳의 일몰 풍경은 일생 한 번은 보아야 할 석양이라 생각되었다.
만약, 아그리젠토 신전 지역을 여름에 구경할 때는 햇빛 차단제와 양산뿐만 아니라 충분한 음료수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 역사지구는 넓기도 하거니와 신전으로 가는 길은 언덕이라 물이 적고, 올리브 나무들이 가로수처럼 서 있긴 하지만 나무 그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지중해가 보이는 시라쿠사의 Teatro Greco(그리스 극장). 좌측의 뾰족탑은 ‘눈물의 성당’ 첨탑
시라쿠사는 시칠리아의 남동쪽 해안에 있는 도시로 기원 전 8세기 그리스인들에 의해 세워졌으나, 제 2차 포에니 전쟁이후 로마에 복속되었기에 그리스와 로마 유적이 많다. 시라쿠사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위쪽의 고대 유물들이 있는 네아폴리 고고학공원(Parco Archeologico della Neapolis)과 아래쪽 잘록한 섬에 있는 오르티지아(Ortigia) 섬 이라 불리는 구시가(old city) 부분이다. 오리티지아 섬은 차로 건너 갈 수 있는 짧은 다리가 놓여있어 섬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고고학공원에선 그리스 극장과 로마 원형극장의 차이를 관찰해 볼 수 있고, 채석장 쪽에 위치한 디오니시우스의 귀(The Ear of Dionysius)라 이름 붙여진 인공 동굴은 입구 쪽에 있는 ‘Garden of Paradise(천국의 정원)’이라는 이름과 달리 포로(죄수)수용소였다 한다. 그리스 극장(Teatro Greco)의 꼭대기에 올라서면 저 멀리 바다(지중해)가 보이고, 16,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고대 극장의 계단에 앉아 있으면 고대 그리스인들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객석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을 수 있는 곳이 여기 말고 또 있을까 싶었다.
200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시라쿠사 역사지구의 입구에는 아폴로 신전(BC 6세기)이 부러진 기둥만 덩그러니 남아 있고, 역사 지구 안에 있는 시라쿠사 대성당(Cattedrale di Siracusa)은 그리스 신전의 기둥을 살려 7세기에 성당으로 지어졌다. 이 성당은 16세기 들어와 바로크 양식으로 개축되었지만 1693년 지진으로 파괴되었고, 18세기 들어와 안드레아 팔마에 의해 아름다운 코린트식 기둥을 갖춘 현재의 모습으로 고쳐지었다.
아름다운 코린트식 기둥을 가진 시라쿠사의 두오모
오르티지아(Ortigia) 서남쪽 끝에는 아레투사 샘(Fonte Aretusa 숲의 요정 샘)이 있는데, 시라쿠사의 항구(grande mare)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도 있어 바다를 구경하며 데이트하는 연인들의 장소이다. 사냥의 여신이자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Artemis)의 시녀 아레투사가 강에서 목욕하다가 강의 신 알페오(Alpheus)에게 들켜 시라쿠스까지 도망쳐 왔지만 사랑에 눈 먼 알페오가 끈질기게 추격해 오자 아르테미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르테미스는 갈라진 땅 사이로 그녀가 도망칠 수 있도록 그녀를 샘으로 변신시켰다는 신화에서 아레투사란 샘 이름이 지어졌다 한다.
강의 신 알페오(Alpheus)에 쫓겨 샘(泉 spring)이 된 숲의 요정 아레투사(Aretusa)
오비디우스의 ‘변신(變身) 이야기(Metamorphoses)'
오비디우스의 대표작, 변신이야기(Metamorphoses)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변신과 관련된 사물의 유래들을 기술한 전15권으로 된 서사시 형식의 시로, 천지장조에서부터 오비디우스 자신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약 250편의 변신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이는 크게 신들에 관한 부분, 영웅들에 관한 부분, 역사적 인물들에 관한 부분으로 나뉘며, 오비디우스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집대성한 변신이야기는 신, 인간, 자연 등 다양한 변신 이야기를 통해서 오비디우스가 생각하는 사랑과 애욕에 관해서 말하고 있으며,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미술과 문학작품에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을 제공하고 있다.
출처: 원전으로 읽는 변신이야기, 오비디우스, 천병희, 숲, 2005.
영화 <말레나>의 촬영지인 이곳에서 오래된 골목길과 성당사이로 자전거를 타고 다녀 보는 것도 나만의 영화를 찍는 셈이 될 것이다.
지중해 중심이자 지중해 최대의 섬인 시칠리아는 삼각형(북쪽이 윗변, 남쪽이 꼭짓점) 모양의 섬으로 제주도의 14배 크기이다. 장화 모양인 이탈리아 반도의 남서쪽 끝(소위 장화 끝)에서 메시나 해협(폭 16km)을 사이에 두고 본토와 떨어져 있으며 이 섬의 남서쪽 바로 아래는 아프리카 튀니지다.
메시나(Messina)북쪽 지중해 지역을 티레니아 해(Tyrrhenian Sea)라 하고 동남쪽을 이오니아해(Ionian Sea)라 한다. 이오이아 해는 아르타·파트라스·코린트 만(그리스)을 포함하며 주요항구로는 시라쿠사와 카타니아(시칠리아), 타란토(이탈리아), 코르푸(이오니아 제도), 파트라이(그리스) 등이 있다. 이 이름의 기원이 된 이오니아 제도는 그리스 서부 해안 근해에 있다.
시칠리아는 북서쪽에 있는 주도(州都) 팔레르모(palermo)가 북위 38도이고 동남쪽에 있는 시라쿠사(siracusa)는 북위37도로, 여름에는 덥고 건조하며 겨울엔 따뜻하고 습기가 많은 지중해성기후를 보인다. 유럽 와인 산지의 최남단 지역인 시칠리아의 와인은 그리스, 로마, 바이킹 등 다양한 민족의 지배를 받았던 시칠리아의 역사처럼 품종이 다양하고 개성이 뚜렷한 데, 주정이 강화된 달고 진한 테이블 와인이나 값싼 화이트 와인이 대부분이다.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시칠리아의 역사
시칠리아는 지중해 중심에 위치한 탓에 수많은 침략을 받았고 수많은 정복자들이 거쳐 갔기 때문에 이 섬을 지배한 주인공은 시칠리아 역사만큼이나 다양하다. 거의 천 년의 세월에 걸쳐 그리스와 로마인, 비잔틴인, 아랍인(사라센), 노르만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세력에 의해 침략을 받았다. 시칠리아의 동부 지역 시라쿠사는 고대 그리스의 식민 도시였고 서부지역은 카르타고의 통치를 받았었다. 포에니 전쟁이후 로마의 지배를 받다가 중세 초기에 반달족·동(東)고트족·비잔틴·아랍인 등에게 차례로 점령당했다. 831년 아랍인에게 점령 당한 뒤 북아프리카와의 활발한 무역 중심지로 번창했으며, 11세기엔 노르만족, 12~13세기엔 시칠리아 왕국(신성 로마제국)의 통치를 받았다. 이후 시칠리아의 지배자는 독일의 슈타우펜 왕가, 프랑스의 앙주 왕가로 바뀌었다가 민중의 봉기로 아라곤 왕국의 피터 3세가 왕위에 올랐다. 한편 시칠리아의 지배권을 잃은 앙주 왕가는 나폴리 왕국을 세웠다. 16세기 이후 시칠리아는 다시 나폴리까지 통치하게 되었고 1816년 나폴리 왕국과 합병하여 양(兩)시칠리아 왕국이 되었지만, 1860년 사르데냐 왕국에 합병되었다가 이후 가리발디가 일으킨 반란의 결과 1861년 통일 이탈리아 왕국에 편입되었고, 1947년 지방자치권을 얻었다. 출처: 위키 백과
시칠리아에 가려면 어떻게 가나
이태리 본토에서 시칠리아로 들어가려면 자동차나 기차, 배로 가는 방법과 비행기로 갈 수 있다. 자동차나 기차를 타고 시칠리아로 들어갈 때는 이탈리아 반도의 남서쪽 끝(소위 장화 끝)에서 배(페리)를 타고 메시나 해협을 건너가며, 배로는 나폴리에서 팔레르모로 갈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시칠리아로 가는 것은 번거롭기도 하거니와 시간이 많이 걸려 불편하므로 비행기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비행기로 시칠리아로 들어갈 때는 로마나 피사에서 시칠리아 북서쪽의 팔레르모나 시칠리아 섬 동쪽에 있는 제 2의 도시 카타니아로 들어간다.
옛 팔레르모의 중심이었던 콰트로 칸티(Quattro Canti ‘네 모서리’라는 뜻)
‘모든 길은 콰트로 칸티로 통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콰트로 칸티는 팔레르모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거리와 마
퀘다 거리가 교차하는 구시가지 중심 사거리에 있다. ‘콰트로 칸티’는 스페인 바로크 양식의 건물로 1층은 봄, 여
름, 가을, 겨울 등 사계절을 상징하는 조각이, 2층은 시칠리아를 지배했던 왕들의 조각이, 3층은 성녀 Cristina,
Ninfa, Oliva, Agata 의 조각이 있다. ‘콰트로칸티’는 팔레르모 시내 마차 관광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다.
porto nuova(포르토 누오바=새 출입문)
porto nuova(포르토 누오바)은 팔레르모의 출입구로 1553년 카를로 5세가 튀지니와 싸워 이긴 것을 기념하기 만든 문으로, 위는 피라미드 모양의 지붕이며 Arch형 돌기둥과 입구 벽에 조각된 아랍인 모습이 인상적이다.
시칠리아의 상징 트리스켈리온(Triskelion)은 세 개의 굽은 사람 다리 또는 나선의 회전 형태다. 삼각형은 시칠리아의 모양을 뜻한다고 하기도 하고 중세 이슬람 지배기의 세 행정구역(Val di Manzara, Val di Noto, Val di Demone)을 나타낸다고도 한다. 가운데 날개 달린 얼굴은 메두사의 얼굴이다. 다리 사이에는 밀알이 배치되어 있는데 시칠리아의 풍족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팔레르모의 출입구로 아랍인 조각이 있는 porto nuova(포르토 누오바-새 출입문의 뜻)
시칠리아의 상징 트리스켈리온(Triskelion)
시칠리아 각 도시의 문장과 특산물
八色鳥(팔색조)의 도시 팔레르모
괴테는 시칠리아의 주도(州都) 팔레르모(palermo)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 했고 또 어떤 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슬람 도시’라 하였지만, 나는 八色鳥(팔색조)의 도시라 말하겠다. 팔레르모는 그 명성만큼이나 풍광이 아름답고 여러 지배 세력이 거쳐 간 탓에 다양한 문화와 종교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시칠리아 섬 여기저기에 그리스 신전, 로마 건축, 노르만 교회, 비잔틴 모자이크와 돔, 화려한 바로크 교회, 웅장한 palazzo와 궁전 등 과거의 여러 시대의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고, 각 시대의 사람들 사이에 있었던 문화 충돌과 융합의 흔적도 느낄 수 있다. 고고학, 인류학, 지리학, 건축, 미술, 음악 등 여러 분야에서 관심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찾아봐야 할 곳이다.
시칠리아의 심벌로 익숙한 트리스켈리온 문양은 미케네 문명의 그릇, 리키아의 동전, 팜필리아의 금화, 피시디아와 같은 많은 고대 문명에서 나타나며 그리스 도기와 전사의 방패에도 이 문양이 새겨져 있다 한다.
시칠리아에서 비잔틴 문화를 만나다
팔레르모에서 8km정도 떨어진 몬레알레(Monreale)는 '왕의 산'이라는 뜻인데, 산 중턱에 있는 중세기 왕의 휴양지로 전망이 아주 좋다. 몬레알레 대성당(Monreale Cattedrale)은 12세기(1174~1189)에 지어졌는데 노르만·비잔틴·이탈리아·사라센 양식이 모두 종합된 양상을 보인다.
사라센이란 말은 중세 유럽인이 서(西)아시아의 이슬람교도를 부르던 말로, 십자군 이후 서유럽에서 이 호칭이 사용되었다. 아라비아 유목민인 사라센族(족)에 의해 정복된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스페인 등을 포함한 사라센 제국에서, 이슬람교(회교)를 바탕으로 하여 7세기경부터 17세기경까지, 회교 사원인 모스크에 집중되어 표현된 회교 중심의 건축양식을‘사라센 양식’이라 한다.
사라센 양식의 특징 중 하나는 아라베스크 장식인데, 아라베스크(Arabesque)는 이슬람교에서는 우상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아랍 문자나 식물의 줄기와 잎을 도안화하여 당초(唐草) 무늬나 기하학 무늬를 배치시킨 것이다.
몬레알레 대성당
몬레알레 대성당 천정의 장식과 벽체의 문양과 상감(象嵌)은 아라베스크 장식(Arabesque ornaments)으로 되어 있다. 몬레알레 대성당 입구 현관의 三重(삼중) 아치는 노르만 양식이다. 또한 몬레알레 대성당은 직사각형(장방형)바닥에 제단뒤쪽은 반원형으로 앱스(apse 後陣)를 갖춘 형태로, 가운데 통로인 身廊(신랑)과 양쪽 복도에 해당하는 측랑(側廊)이 있으며, 身廊(신랑) 위쪽에 높은 창(高窓)을 가진 전형적인 바실리카(basilica) 式 구조이다.
몬레알레 대성당의 바실리카식 평면과 내부의 섬세한 황금빛 모자이크를 보고 깜짝 놀랐다. 북 이탈리아의 라벤나에서 보았던 산아폴리나레 누오보의 바실리카와 산비탈레(San. Vitale)교회의 모자이크를 다시 보는 듯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존하고 있는 모자이크 중에서 가장 대형인 몬레알레 대성당의 모자이크 장식은 비잔티움(Byzantium)에서 훈련받은 장인들이 10년에 걸쳐 완성한 것이라 한다. 참고로 북 이탈리아의 라벤나는 5세기에서 로마 제국의 수도였으며 비잔틴 문화를 꽃피운 古都(고도)이다. 라벤나의 San Apollinare Nuovo(520년경)는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어진 대표적인 예이다.
또 다른 아랍-노르만-비잔틴 문화(Arab-Norman-Byzantine style)의 자취
팔레르모의 두오모(Cattedrale di Palermo 팔레르모 대성당)는 1185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약 600년에 걸쳐서 건축되었다. 처음엔 비잔티움 양식으로 짓기 시작하였으나 시칠리아를 지배했던 여러 건축 양식이 덧대어져 12세기~18세기의 건축양식이 뒤섞여 있다. 대리석으로 만든 화려한 대성당의 벽은 바로크 양식이고 정면은 고딕 양식이며, 성당 내부는 1771년부터 1809년까지 피렌체의 건축가인 페르디난도 푸가에 의해 네오클래식 양식을 갖추었다.
당 안에는 ‘Heliometer dome(헬리오미터 돔-天文 돔)’이 있는데, 돔 안의 작은 구멍을 통해 나온 태양빛이 태양빛이 성당 바닥에 새겨진 12황궁도 에 표시되는 것을 보아 계절과 날짜, 시간을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팔레르모 대성당 지하묘지에는 시칠리아의 왕들과 왕족들의 무덤도 있지만, 옷을 입은 미이라, 기도하는 모습의 미라, 붕대 감은 모습 등 여러 미라가 눈앞에 바로 나타나므로 임신부나 심약자는 관람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팔레르모 왕궁(Palazzo dei Normanni 노르만 왕궁)
팔팔레르모의 황금기는 시칠리아 왕국의 수도로 있었던 노르만족 시대(1072~1194)이다. 아랍-노르만-비잔틴 양식의 건축물은 1185년에 지은 팔레르모 대성당 외에도 팔라초 레알레(왕궁), 산토조반니 델리에레미티 교회(1132), 마르토라나 교회(1143), 그리고 쿠바 궁과 치사 궁 같은 팔레르모 시 주변의 궁전들이 모두 같은 시대에 건축된 것이다. 팔라초 레알레(Palazzo dei Normanni 노르만 왕궁)에 있는 예배당은 그 화려함이 지나칠 정도이다. 황금빛 빛나는 모자이크, 눈이 뱅뱅 돌아가는 아라베스크 문양과 상감 조각, 여러 시대에 만들어져 다양한 조각이 장식된 대리석 기둥을 감상하노라면 마치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마피아(Mafia)와 영화 ‘대부’의 배경지 팔레르모
‘시칠리아’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영화 ‘대부’나 ‘마피아’일 것이다. ‘시칠리아 마피아’들은 1992년 자기들을 수사하는 팔코네, 보르셀리노 두 명의 검사를 살해하기도 했다. 팔레르모 국제공항의 이름은 현재 두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 '팔코네-보르셀리노' 공항이라고 명명되었다. 팔레르모의 중심 도로변에 있는 웅장한 규모의 마시모 극장(Teatro Massimo)의 입구 계단은 영화 ‘대부3’에서 꼴레오네가 총에 맞아 죽어가는 딸을 부여잡고 통곡하는 마지막 장면이 촬영된 곳이기도 하다.
영화 ‘대부’에 나오는 돈 마이클 꼴레오네의 본명은 비토 안돌리니로 이곳 시칠리아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비참하게 이탈리아 마피아의 폭력으로 살해되자, 그는 이들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와 뉴욕의 뒷골목을 평정하고 대부(代父 Godfather)의 위치에 올랐다.
영화 ‘대부’에 나오는 돈 마이클 꼴레오네의 본명은 비토 안돌리니로 이곳 시칠리아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비참하게 이탈리아 마피아의 폭력으로 살해되자, 그는 이들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와 뉴욕의 뒷골목을 평정하고 대부(代父 Godfather)의 위치에 올랐다.
‘마피아(Mafia)’하면 ‘범죄 조직’으로 동일시 될 정도인데, 세계적으로 이름난 마피아로는 시칠리아 마피아, 러시아 마피아,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 중국 삼합회, 인도 암살단 등이 있지만 ‘시칠리아 마피아’가 원조로 불린다. 시칠리아 마피아가 명성(?)을 얻게된 것은 이들 조직의 일부가 미국으로 건너간 19세기 말부 터 20세기 초이다. 뉴욕이나 시카고 같은 대도시에 둥지를 튼 이들은 매춘, 도박, 마약 거래 등 불법과 폭력을 수단으로 하는 전형적인 범죄조직의 활동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러나 요즈음 마피아들은 건설, 부동산, 쓰레기 처리, 공연, 관광, 호텔 등으로 사업을 확대하고, 마피아의 지하경제를 지상경제와 적절히 융합시켜 오고 있다 한다. 합법과 불법의 경계마저 모호해진 상태라곤 하지만, 여전히 마피아들이 주민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어 경찰과 검찰이 그들의 범죄를 추적 중이라 하며, 최근 뉴스엔 교황 프란시스코가 ‘시칠리아 마피아’를 파문한 후 일부 시칠리아 마피아들이 자수해 오고 있다고 한다.